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종교개혁 유적지 순례] 1. 까롤리눔과 까렐 대학

* 이 자료는 이지 오떼르 박사의 <프라하의 종교개혁 유적지> 체코어판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저자와 번역 출판을 약속하였다. 어디에 얽히지 않으면 번역이 점점 늦어질것 같아 매월 발간되는 체코 프라하 한인 소식지 나눔터에 게제하고 있다. 이 번역은 나눔터를 함께 만들어가는 조영란씨와 공동으로 번역을 하였다. 폰드관계로 깨어진 글자는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것은 인쇄를 하면 원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폰드관계로 깨어져 보이는 글자는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목사 이종실)

지역 1
구시가 – 중앙, 남서부

차례
1. 카롤리눔 – 대학교 (Karolinum – Univerzita)
2. 성 하벨 교회와 멜랑트리히의 집 (Kostel sv. Havla a někdejší dům Melantrichů)
3. 구시가 광장의 후스 동상 (Husův pomník na Staroměstské náměstí)
4. 구 시청사 (Staroměstská radnice)
5. 성 니콜라스 교회와 구시가 주위 (Kostel sv. Mikuláše a staroměstské okolí)
6. 성 미할 교회 (Bývalý kostel sv. Mchala)
7. 성 일리 교회 (Kostel sv. Jiljí )
8. 베들레헴 교회 (Betlémská kaple)
9. 슈티트니家 저택 (Někdejší dům rodiny Štítných)
10. 콘빅트 홀, 밀리치의 예루살렘 (Areál Konvikt, někdejší Miličův Jeruzalém)
11. 성 마르틴 교회 (Kostel sv. Martina ve zdi)
12. 전 후스주의 시대의 플라티스 홀 (Areál Platýz s předhusitskou minulostí)

중세 체코 문화의 토대이자, 결국 체코 개혁 운동의 산파 구실을 하였던 카렐 대학을 제외하고서는 체코 종교 개혁의 자취를 따라가는 프라하 도보 여행을 시작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안에서 후스 개혁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발전하였으며, 점차 개혁 교의에 관한 자료들도 만들어 졌다. 오늘날까지 카렐 대학을 대표하는 것은 카롤리눔 강당이다. 이로서 우리는 첫 발걸음을 이 곳으로 향하도록 한다.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 아랫 부분에 있는 지하철역 ‘무스텍(Můstek)’에서 ‘나무스트쿠(Na Můstku)’ 거리를 통해 내려와서 ‘리티즈스카(Rytířska)’ 거리를 만난다. 이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젤레즈나(Železná)’ 거리와 만나는 곳에 르네상스 건물인 스타보브스케 극장(Stavovské divadlo)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타보브스케 극장(Stavovské divadlo) (이전의 노스티츠 극장(Nosticovo divadlo)은 1781-83년 F.A. 노스티츠 백작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중앙 입구에 걸려있는 현판은 이 곳에서 1787년 요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Don Giovanni)’ 초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834년에는 요세프 카예탄 틸(Josef Kajetán Tyl )의 극 ‘피들로바츠카(Fidlovačka)’에서 프란티셱 슈크로우프(František Škroup)가 작곡의 극 중 삽입곡인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Kde domov můj)’가 처음으로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1- 카롤리눔 Karolinum (카렐 기숙사, 라틴어로는 Collegium Carolinum)

카렐 대학교 (Karlova Univerzata)본관은 스타보브스케 극장 왼편에 서 있다. 이 건물의 본래 정면 부분은 젤레즈나 거리로 나 있었고, 오늘날 건물 중앙 입구는 극장 뒤 왼편, 잘 가꾸어진 안뜰 쪽으로 나 있다. 지금은 건물 2층 대학 강당 측벽 가운데에 그 부분이 보존 되어있는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 교회(Kaple sv. Kosmy a Damián) 의 고딕식 교각 사이를 따라 좁은 길을 통해 들어가 보자.

카렐 4세(Karel Ⅳ, +1378)는 1348년 프라하에 대학을 설립하였다. – 북쪽으로는 알프스, 서쪽으로는 파리까지의 유럽지역에서 설립된 최초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대학 본관은 없었다. 초기에 수업은 교회 부속실이나 수도원, 교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구시가 유태인 지구 주변에 카렐 4세가 구입한 집들 조차도 학생 기숙사 이외에도, 여러 가지로 필요한 공간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 때 카렐의 후계자인 바츨라프 4세(Václav Ⅳ, +1419)는 1383년 은화 주조원이었던 J. 로틀레프에게 거대한 고딕식 저택을 구입하여, 근처 두 개의 건물과 함께 대학 건물로 활용토록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오늘날까지 고딕식 1층으로 보존되어오고 있다.) 점차적으로 진행된 공사로 강의실로 필요한 공간들과 교수 및 학생들의 기숙사가 생겨났다.

