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

  • 연합 예배 (2004년 04월 04일)
  • 눅 19:28-44
  • 설교자: 이종실

종려주일

<본문>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 첫날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환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2:13)

이 날을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주님의 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날에 대해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비교해서 읽으면, 누가복음서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입니다.

무리들은 기뻐 노래했으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이러한 상반되는 모습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무리들의 환호에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몸보다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왜 “나귀새끼” 입니까?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이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그 내용을 구약 스가랴에서 직접 인용하고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9-10)

다시 말씀드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끌고오라는 명령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평화의 왕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왕이 올 때

평화의 왕이 올 때

그는 나귀새끼를 타고 옵니다.

이 예언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이 이 예언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귀새끼를 끌고 왔을 때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 때문입니다.

이것이 35절에서 38절까지 나옵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들이 한 행동은 예수님을 왕으로 즉위 시키는 왕의 대관식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후가 구테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는 모습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던 그들의 노래로부터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들은 참된 왕의 오심을 환호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노래하였습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일제히 예수님의 왕위 즉위식을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기대한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19장 11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기(예수)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제자들)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1)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부풀었던 것은 예수님이 간 곳 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능력있는 사람은 오실 왕이심에 틀림없다.

그는 스가랴에 기록된 왕이심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참된 왕으로 로마를 통치할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실 분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할 때 그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39, 40)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무슨 뜻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왕의 대관식과 관련되어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로마를 자극하여 군사개입을 가져올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만약 로마의 군사개입이 있다면 당신은 위험하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을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다.”라는 경고이며 동시에 “그러니 그들을 멈추게 하시오”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관심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군사적 개입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의 권력은 현재의 통치가 지속될 때 유지될것이며 그래서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로마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고 그리고 만약에 소동이 일어나면 로마는 정치적으로 개입하여 자신들의 특권은 상실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7, 48)

이것이 그들의 진짜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의 그들의 요구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40)

진짜 왕이신 예수님을 어떠한 권력도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와 같이 왕으로 즉위하는 예수님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후 70년에 즉 40년 뒤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파괴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군대였지만 예수님은 로마 때문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계속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평화>는 모든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예언자와 함께 그들의 마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왕위 즉위를 선포하였으며 기뻐하며 축하를 하였던 많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참된 평화의 설립을 희망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권력을 전복시키는 힘을 희망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예루살렘에 이미 와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능력의 힘을 사용해서 참된 평화를 세우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그런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기
시작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한편 바리새인들 역시 평화를 원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반 로마의 입장을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완전히 군사적인 힘의 사용을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곧 평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고의적인 행위 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 (시 128:5-6)

이 시편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는 예루살렘의 파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시는 그 평화의 길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예언자가 나귀새끼를 타신 왕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알았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서의 첫부분입니다.

스가랴 1장 1절부터 4절까지 말씀입니다.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1-4)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가 있었습니다.

 “내게 돌아오라”라는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조상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내게 돌아오라”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평화의 왕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참된 왕이신 그 분이 있음에도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들이 했던 그 길을 따라 가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그들이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원치않고 하나님께 돌아가길 원치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축복만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는 자신의 적을 파괴하고 시스템이 변화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세상의 악의 축을 선언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가볍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와 전쟁의 그림자가 길게 우리들에게 드리우고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타락의 시작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지금 2004년도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때 그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잊지 마십시다.

참된 평화의 길은 진심어린 회개입니다.

평화의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회개가 없을 때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오히려 파멸만 가져 올 뿐 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을 환영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기적인 우리자신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 뜻을 외면하는 고집스러운 우리 자신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이 세상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룬 우리들의 존재와 사명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들에게 말씀하는 동안 하나님의 초청의 시대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가고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

내가 갈 길

  • 연합 예배 (2004년 03월 07일)
  • 눅 13:31-35
  • 설교자: 드로빅

<본문>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복음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 조금은 의심을 하게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헤롯에 대해 경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고가 좀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복음서 다른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논쟁을 한 사람들이며 예수를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논쟁하질 않고 그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준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예상되는 헤롯의 위협을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헤롯을 쓸모없는 인간의 의미로 여우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최강의 동물이며 헤롯을 임명한 로마 권력의 상징인 사자와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유머가 돋보입니다.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떠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가지고온 소식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헤롯에게 예수가 한말을 일러바칩니다.

분명히 헤롯의 권위를 무시하였다고 일러바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갑니다.

스스로 준비한 길을 갑니다.

