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슈토렉 목사님 하나님품에 안기셨습니다.

strk

intrpg30

이지 뻬뜨르 슈토렉 목사님이
2003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별예배가 2003년 7월 4일 금요일 오후 5시에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 에서 있습니다.

슬픔을 당한 유가족들과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개역한글판 계 21:3-5절 일부)

여호와 닛시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08일)
  • 출 17:1-16
  • 설교자: 이종실

030608 (성령강림주일)
출애굽기 17: 1-16
여호와 닛시

<본문>
반석에서 물이 나다(민 20:1-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아말렉과 싸우다
8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설교>
오늘은 교회달력에 따라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에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요한복음 14장 26절과 27절의 말씀을 예배시간에 낭독을 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시며 우리를 가르쳐서 근심과 두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명절 음식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장)

우리는 사람들이 원치않는 고난과 시련을 피하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을 종종 보게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평안을 세상의 평안이며 그것은 자신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환란을 세상에서 우리는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세상의 문제들을 피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시련을 도피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고 있지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시련의 길을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 광야(시나이 반도 – 현재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반도)를 떠도는 유목민들이었습니다.
광야의 거친 환경에서 살면서 그들은 물과 식량의 부족에 늘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곳에서는 유목민들 사이에 물과 식량 확보를 위한 전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아말렉이 르비딤에 이르러 거기서 이스라엘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물을 뺏기위해 공격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신 광야에서부터 만나를 먹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진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우물을 갖게 된 과정이 오늘 본문의 전반부인 1-7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멀리서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있고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지도자를 원망하고 심지어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또 목이 말라 거반 다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 우물을 빼앗는것은 시간 문제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 대한 모세의 평가가 후에 신명기에 나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신 25:17-18)

오늘 본문 9절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한 모세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두 달 전에 그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손에 들고 나갈 만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보듯이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아말렉과의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전반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3절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어서 4절을 보시면
이일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그들은 모세를 향해 돌질을 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향한 하늘을 찌를 듯한 원망과 분노의 상황이 지금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 그들을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아직 피곤하였고 직감적으로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은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돌질을 하여 죽이고 싶을 정도 원망과 분노가 풀릴만큼 상황이 완전히 해결되지않았지만 아말렉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고 자기 자신은 살짝 비켜 설 수 있는 삶의 문제가 있지만 때론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이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인 결단을 요구하며 우리를 시험하는 삶의 문제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여호수아와 그가 지도하는 군대의 싸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느냐 죽느냐는 긴박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쟁터 대신에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 꼭대기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그곳은 모세와 아론과 훌이 있는 곳입니다.
이야기는 더 코믹해집니다.

11절을 보시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전쟁의 승패가 전쟁하는 장군과 용사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모세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직접적으로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와 분리되거나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이슈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우리들은 상황에 영향을 받고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많은 예가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작은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이유는 아간 이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수 7장).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는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솔로문의 불신앙 때문입니다.(왕상 11장)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 예루살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기에 앗수르를 물리쳤습니다. (왕하 19장)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는 2천년전 전혀다른 민족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의 사건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고 일하지 않는 사건은 하나도 없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시각각으로 환란을 겪었습니다.
환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절망을 뚫고 열리는 길들을 걸었고 광야의 바위로부터 쏟아지는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전쟁의 실재상황에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있고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였습니다.

산꼭대기 서서 손을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저와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이세상의 모든 환란들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식으로 풀이합니다.
분명히 이 장면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만 본문은 모세가 기도하는 상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히브리말로 기도하는 동작을 손과 관련시켜 말을 할 때 보통 손을 뻗쳤다. 펼쳤다고 합니다.

을 높이 든다는 표현은 창세기 13장 22절의 맹세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오늘 본문의 손을 높이 든다는 표현의 경우는 이사야
26장 11절과 신명기 32장과 미가서 5장에 나오는 어떤 힘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성서
학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모세는 하나님이 환란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신다고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배한다는 이야기를 모세가 어떤 마술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도 환란을 겪을 때 마다 원망을 하고 분노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모세는 손을 들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기도 없고 전술도 없고 전쟁의 경험도 없는 자신들이 모세의 손이 들려있으면 이깁니다.
그런데 그 손이 내려가면 무참히 패배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모세의 손을 통해 그들은 지금 자신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투성이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이라는 보다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시련들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깨닫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게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만과 자만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를 하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굳은 살처럼 딱딱하여 왠만한 자극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대신해서 싸우신다고 고백한다면 오늘 모세의 모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다툰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 싸움을 걸어와 따지고 든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싸움을 걸어 모세가 답합니다.
여러분들은 나와 다투어 어찌하자는 겁니까?
여호와를 시험하여 어찌하자는 겁니까?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아마 모세가 노무현 대통령처럼 조리있게 설명을 잘하고 언변이 있어 토론을 잘했더라면 공개토론회도 열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모세는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 대체로 화를 금방 잘 냅니다.
모세도 성격이 급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달려가 불평을 할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가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이제 그만 이 노릇 하고 싶지않습니다.
다시 미디안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양을 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백성들이 자신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 처럼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지않았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틈만 있으면 불평과 원망을 터뜨릴 때 마다 모세가 한 유일한 일은 백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등지고 보이지도 않는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완벽하게 소극적인 태도로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께 의존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무능이 아니라 유능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한 만큼 강해지고 무능한 만큼 유능해지는 비밀을 사도 바울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고후 11:30)

