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9)

땅끝까지이르러/(27) 나의 목사 나의 친구 이지 슈토렉 (9)

이지 슈토렉은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목사였다. 체코형제교단의 소개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그 무렵 그가 프라하에서 유일하게 슬램화 되어가던 프라하 4구역의 아파트 단지 교구 안에 있던 카톨릭 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에게 에큐메니칼 선교프로그램을 제안하여 모임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러나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그 지역 교회 목회자가 자신의 교구에서 활동하는 같은 교단의 이지 슈토렉 목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계속 갈등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갈등이 다른 교단과 교회의 사람들 보기 민망해서 내가 직접 나서서 한번은 이지 슈토렉 목사에게 프라하 4구역에서의 활동에 손을 떼고 프라하 8 꼬빌리시 지역에서 활동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때는 이미 나의 가족이 이지 슈토렉 목사가 시무하는 꼬빌리시 교회의 교인으로 출석을 하며 그를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우리는 체코교회의 사명과 선교적 과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교육 봉사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구조적으로 이 교회의 과제들이 분리되어 있다. 예배와 교육과 성도의 교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선교와 봉사는 교회와는 분리되어 있는 교회의 사회봉사 기관인 “디아코니아”에서 진행된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분리된 데에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고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결과였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독특한 관계로 “디아코니아”가 체코 국내의 많은 인도주의적인 사회봉사 기관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이 되면서 구조적으로 “디아코니아”가 감당해야 될 교회의 선교와 봉사의 역할이 교회 공동체와 상호작용을 할 수 없게 된 문제점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코교회의 문제점을 이지 슈토렉과 나는 공감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중풍병자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교회의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가리워진 상황이 바로 체코교회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이 오늘 체코교회의 문제의 해결임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네 친구가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까지 운반을 하였듯이 디아코니아 실천은 단지 봉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의 식탁에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체코교회의 문제에 대한 공감과 성경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지 슈토렉과 나는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 댜블리쩨 디아코니아 활동 그리고 꼬빌리시 교회의 교구 안에 있는 8백명의 환자와 천여명의 의사와 직원이 거주하는 한 마을 같은 보흐니쩨 정신병원을 향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활동들은 날마다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들인 꼬빌리시의 한국 교우들에게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 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마지막 말을 남기고 2003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6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그에게 목회와 목회자의 삶과 개혁교회와 그 신앙을 배웠고 그리고 췌장암과의 일년 반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면서 일상생활의 리듬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흐트러트리지 않던 그로부터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퇴원한 후에 평상시처럼 입가에 싱글벙글 웃음을 띄며 나에게 한 그의 농담이었다. 그의 농담은 앞으로 남은 짧은 자신의 인생의 기간이 이전 보다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자 그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마지막 순간까지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던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안건으로 그는 당회에 교회 정원을 담장처럼 둘러싸고 세월질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요청하여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당회를 마치고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를 나눌 때 그는 내게 해맑은 미소를 띄며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 싶다.”고 하였다.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8)

땅끝까지이르러/(26)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이야기 (8)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유창한 한국말로 꼬빌리시 체코 교우들이 인사를 건네면 자연스럽게 “도브리-덴” “뎨꾸이” 대답을 하는 한국 교우들이다. 예배가 끝나면 예배당 뒤쪽에 마련된 커피와 차 그리고 다과를 나누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간단한 대화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는 언어의 장벽을 느끼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다.

타민족이 어울려 사도들의 고백대로 “거룩한 공회” 즉 하나의 교회를 고백하고 실천하는 현장이 바로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이다.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 체코와 한국인 신자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어려운 에큐메니칼 신학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함께 예배 드리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상한 쉰내를 참아야 하고 체코인들은 역겨운 마늘냄새를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신앙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체코 기독교인들과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예배와 설교 등 모든 교회생활의 차이를 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체코 기독교인들은 예배예전을 마치 우리나라 유교의 제사의식처럼 예전의 순서와 절차 그리고 그 내용들을 소중하게 다루기 때문에 감성적 요소가 많은 한국 교회들의 예배에 익숙한 우리 한국 교우들에게는 지루하고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한국인들의 예배는 그들에게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한국인들에게 체코 목회자의 설교는 무언가 내용은 있는데 결론이 없이 느껴지고 반대로 체코 교인들에게 나의 설교는 너무 선동적으로 느껴진다.

