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 식사준비 하신 여러분 모두 수고가 많았습니다.
날씨도 우리들의 모임을 축하하듯 쾌청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주 이런 친교모임을 가졌으면 하고 의견을 주셨습니다.
체코교우들은 맛있는 집에서 구운 후식과 보리차음료(?)를 준비해주셨고
저희교우들은 먹고도 남을 풍성한 야채와 맛있는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체코교우들 모두들 맵다고 하면서도 처음보는 그 맛…
교회관리하시는 예자벡 장로님은 바베큐틀을 그대로 교회정원에 두자면서 언제 다시 한번 더 맛볼 기회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체코사회] 체코인들의 직장관
체코인들은 직장 때문에 이사를 원치않는다.
직장에 따라 이사를 하는 것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유럽연합국들과 다른 유럽연합가입후보국들에 비해 체코공화국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과 사회의 통계기관의 야로미르 꼬띠꼬바에 의하면 체코공화국에서 다른 유럽연합국들과 비교할 때 노동력 이동이 매우 낮았다. 그리고 다른 유럽연합가입 후보국 가운데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체코의 장년층들은 직장 때문에 자신의 삶의 뿌리를 변경시키는 이사를 하지 않겠다는 통계조사가 나와 주목을 받고있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직장을 찾기를 원하고있다. „직장을 바꾸면 떠돌이가 된다. 그리고 직장을 바꾸는 일은 계속된다.“ 꼬띠꼬바가 말하였다. 젊은 세대는 직장에 따라 이사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세대는 직장 때문에 이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돈을 더 받는 것을 원한다. 그들은 대체로 가족이 없다. 그들은 대체로 4번쯤 친구들과 함께 세를 얻은 뒤 그 후 독채로 세 들어 산다.“고 그녀는 말한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체코 노동자들의 이동은 폴란드와 비교할 때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있다. 폴란드의 경우 대학 졸업자의 상당 부분이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폴란드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경험에 기대를 할 수 있지만 한편 이들이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되면 다시 돌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도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노동력 이주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체코에서는 없다고 한다. 분석자료는 대체로 24세까지의 남성 젊은이들이 여성들에 비해 직장에 따라 이주하는 것을 가장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직장으로 인한 이주에서 실업자들과 학생들의 고소득 그리고 장기 고용계약이 가장 많은 이유였으며 결혼에 의한 거주와 직장도 있었다.
꼬띠꼬바는 직장 때문에 체코인들이 프라하 이사가 가장 높다고 하였다. 학업 이후에 그대로 남아있는 대학졸업자들에게 프라하 이주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프라하 이주는 실업률이 높은 지방의 사람들이 많다. 남 체코의 경우 30키로미터 안에서 다른 직장을 찾고있으며 북 모라바의 실업자들은 자신의 지역 안에서 직장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프라하에 모라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이유라고 그녀는 지적하고 있다.
(리도베 노비니)
II/4 오테르스도르프의 식스트 집
4. 오테르스도르프의 식스트 집
(Někdejší dům Sixta z Ottersdorfu)
구시가 광장 앞 첼레뜨나 거리 왼편 끝에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집에 개혁의 자취가 있다. 그러나 2/553호 집은 오늘날 식스트의 집으로 통칭된다. 16세기 초부터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이 곳의 주인은 주요한 후스파 문헌학자이자 성서 연구자 및 유능한 정치가였던 오테르스도르프의 얀 식스트 (Jan Sixt z Ottersdorfu) 였다.
얀 식스트는 까렐 대학에서 학사 졸업을 하고, 오랫동안 외국에서 학업을 계속 하였다. 체코로 돌아온 후 프라하 구시가 시의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재상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많은 외교적 활동으로 귀족의 반열에도 오른다. (오테르스도르프 출신이라는 것을 이름에 붙임.) 페르디난드 1세에 대항하여 1547년 반합스브르크 봉기에 참여하여 재상의 자리에서 축출당하고 감옥 생활에 들어간다.
프라하에서 오테르스도르프의 얀 식스트는 후스파 구 양종성찬주의자들(보수파)의 편이 되었지만 루터파 신 양종성찬주의자들과의 관계도 꽤나 원활하였다. 그 당시 금지되었던 형제단 사람들과도 친교를 맺고 그들과 함께 신학과 성서 번역에 관한 관심도 나누게 된다. 1549년부터 그의 친구인 얀 멜랑뜨리흐의 인쇄소에서 체코어 성서 프라하 출판을 위하여 유능한 언어학자로써 신약 부분의 번역 작업에도 참여한다. 1575년 관록있는 외교관이자 대변가로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정대사들이 모인 가운데 체코 신앙고백(Česká konfese)의 인정에 관한 회의에서 양종성찬파를 대표하게 된다. 얀 식스트가 후스 시대 역사까지 “체코를 불안정하게 한 1546-47년 두 해의 사건들”이라 표현한 그 사건에 자신도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얀 테오도르 식스트(Jan Teodor Sixt)는 프라하 신양종성찬주의자들과 연계하였다. 그들과 같은 편에 서서 체코 반합스부르크 봉기를 준비하는 기간에 신교 의회의 변호인으로 선출되었다. 이 저항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 이후 교수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 받는다. 그러나 구시가 광장에서 교수형을 받기 직전, 그의 영향력있는 친구들의 탄원으로 황제에게 면책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톨릭을 신봉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므로 추방령을 받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서의 삶을 마친다.
