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11일)
  • 행18:18-28
  • 설교자: 이종실

040711

본문: 사도행전 18:18-28

제목: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본문>

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설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 그리고 설령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 뜻을 어떻게 실천해야될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2차선교여행의 막바지 내용과 3차선교여행의 시작 내용이 잠깐의 인터발도 없이 연이어 지고 있습니다.

1차선교여행은 사도행전 13장 4절에서 14장 28절까지 기록되어있고 잠시 인터발을 두고 2차선교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15장 36절부터 18장 22절까지 나오는 것에 비하면 3차선교여행에 대한 내용이 (오늘 성경을 보시면) 22절에서 마침표도
찍지않고 23절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에 있는 고린도에서 1년반 선교를 하고 에게해를 배를 타고 건너 현재 터어키에 있는 에베소를 거쳐 다시 배를 타고 지중해를 통해 팔레스틴의 주요항구인 가이사랴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시면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라고 나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문안한 뒤에, 안디옥으로 내려갔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 상륙해서 가이사랴 교회에 들리지도 않고 해안에서 100km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문안하였다.” “안부를 물었다.”라고 설명한 것을 볼 때 그동안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염려하던 안디옥 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곳에서 인사만 한 것이 아니라 선교보고도 하였을 것이고 그동안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성밖에 버림을 당하고 죽일려고 폭동이
일어났고 야반 도주하였더니 거기까지 폭도들이 따라왔던 일이며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은 일들을 설명하면서 그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지 간증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목회를 하였던 안디옥 교회에서는 아마 예루살렘 보다 더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겪었던 고난과 체험으로 선교보고를 할 때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반응도 대단하였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모두들 흥분의 도가니였을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주후52년 여름경에 2차선교여행에서 돌아와서 53년 이른 봄 에 3차선교여행을 출발하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3차선교여행을 출발하기전 6개월 동안에 바울의 설교와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는 많은 부흥과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6개월의 이야기를 22절 후반절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보기에 더 궁금하고 알았으면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않으면서 겐그레아서 머리를 깍은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 입니다.

“바울은 여러 날을 더 머무른 뒤에, 신도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와 동행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서원한 것이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한 항구도시입니다.

다른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슬쩍 지나가면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의 머리깍는 이야기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갖는 질문은 “왜 누가는 그런 사소한 것을 일부러 기록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또 이상한 것은 3차선교여행때는 머물렀지만 에베소에 머무를 계획이 없는 사도 바울의 생각을 자세히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차전도여행때 처음에 아시아 지방으로 가려고 했던 바울의 목적지는 당연히 에게해 항구도시인 아시아 수도 에베소가 목적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6절에 아시아로 가는 것을 성령이 막았기 때문에 갑바도기아 내륙지방으로 빙돌아 지금의 그리스 빌립보로 갔습니다.

이제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을 바닷길로 가려고 하다 보니 처음에 성령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에베소를 지금 경유하게 된것입니다.

19절 20절 21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 일행은 에베소에 이르렀다. 바울은 두 사람을 떼어놓고, 자기 혼자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 사람과 토론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 좀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으나, 바울은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났다.”

이 본문이 흥미있는 것은 성령께서 보낸 선교지에서 사도 바울은 환영대신 박해와 핍박과 경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가로막은 선교지 에베소에서는 지금 환영을 받고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내가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거나 다른 곳에서 견뎌내지 못할까봐 에베소 가는
길을 처음에 가로막은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고국으로 돌아가기전 마지막으로 나를 환영하는 이곳에서 나의 2차선교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받은 속상했던 마음이 위로받고 심신을 회복해서 귀국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아무 일도 하지않고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분명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그 판단이 매우 모호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의깊게 오늘 본문을 보시면 겐그레아에서 바울이 머리를 깍은 이야기가 바로 이 판단이 어려운 상황직전에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중요한 상황이 바울의 머리깍은 이야기와 관련성을 갖는 다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께서 이 기록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중요한 영적기준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깍은 동기와 목적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와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그대로 받아들이면 서원(서약, 맹세)한 것이 있어 머리를 깍은 것입니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두려워 떨었던” 고린도에서 하나님앞에서 많은 맹세들을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앞에서 맹세하고 서원한 경험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느날 급한 문제가 생겨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다음부터 다시는 하나님앞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맹세를 둔 기도를 합니다.