서로 경쟁하듯 신앙생활을 하는 개교회주의에 익숙한 한국인 교우들에게는 교구중심의 체코교회가 나태해보이고, 늦은 저녁시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우들 가정을 방문하는 나의 목회활동을 체코교우들은 신기하게 생각한다.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의 교회를 고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피상적으로 국적과 생김새와 피부색깔과 문화의 다름을 넘어 실제의 삶에서 사고방식, 삶의 습관 심지어 신앙의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신앙의 경험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고 수용하는 법을 배워가는 우리들은 초교파로 모이는 한국인 교우들 내부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정한 규범을 형성하였고 나아가 활기 없이 죽은 교회 같지만 천년이 넘는 기독교역사의 뿌리에서 흘러나와 끈적끈적 이어져 가는 체코 교우들의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에 꼬빌리시의 한국인들은 다른 한국인들 처럼 유럽교회를 경솔하게 판단하지않는다. 오히려 연약한 체코교회이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의 저력을 미래의 세계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하고 호흡하려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라하 꼬빌리시의 한국 교우들은 내가 존경하는 체코 선교사들이며 나의 선교 동역자들이다. 이들이 불씨가 되어 체코개혁교도들의 가족모임처럼 변해버린 체코교회가 자신들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세상을 향해 스스로 열린 공간 “오픈 하우스”가 되어 세상이 새롭게 교회를 인식하고 복음에 대해 그들이 마음 문을 연다면 그것이 바로 체코선교이다.

600년의 체코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네 차례 큰 박해를 겪는 동안 체코개혁교도들은 생존을 지상목표로 삼고 살아왔기에 유대인 게토처럼 체코개혁교도들의 게토가 되어버린 체코교회에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가족이 되어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체코교회에 던지는 선교적 의미가 적지않다. 우리교회의 일거수 일투족이 300여개의 체코전국교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리고 이웃나라 독일에서 년간 한 두 차례 독일 목회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우리교회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모습을 살펴보고 돌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의 활동이 더욱 무거운 책임감으로 느껴진다.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7)

땅끝까지 이르러/ (25) 빠벨 호이까 목사와 삐섹 오픈 하우스 (체코편7)

빠벨 스메따나 체코 총회장과 이규호 총회장 양 교단의 대표 두 분을 모시고 개회 예배까지 열고 시작한 쁠젠 꾸란두브 교회에서의 오픈 하우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당 회원들과 교인들의 지속적인 반대로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자신의 성 안에서 고요하게 살던 교인들 사이에 이 일로 금방이라도 교회 분열로 치달을 것 같은 내분이 일어났다. 나와 뜻을 같이 하던 그 교회 목회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2003년도 여름 모라바 지방에 200여명 모이는 시골 교회로 옮겼고, 당시 신학생이었던 실무자 한 사람은 같은 도시 안에 있는 카톨릭 디아코니아에서 자신의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 목회자와 2년 후에는 목사안수를 받을 실무자와 지금도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고 만나고있다. 그리고 우리들을 지지하는 꾸란두브 교회 교인들과도 교제가 끊어지지않고 있다. 교회의 사명에 새롭게 눈을 뜬 이들의 마음 속에 “오픈 하우스”의 꿈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당회와 교인들을 어렵게 설득해서 모든 절차를 밟아 추진한 일이 좌절되면서 실망한 나는 쁠젠과 같은 행정구역에 있는 삐섹(Pisek)에서 까페 형태를 띈 오픈 하우스를 설립하였다. 까페 이름은 “벨리바” 이다. 욥을 삼킨 큰물기를 체코어 성경은 “벨리바”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큰물고기” 또는 “고래” 이다.

