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2 나뽀지취의 성 베드로 교회

12. 나뽀지취의 성 베드로 교회 (Kostel sv.Petra Na Poříčí)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의 목사관으로부터 거리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바르비즈스까 거리(Barvířská ulice)의 끝과 만난다. 이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뻬뜨르 광장(Petrské náměstí)쪽으로 계속 간다. 왼편으로 뻬뜨르 광장이 나타난다. 이 곳에서 바로크식 둥근 지붕과 함께 흰 종탑이 눈에 띈다(이전에 구 뻬뜨르 묘지로 통하는 입구로 사용되었다).

성 베드로 교회는 오늘날 비스꿉스까 거리(Biskupská ulice) 로마네스크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에 서 있다. 이 바실리카는 1172년 블라디슬라프 1세(Vladislav I.+1173)가 프라하로 불러들였던 독일 상인들에 의하여 블따바 강 옆 나뽀지취 거리에 건립되었다(원래의 로마네스크 건물에서 두개의 백탑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13세기 중반까지 독일 기사 수도사들과 붉은별 십자군 수도사들의 두 수도원파가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었다. 까렐 4세 때에 이 교회와 더불어 나뽀쥐취 지역은 신도시 구역으로 편입된다. 그때까지의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고딕식으로 개축된다.

후스주의 때에 성 베드로 교회는 양종성찬 교회단 소속이었고, 후기에는 프라하 우크라퀴스트교회 소속이 되고, 교회를 부분적으로 재시공한다. 반개혁 세력들이 집권하자 성 베드로 교회에는 붉은 별 십자군들이 득세한다(이들의 문장은 비스꿉스까 거리 13번지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 정면 쪽에 나타나 있다). 교회는 요세프 개혁 때에도 십자군 수도원 소속이었다. 1874-76년 교회 정면부가 후기 고딕 양식으로 개축된다. 중앙 제단에 성 베드로와 함께 있는 예수 그림(V.V. Reiner 작품)과 왼편 탑 기둥 아래에 있는 성 베드로 조각상(M.V. Jäkl 작품)이 내부 바로크 양식화를 잘 대변 한다. 이 흰 교회건물과 종탑은 얼마 멀지 않은 현대식 프라하 중심지의 번잡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로서 우리의 두번째 도보여정은 끝이 난다. 비스꿉스까 거리에서 대략 100미터정도 내려오면 나뽀쥐취 거리가 나온다. 왼편으로 가면 전차 정류장이 나오고 이 곳에서 3번이나 24번을 타면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의 지하철역 무스텍(Můstek)으로 연결된다. – 그러나 우리는 계속 왼편으로 가서 뗴슈노프(Těšnov) 교차로를 지나 플로렌츠(Florenc) 지하철역으로 가서 B선을 타고 도로 무스텍역으로 가도록 한다.

II/11 끌리멘크 개혁교회

11. 끌리멘트 개혁 교회 (Evangelický kostel U Klimenta)

원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 회당이었던 성 끌리멘트(sv. Kliment) 교회는 프라하 근교의 우예즈드(Újezd) 마을에 있었다. 우예즈드는 블라디슬라프 1세가 1165년 독일인 이주자들도 소집한 곳이기도 하다. 까렐 4세 집권 당시 이 마을은 프라하 노베 므녜스또(Nové Město) 구역 (신시가)으로 통합된다. 소 교회당은 고딕 양식의 교회로 공사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건물 후진(後陣)의 둥근 천장과 그 안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대화재를 겪고 교회는 완전한 고딕식 건축물로 재건된다. 본당 회중석(會衆席)의 아치는 야겔론 왕조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혁시대 이전 1407년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의 목사는 얀 쁘로띠바(Jan Protiva)로, 베들레헴 채플의 첫 담임 목사(1394-96)이기도 하였다. 이는 얀 후스보다도 6년 앞 선 것이다. 위클리프 교리 논쟁때에는 반대파에 가담하였고, 이는 곧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반 후스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하에서 후스파가 승리하게 되자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교회는 계속하여 양종성찬 목사들에 의하여 움직였다.

