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5일

3월 부활주일, 4월 그리고 5월 에큐메니칼 예배 설교를 이종실 목사가 계속하였다. 슈토렉 목사의 갑작스러운 입원, 수술, 치료로 당분간 설교를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5월 에큐메니칼 예배에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성만찬을 집례하였다. 15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20여개 비어있고 늦게온 교우들이 뒤에 10여명 서있었다. 귀가 어두우신 체코 할머니 교우 몇분들이 귀에 통역기가 없는것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 분들에게 통역기는 보청기 구실을 한다.)

유비에프 선교사 가족들이 참석해서 예배 통역도 도왔다. 그리고 새로온 체코 교우 몇분들이 있었다. 친척을 방문해서 주일 우리교회에 출석했다고 끝나고 문앞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매주 첫째주는 오전 9시 30분에 예배가 시작되어 어린 자녀를 가진 가족들의 예배참석이 그리 쉽지않다. 첫째주에 거의 참석을 하지 못하던 재광이 가족이 나왔다. 그리고 식당일때문에 나오지 못하던 수원이 가족도 눈에 들어왔다. 오낼 만에 나온 수원이가 아이들과 서먹해 하는 모습도 얼핏 눈에들어왔다.

오늘은 어린이주일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어린자녀들에게 교회가 조그마한 선물을 하였다. 물건은 그리 값비싼것은 아니었지만 예쁜 포장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특별히 유비에프 선교사 가족들의 자녀들이 교회에서 기쁨을 함께 나누는것도 우리들의 기쁨이다. 오늘 식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카레라이스였다. 안정숙 집사께서 준비하셨다.

슈토렉 목사와 예배에 대해 늘 그렇듯이 평가를 했다. 몇가지 평신도들의 예배를 돕는 활동에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이종실 목사가 성경본문을 너무 빨리 읽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체코교우들은 성경책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앉아서 목사가 읽어주는 성경을 듣고 설교의 본문을 이해한다. 눈으로 같이 읽고 듣는 한국교우들의 교회생활과 다른 모습이다. 오늘 설교본문은 길었고 빨리 읽다보니 아무래도 체코교우들이 정확히 본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설교도 말이 빨랐다는 지적이다.

설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설교의 전달방법도 신경을 써야한다. 외국인이 체코어로 설교를 한다는것 자체가 처음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제는 정확한 체코어발음과 표현등 체코어를 극복해야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시점에 도달한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28일)
  • 마28:16-20
  • 설교자: 이종실

2002년 4월  28일 주일예배
본문: 마태복음 28:16~20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

<공동기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기억합니다.
먼저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희들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전까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주기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불렀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갈릴리 – 예수가 지시한 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6-20)

이 성경말씀을 우리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이라고 별명을 붙여 부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분명하게 하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따라 성령의 임재와 능력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고 고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 –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들의 생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우선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러분 앞에 서있는 부족한 저도 나이 서른 아홉에 단 한명의 아는 사람도 없고 한마디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곳에 내일 모래 중학교
들어갈 아이의 손을 잡고, 내일 모래면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연금혜택자가 되는 아내에게 직장을 포기하게 하고 성경책과 몇
권의 신학서적이 들어있는 배낭과 입을 옷가지 챙겨 넣은 여행용 가방하나 들고 십년 전 이 체코를 찾은 것은 바로 이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비단 저뿐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해서 확신을 갖고 이 체코로 찾아오신 분은 이 자리에 아마 거의 계시지 않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계기들을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 이 땅을 찾아 오실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머리 속에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의 오늘 본문말씀인줄 압니다.
이러한 사명을 자각한 우리 성도들의 모습의 한 예가 민주혁명 직후 아직도 공산주의의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그 때 그 시절 체코에 역사적인 첫 한인교회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도의 한 가정에서 시작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로 모이는 우리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함으로 우리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고통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교회로 모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을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는 바로 이 반성과 회개 위에서 출발했습니다.
지난 날의 우리들의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교회를 분열시킨 자들이 라는 조롱과 오해와 손가락질을 받아도 묵묵히 지냈습니다.
해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시편의 시인의 신앙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들인지 발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나의 죄 우리 모두의 죄를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지난 2년간 이 강단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자, 은혜스러운 말을 사용하자, 숨은 봉사생활을 하자

이 세가지 교회생활 모토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을 수행하기 위한 우리들의 철저한 자기 반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난날의 경험을 잊어서는 안될 것 입니다.
불과 이 년 전의 교회의 고통의 원인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부활하신 후 우리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모여서 나누어야 될 이야기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많은 관심들이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일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지위, 자녀들의 진로…
교회로 모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선교입니다.

