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호 (2003년 가을호)

Editorial

The Diaconia and the Suffering of Terezin

CZECH BRETHREN ABROAD
– Bjelisevac
– 200 Years in Zelow
– Czech Brethren in the Ukraine
– The Presbytery of Southern Bohemia
– Fire in the Protestant Church in Rumburk
– A Dwelling of God among the People
– Dedication fo New Church in Letohrad, May 25, 2003

NEWS FROM PROTESTANT THEOLOGICAL FACULTY
– Protestant Theological Faculties Meet in Prague
– Academical honourings
– Conference of the friends of the faculty
– Theologians Focus on Human Rights
– To study in Prague
– Prof Broz dies

PERSONALIA
– Rev. Silarova Retires

The New Synodal Council

100 Years Czech Diaconia
(By Zdenek Barta, Chairman of the Board of Diaconia)

Welcome to the Czech Republic

Visitors from Scotland in Miroslav
(By Ondrej Titera, Pastor of the Miroslav congregation: cce.miroslav@volny.cz)

Im Momoriam
– Dr. Pavel Simek
– Pastor Jiri P. Storek

이종실 목사 체코 라디오 대담방송 출연

체스까 라디오 1 – 라디오저널 초청손님과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마르띤 펜드리흐와 이종실과의 대화 (2003년 10월 19일 저녁9시)

들어가는 말(펜드리흐)

라디오저널 청취자 여러분께 마르띤 프렌드리흐 인사드립니다. 프라하 야곱의 사다리교회 (얼마전 까지 카리스마가 있는 이지
슈토렉 목사님께서 활동한 교회입니다.)에서 프라하 개혁교인들뿐 아니라 남한의 대한민국 공화국의 기독교인들이 모입니다. 스튜디오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종실 목사님을 초청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목사님.

– 제가 이목사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했나요?

예 정확합니다.

-한국 어떤 도시에서 오셨나요?

수도 서울에서 왔습니다. 저는 광산촌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체코에 어떻게 오셨나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인들이 무역관계로 먼저 이곳에 오셔서 그래서 그분들을 위해서 오셨나요?

대한예수교 장로교회는 외국에서 일하는 자신의 교인들을 위해 목회자를 파송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국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이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회자를 찾은 뒤 독립교회가 됩니다. 저는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교회들의 경험을
교류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라하에 왔습니다.

– 체코의 한국인들이 모국어 예배를 원합니까?

한국인들은 모국어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가족들이 외국생활에서 많은 스트레스가 있어 교회에서 고향 같은 느낌을 받고싶어 합니다.

– 우리나라에서 한국인들이 대체로 어떤 사업을 하십니까?

다양한 상품의 수입과 수출을 합니다.

– 이목사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목사로서 일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직업이 있습니까?

예, 목사로만 일하고 있습니다.

– 남한에 개신교회 교세가 두 번째로 강하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가 28%이고 개신교가 18% 카톨릭이 6%
비종교인들이 절반이 조금 못된다(46%)고 하는데 남한에서 개신교회가 그렇게 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교사들의 활동의
결과입니까?

선교사들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첫번째 순교자가 영국 선교사였고 몇몇 미국 선교사들이
풍토병으로 죽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의 2, 3세대 후손들이 지금도 한국의 생활 습관으로 일하면서 살고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한국에서 개신교회가 매우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요인은 당시 민족의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던 18, 19세기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과 사상이 쇠약해져 세계의 변화를 이해할 수도
그리고 그것에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국가종교였던 유교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응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기독교를 민족의 구원자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원래 한국인들은 불교신자들이 대부분이지 않았습니까?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불교신자들과 어떻게 관계합니까? 유럽 에큐메니칼과 같은 그런 노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두 종교간의 차이로 적대적입니까?

관용이 없는 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체코인들이 공산독재를 겪고 있을 때 남한사람들은 군사독재를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불교신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이 함께 인권을 위해 독재자와 싸웠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인권을 위한 종교간의 연대와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협력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북한에 기독교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에 대한 뉴스가 있습니까? 친척이나 아니면 아는 분이 북한에 계십니까?

죄송한데 정확한 뉴스가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아는 분도 친척도 계시지 않습니다.

– 꼬빌리시의 프라하 한인 공동체 교인 수는 얼마나 됩니까?

50여명 재직 인원에 40여명이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합니다.

– 꼬빌리시 교회에 함께 모이는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저와 가족이 꼬빌리시 교회에 나간 것은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공동체가 그 교회에 생겨난 것은 2000년도 였습니다.

