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

  • 한인 예배 (2001년 11월 11일)
  • 왕하 5:9-15a
  • 설교자: 이종실

01/11/11 (삼위일체 후 스물 두 번째 주일)

본문: 열왕기하 5장 9-15절 상반절
제목: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

<공동기도>

우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번지
작은 일이 주의 은혜를 여는 열쇠이오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본문>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멕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햐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니이다…”

<설교>

오늘 아침 저희들은 엘리사와 나아만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왕국의 제2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최측근이었고 왕의 마음은  그의 마음이었고 그의 생각은 곧
왕의 생각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눈이요 귀요 입이었습니다. 절대 권력를 가진 사람 나아만이 불치의 병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구약 시대에 문둥병은 질병가운데 가장 두려운것이었습니다. 다른 전염성 피부병과는 달랐습니다. 그 질병으로 나아만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잃게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나아만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모든
조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계집 종의 조언에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은 전쟁포로, 그
중에서도 계집아이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과 전쟁 포로인 노예 계집아이 이 둘의 만남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시 중근동 지역을 주름잡던 강대국의 왕의 군대장관에게 전쟁포로 노예 계집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미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불행한 나아만일 지라도 하찮은 계집아이의 말 하나쯤 무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불행한 삶에서 행복한 삶에로의 전환점에 이 하찮은 계집아이가 있음을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 다. 

하찮아 보이는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인생의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즈음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교우님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에 영주하시는 어떤 분이 1989년 체코개방 직후 자신은 체코가 마치 전쟁 후 복구사회처럼 많은 특수가 있어 빨리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체코 사회에서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 대신에 작은
일, 궂은 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둥병에 걸린 나아만은 자신의 노예 계집아이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습니다. 계집 종의 말을 믿고 왕의 허락까지 받은 나아만은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해 떠납니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도달하였습니다. 자신의
심복 나아만의 질병을 치유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아람 왕의 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두려워 떱니다. 이스라엘 왕도 두려워 떠는
아람 왕의 친서와 군대장관이 도착했는데도 엘리사는 어떤 반응도 없습니다. 나아만과 그리고 함께 온 병사들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먼길을 찾아온 환자이자 세계의 권력자를 자기 집 문앞에 세워둔 채 엘리사는 얼굴도 보이지않고 사람을 보내
처방전을 보냅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은 그만 화가
났습니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엘리사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만약에 나아만 대신 그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이 있었다면 우리도 나아만
처럼 매우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좋은 의사란 좋은 처방보다 환자에게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의
태도를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태도 때문에 나아만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마음으로 모든 자존심을 꺽고 엘리사에게 희망을 걸고 왔습니다. 엘리사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태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나아만의 속마음을 들여 다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11절 12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이스라엘 왕도 벌벌 떠는 세계의 권력자가 엘리사를 아람으로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직접 찾아나선것은 의사 엘리사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삼아 이스라엘과 아람의 국제관계를
강화하여 양 국가간의 불가침 조약과 포로들의 귀환협상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이스라엘 왕은 최소한 성전이나 아니면 자신이 거처하는
왕실로 엘리사를 불러 거기에 나아만을 위한 진료실을 만들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말은 없었지만 나아만은 속으로 그 정도
기대했겠지만 그것 마저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엘리사의 오만함 때문에 참았던 화가 폭발했습니다.
나아만은 속마음을 토해냈습니다.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극진히 치료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그만한 예를
보였으니 엘리사가 응당히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의 태도도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의 처방에도 불만이 있었습니다. 환자가
의사의 진료와 처방까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욕창이 덧난 곳에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나아만의 속마음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기독
교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나라가 이땅에 널리 퍼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 마음은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훌륭한 신앙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집사 직이나 장로 직에 발탁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봉투에
적힌 이름이 강단에서 불려지거나 주보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교회 봉사에 공짜가 없습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무언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위치와 영향력을 교회 안에서 세우려고 합니다.