후스파 시대 후기에는 교회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나뽀지취(Na Poříčí) 거리의 성 뻬뜨르 교회의 우크라퀴스트 성직자들도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다. 빌라호라 전투 이후 양종성찬파 마지막 목사였던 또비아쉬 알베르뚜스(Tobiáš Albertus)는 1621년 12월 프라하에서 추방당한다. 교회는 재가톨릭화되며 반개혁주의 때에는 이 교회의 의미도 하락하게 된다. 요세프 개혁 때 교회와 그 옆에 있던 묘지 모두가 없어지고 곡물 저장 창고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프란띠셱 요세프 1세에 의한 종교 관용령(1861년 4월 8일)이 내려지기 전인 1850년 프라하 관용 교회는 아주 황폐해진 이 교회 건물을 27.500 즐라띠를 주고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기금모금과 끌리멘트 교회의 새로운 일들은 특히 의욕적이었던 베드지흐 빌렘 꼬슈트(Bedřich Vilém Košut) 목사가 담당하였다. (그때까지 개혁교회는 말라 스뜨라나(Malá Strana)의 예수회 정원에 있는 성 미할 구 예수회 수도원(sv. Michal) 건물의 홀을 빌려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현재 체코 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다.)

B. V. 꼬슈트(B.V. Košut)는 관용 교회 목사 국내 세대에 속한다. 체르닐로바에 있는 교회 출신이고 슬로바키아에서 공부하였다(모드라에서 신학을, 쁘레슈뻬르크에서 법을 공부하였다). 1847년 프라하 개혁교회의 목사로 임명되면서 신념이 확고한 목사 및 조직책으로서 (심지어 20명의 가톨릭 신부들을 포섭하기도 한다) 활동한다. 1848년에는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프라하 시에 사용되지 않던 구시가의 성 미꿀라쉬 (sv. Mikuláš) 교회당 건물을, 이후에는 신시가지에 있는 성 까렐 보로메이스끼 교회당 (sv. Karla Boromejského)을 사용토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1850년에는 개인 소유주로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가 설교할 때나 강연, 혹은 체코 형제 전도사지에 기고할 때도 체코 개혁의 정신적 유산을 불러 일으키곤 하였다. – 이르하지의 미할 학교의 루터교 교수인 Lic.J.루쥐츠까 (Lic. J. Růžička)와 함께 체코 관용의 교회의 연합과 체코 개혁교회 신학부 설립에 힘썼다. – 그리고 그는 사명감과 애국에 대한 열망으로 구교도 세력과 세속적 권력에 대항하였다. 1852년 체포되어 1853년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로 이송된다. 1857년 출소한 이후 프라하로의 귀향이 금지되어 포리니에서 개혁 목사직 수행을 받아들인다. 1861년 체코 개혁 교회 내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정식 인준은 받지 못하고, 1891년 독일에 있던 아들 곁에서 숨을 거둔다. – 꼬슈트 이래로 끌리멘트 교회에서는 뛰어난 목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중 한 명이 1894년부터 활동하였던 요세프 소우첵 (Dr. Josef Souček) 박사로, 두 개혁 교회가 연합된 이 후 1918년 첫 체코 형제개혁교회 대표 모임의 장로로 선출된다.

1918년부터 끌리멘트 교회는 체코 형제개혁 교단의 소속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1975-80년까지 프라하시의 도움을 받아 고고학 연구팀과 함께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 된다. 1990년 오늘날의 온화한 형태로 건물 정면도 공사한다. 1578년 (1575년 체코 신앙고백 이후) 부터 교회 정문 현관에 새겨져 있는 성서 말씀으로 지난 개혁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이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1장 24절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 (Slovo Páně zůstává na věky). 이후 1606년, 1609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묘비는 체코 형제단에 입교하였던 흐라데쉰 출신 귀족부인들의 유적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교회의 성구 보관실 문의 오래된 부조물도 귀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벽에는 14세기부터 희귀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있는 앱스(교회당 내부의 반원형 부분:역자 주)가 있었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못 박히고 부활하신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뒷편에는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하는 세 천사가 그려져 있다.

교회로부터 50미터 정도 내려오면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에 끌리멘트 교회 목사관 및 일반 주거지 건물이 있다.

