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기독사상가]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1320-1374) – 예언자와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
또는 교회개혁과 그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1358년까지의 그의 생애에 대해 분명한 기록이 없다. 모든 자료에 의하면1320년경 현재의 즐린 부근의 중간정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올로모쯔의 비숍주재 성당에 있는 라틴학교에서 분명히 공부하였고 그리고 이탈리아의 어떤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1348년에 신부가 되었다. 그 후 끄로미에지쉬의 교회법률가로 임명을 한 올로모쯔 비숍 얀 오첵을 위해 일하였다. 밀리츠는 그와 함께 까렐 4세 황제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1358년에 프라하로 왔다. 이 일은 모라비아 작은 도시에서 가졌던 그의 시각을 괄목하게 넓게하였다. 비숍 얀 오첵의 외교회의와 여행에 참가하면서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고 그의 활동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게되었다. 그래서 1361년에 프라하 교회법률가가 되었고 성 비따 성당과 성 바츨라프 무덤을 돌보는 „성비따의 사끄리스따“직을 맡았다. 그래서 맡았던 황제 사무실의 일반행정직을 사직하였다.

당시에 사제가 술 취하고 위험한 장난을 하고 사제관에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교인들을 강탈하였다. 밀리츠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있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근본적인 교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전생애의 과제로서 교회의 권력 남용자들과 투쟁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생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1363년에 프라하에서 교회와 기독교의 몰락에 대한 설교를 시작한 오스트리아의 설교자 콘라드 발드하우서로부터 더욱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밀리츠는 그해 자신의 모든 교회의 직책을 사임하고 오직 그리스도 복음의 설교가로만 활동할 것을 마음먹었다. (눅 9:62)

그의 교회당이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성 미꿀라쉬 성당이 되었다. 감성적으로 열정적으로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로인해 처음에 모든사람들이 어색해 하고 웃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모든 설교는 회개와 거듭남의 요청이었다. 관심을 갖게 하기위해 주일에 두 번 또는 그 이상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비좁아 더 넓은 스따레 미에스또의 성 일이 교회당으로 옮겼다. 그의 설교는 2-3시간 걸렸고 몇 차례의 설교를 그가 직접하였다. 성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단에 있었다. 1365년부터 구시각 광장에 있는 성 미꿀라쉬 교회에서 성직자와 학생들을 위한 라틴어 설교를 시작하였고 1366년부터 띤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독일어 설교를 하였다.

성경 공부와 교부들에 대한 공부가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설교 외에 가장 중요한 사제활동은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었다. 거룩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함께하는 주님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도와 실천이 있는 신앙고백과 특별히 성만찬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그는 영적으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설교는 수집이 되었고 설교들 가운데 대중적인 설교들 – 주석이 되었다. 설교의 뼈대만을 준비해서 설교하였기에, 그의 말은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강한 사회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언급하였고 사람을 물건처럼 주고 받는 귀족들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그의 설교는 때때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하여금 실천을 불러있으켰으며 특별히 그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하였다. 밀리츠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금욕으로 자신의 몸을 고행을 시켰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영을 긴장시켰다.