“지금 이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게 하옵소서. 내가 이제 나의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 고백합니다. 앞으로 감사생활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십일조 생활을 하겠나이다.” 맹세를 둔 기도를 합니다.

“건강을 잃고 병상에 누웠을 때 기도하기를 나를 치유해 주신다면 내 생명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기도합니다.

“환란과 고통을 겪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환란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소서. 내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겠나이다.”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상황이 지나가면 마치 화장실 들어갈 때의 마음이 나올 때 달라지듯 달라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갈대와 같이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인간의 마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주님의 위로와 허락하신 비전 앞에서 무릎 꿇고 자신의
의지와 지식과 경험으로 선교하려했던 그동안의 선교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자신의 판단으로 하려고 했기에 “두렵고 떨었던”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의 힘과 뜻으로 선교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심을 잊지않기위해 고린도에서 나와 바로 옆에 한적한 도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았던 것입니다.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뜻을 잘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인 기준 즉 영적 분별력이 우리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환란과 고통속에서 드리는 기도가운데 마음에 둔 맹세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영적 분별력을 이끌어 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이 바뀌면 그만 그 마음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려버립니다.

그당시 머리를 깍는 행위는 나실인들의 맹세와 관련이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나실인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신분들은 계시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실인은 민수기 6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6장에 의하면 맹세한 이후에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부릅니다.

민수기 6장에 따르면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나실인의 맹세를 하는 사람이 지켜야할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포도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먹거나 마셔서는 안됩니다.

두번째로 머리를 깍아서는 안됩니다.

세번째로 시체를 만져서는 안됩니다.

첫째로 포도로 생산되는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떠돌이 유목민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경생활에 동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매일 매일의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비옥한 땅이나 다른 무엇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머리를 깍는 것을 금하는 것은 긴머리카락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의미를 늘 인식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머리카락이 짧거나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리면 머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깨끗한 거울이 없어서 머리가 긴지 짧은지 다듬어야되는지 만져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 정신이 팔려있을 때는 적당히 머리가 길어도 머리가 길어진 것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자주 들여다보고 만져보아야 머리를 손 볼때가 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식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읽고 기도하지않고 심지어 성수주일하지 못하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까?

마직막으로 시체에 손을 대지않는 것은 순결함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나를 하나님께 봉헌한 사람의 삶의 중요한 것은 순결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 품위있는 교양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알고 정직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고 남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살 줄 아는 삶의 태도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비판하고 하는 혀에는 가시가 밖혀있어 남의 심장을 쑤시고 욕설을 담고 인격을 무시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하고,
먹을 것과 먹지 말을 것에 구분이 없고, 갈 곳과 가서는 안 될 곳에 구분이 없고, 앉아야 될 것과 앉아서는 안될 것의 구분도
없는 그런 삶을 살면서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체를 만지지않고 포도주를 마시지않고 자신의 머리를 자르지 않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을 알고 날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과 결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곱번 넘어지면 여덟번 일어나겠다는 용기와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설령 세상에, 사람에 넘어지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비전이 있는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것이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 확신과 용기와 열정은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한 사람의 노력이자 동시에 기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에서 마음에 깨닫고 결심한 것을 꼭 지켜내겠다는 바울의 맹세의 마음이  겐그리아에서 머리깍는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2차선교여행은 바울을 더 깊은 신앙의 결단의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신뢰하며 주님의 것으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바울은 귀향 길에 에베소를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그는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에베소는 바울이 첫번째로 선교지로 삼았던 도시였습니다.

