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획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16일)
  • 출 2:1-10
  • 설교자: 이종실

030316 사순절 둘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0
제목: 하나님의 계획

<본문>
1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설교>
단지 여행객이 아니라 삶의 근거를 찾으러 체코로 온 것은 누구나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체코라는 나라를 생각하고 오신 분들은 그리 많지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동기와 계기가 있어 기대하지 않게 체코로 오신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체코로 오게된것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나름대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일년 이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 치이고 생존경쟁과 타문화 환경에 시달리면서 시기와 질투와 오해와 자기과시와 불만과 짜증스러움이 점점 많아지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날에는, 도무지 자기보호의 성에 갇히고 그리고 이기적인 조그마한 자신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매일 살기에 급급하여 하나님에게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성이 있는가?
만약 관련성이 있다면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오늘 저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탄생이야기를 통해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모세의 탄생이야기 안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에서 나타났던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탄생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라기 보다 인간세상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냥 일어난 일로서 나타난 것 처럼 그렇게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나 모세의 탄생의 불과 몇 달밖에 되지않은 짧은 기간의 사건을 그 당시 그 시대의 순간으로 보면 불행과 행복을 교차하는 한
사람의 탄생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긴 역사의 여정에서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눈에는 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는 피 말리는 긴장이 감도는 순간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모세탄생 이전부터 있었음을 이야기 전체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권속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와서 4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였습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창대해지자 그들의 인구 숫자를 억제하기위해 잔인한 학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여하여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였습니다.
가공할 이와 같은 위협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먹구름처럼 밀려왔고 마침내 바로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 여든 살리라.” 명령하였습니다.

남자유아를 살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씨를 말려 민족의 미래를 없애버리려는 바로의 계획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외국인 증오로 자국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상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천인공노할 계획은 역사 이래로 지속되었습니다.
민족을 포로로 만들었던 바빌론의 시대가 그랬고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요 왕이신 예수를 제거하기위한 헤롯의 유아학살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흑인을 노예로 삼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인종을 청소하는 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표현을 담아낼 수 없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가득찬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안하고 좋은 시대에 살기를 원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시대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태어나는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시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태어난 때를 때론 저주하고 때론 저항을 하고 때론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라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던 시대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힘들고 어두웠을 때였습니다.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찬 가장 암울한 시대를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으로 삼으시고 그때 미래의 희망,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

저와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습니까?
미래의 희망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시간이심을 믿으십시다.
나를 둘러싼 고난의 시간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를 둘러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징표임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특별한 곳이 아닌 한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1-2절)은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이가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석 달 동안 자신의 아이를 숨겨서 키웠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신앙의 후배들은 그것을 자녀에 대한 일반적인 부모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11:23)
이스라엘 신앙의 후배들은 모세의 부모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 해야 할 분을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 산파가 나옵니다.
하나는 십브라이고 다른 한사람은 부아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그들은 진정한 통치자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바로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에 왕의 명령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모세의 부모의 결정과 행동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가 믿음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하더라도 애굽 바로의 막대한 권력 앞에 노예에 불과한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권력을 전복시킬 힘도 없고 그렇다고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를 숨겼습니다.
아이를 숨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대책을 믿음이냐 인간의 본능이냐 분석하는 것은 관념적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모세도 없습니다!

석 달!
아이를 더 감출 수 없는 시간이 임박할수록 초조하게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1분 1초 아니 순간일지라도 아이의 보호를 더 연장할 방도를 찾느라 혼란스러웠습니다.

갈대상자를 바르고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않도록 하여 아이를 포대기로 잘 싸서 그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 강가로 가서 갈대 숲 사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넣어 나일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어디에서 살던지 살아있기 만을 바라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이를 흐르는 강물에 홀로 두고 떠나는 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아 자꾸 뒤돌아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이를 지켜주시리라는 막연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결정들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간구가 그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를 낳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장)

그 상황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발걸음을 차마 돌리지 못하던 아기의 누이는 동생을 실은 갈대상자가 혹시 뒤집어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물에 빠지지않는지 아니면 잘 떠내려 가는지 멀리서서 바라보고있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딸아이를 부모들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으로 오던 시간과 그들이 아이를 버린시간이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유아살해의 명령을 내렸던 사람의 딸, 그 바로의 친딸이 왔습니다.
그 다음, 아직도 떠내려가지 못하고 빙글 빙글 제 자리를 돌며 갈대 숲에 놓여있던 바구니는 쉽게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경우 수 가운데 최악의 경우였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바로 이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겪는 상황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을 삭일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참다가 그 보다 더 한 일이 덮치면 그만 원망과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러나 비록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하지만 그것에 넘어지지는 마십시다.
하나님은 가장 나쁜 상황을 자신의 목적으로 바꾸고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공주는 종들에게 바구니를 열어보게 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생후 3개월쯤 되어보이는 갓난아기가 울고있었습니다.