이것은 그가 더 급진주의적이 되게 하였고 그리고 동료사제들과 더 갈등하게 하였다. 그의 군사작전을 적그리스도와 비유한 까렐 4세 황제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밀리츠는 투옥되었고 그의 설교는 조사를 받았으나 어떤 문제점도 발견되지않아 결국 풀려났다. 밀리츠는 로마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1367년 그때 로마는 아비뇽에서 교황 우르반 5세의 귀향을 기다렸다. 그는 교황을 기다리면서 로마사람들에게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로인해 그는 이단으로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당시 그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교회의 훌륭한 설교가들의 도움과 공의회 회의로 적그리스도와의 전쟁과 교회의 개혁의 방법을 준비하여 모든 교회에 그것을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황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교회에서 사제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밀리츠는 체코에서 전체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라하로 다시 돌아왔다.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을 발표하였다. 그 글에서 그는 교회의 문제들(교회를 거룩한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대신 비숍들은 도둑 같고, 교회법률가들은 귀족들 마상 창 시합을 즐기고있고, 고위 성직자들은 주님의 양들을 잡아먹고, 신부들은 간음을 하고, 간통을 하고 매춘녀들과 성생활을 즐기고, 하루 종일 술에 취하여 있고, 짐승과 춤추는 여자를 사냥한다.) 을 지적하였고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그것은 말씀과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섬겨야만 하고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처럼 복음의 가난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을 제안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글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368년에 다시 로마로 떠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프라하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설교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1372년에 매춘녀들을 회개시켰다. 매춘굴에서 그들을 사왔다. 그들가운데 일부는 가정으로 돌아갔고 또는 결혼을 하였고 그리고 남은이들을 위해 집을 장만하였다. 그 집을 요한 계시록 14장 8절과 21장 1절과 2절에서 상상력을 얻어 „예루살렘“ 이라 하였다. 예루살렘은 막달라 마리아 채플에서 멀지않는 곳에 있는 공공건물에 있었다. 이 시설의 운영자금을 위해 밀리츠는 자신의 재산인 책을 팔았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고 부자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매일 이곳에서 16번의 미사가 드려졌고 성만찬이 베풀어졌으면 세명의 신분들이 설교하였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주위의 집 27채를 구입하여 예루살렘을 확장시켰다. 설교자들을 위한 그의 학교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사제들의 눈에 가시였다. 그들은 교황 레호즈 11세에게 고발하여 1374년 1월 13일 교황이 체코교회의 행정관에게 밀리츠의 이단적인 활동에 대한 조치를 위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항소문을 써서 교황에 뒤를 따라 아비뇽으로 갔다. 그는 적선행위를 계속하였고 가난 사람들은 그를 위해 도망을 쳤다. 아비뇽에서 관심을 끌어내어 동감을 얻어 완전히 복권되어 1374년 5월 21일 성령강림절에 교황청에서 설교하는 특권을 얻었다. 그 이후 지속적인 긴장의 결과로 쇠약해져서 1374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날에 아비뇽에서 죽었으며 그곳 추기경 성당에 장례되었다.

그의 죽음은 프라하 신부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밀리츠 추종자들의 박해가 있었고 예루살렘이 폐쇄되고 시토 수도회의 성 베르난트 기숙사가 들어섰다.

밀르츠의 제자이며 추종자인 야노보의 마떼이는 그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과 그 모습이며 경건하며 사도들의 현존하는 모습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다빗 유레흐

참고문헌
까냑, 미로슬브: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블라호슬라브, 프라하 1975년)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 (블라호슬라보바 출판사, 프라하 1948년)

출애굽 강해설교집 서문

이종실 목사 강해 설교집 발간

이종실 목사의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주일이 우리를 지킨다>의 출애굽 강해 설교집이 발간되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외생활에서 다가오는 실존적 문제들과 직면하여 믿음 안에서 그 문제들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체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교인들의 삶과 그 고민이 담겨있다. 여기에 이종실 목사의 설교집 머리말을 옮겨놓는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이 명제와 더불어 씨름하길 10년이 흘렀다.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기독교인으로서, 특히 한국 기독교인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죽을 때 까지 씨름 할 존재론적인 고백이다.

선교가 하나님의 일이 되지않고 자주 교회의, 목사의 그리고 교인들의 욕망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는 <서구 제국주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 왕국>이라는 신앙의 가치관과의 혼돈 속에서 그 뜻이 훼절되기도 했다.
아니 그 혼돈의 용광로에서 선교는 정제되어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 세속의 가치관 속에서 혼돈 되고 왜곡되었던 그 역사로부터 배우려 하지않는다. 십자군의 승리의 부활의 깃발을 여기 저기에 꽂으며 기독교 왕국을 세우는 일에 정신이 없어 인간의 모든 장벽을 넘어간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것이다. 목사가, 선교사가, 교회가 그리고 교인이 우선 해야 될 일들이 자비우고
버리는 자기 정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를 버리고 비운만큼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나님의 일로 고백하는 삶은 결국 참 신자, 올바른 교회가 되는 길이다.