지금 에베소 사람들은 그를 필요로하였습니다.

만약에 이곳에서 그를 다시 붙잡는 사람들이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들이었다면 그는 에베소에 더 머물러야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자신의 동족 한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처형한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깨닫게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성령께서 지난번처럼 에베소를 가는 것을 가로막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 더 머물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기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것이고 그는 허락된 시간에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그릇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일보다도 바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복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바울의 입장을 그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적용을 한다면 우리 신자들은 자신의 먹고 사는 삶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눈앞에 돈 버는 일이 닥쳐와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질문해야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나에게 불리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절하게 더욱 듣고싶어 더 남아있을 것을 간청하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대답하는 바울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은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싯점에서 놓을 줄도 알고, 또 어떠한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일할 줄도 아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지 바울의 의지가 아닌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이제 나 중심로 이웃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멈추십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의지를 머리깍고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고백으로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을 날마다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다

  • 한인 예배 (2004년 07월 04일)
  • 행18:1-17
  • 설교자: 이종실

040704

본문: 사도행전 18:1-17

제목: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다

<본문>

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16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로 어제와 오늘 1박 2일 동안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습니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면 체코 보모와 아니면 유치원에서 말과 습관이 낯 설은 체코 친구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우리 어린 자녀들이 비록 짧은 1박 2일이지만 서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바라보면 마음 같아선 프라하 시에서 유치원 건물을 불하 받아 한나절 반이 되었던, 종일 반이 되었던 저들의
핏속에 흐르는 한국정서가 타 문화와 큰 충돌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당장이라도 우리교회가 발벗고 나서고 싶지만 마음의
의욕만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체코의 한인사회의 2세들 교육에 대한 우리 교회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시간을 빌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것은 어린 자녀들을 위해 바쁜시간을 내고 봉사한 다섯분의 선생님들과 뒤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한 남유정, 장혜원 두 교우님들과 이수정 교우님, 김영만 선교사님, 방인갑 선교사님 그리고 그 외의 여러분들의
수고입니다.

이 시간 모든 분들의 수고를 큰 박수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이번에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교회활동에 대한 우리 집사님들의 관심과 참여입니다.

교육부장님이 앞장서서 여름성경학교의 원만한 진행과 수고한 선생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집사님들께 기도와 도네이션을 요청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주셨습니다.

칭찬과 격려 가운데 자라나는 자녀들이 구김살 없이 성장하듯이 칭찬과 격려가 있는 교회는 밝고 아름답게 성장해갑니다.

이 일에 우리 집사님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봉헌한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하고 예배드리고 그리고 각
가정에서 서로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성도의 교제가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추구하였고 앞으로도 추구해가야 할 우리들의
좌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우리교회 집사님들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의 모범을 이 설교의 시간을 빌어 여러분들의 목회자로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사님들의 그러한 참여가 바로 부족한 사람의 목회를 돕는 일이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별히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며 칭찬을 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박민우 교우입니다.

