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 한인 예배 (2002년 07월 21일)
  • 요 9:1-7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721(여덟번째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요한복음 9장 1-7절
제목: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본문>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한가? 우리는 이런 말을 주위에서 자주 듣습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내버려두십니까?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쉬운 해결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의 방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해 우리들에게 결단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좋은 질문에 주목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묻습니다.
그 당시 시대에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랍비의 가르침은 모든 불행은 범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선천적인 장애는 유대사회에서 죄 많은 부모의 삶의 결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제자들은 물론 잘 알고있었고 심지어 어리석은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한 남자가 있었지만 전통대로 그나 또는 그의 부모의 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질문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공격하기위해서, 아니면 예수와 함께 다니며 익숙해진 예수님의 어떤 새로운 해석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본질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있습니다.
예수님은 불행의 원인에 대한 무의미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기대고 있는 과격한 두 개의 해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람의 불행의 원인에 대해 질문 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불행에 대한 질문은 „왜“ 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어떤 선언적인 말씀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곧 치유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광경을 발견합니다.
침으로 이겨서 만든 진흙은 고대시대에 일반적으로 치료약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땅 바닥의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소경된 눈에 발랐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이해하시겠습니까?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것은 어떤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새로운 눈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실천하신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셨고 그가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렇게 자주 논쟁을 하게된 이유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았고 모든 것에 대해 자신들이 정답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이 사람의 불행이 비롯된 이유를 숙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인가 질문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신 것처럼 소경을 치료하고 보게하는 것이 중요함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행위가 유대의 규례 가운데 하나를 어김으로써 율법에 모순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어떠한 종류의 반죽하는 행위가 금지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들과 율법들의 모순을 드러내셨고 그러한 어떠한 세상의 전통과 율법들도 인간을 위해 오신 하나님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됨을 지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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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이 눈을 씻고 결국 밝은 눈을 갖게 된 연못은 실로암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연못은 성전이 있는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였고 연못의 물은 수로를 통해 성전으로 보내져서 그 연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관심은 예수님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소경을 치유하시는 그 사건을 본 사람은 누구나 일어났던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던 특별한 활동인 것을 압니다.
여기서 실로암의 물이 성전으로 보냄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 암시되어있고 소경의 치유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암시하신 곳과 이땅 위에서 하나님의 일의 실천에 제한이 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때를 오늘 본문에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때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렵지만 간단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의 3년간동안 많은 활동을 하셨고 특별히 많은 지역에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낮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밤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사람들이 하게될 시간을 의미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일하셨던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이미 과거였지만 예수님은 그때처럼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에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이 잘못된 이유를 질문하는 것 아니면 어떤 것이 잘못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신자들은 제자들처럼 그런 수동적인 질문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그것이 우리들의 과제와 관심이 되어야합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들은 우리들도 알고있다고 답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완전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들의 과제의 몇가지를 짤막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군들을 얻는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우리들은 선교라고 합니다.

2)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봉사의 사역입니다.

3) 부정의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시장의 자유에 억눌린 사람들, 세계화에 억눌린 개인들, 권력에 억눌린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부유한 이들에게 억눌린 가난한자들의 자유를 우리는 언급해야만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우선되고 인간의 모든 법보다 앞서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는 인간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자유를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또한 이 자유를 남용해서도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곳에서 나의 자유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늑대로 만든다.“는 유럽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사람은 오늘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웃으로 보지않고 단지 경쟁자로, 방해자로 아니면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자로 보는 것입니다.
몇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은 율법 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큰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토이자 삶의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의 포도원의 종들이며, 일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영광을 위해 그의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들 사이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기독교인들이 확고하게 증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어떤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인간들의 비젼과 계획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여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의 증언자의 삶을 우리들은 살아야 합니다.(마 5:16)

아멘

<기도>

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오늘 하나님의 종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우리들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자임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깨닫게된
우리들의 사명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삶의 위기과 고난이 누구의 잘못때문이가를
묻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위기와 고난을 통해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희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불행을 행복으로 다툼과 미움과 시기와 원망을 평화와 복의 근원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놀라운 믿음의
일군들이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이땅에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로 저희들을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의 뜻을 따라 실천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복을 누려
세상 앞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제 1회 찬송가 암창대회

6월 16일 예배시간에 찬송가 암창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가족이 모두 참여하여 은혜가운데 성황리에 그 첫회가 열렸습니다.
교우들로 부터 열렬히 호응을 받은 찬송가를 모두 외운 재광이의 덕분으로 신호성도님 가족이 사랑상을 차지했으며 믿음상에 유수영, 김미영, 박재영 성도님들이 차지했고 소망상은 강동주 집사님 가정에 돌아갔습니다.