II/10 성 하슈딸 교회

10. 성 하슈딸 교회당 (Kostel sv. Haštala)

성 아네슈까 수도원 앞 좁은 마당에서 남동쪽의 아네슈까 거리를 지나 하슈딸 광장(Haštalské náměstí)에 있는 성 하슈딸 교회당(라틴어로 Castellus)로 가자. 이 교회는 프라하의 제일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고, 나중에 바로크식으로 개축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외부와 내부가 14세기의 본래 고딕식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 교회당의 역사는 프라하의 루터파 교도들과 신 우트라퀴스트들의종교개혁 시대와 관련이 있다. 첫 후스파 시대에 양종성찬 교회에 이 교회당이 속하였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루터파 목사인 드라죠프의 M. 사무엘 마르띠니우스(M. Samuel Martinius z Dražova)가 이 곳에서 활동한다(1639년 색스니에서 망명 중 사망).

드라죠프의 마르띠니우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마틴 루터와 얀 후스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하였다. 반 합스부르크 봉기 시대에 그는 개혁파의 저항파 주동자들과의 협상에서 우트라퀴스트 교의회의 주요 고문(顧問)이기도 하였다. 결국 그가 1575년부터 체코 신앙고백의 내용을 소개하였던 프리드리히 팔츠끼(Fridrich Falcký)가 새롭게 왕으로 선출되면서 교의회와 왕 사이의 연락책도 맡게 되었다. 교리상으로 그는 루터파의 신학자로 분류되며 체코 형제단의 교리를 날카롭게 반박하였다.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로 프라하의 동료들과 함께 색스니의 피르나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망명 교회를 세운다. 1631년 가을 파사우(Passau)의 프라하 공격 때 몇몇 망명자들과 함께 귀향하고, 모스떼츠까 탑(Mostecká věž : II/7, IV/4)에서 처형당한 11명의 두개골을 모아 경건하게 장례식을 치룬다. 그리고 1632년 루터파 교회인 살바또르 교회(Kostel U Salvátora) 납골당에 안치시킨다 (슐릭 백작의 유골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르띠니우스가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을 때에 우트라퀴스트의 행정관으로 선출되었었지만 곧바로 색스니의 망명길로 돌아가야했다. 그 곳에서 신학자로서의 작업을 계속함은 물론 형제단과 얀 아모스 꼬멘스끼와도 논쟁을 계속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반개혁 당시 성 하슈딸 교회당은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고 1689년 바로크식으로 재건된다. 교회의 북쪽 측면 지붕은 가는 기둥들과 함께 프라하 고딕 건축물의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있다.
교회 건물을 뒤로 하고 하슈딸 광장에서 북쪽으로 리브나 거리(Rybná ulice)를 돌아 들로우하 거리(Dlouhá unice)를 만나서 왼편으로 돌아보자. 100미터정도 걸어 내려오면 레볼루츠니 거리(Revoluční třída)가 나온다. 신호등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진다; 50미터쯤 내려오면 오른편에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가 있다. 이 곳에서 작은 광장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개혁의 과거가 오늘에까지 남아있는 다른 교회가 서 있다.

II/9 성 시몬과 유다 교회

9. 성 시몬과 유다 교회당 (Kostel sv. Šimona a Judy)

스페인 회당(Španělská synagoga)에서 두쉬니 거리(Dušní ulice)를끼고 서쪽으로 계속 가면 우 밀로스르드니흐(U Milosrdných) 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에서 구시가 요세포프 구역 저지대에 설립되었던 성 시몬과 유대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원래 이 곳은 14세기부터 성 시몬과 유대의 고딕식 채플과 프라하 빈민들을 위한 보후슬라프 병원이 함께 있던 곳이기도 하다. 후스파 시대에 이 채플은 양종양종성찬을 시행하던 교회의 관리아래 놓이기도 하였다. 루돌프루돌프의 종교칙서 교부(1609. 7. 12) 이 후 우트라퀴스트 교의회(konzistoř)는 이 채플을 형제단(Jednota bratrska)이 사용케 하였다 (베들레헴 채플을 포함한 프라하의 다른 3개의 교회와 비슷한 경우). 체코 형제단은 채플을 대형 홀의 교회당으로 재시공하였으며(1615-20) 오늘날까지 그 홀 내부와 음향까지 잘 보존되어 오고있다. (지금도 주요한 축하 행사나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형제단은 재시공한 교회 옆에 독일 신자들과 서부로부터 온 발롱 개혁 교회 신자들을 위한 작은 교회를 하나 더 세웠다. 1620년 꼬네츠니에 의하여 축성 받았으며 오늘날 이 교회는 남아있지 않다.