오픈 하우스 선교 프로그램을 쁠젠에서 삐섹으로 옮기면서 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방향을 선회하던 바울의 마음을 느껴보려고 애쓴 것은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도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던 쁠젠에서의 좌절이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의 상처로 크게 남아 스스로 치유해 보려는 몸부림이었던 것 같았다. 한편 “오픈 하우스” 선교정책이 체코선교에 적합한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같은 행정구역인 삐섹(Pisek)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왜냐하면 1995년부터 크고 작게 관여하던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회 목사 이름은 빠벨 호이까였다. 그는 체코 개혁전통의 한 갈래인 만 여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는 형제교단 (필자가 소속된 체코형제개혁교단과 다른 교단) 소속이었다. 그는 전현직 수상이 졸업하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정치가를 배출하는 프라하 경제학부를 졸업한 경제학자이기도 하였다. 1989년 공산정권이 물러나고 자유국가가 되자 경제적 자립 없이 신앙의 완전한 자유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섬기던 삐섹 교회를 재정자립을 위한 시도들을 하였다. 이것이 논쟁이 되어 결국 그는 교단을 떠나 가족들과 그리고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였다. 1995년 봄 어느날 그가 교회당 설립을 위해 한국 목사인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교회당 설립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의 실천으로 주제가 바뀔 만큼 마음이 서로 통하였다. 그도 교회당 설립보다 더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거리에서 배회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서 일할 것을 조언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30여명의 교회가 지금은 예배시간에 150명이 모일 정도가 되었다. 1999년 7월까지 거의 매주 한번 이상 그와 만나 전도상황과 과정을 점검하고 전도 전략을 세우며 교회의 미래를 설계하던 논의를 매번 회의록으로 기록하였다. 그 기록의 분량이 적지않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토대로 전도경험을 신학화하고 전도방법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여 기존의 전통교회가 무신론 사회에서 전도를 실천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 해 쉰 한 살이었던 그는 급성간암으로 1999년 9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로를 의지하는 신앙의 동지였던 그를 대신해서 나는 그의 양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울타리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와 우리들의 길

  • 한인 예배 (2006년 11월 12일)
  • 행 1:1~11
  • 설교자: 이종실

061112

성경: 사도행전 1장 1~11절 / 제목: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들의 길

<본문>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설교>

체코 국가통계청이 체코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것과 가장 신뢰하지 않은 것 각각 두 가지 통계를 낸 것이 몇 주 전에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체코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언론과 군대이며 반대로 가장 신뢰하지 않는 것은 전문가와 교회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통계가 체코 슬로바키아 교회들과 함께 일하는 저에게는 매우 실감이 나고 그 불신의 정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분위기가 일반적인 체코사회에서 사람들은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대단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몇 해 전에 경험하였습니다.

성경을 보급하는 어떤 선교단체가 브르노 대학 기숙사에 성경책을 무료로 보급하였습니다.

성경책을 그냥 배포했으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요한복음 3장 18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라는 요지의 내용과 이 책을 기증하는 단체에 대한 소개를 스티커로 만들어 성경책 첫
페이지 빈 공간에 붙여놓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기숙사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우리는 믿지 않을 권리도 있다. 이것은 인권침해다>라고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여 결국 배포되었던 성경책을 모두 수거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생산하는 종교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기독교 이미지 속에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는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입으로는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도 삶은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들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의 이런 자화상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천국은 분명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비록 각각 다른 나라의 여권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법 아래 살고, 우리 모두는 국적과 여권과 피부색깔과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때부터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기간이 40일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그가 하셨던 일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으신 뒤에, 자기가 살아 계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시고, 하나님 나라를 두고 여러 가지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이별의 순간 40일 동안 나누고 싶었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3년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복음서들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가르쳐주신 많은 가르침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마지막 40일 동안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실 만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해서 그만큼 밀접하고 중요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28장 31절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고 강조하셨던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뜻을 받든
사도들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지적 받고
있습니다.

그 오해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신앙고백이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물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21절)라고
말씀하셨으며, 마태복음 18장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 보낸 편지에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구원하신다>(딤후 4:18)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이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자동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관심은 곧 구원에 대한 관심이며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본질적인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만 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해서 더 자주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처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방점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9절과 10절 두절만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게 하옵시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게 하옵시며>가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 훗날에 다가 올 당신의 왕국을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그 순간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고 그리고 그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 내신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 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신 직후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가 어떻게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는지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앞다투어 말하다가 논쟁이 일어납니다.

귀신을 축출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귀신의 두목 바알새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은 것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또 다시 귀신을 내쫓거나 아니면 다른 기적을 통해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이었음을 증명해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중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그러니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는데,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귀신을 축출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 (눅 11:17~20)