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9-10)

지워도 지워도 끝없이 날아오는 스팸 메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아가야할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모세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아말렉 전쟁처럼 쉽게 끝나지않고 오래 걸립니다.
모세가 계속 손을 들고 있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함께 간 아론과 훌이 돌을 하나 가져와 모세를 그 위에 앉게하고 모세의 두팔을 양쪽에서 떠받칩니다.
이렇게 하루종일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을 쳐부숩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 그 길을 방해하는 무서운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친히 그 세력들과 싸워 이기시지만 우리 모두는 제나름대로 서로 도와야함을 또한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교역자, 집사님 그리고 봉사자들이 제 나름대로 맡은 일들을 충실히 하면서 서로 도와야 교회가 부흥발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모세는 전쟁의 승리로 여호수아를 칭찬하지않았습니다.
대신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닛시는 깃발, 승리의 깃발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진실로 승리의 깃발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환란과 인생의 문제를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환란과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우리가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이 추구하고 기대하는 세상의 평안과 다른 그리스도의 평안을 체험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승리의 깃발, 여호와 닛시라 고백하는 생의 체험으로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는 약속의 땅의 희망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서 보라!

  • 한인 예배 (2003년 05월 25일)
  • 출 14:5-14
  • 설교자: 이종실

030525
출 14:5-14
서서 보라!

<본문>
5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6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10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설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도로 애굽을 나왔습니다.
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의기양양하게-공동, 당당하게-표준새) 나갔음이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살아왔던 애굽으로부터 도망치지않았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 전역에 재앙이 번지자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이 성경 출애굽기 12장 33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이처럼 국민 여론에 정부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로 결정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승리의 해방자로 당당히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태도를 바꿨습니다.

5절에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준 것을 후회한 바로는 직접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드디어 바로는 비하히롯 이란 곳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잡았습니다.
그들이 캠프를 하는 곳이 해변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피할 수없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가 있었고 그들 뒤에는 애굽 군대들이 압박을 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라 – (체코어 성경에)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그 상황에서 모세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이 위기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하필 그들이 애굽을 나온 후 첫번째 캠프 장소가 해변가였습니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기위해 첫 야영지로 시야가 툭 터진 해변가를 택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신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의 14장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돌쳐서 –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 이 명령 때문에 백성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바다가로 갔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들이 직면하고있는 상황은 전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데서 기인한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인간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모두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목격한 상황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도 우리가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체코땅에서 때때로 예상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늘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일 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역시 주님의 손에 있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이야기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1절 12절 입니다.

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에 대해 모세가 대답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두 단어로 줄이면 서서 보라!