박민우 교우는 저도 이번에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외국어대학 체코학과를 다니다가 언어연수로 와서 프라하 한인교회를 출석하며 많은 봉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목사들과 어른들이 갈라놓은 프라하의 예배 터가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고한 것은 그 마음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린아이들을 사랑하는 진실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민우 교우는 여름성경학교의 어린이들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봉사의 의미를 저와 여러분들이 잊지 않고 바른 교회, 참 신자가 되는 길을 고민하고 노력하는 일을 더욱더 정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들을 뜻하였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새로운 땅을 탐험하고 정복하기위해서 유대인들은 해외로 이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찾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유대민족이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고 강대국들의 권력에 의존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다른 강대국에 의해 멸망을 시키고 포로로 또는 유민으로 만들어 유대인들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해외에 이주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이유로 해외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스스로 폐쇄적인 집단이 됩니다.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오늘날 그리스 터키 이태리 북아프리카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저희들이 함께 읽고 있는 사도행전의 배경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차전도여행은 주로 그리스 선교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서 전도를 할 때 언제나 그의 복음전파의 시작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모이는 회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 많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대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해외에서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진리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바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동안 전혀 근거없이 범죄자로 몰려 심문을 받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에 그를 죽이려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밤에 몰래 데살로니가를 도망쳐 베뢰아로 왔는데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거기까지 몰려와 다시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할 수 없어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홀로 아테네로 왔습니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비웃음과 경멸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에 왔지만 이미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의욕을 상실할 만큼 약해져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될지 모를 만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일년 육개월 고린도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말이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두려워 떨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차전도여행 내내 겪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폭행과 박해와 경멸을 고린도에서 또 다시 겪자 사도 바울은 오랜 여행길에 육체적으로 지쳤고 그리고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었으리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는 작은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현재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그 당시 만명이 간신히 되는 작은 도시에 불과하였지만 반면에 고린도는 아가야 주의 수도로 도시 발전이 절정에 달할 무렵에 인구가 75만명에 달했습니다.

지금까지 작은 도시에서 겪었던 고초를 생각만해도 끔찍한데 이제 대도시에서 또 다시 고초를 당하니 덜컥 겁이 나고 그만 사도 바울은 사지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도시의 큰 규모에 위축이된 바울은 도시의 타락상을 보면서 “내가 정말 이 곳에서 전도를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년 4월 그리스를 갔을때 고린도를 방문하였습니다.

해안항구에서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시장까지 연결한 도로와 도로 주변의 상점들 신전들 공공건물 목욕탕과 배수로와 삼천명이 들어가는 극장이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어 당시의 고린도의 부귀영화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어떤 성서고고학자는 “로마가 통치하던 주후 50년의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허영심의 박람회장”이라고 할 만큼 번성하였습니다.

그 도시의 뒷편에 해발 575미터의 산위에 성벽이 축조되어있고 그 안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띠(비너스)의 신전이 있고 그곳에
종사하던 제관 선남 선녀들이 무려 천명이 넘었고 그들은 신을 받든다는 미명아래 음행을 하며 살았고 심지어 그들은 도시아래로
내려와 매춘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데네는 우상의 도시였다면 고린도는 매춘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도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모습을 로마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어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 (고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 (고린도)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롬 1:22-31)

고린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적대감과 그들의 피폐한 인간상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던 것 같습니다.

대도시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이전의 작은도시에서 전도할 때 보다 훨씬 강함을 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두려움에 쌓여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환상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9,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과 더 불어 <이 도시에 나의 백성이 많다>라고 예수님은 바울에게 비전을 부어주십니다.

<이 도시에 나의 백성이 많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환상중에 나타나 바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타락한 대도시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종교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며 미신에 빠진 야만인들이며 성적으로 문란한 자들이며 인간성이 피폐해진 사람들이며 물질의 번영에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린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시기심에 불타고 분노하여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바울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도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많기는커녕 소돔과 고모라처럼 곧 심판이 임박한 타락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 아래 놓여있는 도시에서 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예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두려워 떨고있는 바울에게 우리 주님의 눈으로 자신의 디아스포라와 타락한 도시를 바라보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고린도와 고린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좌절하고 절망하여 비전을 상실한 우리 신자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넓은 의미에서 해외에서 이주해서 살아가는 소수민족공동체를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국인들을 <한인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해외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 무척 서글퍼질때가 많습니다.

제가 살붙이고 살아가는 체코정부는 자국민이 우선이고 우리와 같은 소수민족공동체를 천덕꾸러기처럼 여깁니다.

그런가 하면 고국 한국 정부로 부터는 소외감을 느낍니다.

투표권도 없고 특별한 보호대책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해외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가급적이면 해외동포들을 기피하려고 합니다.

