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쁠라띠스 – 전 후스 개혁 시대의 과거가 깃든 공간

12. 쁠라띠스 – 전 후스 개혁 시대의 과거가 깃든 공간
(Platýz – areál s předhusitskou minulostí)

17세기 루돌프 2세의 궁정원이었던 플라텐슈타인의 플라타이스(Plateise z Platteneteinu)가 건물을 기초한 이후, 또한 나중에 앙피르 양식(프랑스 제정 양식:역자 주)과 고전주의 양식으로 재시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 건물 안 안뜰 공간 속에 본래의 르네상스 양식은 잘 보존되어있다. 그리고 몇몇 창고 안에는 오래 전의 구시가 성벽 기초석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있다. 그 당시 프라하 지형도에 의하면 중세 그 장소에 고딕식 집이 있었다. 그 집 주인들은 후스 개혁 시대의 멀지 않은 벽 속의 마르띤 교회와 또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양종 성찬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체코 개혁의 과정들을 암시하는 또 다른 묻혀있던 기념물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 첫번째 지역 여행에서 이미 여섯번째 순서이다. (2, 5, 7, 9, 10회)

15세기 초에 오래된 고딕식 집 주인은 구시가 시장(市長)이자 엿기름 만드는 이였던 스트지브로의 얀 브라다띠(Jan Bradatý ze Stříbra)였다. 이 사람은 1419년 후스주의자들 리스트에 등록한다. 반 후스개혁 전쟁 때에는 프라하의 성배 주의자들 편에서 싸운다. 1426년에는 우스띠 나드 라벰 전투에서 십자군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 때에는 이 집에서 두 후스개혁파의 우두머리가 모여 주요한 회의를 연다. 온건파를 이끈 사람은 성 일리 교회의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이고, 급진파 주동자는 영국 옥스포드 뿌리를 따라 ‘파인 잉글리쉬’라 불리우는 뻬뜨르 빠이네(M. Petr Payne) 였다. 리빠니 전투 패배 (30.5.1434) 이 후에는 벽 속의 마르띤 교회의 행정원까지에게도 신뢰를 얻었던 끄볘뜨니체의 홀레츠(Holec z Květnice)가 집을 소유한다. (교회 천정 아치 부분의 그림 비교) 쁠라따이스 기사는 1586년 집을 매입하여 르네상스 양식으로 집을 개축한다. (그의 이름으로부터 연유하여 나중에 사람들은 이 건물을 쁠라띠스라 부른다.)

쁠라띠스로 프라하 개혁 유적지 여행 첫 부분을 마감하도록 하자. 쁠라띠스 벽으로부터 나로드니 트지다(Národní třída)를 지나 10월 28일 거리(ulice 28. října)로 가서 바츨라프 광장의 무스텍 역으로 가자.

(첫 부분을 모두 돌아보는 데에는 25-35분 정도 소요된다.)

11. 벽 속의 성 마르띤 교회

11. 벽 속의 성 마르띤 교회 (Kostel sv.Martina ve zdi)

교회의 이 독특한 이름은 중세 교회 형태와는 다른 모습과 관련이 있다.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던 성 마르띤 채플은 예전의 성 마르띤 우예즈드 (움푹 파인 길이라는 뜻:역자주) 지역에 있었다. 바츨라프 1세 집권 시절인 1232년 구시가 성벽이 완공된 이후 채플의 남쪽 벽이 성벽에 포함된다. 1350년 고딕 양식으로의 재건축이 끝난 이후에도 신 교회는 계속 성벽의 일부로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후스개혁 시대에는 양종성찬 교회로 흡수된다. 이 곳에서 얀 후스(Ja Hus)는 사제 서품 이후 첫 설교를 하게 된다. 지역 교회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베들레헴 채플의 완공 후 마르띤 교회는 베들레헴 채플과 \"동등한\" 지역 교회가 된다. 그래서 1414년 가을, 당시 신부였던 흐라데츠의 얀(Jan z Hradce)은 후스 이후 베들레헴 채플을 담당하던 야꼬우벡(Jakoubek)의 부름을 받아 일반 신도들에게도 성배가 주어지는 양종 성찬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이 성찬 방법(라틴어로 sub utraque parte – 양종 성찬법)은 야꼬우벡(Jakoubek)에게 1415년 봄 콘스탄츠 감옥에서 보낸 응답으로 후스가 승인 한 것이다. 베들레헴 설교관에서 나온 이 개혁적인 소식은 성찬식에서 성배를 모든 이가 함께 공유한다는 의견에 대한 큰 강조였다. \"평신도 성배\"는 일찌기 다른 교회에서도 이루어졌다. 후스의 순교 이후 바츨라프 4세는 프라하 사람들에게 프라하의 8개 다른 교회에서도 양종 성찬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벽 속의 마르띤 교회는 베들레헴 채플의 지역 교회로 반 개혁 초기시절, 즉 양종 성찬의 마지막 목사였던 야꿉 야꼬비데스(Jakub Jakobides)가 1621년 프라하를 추방 당했을 때까지 역할을 다하였다. 1678년 교회는 차츰 화재를 당하였지만, 약 100년 후 바로크 양식으로 조금씩 바뀔 즈음 재건될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 교회 옆에 그의 조각으로 프라하를 장식하였던 조각가 가족인 브로꼬프家(rodina Brokoffů)의 사체가 안장되어있다. (교회의 북쪽 측면에는 F.M. 브로꼬프 초상이 부조되어있는 현판이 잘 보존되어있다.)

