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유골

  • 한인 예배 (2003년 05월 18일)
  • 출 13:17-22
  • 설교자: 이종실

030518

본문: 출애굽기 13:17-22

제목: 요셉의 유골

<본문>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설교>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지켜지는 초막절 명절이 끝나는 날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 7:2, 37)

초막절에 대한 설명이 레위기 23장에 나옵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3:42-43)

이처럼 초막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40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초막 = 천막)

그래서 초막절에 성전에 금으로 만든 커다란 등불을 켜서 밤에 예루살렘의 후미진 곳까지 모두 비추어준다고 합니다.

초막절의 예루살렘 야경이 프라하 야경만큼이나 장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초막절에 등불을 켜는 것은 예루살렘의 야경을 아름답게 하여 축제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오늘 본문 2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1-22절)

다시말씀드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광야의 어두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준 불기둥의 상징입니다.

등불이 아무리 커도 명절이 끝날 무렵에 이 등불도 기름이 다하여 그 불빛이 서서히 시들어 갑니다.

등불의 불빛이 희미해져 가는 명절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외치십니다.

초막절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자신의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에 이끌리어 우리들은 약속된 나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현재 이세상을 여행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히브리 말로 ‘펠리쉬팀’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한 전 지역을 팔레스티나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애굽(이집트)에서 내륙을 관통하여 지중해에 도달하는 팔레스틴 하이웨이를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길을 따라가면 쉬엄 쉬엄 가더라도 넉달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길을 두고 1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직선도로를 두고 우회도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넉 달이 걸릴 여행이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구불 구불 우회도로를 빙 돌아서 걸어간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인의 삶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 하는데 왜 당신은 나를 외면하십니까?

왜 당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나의 눈물과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나의 인생은 짧은 거리를 두고 이렇게 멀리 멀리 돌아서 와야합니까?

우리는 계속 질문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그리고 기독교회들이 하나님앞에 순복하지 못하고 살았던 죄의 결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 하는 삶을 사는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순탄하게 빠른 길로 인도하시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최소한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지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짧고 순탄한 팔레스틴의 하이웨이가 아니라 홍해의 광야길로 돌고 돌아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17절 본문을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립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 본문은 출애굽이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언제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유인으로 살기 보다 익숙한 과거의 노예의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들의 본성을 오늘 본문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쉽게 발견합니다.

교회는 건물과 조직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을 고쳐가는데 걸림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교인들인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들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노예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삶이 상황과 조건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그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항상 이 한계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 한계로부터 목사인 제 자신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를 위한 비판은 바로 이 한계에 머무르려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그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비판은 우리들의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된 습관으로 회기 하려는 비판과 원망은 교회를 허물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거기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양보한다면 저는 이미 여러분들의 목회자일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삯꾼이 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신앙인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길은 바로 바른 비판을 잘 수용하고 잘못된 비판을 거두어 들일 줄 아는 영적 싸움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싸움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개인이 아닌 민족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과거의 노예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거듭난 삶을 사는 것도 햇수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려 50년이 넘게 미움과 증오를 키운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데올로기가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변의 강대국들이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또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 자기 자신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협력과 연대 보다 경쟁과 분열이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북이 갈린 50년 동안 동서가 갈라졌습니다.

학연 지연 조그마한 이해관계로 우리들은 이 좁은 체코의 한인사회에서도 언제든지 분열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50년이 지나도 분열의 화해와 치유의 기미는 더욱 보이지않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40년 만에 노예의 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이된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팔레스틴의 하이웨이를 택해도 그리고 돌고 돌아가는 홍해의 광야길을 택해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잘 아시기에 우리들에게 문제가 덜 심각한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은 인간의 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여행이 너무 힘들어 원망을 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16:3)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깊은 의중을 끝까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먼 훗날 언젠가 반듯이 그때 그 하나님의 의중을 알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사도 바울 처럼 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지는 19절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행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저희들이 자동차로 여행할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동차를 정비하고 지도를 구입하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천막 장비와 침구를 준비하고 그리고 여행 중에 먹을 음식을 챙깁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잘 이끌기 위해 책임감으로 천막과 침구와 옷과 음식과 지도 등 여행 준비물을 꼼꼼히 챙겼다고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같은 절에 설명되고있습니다.