유진 가족과 재서네 가족도 모두 참석해서 더욱 모임이 빛이 났습니다.
어려운 한국가사를 외워 부른 유진 아빠, 재서 아빠 화이팅!

부목사 부임 투표

지난 월요일 당회의 부목사 청빙요청서를 작성 총회에 우송하였고 총회는 이를 허락 9월 두째주에 부목사 부임에 대한 교우들의 허락 유무를 묻는 투표를 하게됩니다. 부목사 후보로 토마쉬 드로빅이 추천된 상태입니다.

토마쉬 드로빅 전도사님은 신학을 졸업하고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훈련과정을 지난 1년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당회는 드로빅 전도사님을 우리 교회의 부목사로 청빙키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드로빅 전도사님은 앞으로 보흐니쩨 사역을 중심으로 슈토렉 그리고 이종실 목사님과 함께 팀으로서 일하게 됩니다. 부목사 취임 마지막 단계로 9월에 교우들의 청빙신임 투표를 받게됩니다.

선교여성의 한국교회의 간증

  • 연합 예배 (2002년 06월 02일)
  • 눅 10:1-20
  • 설교자: 이연옥

2002년 6월 2일 (삼위일체 첫주일)
누가복음 10:1-11, 16-20

<본문>
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3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6 만일 1)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줄을 알라 하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17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설교>

금번 체코 선교지 방문 목적은 이종실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로써 선교사역을
격려하며, 선교현장 경험을 통하여 후원단체인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는 선교적 새로운 비젼을 갖게하며, 본회 회장을 비록한 임원들이
선교여성의 사명감을 강화하고저 합니다.

특히 체코는 1000여년의 긴 기독교역사를 가진 나라의 문화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저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한 마을과 같은 개념을 갖고 있기에 지구화 시대라고 합니다.


런 때에 그리스도안에서는 국가와 계급과 성을 초월하여 하나인 것을 깊이 생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과 같이 생각 할때 체코에
계시는 형제 자매들을 만나 서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믿음을 본받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갈3:28)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 하면서 그들에게 특전과 보너스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임명된 70인에게 효율적인 복음전파를 위한 피알 방법을 가르치는 세미나에 대해 서도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늘 본문은 단지 그들이 둘씩 보냄을 받고, 어린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집을 완전히 떠나야 했으며,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를 나누어야 하며, 나그네의 영접에 의존 해야 하고, 병자를 치유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라고 전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 이후 보냄을 받아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보냄을 받은 70인 모두는 기쁨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숫자의 심볼은 중요합니다.

9장에 예수가 12명의 제자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도록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 제자는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의미합니다.

10장에서 70인은 세상의 모든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70인은 둘씩 짝을 지을 수 있는 숫자입니다.

노아와 홍수의 성경이야기에서 노아 방주로 몸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것 둘씩 들어가는 중요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둘씩은 종의 보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한 쌍은 보존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방주에 가두는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씩이 아니라 두사람이 짝을 이루어 위탁 받은 세계 선교의 목적을 위해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보냄을 받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는 보존과 생존을 넘어 목적과 선교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의 증언자들이 바로 체코 개혁교회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의 종교개혁이 교회의 전통에 갖혀 있던 복음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그 복음이 미국 대륙으로 그리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지 13년 후, 1898년에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널다리 교회에서 최초로 63명의 여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성 세례를 기념으로 널다리 교회 담임목사인 마펜목사(미국 선교사)께서 여전도회를 최초로 창립하였습니다.

이 여전도회 회원들은 세상으로 파송된 누가복음의 70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정으로 파송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회로 파송 되었습니다.

