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사회] 일반 체코 국민의 가계비 내역

일반 체코 국민들의 생활비 수입과 지출내역

일반적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세자녀(5, 10, 12살)가 있는 가족의 경우 – 15만 꼬룬의 주택 융자금이 남아있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약 7십만 꼬룬에 팔고 그리고 소유한 주말별장을 15만꼬룬에 팔아 개인주택을 구입할 계획이 있어, 현재 3만꼬룬의 주택구입금(현찰)과 건축부금(2년불입, 총300,000꼬룬)을 불입하고 있는 가정의 월 생활비 내역 – 월 순 수입 20,000(꼬룬), 월세 2,000, 전기료 1,100, 가스 1,200, 하수도 및 오물세 600, 식대 4,000 의류비 2,000, 문화비 500, 건축부금 1,500, 교통비 2,550, 모바일 전화 800, 일반전화 600

시골의 자신의 주택에서 성장한 아들 한명과 함께 살고 있는 부부의 경우 – 대학 다니는 아들, 아들에게 월 6,000꼬룬 지출, 부부가 조그마한 가계를 운영하고 있어 수입은 변동적이며 자동차 할부금 지출하고 있다. – 월 순 수입 평균 30,000(꼬룬), 전기료 2,500, 가스 2,000, 하수도 및 오물세 1,000, 식대 6,000, 의류비 1,500, 문화비 300, 대출상환(할부금) 6,000, 교통비 2,000, 모바일 전화 1,500, 일반전화비 700

부모 집에서 부모와 동거, 학업을 하면서 일하는 여학생의 경우 – 앞으로 몇 년 안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길 원하다. 현재 경제적으로 주택부금에 가입할 형편이 아니지만 2-3년 안에 주택부금 가입을 목표로 저축을 한다. – 월 순 수입 14,000(꼬룬), 식대 4,000, 의류비 4,000, 문화비 900, 건축부금 1,000, 교통비 500, 모바일 전화 600

아기가 한명이 있고, 부인은 유아휴가, 조합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족의 경우 – 300,000꼬룬 정도의 아파트 수리를 계획하고 있음. 자동차 할부금 1년이 남아 있음. 현시가 650,000꼬룬의 주말별장이 있음. 3년 안에 두 번째 아기를 가질 계획. 부인은 당분간 직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 – 월 순 수입 20,000(꼬룬), 전기료 1,200, 가스료 1,500, 하수도 및 오물세 550, 식대 4,000, 의류비 2,000, 문화 800, 노후연금 500, 건축부금 1,500, 대출상환(할부금) 5,000, 교통비 2,000, 모바일 전화 500, 일반 전화 700

국가 조합 주택 소유의 월세(편집자 주: 국가 조합의 소유로 사용권자들이 월세를 내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5살 7살 두 자녀를 둔 가족의 경우 – 자신의 소유 주택을 원함. 오래된 자동차 소유. 건축부금을 마침, 대출 상환금 반년 남음. – 월 순 수입 30,000(꼬룬), 월세 2,500, 전기료1,200, 가스료 600, 하수도 및 오물세 700, 식대 4,000, 의류비 3,000, 문화비 1,500, 생활용품비 2,500, 건축부금 3,000 대출상환금 1,500, 교통비 2,000, 모바일 전화 1,500, 일반전화 600

국가 조합주택 소유의 월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연금 혜택자 노부부의 경우 – 시골에 주말 별장(편집자 주: 우리가 상상하는 호화별장이 아니라 시골의 오두막집으로 체코의 서민들을 위해 주말 시간과 여가를 가족들이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을 소유하고 있다. 오래된 자동차 한대 소유. 일년에 한차례 온천 휴양소(편집자 주: 의사들은 노인질병 치료를 위해 온천 휴양소 처방을 내린다)에 간다. 이를 위해 년 20,000꼬룬 예산을 세움. – 월 순 수입 14,000(꼬룬) 월세 1,500, 전기료 700, 가스료 1,200, 하수도 및 오물세 500, 식대 2,500, 의류비 700, 문화비 150, 교통비 2,000, 모바일 전화 500, 일반전화 400

성장한 두 자녀와 함께 시골의 주택에서 살고 있는 가족의 경우 – 두 부부는 5년 후에 연금수혜자가 된다. 그래서 저축을 하고 있다. 오래된 자동차 소유. 건축 부금을 4년 더 불입 해야 하며 30,000꼬룬 저축통장이 있다. 매년 휴가비로 30,000꼬룬 정도 예산을 세우고 있다. – 월 순수입 15,000(꼬룬), 전기료 2,500, 식대 3,500, 의류비 2,000, 문화비 500, 건축부금 1,000, 교통비 3,500, 모바일 전화 1,000, 일반전화 500