요제프 개혁시대인 1784년 마르띤 교회는 없어지고, 계속 가게 창고로 쓰여지다가 나중에는 야간 카페로도 쓰인다. 1904년 프라하 자치 당국은 낡은 교회 건물을 사들여 1905-6년까지 건축 공사를 하게 한다. 그 당시 내부 공간 안에 있던 성물 안치소가 발견 되어 원래의 로마네스크 양식대로 복원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세워지고 프라하 시는 영어 예배를 위하여 감리교단에 이 교회를 대여한다. 나중에 교회는 저녁 학생 청년 예배를 위하여 체코 형제개혁교단에 위탁된다. 체코 형제개혁교단은 1975년 교회 공사에 관여하게 되는데,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친 후에는 교회 내부에 오르간도 설치한다.

교회 재단 뒤 반원형으로 된 부분에 펼쳐진 성서와 함께 있는 성배상은 체코 개혁의 기본적인 상징이다. (상징은 이 책 표지에 나와있다.) 지붕 아치에 있는 두 문장은 중요한 두 후스파 시대의 가문의 문장을 의미한다: 블까노프家(Vlkanov, 반은 개, 반 늑대 – 오른편)와 끄볘뜨니쩨의 홀레츠家 (Holec z Květnice, 왼편의 백합 문장).

벽 속의 마르띤 교회 뒷편 연와조 건물안에 나로드니 트지다(Národní třída)로 통하는 복도가 두 개 나 있다. 이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20m정도 넓은 복도와 쁠라띠스 마당까지 올라가도록 하자.

10. 학사 지역 (밀리츠의 예루살렘)

10. 학사 지역 – 밀리츠의 예루살렘

베들레헴 광장에서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서 종교개혁 시대 이전의 유적과 관련된 문화재를 만나게된다. 재건축한 학사 일대의 둘러싸인 담 안에 회색 수녀(šedy sester) 수도원인 성 바르토로메 바로크 교회당의 탑이 높이 솟은 곳이 있는 꼰빅스께 울리쩨 (번역하면 학사 거리 – 옮긴이) 까지 걸어간다. (평일에 건물의 일부가 장식무늬의 아치와 연결된 새롭게 수리된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좁은 통로 길을 따라 바르또로미예스까 울리쩨 (바르토로메 거리 – 옮긴이)까지 걸어나오면 교회당 입구가 나온다. 왼쪽(동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학사 지역을 둘러볼 만 하다.)