그 설명을 풀어 이해하자면 요셉이 자신의 자손의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고 죽을 때 한 유언을 그 자손들이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의 이 요셉의 유언은 창세기 50장 25절에 나옵니다.

25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요셉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이 유언을 하게된 이유가 바로 앞절인 창세기 50장 24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창 50:24)

다시말씀드려 요셉이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떠나라고 한 유언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맹세를 잊지않도록 하기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의지하라는 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면서 모세와 아론이라는 출중한 민족의 지도자를 허락하셨고 게다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의 조상과 맹세한 하나님의 맹세를 요셉의 유골로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도 자주 원망하는 인간들에게 요셉의 유골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과의 약속을 회상시키십니다.

요셉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간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가는 행위는 단지 조상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맹세 이전에 하나님 자신의 맹세를 지니고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믿음이 모세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유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 때문임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요셉의 유골이 연약하기 짝이 없고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40년의 광야생활에 모래알 처럼 흩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의 미족으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구심력은 지도자나 능력 있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연령과 출생배경과 인생경험과 개인의 능력과 신앙의 배경과 삶의 환경이 모두 다른 저희들이 지금 어떻게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사회적 이해관계를 고리로 모이면 그것은 이익집단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 교인들 각자가 꽉 붙잡을 때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연약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저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교회를 허락하시고 목회자와 집사와
봉사자들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성만찬을 주시면서 세심히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로 우리들이 이 세상의 악에 지지않게 도우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할 지라도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읍시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광야 같은 이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 까지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유월절

  •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7일)
  • 출 12:21-23
  • 설교자: 이종실

030427 (부활절후 첫째주일)
출애굽기 12:21-23
유월절

<본문>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28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설교>
지난주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놓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전했을 때 바로는 모세의 말을 듣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재앙을 하나씩 하나씩 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부터 해방을 시키도록 압박을 가합니다.
결국 10번의 재앙 끝에 바로는 그들을 해방시킵니다.
이 이야기가 12장까지 이어집니다.

아주 유치해 보이는 출애굽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무고한 애굽사람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시는가?

출애굽 8장에 파리떼 재앙을 내리실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출 8장)

무슨 근거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고 구별하시는가?
하나님은 인종 차별자이신가? 아니면 민족 차별자이신가?
애굽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편드시는가?

무엇보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게한 원인제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가 고집을 부린 것이 스스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언급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함정을 파고 그 함정 속으로 바로가 들어가도록 등을 떠밀고 애굽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셨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가치가 있어 하나님은 애굽사람들에 그토록 잔인하신가?
우리는 의문을 갖지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문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믿음의 관점에서 고민없이 그 의문을 해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하나님을 믿고있었고 애굽인들은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드신다는 것입니다.
바로와 모세 또는 바로와 하나님의 대결을 신앙과 불신앙의 불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말로 표현하면 신앙의 우월성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것 그것 자체가 우리들의 신앙의 우월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한번 자문해 보고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지 수십년이 되어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며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말한 내용이 여호수아 24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결심은 그들의 믿음때문이 아님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던 그 싯점은 그들이 애굽에서 애굽인들이 했던 것 처럼 애굽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사람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겔20:5-8)

무슨 말씀입니까?
심지어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그곳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사람들보다 조금도 더 낫지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자들 보다도 타종교인들 보다도 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바로와 모세,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 사울과 다윗, 바리새인과 예수의 제자들, 유대인과 바울 이런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을 해서 한쪽을 이기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이해하였습니다.(출3:7)
하나님이 그들을 본 이유는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독자들로 인한 고통때문에 부르짖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무가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책입니다.

그들이 제각기 자기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의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와 그의 형제 아론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1)

바로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

이처럼 해방을 요구하는 하나님과 완고하게 거절하는 바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10가지 재앙은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고, 가축에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과 가축들에 종양이 번지고 거대한 우박이 비오듯 쏟아지고 메뚜기떼가 자라는 풀들을 갈아먹고 3일동안 어두움이 전 애굽 땅을 덮었다.