아기 하나가 있고 국가 주택조합 소유의 월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이혼녀의 경우 –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고 있으나 소도시에 살고 있어 기회가 적음. 아들의 교육비를 저축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부모가 감자와 야채를 돕고 있어 식비를 아낄 수 있다. 5년 만기의 건축 부금이 끝나 가고 있어 현금의 활용을 고민하고 있다. – 월 순 수입 8,000(꼬룬), 월세 1,200, 전기료 600, 하수도 및 오물세 550, 식대 2,500, 의류비 800, 문화비 300, 건축부금 300, 교통비 500, 모바일 전화 300

일반 월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자녀가 없는 남성의 경우 – 몇 년간 직장의 일에 전념할 계획. 봉급 인상을 기대하고 있고 5년안에 가정을 이루려고 함. 주택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저축을 하고 있다. 자주 해외 여행을 을 한다. 불필요한 지출이 없도록 신경을 쓰지만 적은 금액의 지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 월 순수입 40,000(꼬룬), 월세 10,000, 전기료 850, 가스료 1,200, 하수도 및 오물세 350, 식대 6,000, 의류비 7,000, 생활용품비 2,000, 문화비 700, 교통비 2,000, 모바일 전화 1,000

부인이 임신을 하고 주택 부금을 지불하고 있는 대도시의 부부의 경우 – 부인은 3년간 육아휴가를 원하고 남편은 외식과 자 자동차 연료비 지출이 많음. 아기가 출생하면 부인의 자동차를 구입할 예정임. 노후 보장을 위한 저축을 하고 있다. 불필요한 지출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있고 2년간 주택부금을 불입하였다 (13년이 남아 있음) – 월 순 수입 50,000꼬룬, 전기료 1,000, 가스료 2,000, 하수도 및 오물세 500, 식대 9,000, 의류비 5,000, 문화비 1,000, 생활용품비 5,000, 생명보험 1,200, 주택부금 7,000, 대출상환금 3,000, 교통비 3,000, 일반전화 700

[체코사회] 청소년 홈레스의 숫자증가

청소년 홈레스들의 숫자 증가

청소년 홈레스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30만 인구가 넘는 브르노에서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약 2500명이 등록되어있다. 이중에 약 천명이 홈레스이다.
“매년 홈레스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전형적인 홈레스나 아니면 사회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온다. 일부는 브르노 시내를 배회하다가 어떤 사람은 역에서 절도를 하고 그리고 대부분은 굶는다.” 브르노 말로미예지체 지역의 홈레스를 위한 센터 뻬뜨르 쉬몬이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형적인 청소년 홈레스들은 어린이집이나 감옥에서 나왔으며 초등학교 교육수준이거나 교육을 받지못하였다. 직업과 집이 없어 일부는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어있다.
“사업을 하던 대학졸업자들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가정이 파괴되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정신병원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혼자남는다.” 브르노시 담당자 이지 메이게르가 말했다.
“법으로 홈레스에 대한 어떤 규정이 없어 공식적인 통계조차 있지않다.” 브르노 므린스까에 있는 수용소 뻬뜨르 야노우쉑이 말했다.

II/12 나뽀지취의 성 베드로 교회

12. 나뽀지취의 성 베드로 교회 (Kostel sv.Petra Na Poříčí)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의 목사관으로부터 거리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바르비즈스까 거리(Barvířská ulice)의 끝과 만난다. 이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뻬뜨르 광장(Petrské náměstí)쪽으로 계속 간다. 왼편으로 뻬뜨르 광장이 나타난다. 이 곳에서 바로크식 둥근 지붕과 함께 흰 종탑이 눈에 띈다(이전에 구 뻬뜨르 묘지로 통하는 입구로 사용되었다).

성 베드로 교회는 오늘날 비스꿉스까 거리(Biskupská ulice) 로마네스크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에 서 있다. 이 바실리카는 1172년 블라디슬라프 1세(Vladislav I.+1173)가 프라하로 불러들였던 독일 상인들에 의하여 블따바 강 옆 나뽀지취 거리에 건립되었다(원래의 로마네스크 건물에서 두개의 백탑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13세기 중반까지 독일 기사 수도사들과 붉은별 십자군 수도사들의 두 수도원파가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었다. 까렐 4세 때에 이 교회와 더불어 나뽀쥐취 지역은 신도시 구역으로 편입된다. 그때까지의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고딕식으로 개축된다.

