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 한인 예배 (2004년 06월 13일)
  • 눅13:1-9
  • 설교자: 다빗 유레흐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이 6월 6일 첫째주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우리 꼬빌리시 한인들을 위한 첫 설교임.

(13. VI. 2004)

본문: 누가복음 13:1-9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교역자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예배당에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설교를 통해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말씀이 아니라 우리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우리들이 가야할 바를 보여주는 말씀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무리들이 눈에 띕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한 남자가 그 군중들 사이로 뛰어들어와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학살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응시하며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소리 나는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잠시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뉴스에 어떻게 예수님께서 코멘트를 하실지 궁금해 했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말씀이 이 세상의 사건과 사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빌라도,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 사람이며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최고위직 로마 관리였던 그가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로마가 갈릴리 사람들을 의심하였던 것은 로마 제국의 지역통치를 위협하는 정치적 급진파와 극단주의자들이 그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의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재단에 희생제물을 성전에 가져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많은 갈릴리 순레자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성전에 올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값진 자신의 것을  희생재물로 가지고 옵니다.

희생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짐승의 피가 흐릅니다.

바로 이 제사의 장소에서 불쌍한 갈릴리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학살당한 이들의 피가 희생제물의 피와 섞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스캔들입니다.

하나님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이며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거룩한 곳이 학살의 잔혹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사상은 우연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댓가로 받아들였습니다.

불쌍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의 죄에 대해 상응하는 대가였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이런 잔인한 죽음을 당하게되었는가? (말들을 합니다.)

전통적인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에게 그들은 도전합니다.

죄와 벌은 어떤 관계입니까?

죽음과 벌은 이전에 지은 죄에 비례합니까?

예수님은 그 논리를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재앙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갈릴리사람들이 죽었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죄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도 예수를 실제로 죽게한 빌라도의 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의 논리를 완전히 거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또 어떤 사람은 암살로 희생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죽을 죄를 진 하나님의 심판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로암에 있는 예루살렘 망을 보는 탑 가운데 하나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런 사고방식을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의 저지른 잘못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우리식으로 표현해서) 재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물론 예수님은 두 재앙으로 죽은 사람들이 허물과 죄가 없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지금 자신의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모든 이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없는 사람이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의 죽은이들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를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졌기에? 라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죄의 문제로 방향을 돌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을 자신의 거울 앞에 서게 하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들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과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한 삶을 지속하는 우리들에게 갈 바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는 길이며 그 깨달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그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회개를 원하시는 뜻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리고 우리를 여호와께 이르도록 하게 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는 올바른 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집을 떠나 자유롭게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방탕한 아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그리고 그는 바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집의 종이 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마중나갔으며 사랑으로 그를 맞아들이면서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눅15,24) 하였습니다.

사람은 꼭 죽지않더라도 죽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지않더라도 길 잃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경고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무화가 나무 비유는 열매를 내지 못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진 포도원의 주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삼년째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땅을 소비하지 않고 다른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그 나무를베어버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가 자신의 주인에게 뜻밖의 반응을 합니다.

그는 그 나무를 옮겨 심을 때부터 관리했고 지금도 관리하고 있는 포도원 지기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제 그에게 불필요한 일을 없애주려고 했을 수 있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이 나무를 돌보는 것이 더 이상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나무를 버려두거나 아니면 베어버리고 싶어도 그것을 자기가 임의대로 결정할 수 없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주인에게 제안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 포도원 지기는 나무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싶어, 무화가 나무를 베지않도록 주인에게 간청하여  나무가 열매를 내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서 노력을 하였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짐으로써 무화과 나무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무는 열매를 맺는 책임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한번 더 기회를 갖게되었습니다.