오늘 본문은 10번째 재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재앙들이 차례 차례로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들 속에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능력으로 심판을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전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절정에 다다를 다가올 저녁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밤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애굽 전역에 짙은 안개가 깔리듯 펼쳐질것입니다.

그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토록 갈망하며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들에게 역시 가장 큰 위기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롭게 애굽의 전영토를 심판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판을 피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구원을 찾는 그들이 자신들의 억압자인 애굽인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억압자들 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구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의로움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기다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 모두를 불러 명령하였습니다.


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1-23)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칠해진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안의 사람들과 짐승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피를 본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용서와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의 근거는 희생의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28)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집 문설주와 기둥에 피를 칠하고 집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어린양의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하신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축제의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가 예루살렘에서 진행되는 동안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진실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찬예식때 하나님의 어린양 찬송을 부릅니다.
세상 죄를 끊으신 어린양 예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유월절은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전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출애굽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유월절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전환점이 되고있습니다.

출애굽 전야의 유월절 그날 저녁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바른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각자의 의로움으로 모인 곳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모인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이 다른 어떤 종교인들에 대해 불신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집단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을 가치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피에 의지해서 묵묵히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한인 송년의 밤 때 한글학교 발표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어린 자녀들이 나와서 모든 한인들 앞에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어린 학생이 말과 행동이 다른 교회 다니는 친구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목사로서 부끄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어린 학생에 대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구나.
그런데 교회가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야. 좋은 점도 보려고 한번 노력해 보렴.
그 어린 학생이 싫었던 것은 말과 행동이 본이 안되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한 어린아이의 철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희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조롱을 당하고 있는지 조금만 귀를 열어보면 금방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만심과 우월성을 극복하는 문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2차세계 대전이후 유럽교회들의 질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고 그러면 그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한 기독교인들은 구원은 물론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믿음으로 서구 기독교인들은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오지않고 대신 참혹한 전쟁의 체험만이 있었습니다.
1차세계대전은 카톨릭의 종주국인 이탈리아가 주도하였고 2차세계대전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나라, 개신교의 나라 독일이 주도하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을 체험한 서구 교회들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기시작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의 우월성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독일교회는 사회봉사단체를 교회가 이름없이 빛도없이 세상을 섬기기위해 막대한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대가없이 투자하면서도 교회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사회를 일으키는 큰 역할을 감당하게됩니다.
이슬람과 힌두교 등 다원화된 사회인 영국 버밍험에서 영국교회들이 타종교와 평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 백인 기독교와 흑인 기독교의 대화 각종 연구센터들이 생겨났습니다.
서구교회는 선교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참회의 실천의 내용이 지금 서구교회의 선교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인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희생의 어린양의 피로 칠해진 자기 집 대문을 열지말고 그 안에서 기다려야 하듯 우리들도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기억하고 의지하며 구원의 아침까지 교회를 떠나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않고 그들의 문설주에 칠해진 피를 신뢰하며 평화롭게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구원의 희망 안에서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을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동시에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후 5:18)

이러한 교회의 삶이 유월절 축제요 구원의 희망 안에서 주의 날을 기다리는 교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이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와 실망과 낙심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기준과 잣대로 교회의 문턱을 높여 나도 들어가지않고 남도 들어가 못하게 천국 문을 가로막는 불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마십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칠해진 십자가만을 의지합시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여 아무 대가 없는 희생과 섬김입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이 교회 안에서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며 함께 노력하십다. (아멘)

하늘양식

  • 연합 예배 (2003년 06월 01일)
  • 출 16:1-15
  • 설교자: 이종실

030601ek
본문: 출 16,1-15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찌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설교>
부활의 승리의 기쁨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승천으로 이 땅에 남은 자들에게 다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번져갑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에서 읽혀지는 요한복음의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뒤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닥쳐올 박해를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결과는 우리가 기대한 편안함과 행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망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 3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3절)

지금 원망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지금 원망하는 그들은 애굽을 탈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유하게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해방시킨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들이 원망하기 시작하던 날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1절)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 이제 꼭 한 달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과 한달 전에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애굽 군대가 그들을 추격할 때에 그들 앞에 나타난 홍해바다는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막다른 길을 뚫어 계속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고 그들의 절망을 뚫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그때 자신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낌없이 찬양하였습니다.
15장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한 찬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은 주님께 노래하였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1-2)