해외동포들 사이의 관계도 별로 나을것이 없습니다.

초창기에 와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의 가치관은 언제나 나중에 와서 정착하는 사람들에게 존중 받지 못하고 심지어 무참히 무시를 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먼저와서 정착한 사람들은 나중에 와서 정착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한 공동체로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내가 피해를 입지는 않을지 경계하고 냉대를 합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처럼 신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성공과 출세를 위해 대부분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기에 인간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익집단이 되었고 그래서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 분열과 갈등과 반목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인사회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한인 사회를 저주하고 비난하고 침밷는 자기모순을 드러냅니다.

프라하는 카지노와 매춘업이 갈수록 번성해지는 관광도시가 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이제는 매춘업을 공식 업종가운데 하나로 법제화 하였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이 카지노와 매춘장소를 자주 찾는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체코의 한인사회는 도덕과 윤리와 체면과 분수가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해외에 한인교회들이 있지만 교회가 자신의 한인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모순이 그래도 교회 구조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조차 사람에 실망하여 도무지 조그마한 희망조차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내가 교회 공동체에 몸을 함께 담구어야 할지 고민이됩니다.

도덕과 윤리와 체면과 자기 분수를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와 자매를 보면 그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실제로 그들 때문에 교회에 오고싶은 사람들도 교회에 등을 돌립니다.

내가 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될지 이유를 모릅니다.

내 마음 속에 그들에 대한 비판은 날마다 더욱 심해집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고 대면하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고싶습니다.

해외에서 신앙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좌절과 절망만을 경험하고 교회의 사명과 그 비전은 점점 사라집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겪으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신자들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곳에서 태어납니다.

문둥병자, 중풍병자, 눈먼자, 귀먹은자, 벙어리된자, 앉은뱅이, 죽을 질병에 걸린자, 수족을 쓰지 못하는 자, 가난한자,
흉악한 범죄자, 몸을 파는 매춘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세리들 … 도무지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도무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백성을 보고계십니다.

우리 체코의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복음을 환영하지않는 무신론의 분위기가 팽배한 체코사회에 우리 주님은 콘스탄쯔에서 1415년 7월 6일 화형당한 얀 후스를 복음의 불씨로 일으켜 600년이 넘는 박해에도 그 불씨를 꺼트리지않고 지금까지 지켜오셨습니다.

그래서 체코교회는 7월 첫째주일을 후스를 기념하는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불꽃도 시들어가고 열기도 식어가는 약하디 약한 그 불씨 곁으로 지금 우리 한인 디아스포라를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배장소를 세를 주고 세를 받는 서유럽의 큰 교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체코기독교인들과 한국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을 지금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미약한 체코교회를 다시 세우기위해 희망 없어 보이는 하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렇게 그분은 지금 자신의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다.

그것은 악한 사탄의 계략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지금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 안에 많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름 떼 처럼 모여들 것입니다.

우리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잠자코 있지말라/ 끊임없이 주의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는 이땅에서 상함이 없으리라/ 이 도시에 나의 백성이 많다/ 이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

  • 한인 예배 (2004년 06월 13일)
  • 눅13:1-9
  • 설교자: 다빗 유레흐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이 6월 6일 첫째주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우리 꼬빌리시 한인들을 위한 첫 설교임.

(13. VI. 2004)

본문: 누가복음 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교역자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예배당에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설교를 통해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우리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우리들이 가야할 바를 보여주는 말씀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무리들이 눈에 띕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한 남자가 그 군중들 사이로 뛰어들어와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학살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응시하며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소리 나는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잠시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뉴스에 어떻게 예수님께서 코멘트를 하실지 궁금해 했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말씀이 이 세상의 사건과 사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빌라도,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사람이며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최고위직 로마 관리였던 그가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로마가 갈릴리 사람들을 의심하였던 것은 로마 제국의 지역통치를 위협하는 정치적 급진파와 극단주의자들이 그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의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재단에 희생제물을 성전에 가져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많은 갈릴리 순레자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성전에 올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값진 자신의 것을  희생재물로 가지고 옵니다.

