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9)

2013년 3월 19일 오늘의 말씀

또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너희가 이 곳에 이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광야에서 직접 보았다.
(신명기 1장 31절,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장 16절)
묵상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의 의미로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 에서 
요단강만 건너면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앞에 보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모세의 설교를 듣습니다.
약속의 땅 그곳은 아무도 살지않는 비어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고도의 문명이 발달된 민족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세워논 난공불락의 성들이 곳곳에 놓여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정탐꾼들이 그들에 비해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했겠습니까?
미래는 장미빛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닥쳐오는 시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더욱더 “두려움”입니다.
우리들의 미래의 시간은 명약관화하게 약육강식의 비참한 결론입니다.
모든 국가와 조직과 그 구성원들 각자는 저마다 생존하고 
나아가 서로 이기기 위해서 각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약자에게는 절망적인 약육강식의 세상 질서 안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그 질서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인간 사회의 양육강식의 경쟁의 모든 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인간의 죄 (3월 17일 주일 설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시어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요 3:16)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습니다 (요일 4:18) 
즉,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약육강식의 세상의 질서를 사랑의 질서로 변화시킵니다.
인류 역사이래로 절망에 빠진 세상이 소망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기에
오늘날 아직 세상과 교회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 순간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믿음의 나이테로 만들어갈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사랑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당신의 사랑을 세상의 질서로 삼아야될
“정의”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사랑안에서
인간들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도 의미가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모든 대립되는 주장과 주의들의 대립과 분열은
참된 당신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사랑이신 당신의 사랑 안에 
나의 삶이 온전히 머무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있음을 감사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깨닫게 하심을 감사
사랑의 사람으로 온전히 거듭나는 믿음의 목표를 주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8)

2013년 3월 18일 오늘의 말씀
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내가 언제 죽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
알게해 주십시요.
(시편 39편 4절, 표준새번역)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 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 표준새번역)
묵상
오늘 시인의 기도는 
오지랍 넓은 사람처럼 알고싶은게 많아서,
권태로운 인생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닐것입니다.
짧은 인생,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생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실한 과실처럼 만족하게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기도일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인생이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 분수와 염치를 아는 인생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김연아 선수의 국제대회우승 소식을 듣고
갈라쇼에서 그의 모습을 보기위해 밤늦게까지 TV앞에 앉았습니다.
22살의 그녀가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나 자신이 이룬 업적을 무너트리는 삶을 살고싶지않다”는 말입니다.
22살의 어린나이에 비해 너무나 어른스러운 생각이어서 
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자기분수와 염치를 모르고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욕망만 가득차게
살아가다가 욕을 당하는 기성세대들, 사회 지도층들을 
시문지상에서 매일같이 보고있습니다.
공직자가 되려면 삶의 과정이 공직자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가 되려면 삶의 과정이 성직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나 명예를 탐하는 삶을 살았거나,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직자와 성직자가 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분수와 염치를 모르는 욕망을 
꿈과 비전으로 포장하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자기성찰이 너무나도 필요한 우리 사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믿음으로 포장된 욕망을
반성할 수 있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분수와 염치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바른 비전은 이 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하늘에 대한 것이어야합니다.
이와같은 자기성찰의 기준을 오늘 본문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한 과실처럼 충족감을 갖는 우리의 인생이 되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부단한 자기성찰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과 내 마음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마음의 욕망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원치않는 욕망인줄 알면서도
욕망의 힘에 이끌려 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않고
내가 원치않는 것을 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모습을 
늘 성찰하고 회개하며 
당신의 용서의 은총을 덧입으며
당신이 친히 보여주신 
이 땅의 삶의 모습을 묵상하며
푯대로 삼고 
그 길로 달려가도록 
매일 씨름하는 삶을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 감사   
기쁨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계시니 감사
건강하게 치료를 잘 받고계신다는 성도의 소식을 들으니 감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잃지않게하시니 감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생기니 감사
새로운 한주간을 주님과 동행하기를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
시험 준비를 하는 성도들을 성령께서 도와주실줄 믿으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5)