나아만의 겸손 뒤에 감추어진 문둥병을 치유 받는 것 이상의 기대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 뒤에 감추어진 우리들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진심으로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인생의 전환을 기대한다면 바로 신앙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욕심에 찬 우리들의 속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자기 방식과 자기 경험이 더 돋보이는 교만과 싸우는 시간입니다. 나아만은 치유의 강물이 더러운
요단강이 될수 있다면, 수질도 더 좋고 풍경도 더 아름다운 자신의 경험 다멕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들이 치유에 더 효험이 있어
보였습니다. 고백은 이러한 자기의 주장을 진심으로 꺽고 예언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게 만드는 사탄의 시험에 맞서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분이 난 나아만은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합니다.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납니다.”  혈기는 그 동안 쌓아온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이 찰나의 시간에 뜻하지 않은 나아만의 종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다시말해
“예언자가 당신에게 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했으면 당신은 떠나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았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크
고 중요한일도 한 내가 이 작은 일이야 못할리 없지” 생각한 나아만은 떠나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요단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냥
돌아가느니 엘리사 선지자가 처방한 대로 해보고 안되면 빌미를 잡아 분풀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으로
내려가서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아만은 영웅입니다. 조그마한일 사소한일 쉬운일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일은 그의 주위에 있는 종들이하는 일입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만 나서서 영웅적으로 해결하던 나아만이었습니다.


회 공동체 안에는 이처럼 영웅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고 큰 헌신과 용기를
필요로하는 영웅적인 일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신자들입니다. 이것이 생의 변화의 장애물이 되는것입니다. 나아만의 인생의
문제해결의 전환점은 영웅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사소한 조그마한 일이었습니다.

금년 한해동안 사랑하는 교우들에게
목회자가 안내한 일이 영웅적인 헌신과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습니다. 먼저 개인의 신앙성장을 위해
“하루 한 장 성경 읽고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두번째로 개인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훈련으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말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하지 않고, 자발적인 봉사생활을 하시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로 집사로
봉사하는 분들은 교회를 관리하는 일들을 하나씩 맡았습니다.

영웅적인 헌신과 용기는 마치 우주선을 궤도에 올려놓는
추진연료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궤도에 올라가면 이 추진연료는 필요가 없습니다. 늘 똑 같은 궤도를 일상적으로
똑같이 반복해서 돌며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충성심이 우주선에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 우주선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똑
같은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마치 치유 받기 위해 일곱번을 강물 속에 드나드는 나아만의
목욕과 같습니다. 일곱번은 단지 숫자의 개념만으로 이해해서는 안될것입니다.  7은 완성된 숫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이란
숫자는 인내를 필요로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속으로 들어갑니다.
한번…!! 물 밖으로 나와 물에 젖어 더 선명해진 곪은 상처들이 보입니다. 어떤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이 그대로 있습니다.
나아만이 두번째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립니다. 그래 두고보자 7번 들어갔다 나와도 몸에 병이 낫지않기만 한다면 그대로
두지않을것이다. 혼자 중얼거렸을것입니다.

두번…!! 두번째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세번…!! 네번…!! 요단강에 들어갔지만 아직 병의 차도가 없습니다. 그는 더욱 분한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멈추어버릴까?”  “미친 예언자의 말을 듣고 나만 우스운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 전에 당장 지금 나가 그 예언자를
끌어내 처단해 버릴까?”  “바보 같은 짓 지금 당장 그만둘까?”  화가 치밀고 이미 물속에 들어간 자신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지위도 체면도 사라져 버리고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자신이 느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칩니다. “그만두자! 이거 다
미친짓이다! 나는 여기서 더 우스운 꼴 당하고 싶지않다. 집에서 치료받겠다.”  그러나 종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예언자가
당신께 일곱번 목욕하라고 했습니다.”  격분한 마음에 물속에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것이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다섯번…!! 아직
변화가 없습니다.  불평을 하며 여섯번째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요단강의 더러운 물 때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일곱번 다 채워주지 만약에 낫지않기만 해봐라 엘리사 내 너를 가차없이 처형할거다.” 아마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곱번…!! 마지막으로 물속에 들어갔던 나아만이 서서히 걸어서 강언덕으로 걸어나오고 있습니다. 얼굴은 혈기 돋은
표정으로 붉게 물든채 일그러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하찮은 일, 조그마한 일, 권태가 날만한
일상적인 일, 나를 바보처럼 만드는 일, 나를 무시하게 만드는 일 그러면서도 반복적으로 해야되는 일들이 오늘 나아만의 인생의
전환점의 표시들입니다. 질병에서 치유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변화하는 삶의 키워드가 되고있습니다.