이 설교집은 프라하 꼬빌리시에서 교회로 모이는 모든 선교 동역자들과 더불어 함께 <선교를 하나님의 일로 고백하고
실천하는 참 신자와 참 교회의 삶>을 고민하며 선포한 설교이다. 출애굽기를 통해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맡기신 양무리이자 동시에 선교의 동역자들인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매주 설교의 주제와 그 본문을 달리 정하여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체코어 책 읽기는 아직 사전에 의지해야 될 형편이어서 체코어 책을 참고하여 설교 준비를 하기에는 역부족이고 그렇다고 한국 책을 구해 읽는 것이 해외에서 쉽지않아 본의 아니게 늘 설교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과 설교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해 설교를 시작하였다.

참고서적은 한국 목회자들의 출애굽기 설교집(박동현 교수, 이현주 목사)과 목회자 없는 예배를 인도하는 평신도들을 위해 체코형제개혁교단이 매년 발간하는 설교집들에 나오는 출애굽기 설교들이었다. 이들 설교로부터 주석과 본문 해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체코어와 영어 주석들을 구해 볼 수 있었고, 보관하고 있는 몇 권의 성서신학 개론서들과 출애굽기 관련 신학서적들을 참고하였다.

출애굽기 1장 1절부터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빠짐없이 강해 설교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자료를 접하는 대로 그리고 묵상이 되는 대로 열세번에 걸쳐서 40장의 출애굽기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나 대체로 출애굽기의 맥들은 언급되었다고 생각되어 추후 증보판을 내더라도 일단 설교를 한곳에 묶어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성수주일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교우들을 위해 비록 활자이지만 선포된 메시지를 함께 나눌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무엇보다 성경을 읽는 과정을 설교의 구성에 그대로 옮겼기에 교우들이 설교의 내용보다 성경을 읽는 방법을 설교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설교집 발간의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의 신자들이무엇을 고민하고 노력하는지 프라하의 다른 이웃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민과 노력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다. 이 고민과 노력이 해외에서 황금 같은 인생의 시절을 보내는 이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가꾸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체코사회] 2002년, 15,000꼬룬 임금수령자의 분포 가장 높아

2002년, 15,000꼬룬 임금수령자의 분포 가장 높아

작년에 15,000꼬룬 임금수령자의 분포가 가장 높게 나와 작년도 평균임금이 18,133꼬룬에 달했다. 소수의 고소득수입자들의 증가가 대부분의 봉급자들을 평균이하의 수입자로 만들었다 . 중간 수입자는 월 15,542꼬룬이며 봉급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가 14,000-15,000꼬룬을 받는다. 대부분의 봉급자들이 산술적 평균치에 미달되어 통계청은 중간이하의 임금수령자와 중간이상의 임금수령자로 구분하여 발표하였다.
인구의 2/3는 작년에 전국평균임금 보다 낮은 봉급을 받았다. “법이 정한 최저임금의 저임금도 있지만 그 층은 매우 미미하며 고소득은 개인따라 차이가 있지만 백만꼬룬 이상이다.”라고 통계청은 발표하였다.
월 14,000-15,000꼬룬 임금 수령자 분포가 가장 높으며 20,000꼬룬 이상은 1/4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1/5정도 적은 임금을 받는다. 이런 차별이외에도 근무시간 수가 적고 파트타임이 많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간호사와 교사가 많고 평균이하의 수입자들이 대부분이다.” 체코통계청 청장 얀 피셔가 말했다. 저임금계층의 1/10이 매월 7,000꼬룬 이하를 받는 반면 부유층가운데 1/10이 월 27,000꼬룬 이상 고임금자들이다.
임금수령의 차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교육정도이다. 초등학교 졸업자들은 월 평균 12,070꼬룬이며 마뚜리따(국가졸업시험 자격증)이 없는 중고등학교 졸업자들은 14,409꼬룬 국가졸업시험 자격자들은 18,514꼬룬이다. 전문대학 또는 대학의 학사학위 졸업자는 2천꼬룬 더 높은 봉급을 받으며 대학졸업자들은 평균 32,000꼬룬을 받는다. 이것은 고소득자 매니저들을 포함하는 통계이다. 그래서 대학졸업자 가운데 절반이 24,000꼬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체코 법] 교육법