2103년 3월 15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시편 130편 3절, 공동번역)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 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표준새번역)
묵상
현대사회에서 정의의 개념이 복잡해진 만큼 
윤리와 도덕의 해석도 그만큼 발전되었습니다.
그것을 달리 설명하면 현대사회는 복잡해졌고 
현대인들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가중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입니다.
소위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중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죄와 희생을 요구하는 이야기보다 
위로와 평안과 행복과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바로 이 유혹에서 부터 교회의 영적기반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죄”에 대한 이해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기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로서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 9)
욥기를 보시면 욥은 조금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조금도 자신의 의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던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두고 그는 친구들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당시 일반적인 생각은 인생의 불행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사고방식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아무리 성찰해보아도 
자신은 하나님앞에서 조금도 불의가 없었기에 
친구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며 불행을 주신것도 하나님이시니
그 불행조차 감사히 받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에 대해서 조금도 흠이 없었던 욥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깊이와 질이 달라지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됩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재위에서 회개합니다”
욥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것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존재 깊이에서 하나님을 만날때 깨달아지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단순한 “행위”나 “의식”의 반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지는 나의 모습이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만큼 죄를 알게되고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됩니다.
기도
주님,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다달랐습니다.
한주가 더 지나가면 고난주간을 맞이하게됩니다.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찾아다니시고
죄인을 만나시고
죄인과 교제하신것은
죄인을 부르기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
진솔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면
죄인을 부르러오신 당신이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 생각, 내가 하고싶은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만이 내 죄를 용서해 주는 
능력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4)

2013년 3월 14일 오늘의 말씀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2편 1절)

그리고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 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골로새서 3장 17절, 표준새번역)
묵상
어제 선출된 새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카톨릭교회 역사상 유럽대륙 밖 출신  첫 교황이며
무엇보다 첫 예수회(제수이트) 출신 교황이라는 점은
앞으로 카톨릭교회가 1968년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시 교회 개혁의 기대를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로 부터 출교를 당한 사제이자 학자인 한스 큉 교수는
카톨릭 교회는 교황을, 개신교회는 성경을 우상화 시킨다고
비판을 한적이 있습니다.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는 복음을 
교회의 전통안에 가두는 잘못을 저지르게되고
자기성찰과 실천이 없는 “오직 말씀”의 강조는 
말씀을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게된다는 지적일 것입니다.
중세시대때 부패한 제도 교회에 대항한 
체코 종교개혁교도들은 
골로새서 이 말씀을 매우 신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를 거부하고
말을 하던지 일을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예수 즉 복음의 이름으로 하고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신실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척도입니다.
비주얼한 카톨릭교회의 제도와 예배예식도
감정과 감성의 눈을 열게하는 개신교회의 설교와 예배도
자기성찰과 실천의 “영적 신실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든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골로새서의 “영적 신실함”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접속시키는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기도
주님,
저의 삶의 뿌리가 
이 세상에 너무 깊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당신 안에서 힘을 얻는 경험을 
기억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 안에서
당신께 감사로
당신앞에서 “영적 신실함”을 유지하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3)

2013년 3월 13일 오늘의 말씀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 92편 13-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장 15절)
묵상
오늘날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않고
위대한 여호와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소비적으로 교회를 출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다른 어느나라 교회들 보다도 
개교회주의의 특성이 강합니다.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지역별로 배치된
교구중심의 교회입니다.
목회자들의 봉급도 교단의 호봉대로 지급됩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는 개교회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교회간의 경쟁이 필연적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는
왜곡되기 싶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의 경험이 잘 공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아무리 파괴되어도 가정은 가정이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오늘날 교회를 의미하는 “여호와의 집”을 “좋은 땅”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처음 경험한 복음의 구원의 은혜의 때를 
회상할 수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좋은 땅”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체코 종교개혁자이며 형제단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얀 아모스 꼬멘스끼라는 분이 계십니다.
일반 학문에서는 중세시대 교육학자 꼬메니우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학제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인생의 첫 5년에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첫 5년을 “좋은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맹모 삼천지교”를 연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인생의 축복된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람은 잘 익은 포도와 같이 성숙해집니다.
노년이 될때까지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맛보며 살게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여호와의 집”보다 더 안전하고, 더 좋은 땅이 
어디에 있습니까?
특히 해외 이민자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정말 솔직히 대답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자신들과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정말 바른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교회 만이 인생의 좋은 열매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를 포함하여 
사무엘, 시므온과 안나, 그리고 예수님
그 외에도 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여호와의 집”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모든 가치관을 상대화시키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좋은 땅”을 찾아 그 안에서 머무르며
뿌리내리며 열매맺는 영적안목이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모든 선과 은혜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좋은 땅입니다.
당신을 떠나 
나는 성숙할 수 없고
나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당신을 배우고 가르치고
당신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당신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우리가 교회 입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경험한
그런 교회를 
우리도 경험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감사
오직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복음의 음성만을 듣는 교회되게하실줄 믿으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