이 무화과 나무 비유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들을 위한 초청과 자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원 관리자이며,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우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주 하나님의 열매를 얻도록 우리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무화과 나무의 생명을 연장시킨 포도원 지기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그의 구속하심으로 믿음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셔서 우리들이 열매 맺는 무화과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열매를 맺는데 최적의 햇빛이며 물이며 기름진 옥토인 하나님 말씀으로 달려가십시다. Amen.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기 전 그당시 사람들은 목자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주님의 현존이 없이는 우리들 역시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은 이 세상, 교회와 우리들을 사랑하시사 당신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의 한 가운데에 주님의 말씀의 확신 안에 거하게 하시사 우리가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 우리를 붙잡아 주셔서 당신의 손에서 누구도 우리를 빼앗아 가지 않도록 하옵소서.

우리를 담대하게 하사 유혹과 악의 세력을 이기게 하옵소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치유하시사 적은 믿음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웃에 마음의 문을 열게 하옵소서.

주의 성령께서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Amen.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이 이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누구신가?

  • 연합 예배 (2004년 06월 06일)
  • 요16:12-15
  • 설교자: 드로빅

요한복음 16장 12-15절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들이 의문을 가져서는 안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질문이 있지만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고 때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십니다.

첫번째 성경읽기 로마서의 내용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단지 공허한 내용이나 이름만을 반복할 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랑과 고통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사랑과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새로운 자유에 대한 인식의 체험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유를 주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은 두려움으로 마치 노예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아량이 넓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신화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체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삶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소외된 사회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실 때.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약속하실 때.

그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해주시길 원하시는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임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선한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들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우리들은 자신의 삶의 보장을 세상의 것으로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시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상황이 오히려 문제가 될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가 위험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절망을 경험한때가 십자가 위에서 였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삶의 고통에 대한 보장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은 삶의 고통을 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은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이 홀로 있지않음을 알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게 하심을 알게합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의 소망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멀리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가듯 우리들이 그에게 감으로써 모든 두려움을 없애길 원하십니다.

사랑의 그의 삶에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체코어로 <부흐(B&#367;h)>는  감탄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맙소사>란 뜻의 체코어 <쁘로보하(proboha)>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쓸 때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단어를 우리들은 절망의 상황에서 사용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의 증언자들이 설명한 약속의 하나님을 말하며 우리를 돕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란 단어는 아마도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가장 부담이 되는 단어일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전쟁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종교, 정치, 이기심과 전쟁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까?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딤후 6:16)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설명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비밀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수 도 있습니다.

세부적인것에 대해 설명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들의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들을 위해 섬기도록 만듦으로써 우리들은 십계명의 첫번째와 두번째 계명을 어기게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하나님”(사 45:15)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다원화된 사회에서 사상가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심을 설명하려고 애를씁니다.

광대한 분이어서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분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5세기 중국의 한 사상가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될 수 있는 이름이지 영원한 이름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사상가 레라클레토스는 “유일한 지혜자는 제우스라는 이름을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하였고 오늘날까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은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해 언급하지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저술한 책 신앙고백에서 “당신에 대해 말하던 그 사람들은 벙어리 같습니다.”

토마쉬 아끄빈스끼가 하나님이 오심에 대한 신학논문을 완성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쓴 모든 것은 마치 잡초 나부랑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상가들은 하나님에 대해 침묵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르거나 소심하기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침묵의 의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며,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시는 기다림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자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안에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이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말씀들 앞에 하나님의 오심은 침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안에서 부르십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성령은 그 부르심을 듣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주일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임재로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 나의 아버지 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낙망치 않는 기도

  • 한인 예배 (2004년 05월 16일)
  • 눅18:1-8
  • 설교자: 베네쉬

Text: Lk 18,1-8

형제 자매 여러분

       

여기 누구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기만을 위하고  거만하고 오만한 그런 재판관을 아직 만나 보지 못해 보신 분 계십니까? 

그 재판관은 자신의 원한을 풀지 못했던 불쌍한 과부가 끊임없이 그를 찾아 오는 데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마 2천년 전에도 그런 냉소적인 관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해할 만 하며 아주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재판관을 비유로 들어 즉, 보다 더 쉽게 기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재판관에 비유됨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늘의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의 기도가 공허한 것이 아니며 귀머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들의 모든 기도들은 들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낙망 치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모임에서 집에서 성경공부 중에 수업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또는 저 문제에 대해서  최소한 열 번, 스무 번 이미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수 십 년 간을 모임들에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또 계속 똑같은 일 만 일어나고 전혀 변화가 없으며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선물들에 대해 기도 중에 감사 할 수 있고 위기의 순간들 속에서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으십니다.