설교자들을 교육하던 끄로미에지쉬의 밀리츠 (Milič z Kroměříž)가 1472년에 조직한 프라하 매춘녀들을 수용하는 새 예루살렘(Nový Jeruzalém) 이라는 사회복지 시설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이 학사 지역이다. 사회복지 시설은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일부 건물을 까렐 4세가 대학에 주었고 나머지는 시토 수도회에 넘겼다. 후에 밀리츠 추종자들의 모임이 이 시설을 다시 시작하였고 그리고 베들렘 까펠 운영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만든 갱신운동을 도왔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시토 수도회를 이어 1660년에 독일을 포함하여 귀족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서 멋진 학사를 이곳에 건축한 예수회가 구 건물들을 차지하였다. 젊은 귀족들이 (개혁파 가문 출신도 포함하여) 로마 카톨릭 종교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예수회가 해체된 후(1773년) 인쇄소로 용도변경을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한때 대규모 식당이었던 곳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들, 음악회와 무도회가 열렸다. (1798년 이곳에서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863년에 바그너 Richard Wagner가 연주를 하였다.) 1840년에 이곳에서 첫번째 체코 무도회가 열렸고 나중에 이곳은 영화관이 되었다. 1830년부터 이곳은 안토닌 드보작(Antonín Dvořak)이 공부를 했던 프라하 오르간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재건축된 학사 지역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 남동쪽의 모퉁이에 이 문화재의 주요 일지를 적은 작은 문화재 설명판이 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블다바 강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12세기 초의 가장 오래된 로마 로툰 양식의 성 크지슈 채플에 다다른다. 바로 가까운 까롤리나 스비에뜰라 거리 모퉁이에 (316호 건물에) 후스파 시대에 레츠꼬바 (Rečkova)라는 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이 기숙사는 양종성찬 시대의 체코 교회 학생들을 위해 세워진것이다. 약간 떨어져 블타바 강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1519년에 슈마바 지역의 보우비나에서 프라하로 온 뽀우스떼브닉(Poustevník)으로 알려진 설교가 마뗴이 (B. Matěj)가 진흙벽돌로 세웠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520년에 프라하의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이곳에서 보살폈다. 대담한 설교로 옥에 갖히고 결국 프라하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우리들의 여행은 이곳 바르또로메이스까 거리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 동쪽방향으로 걸어간다: 나 뻬르슈띠녜 (Na Perštýně) 거리와 만나는 사거리까지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음 왼쪽편 거리 마르띤스까 (Martinská)까지 걷는다. 여기서 종교개혁 시대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9. 슈띠뜨니 주택

9. 슈띠뜨니 주택

후스파 시대 초기에 베들레헴 까펠 바로 동쪽으로 남 체코 지주인 슈띠뜨니의 토마쉬 슈띠뜨니(+1401)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지은 고딕건물이 있었다. 그는 체코 종교개혁자들의 일반대중 지도층에 속하였으며 체코 시골에 그리고 나중에는 프라하에 토지를 구입하여 종교개혁을 도왔다.

토마쉬 슈띠뜨니는 까렐 대학 제 1회 졸업생이 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시골 저택에서 대가족을 돌보기 위해 대학과 신부의 길을 포기하였다. 얀 밀리츠와 대학 선생들의 학생들을 위한 설교에 받은 깊은 감동으로 편지를 썼고 기독교인의 바른 삶에 대한 설교형태의 글쓰기에 깊이 빠졌었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위해서 (“클럽 대화” 1370년) 처럼 더 폭 넓게 특별히 농촌을 위해서 (“일요일과 공휴일 대화” 1392년) 중세 라틴어 방식과 다른 체코어로된 많은 신앙적이며 교육적인 소책자들을 발간하였다. 특별히 그의 중요한 저술인 1376년에 발간된 “기독교의 일반적인 사항에 대한 6권의 책”은 종교개혁 운동을 촉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슈띠뜨니는 말년에 생존한 두 자녀 아네슈까와 얀과 함께 영적인 삶과 일반적인 도덕의 갱신을 위한 노력의 희망적인 근거지였던 프라하 베들레헴 까펠 부근에 살았다. 그의 딸 아네슈까를 위해 후스의 설교단 오른쪽 위쪽에 있는 특별 좌석 가운데 유명한 인사의 좌석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얀 후스 선생의 저서 “어린딸, 그리고 구원의 바른 길을 깨달음에 대하여”는 그녀에 대한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슈띠뜨니 주택은 종교개혁 프라하 유적지로 선정되었다.

8. 베들레헴 채플

8. 베들레헴 채플(Betlemská kaple) – 신축 건물

원래 이 채플은 바츨라프 4세(Václav Ⅳ)의 궁정원이었던 밀 하임의 얀(Jan z Milheimu)(혹은 하누쉬, Hanuš)(독일 원명은 „폰 뮐하임“)의 재원과 채플 자리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부유한 상인이었던 바츨라프 크쥐쉬(Václav Kříž)의 기부로 1391년 5월 24일 착공하여 1394년 완공한다. 이 둘은 프라하지역에 오직 설교만을 위한 공간을 세우고 싶어했던 밀리치와 마뗴이의 소망을 이루는데 한 몫 했던 것이다. (기증 받은 토지가 공사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을 알자 그 옆에 묘지 였던 자리와 식료품을 보관하고 있던 공공 창고 및 일반 토지를 매입했어야 했다.)

약 3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15개의 기둥이 있는 이 고딕식의 건축물은 (개혁 운동의 적을 나타내는) 밀하임이 기초한 선언문의 내용 대로 – „베들레헴, 번역하면 떡집이라는 뜻으로 일반인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신성한 설교 말씀으로 충만해 지는 곳“ – 사용되어져야 했다. 성인들, 신학생 등 베들레헴의 신생 기념물로 취급되었고 이는 곧 대학과도 연결 되었다. (까롤리눔의 원로 지도자들과 프라하 시장은 이러한 설교자들의 규정에 곤혹스러워 하였다.)