원망을 하는 사람들이 캠프를 친 곳은 샘물 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 15:27)
광야에서 이보다 더 좋은 캠프장소는 없습니다.
그 장소를 그들이 스스로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장소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주님이 그들을 샘물로 인도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풍성함이 넘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원망을 하였을 때 그들은 그와 같은 체험들을 하였을 때였습니다.
샘물로 목마르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같은 입으로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모습입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의 발걸음을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자신의 매일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와 비슷한 배은방덕하고 부끄러운 사고방식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 아침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찬양하고 주의 만찬의 샘물 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예배를 마치고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이 우리들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 대해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8절)
주님은 분명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이 들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망할 때마다 주님이 그 원망도 들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8절)
우리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말한 백성들을 여호와께서 계속 살리십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한 것이 사실대로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저녁이 되자 메추라기가 날아와 장막 주변을 덮었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장막에 내리고 그리고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으로 덮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양식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양에서 여행한 40년 동안 그들은 이 하늘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온전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대로 그들은 의롭고 경건하고 신실한 백성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존재 상태는 애굽에 있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양식을 받을 마땅한 권리가 있지않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오직 은혜때문이지 은혜이외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혀 가치 없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은총을 보여주신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12절에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위를 만족하기 위해 양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은 녀희가 내가 주 너의 하나님임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이 양식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은혜가 넘치는 여호와와 생명의 관계로 살게 되어 그를 사랑함으로 그를 두려워 함으로 그를 신뢰함으로 그를 따름으로 살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거기서 양식을 주는 이유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광야로 인도되지않았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 없이 교만한 인간이 그들을 진실한 삶으로 해방시키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신명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40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신 8:2-3)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양식을 주신 이유가 그들은 양식으로 단지 살게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매일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단지 양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복종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만나를 저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각 사람의 식량대로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양식 그 자체가 아니라 양식을 주는 분 그 분 여호와께 초점을 맞추게 하여 날마다 복종하며 그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에 참된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치도 없는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어지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 광야의 여행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위해 겪어야만 하는 커리큘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장케하고 훈련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광야의 여행을 통해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이 광야의 여행 길을 우리 홀로 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아멘)

일어나 걸으라

  • 연합 예배 (2003년 05월 04일)
  • 행 3:1-12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30504ek
본문: 사도행전 3, 1-12a

<본문>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개역한글판 행 3장)

그리스도 부활이후 우리들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 것을 배우고 놀라는 것을 배웁니다.
성령이 교회를 세웁니다. – 이것은 유일한 성령의 기적입니다. –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고 이스라엘 성전은 예언자들의 예언으로 채워집니다.
사도들에 의해 증언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전없이 나타날 수 없었고, 교회는 이스라엘 없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며 사도들의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가야만합니다.
만약에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야곱 – 이스라엘이 기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수도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잊어버릴 때 교회의 증언과 모든 민족들을 위한 여호와의 이름을 교회는 타락시키게 됩니다.

드로가 앞장서서 교회당으로 가고 요한이 함께 성전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증언의 효과에 대한 희망이 깊은 일치안에서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전통의 교회를 서방교회 그리고 요한 전통의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여기 꼬빌리시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게다가 야곱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사람 (전통적인 교회들과 그들의 설교자들과 선교사들) 없이 우리들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혁교회 전통의 공동체의 변화를 추구하지않는다면 그리고 중세교회의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리고 사도들의 교회의 모습이 없다면 우리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예배는 역사를 소재로하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불과할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백성을 찾았습니다.