유혹의 순간들에 의심의 순간들에.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아십니까! 다만 기도 덕택에 저는 저의 병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보십시요.  기도가
없었더라면 제 아들들은 아마 어느 곳에서 탕자들이 되었을 것 입니다….  다만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마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떤 곳에서 설명을 해야만 된다면, 당신들은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따르면 기도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도록 하기위한 끊임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우리와 이 세상이 처해있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도록 하는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은 애굽 노예생활로부터 하늘까지 상달 하였습니다.

사무엘 상 2장에 보면 이렇게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던 한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끈임 없는 간청을 재판관의 모습 을  통해 설명하십니다.

재판관, 그는 아주 불쌍한 여인이었던 과부, 아무것도 없는, 기댈만한 그 무엇도 없는, 설혹 어떤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그 도움에  수수료나 감사함을 표시할 수 없는 이 과부에 대해 이 재판관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아무 것 도 없습니다.  다만 부르짖음과 간청이 있을 뿐입니다.

과부는 매일 재판관에게 갑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재판관은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과부는 재판관의 의지를 꺾고야 말았습니다.

거기에 과부가 재판관을 신뢰 했다 든가 재판관이 과부를 이해 했다 든가 하는 말은 없습니다.

또는 재판관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든가 의무감을 느꼈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 재판관은 말하였을 것입니다.  „과부가 나에게 평안을 주도록, 갑자기 나에게 들이 닥치거나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나의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간절하고 끈질긴 여인이 당신들의 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점에서 본이 됩니까?

기도 속에 무엇을 놓고 이렇게 끈질긴 싸움을 해야 됩니까?

과부는 요구하였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우리는 어디에 우리를 못살게 구는 원수들이 있는지 잘 압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꼭 밖에 있는 그 누구일 필요는 없습니다.  악한생각, 부족함, 배신, 죄책감, 슬픔 또는 질병이 우리의 원수 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더욱 괴롭힙니다.

이것을 없애고 싶지만 되지 않습니다.

변화를 원하지만 오지않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오래 전부터 이 외침은 교회의 외침이었습니다.

교회와 각 개인의 외침입니다.  –  “원한을 풀어 주소서“

어느 누구도 과부를 변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버려졌으며 심지어 위협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는 대적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가 감당치 못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믿음 없음으로 넘어지기 잘하며 얼마나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할 때가 많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숨어 버리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시는가“라는 생각이 우리 내면 속에 피어 오를 때가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무관심한 존재들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가 우리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온 힘을 다해 밤낮 부르짖다가도 낙망 하기 잘 한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병든 자연에 대해서, 우리의 정치나 세상의 다른 나라를 위해서 끈질긴 기도를  쉬지않고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 제목들 속에서 낙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 제목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홍보를 위한 특별한 행사를 위한 것에 해당 되어야 하는 것 처럼
생각되고 달리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아느냐 그렇지 않는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즉, 이미 기도 했는데 전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때 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만두지 마십시요.  낙망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이 거만한 재판관에게 왔던 과부를 기억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매일 반복해서 간청했던 과부의 요구에 대해 아마 불합리하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낙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관이 그의 의지를 굽히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비유를 마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기도에 대해서 의심이 들 때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시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람 중에 한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원치 않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속에서 낙망 할 때 기도를 의심하게 될 때 또 누가 그러함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 그 이름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예수님의 말씀은 질문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는 늘 묻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신가?  큰 불행 중에 그리고 큰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의지할만한 분이신가?“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점에 대해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대들은 신실한가?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돌보시도록 기도하며 원하는가?  그대들은 신실한 종들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세례를 통해 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불편함과 불이익으로 인해 오히려 여기 계신 분들이 순종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실려는지요.

