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9 성 시몬과 유다 교회

9. 성 시몬과 유다 교회당 (Kostel sv. Šimona a Judy)

스페인 회당(Španělská synagoga)에서 두쉬니 거리(Dušní ulice)를끼고 서쪽으로 계속 가면 우 밀로스르드니흐(U Milosrdných) 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에서 구시가 요세포프 구역 저지대에 설립되었던 성 시몬과 유대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원래 이 곳은 14세기부터 성 시몬과 유대의 고딕식 채플과 프라하 빈민들을 위한 보후슬라프 병원이 함께 있던 곳이기도 하다. 후스파 시대에 이 채플은 양종양종성찬을 시행하던 교회의 관리아래 놓이기도 하였다. 루돌프루돌프의 종교칙서 교부(1609. 7. 12) 이 후 우트라퀴스트 교의회(konzistoř)는 이 채플을 형제단(Jednota bratrska)이 사용케 하였다 (베들레헴 채플을 포함한 프라하의 다른 3개의 교회와 비슷한 경우). 체코 형제단은 채플을 대형 홀의 교회당으로 재시공하였으며(1615-20) 오늘날까지 그 홀 내부와 음향까지 잘 보존되어 오고있다. (지금도 주요한 축하 행사나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형제단은 재시공한 교회 옆에 독일 신자들과 서부로부터 온 발롱 개혁 교회 신자들을 위한 작은 교회를 하나 더 세웠다. 1620년 꼬네츠니에 의하여 축성 받았으며 오늘날 이 교회는 남아있지 않다.

빌라 호라 에서 개혁 교도들을 누르고 승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 2세는 형제단 교회를 1620년 크리스마스에 자선의 수사회에게 선물한다. 이들은 신축한 수도원과 병원에 교회를 연결하였다. 1751년 교회 외관을 바로크식으로 개축하고 이 모습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교회의 바로크식 오르간은 요세프 하이든과 W.A.모차르트가 연주하기도 하였다.) 우 밀로스르드니흐 거리쪽 교회의 동편에는 라틴어로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Dilige deum ex toto corde… – 주님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 시몬과 유대 교회당은 뒷 편 탑쪽으로 확장 건립된 수도원 산하 병원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18세가 말부터 프라하 최초의 진료소와 해부학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라섹의 소설 “F. L. Věk”으로 유명한 J. T. Held (+1851) 박사가 이 곳에서 과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이전의 수도원 산하 병원건물을 따라 우 밀로스르드니흐 거리를 죽 올라가서(북쪽으로) 코지 거리(Kozí ulice)와 만나는 교차로를 지나면 이 곳에 성 아네슈까 수도원(Klášter sv. Anežky)이 있다. 이 수도원의 역사는 체코 개혁 운동과 연관짓기 어려우므로 그냥 지나쳐가기로 하겠다.

프라하 최고(最古)의 고딕식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이 건물에 대한 기초 사실을 언급하도록 하자. 바츨라프 1세(+1253)의의 누나인 아네슈까 공주는 프란치스코 수녀회에 들어갔으며 이 곳에 1234년 소 프란치스코 수도회 옆에 여성 수도원을 건립한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수녀들을 위한 성 바르보라 교회와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교회가 세워진다. 후스파 시대에는 이 수도원이 해체되었으며 1626년 성 일리 교회로 옮겨지 옮겨지기 전인 1556년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이 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 이후에 수녀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1782년 수도원은 완전히 없어졌으며 차츰 창고와 프라하 빈민을 위한 집으로 용도가 변하기 시작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이 황폐했던 건물은 본래 모습으로 재건되기 시작 하였으며 오늘날 국립 문화재로서 보호 받으며 문화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II/8 두쉬니 거리의 성 두흐 교회

8. 두쉬니 거리의 성 두흐 교회당 (Kostel sv. Ducha v Dušní ulici)

살바또르 교회당 뒤쪽 왼편으로 돌아 두쉬니 거리로 가서 사거리를 가로질러 맞은편 낡은 성 두하 교회당까지 간다. 그 교회당은 지을 때 부터 이웃하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연결되었다. 후스파 혁명의 시대에 부분적으로 손상되었고 한때 폐쇄되었다.