후스주의 때에 성 베드로 교회는 양종성찬 교회단 소속이었고, 후기에는 프라하 우크라퀴스트교회 소속이 되고, 교회를 부분적으로 재시공한다. 반개혁 세력들이 집권하자 성 베드로 교회에는 붉은 별 십자군들이 득세한다(이들의 문장은 비스꿉스까 거리 13번지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 정면 쪽에 나타나 있다). 교회는 요세프 개혁 때에도 십자군 수도원 소속이었다. 1874-76년 교회 정면부가 후기 고딕 양식으로 개축된다. 중앙 제단에 성 베드로와 함께 있는 예수 그림(V.V. Reiner 작품)과 왼편 탑 기둥 아래에 있는 성 베드로 조각상(M.V. Jäkl 작품)이 내부 바로크 양식화를 잘 대변 한다. 이 흰 교회건물과 종탑은 얼마 멀지 않은 현대식 프라하 중심지의 번잡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로서 우리의 두번째 도보여정은 끝이 난다. 비스꿉스까 거리에서 대략 100미터정도 내려오면 나뽀쥐취 거리가 나온다. 왼편으로 가면 전차 정류장이 나오고 이 곳에서 3번이나 24번을 타면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의 지하철역 무스텍(Můstek)으로 연결된다. – 그러나 우리는 계속 왼편으로 가서 뗴슈노프(Těšnov) 교차로를 지나 플로렌츠(Florenc) 지하철역으로 가서 B선을 타고 도로 무스텍역으로 가도록 한다.

II/11 끌리멘크 개혁교회

11. 끌리멘트 개혁 교회 (Evangelický kostel U Klimenta)

원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 회당이었던 성 끌리멘트(sv. Kliment) 교회는 프라하 근교의 우예즈드(Újezd) 마을에 있었다. 우예즈드는 블라디슬라프 1세가 1165년 독일인 이주자들도 소집한 곳이기도 하다. 까렐 4세 집권 당시 이 마을은 프라하 노베 므녜스또(Nové Město) 구역 (신시가)으로 통합된다. 소 교회당은 고딕 양식의 교회로 공사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건물 후진(後陣)의 둥근 천장과 그 안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대화재를 겪고 교회는 완전한 고딕식 건축물로 재건된다. 본당 회중석(會衆席)의 아치는 야겔론 왕조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혁시대 이전 1407년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의 목사는 얀 쁘로띠바(Jan Protiva)로, 베들레헴 채플의 첫 담임 목사(1394-96)이기도 하였다. 이는 얀 후스보다도 6년 앞 선 것이다. 위클리프 교리 논쟁때에는 반대파에 가담하였고, 이는 곧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반 후스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하에서 후스파가 승리하게 되자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교회는 계속하여 양종성찬 목사들에 의하여 움직였다.

후스파 시대 후기에는 교회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나뽀지취(Na Poříčí) 거리의 성 뻬뜨르 교회의 우크라퀴스트 성직자들도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다. 빌라호라 전투 이후 양종성찬파 마지막 목사였던 또비아쉬 알베르뚜스(Tobiáš Albertus)는 1621년 12월 프라하에서 추방당한다. 교회는 재가톨릭화되며 반개혁주의 때에는 이 교회의 의미도 하락하게 된다. 요세프 개혁 때 교회와 그 옆에 있던 묘지 모두가 없어지고 곡물 저장 창고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프란띠셱 요세프 1세에 의한 종교 관용령(1861년 4월 8일)이 내려지기 전인 1850년 프라하 관용 교회는 아주 황폐해진 이 교회 건물을 27.500 즐라띠를 주고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기금모금과 끌리멘트 교회의 새로운 일들은 특히 의욕적이었던 베드지흐 빌렘 꼬슈트(Bedřich Vilém Košut) 목사가 담당하였다. (그때까지 개혁교회는 말라 스뜨라나(Malá Strana)의 예수회 정원에 있는 성 미할 구 예수회 수도원(sv. Michal) 건물의 홀을 빌려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현재 체코 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다.)

B. V. 꼬슈트(B.V. Košut)는 관용 교회 목사 국내 세대에 속한다. 체르닐로바에 있는 교회 출신이고 슬로바키아에서 공부하였다(모드라에서 신학을, 쁘레슈뻬르크에서 법을 공부하였다). 1847년 프라하 개혁교회의 목사로 임명되면서 신념이 확고한 목사 및 조직책으로서 (심지어 20명의 가톨릭 신부들을 포섭하기도 한다) 활동한다. 1848년에는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프라하 시에 사용되지 않던 구시가의 성 미꿀라쉬 (sv. Mikuláš) 교회당 건물을, 이후에는 신시가지에 있는 성 까렐 보로메이스끼 교회당 (sv. Karla Boromejského)을 사용토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1850년에는 개인 소유주로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가 설교할 때나 강연, 혹은 체코 형제 전도사지에 기고할 때도 체코 개혁의 정신적 유산을 불러 일으키곤 하였다. – 이르하지의 미할 학교의 루터교 교수인 Lic.J.루쥐츠까 (Lic. J. Růžička)와 함께 체코 관용의 교회의 연합과 체코 개혁교회 신학부 설립에 힘썼다. – 그리고 그는 사명감과 애국에 대한 열망으로 구교도 세력과 세속적 권력에 대항하였다. 1852년 체포되어 1853년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로 이송된다. 1857년 출소한 이후 프라하로의 귀향이 금지되어 포리니에서 개혁 목사직 수행을 받아들인다. 1861년 체코 개혁 교회 내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정식 인준은 받지 못하고, 1891년 독일에 있던 아들 곁에서 숨을 거둔다. – 꼬슈트 이래로 끌리멘트 교회에서는 뛰어난 목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중 한 명이 1894년부터 활동하였던 요세프 소우첵 (Dr. Josef Souček) 박사로, 두 개혁 교회가 연합된 이 후 1918년 첫 체코 형제개혁교회 대표 모임의 장로로 선출된다.

