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갈 길

  • 연합 예배 (2004년 03월 07일)
  • 눅 13:31-35
  • 설교자: 드로빅

<본문>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복음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 조금은 의심을 하게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헤롯에 대해 경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고가 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복음서 다른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논쟁을 한 사람들이며 예수를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논쟁하질 않고 그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예상되는 헤롯의 위협을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헤롯을 쓸모없는 인간의 의미로 여우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최강의 동물이며 헤롯을 임명한 로마 권력의 상징인 사자와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유머가 돋보입니다.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떠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가지고온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헤롯에게 예수가 한말을 일러바칩니다.

분명히 헤롯의 권위를 무시하였다고 일러바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스스로 준비한 길을 갑니다.

그것을 이룰 자신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길에 초청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이 길을 이해할 것을 요청 받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에게 이 길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스로 악의 길을 피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마음이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취하는 우리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목적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우리들이 실패할 때, 우리들은 길을 잃습니다

아니면 그의 길을 모양만 본뜨게 됩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누가복음에서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주 의식적으로

예수님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지 잘못된 재판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의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쉬운 길이었으며, 인간으로서 내적 투쟁과 심각한 질문과 의심에 대한 대답을 찾을 필요도 없었던 그런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다른 통치자에 대한 신뢰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신뢰, 그의 사명에 대한 신뢰의 결과가 죽음까지 걸어가야 했던 그의 길이었습니다.

그를 기다렸던 불행한 종말은 헤롯에 달려있었고 갈릴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극장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보는 “영화의 끝”이란 자막글자 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이 완성한 그 길로 나아가길 원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시는 길

우리 개인뿐 아니라 우리 모든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꼭두각시 인형들이 아닙니다.

미리 결정된 대로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해 오늘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이와 같이 “아니오”하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라 말하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면 그에 뒤따르는 행동과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의 “아니오”때문에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현존안에 살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길을 완성하셨고 악에 굴복하지 않으셨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으셨으며 그러나 홀로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안에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오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영광 안에서 종려주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축복의 왕이여 호산나” 찬양을 하였던 그들과 연합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의 헤롯들의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며 그의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내일 모래 우리의 길에 고통과 죽음과 내적 갈등과 의심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연약한 믿음과 의심으로 뒤덮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

  • 연합 예배 (2004년 02월 01일)
  • 눅 5:1-11
  • 설교자: 이종실

<본문>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본문>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계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언뜻보기에 예수님은 무리를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존경하는 많은 무리들을 위해 거기서 서계신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이 열심히 바라본 사람들은 후에 제자로 사명을 받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군중들을 무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에 타고 해변에서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고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베드로와 그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게네사렛 해변에서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바라보던 게네사렛 해변의 광경을 오늘 본문은 소상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그들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5:5)여기서 우리는 무익한 노동의 시간을 보낸 그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부로서 지식과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고기잡는 일에 관한한 전문가들이 온 밤을 함께 일했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는 비었고  얻은 것은 없었습니다.

실패후의 느껴지는 그들의 세상은 공허하였고 그들의 육신과 마음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육신을 끌고 그들은 내일 출항을 위해 그물을 씻고 준비해야 했습니다.

해변가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그 동료들의 광경을 어촌의 한 풍경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군중들 사이에서 일어날 이적과 기적들 그리고 다른 한편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어떤 호기심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일들에 열중하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인 이들 어부들의 관심이 그렇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활동에 동참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목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두 배와 그들 일행을 보았고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빈 배의 의미와 죽도록 고생했지만 결과 없는 일로 낙담한 모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지금 그가 처한 현실 모두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을 무시한 채 그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5:3)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탔습니다.

해변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질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들의 일을 잠시 멈추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정말 운수 나쁜 날 때문에 그는 다음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어 일할 준비를해야 했습니다.

그는 빨리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기잡이에 성공을 하였더라면 아마도 예수님의 요청에 더 쉽게 응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가 그 청을 들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수 있도록 그는 베드로의 협조를 부탁하였고 베드로는 승락하였습니다.