예수님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의 주권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치 않고 끊임없이 기도 했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실 것인지요?

모든 어려움에 주님의 신실 하심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시겠는지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예수님을 기다리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한 모임들과 교회가 이 땅에 있을 것인지요?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낙망치 않고 간청한 사람들이 이 땅에 일을 것인지요?

포기치 않고 꾸준히 끈질기게 우리와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한 사람들이 이 곳에 있을 것인지요?

우리는 ‚인자가 올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 9장 24절 말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

  • 연합 예배 (2004년 05월 02일)
  • 요10:22-30
  • 설교자: 드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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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22-30 /  (설교: 드로빅)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진짜 양을 치는 목자를 제 눈으로 딱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자락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노인이었습니다.

색 바랜 비옷을 입고있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이리 저리 다니면서 양들을 에게 무언가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의 하루의 모습을 길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떼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났었고 잠시 후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멍멍짓는 양몰이 개가 짓는 소리와 양들의 울음소리로 양떼들은 길을 안내 받습니다.

부유한 서방 문명의 사람에게 이것은 낯설은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장면은 매일 일어났던 일이며 이 장면으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첫번째 우리의 반응는 왜 양들인가?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아주 바보 같은 짐승 양에게 비교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빠르게 변하는 오늘날에 탄력성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현대 개신교 기독교인들은 아마 다른 짐승에 비교해야 되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입니다.

사자는 우렁찬 목소리, 힘이 있고 빠르고 날렵해서 스스로 먹이를 취합니다.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눈으로 보통 자연 속에서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떼를 지어 삽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중세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은 많은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 안에서 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목자의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목자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고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해방의 말씀입니다.

정복하려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더 빠른 템포에 적응하도록하는 채찍으로부터 인간 자신의 독재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인 것을 아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속에서 우리를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우리 인생의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있었습니다.

그 음성에 대한 응답이 오늘 자신의 자녀들이 세례받기 원하는 부모님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례를 원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이 목자의 음성에 우리는 모든 방법으로 응답을 합니다.

신자의 삶으로 이 음성을 분별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지도자의 음성이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의 음성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는 음성은 우리를 아는 선한 목자의 음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 음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각계 각층 모든 민족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과 양 무리들의 그림이 사용되고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내하도록 부르심을 듣고 선한 목자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는 동서남북에서 자신의 교회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두번째, 자신의 손에 있는 우리를 빼앗기지 않는 목자의 안전함입니다.

성경에서 손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능력의 비유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안정되고 견고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 불확신에서 오는 흔들림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님의 안정성과 견고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모든 인간을 수용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불완전한 사람도 받아들입니다.

이 본문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였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오클레스 황제시대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적들로 둘러쌓였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교회의 양들의 확신과 자기이해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유럽의 우리 기독교인들은 1, 2세기의 기독교의 전환의 시기와 같은 그러한 박해로 위협을 받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는 목자에 대해 다양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희생들에 대해 단지 한가지만 선택하고 강조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을 거부하던 당시에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종류의 수박겉핥기식의 지식과 우리 목자의 음성에 건성으로 순복하는 것이 우리를 위협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한분 목자를 뒤따르는것을 아는일에 대한 게으름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내 옆에 검은 양이 있을 때 그리고 다른 울음소리로 양이 매애애 울 때 그때 우리는 위협을 받습니다.

세번째로 목자는 크신 분입니다.

교사와 도덕가의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19세기에 있었던 신앙고백의 논쟁은 바로 오늘 본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에서 발전된것입니다.

양과 양떼들과 관련해서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곧 하나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하나이십니다.

이 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되심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의 목자가 양떼를 이끌 때 이리 저리 아무데나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다닙니다.

양들이 배고프지않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안전한 목초지에서 쉬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들을 어디론가 인도합니다.

배부르게 합니다.

우리들의 목자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아십니다.

우리들은 그의 양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그러나 목자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길로 언제나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미래와 좌절을 경험케하는 것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신자들로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압니다.