카롤리눔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 측벽 가운데 있는 교회의 교각 사이 사이를 볼 수 있는, 2층 강당이다. 오늘날 강당에는 카렐 4세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카렐 포코르니의 작품) 이 곳에서는 입학식, 졸업식 및 각종 교내 행사가 이루어지며, 후스의 노래 ‘예수 그리스도여, 자비하신 분이시여’가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울려 퍼진다. 이는 1396년부터 얀 후스(Jan Hus)가 개혁운동을 시작한 이후, 카렐 대학이 첫 종교 개혁의 정신적인 온상이자 연단이 되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후스는 곧 대학 내에서 주요한 인물이 된다. 1401-2년 철학부 학장으로 선출되었고, 1402-3년과 1409-10년 대학 총장으로 재임한다. 그의 ‘alma mater’를 바탕으로, 개혁 운동을 시작하고 이끌었다. 특히 1402년부터, 대학 교회였던 베들레헴 교회에서의 설교 활동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교의와 연결되어, 얀 후스도 철학적인 사실주의의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 복음의 가르침과 초기의 사도들의 교회화 방법으로의 철저한 회귀로 기초부터 ‘머리부터 사지까지’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 외국 성직자들은 반대를 한 반면, 후스의 개혁안은 평의회에서부터 기대를 모아, 종교 회의를 소집한 바츨라프 4세도 체코 성직자들과 모여 힘을 실어주었다. 그 당시 대학은 파리의 본을 떠서 4개의 학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철학부, 신학부, 의학부, 법학부) ; 교수들과 학생들은 태생에 따라 4개의 ‘민족’ – 체코인(체코 내 독일인 포함), 바바리아인, 색슨족, 폴란드인으로 구분되었다. 각 ‘민족’은 중요한 결정 사항 앞에서 한 표씩을 행사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대학 내에서 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후스와 예로님(Jeronym)의 주장으로 이러한 제도는 1409년 왕의 쿠트나호라 칙령(Kutnohorský dekret)으로 바뀌었으며, 이후로 체코 민족에게는 3 표를 주고, 외국인들에게는 한 표를 주게 되었다. (칙령은 카롤리눔 앞마당에서 성대하게 발표되었다.)