공주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공주가 아이를 해칠 생각이 없는 것을 멀리서 본 아이의 누이가 지체하지 않고 공주에게 다가가 제안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먹이게 하리이까?”
공주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누이가 데리고 온 사람은 아이의 친 어머니였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에 대한 모세의 어머니의 반응에 대해 어떤 기록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기뻐하고 있다면 불행이 행운으로 바뀐 들뜬 기쁨이 아니라 바로의 통치너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기쁨과 전율일 것입니다.
 

바로의 딸은 “내 대신 아기에 젖을 먹이라.” 말하였습니다.
지금 모세의 친 어머니는 애굽 왕가의 자식을 양육하도록 부탁받고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의 삶이 상호 연관을 갖는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해야 됩니다.

지금 모세의 친어머니가 안고 있는 그 아이가 여러분의 아이라면, 여러분들은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우시겠습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노예의 자식에서 애굽 왕가의 자식으로 한 순간에 그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뒤바뀐 그 자녀를 가슴에 안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은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정치 경제 군사력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는 미국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영향을 주는 나라의 주류사회에서도 핵심주류의 사람으로 잘 키워 보겠다는 생각입니까?
아니면, 억압받고 고통을 겪고있는 노예들의 희망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시겠다는 생각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애굽의 왕가의 자녀로서 그 아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노예의 신분인 히브리인으로 그를 키웠습니다.

모세는 후에 애굽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1절을 읽어보시면 당시 그는 히브리인들을 자신의 동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히브리인으로 살았습니다


브리기자는 모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다 생략하고 오늘 설교의 초점으로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만약 모세의 어머니가 단지 자신의 행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교회를 봉사로 섬기고 감사헌금과 십일조의 예물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드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행복해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만 하고 그 사건이 자신의 책임과는 어떻게 관련을 갖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해서 어떤 의식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믿음에 의한 인간의 책임이 일치되는 길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건에 대한 믿음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전에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 믿음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의 특성을 오늘 본문은 감추어진 그림으로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딸,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를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가족들은 원수에 대한 마음의 분노를 폭발하지않고 오히려 공주가 아이를 해하려 하지않는 불쌍한 마음, 선한 마음을 원수의 딸에게서 발견하였습니다.


약 이들이 “안돼! 우리를 이토록 못살게 구는 원수 애굽에게 동생을 넘기느니 차라리 우리들의 손으로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아.” 이렇게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로부터 선한 것을 발견하는 마음 그것이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책임 또한 눈뜨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책임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 우리들은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힘, 마음의 눈을 스스로 키워가야 함을 오늘 성경은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모세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읽는 저희들은 압니다.
바로의 딸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신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서
불행의 자리에서
죄악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 받은 자의 충만한 기쁨과 희망과 전율의 체험이 사순절 둘째주일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의 체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의 궁극적 해결

  • 연합 예배 (2003년 04월 06일)
  • 요 11:17-44
  • 설교자: 이종실

030406ek 
Jan 11: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죽음을 등에 업고 다닙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가운데 죽음은 가장 잔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잊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날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죽음을 만납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만연했던 그 당시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이 편히 쉴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고통이 이 집에 닥쳤습니다.
나사로는 치유할 수 없는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웃음이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다음날 고통이 저 바닥까지 그들을 밀어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인간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장사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에 마르다가 대답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말한 이 구절은 유대주의 특히 바리새인의 정통 교리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나는 압니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녀는 하늘과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고있습니까?
마르다의 경우, 그녀의 고백이 도움이 되지않았습니다.
그녀가 했던 것 처럼 죽음 후에 일어난 것에 대한 일반적인 희망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그녀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직접 우리자신 또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의 현실이 닥쳤을 때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한 희미한 희망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대담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질문이 얼마나 굉장한가!
주님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그녀가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예수님이 그녀에게한 질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단지 도식화된 진리를 믿느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그녀가 믿는지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를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마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가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말을 똑같이 하고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 주위의 사람 모두도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주님은 분노와 흥분을 느꼇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거칠고 무서운 협박하고 맹렬히 ㅅ람의 생명을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는 죽음의 힘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는 흥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단지 나사로를 사랑하기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황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한숨에서 사람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흘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드럽게 묻고계십니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은 교리나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으로 걸어가/ 섰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을 옮겼을 때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것 즉 메시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집은 죽음의 세력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나사로와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고생, 병들고 늙고 결국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여러분”은 짧은 표현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있지만 죽었던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다시말씀드려 생명의 근원이 없기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없다면 육체적인 죽음이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생애 어디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슬픔과 절망이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영적으로 죽은것입니다.