그 순간 이미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사람들의 루머를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베드로의 장모가 고열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갔고 그리고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었다”라고 말합니다. (4:39)

베드로는 이미 열병을 꾸짖고 치료한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개인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예언자, 권위있는 선생,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장모의 경우로 분명히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를 움직이게한 이유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유는 언급되어 있지않지만 베드로는 준비하는 일을 바로 멈추고 예수님의 청에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청하는 대로 베드로는 해변에서 약간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흐르는 물에 배가 떠내려가거나 움직이지 않고 예수님이 군중들을 향해 잘 말씀하시도록 배의 위치를 유지하는데 온 신경을 써야 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능력의 말씀을 듣는 중에 그는 동의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우연히 예수님 매우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이 끝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때 베드로의 역할도 끝났습니다.

베드로는 해변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내일 일을 준비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는 그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몸과 마음이 심하게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음날 고기잡이를 위해 그는 그물을 청소하고 아직 수리할 일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리들을 위해 배를 띄울 것을 요청하며 베드로의 일을 방해하였던 예수님이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5:5a)

한국속담으로 비유하자면 “선생이여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마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다시말씀드려 그 일은 내가 전문가니 그 일을 당신이 어떻게 잘 알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도 예수님이 잘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역시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매우 유순하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그 말씀에 복종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소용없다고 느끼는 것을 따라 할 수 없고 특별히 완전히 소용없다고 판명된 그런 확신아래에서는 더욱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경험과 지식과 믿음과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내면에 강하면 강할수록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욱 더 끓어 올랐습니다.

이들 요소들은 그것은 헛된 노력임을 확신시킵니다.

다시 더 우리가 더 고통스럽기 위해 아무 결과 없는 일이 기다리는 깊은 바다로 우리가 나아가야만 합니까? 베드로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그에게 중요한 것, 그가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옆으로 미루어둡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선생이여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한국어 성경의 번역에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 하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베드로의 말속에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믿져 보아야 본전이라는 아주 불성실한 믿음의 형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고집, 확신, 경험과 전통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방해가 될 때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과 경험이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드리는 이 예배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서로 깨닫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아주 불성실하고 소극적인 복종이었지만 그 복종의 결과는 베드로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동료의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를 끌어올리니 배에 가득차서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가장 자신하는 일, 거기에서 예수님은 그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함으로서 이세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자신의 세상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이기 때문에 지금 그의 눈앞에 일어난 이 광경에 대해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이 아주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것 이었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할렐루야” 인사로 예수님과 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부여서 그가 그 사건을 그렇게 쉽게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는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베드로의 삶에 강력하게 개입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여가 아니라 주여라고 부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군중들에게 설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베드로의 삶 안에 개입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 용서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후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것이라 합니다.

주님에 의해 용서받은 사람, 그의 생명 안에 참여한 사람은 주님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정한 복음을 발견합니다.

용서받은 사람,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의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생명에 인도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신자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라는 고백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도록 그리고 결국 예수님의 초청을 따르도록 그리고 제자가 되도록 하는 첫 단계가 됩니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일상의 세상의 삶, 이기적인 우리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삶,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는 삶의 길을 잠시 포기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 연합 예배 (2004년 01월 04일)
  • 요 1:10-18
  • 설교자: 드로빅

<본문>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개역한글판 요 1장)

<설교>

여러분들에게 역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우리의 기쁨이나 염려에도 두려움에도 희망과 어떤 계획에도 전혀 말씀을 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까?

새해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누구를 신뢰해야 하며 무엇과 싸워야 할 것 인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권면처럼 들리도록 하나님은 말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말의 홍수 사이에서 그리고 많은 말들과 생각들 사이에서 맑은 종소리처럼 요한복음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우리들 곁에 두지 않았고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상상하고 실제로 느끼고 있는 하나님의 침묵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통치하고 어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모든 감추어진 말들을 극복합니다.

그러나 우월감이나 도덕적인 것으로 극복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한 말이 아닙니다.