식스트家의 집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몰수당한다. 이후 황제의 프라하 장관들의 비서였던 필립 파브리시우스(Filip Fabricius)가 이 집을 하사 받지만 1618년 5월 23일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당시 장관들과 함께 창문 밖으로 떨어진다. – 이 빛 바랜 식스트家의 집은 지금은 단지 이름 뿐이고 (18세기 초 재건축 됨), 1층에는 와인바가 있다.
II/3 띤 사제관
3. 띤 사제관 – 띤 앞의 성모마리아 성당 옆
Týnská fara – při kostele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에서 출발하여 구시가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슈뜨빠르뜨스까(Štpartská) 거리가 좁게 나있다. 이 거리 오른편에 까렐 4세가 띤 앞의 성모마리아 성당(Panny Marie před Týnem) (다다음편에 우리는 이 곳을 둘러볼 것이다.)을 위한 사제관으로 건립한 5/601호 건물이 있다.
이 곳은 허옇게 바랜 색으로 써있는 ‘띤 앞’ (před Týnem)이라는 이름에서 설명된다. – 이 이름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띤(Týn), 띤 마당(Týnský dvůr) 혹은 운겔트(Ungelt) 등과 관련이 있다. 11세기에 이미 띤 이라는 이름의 안뜰에는 외국 상인들을 위한 여행자 숙소와 수입품 등에 관세를 매기는 세관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오늘날의 띤 사제관을 포함하여) 외국 병원과 더불어 작은 성모 마리아 교회가 건립되었다. 이 상인들을 위한 공간은 체코 왕 뿐 아니라 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돈이 나오는 가장 중요한 장소’ 였던 띤 마당은 – 독일어로 um Geld가 프라하 시민들에 의하여 발음이 와전된 채로 운겔트라 불리웠으며, 까렐 4세에 의하여 지어진 새로운 고딕 성당도 ‘띤 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체코 개혁시대에 띤 사제관에는 양종 성찬교회들을 관리하였던 후스 교의회(husitská konzistoř)가 있었다. 이 곳에서 대주교 얀 로키찬(Jan Rokycan)은 1424-1471년 사이에 모든 후스 교회들을 대표하였다. 띤 사제관은 반 개혁파가 재집권 할 때 까지 후스파 교회들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곳의 마지막 행정관이자 목사였던 이지 디카스투스(Jiří Dikastus)는 1621년 가을 띤 사제관을 떠나야했다.
II/2 히베른의 집, 화폐주조소 부꼬이 성
2. 히베른의 집, 화폐 주조소 부꼬이 성
(Dům „U Hybernů“, Někdejší mincovna Buquoyský palác)
화약탑 건너 편 공화국 광장 동쪽으로 제정 양식의 거대한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이는 히베른의 집(U Hybernů)이다. 이는 1355년 까렐 4세가 로마에서의 대관식을 마치고 암브로시오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트 수도회를 위하여 성 암브로시우스 교회와 수도원이 있던 자리이다.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 초기에 이 교회가 중요한 의미를 얻은 이유는 1419년 초 바츨라프 4세가 후스주의 신봉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 교회에서의 양종 성찬을 허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만 해도 양종 성찬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와 왕정(Kralův dvůr)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성 베네딕트 교회에서만이 가능하였다. 그 이후 성 베네딕트 교회는 철거되었고, 단지 지금은 거리 이름으로 교회에 관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베네딕트 거리- Benediktská ulice))
1차 후스 전쟁 시대에 암브로시오 베네딕트회 사람들은 프라하에서 추방 당하였다. 이단 형상들을 모두 없애고 프라하 내 교회의 조각상들과 그림들을 불태운 지그문트의 십자군 원정대를 막고, 프라하인들을 돕기 위하여 후스 급진파들은 1420년 성 암브로시아 교회 앞에서 집회를 가진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구시가와 신시가에서 후스파들의 큰 집회가 열리곤 하였다.