위클리프의 교의에 대한 논쟁이 극에 달하고 있을 무렵 후스는 실질적인 개혁 싸움을 시작한다. 즈비녝(Zbyněk) 대주교는 반 후스파 입장에 서게 된다. 공개적으로 위클리프의 교서들을 불태우게 하고, 금지 당했음에도 베들레헴 교회에서의 설교를 그만두지 않았던 후스를 화형에 청하게 하였으며,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1412년 6월 7일 후스가 예로님과 함께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여 카롤리눔에서 공개 논쟁을 벌였을 때, 싸움은 한층 격렬해졌다. 도시에 있는 한 일체의 교회 활동을 금지한 ‘성무 금지령’이 발표된 후, 시골로 자진하여 내려간 1412년 9월, 후스의 프라하 활동은 끝이 난다. 대학과의 연락, 특히 총장 후임자였던 M. 야코우벡(Jakoubek) 과는 콘스탄츠에서의 형기 생활 때까지 지속된다. 이 때부터 야코우벡에게 양종 성찬주의에 대한 그의 동의를 적어 연락한다.
후스의 순교이후, 대학 마저 그의 개혁 의견에 전적으로 동참한다. (후스는 공의회에서 마치 대법원이나 당국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는 교회가 교황과 공의회의 노예였던 것에서 자유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417년 대학은 후스가 신의 정의를 위해 싸운 순교자였음을 선포하고, 양종 성찬의 정당성을 강조하게 된다. 야코우벡과 그의 동료들은 후스의 개혁 요구안을 정리하여, 1420년 7월 14일 카롤리눔에서 프라하 4개 조항이라는 이름으로 선포한다. 후스의 대학은 개혁의 시기가 끝날 때인 1620년까지 종교적 믿음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기관이 되었다.
개혁 기간동안 카롤리눔은 또한 주요한 교회 행사를 주관하는 곳이 되었다.
이 곳에서 후스주의 교회 교구 감독들이 모여 양종 성찬에 관한 선거를 실시한다. 특히 1421년 교구가 중요하였는데, 가톨릭이나 타보르파와도 차이가 있는 프라하 성배주의 원칙을 세운다. 그러나 1431년 펠흐지모프의 니콜라스 (Mikuláš z Pelhřimova)주교에 의하여 작성된 타보르 선언 또한 이 곳에서 행해졌다. 100년 후인 1543년 성배 교의와 루터파 교의의 차이점에 관한 협의가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나중에 카롤리눔에서는 신교도들의 회의가 열린다. 루돌프 2세의 종교와 자유에 관한 칙령의 내용을 고수하려는 신교도들과, 그 내용을 없애려는 가톨릭 세력들간의 충돌이 있던 때, 1618년 봄 마티아쉬(Matyáš) 황제에 의하여 문제점 협의의 요구를 받아 귀족들이 소집된다. 황제가 요구서를 거부하고 다른 회의도 금지시켰을 때, 1618년 5월 21일 귀족들은 분개하여 이 곳에서 모임을 가진 후, 이틀 뒤 무장한 사람들을 대동한 귀족 대표를 프라하 성으로 보낸다. 그러나 협의를 채 마치지도 못한 채, 왕실 대표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제2차 ‘창문 밖 투척 사건’으로 합스부르크 카톨릭 세력에 대항하는 항쟁이 시작되었다.
백산 전투에서의 패배로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Ⅱ)는 1620년 체코 개혁에 대한 댓가로 대학에 까지 형벌을 가한다. 1622년 대학 내에 예수이트(Jesuit) 행정실을 열고 카롤리눔을 그들의 독일 기숙사였던 클레멘티눔(Klementinum)과 연결시켰다. 카렐 대학은 카렐-페르디난드 대학이라 개칭하고, 체코와 독일 파트로 나뉘어져있던 1882년까지 독일 행정 아래 있었다. 카렐 대학은 제 1공화국 시절인 1920년까지 재 개편 되었다.

제 5 호 (2002년 06월)

1. Editorial
2. Series: Seniorates of the ECCB
2) The Prague Seniorate (by Blahoslv Hajek)
3. Critical issues in the life of the Church
– The New Law about the Church in the Czech Republic
(by Pavel Vychopen, Director of the Diaconia)
4. The Fourth Session of the Synod of the ECCB
– Synod
– Reports on the Synod by Czech Press Agencies
1) Protestants called for the courage to apologize and reconcile
2) The ECCB expects ecumenical relationships to intensify
3) The ECCB Criticized the New Church Law and Stood behind the Diaconia
– An Invitation to the Congregations of the ECCB
– The Relationship of Jews to Christians
– A Statement by the Synod of the ECCB on Current Czech-German Relations
– Other News from the Synodal Council
1) Help for Afghanistan
2) Cheb said farewell to Kathrin Frowein
3) Christian Link Leaves Prague