다른 말들과 우위를 다투는 그런 경쟁을 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압도하기를 원치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었고 우리들 가운데 거주하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날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성탄절의 증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축하를 하는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겸손하게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평범하게 겸손하게 오셔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누구 그리고 그 무엇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되셨고 겸손하게 가난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불분명한 것이 보입니다.

첫번째로 아기가 태어난것입니다.

마치 아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무기력함이 숨겨져있습니다.

무기력한 아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한 아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 단어 „아니오“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늘이 침묵한다고 불평합니다.

오래전에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고 우리는 느낍니다.

아브람, 이삭, 야곱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약속하셨고 명령하셨고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많은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하지않으십니다.

지금 육신이 되신 말씀만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과 연결되고 완전히 새롭게 준비되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준비하였습니다.

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기쁨과 염려와 문제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인생의 문제들에 코멘트도 지시도 명령도 하지않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약한자들과 함께 하시기에 오직 인간의 한 단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종이 아니라 나의 자녀입니다.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부모입니다. 나의 말에 응답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때가되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를 향하며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셨고 스스로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연설이 되지 않도록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밝견하도록

우리들이 자신의 문제에 응답하도록

삶의 이유를 갖도록

깨달음과 은혜의 샘에 도달하도록

인간의 말과 약속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보장을 하지않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곁에 왔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힘이 없어 우리들의 삶에 그의 가까이 오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와 함께 무언가 시작할 흥미를 갖지않고있으며

다른 인간의 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계속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삶의 문제로부터 끌어내어 다른 삶의 길을 보여주고 그것을 막아주겠다는 약속을 해줄 강한 능력자를 희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존중합니다.

인간의 말이 많음을 압니다.

인간의 말로 우리들은 기쁨과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신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들은 야곱과 구약의 시대처럼 인종적으로 청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육신이 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형제 자매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모든 마음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제 7 호 (2003년 가을호)

Editorial

The Diaconia and the Suffering of Terezin

CZECH BRETHREN ABROAD
– Bjelisevac
– 200 Years in Zelow
– Czech Brethren in the Ukraine
– The Presbytery of Southern Bohemia
– Fire in the Protestant Church in Rumburk
– A Dwelling of God among the People
– Dedication fo New Church in Letohrad, May 25, 2003

NEWS FROM PROTESTANT THEOLOGICAL FACULTY
– Protestant Theological Faculties Meet in Prague
– Academical honourings
– Conference of the friends of the faculty
– Theologians Focus on Human Rights
– To study in Prague
– Prof Broz dies

PERSONALIA
– Rev. Silarova Retires

The New Synodal Council

100 Years Czech Diaconia
(By Zdenek Barta, Chairman of the Board of Diaconia)

Welcome to the Czech Republic

Visitors from Scotland in Miroslav
(By Ondrej Titera, Pastor of the Miroslav congregation: cce.miroslav@volny.cz)

Im Momoriam
– Dr. Pavel Simek
– Pastor Jiri P. Storek

이종실 목사 체코 라디오 대담방송 출연

체스까 라디오 1 – 라디오저널 초청손님과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마르띤 펜드리흐와 이종실과의 대화 (2003년 10월 19일 저녁9시)

들어가는 말(펜드리흐)

라디오저널 청취자 여러분께 마르띤 프렌드리흐 인사드립니다. 프라하 야곱의 사다리교회 (얼마전 까지 카리스마가 있는 이지
슈토렉 목사님께서 활동한 교회입니다.)에서 프라하 개혁교인들뿐 아니라 남한의 대한민국 공화국의 기독교인들이 모입니다. 스튜디오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종실 목사님을 초청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목사님.

– 제가 이목사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나요?

예 정확합니다.

-한국 어떤 도시에서 오셨나요?

수도 서울에서 왔습니다. 저는 광산촌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체코에 어떻게 오셨나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인들이 무역관계로 먼저 이곳에 오셔서 그래서 그분들을 위해서 오셨나요?