희생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짐승의 피가 흐릅니다.

바로 이 제사의 장소에서 불쌍한 갈릴리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학살당한 이들의 피가 희생제물의 피와 섞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스캔들입니다.

하나님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이며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거룩한 곳이 학살의 잔혹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사상은 우연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댓가로 받아들였습니다.

불쌍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의 죄에 대해 상응하는 대가였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이런 잔인한 죽음을 당하게되었는가? (말들을 합니다.)

전통적인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에게 그들은 도전합니다.

죄와 벌은 어떤 관계입니까?

죽음과 벌은 이전에 지은 죄에 비례합니까?

예수님은 그 논리를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재앙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갈릴리사람들이 죽었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죄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도 예수를 실제로 죽게한 빌라도의 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의 논리를 완전히 거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또 어떤 사람은 암살로 희생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죽을 죄를 진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로암에 있는 예루살렘 망을 보는 탑 가운데 하나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런 사고방식을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의 저지른 잘못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우리식으로 표현해서) 재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물론 예수님은 두 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이 허물과 죄가 없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지금 자신의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모든 이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없는 사람이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의 죽은이들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를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졌기에? 라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죄의 문제로 방향을 돌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을 자신의 거울 앞에 서게 하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들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과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한 삶을 지속하는 우리들에게 갈 바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는 길이며 그 깨달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그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회개를 원하시는 뜻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리고 우리를 여호와께 이르도록 하게 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는 올바른 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집을 떠나 자유롭게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방탕한 아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그리고 그는 바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집의 종이 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마중나갔으며 사랑으로 그를 맞아들이면서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눅15,24) 하였습니다.

사람은 꼭 죽지않더라도 죽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지않더라도 길 잃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경고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무화가 나무 비유는 열매를 내지 못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진 포도원의 주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삼년째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땅을 소비하지 않고 다른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그 나무를베어버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가 자신의 주인에게 뜻밖의 반응을 합니다.

그는 그 나무를 옮겨 심을 때부터 관리했고 지금도 관리하고 있는 포도원 지기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제 그에게 불필요한 일을 없애주려고 했을 수 있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이 나무를 돌보는 것이 더 이상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나무를 버려두거나 아니면 베어버리고 싶어도 그것을 자기가 임의대로 결정할 수 없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주인에게 제안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 포도원 지기는 나무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싶어, 무화가 나무를 베지않도록 주인에게 간청하여  나무가 열매를 내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서 노력을 하였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짐으로써 무화과 나무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무는 열매를 맺는 책임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한번 더 기회를 갖게되었습니다.

이 무화과 나무 비유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들을 위한 초청과 자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원 관리자이며,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주 하나님의 열매를 얻도록 우리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무화과 나무의 생명을 연장시킨 포도원 지기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그의 구속하심으로 믿음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셔서 우리들이 열매 맺는 무화과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열매를 맺는데 최적의 햇빛이며 물이며 기름진 옥토인 하나님 말씀으로 달려가십시다. Amen.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기 전 그당시 사람들은 목자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주님의 현존이 없이는 우리들 역시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은 이 세상, 교회와 우리들을 사랑하시사 당신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의 한 가운데에 주님의 말씀의 확신 안에 거하게 하시사 우리가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 우리를 붙잡아 주셔서 당신의 손에서 누구도 우리를 빼앗아 가지 않도록 하옵소서.

우리를 담대하게 하사 유혹과 악의 세력을 이기게 하옵소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치유하시사 적은 믿음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웃에 마음의 문을 열게 하옵소서.

주의 성령께서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Amen.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이 이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누구신가?