5. From the Faculty
– Josef B. Soucek(1902-1972)
(by Petr Pokorny, professor of New Testament at the Protestant Theological Faculty)
– Professor Dr. Josef Smolik (by Blahoslav Hajek)
– Professor Dr. J.M. Lochman (by Blahoslav Hajek)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 한인 예배 (2002년 07월 21일)
  • 요 9:1-7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721(여덟번째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요한복음 9장 1-7절
제목: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본문>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한가? 우리는 이런 말을 주위에서 자주 듣습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내버려두십니까?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쉬운 해결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의 방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해 우리들에게 결단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좋은 질문에 주목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묻습니다.
그 당시 시대에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랍비의 가르침은 모든 불행은 범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선천적인 장애는 유대사회에서 죄 많은 부모의 삶의 결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제자들은 물론 잘 알고있었고 심지어 어리석은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한 남자가 있었지만 전통대로 그나 또는 그의 부모의 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질문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공격하기위해서, 아니면 예수와 함께 다니며 익숙해진 예수님의 어떤 새로운 해석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본질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있습니다.
예수님은 불행의 원인에 대한 무의미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기대고 있는 과격한 두 개의 해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람의 불행의 원인에 대해 질문 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불행에 대한 질문은 „왜“ 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어떤 선언적인 말씀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곧 치유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광경을 발견합니다.
침으로 이겨서 만든 진흙은 고대시대에 일반적으로 치료약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땅 바닥의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소경된 눈에 발랐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이해하시겠습니까?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것은 어떤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새로운 눈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실천하신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셨고 그가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렇게 자주 논쟁을 하게된 이유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았고 모든 것에 대해 자신들이 정답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이 사람의 불행이 비롯된 이유를 숙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인가 질문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신 것처럼 소경을 치료하고 보게하는 것이 중요함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행위가 유대의 규례 가운데 하나를 어김으로써 율법에 모순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어떠한 종류의 반죽하는 행위가 금지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들과 율법들의 모순을 드러내셨고 그러한 어떠한 세상의 전통과 율법들도 인간을 위해 오신 하나님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됨을 지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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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이 눈을 씻고 결국 밝은 눈을 갖게 된 연못은 실로암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연못은 성전이 있는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였고 연못의 물은 수로를 통해 성전으로 보내져서 그 연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관심은 예수님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소경을 치유하시는 그 사건을 본 사람은 누구나 일어났던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던 특별한 활동인 것을 압니다.
여기서 실로암의 물이 성전으로 보냄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 암시되어있고 소경의 치유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암시하신 곳과 이땅 위에서 하나님의 일의 실천에 제한이 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때를 오늘 본문에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때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렵지만 간단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의 3년간동안 많은 활동을 하셨고 특별히 많은 지역에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낮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밤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사람들이 하게될 시간을 의미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일하셨던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이미 과거였지만 예수님은 그때처럼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에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이 잘못된 이유를 질문하는 것 아니면 어떤 것이 잘못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신자들은 제자들처럼 그런 수동적인 질문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그것이 우리들의 과제와 관심이 되어야합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들은 우리들도 알고있다고 답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완전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들의 과제의 몇가지를 짤막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군들을 얻는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우리들은 선교라고 합니다.

2)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봉사의 사역입니다.

3) 부정의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시장의 자유에 억눌린 사람들, 세계화에 억눌린 개인들, 권력에 억눌린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부유한 이들에게 억눌린 가난한자들의 자유를 우리는 언급해야만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우선되고 인간의 모든 법보다 앞서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는 인간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자유를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또한 이 자유를 남용해서도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곳에서 나의 자유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늑대로 만든다.“는 유럽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사람은 오늘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웃으로 보지않고 단지 경쟁자로, 방해자로 아니면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자로 보는 것입니다.
몇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은 율법 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큰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토이자 삶의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의 포도원의 종들이며, 일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영광을 위해 그의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들 사이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기독교인들이 확고하게 증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어떤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인간들의 비젼과 계획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여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의 증언자의 삶을 우리들은 살아야 합니다.(마 5:16)

아멘

<기도>

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오늘 하나님의 종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우리들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자임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깨닫게된
우리들의 사명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삶의 위기과 고난이 누구의 잘못때문이가를
묻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위기와 고난을 통해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희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불행을 행복으로 다툼과 미움과 시기와 원망을 평화와 복의 근원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놀라운 믿음의
일군들이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이땅에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로 저희들을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의 뜻을 따라 실천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복을 누려
세상 앞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제 1회 찬송가 암창대회

6월 16일 예배시간에 찬송가 암창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가족이 모두 참여하여 은혜가운데 성황리에 그 첫회가 열렸습니다.
교우들로 부터 열렬히 호응을 받은 찬송가를 모두 외운 재광이의 덕분으로 신호성도님 가족이 사랑상을 차지했으며 믿음상에 유수영, 김미영, 박재영 성도님들이 차지했고 소망상은 강동주 집사님 가정에 돌아갔습니다.

유진 가족과 재서네 가족도 모두 참석해서 더욱 모임이 빛이 났습니다.
어려운 한국가사를 외워 부른 유진 아빠, 재서 아빠 화이팅!

부목사 부임 투표

지난 월요일 당회의 부목사 청빙요청서를 작성 총회에 우송하였고 총회는 이를 허락 9월 두째주에 부목사 부임에 대한 교우들의 허락 유무를 묻는 투표를 하게됩니다. 부목사 후보로 토마쉬 드로빅이 추천된 상태입니다.

토마쉬 드로빅 전도사님은 신학을 졸업하고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훈련과정을 지난 1년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당회는 드로빅 전도사님을 우리 교회의 부목사로 청빙키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드로빅 전도사님은 앞으로 보흐니쩨 사역을 중심으로 슈토렉 그리고 이종실 목사님과 함께 팀으로서 일하게 됩니다. 부목사 취임 마지막 단계로 9월에 교우들의 청빙신임 투표를 받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