우리가 서있는 발판을 확인해야 서서 움직이지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 나는 누구인지 확신에 찬 자기고백이 없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바로 이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인도함을 받게된 까닭을 몰랐습니다.
즉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원망의 원인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말합니다. .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단지 애굽의 힘든 노동 때문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애굽보다 더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애굽의 하나님의 이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규정한 말이 공동번역에 그 뉘앙스가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 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느냐? (공동번역)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 내어
끌어낸다는 단어는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을 나오기 싫어하는 소나 돼지를 밖으로 억지로 끌고 나온 것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이 뉘앙스는 오늘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원망과 맥이 통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그들을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끌어 내도록 모세를 사용한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마땅했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여기서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애굽사람들을 섬기는 것에 익숙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전 애굽인들의 종들을 하나님의 종이 되게하기 위해 이끌어냈습니다.
그들이 이끌림을 받은 이유는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인들을 섬기던 백성들 그리고 애굽 신들을 섬기던 이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 –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지않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이끌림을 받은 이유를 모르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모든 고통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전보다 더 심한 고통의 시간에 직면하였을 때 우리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그리스도가 피 흘려 우리를 구원한 이유, 그가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버려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붙잡고 확고히 서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확고히 서야합니다.
중요한것은 확고히 서는 것이며 우리들의 인도자로서 주인이 하는 것을 응시하며 우리가 행할 것을 흔들리지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러나 그들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이 추격하는 애굽군대를 무찌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눈에 끝이 났던 막다른 길이 그 끝을 뚫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이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길을 여신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바다가운데 열린 길을 따라 걷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22절 말씀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바다물이 좌우로 벽을 이뤄 바다 가운데 길이 생기고 그 길을 걷는 것은 첫경험입니다.
갈라져 좌우벽을 이룬 거대한 물기둥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언제 아래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그 물기둥 통로를 건너는데 그들은 믿음이외에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인생의 경험과 과학 어떤 것으로도 그 길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과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건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싸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싸우시는 동안 우리들 앞에 우리를 완전히 파괴할 어떤 악한 세력, 어둠의 세력은 더 이상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고 그와 동행하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되어 그의 약속의 땅으로 향한다면 죽음도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합니다.

모세는 가만히 있으라 말하였습니다.
불평하지 말으라는 말입니다.
의심하지 말으라는 말입니다.
절망해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희망 없는 사람처럼 원망하지 말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진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에 의지해야 하며 그가 우리 앞에 열어두신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이끌어내신 백성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이들 말씀들을 마음깊이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구약의 말씀과 관련해서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믿
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애쓰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눅 12:28-31)

염려하지 말아라…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런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바라 보아야 할 시선은 이 땅위의 관심이 아니라 오직 약속의 땅 – 구원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관심에 자신의 존재를 세우면 안됩니다.
지금 이 해외, 이제 한인이주역사가 10여년이 갓 된 체코에서의 우리들의 삶은 한마디로 불확실성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발자취가 미래의 체코 한인사회의 모습입니다.
불확실성은 불안, 염려, 두려움을 생산합니다.
이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하나님 나라를 찾는 우리들의 시선을 흐리게 하지 마십시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면서 잠잠히 주의 구원을 기다립시다.
염려하지 말아라…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들은 들풀하나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고귀한 인생들입니다.
약속의 주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의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소망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요셉의 유골

  • 한인 예배 (2003년 05월 18일)
  • 출 13:17-22
  • 설교자: 이종실

030518

본문: 출애굽기 13:17-22

제목: 요셉의 유골

<본문>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설교>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지켜지는 초막절 명절이 끝나는 날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 7:2, 37)

초막절에 대한 설명이 레위기 23장에 나옵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3:42-43)

이처럼 초막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40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초막 = 천막)

그래서 초막절에 성전에 금으로 만든 커다란 등불을 켜서 밤에 예루살렘의 후미진 곳까지 모두 비추어준다고 합니다.

초막절의 예루살렘 야경이 프라하 야경만큼이나 장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초막절에 등불을 켜는 것은 예루살렘의 야경을 아름답게 하여 축제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오늘 본문 2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1-22절)

다시말씀드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광야의 어두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준 불기둥의 상징입니다.

등불이 아무리 커도 명절이 끝날 무렵에 이 등불도 기름이 다하여 그 불빛이 서서히 시들어 갑니다.

등불의 불빛이 희미해져 가는 명절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외치십니다.

초막절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자신의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에 이끌리어 우리들은 약속된 나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현재 이세상을 여행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히브리 말로 ‘펠리쉬팀’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한 전 지역을 팔레스티나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애굽(이집트)에서 내륙을 관통하여 지중해에 도달하는 팔레스틴 하이웨이를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길을 따라가면 쉬엄 쉬엄 가더라도 넉달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길을 두고 1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직선도로를 두고 우회도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넉 달이 걸릴 여행이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구불 구불 우회도로를 빙 돌아서 걸어간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인의 삶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 하는데 왜 당신은 나를 외면하십니까?

왜 당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나의 눈물과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나의 인생은 짧은 거리를 두고 이렇게 멀리 멀리 돌아서 와야합니까?

우리는 계속 질문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그리고 기독교회들이 하나님앞에 순복하지 못하고 살았던 죄의 결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 하는 삶을 사는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순탄하게 빠른 길로 인도하시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최소한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지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짧고 순탄한 팔레스틴의 하이웨이가 아니라 홍해의 광야길로 돌고 돌아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17절 본문을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립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 본문은 출애굽이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언제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유인으로 살기 보다 익숙한 과거의 노예의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들의 본성을 오늘 본문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쉽게 발견합니다.