부활절기에 사도행전을 봉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경험한 염려와 기쁨들은 우리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섬김과 예배와 증언의 공동체가 결국 승리함을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배웁니다.

하나님의 손이 강함을 초대교회로부터 배웁니다.

초대교회에 임한 그 능력의 손이 바로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음을 우리들은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도마를 위한 변명

  • 한인 예배 (2004년 04월 25일)
  • 요 20:19-31
  • 설교자: 빠벨 뽀꼬르니

040428

이사야 53장

요한복음 20: 19-31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때부터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동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는 그들이 확인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했습니다. .

도마는 회의론자와 의심 많은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교황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왜 그 자리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도마가 제자들의 모임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도마를 변호하고자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구요?

다른 제자들을 한번 살펴 보십시요 : 그들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주시며 세상으로 그들을 보내십니다. –
그런데 그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난 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해 또다시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두 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의 기쁨은 무엇 이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과 평강의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어떻게 행했습니까?

그들이 정말 믿음이 있었는지 대해서는 쓰여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만 그랬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에게선 그 믿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도마가 왜 믿어야 합니까?

이 제자들이 교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 입니까?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그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어쩌면 그 제자들이 도마를 전혀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의심이 많은 도마를 그 모임에 계속 끼워 주었고, 다음 주일에  모두 함께했던 것은 성령의 열매인지도 모릅니다.

도마는 그 때까지 12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서만 등장합니다.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았고, (베드로나 요한 처럼)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쌍둥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가 정말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누구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불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마는 어쩌면 다른 사도들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쌍둥이가 자기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 도마가 자신의 의심 때문에 이제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의심은 그에게는 약점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했습니다.

의심은 약점이지만 자신이 인정하고 고백한 의심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놓는 의심은 우리의 내면을 약하게 만들고,

우리를 넘어뜨리며, 사람을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물건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나타낸 의심은 의심을 풀려고 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용기와 내면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솔직함의 표현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기도 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할 때도 많습니다. 

아우구스틴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 도마는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럼, 도마의 의심은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요?

도마는 무엇에 대해 의심했습니까?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까?

다른 동료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 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까?

도마는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도마가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랬다면, 제 생각엔 도마는 오히려 못자국이 다 나아 상처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 분이 진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했다면 오히려 도마는 자신이 아는 얼굴을 보고 아는 음성을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정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살과 뼈로 된 그 사람을 오히려 한번 안아보고 싶어했을 겁니다. – 그렇다면 왜 도마는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상처 난 곳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을까요? 

제 생각에 거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질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종, 그 분에게 난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받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도마는 단지 살아있는 시신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구세주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가 그 이상의 다른 뭔가를 원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마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 도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군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마 때문에 다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 의심을 풀어주십니다. 도마가 믿음에 대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도마에 대해 마찬가지 입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보다는 믿는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계십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의심들과 질문들에 대답해 주시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각자의 개성 속에서 찾고 계십니까?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한가지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못자국 난 상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각자 개성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동일한 한가지 입니다.  – 동일한 하나의 믿음입니다. : 바로 예수님이 받은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되며,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도마는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대답합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그것은 도마의 외침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 회의론자에 의심이 많았던 그 도마가 요한 복음을 통틀어 최고의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아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항상 다른 사도들의 그림자 속에 있었던 것 같은 도마가 그러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는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고 서로 연결시켜준, 알파와 오메가를 찾아낸 첫 번째 사람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도마가 정말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 손바닥의 못자국에 넣어봤는지, 자신의 손을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봤는지는 더 이상 말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시며 말씀을 마치십니다.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귀로 듣는 것으로 충분한 것을 눈으로 보아도 만족하지 않다는 설교자의 회의를 듣는 것 같고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에 대한 시몬 벤 라뀌쉬 랍비의 깨달음을 듣는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에서 번개와 지진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나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구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로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이 있을까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세지입니다. 자신의 의문들과 의심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보지 못해도 믿음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보다  과거에 누구를 믿었었는지, 또 지금은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인지 하는 사실에 달려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