이 채플은 교회법이나 의무를 다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설교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 할 수 있었으며 체코 개혁의 첫 선언의 장이 될 수 있었다. 얀 쁘로띠보프 신부(Jan Protivov, 1396년 까지)와 꼴린의 슈뗴판 (M. Štěpán z Kolína, 1402년 까지) 이후 얀 후스(Jan Hus)가 설교자가 된다. (대학에서 까지) 얀 후스는 베들레헴 설교관에서 늘어나는 청중들의 흥미에 따라 대학 내에서 선별된 개혁사상의 울림들을 스스로 체험하게 된다. 초기에는 (1408년까지)영국의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Viklef)의 사상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프라하의 개혁 신학자 밀리치(Milič)와 야노프의 마뗴이(Matěj z Janova)의 사상에 따라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이후에는 전쟁을 목적으로 한 면죄부 판매에 따른 결정적인 저항정신을 설교하였다.

후스가 설교 할 때에는 배운 사람들이건 못 배운 사람들이건 전 시민 계층이 함께 어우러졌다. (소피에 여왕(Královna Žofie)도 심복 얀 쥐슈까(Jan Žižka)를 대동하고 설교하는곳에 왔었다.) 후스의 늘어나는 신도들 때문에 프라하의 다른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감소로 불만을 품었다. 후스는 또한 몇몇들을 혁신시켰다. 교회의 그림들과 조각상들을 십계명과 사도들의 간증내용, 찬송가 가사들로 교체시켰다. 예배시간에는 직접 만든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교황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와 교육 활동은 계속되었다. 프라하에 성무금지령(1412년 9월 모든 종교의식활동을 금지)이 내려지자 이제는 교외로 내려간다. 그 곳에서 종교회의에 참석하시 위하여 콘스탄츠로 떠날 때까지 좀 더 넓은 하늘아래에서 설교를 한다. (동시에 주된 작품들을 완성한다.) – „주님을 증언하리라, 주님의 가장 신실한 성서를 위해서라면 죽음까지 견디리라.“ 조금 더 덧붙이자면, 후스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분노한 체코 귀족들은 1415년 9월 2일 콘스탄츠에 있는 공의회에 452명이 서명을 한 항의 조항을 보낸다. 이는 로마 카톨릭 지배 권력에 대항한 첫 항거이자, 첫 체코 프로테스탄트의 진정한 외침이었다.
후스의 순교이후 (1415년 7월 6일), 목사 자리는 그 당시에 대학 총장이었던 스트지브로의 야꼬우벡(M. Jakoubek ze Stříbra)이 물려받는다. 그는 모든 신자들이 예배시간에 성배를 모시는 것까지 아우르는 개혁 프로그램을 끌어들이는데에 성공한다. (드레스덴의 목사들, 특히 미꿀라쉬(M. Mikuláš) 목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콘스탄츠 감옥에 수용되어있던 후스의 동의 이후, 야꼬우벡은 주위의 ‚벽 속의 마르띤 교회‘(Kostel Martina ve zdi)에도 양종성찬의 전례를 적극 권유한다. 평신도 성배는 베들레헴 채플에서도 교회 최고 권력은 로마 교회 계급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최고라는 개혁에 관한 신념으로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 때문에 얀 후스는 최고 법원에 항소를 하였다. 야코우벡 이후로 베들레헴 채플의 새로운 목사는 드라호프의 바츨라프(Václav z Dráchova)가 되었다. 그러나 리빠니 전투 이후 1346년 지그문트 황제는 프라하로부터 그를 추방시킨다. 1448년 뽀제브라디의 이지왕이 집권하자 베들레헴 설교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추방당하였던 기간동안 그를 대신하여 일리 교회의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이 공석을 메웠다.
야겔론 왕조의 루드빅이 집권하였을 1521년에는 이 곳에서 또한 독일어도 사용되었었다. 마틴 루터 박사(dr. Martin Luther)의 신실한 제자였던 또마쉬 뮌처(Tomáš Müntzer)가 대학 귀빈으로서 프라하에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뮌처가 체코의 양종성찬 주의와 독일 개혁사상이 밀접해지는 것에 도움을 주리라 기대 하였으나 오히려 급진적으로 그 자신의 새로운 세례와 사회에 관한 의견을 선전하는데에 급급하였다.