– 한국 기독교인들이 프라하에서 다른 예배 장소를 찾고 있고 그리고 다른 도시에도 아마 있는 것 같은데, 그 분들 가운데 오순절 교인들도 있다고 알고있는데요. 그들과 만나거나 아니면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개혁신학부 박사과정 학생으로 공부하기 위해1993년에 프라하에 왔을 때 20여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목회자 없이 매주
모였습니다. 녹음테이프로 설교를 듣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로 회피할 수 없어 목회자를 찾을 때 까지 설교를 하기로
그분들과 의논을 했습니다. 1년 만에 체코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길 원하는 오순절 교회의 목회자를 찾았습니다. 이때 교인들은 우리들의
관계를 끝내지 않고 저를 선교사로 체코 교회에 파송하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교회의 거의 모든 교인들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프라하로 왔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관계는 점점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이끄는 말 (펜드리흐)

라디오 저널 청취자 여러분, 초대손님 프로그램 입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 이종실 목사님과 체코 꼬빌리시교회의 한국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얼마전에 꼬빌리시 교회 이지 슈토렉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은 구약성경의 야곱의 이야기에 매우 영향을 받은 분입니다. 그것이 이 목사님에게 상상력을 줍니까?

이지 슈토렉 목사님은 제게 자주 „꼬빌리시 교회의 한국인들은 우리들의 천사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
마다 저는 „꼬빌리시 교회의 체코인들은 우리들의 천사들이며 야곱의 돌베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개방적이고
관용적이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서로 열린 마음을 볼 때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을
전해주는 천사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체코 교우들과 한국 교우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꼬빌리시의 한국인들만을 보더라도
그들은 다양한 개신교회, 오순절 교회, 카톨릭의 여러 다른 교회들로부터 모였고 그리고 신학적인 사고도 다양합니다. 일터에서는
그들은 서로 경쟁자로 만나야 하기에 그들 사이에 갈등이 쉽게 일어 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천사를 발견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수 있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한국인들은 다양한 활동이 있는 교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 활동들에 참여합니까? 예를 들어 게이와 레스비언 기독교 모임인 로고스에 방문을 하거나 지원을 합니까?

현재 저는 한인 공동체가 잘 뿌리를 내리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고 이 일이 꼬빌리시에서 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 교회는 게이와 레스비언들의 삶에 대해 응답을 회피할 수도 그리고 피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남한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한국에서 차별을 받거나 거부를 당합니까? 아니면 받아들입니까?

우리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성을 타부시 합니다. 거리에서 남자와 여자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키스를 할 수
없습니다. 혼전동거도 할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을 사회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성에 대한 사고와
태도가 매우 개방적입니다. 한 젊은 한국 배우가 공개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입을 밝혔습니다. 그의 발표는 사회에서 토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아직 동성애자들의 파트너 입법에 대한 논의에 이르기 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 꼬빌리시 교회는 지역사회에 대해 의미있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아스포라 개념입니다. 원래 그 말은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목사님께 이 디아스포라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저는 디아스포라 개념을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로 이해합니다. 우리들에게 디아스포라는 외국에 이주하거나 살고있는 작은 (한인)공동체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 꼬빌리시의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가 인용해서 읽어드립니다. „디아스포라 상황은 교회의 토대이며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징표이다“. 이 목사님, 청취자들에게 이것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러한 교회의 입장에 동의 하십니까?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될 역할에 대한 이러한 전망에 동의 하십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을(말씀하신 질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들을 찾으셨고 죄인들을 방문하셨고 그리고 그들과 먹고 마셨고 병든자들과 가난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연약한 자
어린이들을 환영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 주위에서 꼬빌리시 교회를 인용해서 말씀드리면 „섬김과 증언의 장소“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꼬빌시 사람들은
다시 인용해서 말씀드리면 „교회에 경계심, 염려, 두려움이 가득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교회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자발적으로 „게토화“(자신을 폐쇄화)하게 하고  그 결과 사회에서 교회의 신뢰를 상실하게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꼬빌리시 교회에서 그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체코교회의 폐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 한국에도 기독교인들의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잘 억제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교회가 사회와 다른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 꼬빌리시의 한국인들과 체코인들이 얼마나 깊이 만나고 교제하고 친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 체코 자매와 형제들이 예배 외에 더 많은 만남을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함께 하길 원하고 산보도 같이
가고 맥주 한 잔 하러 가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잘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27명의 교인들이
떠나고 21명이 새로 교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년 또는 이년 동안 이곳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익숙해 지면 벌써
체코를 떠날 시간이 됩니다. 그러나 물론 개인적인 만남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 언어 문제 이 외에 우리 체코인들이 한국인들과 무엇이 가장 다릅니까?