이 선교의 수행은 우리들 감정에 호소와 선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는 믿음이 이 선교를 수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교의 지상명령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후에 예수님에게서 나온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그들이 그를 뵙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의 산으로 찾아가서 뵈었을 때 그 때 주신 명령이 선교였습니다.

우리의 선교는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표준새번역 고전 15:14)

부활하신 주님의 토대 위에 있기 때문에 선교는 오늘날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 복음서를 펴서 읽을 때 복음서 저자들이 다같이 말하고 있는 공통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언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성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안에서 생겨난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그 자체를 형성시키고 자라게 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분명히 실제적으로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부활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산으로 갔고 거기서 예수를 뵙자 절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절을 하였다는 영어성경에 예배 드렸다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예배로 이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께 예배드릴 때 그 예배에서 위대한 명령 – 교회의 선교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선교는 예배에서 주어졌으며 오늘날 예배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표준새번역 히 10:24)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 존재, 우리 교회는 예배 안에서 태어났고 예배 안에서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로 성장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않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예배- 의 가슴으로 돌아오게 해야만 합니다.
“세계선교의 연료는 예배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에 회개와 죄 용서와 천국기쁨의 복음이 재현되어야만 합니다.

리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죄없는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직도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과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는 본질적으로 복음적이며 선교적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서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이 있을지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함께 모여 거기서 주를 찬양하고 기도하고 우리의 오늘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그 사실이 우리의 믿음의 표징입니다.
여기서, 이 교회에서 드려지는 우리들의 예배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올려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선한 길로, 복된 길로 이끌어주시길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예배 공동체는 언제나 확신과 열정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7절)

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예배 드리면서도 의심하였습니다.
어떻게 더 이상 주님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예배 공동체 가운데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예배 공동체에 일체감이 없는 형제와 자매들로 인한 분쟁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언제나 있었고 마지막 심판 때 까지 있을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심판자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쳐 말씀에 끊임없이 복종시켰습니다.
고린도 전서 9장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했습니다.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이 의심하는 자가 되지않도록 자신을 쳐 말씀에 복종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신앙인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0절)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은 시작과 마지막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선언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이 임마누엘 하나님과의 친교가 바로 예배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성만찬과 섬김이 있는 예배를 통해 우리들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더욱더 확신해 가게 됩니다.

예배는 부활 이전의 시간에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부활하신 예수의 부름을 받은 무리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 임마누엘 하나님과의 친교의 시간입니다.
이 예배의 친교 가운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젼이 있습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 이 세상을 섬기고자 하는 헌신과 결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새로운 친교의 삶의 자리에 이 세상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19절) 명령 하십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위대한 위임의 성취를 위탁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임들에서 그리고 다른 믿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나라에서 아직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 친교의 삶의 자리로 초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임마누엘 하나님과의 친교를 우리 자신들만 즐겨서는 안됩니다.
그 영생의 기쁨의 미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우리 곁에 초대해야 합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로 얻은 구원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21일)
  • 엡 2:4-10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421(부활절 후 세번째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전도사
본문: 에베소서 2:4-10
제목: 은혜로 얻은 구원