그 당시 루터 사상에 관심이 있었던 독일시민그룹은 또마쉬 뮌처(Tomáš Müntzer) 를 프라하로 초청하였다. 체코어로 통역된 설교를 하면서 뮌처는 후스의 사상에 이의를 제기 하였고, 그의 설교는 민중 계급 속에서 더 특별한 목소리를 내었다. 체코 뿐 아니라 독일에도 널리 전파 하려했던 하느님 나라를 체코에 강제로 건설하려 했던 후스파의 목적과 연관된 곳에서 우선 먹혀들었었다. 그러나 대학 내의 교수들은 뮌처의 사회 급진론과 천년왕국설을 거부하였다. 뮌처는 강제 추방을 당하기 전까지 기독교 사회의 혁명적 부흥에 관한 “선언서”를 내는 것에 만족해하였다. 뮌처가 지방 봉기에 실패한 후 1525년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하였을 때, 프라하에서는 그의 독일 및 체코 추종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당하였다.

베들레헴 채플은 1609년 7월 12일 루돌프 2세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양종성찬 교회 하에 있었다. 그 때까지 법 외에 있던 체코 형제애단(Jednota bratrská)의 사용까지도 허용이 되었을 때였다. 새 교회의 행정관은 1618년까지 마뗴이 찌루스(B. Matěj Cyrus)였고, 1620년부터 1622년까지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나중에 꼬멘스끼의 사위가 되는 얀 찌릴(Jan Cyril)이었다. 반 개혁파가 집권하고 난 후 몰수당한 채플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재산이 되고 1661년 예수이트들에게 판다. 예수이트들은 고딕식의 박공을 없애고, 설교관을 가렸으며 벽에 있던 문장들도 제거하였다. 그러나 지붕 밑 다락방을 포함한 채플의 일부분을 후스주의 사람들의 설교관을 위하여 도로 판매한다. 1777년 예수이트 법령이 해재된 후 채플은 사용되어지지 않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문을 닫고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781년 관용령이 선포된 후 프라하에서 새로 발족된 개혁교회 모임을 위해 사용되었다. 1786년 이미 황폐해 진 채플은 파괴된다. 단지 세 벽만 남은 자리에 1836-37년 꽤 큰 아파트 건물이 세워진다.

프라하 개혁주의파들과 체코 애국주의자들은 “체코 개혁의 요람” 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채플을 재건하려는 노력은 친카톨릭의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는 거의 허사였으며 게다가 채플자리 일부분이었던 255호집은 독일인의 소유였다. 1919-20년에 걸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채플의 일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첫 민족의회는 아파트를 사들여 베들레헴 채플을 재건하자는 얀 헤르벤(Jan Herben) 작가의 안건을 받아들였다 한다. 그러나 까롤리눔 신축을 우선시 한 까닭에 이 계획은 무산된다. 이 과제는 후스 박물관 협회의 과제로 남아있었으나 이도 재정 부족문제가 있었다. 1941년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앞장을 서 베들레헴 채플 재건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발족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파트는 독일인 재산으로 압류되고 건물을 없앨 수 있었다. 피에타 상과 더불어 원래 채플대로의 재건축은 체코슬로바키아 문화부에서 담당하여 1950년에서 1954년 사이에 복원된다.

신축된 베들레헴 채플은 지붕 대들보로 크기가 나타나 있는 대로 이전의 평면 모양과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쪽 벽면이 예전 그대로의 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 대형 고딕식 창문, 설교인들의 집과 설교관 입구이다. 서쪽 부분은 세 고딕식 창문이 복원되었다. 채플 공간안에 있는 원래의 우물도 그대로 두었다. (깊이 8미터) 후스와 야꼬우벡의 글에서 따온 벽에 있는 문장뿐 아니라 신자들이 찬송을 위해 쓰였던 노래 가사도 복원되었다. 옌스끼의 후스시대 필사본과 리헨탈의 콘스탄츠 연대기, 벨리슬라프의 성서 내용에 따른 그림들이 추가 되었다. 동쪽 벽면 뒤쪽에 있는 기념 현판은 이 곳에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후스의 항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세 청년(마르띤, 얀, 스따셱)이 은신하였으며, 구시가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음을 알려준다. – 채플 서쪽으로 고딕식의 정문과 더불어 설교자의 집도 예전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이 곳에서는 몇 년간 얀 후스도 제자들과 생활하였었다. (이 집안에는 이전 중세스타일의 타일이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이 채플에서는 후스의 활동 뿐 아니라 베들레헴 채플이 재건되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