체코 교육법

교육법, 29/1984 Sb. (초등교육과 고등교육 기관에 대한 법) 13번의 개정후 오늘날에는 284/2002 Sb. 로 등록되어있다. 서론(preamble)은 생략되었다. 1984년 체코슬로바키아 연합정부의 입법 의회에서 교육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었다. 교육법(초등교육과 고등교육 기관에 대한 법)은 11개의 항목으로 구분되어있다.
제 1항 – 교육법 규정
교육기관에는 초등학교, 초등 예술학교, 고등학교, 특별 학교, 전문 고등학교, 유치원 등이 있다. 교육기관의 시설에 대해서는 다른 특별한 법이 관리한다. 위의 기관들은 교육부에서 담당한다. 초등, 고등교육의 체계는 초등학교, 고등 전문학교, 김나지움 그리고 특별 교육기관으로 이루어진다. 교육시설의 종류와 이름은 교육부가 지정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의 교육은 체코어로 이루어진다. 소수민족들은 교육기관에서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더 발전시키는데 관심이 있다면 그들의 모국어로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장애인들에게는 그들이 공부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초등, 고등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이 무료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사립학교나 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에서는 학비를 지불 해야 한다. 정부의 예산에 의하여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교과서가 주어진다.
제 2항 – 초등학교
초등교육 기관은 학생들의 정신, 지적 능력을 담당하며, 도덕, 윤리, 환경, 건강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교육한다. 초등교육기관은 종교교육을 행할 수 있다. 초등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을 다음 교육(고등교육)을 위해 준비시킨다. 초등학교는 9년제이며,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뉘어진다. 저학년은 1학년부터 5학년까지를 의미하며, 고학년은 6학년부터 9학년까지를 말한다. 9학년 까지 모든 학급을 만들 수 없는 경우, 학년규모가 작은 학교를 설립 할 수 있다. 이런 학교의 학생들은 나머지 학년을 다른 학교에서 이수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 교육이다. 1-2개의 종합반(1-5학년)으로 설립된 학교는 평균 최소 한 반에 13명의 학생이 있어야 한다. 저학년의 모든 학년이 최소 1반정도가 있다면, 각반의 학생수는 최소 평균 15명이어야 한다. 그 외에 특별한 경우는 교육부와 그 도시의 시청 교육 담당실에서 관리한다.
위의 경우가 아닌 학교들(도시에 있는 큰 학교)은 각반에 최소 평균 17명의 학생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 특별한 경우는 교육부와 그 도시의 시청 교육 담당실에서 관리한다.
초등 예술학교는 각각의 예술종목에서 기본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관이다. 초등 예술학교는 음악반, 무용반, 미술반, 문학반, 연극반등 등을 설립 할 수 있다.
제 3항 – 고등학교
고등교육 기관은 학생들의 고등교육을 담당하며, 학생들이 여러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대학에 진학 할 수 있게 준비하는 기관이다. 고등교육 기관은 고등전문학교, 김나지움이 있다. 김나지움은 학생들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다. 김나지움은 4년제, 6년제, 8년제가 있다. 고등전문학교는 학생들이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정한다. 전문분야는 기술, 경제, 건강, 행정, 문화, 예술등 등이며 전문학교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기도 한다. 전문학교는 4년제이다. 꼰제르바또르 는 특별한 고등전문 교육기관이다. 이 교육기관은 예술분야에 교육중심을 둔다. 음악, 무용, 연극등 등, 대학진학을 준비시키기도 한다. 꼰제르바또르는 6년제이며 무용분야는 8년제이다. 꼰제르바또르의 졸업시험은 압솔루또리움이라 한다(압솔루또리움은 자격증이다)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하려면 고등교육의 대한 관심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 의무교육을 수료하여야만 하며(초등학교) 고등교육의 입학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8년제 김나지움과 8년제 꼰제르바또르에 입학하려면 초등학교 5학년을 수료한 학생들이어야만 한다. 6년제 김나지움에는 초등학교 7학년을 수료한 학생들이 입학가능하다. 4년제 김나지움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의 입학이 허가된다.
고등학교의 입학시험은 각 학교 교장이 담당하며(시험날짜, 시험출제 등), 원서를 접수한 학생들은 시험 결과에 따라 합격 또는 불합격이 된다. 시험은 4월 말에 있다. 합격/불합격 통지서는 각 학생들에게 편지로 통보된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은 마뚜리따라 칭한다. 8년제, 6년제, 4년제 김나지움들의 모든 학생은 졸업시험, 마뚜리따 시험을 본다. 만약 학생이 주어진 시간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2차 재시험을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제 4항 – 특별학교
특별학교는 장애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특별교육 기관이다. 특별학교의 교사들은 보통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육방법과는 다른 특별 교육방법을 사용한다. 특별학교의 종류에는 특별 초등학교, 특별 고등학교가 있다. 이 특별교육기관도 교육부에서 담당한다.
제 5항 – 의무교육
만 6세가 되는 학생들은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다. 만약 만 6세가 된 어린이가 건강에 (신체적, 정신적)문제가 있다면 그 어린이의 부모의 요청에 의하여, 그리고 학교 교장은 병원의 의사나 정신과 의사의 요청에 근거하여 어린이의 입학을 1년 후로 미룰 수 있다. 1학년 학생이 재학하는 도중 적응을 못하거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 학부형의 동의로 학생의 2학년 진학을 1년 미룰 수 있다. 의무교육은 9년이다.
만 6세의 어린이의 부모나, 그 어린이를 담당하는 관리기관(고아원, 보육원…)에서는 정시에 학교에 입학원서를 접수할 의무가 있으며, 어린이를 매일 등교시켜야 하는 의무도 있다. 학기는 9월 1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해 8월 31일에 종료된다.