<공동기도>

부활의 참 소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악독과 시기와 분쟁과 투쟁과
패짓기를 즐겨하는 마음이 가득한 죄인들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살아가는 이세상에서 구원의 사랑과 감격을 채워가는
우리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읽은 오늘 말씀에서 세가지 중심 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허물로 죽은 우리들이지만 사랑이 크신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도 바울,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인 그는 자신의 신학에서 분명히 보여준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 까지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까지 모든 것은 율법과 인간이 선하고 온전하기 위해 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는 명령에 의해 판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과 명령은 인간이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 율법과 명령은 인간의 능력 밖이었고 그래서 인간은 그것들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16세기 초에 중부유럽에 한 젊은 수도자가 괴로움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고 죄 짓지않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자가 하나님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삶으로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않으려고 하지만 죄는 더 강해졌고 그 수도자를 지배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성경을 잊어버리고 전통과 추상적인 신학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의로 가르쳤으며 그리스도는 엄격한 심판자로 설명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수도자의 괴로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단지 선만을 행하지 못하고 죄를 범한 다는 것은 엄격한 심판자 그리스도앞에 설 수 없으며 그리고 죄로 죽음과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 젊은 남자의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죄와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싸움에 졌고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의 확신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고통속에서 그는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찾기 시작하였고 시편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 시편 31편 특별히 2절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그는 로마서 1장 16, 17절과 함께 이 시편의 말씀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중심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사랑으로 믿음을 통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들의 행위가 아니며 우리들은 선물을 받을만한 공적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은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율법의 실천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오직 믿음으로 쉽게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을 갖게되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들음으로 우리는 믿음을 얻게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사랑과 의로움과 평화와 진리를 이룹니다.
다시 말씀드려: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우리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수도자에게 눈을 돌려봅시다. 그는 1세기의 사도 바울의 신학을 16세기 에 재 발견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신뢰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에게 복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그는 발견하였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하고 의로움으로 깨닫게 되는 능력이 없는 인간이 상실되고 낙심되지 않을 것을 그는 발견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인간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수도자는 복음 안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의로움으로 행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살아계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없이 구원에 이룰 수 없습니다.

도 바울의 시대에 그리고 젊은 수도자가 믿음과 구원에 대해 깨달은 직후 그때 그시절 그 사람들은 말하였습니다: 만약 믿음이 인간을
의롭게 한다면 이를 테면 선한 실천을 하는 것이 필요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복음을 가지고 있다면 율법은 필요 없고
우리들에게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수도자는 올곧게 그러한 의견들을 거부합니다. 율법은 계속 설교 되어 죄인들을 놀라게하고 그들의 죄를 드러내서 회개와 결단을 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에 사랑의 약속도 선포됩니다.
율법이 회개를 이르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있게하여 우리 인간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중심내용을 만나게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창조물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로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행하고 모든 실천은 믿음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없이 모든사람들이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만 깨달은 신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어떠한 실천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우리들의 사랑을 채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광을 보여주시고 우리들과 함께 우리들을 통하여 자신의 창조사역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을 도우셨던 것 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실천으로부터 유익함을 얻도록 자유롭게 개방적으로 자연스럽게 돕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선 하심과 사랑이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로 물처럼 흘러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매와 형제 여러분,
오늘 설교 처음에 언급하였지만 그 이름을 여러분들에게 밝히지 않은 그 수도자의 어록으로 결론을 맺으려고합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 입니다. 그의 글들 가운데 한 귀절입니다:
신자는 혼자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이웃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랑으로 이웃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거합니다.
아멘

<설교후 기도 -이종실 목사>

나님 아버지 우리의 동역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긴 모습이 달라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인 것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하나님앞에 설 수 없는 죄와 허물이 가득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이시간 다시한번 말씀을 통해 확신을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들의 삶이 괴롭고 힘들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스쳐지나갈지라도
그 삶또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계획 하심속에 있음을 이시간 믿습니다. 주의
사랑을 깨닫고 주를 믿는 믿음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주님의 은혜의 마음으로 내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보게 하셔서
우리들이 더욱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고 있는 그 감격의 체험속에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다빗 유레흐 교역자 청빙

한인 공동체 교우 목회 돌봄(체코사회에 필요한), 유학생 성경공부와 활동, 이종실 목사의 목회와 선교사역 협력, 체코 청소년과 체코의 소수민족을 위한 신앙잡지 발간을 위해 체코 교역자 다빗 유레흐를 우리 교회가 전도사님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빗 유레흐는 27세이며 슬로바키아 루터교회 소속이며 까렐대학 개혁신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일꾼을 발굴하고 지원하여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돕는것은 선교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한국교회의 목회와 선교정신을 배워 훌륭한 주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우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정미현 목사님 주일 설교

오늘(4월 14일)설교해 주신 정미현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미현 목사님은 한국기독교 장로회 목사님이시며
바젤에서 공부를 하시고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가르치시며
현재 금년 8월까지 스위스 개혁교회의 초청으로
스위스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스승이신 세계적인 체코신학자 로흐만 교수님의 80회 생신축하 기념강연회에 초청을 받아 오셔서 저희교회가 목사님을 모시게되었습니다.

좋은 말씀 들려주시고 교제를 나누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