빌라 호라 에서 개혁 교도들을 누르고 승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 2세는 형제단 교회를 1620년 크리스마스에 자선의 수사회에게 선물한다. 이들은 신축한 수도원과 병원에 교회를 연결하였다. 1751년 교회 외관을 바로크식으로 개축하고 이 모습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교회의 바로크식 오르간은 요세프 하이든과 W.A.모차르트가 연주하기도 하였다.) 우 밀로스르드니흐 거리쪽 교회의 동편에는 라틴어로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Dilige deum ex toto corde… – 주님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 시몬과 유대 교회당은 뒷 편 탑쪽으로 확장 건립된 수도원 산하 병원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18세가 말부터 프라하 최초의 진료소와 해부학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라섹의 소설 “F. L. Věk”으로 유명한 J. T. Held (+1851) 박사가 이 곳에서 과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이전의 수도원 산하 병원건물을 따라 우 밀로스르드니흐 거리를 죽 올라가서(북쪽으로) 코지 거리(Kozí ulice)와 만나는 교차로를 지나면 이 곳에 성 아네슈까 수도원(Klášter sv. Anežky)이 있다. 이 수도원의 역사는 체코 개혁 운동과 연관짓기 어려우므로 그냥 지나쳐가기로 하겠다.

프라하 최고(最古)의 고딕식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이 건물에 대한 기초 사실을 언급하도록 하자. 바츨라프 1세(+1253)의의 누나인 아네슈까 공주는 프란치스코 수녀회에 들어갔으며 이 곳에 1234년 소 프란치스코 수도회 옆에 여성 수도원을 건립한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수녀들을 위한 성 바르보라 교회와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교회가 세워진다. 후스파 시대에는 이 수도원이 해체되었으며 1626년 성 일리 교회로 옮겨지 옮겨지기 전인 1556년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이 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 이후에 수녀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1782년 수도원은 완전히 없어졌으며 차츰 창고와 프라하 빈민을 위한 집으로 용도가 변하기 시작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이 황폐했던 건물은 본래 모습으로 재건되기 시작 하였으며 오늘날 국립 문화재로서 보호 받으며 문화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II/8 두쉬니 거리의 성 두흐 교회

8. 두쉬니 거리의 성 두흐 교회당 (Kostel sv. Ducha v Dušní ulici)

살바또르 교회당 뒤쪽 왼편으로 돌아 두쉬니 거리로 가서 사거리를 가로질러 맞은편 낡은 성 두하 교회당까지 간다. 그 교회당은 지을 때 부터 이웃하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연결되었다. 후스파 혁명의 시대에 부분적으로 손상되었고 한때 폐쇄되었다.

이 교회당은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체코 종교개혁시대인 16세기부터 프라하의 독일 루터교인들의 예배모임을 위해 사용되었고 그들은 이 교회당을 멀지않은 곳에 자신의 교회당 살바또르(I/7)를 건축할 때 까지 사용하였다.

반종교개혁 이후 성 두흐 교회당은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넘어갔다. 교회당 입구 전면에 바로크 양식의 성 얀 네뽀무쯔끼(sv. Jan Nepomucký) 동상이 있었으며, 그것은 스따로미예스뜨스께 남미예스띠(구시가 광장)의 성 미꾸라쉬(sv. Mikuláš) 교회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1689년에 대화재 이후 교회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성 두흐 교회당 뒤쪽 스따레 미예스또(구시가)로 계속 걸어가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중세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이 나온다. 시내 가까운 곳의 유대인들이 후에 옛날 학교(Stará škola) 명패를 붙인 회당을 가졌다. (오늘날 뒤쪽 골목길 이름이 우 스따레 슈꼴리(U staré školy)이다.) 현재 유대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무어인 양식으로 후에 세워진 스페인 회당(1868년부터)이 이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