남존여비의 사상과 샤머니즘 문화가 일반적인 가정과 사회로 파송을 받는 다는 것은 마치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존여비와 신분제도의 사회가 기독교의 사랑과 평등의 사회로 변할 때, 샤머니즘 문화의 사회가 기독교적인 가치로 바뀌어 가는 사회가 될
때,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17절의 말씀처럼 그것은 귀신들의 항복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거저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배 여전도회 회원들이 여성들을 성서교육과 신문화 교육으로 훈련시켜 오늘 본문의 70인과 같은 여성 지도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였습니다.

개신교 복음이 전파된지 30년도 안되는 1910년 한국정부의 통계로 개신교회가 세운 초등 중고등 전문대 종합대학이 모두 666개 학교였습니다.

이들 기독 학교로부터 배출되는 여성 지도자들은 복음으로 미신의 쇠사슬로 부터 해방되고 여성의 정체성과 여성의 인간화를 이루어 스스로 기독 여성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 장로교 여성들은 스스로 선교여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남존여비사상의 전통문화를 개혁하여 바른 교회로 성장해 가는 일에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33년부터 여성안수를 교단에 건의 하였습니다.

결국 62년간의 노력으로 1994년에 총회가 여성안수를 허락하여 현재 여장로  150명, 여 목사 350명이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다른 교단들은 여성안수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평화를 전하기 위해 우리 한국 교회가 먼저 평화를 창조하는 모성애 문화를 정착해야 되는 선교적인 과제가 있습니다.

아울러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선교적인 과제도 우리들 앞에 산처럼 놓여있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현재 연합회는 62개 노회로 구분하여 전국적으로 130만 명의 회원이 서로 연대와 협력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1950년 한국전쟁이후 60만 군 장병들이 있습니다.

아직 사회보장제도가 약한 한국에 소외된 이웃들이 있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는 북한 동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사회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어촌 지역의 자립이 불가능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숭배되고 다원화와 세계화로 평화가 이전보다 더 크게 위협 받는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연대하며 복음을 함께 전해야 할 세계 교회들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은 우리들을 노아 방주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세상 속으로 계속 파송하십니다.

세상으로 파송 받은 저와 여러분의 간증은 기쁨으로 돌아오는 칠십인의 체험입니다.

이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귀신과 사단이 유혹하는 이세상에서 확신도 믿음도 사라질것입니다.

체코 교우여러분들에게 우리의 자랑이 되지않기를 바라면서 70인의 이 기쁨을 간증하길 원합니다.

1987년도에 여전도 회원들의 평생교육과 지도력 개발 그리고 회원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에 여전도회관을 건축하였습니다.

14층 건물에 5,500평(약20,000m2)의 100억(250 000 000꼬룬)공사로 회원들의 힘으로 완공되었습니다.

거액의 건축비계획은 헌금참여 가능한 회원을 10만명으로 예상하고 한 사람이 10만원(2,500꼬룬) 헌금을 한다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기적적으로 완공이 되었습니다.

이 건축을 통해 저는 우리들이 서로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하나로 연합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수십년간 여전도회를 섬기면서 갖게 된 확신입니다.

우리 여전도회의 자랑은 분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배 후배가 하나로 단결하여 선배를 존경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서가 100년간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위한 파송이 혼자가 아니라 둘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연대와 협력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빌리시 교회의 체코교우 여러분들과 한국교우 여러분들이 한 교회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위임받은 사명을 감당하듯, 저와 우리
여전도회도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세계를 한 가족, 한 형제, 한 자매로 생각하고 우리를 필요로하는 곳에 기도의 눈물을
흘리겠습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함께 기쁨과 고통을 나누며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선교여행을 갖게 되었고 특별히 여러분들을 방문하여 새로운 경험을 갖고 이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저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꼬빌리시 교회 체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고 한인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살던지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며 낙심하지 않고 맡겨진 주의 사명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부활의 예수안에 있는 은혜