유럽의 개인주의와 아시아의 공동체입니다. 유럽의 개인주의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지만 아시아의 공동체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 꼬빌리시 교회 밖에서 본 체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 외국인을 싫어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것을 겪으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없습니다. 특별한 어려움은 없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 한국인들은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인종차별이 한국에 있습니까?

아직 인종차별이 우리나라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유럽인들 보다 미국인들을 더 잘 압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유럽보다 미국을 이해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 목사님은 자신을 디아스포라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늘 고향에 가기 전 까지 저는 제 자신을 디아스포라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목사님이 „믿음의 결과는 우리들이 기다리던 만족과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불평을 합니다.“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목사님이 불평을 하십니까? 아니면 목사님의 한국 형제들이 불평을 하십니까?

제가 불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말 한마디 해보겠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입니까?

예, 맞습니다.

대화를 마치며 (프렌드리흐)

라디오 저널 청취자 여러분께 우리들의 대화를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해주신 이종실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마이크로 마르띤 프렌드리흐 작별인사를 드립니다.

[체코기독사상가]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1320-1374) – 예언자와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
또는 교회개혁과 그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1358년까지의 그의 생애에 대해 분명한 기록이 없다. 모든 자료에 의하면1320년경 현재의 즐린 부근의 중간정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올로모쯔의 비숍주재 성당에 있는 라틴학교에서 분명히 공부하였고 그리고 이탈리아의 어떤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1348년에 신부가 되었다. 그 후 끄로미에지쉬의 교회법률가로 임명을 한 올로모쯔 비숍 얀 오첵을 위해 일하였다. 밀리츠는 그와 함께 까렐 4세 황제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1358년에 프라하로 왔다. 이 일은 모라비아 작은 도시에서 가졌던 그의 시각을 괄목하게 넓게하였다. 비숍 얀 오첵의 외교회의와 여행에 참가하면서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고 그의 활동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게되었다. 그래서 1361년에 프라하 교회법률가가 되었고 성 비따 성당과 성 바츨라프 무덤을 돌보는 „성비따의 사끄리스따“직을 맡았다. 그래서 맡았던 황제 사무실의 일반행정직을 사직하였다.

당시에 사제가 술 취하고 위험한 장난을 하고 사제관에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교인들을 강탈하였다. 밀리츠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있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근본적인 교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전생애의 과제로서 교회의 권력 남용자들과 투쟁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생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1363년에 프라하에서 교회와 기독교의 몰락에 대한 설교를 시작한 오스트리아의 설교자 콘라드 발드하우서로부터 더욱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밀리츠는 그해 자신의 모든 교회의 직책을 사임하고 오직 그리스도 복음의 설교가로만 활동할 것을 마음먹었다. (눅 9:62)

그의 교회당이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성 미꿀라쉬 성당이 되었다. 감성적으로 열정적으로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로인해 처음에 모든사람들이 어색해 하고 웃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모든 설교는 회개와 거듭남의 요청이었다. 관심을 갖게 하기위해 주일에 두 번 또는 그 이상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비좁아 더 넓은 스따레 미에스또의 성 일이 교회당으로 옮겼다. 그의 설교는 2-3시간 걸렸고 몇 차례의 설교를 그가 직접하였다. 성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단에 있었다. 1365년부터 구시각 광장에 있는 성 미꿀라쉬 교회에서 성직자와 학생들을 위한 라틴어 설교를 시작하였고 1366년부터 띤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독일어 설교를 하였다.

성경 공부와 교부들에 대한 공부가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설교 외에 가장 중요한 사제활동은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었다. 거룩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함께하는 주님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도와 실천이 있는 신앙고백과 특별히 성만찬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그는 영적으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설교는 수집이 되었고 설교들 가운데 대중적인 설교들 – 주석이 되었다. 설교의 뼈대만을 준비해서 설교하였기에, 그의 말은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강한 사회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언급하였고 사람을 물건처럼 주고 받는 귀족들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그의 설교는 때때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하여금 실천을 불러있으켰으며 특별히 그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하였다. 밀리츠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금욕으로 자신의 몸을 고행을 시켰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영을 긴장시켰다.