그것을 이룰 자신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길에 초청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이 길을 이해할 것을 요청 받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에게 이 길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스로 악의 길을 피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마음이 치유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취하는 우리임을 고백하십시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목적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우리들이 실패할 때, 우리들은 길을 잃습니다

아니면 그의 길을 모양만 본뜨게 됩니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누가복음에서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주 의식적으로

예수님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지 잘못된 재판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의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쉬운 길이었으며, 인간으로서 내적 투쟁과 심각한 질문과 의심에 대한 대답을 찾을 필요도 없었던 그런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의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다른 통치자에 대한 신뢰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신뢰, 그의 사명에 대한 신뢰의 결과가 죽음까지 걸어가야 했던 그의 길이었습니다.

그를 기다렸던 불행한 종말은 헤롯에 달려있었고 갈릴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극장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보는 “영화의 끝”이란 자막글자 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이 완성한 그 길로 나아가길 원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시는 길

우리 개인뿐 아니라 우리 모든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꼭두각시 인형들이 아닙니다.

미리 결정된 대로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해 오늘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이와 같이 “아니오”하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라 말하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면 그에 뒤따르는 행동과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의 “아니오”때문에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현존안에 살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길을 완성하셨고 악에 굴복하지 않으셨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으셨으며 그러나 홀로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안에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오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영광 안에서 종려주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축복의 왕이여 호산나” 찬양을 하였던 그들과 연합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의 헤롯들의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며 그의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내일 모래 우리의 길에 고통과 죽음과 내적 갈등과 의심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연약한 믿음과 의심으로 뒤덮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

  • 연합 예배 (2004년 02월 01일)
  • 눅 5:1-11
  • 설교자: 이종실

<본문>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본문>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계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언뜻보기에 예수님은 무리를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존경하는 많은 무리들을 위해 거기서 서계신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이 열심히 바라본 사람들은 후에 제자로 사명을 받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군중들을 무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에 타고 해변에서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고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베드로와 그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게네사렛 해변에서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바라보던 게네사렛 해변의 광경을 오늘 본문은 소상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그물을 씻고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그들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5:5)여기서 우리는 무익한 노동의 시간을 보낸 그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부로서 지식과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고기잡는 일에 관한한 전문가들이 온 밤을 함께 일했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는 비었고  얻은 것은 없었습니다.

실패후의 느껴지는 그들의 세상은 공허하였고 그들의 육신과 마음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육신을 끌고 그들은 내일 출항을 위해 그물을 씻고 준비해야 했습니다.

해변가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그 동료들의 광경을 어촌의 한 풍경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군중들 사이에서 일어날 이적과 기적들 그리고 다른 한편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어떤 호기심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일들에 열중하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인 이들 어부들의 관심이 그렇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활동에 동참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목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두 배와 그들 일행을 보았고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빈 배의 의미와 죽도록 고생했지만 결과 없는 일로 낙담한 모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지금 그가 처한 현실 모두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을 무시한 채 그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5:3)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탔습니다.

해변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질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들의 일을 잠시 멈추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정말 운수 나쁜 날 때문에 그는 다음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어 일할 준비를해야 했습니다.

그는 빨리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기잡이에 성공을 하였더라면 아마도 예수님의 요청에 더 쉽게 응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가 그 청을 들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수 있도록 그는 베드로의 협조를 부탁하였고 베드로는 승락하였습니다.

그 순간 이미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사람들의 루머를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베드로의 장모가 고열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갔고 그리고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었다”라고 말합니다. (4:39)

베드로는 이미 열병을 꾸짖고 치료한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개인적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예언자, 권위있는 선생,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장모의 경우로 분명히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든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를 움직이게한 이유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유는 언급되어 있지않지만 베드로는 준비하는 일을 바로 멈추고 예수님의 청에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청하는 대로 베드로는 해변에서 약간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흐르는 물에 배가 떠내려가거나 움직이지 않고 예수님이 군중들을 향해 잘 말씀하시도록 배의 위치를 유지하는데 온 신경을 써야 했을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능력의 말씀을 듣는 중에 그는 동의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우연히 예수님 매우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이 끝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때 베드로의 역할도 끝났습니다.

베드로는 해변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내일 일을 준비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는 그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일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몸과 마음이 심하게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다음날 고기잡이를 위해 그는 그물을 청소하고 아직 수리할 일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무리들을 위해 배를 띄울 것을 요청하며 베드로의 일을 방해하였던 예수님이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5:5a)

한국속담으로 비유하자면 “선생이여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마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다시말씀드려 그 일은 내가 전문가니 그 일을 당신이 어떻게 잘 알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도 예수님이 잘 설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역시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매우 유순하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그 말씀에 복종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소용없다고 느끼는 것을 따라 할 수 없고 특별히 완전히 소용없다고 판명된 그런 확신아래에서는 더욱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경험과 지식과 믿음과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내면에 강하면 강할수록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욱 더 끓어 올랐습니다.