대한예수교 장로교회는 외국에서 일하는 자신의 교인들을 위해 목회자를 파송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이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회자를 찾은 뒤 독립교회가 됩니다. 저는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교회들의 경험을
교류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라하에 왔습니다.

– 체코의 한국인들이 모국어 예배를 원합니까?

한국인들은 모국어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가족들이 외국생활에서 많은 스트레스가 있어 교회에서 고향 같은 느낌을 받고싶어 합니다.

– 우리나라에서 한국인들이 대체로 어떤 사업을 하십니까?

다양한 상품의 수입과 수출을 합니다.

– 이목사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목사로서 일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직업이 있습니까?

예, 목사로만 일하고 있습니다.

– 남한에 개신교회 교세가 두 번째로 강하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가 28%이고 개신교가 18% 카톨릭이 6%
비종교인들이 절반이 조금 못된다(46%)고 하는데 남한에서 개신교회가 그렇게 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교사들의 활동의
결과입니까?

선교사들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첫번째 순교자가 영국 선교사였고 몇몇 미국 선교사들이
풍토병으로 죽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의 2, 3세대 후손들이 지금도 한국의 생활 습관으로 일하면서 살고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한국에서 개신교회가 매우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요인은 당시 민족의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던 18, 19세기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과 사상이 쇠약해져 세계의 변화를 이해할 수도
그리고 그것에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국가종교였던 유교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응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기독교를 민족의 구원자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원래 한국인들은 불교신자들이 대부분이지 않았습니까?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불교신자들과 어떻게 관계합니까? 유럽 에큐메니칼과 같은 그런 노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두 종교간의 차이로 적대적입니까?

관용이 없는 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체코인들이 공산독재를 겪고 있을 때 남한사람들은 군사독재를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불교신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이 함께 인권을 위해 독재자와 싸웠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인권을 위한 종교간의 연대와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협력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북한에 기독교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에 대한 뉴스가 있습니까? 친척이나 아니면 아는 분이 북한에 계십니까?

죄송한데 정확한 뉴스가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아는 분도 친척도 계시지 않습니다.

– 꼬빌리시의 프라하 한인 공동체 교인 수는 얼마나 됩니까?

50여명 재직 인원에 40여명이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합니다.

– 꼬빌리시 교회에 함께 모이는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저와 가족이 꼬빌리시 교회에 나간 것은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공동체가 그 교회에 생겨난 것은 2000년도 였습니다.

– 한국 기독교인들이 프라하에서 다른 예배 장소를 찾고 있고 그리고 다른 도시에도 아마 있는 것 같은데, 그 분들 가운데 오순절 교인들도 있다고 알고있는데요. 그들과 만나거나 아니면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개혁신학부 박사과정 학생으로 공부하기 위해1993년에 프라하에 왔을 때 20여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목회자 없이 매주
모였습니다. 녹음테이프로 설교를 듣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로 회피할 수 없어 목회자를 찾을 때 까지 설교를 하기로
그분들과 의논을 했습니다. 1년 만에 체코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길 원하는 오순절 교회의 목회자를 찾았습니다. 이때 교인들은 우리들의
관계를 끝내지 않고 저를 선교사로 체코 교회에 파송하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교회의 거의 모든 교인들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프라하로 왔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관계는 점점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이끄는 말 (펜드리흐)

라디오 저널 청취자 여러분, 초대손님 프로그램 입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 이종실 목사님과 체코 꼬빌리시교회의 한국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얼마전에 꼬빌리시 교회 이지 슈토렉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은 구약성경의 야곱의 이야기에 매우 영향을 받은 분입니다. 그것이 이 목사님에게 상상력을 줍니까?