예수님은 사람들을 얽매고 있는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은 우리가 죽은 이후에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왔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완성이 될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완전한 하나님의통치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왕국과 나라들이 역사 속에서 흥망성쇠를 하고, 때론 분쟁을 하고, 때론 평화를 누리기도 하지만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 다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희로애락의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고 역시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의 맨 처음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시며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계속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창조된 이 땅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보시기에 너무 좋은 이 세상에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들을 두시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세상 속에 살 곳을 마련하도록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걸으셨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만드셨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 나라를 들어가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 행복하게 사는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신의 뜻을 신명기 10장 12절-13절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주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길을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섬기며, /너희가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느냐?>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결국 율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은 친히 자신이 육신의 몸을 입고 아들의 모습으로 우리들처럼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제자들이 길을 걸어가거나 아니면 다시 바다에서 노동을 할 때, 밥을 먹을 때, 서로 삶의 근심 걱정거리를 모여서 이야기 할 때 바로 그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이 세상이란 의미는 바로 우리 기독교신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갖기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완성되는 것>에 관심을 더 갖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기다릴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신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떻게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그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듣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살전 1:8~10)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어 다른 모든 나라들의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던 것>(6, 7절)소식을 사도 바울은
들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의 특징은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주님을 본받는 신앙의 올바른 자기 길을 걸어 갑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조급합니다.

쉽게 좌절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69년 초에 히트 시켜 오늘날까지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애창되는 팝송 <마이 웨이(My way)>를 아실 줄 압니다.

<마이 웨이> 노래 제목만 들어도 노래를 잘 부를 줄 모르는 저 같은 사람도 <프랭크 시나트라>의 중후한 목소리로 흐르는 멜로디가 저의 가슴을 꽉 채우며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30년 동안이나 마이 웨이를 열창한 <프랭크 시나트라>는 과연 이상적인 마이 웨이의 주인공이었습니까?

그가 걸었던 길은 세계 최고의 범죄조직인 마피아와 무관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생활은 문란하였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병원에 누워 있을 때부터 그의 재산을 놓고 그의 전처와 현재의 처, 전처가 낳은 자식들과 현재의 처가 낳은 자식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불렀던 노래 <마이 웨이>는 말할 수없이 감동적일 정도로 훌륭했지만, 그러나 그가 걸었던 그의 인생 <마이 웨이>는 이상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림이 없는 삶은 그야말로 <마이 웨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라 다닌 그의 제자 한 명도 자기 길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1장 25절에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가 갈 곳으로 갔습니다>라고 기록하고 되어 있습니다.

<마이 웨이>를 가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마태복음 27장은 가롯 유다가 목매어 자살했다고 하고 오늘 사도행전 1장 18절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를 합치면 목매어 자살한 가롯 유다의 시체를 아무도 거두어주지 않고 방치되다가 마침내 목맨 줄이 끊어져 시체가 땅으로 곤두박질 하면서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이 웨이>의 종말은 비참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삶은 오늘 우리의 일상의 세상의 삶과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끌어주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구원을 이루가게 합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교우들이여!

여러분들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처럼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본받는 삶을 노력하는 신실한 신자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복된 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서머나 교회

  • 연합 예배 (2006년 11월 05일)
  • 계 2:8~11
  • 설교자: 에르딘게르

본문:요한 계시록 2,8~11 요한일서 4:1~6

사랑하는 꼬빌리시 성도 여러분,

한국, 체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내진 편지 덕분에 우리는 또 다른 도시, 이번에는 서머나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머나는 높은 수준의 상업과 경제 도시였고, 부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서 우리는 서머나가 아주 근대화 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머나는 짧은 기간에 부흥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잡목들과 숲들, 포장된 도로들- 이러한 것은 당시에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미와 부, 부와 미. 이 둘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서머나는 상업을 꽃피우고, 뇌물이 성행하며, 사람의 가치가 돈지갑의 두둑함으로 평가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또한 정치적으로도 잘 질서 잡혀진 도시였습니다.

즉 서머나는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에 경의를 표하고 이를 통해 더욱더 강한 도시가 되고자 도시에 신전을 세웠으며, 그래서 이곳에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서머나는 로마를 후원하는 도시요, 이를 통해 어떻게든 도시의 제정과 도시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유대민족뿐만아니라 여러민족이 살았으며 식민지 중에 아주 파워가 있는 식민지였습니다.

서머나는 또한 그곳에 있는 크리스찬들을 쉽게 타락하도록 만드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점을 놓치지 맙시다.

이는 바로 서머나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크리스찬 모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위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그런 세속적인 환경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서머나교회 크리스찬들은 남을 딛고 올라서는 것이 당연시 되고, 성공과 부와 권력을 쫓는 그런 삶만을 인정해 주는 그런 환경속에서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권력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명예와 비굴이 결정되었으며, 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며 삶의 질과 멋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서머나에서 관용에 기초하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곳에서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크리스찬의 삶은 상당히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크리스찬들이 권력과 부와 성공만을 쫓는 공동체에서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크리스찬들이 유대인의 적대감에 맞서서, 또는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서머나의 세상풍조에 맞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버텨 나갈수 있을까요 아니면 굴복하게 될까요?