  • 연합 예배 (2004년 06월 06일)
  • 요16:12-15
  • 설교자: 드로빅

요한복음 16장 12-15절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들이 의문을 가져서는 안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질문이 있지만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고 때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십니다.

첫번째 성경읽기 로마서의 내용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단지 공허한 내용이나 이름만을 반복할 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랑과 고통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사랑과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새로운 자유에 대한 인식의 체험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유를 주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은 두려움으로 마치 노예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아량이 넓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신화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체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삶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소외된 사회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실 때.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약속하실 때.

그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해주시길 원하시는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임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선한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들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우리들은 자신의 삶의 보장을 세상의 것으로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시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상황이 오히려 문제가 될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가 위험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절망을 경험한때가 십자가 위에서 였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삶의 고통에 대한 보장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은 삶의 고통을 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은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이 홀로 있지않음을 알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게 하심을 알게합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의 소망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멀리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가듯 우리들이 그에게 감으로써 모든 두려움을 없애길 원하십니다.

사랑의 그의 삶에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체코어로 <부흐(B&#367;h)>는  감탄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맙소사>란 뜻의 체코어 <쁘로보하(proboha)>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쓸 때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단어를 우리들은 절망의 상황에서 사용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의 증언자들이 설명한 약속의 하나님을 말하며 우리를 돕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란 단어는 아마도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가장 부담이 되는 단어일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전쟁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종교, 정치, 이기심과 전쟁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까?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딤후 6:16)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설명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비밀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수 도 있습니다.

세부적인것에 대해 설명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들의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들을 위해 섬기도록 만듦으로써 우리들은 십계명의 첫번째와 두번째 계명을 어기게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하나님”(사 45:15)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다원화된 사회에서 사상가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심을 설명하려고 애를씁니다.

광대한 분이어서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분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5세기 중국의 한 사상가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될 수 있는 이름이지 영원한 이름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사상가 레라클레토스는 “유일한 지혜자는 제우스라는 이름을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하였고 오늘날까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은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해 언급하지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저술한 책 신앙고백에서 “당신에 대해 말하던 그 사람들은 벙어리 같습니다.”

토마쉬 아끄빈스끼가 하나님이 오심에 대한 신학논문을 완성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쓴 모든 것은 마치 잡초 나부랑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상가들은 하나님에 대해 침묵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르거나 소심하기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침묵의 의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며,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시는 기다림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자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안에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이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말씀들 앞에 하나님의 오심은 침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안에서 부르십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성령은 그 부르심을 듣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주일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임재로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 나의 아버지 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낙망치 않는 기도

  • 한인 예배 (2004년 05월 16일)
  • 눅18:1-8
  • 설교자: 베네쉬

Text: Lk 18,1-8

형제 자매 여러분

       

여기 누구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기만을 위하고  거만하고 오만한 그런 재판관을 아직 만나 보지 못해 보신 분 계십니까? 

그 재판관은 자신의 원한을 풀지 못했던 불쌍한 과부가 끊임없이 그를 찾아 오는 데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마 2천년 전에도 그런 냉소적인 관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해할 만 하며 아주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재판관을 비유로 들어 즉, 보다 더 쉽게 기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재판관에 비유됨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늘의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의 기도가 공허한 것이 아니며 귀머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들의 모든 기도들은 들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낙망 치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모임에서 집에서 성경공부 중에 수업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또는 저 문제에 대해서  최소한 열 번, 스무 번 이미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수 십 년 간을 모임들에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또 계속 똑같은 일 만 일어나고 전혀 변화가 없으며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선물들에 대해 기도 중에 감사 할 수 있고 위기의 순간들 속에서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으십니다.

유혹의 순간들에 의심의 순간들에.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아십니까! 다만 기도 덕택에 저는 저의 병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보십시요.  기도가
없었더라면 제 아들들은 아마 어느 곳에서 탕자들이 되었을 것 입니다….  다만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마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떤 곳에서 설명을 해야만 된다면, 당신들은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따르면 기도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도록 하기위한 끊임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우리와 이 세상이 처해있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도록 하는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은 애굽 노예생활로부터 하늘까지 상달 하였습니다.