교회는 건물과 조직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을 고쳐가는데 걸림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교인들인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들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노예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삶이 상황과 조건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그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항상 이 한계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 한계로부터 목사인 제 자신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를 위한 비판은 바로 이 한계에 머무르려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그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비판은 우리들의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된 습관으로 회기 하려는 비판과 원망은 교회를 허물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거기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양보한다면 저는 이미 여러분들의 목회자일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삯꾼이 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신앙인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길은 바로 바른 비판을 잘 수용하고 잘못된 비판을 거두어 들일 줄 아는 영적 싸움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싸움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개인이 아닌 민족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과거의 노예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거듭난 삶을 사는 것도 햇수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려 50년이 넘게 미움과 증오를 키운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데올로기가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변의 강대국들이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또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 자기 자신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협력과 연대 보다 경쟁과 분열이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북이 갈린 50년 동안 동서가 갈라졌습니다.

학연 지연 조그마한 이해관계로 우리들은 이 좁은 체코의 한인사회에서도 언제든지 분열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50년이 지나도 분열의 화해와 치유의 기미는 더욱 보이지않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40년 만에 노예의 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이된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팔레스틴의 하이웨이를 택해도 그리고 돌고 돌아가는 홍해의 광야길을 택해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잘 아시기에 우리들에게 문제가 덜 심각한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은 인간의 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여행이 너무 힘들어 원망을 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16:3)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깊은 의중을 끝까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먼 훗날 언젠가 반듯이 그때 그 하나님의 의중을 알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사도 바울 처럼 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지는 19절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행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저희들이 자동차로 여행할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동차를 정비하고 지도를 구입하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천막 장비와 침구를 준비하고 그리고 여행 중에 먹을 음식을 챙깁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잘 이끌기 위해 책임감으로 천막과 침구와 옷과 음식과 지도 등 여행 준비물을 꼼꼼히 챙겼다고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같은 절에 설명되고있습니다.

그 설명을 풀어 이해하자면 요셉이 자신의 자손의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고 죽을 때 한 유언을 그 자손들이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의 이 요셉의 유언은 창세기 50장 25절에 나옵니다.

25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요셉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이 유언을 하게된 이유가 바로 앞절인 창세기 50장 24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창 50:24)

다시말씀드려 요셉이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떠나라고 한 유언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맹세를 잊지않도록 하기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의지하라는 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면서 모세와 아론이라는 출중한 민족의 지도자를 허락하셨고 게다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의 조상과 맹세한 하나님의 맹세를 요셉의 유골로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도 자주 원망하는 인간들에게 요셉의 유골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과의 약속을 회상시키십니다.

요셉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간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가는 행위는 단지 조상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맹세 이전에 하나님 자신의 맹세를 지니고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믿음이 모세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유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 때문임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요셉의 유골이 연약하기 짝이 없고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40년의 광야생활에 모래알 처럼 흩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의 미족으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구심력은 지도자나 능력 있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연령과 출생배경과 인생경험과 개인의 능력과 신앙의 배경과 삶의 환경이 모두 다른 저희들이 지금 어떻게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사회적 이해관계를 고리로 모이면 그것은 이익집단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 교인들 각자가 꽉 붙잡을 때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연약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저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교회를 허락하시고 목회자와 집사와
봉사자들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성만찬을 주시면서 세심히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로 우리들이 이 세상의 악에 지지않게 도우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할 지라도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읍시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광야 같은 이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 까지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유월절

  •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7일)
  • 출 12:21-23
  • 설교자: 이종실

030427 (부활절후 첫째주일)
출애굽기 12:21-23
유월절

<본문>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설교>
지난주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놓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했을 때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재앙을 하나씩 하나씩 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부터 해방을 시키도록 압박을 가합니다.
결국 10번의 재앙 끝에 바로는 그들을 해방시킵니다.
이 이야기가 12장까지 이어집니다.

아주 유치해 보이는 출애굽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무고한 애굽사람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시는가?

출애굽 8장에 파리떼 재앙을 내리실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출 8장)

무슨 근거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고 구별하시는가?
하나님은 인종 차별자이신가? 아니면 민족 차별자이신가?
애굽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편드시는가?