이미 예언자들의 희망이 성취되는 시간이 임했습니다.
누가는 화가처럼 끌어당기는 놀라운 힘으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자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세웠을 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전으로 갈 때 그당시 거기에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옮겨두어 거기서 그들이 구걸을 하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죄로 여겼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죄가 많았고 그래서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질병은 이스라엘의 희망이 성취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었습니다.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면 이 병자 한사람은 전체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앉은뱅이가 사람의 마음을 끌게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아직 섬기는 공동체가 존재하기때문입니다. – 매일 일하는 신실하고 인내심있는 디아코니아 즉 섬김이 있기때문입니다.
이 섬김을 우리 교회의 삶으로 보여주십시다.
우리는 교회당으로 갑니다. 우리들의 희망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당 주변에 섬기는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그래도 저는 성전이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좋은 곳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까렐 다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많은 돈을 그들 대장들에게 갈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난과 교회의 대대로 전해지는 질병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모두 성전의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늙은 구걸하는자의 희망은 약을 살 수 있는 돈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희망은 다른 곳으로부터 옵니다.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당안에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로 앉은뱅이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이 증언이 없는 곳 그리고 자선을 위한 문이 열려있지않는 곳 그리고 디아코니아 섬김과 봉사의 마음이 열려있지않은 곳 그곳은 벌레처럼 그냥 왔다 갔다하는 여행자들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소비적으로 교회를 출입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도 않고 그래서 위대하신 여호와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약한자 도움을 갈구하는자 죄인들을 교회로부터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유대인들과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 왕국의 표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눈 먼자가 보고 귀먹은 자가 듣고 앉은뱅이가 걸을“ 디아코니아 의 모든 봉사를 통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서 가난한 자는 가난하게 되고 앉은뱅이는 온 육신과 영혼이 불구가 되고 죄인들은 교회당에서 쫒겨나게됩니다.
병자들은 죽어가고 부유한 자는 더 부유하게 되고 찬양의 기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앉은뱅이를 돌보지 않는 교회를 도우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 앞에 놓여 있는 앉은뱅이를 기다립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합쳐질 수 없는 것을 연합시킵니다. 이미 오래전에 역사적으로 분열된 것을 예를들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로마 카톨릭교인들과 개혁교도들 건강한자들과 병든자들을 연합시킵니다.
모든이들이 연합되어야 합니다. 앉은뱅이의 다리가 강해진 것 처럼 그렇게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설교자들의 관심과 장로님들의 관심이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교회를 이루어 그곳에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자리가 준비된 그런 교회를 우리는 이룩해야 합니다.
노인분들이 등을 기대고 앉는 의자처럼 우리 교회를 세상이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평온해야 합니다.
한 존경할만한 주석가가 서커스에서 어릿광대처럼 재주를 넘었다고 통합에 대해 글을 썻습니다.
공중에서 뛰어넘고 회전하다가 두다리로 착지를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회복시켜준 이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미친사람들로 가득차지않을 때 여행자들에겐 쓸만합니다.

리는 지금 교회당에 사무실, 찻집, 기도실을 늘리고 울타리 없는 정원을 만들어 기도를 원하는 사람이 올 수 있도록 그리고 한국인들
디아코니아 체코인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넉넉히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넓히는 일을 추진할 것입니다.

누가는 모든 연약한 자들을 위해 아름다운 말씀을 전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으라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을 증거하라는 뜻이며 걸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 다시말씀드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삶을 살으라는 뜻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 거기서 어떻게 기뻐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도왔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리를 절고있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하나된 교회로 회복된 모습을
보는 것, 모든 전통의 기독교의 하나님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모여 하나됨을 기뻐하는 찬양을 듣는 것은 앉은뱅이에 대한
디아코니아 섬김과 봉사의 매일의 사랑이 부활의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곳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것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 을 놀라고 감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절기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스스로 가질 수 없고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간직하였던 모든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을 회복시킬 변치 않는 도구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날 그가 우리들을 서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식탁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시간 이후에 다리를 절고 놀라고 그리고 죽음을 대면하여 우리가 보았고 들었던 것에 의지하고 있을 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식탁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Amen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성가단 체코 콘서트

plak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성가단이 5월 26일 부터 31일까지 체코를 방문합니다.
형제개혁교단 디아코니아(교회사회봉사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는 자선음악회를 갖습니다.
5월 26일 프라하 도착
5월 27일 저녁 6시 체코-한국 기독교인들의 문화가 있는 만남

5월 28일 저녁 7시 프라하 콘서트
장소 살바또르 교회 (Salvatorska 1, 프라하 1 – 구시가광장)

5월 29일 삐섹 벨리바 선교찻집 방문

5월 30일 저녁 7시 30분 브르노 콘서트
장소 얀 아모스 꼬멘스끼 교회당

5월 31일 폴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