이것은 그가 더 급진주의적이 되게 하였고 그리고 동료사제들과 더 갈등하게 하였다. 그의 군사작전을 적그리스도와 비유한 까렐 4세 황제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밀리츠는 투옥되었고 그의 설교는 조사를 받았으나 어떤 문제점도 발견되지않아 결국 풀려났다. 밀리츠는 로마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1367년 그때 로마는 아비뇽에서 교황 우르반 5세의 귀향을 기다렸다. 그는 교황을 기다리면서 로마사람들에게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로인해 그는 이단으로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당시 그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교회의 훌륭한 설교가들의 도움과 공의회 회의로 적그리스도와의 전쟁과 교회의 개혁의 방법을 준비하여 모든 교회에 그것을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황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교회에서 사제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밀리츠는 체코에서 전체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라하로 다시 돌아왔다.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을 발표하였다. 그 글에서 그는 교회의 문제들(교회를 거룩한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대신 비숍들은 도둑 같고, 교회법률가들은 귀족들 마상 창 시합을 즐기고있고, 고위 성직자들은 주님의 양들을 잡아먹고, 신부들은 간음을 하고, 간통을 하고 매춘녀들과 성생활을 즐기고, 하루 종일 술에 취하여 있고, 짐승과 춤추는 여자를 사냥한다.) 을 지적하였고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그것은 말씀과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섬겨야만 하고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처럼 복음의 가난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을 제안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글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368년에 다시 로마로 떠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프라하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설교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1372년에 매춘녀들을 회개시켰다. 매춘굴에서 그들을 사왔다. 그들가운데 일부는 가정으로 돌아갔고 또는 결혼을 하였고 그리고 남은이들을 위해 집을 장만하였다. 그 집을 요한 계시록 14장 8절과 21장 1절과 2절에서 상상력을 얻어 „예루살렘“ 이라 하였다. 예루살렘은 막달라 마리아 채플에서 멀지않는 곳에 있는 공공건물에 있었다. 이 시설의 운영자금을 위해 밀리츠는 자신의 재산인 책을 팔았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고 부자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매일 이곳에서 16번의 미사가 드려졌고 성만찬이 베풀어졌으면 세명의 신분들이 설교하였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주위의 집 27채를 구입하여 예루살렘을 확장시켰다. 설교자들을 위한 그의 학교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사제들의 눈에 가시였다. 그들은 교황 레호즈 11세에게 고발하여 1374년 1월 13일 교황이 체코교회의 행정관에게 밀리츠의 이단적인 활동에 대한 조치를 위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항소문을 써서 교황에 뒤를 따라 아비뇽으로 갔다. 그는 적선행위를 계속하였고 가난 사람들은 그를 위해 도망을 쳤다. 아비뇽에서 관심을 끌어내어 동감을 얻어 완전히 복권되어 1374년 5월 21일 성령강림절에 교황청에서 설교하는 특권을 얻었다. 그 이후 지속적인 긴장의 결과로 쇠약해져서 1374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날에 아비뇽에서 죽었으며 그곳 추기경 성당에 장례되었다.

그의 죽음은 프라하 신부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밀리츠 추종자들의 박해가 있었고 예루살렘이 폐쇄되고 시토 수도회의 성 베르난트 기숙사가 들어섰다.

밀르츠의 제자이며 추종자인 야노보의 마떼이는 그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과 그 모습이며 경건하며 사도들의 현존하는 모습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다빗 유레흐

참고문헌
까냑, 미로슬브: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블라호슬라브, 프라하 1975년)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 (블라호슬라보바 출판사, 프라하 1948년)

출애굽 강해설교집 서문

이종실 목사 강해 설교집 발간

이종실 목사의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주일이 우리를 지킨다>의 출애굽 강해 설교집이 발간되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외생활에서 다가오는 실존적 문제들과 직면하여 믿음 안에서 그 문제들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체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교인들의 삶과 그 고민이 담겨있다. 여기에 이종실 목사의 설교집 머리말을 옮겨놓는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이 명제와 더불어 씨름하길 10년이 흘렀다.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기독교인으로서, 특히 한국 기독교인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죽을 때 까지 씨름 할 존재론적인 고백이다.

선교가 하나님의 일이 되지않고 자주 교회의, 목사의 그리고 교인들의 욕망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는 <서구 제국주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 왕국>이라는 신앙의 가치관과의 혼돈 속에서 그 뜻이 훼절되기도 했다.
아니 그 혼돈의 용광로에서 선교는 정제되어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 세속의 가치관 속에서 혼돈 되고 왜곡되었던 그 역사로부터 배우려 하지않는다. 십자군의 승리의 부활의 깃발을 여기 저기에 꽂으며 기독교 왕국을 세우는 일에 정신이 없어 인간의 모든 장벽을 넘어간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것이다. 목사가, 선교사가, 교회가 그리고 교인이 우선 해야 될 일들이 자비우고
버리는 자기 정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를 버리고 비운만큼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나님의 일로 고백하는 삶은 결국 참 신자, 올바른 교회가 되는 길이다.