이 교회당은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체코 종교개혁시대인 16세기부터 프라하의 독일 루터교인들의 예배모임을 위해 사용되었고 그들은 이 교회당을 멀지않은 곳에 자신의 교회당 살바또르(I/7)를 건축할 때 까지 사용하였다.

반종교개혁 이후 성 두흐 교회당은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넘어갔다. 교회당 입구 전면에 바로크 양식의 성 얀 네뽀무쯔끼(sv. Jan Nepomucký) 동상이 있었으며, 그것은 스따로미예스뜨스께 남미예스띠(구시가 광장)의 성 미꾸라쉬(sv. Mikuláš) 교회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1689년에 대화재 이후 교회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성 두흐 교회당 뒤쪽 스따레 미예스또(구시가)로 계속 걸어가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중세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이 나온다. 시내 가까운 곳의 유대인들이 후에 옛날 학교(Stará škola) 명패를 붙인 회당을 가졌다. (오늘날 뒤쪽 골목길 이름이 우 스따레 슈꼴리(U staré školy)이다.) 현재 유대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무어인 양식으로 후에 세워진 스페인 회당(1868년부터)이 이 자리에 있다.

[살며 생각하며] 블타바는 흐르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고

나눔터 34호 (2004년 2월)

블타바는 흐르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고

1월 30일 블타바는 220년 동안 감추었던 역사를 드러냈다. 현재 까렐 다리 중간 쯤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루드밀라 복사본의 위치에는 원래 양쪽에 천사상이 있는 바츨라프 동상이 있었다. 그런데 1784년 대홍수 때 다리의 교각이 손상되면서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이 무너져 내렸었다. 강에서 건져올린 이 후 지금까지 그 동상은 라피다리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그 동상의 목과 팔이 없는 오른쪽 천사 진본이다. 이 바츨라프 동상의 현재 양쪽 천사들은 실종된 부분을 당시에 복원시켜 놓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재 작년 블타바 강의 대 홍수가 강바닥을 쓸고 내려가면서 드러난 이 조각상을 까렐 다리 교각 보수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발견하였다. 홍수에 휩쓸려 내려가듯 시간에 밀려 살가고 있음을 느끼는 새해 첫 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체코소식이었다.

아이러니 하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진본을 감추고 흐르던 강물이 스스로 그것을 까렐 다리에게 되돌려준 셈이다.  감추고 드러내며 흐르는 것이 비록 어디 강물뿐인가? 시간 역시 때론 서서히 장강(長江)처럼 흐르며 역사의 진실을 감추고 때론 폭포처럼 급격하게 흐르며 그것을 드러낸다. 인간을 누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였는가? 인간은 시간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미물일 뿐 이다.

요즈음 시간이 급하게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 흐름을 바라보면 어지러워 구토가 나려고 한다. 인간의 창의적인 스피릿은 우주의 시공간을 비웃으며 화성에 꽂히고, 인터넷은 나라와 민족과 인종과 문화의 벽을 뚫어 시간을 더욱 급격히 흘러가게 한다. 시간의 흐름의 정도와 그 크기는 실로 막대하여 감히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흐름은 소용돌이 되어 인간 존재도 물처럼 허물며 서서히 모든 것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해산이 가까이 다가 올수록 고통은 점점 빠르고 급하게 나타나듯 시간의 흐름이 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드러나는 때가 가까이 다가 온 것임을 의미한다. 그날은 인간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흐름은 굽은 것을 곧게 하고 높은 것을 낮게 하고 낮은 곳을 돋아주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호통을 치던 자, 그가 바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부끄러운 자임을 드러냈다. 우리들의 삶 모두는 우직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우리 자신은 잘 안다. 양심이 이미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워 하는 이들은 그 흐름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갖은 술수를 부린다. 아무리 그래도 진위를 드러내는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쉼 없이 우직하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무엇이 참이고 허상인지 자기 자신부터 성찰할 일이다. 지금 소중히 여기는 것이 헛된 것은 아닌지, 헛되게 생각하는 것이 혹시 소중한 것이 아닌지 존재의 밑둥부터 철저히 자기 자신을 뒤져볼 일이다. 우리들이 이 멀고 먼 외국 땅에 까지 와서 해야 되는 우리들의 일들이 우리 자신을 왜곡시키고 파멸시키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긴급하고 시급한 일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참된 자기를 가꾸어가는 일이다. 지체할 일이 아니다. 오늘도 블타바는 흐르며 220년 전의 진실을 드러낸다.