1918년부터 끌리멘트 교회는 체코 형제개혁 교단의 소속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1975-80년까지 프라하시의 도움을 받아 고고학 연구팀과 함께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 된다. 1990년 오늘날의 온화한 형태로 건물 정면도 공사한다. 1578년 (1575년 체코 신앙고백 이후) 부터 교회 정문 현관에 새겨져 있는 성서 말씀으로 지난 개혁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이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1장 24절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 (Slovo Páně zůstává na věky). 이후 1606년, 1609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묘비는 체코 형제단에 입교하였던 흐라데쉰 출신 귀족부인들의 유적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교회의 성구 보관실 문의 오래된 부조물도 귀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벽에는 14세기부터 희귀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있는 앱스(교회당 내부의 반원형 부분:역자 주)가 있었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못 박히고 부활하신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뒷편에는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하는 세 천사가 그려져 있다.

교회로부터 50미터 정도 내려오면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에 끌리멘트 교회 목사관 및 일반 주거지 건물이 있다.

II/10 성 하슈딸 교회

10. 성 하슈딸 교회당 (Kostel sv. Haštala)

성 아네슈까 수도원 앞 좁은 마당에서 남동쪽의 아네슈까 거리를 지나 하슈딸 광장(Haštalské náměstí)에 있는 성 하슈딸 교회당(라틴어로 Castellus)로 가자. 이 교회는 프라하의 제일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고, 나중에 바로크식으로 개축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외부와 내부가 14세기의 본래 고딕식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 교회당의 역사는 프라하의 루터파 교도들과 신 우트라퀴스트들의종교개혁 시대와 관련이 있다. 첫 후스파 시대에 양종성찬 교회에 이 교회당이 속하였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루터파 목사인 드라죠프의 M. 사무엘 마르띠니우스(M. Samuel Martinius z Dražova)가 이 곳에서 활동한다(1639년 색스니에서 망명 중 사망).

드라죠프의 마르띠니우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마틴 루터와 얀 후스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하였다. 반 합스부르크 봉기 시대에 그는 개혁파의 저항파 주동자들과의 협상에서 우트라퀴스트 교의회의 주요 고문(顧問)이기도 하였다. 결국 그가 1575년부터 체코 신앙고백의 내용을 소개하였던 프리드리히 팔츠끼(Fridrich Falcký)가 새롭게 왕으로 선출되면서 교의회와 왕 사이의 연락책도 맡게 되었다. 교리상으로 그는 루터파의 신학자로 분류되며 체코 형제단의 교리를 날카롭게 반박하였다.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로 프라하의 동료들과 함께 색스니의 피르나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망명 교회를 세운다. 1631년 가을 파사우(Passau)의 프라하 공격 때 몇몇 망명자들과 함께 귀향하고, 모스떼츠까 탑(Mostecká věž : II/7, IV/4)에서 처형당한 11명의 두개골을 모아 경건하게 장례식을 치룬다. 그리고 1632년 루터파 교회인 살바또르 교회(Kostel U Salvátora) 납골당에 안치시킨다 (슐릭 백작의 유골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르띠니우스가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을 때에 우트라퀴스트의 행정관으로 선출되었었지만 곧바로 색스니의 망명길로 돌아가야했다. 그 곳에서 신학자로서의 작업을 계속함은 물론 형제단과 얀 아모스 꼬멘스끼와도 논쟁을 계속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반개혁 당시 성 하슈딸 교회당은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고 1689년 바로크식으로 재건된다. 교회의 북쪽 측면 지붕은 가는 기둥들과 함께 프라하 고딕 건축물의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있다.
교회 건물을 뒤로 하고 하슈딸 광장에서 북쪽으로 리브나 거리(Rybná ulice)를 돌아 들로우하 거리(Dlouhá unice)를 만나서 왼편으로 돌아보자. 100미터정도 걸어 내려오면 레볼루츠니 거리(Revoluční třída)가 나온다. 신호등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진다; 50미터쯤 내려오면 오른편에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가 있다. 이 곳에서 작은 광장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개혁의 과거가 오늘에까지 남아있는 다른 교회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