이 설교집은 프라하 꼬빌리시에서 교회로 모이는 모든 선교 동역자들과 더불어 함께 <선교를 하나님의 일로 고백하고
실천하는 참 신자와 참 교회의 삶>을 고민하며 선포한 설교이다. 출애굽기를 통해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맡기신 양무리이자 동시에 선교의 동역자들인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매주 설교의 주제와 그 본문을 달리 정하여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체코어 책 읽기는 아직 사전에 의지해야 될 형편이어서 체코어 책을 참고하여 설교 준비를 하기에는 역부족이고 그렇다고 한국 책을 구해 읽는 것이 해외에서 쉽지않아 본의 아니게 늘 설교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과 설교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해 설교를 시작하였다.

참고서적은 한국 목회자들의 출애굽기 설교집(박동현 교수, 이현주 목사)과 목회자 없는 예배를 인도하는 평신도들을 위해 체코형제개혁교단이 매년 발간하는 설교집들에 나오는 출애굽기 설교들이었다. 이들 설교로부터 주석과 본문 해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체코어와 영어 주석들을 구해 볼 수 있었고, 보관하고 있는 몇 권의 성서신학 개론서들과 출애굽기 관련 신학서적들을 참고하였다.

출애굽기 1장 1절부터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빠짐없이 강해 설교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자료를 접하는 대로 그리고 묵상이 되는 대로 열세번에 걸쳐서 40장의 출애굽기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나 대체로 출애굽기의 맥들은 언급되었다고 생각되어 추후 증보판을 내더라도 일단 설교를 한곳에 묶어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성수주일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교우들을 위해 비록 활자이지만 선포된 메시지를 함께 나눌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무엇보다 성경을 읽는 과정을 설교의 구성에 그대로 옮겼기에 교우들이 설교의 내용보다 성경을 읽는 방법을 설교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설교집 발간의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의 신자들이무엇을 고민하고 노력하는지 프라하의 다른 이웃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민과 노력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다. 이 고민과 노력이 해외에서 황금 같은 인생의 시절을 보내는 이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가꾸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체코사회] 2002년, 15,000꼬룬 임금수령자의 분포 가장 높아

2002년, 15,000꼬룬 임금수령자의 분포 가장 높아

작년에 15,000꼬룬 임금수령자의 분포가 가장 높게 나와 작년도 평균임금이 18,133꼬룬에 달했다. 소수의 고소득수입자들의 증가가 대부분의 봉급자들을 평균이하의 수입자로 만들었다 . 중간 수입자는 월 15,542꼬룬이며 봉급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가 14,000-15,000꼬룬을 받는다. 대부분의 봉급자들이 산술적 평균치에 미달되어 통계청은 중간이하의 임금수령자와 중간이상의 임금수령자로 구분하여 발표하였다.
인구의 2/3는 작년에 전국평균임금 보다 낮은 봉급을 받았다. “법이 정한 최저임금의 저임금도 있지만 그 층은 매우 미미하며 고소득은 개인따라 차이가 있지만 백만꼬룬 이상이다.”라고 통계청은 발표하였다.
월 14,000-15,000꼬룬 임금 수령자 분포가 가장 높으며 20,000꼬룬 이상은 1/4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1/5정도 적은 임금을 받는다. 이런 차별이외에도 근무시간 수가 적고 파트타임이 많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간호사와 교사가 많고 평균이하의 수입자들이 대부분이다.” 체코통계청 청장 얀 피셔가 말했다. 저임금계층의 1/10이 매월 7,000꼬룬 이하를 받는 반면 부유층가운데 1/10이 월 27,000꼬룬 이상 고임금자들이다.
임금수령의 차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교육정도이다. 초등학교 졸업자들은 월 평균 12,070꼬룬이며 마뚜리따(국가졸업시험 자격증)이 없는 중고등학교 졸업자들은 14,409꼬룬 국가졸업시험 자격자들은 18,514꼬룬이다. 전문대학 또는 대학의 학사학위 졸업자는 2천꼬룬 더 높은 봉급을 받으며 대학졸업자들은 평균 32,000꼬룬을 받는다. 이것은 고소득자 매니저들을 포함하는 통계이다. 그래서 대학졸업자 가운데 절반이 24,000꼬룬을 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