이후 뽀뎨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왕은 암브로시오 수도원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한다. 그러나 이들은 블라디슬라프 2세가 집권하였을 무렵인 프라하 전쟁시대에 성찬잔에 대한 설교로 1583년 프라하로부터 추방당한다. 반종교개혁 시기였던 1630년 수도원은 히베르인들 (아일랜드 – 라틴어로 히베르니아 Hibernia, 여기서 히베른 이란 이름도 파생되어 나옴.) 이라 불리웠던 아일랜드의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하여 재건되었다. 요세핀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해체되고, 암브로시아 교회는 이단으로 배척당하였다. 1789년 부터는 체코 극장으로 이 곳이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라섹의 소설 „F.L.Věk“을 극화한 작품에서 유명해진 바츨라프 트함(Václav Thám)과 춤의 명인 부토(Butteau)도 또한 이 곳에서 공연 하였었다.
화약탑(Prašná brana)을 지나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로 가보자. 이 곳에서부터 구시가 광장을 지나 프라하 다리를 건너 소지구외 흐라차니까지 이르는, 체코 지배자들이 지나다닌 王道(Královská cesta)가 시작된다. 한 100미터쯤 지나 왼편에 있는 36/587번지 집 앞에서 멈추어보자. (이 집은 아케이드와 거리쪽으로 난 발코니가 있고, 마치 그 집의 과거를 말해 주는 듯 군사들과 그의 대장의 조각상이 있다. )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벨플로비츠의 집은 1409년 바츨라프 4세가 왕정으로 편입시켜 체코 왕비들의 궁정(Dvůr českých královen)으로 탈바꿈하였다. 후스중의 시대 초기에는 구시가로 편입되고, 1420년부터는 후스의 주조소(husitská mincovna)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759년 주조원이었던 라요프의 파흐따(Pachta z Rájova)에 의하여 재시공된 동전 주조소의 벽면에는 오보츠니 뜨르흐 거리쪽으로 이런 현판이 있다. : 이 곳에 후스주의 시대인 1539년부터 1784년까지 동전을 만들던 주조소가 있었다.- 체코 화폐 100년의 기억. (1848년 이 주조소 앞에서 혁명 봉기 초기에 합스부르크 장군이었던 빈디쉬그뢰츠가 프라하 사람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바로 옆 건물은 1403 년부터 체코 영토 출신 학생들을 위한 체코 민족 대학 기숙사(Univerzitní kolej českého národa) 로 쓰였던 곳이다. 이 기숙사는 체코 개혁 당시 양종 성찬 교회의 학생들에게 제공 되었다.
첼레뜨나 거리 반대편으로 바로크 스타일의 집인 25/590번지 집이 있다.: 네 기둥의 집. (U čtyř sloupů) 이 집은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및 신학자였던 독일-이탈리아 계인 베르나르드 볼자노(Bernard Bolzano)가 살았고, 삶을 마감한 (1848년)곳이기도 하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계몽주의 신학 교수였으며, 독일과 체코 대학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보헤미즘’을 주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체코 땅 안에서 두 개의 민족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첼레뜨나 거리를 따라 약 100미터정도 내려오다 보면 20/562호 집이 있다. 이 곳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랑스 전투 사령관이었던 부꼬이 백작이 소유하였던 부꼬이 성(Buquoyský palác)이다. 부꼬이는 운명적인 빌라 호라 전투에서 황실 군대장으로 있었다. 신교도들을 누르고 승리로서 얻은 여러 재산중에 이 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1762년 이 집은 대학의 소유가 된다. 1880년부터 이 곳에 왕립 체코 교육 학회가 자리 잡는다. 몇몇 정보들에 의하면 이 집은 체코 개혁 당시 체코 형제단의 큰 후원자이자 리또미슐 지역 영주였던 뽀스뚜삐체의 보후슬라프(Bohuslav z Postupic)의 소유였다 한다. 형제단 교리에 관한 협의를 위하여 루까쉬와 바츨라프 끄라쏘니츠(Lukáš a Václav Krasonický) 형제가 지도하는 형제단의 임원들과 그리고 대학 교수들과 전문가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와 함께 이 집에서 모임이 열렸다. 1504년 새해 첫 날, 모임은 이루어졌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그 밖에 여러 해 동안 다양한 회의가 이 집에서 진행 되었었다. 1547년, 시 당국 대표들이 독일의 슈말칼덴 신교연합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페르디난드 1세의 도움을 거절했을 때, 중요한 회의도 이 곳에서 열린다. 뮐베르그 전투에서의 승리 후 페르디난드는 꼬스떽의 재산까지 몰수해 버림으로서 그를 응징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집도 그 때 몰수당한다. 17세기 초에는 프리드리히 팔츠끼가 집권하던 무렵 체코 왕실의 부총리를 역임하였던 미할로비체의 보후슬라프 (Bohuslav z Michalovic)가 이 집을 소유하였었다. 그리고 반합스부르크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