무덤의 나사로는 분명히 인간의 상황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리고 귀한 삶의 시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자신의 존재의 귀함을 상실하고 생명의 불꽃을 상실합니다.
죽은 물고기처럼 파도에 따라 움직이듯, 그들은 세상의 악의 세력에 의해 끌려다니고 욕심에 의해 조종당하고 그리고 생명의 그릇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않고 미움과 속임으로 살아갑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되어 시체가 부패되고 악취가 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은혜로 받은 풍성한 생명을 상실하고, 청결함이 한조각도 없게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부패하고 썩는 냄새가 나서 시체가 된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음성이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가 무덤의 흔적을 지닌채 나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이 부름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유대 종교적인 권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에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주님은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내고 자신의 생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에서 불러내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커다란 음성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의 실천을 통하여 무덤 안에 있는 아직도 죄의 냄새와 죽음이 가득찬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 밖에서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너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라”
무덤안은 저와 여러분들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나아갑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무덤을 떠나 예수께 나아올 때 우리들은 살것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살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들은 영생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있습니다. (아멘)

2003년 4월 6일

오늘예배에 특별한 사항은 없다. 전날 토요일 밤부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며 한동안 눈이 쏟아지더니 아침에도 여전히 춥고 꾸물대는 날씨가 눈발을 날렸다. 이런 궂은 날씨에도 연로하신 노인분들은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 계신다. 슈토렉 목사는 병원에 입원하여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이종실 목사는 드로빅 목사와 함께 예배를 준비하였다. 슈토렉 목사의 건강문제로 금년에 부활절예배는 함께 드리지 않기로 하였다.

베셀리 목사님 고별예배(장례식)

우리교회 베셀리 장로님의 아버님이시자 우리교단의 목사님이신 까렐 베셀리 목사님이 91세의 일기로 지난 토요일(3월 8일) 아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별예배가 3월 14일 오후 4시 우리 교회당에서 있습니다.

가족장으로 열리는 고별예배는 프라하노회장이신 또마쉬 비섹 목사님 또는 이지 슈토렉 목사님이 집례하시게 됩니다.

아버님을 여윈 우리 체코교우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을 함께 나눌때 체코와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만남 또한 더 깊어질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서 많은 분들이 고별예배(장례식)에 참석하시길 부탁드립니다.

2003년 3월 2일

한동안 홈피를 정리하지 못했다.
오늘 예배에 투병 중인 슈토렉 목사가 의자에 앉아서 설교를 하였다.
마치 감기환자가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면 다시 일을 하듯 그는 조그마한 힘만 있어도 그 힘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한다.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은 그의 육신을 지배하지만 그의 믿음과 의지를 아직 꺽지 못하고있다.

그의 오랜 투병으로 에큐메니칼 예배가 점점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다.
예배에 대해 다음 설교의 주제에 대해 이종실 목사와 슈토렉 목사의 토의시간이 없어 자연스럽게 예배의 취지를 지속적으로 살려나가지 못하고 있다.
체코 교우들은 이 예배를 교류 프로그램 정도로 점점 인식하고 있고 한국교우들도 결석이 잦다.
양쪽 교우들이 함께 드리는 이 예배 자체가 이미 선교적인 선언임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슈토렉 목사는 지속적으로 이 예배를 참여하고싶어한다.
지금은 그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도록 그리고 일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꺽지않으려고 이종실 목사가 설교를 동시에 준비하고있다.
만약 슈토렉 목사가 강단에 서지 못할 경우 이종실 목사가 대신 설교를 하기위함이다.
예배의 취지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슈토렉 목사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시점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