이들 요소들은 그것은 헛된 노력임을 확신시킵니다.

다시 더 우리가 더 고통스럽기 위해 아무 결과 없는 일이 기다리는 깊은 바다로 우리가 나아가야만 합니까? 베드로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그에게 중요한 것, 그가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옆으로 미루어둡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선생이여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한국어 성경의 번역에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 하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베드로의 말속에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믿져 보아야 본전이라는 아주 불성실한 믿음의 형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고집, 확신, 경험과 전통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방해가 될 때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과 경험이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드리는 이 예배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서로 깨닫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아주 불성실하고 소극적인 복종이었지만 그 복종의 결과는 베드로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동료의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두 배에 물고기를 끌어올리니 배에 가득차서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가 가장 자신하는 일, 거기에서 예수님은 그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함으로서 이세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자신의 세상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이기 때문에 지금 그의 눈앞에 일어난 이 광경에 대해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였습니다.

그것이 아주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것 이었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할렐루야” 인사로 예수님과 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부여서 그가 그 사건을 그렇게 쉽게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는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베드로의 삶에 강력하게 개입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여가 아니라 주여라고 부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두려워했습니다.

군중들에게 설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베드로의 삶 안에 개입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 용서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후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것이라 합니다.

주님에 의해 용서받은 사람, 그의 생명 안에 참여한 사람은 주님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정한 복음을 발견합니다.

용서받은 사람,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의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생명에 인도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신자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라는 고백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도록 그리고 결국 예수님의 초청을 따르도록 그리고 제자가 되도록 하는 첫 단계가 됩니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일상의 세상의 삶, 이기적인 우리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삶,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는 삶의 길을 잠시 포기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 연합 예배 (2004년 01월 04일)
  • 요 1:10-18
  • 설교자: 드로빅

<본문>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개역한글판 요 1장)

<설교>

여러분들에게 역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우리의 기쁨이나 염려에도 두려움에도 희망과 어떤 계획에도 전혀 말씀을 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까?

새해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누구를 신뢰해야 하며 무엇과 싸워야 할 것 인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권면처럼 들리도록 하나님은 말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말의 홍수 사이에서 그리고 많은 말들과 생각들 사이에서 맑은 종소리처럼 요한복음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우리들 곁에 두지 않았고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상상하고 실제로 느끼고 있는 하나님의 침묵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통치하고 어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모든 감추어진 말들을 극복합니다.

그러나 우월감이나 도덕적인 것으로 극복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한 말이 아닙니다.

다른 말들과 우위를 다투는 그런 경쟁을 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압도하기를 원치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었고 우리들 가운데 거주하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날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성탄절의 증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축하를 하는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겸손하게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평범하게 겸손하게 오셔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누구 그리고 그 무엇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되셨고 겸손하게 가난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불분명한 것이 보입니다.

첫번째로 아기가 태어난것입니다.

마치 아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무기력함이 숨겨져있습니다.

무기력한 아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력한 아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 단어 „아니오“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늘이 침묵한다고 불평합니다.

오래전에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고 우리는 느낍니다.

아브람, 이삭, 야곱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약속하셨고 명령하셨고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많은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하지않으십니다.

지금 육신이 되신 말씀만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과 연결되고 완전히 새롭게 준비되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준비하였습니다.

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기쁨과 염려와 문제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인생의 문제들에 코멘트도 지시도 명령도 하지않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약한자들과 함께 하시기에 오직 인간의 한 단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종이 아니라 나의 자녀입니다.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부모입니다. 나의 말에 응답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때가되어.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를 향하며 우리들에게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셨고 스스로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연설이 되지 않도록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밝견하도록

우리들이 자신의 문제에 응답하도록

삶의 이유를 갖도록

깨달음과 은혜의 샘에 도달하도록

인간의 말과 약속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보장을 하지않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곁에 왔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해서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힘이 없어 우리들의 삶에 그의 가까이 오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와 함께 무언가 시작할 흥미를 갖지않고있으며

다른 인간의 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계속해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삶의 문제로부터 끌어내어 다른 삶의 길을 보여주고 그것을 막아주겠다는 약속을 해줄 강한 능력자를 희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존중합니다.

인간의 말이 많음을 압니다.

인간의 말로 우리들은 기쁨과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신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들은 야곱과 구약의 시대처럼 인종적으로 청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육신이 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형제 자매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모든 마음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