[살며 생각하며] 세드미츠까

2004년 1월 33호

세드미츠까(Sedmicka)


새해들어 물가가 치솟는다. 체코인들이 유럽 연합인이 되는 길목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이다. 유로를 체코통화로 사용하려면 국가부채가 국내 총생산(GDP)의 3퍼센트 미만이 되어야 하기에 현재 6퍼센트가 넘는 부채 비율을 낮추기 위해 외국 기업을 적극적으로 투자 유치하면서 다른 한편 세금을 높이고 최대한 국민의 사회보장을 줄이는 정책을 정부가 펴고 있다. 그야말로 국민 전체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다. 필자는 정치와 경제에 문외한이어서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형편이 아니지만 작금의 체코 사회를 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도시락도 싸가지고 올 형편이 못될 만큼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담임 선생님이 점심값으로 준 그 돈으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하고 왔다는 한 연예인의 회고담이 머리에 떠오른다.
“희망을 기대할 만한 고통인가?” 체코 국민들은 당연히 불안해 한다. 노바 텔레비전의 인기 있는 정치 토론 일요일 프로그램 세드미츠까가 새해 첫날에 특별히 편성되었다. 수상 슈삐들라와 야당 시민당 당수 또뽈라넥이 토론자로 나왔다. 세드미츠까는 한 주간의 뉴스의 초점을 주제로 설정하여 매주 일요일 선정된 정책 당사자들인 여야 정치인들의 토론 프로그램이다. 토론과 농담을 좋아하는 체코 국민들은 한가한 일요일 오후 소파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며 짜릿한 토론을 즐긴다. 일요일 정규 프로그램도 아닌 새해 첫날에 그것도 정부와 야당의 대표들이 나와 공방을 벌리니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토론 주제의 하나가 당연히 높은 세금과 물가 상승의 경제문제였다. 토론 중에 사회자가 국민들에게 높은 세금의 짐을 맡기면서 의회 의원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정치가들의 윤리의식을 질타하였다. 그 예로 의원 회관에서 부과세 없는 값싼 음식을 먹는 것에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의식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수상 슈삐들라는 의회 의원에 대한 세금부과를 정부가 법안으로 올렸지만 의회 특히 야당인 시민당이 반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공박을 받으며 쩔쩔매던 사민당 당수 또뽈라넥은 사회자가 제시한 의원 회관의 메뉴판을 보고서야 의원 회관의 밥값을 아는 눈치였다. “하기야 그렇게 지위가 높은 양반이 자기 돈으로 밥을 사먹어 본적이 있겠는가?” 한국인의 경험으로 대충 때려잡아본 필자의 눈치이다.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이 프로그램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사회적 기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필자인 본인은 체코 사회와 그 인식의 변화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별로 애정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자국민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인식이 저 정도인데 외국인들에게야 하물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외국인의 소외감과 체코인과 그 사회에 대한 애정이 함께 할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인생의 황금시절에 외국인으로 살면서, 냉소주의와 개인주의로 도피하여, 자신의 생이 황폐해 지는 것을 더 더욱 바라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물가가 치솟고 자국민의 사회보장 혜택도 줄이는 마당에 외국인들에 대한 배려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중의 어려움에 시달릴 새해에 체코의 한국인들이 서로를 존중해 주는 마음과 나아가 체코의 다른 외국인들과 뜻 있는 체코인들과 연대를 하며 소외감을 극복하는 것이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며, 동시에 우리들이 살을 맛 대며 살아가는 체코 사회와 그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갖는 길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으며 인간답게 성장한다.

갑신년 새해 독자들의 가정에 만복을 기원하며, 더 밝고 아름다운 체코의 한인 사회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