사무엘 상 2장에 보면 이렇게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던 한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끈임 없는 간청을 재판관의 모습 을  통해 설명하십니다.

재판관, 그는 아주 불쌍한 여인이었던 과부, 아무것도 없는, 기댈만한 그 무엇도 없는, 설혹 어떤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그 도움에  수수료나 감사함을 표시할 수 없는 이 과부에 대해 이 재판관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아무 것 도 없습니다.  다만 부르짖음과 간청이 있을 뿐입니다.

과부는 매일 재판관에게 갑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재판관은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과부는 재판관의 의지를 꺾고야 말았습니다.

거기에 과부가 재판관을 신뢰 했다 든가 재판관이 과부를 이해 했다 든가 하는 말은 없습니다.

또는 재판관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든가 의무감을 느꼈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 재판관은 말하였을 것입니다.  „과부가 나에게 평안을 주도록, 갑자기 나에게 들이 닥치거나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나의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간절하고 끈질긴 여인이 당신들의 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점에서 본이 됩니까?

기도 속에 무엇을 놓고 이렇게 끈질긴 싸움을 해야 됩니까?

과부는 요구하였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우리는 어디에 우리를 못살게 구는 원수들이 있는지 잘 압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꼭 밖에 있는 그 누구일 필요는 없습니다.  악한생각, 부족함, 배신, 죄책감, 슬픔 또는 질병이 우리의 원수 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더욱 괴롭힙니다.

이것을 없애고 싶지만 되지 않습니다.

변화를 원하지만 오지않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오래 전부터 이 외침은 교회의 외침이었습니다.

교회와 각 개인의 외침입니다.  –  “원한을 풀어 주소서“

어느 누구도 과부를 변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버려졌으며 심지어 위협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는 대적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가 감당치 못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믿음 없음으로 넘어지기 잘하며 얼마나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할 때가 많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숨어 버리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시는가“라는 생각이 우리 내면 속에 피어 오를 때가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무관심한 존재들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가 우리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온 힘을 다해 밤낮 부르짖다가도 낙망 하기 잘 한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병든 자연에 대해서, 우리의 정치나 세상의 다른 나라를 위해서 끈질긴 기도를  쉬지않고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 제목들 속에서 낙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 제목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홍보를 위한 특별한 행사를 위한 것에 해당 되어야 하는 것 처럼
생각되고 달리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아느냐 그렇지 않는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즉, 이미 기도 했는데 전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때 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만두지 마십시요.  낙망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이 거만한 재판관에게 왔던 과부를 기억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매일 반복해서 간청했던 과부의 요구에 대해 아마 불합리하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낙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관이 그의 의지를 굽히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비유를 마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기도에 대해서 의심이 들 때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시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람 중에 한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원치 않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속에서 낙망 할 때 기도를 의심하게 될 때 또 누가 그러함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 그 이름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예수님의 말씀은 질문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는 늘 묻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신가?  큰 불행 중에 그리고 큰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의지할만한 분이신가?“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점에 대해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대들은 신실한가?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돌보시도록 기도하며 원하는가?  그대들은 신실한 종들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세례를 통해 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불편함과 불이익으로 인해 오히려 여기 계신 분들이 순종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실려는지요.

예수님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의 주권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치 않고 끊임없이 기도 했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실 것인지요?

모든 어려움에 주님의 신실 하심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시겠는지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예수님을 기다리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한 모임들과 교회가 이 땅에 있을 것인지요?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낙망치 않고 간청한 사람들이 이 땅에 일을 것인지요?

포기치 않고 꾸준히 끈질기게 우리와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한 사람들이 이 곳에 있을 것인지요?

우리는 ‚인자가 올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 9장 24절 말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