세상풍조에 굴복하며 주위환경을 탓하는데 익숙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께, 구원의 주이신 예수그리시도를 견고하게 붙들며, 그 분을 충성되게 섬기게 될까요?

이 모든 것을 서머나에 보내진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서머나에 보내진 편지에서, 또한 서머나의 환경과 비슷한 곳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방향을 줄 수 있는 그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들어 봅시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을 지칭하는 몇 가지 별칭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늘 가까이 계신 분이시요, 삶의 닻이요 방향이요 목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자,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을 없애고자,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자 부활하신 분이시요,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시니, 하나님과 화해한 당신 또한 살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꼬빌리시 성도이신 당신 또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속의 많은 주제들과 관련해서 여러 질문들을 던져 줍니다.

가난이란 무엇입니까, 가난은 단지 돈의 부족함을 말합니까?

반대로 부함이란 큰 소유를 뜻하고,
소유의 풍족함, 안정과 같은 것을 뜻합니까?

고통은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며, 무엇을 보여 줍니까?
고통은 사람을 단지 억압하기만 하는 것입니까?

고난은 단지 부정적인 그 무엇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고통이란 단어를 단순하게 사용하며, 고통이란 단어의 진정한 개념을 모를 때가 많습니까?

소비적인 세상, 상업적이고 부패하고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크리스찬이 믿음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까?

크리스찬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늘 위협받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하고자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좀 더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사람의 부함은 그의 믿음안에 있습니다,

그가 받고 주는 사랑안에 있습니다.

거짓과 속임의 세상속에서 바른 것으로 남고자 하는 용기속에 있습니다.

사람의 부함은 유혹에 굴하지 않는 곳에, 힘있는 사람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곳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위에 빌 붙어 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사람의 부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한 자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크리스찬의 부유함 앞에서, 모든 권력, 부, 보물, 재산 이 모든 것은 다 색 바랜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부유함은, 누구도 당신을 위해 대신 준비해 줄 수 없고, 또는 누구를 의지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부유함은 심지어 당신 자신도 준비하거나 생각해보지 못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부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희생하시고 부활하신 바로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어떠한 고난도 어떠한 외적 가난도 신실한 크리스찬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심각한 대적자였던 유대인들 조차도 신실한 크리스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우회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사단의 회니라. 유대인이라 불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행함은‘ 이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전통과, 선민, 남과 구별됨을 내세웠지만, 악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에 집착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화, 아픔, 억압을 씨뿌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악의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건한 생각들은 그들의 행함과 달랐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유대인의 열매는 신 것이 되었으며 독이 들어 있는 열매로까지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전통을 지키거나, 지난날 행했던 선함이나, 특별한 역사 등이 진정한 믿음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현재에, 살아있고 희생하는 믿음에, 풍성한 사랑에- ‚바로 지금 여기에‘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선교 도구가 됩니다.

반면 전통에 얽매이고, 경건의 형식에 치우치거나, 명목상의 또는 기술적인 믿음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고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찬과 교회는 모든 경건함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자 힘써야 하며 악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자는 되어질 일을 두려워해서는 않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고난은 헛된것이 아니고, 또한 고난의 시험은 열흘간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 열흘간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고난, 고통, 아픔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고난의 끝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욥을 시험할 것을 하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 모든 환란을 견뎠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는 곳에, 그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당신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두에서 시편 27편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비슷하게 우리는 서머나에 보낸 편지에서 이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외에 누가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사랑, 주님안에서의 부함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 가치관이 서머나교회 크리스찬들을 삼키며 또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을 삼킬 수 있겠습니까.

자, 우리 이제 약속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네게 주리라“

이 의미심장한 말씀- 우리가 성경공부시간에 늘 외었던, 또는 영성시간에 늘 요절로 배웠던-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끄랄릭 성경에는 이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어떤 환경속에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 가치 순서를 세상권력과 부함, 그리고 성공에 두지 않는 자, 신실함을 늘 간직하는 자는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듯이, 주님께 충성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진 월계관과 다른 점은 생명의 면류관은 월계관처럼 시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다국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선포하며, 성만찬을 거행하고, 함께 기도하며, 필요한 것을 서로 돕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워진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세워진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꼬빌리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간의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상업화 되고 세속화 되는 위험을 죽을 때까지 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의 면류관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