나머지 남은 항목에서는 교육기관의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학교 직원들 (교사, 학교직원), 교육부에 속하지 않는 교육기관들, 예를 들면 사관학교, 경찰 학교등등 내무부나 국방부에서 담당하는 학교들에 관하여, 사립학교와 교회학교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법의 원문 29/1984 Sb.는 1984년 9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같으며 13번째 개정안 (284/2002 Sb.)는 2002년 6월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기독교 신자수 감소 그러나 군소교단과 종교단체 신도수 증가

기독교 신자수 감소 그러나 군소교단과 종교단체 신도수 증가

체코의 무신론주의는 점점 더 심화되고 기독교 신도수는 감소하고 있다. 최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체코의 59퍼센트가 무신론자들이다 (1991년에 39.8퍼센트 였다)
체코통계청의 통계는 이러한 경향이 주로 전통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소수교단과 종교단체는 과거보다 교인수가 더 늘어났다.

가장 큰 세 개의 기독교단(로마 카톨릭, 체코개혁교단,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단)의 신도수가 2001년에 330,000명으로 전체신도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1년에 소수교단의 교세는 모두 합해서 120,000명에 불과하였다. “통계의 분석을 부인할 수 없지만 깊은 역사를 지닌 체코형제개혁교단이 내일 문을 닫게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1990년 교회의 붐이 있은 이후 지금 우리교회는 활기를 되찾고있다”고 교회 대변인 이바나 베네쇼바가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만명이 넘는 교세를 지닌 몇 개의 교단이 군소교단 가운데 널리 알려져있다. 동방정교회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개혁교회이다. 체코에서 토대가 없는 교회들 가운데 네번째 큰 교회로 23,000명의 교세를 지닌 여호와증인 종교단체가 대표적이다. 인구조사에서 여호와 증인은 8,000명의 신도가 증가하였다.

체코비숍회의 대변인 다니엘 헤르만은 전통교단들은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처를 해야만 한다고 지적하였다.
교회들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숙고하고 그 도전에 대해 응답을 해야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활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소수교단(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단체)의 신자들이 증가하는 이유를 사회학자 얀 스뽀우스따는 “큰 유럽교회들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지원에 익숙하여 예를 들어 미국의 기독교들 처럼 그렇게 활동적이지 않다”고 분석하였다.
체코 무신론자들은 전체인구의 3/5이다. 여성 기독교 인구가 약 57%로 남신도보다 많다. 시골이 도시에 비해서 그리고 저소득층이 고소득층 보다 기독교인구가 높다.

체코의 4개의 가장 큰 기독교 교회 및 단체
로마 카톨릭 2,700,000명
체코 형제개혁교회 117,000명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회 99,000명
여호와의 증인 23,000명
(위의 신도수는 인구조사의 통계이며 실질적인 종교활동인구는 대체로 위의 통계의 1/10로 어림잡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