이지 슈토렉 목사님은 제게 자주 „꼬빌리시 교회의 한국인들은 우리들의 천사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
마다 저는 „꼬빌리시 교회의 체코인들은 우리들의 천사들이며 야곱의 돌베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개방적이고
관용적이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서로 열린 마음을 볼 때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을
전해주는 천사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체코 교우들과 한국 교우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꼬빌리시의 한국인들만을 보더라도
그들은 다양한 개신교회, 오순절 교회, 카톨릭의 여러 다른 교회들로부터 모였고 그리고 신학적인 사고도 다양합니다. 일터에서는
그들은 서로 경쟁자로 만나야 하기에 그들 사이에 갈등이 쉽게 일어 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천사를 발견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수 있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한국인들은 다양한 활동이 있는 교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 활동들에 참여합니까? 예를 들어 게이와 레스비언 기독교 모임인 로고스에 방문을 하거나 지원을 합니까?

현재 저는 한인 공동체가 잘 뿌리를 내리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고 이 일이 꼬빌리시에서 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 교회는 게이와 레스비언들의 삶에 대해 응답을 회피할 수도 그리고 피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남한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한국에서 차별을 받거나 거부를 당합니까? 아니면 받아들입니까?

우리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성을 타부시 합니다. 거리에서 남자와 여자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키스를 할 수
없습니다. 혼전동거도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사회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성에 대한 사고와
태도가 매우 개방적입니다. 한 젊은 한국 배우가 공개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입을 밝혔습니다. 그의 발표는 사회에서 토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아직 동성애자들의 파트너 입법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 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 꼬빌리시 교회는 지역사회에 대해 의미있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아스포라 개념입니다. 원래 그 말은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목사님께 이 디아스포라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저는 디아스포라 개념을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로 이해합니다. 우리들에게 디아스포라는 외국에 이주하거나 살고있는 작은 (한인)공동체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 꼬빌리시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가 인용해서 읽어드립니다. „디아스포라 상황은 교회의 토대이며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징표이다“. 이 목사님, 청취자들에게 이것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러한 교회의 입장에 동의 하십니까?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될 역할에 대한 이러한 전망에 동의 하십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을(말씀하신 질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들을 찾으셨고 죄인들을 방문하셨고 그리고 그들과 먹고 마셨고 병든자들과 가난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연약한 자
어린이들을 환영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 주위에서 꼬빌리시 교회를 인용해서 말씀드리면 „섬김과 증언의 장소“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꼬빌시 사람들은
다시 인용해서 말씀드리면 „교회에 경계심, 염려, 두려움이 가득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교회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자발적으로 „게토화“(자신을 폐쇄화)하게 하고  그 결과 사회에서 교회의 신뢰를 상실하게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꼬빌리시 교회에서 그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체코교회의 폐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 한국에도 기독교인들의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잘 억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교회가 사회와 다른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 꼬빌리시의 한국인들과 체코인들이 얼마나 깊이 만나고 교제하고 친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 체코 자매와 형제들이 예배 외에 더 많은 만남을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함께 하길 원하고 산보도 같이
가고 맥주 한 잔 하러 가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잘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27명의 교인들이
떠나고 21명이 새로 교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년 또는 이년 동안 이곳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익숙해 지면 벌써
체코를 떠날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물론 개인적인 만남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 언어 문제 이 외에 우리 체코인들이 한국인들과 무엇이 가장 다릅니까?

유럽의 개인주의와 아시아의 공동체입니다. 유럽의 개인주의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지만 아시아의 공동체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 꼬빌리시 교회 밖에서 본 체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 외국인을 싫어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것을 겪으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없습니다.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 한국인들은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인종차별이 한국에 있습니까?

아직 인종차별이 우리나라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유럽인들 보다 미국인들을 더 잘 압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유럽보다 미국을 이해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 목사님은 자신을 디아스포라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늘 고향에 가기 전 까지 저는 제 자신을 디아스포라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목사님이 „믿음의 결과는 우리들이 기다리던 만족과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불평을 합니다.“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목사님이 불평을 하십니까? 아니면 목사님의 한국 형제들이 불평을 하십니까?

제가 불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말 한마디 해보겠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입니까?

예, 맞습니다.

대화를 마치며 (프렌드리흐)

라디오 저널 청취자 여러분께 우리들의 대화를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해주신 이종실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마이크로 마르띤 프렌드리흐 작별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