무엇보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게한 원인제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가 고집을 부린 것이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언급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함정을 파고 그 함정 속으로 바로가 들어가도록 등을 떠밀고 애굽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셨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가치가 있어 하나님은 애굽사람들에 그토록 잔인하신가?
우리는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믿음의 관점에서 고민없이 그 의문을 해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하나님을 믿고있었고 애굽인들은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드신다는 것입니다.
바로와 모세 또는 바로와 하나님의 대결을 신앙과 불신앙의 불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말로 표현하면 신앙의 우월성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것 그것 자체가 우리들의 신앙의 우월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한번 자문해 보고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지 수십년이 되어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며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말한 내용이 여호수아 24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결심은 그들의 믿음때문이 아님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던 그 싯점은 그들이 애굽에서 애굽인들이 했던 것 처럼 애굽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사람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겔20:5-8)

무슨 말씀입니까?
심지어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그곳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사람들보다 조금도 더 낫지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자들 보다도 타종교인들 보다도 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바로와 모세,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 사울과 다윗, 바리새인과 예수의 제자들, 유대인과 바울 이런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을 해서 한쪽을 이기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이해하였습니다.(출3:7)
하나님이 그들을 본 이유는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때문에 부르짖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무가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책입니다.

그들이 제각기 자기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와 그의 형제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1)

바로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이처럼 해방을 요구하는 하나님과 완고하게 거절하는 바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10가지 재앙은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고, 가축에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과 가축들에 종양이 번지고 거대한 우박이 비오듯 쏟아지고 메뚜기떼가 자라는 풀들을 갈아먹고 3일동안 어두움이 전 애굽 땅을 덮었다.

오늘 본문은 10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재앙들이 차례 차례로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들 속에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능력으로 심판을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전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절정에 다다를 다가올 저녁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애굽 전역에 짙은 안개가 깔리듯 펼쳐질것입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갈망하며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들에게 역시 가장 큰 위기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롭게 애굽의 전영토를 심판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판을 피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구원을 찾는 그들이 자신들의 억압자인 애굽인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억압자들 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구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의로움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기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 모두를 불러 명령하였습니다.


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1-23)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칠해진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안의 사람들과 짐승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피를 본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용서와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의 근거는 희생의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28)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집 문설주와 기둥에 피를 칠하고 집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어린양의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하신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축제의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가 예루살렘에서 진행되는 동안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찬예식때 하나님의 어린양 찬송을 부릅니다.
세상 죄를 끊으신 어린양 예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유월절은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전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유월절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전환점이 되고있습니다.

출애굽 전야의 유월절 그날 저녁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바른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각자의 의로움으로 모인 곳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이 다른 어떤 종교인들에 대해 불신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집단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을 가치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피에 의지해서 묵묵히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한인 송년의 밤 때 한글학교 발표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어린 자녀들이 나와서 모든 한인들 앞에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어린 학생이 말과 행동이 다른 교회 다니는 친구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목사로서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어린 학생에 대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구나.
그런데 교회가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야. 좋은 점도 보려고 한번 노력해 보렴.
그 어린 학생이 싫었던 것은 말과 행동이 본이 안되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한 어린아이의 철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희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조롱을 당하고 있는지 조금만 귀를 열어보면 금방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만심과 우월성을 극복하는 문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2차세계 대전이후 유럽교회들의 질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고 그러면 그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한 기독교인들은 구원은 물론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믿음으로 서구 기독교인들은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오지않고 대신 참혹한 전쟁의 체험만이 있었습니다.
1차세계대전은 카톨릭의 종주국인 이탈리아가 주도하였고 2차세계대전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나라, 개신교의 나라 독일이 주도하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체험한 서구 교회들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기시작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의 우월성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독일교회는 사회봉사단체를 교회가 이름없이 빛도없이 세상을 섬기기위해 막대한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대가없이 투자하면서도 교회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사회를 일으키는 큰 역할을 감당하게됩니다.
이슬람과 힌두교 등 다원화된 사회인 영국 버밍험에서 영국교회들이 타종교와 평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 백인 기독교와 흑인 기독교의 대화 각종 연구센터들이 생겨났습니다.
서구교회는 선교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참회의 실천의 내용이 지금 서구교회의 선교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인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희생의 어린양의 피로 칠해진 자기 집 대문을 열지말고 그 안에서 기다려야 하듯 우리들도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기억하고 의지하며 구원의 아침까지 교회를 떠나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않고 그들의 문설주에 칠해진 피를 신뢰하며 평화롭게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구원의 희망 안에서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을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동시에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후 5:18)

이러한 교회의 삶이 유월절 축제요 구원의 희망 안에서 주의 날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이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와 실망과 낙심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기준과 잣대로 교회의 문턱을 높여 나도 들어가지않고 남도 들어가 못하게 천국 문을 가로막는 불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마십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만을 의지합시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여 아무 대가 없는 희생과 섬김입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며 함께 노력하십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