  • 연합 예배 (2002년 05월 05일)
  • 요 21:1-18
  • 설교자: 이종실

02-05-05
설교본문 요한복음 21장 1-18절

<본문>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설교>
최근에 바베트의 만찬
영화에 대해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바베트의 만찬은 덴마크 태생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것입니다. 원작의 무대는 노르웨이지만 덴마크의 영화 제작진은 덴마크의 가난한 어촌으로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그곳에 자기 자신을
부인함으로 구원이 온다고 믿는 고립된 경건주의 공동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과 금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고
했습니다. 바베트 만찬은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망명가 바베트는 그 공동체에서 두
자매와 생활을 하게 되고 그것이 그 공동체의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분명한 변화는 그 공동체의 12회원이 바베트가
자신들이 베풀어준 친절에 대한 그녀의 감사의 표시로 맛있는 프랑스음식을 자신들에게 요리하도록 허락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12명 공동체 회원들은 그녀가 이 음식의 준비를 위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투자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화스러운 음식들이 줄줄이 12명앞에 놓였을 때 경건과 금욕생활을 하던 열두명은 음식의 부유함과 풍성함에 분개를 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자 카렌 블릭센은 바베트의 만찬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베푸는 자의 부담으로 값없고 조건 없이 거저 오는
것이지 경건과 금욕의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주고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당신의
부담으로 조건 없이 값없이 바베트의 만찬을 베풀어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부족함의
중심에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예수에 관해서 읽습니다.  2장에서 우리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떨어진 포도주를 준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읽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포도주를 채워 주셨을 뿐 아니라 더 질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였습니다.

4장에서 우리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 물을 제공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물은 보통 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솟아나는 물을 제공하였습니다. 6장에서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오천명을 먹이셨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이
12광주리를 채우셨습니다.  여러 차례 우리는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통해 가져오는 풍성한 삶에 대해 알고있습니다. 요한복음은
1장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선물의 목적은 “그의 풍성으로부터 우리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개역한글판 요 1장))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의 오늘 본문은 마치
인간이 되신 예수님 안에 가장 소중한 것이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선물이 있음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6절과 7절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바로 다음절 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부활 후에 부족함의 한가운데 예수님의 현존은 풍성함이었습니다. 이 요한복음서에 언급된 이러한 지속적인 넘치는 은혜를
통하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자신들의 직업의 성공과 관련을 지어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자리가
다른 곳에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사역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믿을 수
없는 풍성함을 선물을 주었듯이 그들의 사역과 교회의 사역은 세상에 하나님의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베드로에게 질문 한 이유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예수의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돌보는 것은 상호 연결 되어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러한
새로운 제자 삼는 소명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력을 갖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유대 권력자 앞에서 설교가와 대변인이되며 결국
순교를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제자들의 이러한 새로운 또는 새롭게된 소명은 각기 달랐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같은 테마 – 부족함 한가운데 예수께서 풍성하게 준비하심을 반복해서 듣게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풍성하게 주신 그
한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소명을 받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부활 이후 요한복음 21장의 제자들에게 명백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부활 후 제자들이 되는 것을 요청받습니다. 우리들은 언제 어떻게 부족함의 한가운데서 풍성함을 준비하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까?  우리들은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의 풍성하게 주심 한가운데서 우리의 새로운 소명을 발견했습니까? 자신의 집과 친척과
나라를 떠난 체코의 우리 한국인들은 처음에 이 체코는 자신들에게 광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체코 형제 자매들과 하나의 교회
하나의 예배 하나의 성만찬 하나의 신앙고백을 하면서 우리 가운데 베풀어주신 주님의 풍성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형제
자매들은 이 체코에서 그리고 이 꼬빌리시 교회안에서 우리들의 선교적인 사명을 새롭게 발견하고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부족함의 한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풍성함을 경험했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부족함,
공허함, 슬퍼함, 혼란, 고독함을 경험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선물이나 우리가 원했던 때가 언제나 아니었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은 우리들의 삶으로 터져나옵니다.
때론 극적인 방법으로 회개한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들을 위해 준비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 처럼 일상의 한가운데서 더 자주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이 나타납니다. 부족함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이 기도는 두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부족함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을 열어 이미 우리 주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보게 하여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회개한
바울처럼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부터 비늘을 벗겨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시간, 우리의 소유 – 하나님의
기대하지않았던 선물들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풍성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유한 음식을 맛보았고
우리의 목마름은 생명수로 갈증이 풀렸습니다. 풍성함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베드로처럼 예수에 의해 도전과 부름을 받고있습니다:
예수 사랑은 여러분들이 세상속에서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양을 치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족함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도전은 다른 사람들과 이들 선물을 나누는 것이며 1세기의 제자들 처럼 풍성함에 대한
증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생의 풍성하고 특별한 선물에 대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