일곱번째 물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그의 팔을 보았습니다. 물집이 사라졌습니다. 물밖으로나와 자신의 다리를 봅니다. 종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봅니다. 그의 종에게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이 다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깨끗게하심과 거룩하심의 방법을 처음 발견하게됩니다. 이스라엘의
어린여종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를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자신의 종을 통해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치유받았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몸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자만심을 극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혈기를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심을 꺽으셨습니다.
나아만의 인생에 혁명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이방인이 유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15절 이하 에서 나아만의 언어와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오만과 교만이 진심으로 겸손한 품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에도 똑같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찮고 사소하고 작은 일에 대한 충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는 영웅적이고 심각한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작은 일 보잘 것 없는 일들을 일상생활처럼 하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요단강에 우리자신을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가끔 우리는 생의 문제들을 복잡하게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그냥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라는 예언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우리들의 생의 문제는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설교 후 기도>

나님 아버지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금년한해 저희들이 작은 일에 충성된 일꾼들이었는지요? 우리들의 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영웅적인 헌신이 아니라 노예 계집아이처럼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않고 귀를 기울이고 그 작은 일을
변함없이 꾸준히 하는 그 충성심이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문제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속에서 해결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의 교만을 꺽으시고 우리의 혈기를 꺽으시고 우리의 의심을 꺽어주셔서 우리들의 삶의
혁명적인 변화가 있게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도망자 다윗의 사명

  • 연합 예배 (2001년 11월 04일)
  • 삼상 22:1-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스믈세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주일: 삼위일체후 21번째 주일
본문: 사무엘상 22장 1-5절
설교: 이지 슈토렉

<설교본문>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설교>
 도
망자 다윗은 집 없는 사람이 되어 테러리스트들과 게릴라들처럼 동굴에서 지내고 있습니다.사울의 나라에서 군사독재 – 힘센 손과
공포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가족도 베들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둔이 아니었습니다. 도망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위에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
힘없는자, 원통한자, 모든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고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요, 주인이요, 왕이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압 땅 적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위한 그저 그런대로 안전한 망명장소를 찾았습니다.
애굽 땅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말 못하는 아기 예수가 한번 비슷한 망명을 한적이 있습니다. 다윗 왕국은 이미 자신에 대해서
알고있습니다.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윗의 도망은 사명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매우 비슷한 공동체
안에 십자가의 사명이 있습니다. 거기 십자가에서 다윗의 새로운 공동체 – 교회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깊은 곳에서 부활이
승리하고 있습니다.

이 이상스러운 공동체 안에 지금 다윗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 의한 억압과 추격 그리고 한이 맺혀있는 사람들이 다윗의 사람들 – 그의 군대입니다.

기에 모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빠짐없이 모든사람들이 있습니다. 위협을 받고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다윗
왕국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 특별히 우리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비난을 받게 될것입니다.

만약에 존경할만한 공동체로 들어오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있지않으면 동굴에 있는 다윗
소식이 모든 민족과 나라들에게 빠르게 전달 되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왕국에 모이지 않는 한, 그 진실한 왕은
그러한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끄는 것을 멈추지않고 그리고 멈추지않을 것입니다.

이로인하여 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삶을
이해하기 어렵게하고 있고 또 어렵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들이 실천하고 있고 희망하고있는 것과는 다른 교회의
모습입니다. 억압받는 사람,  부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한이 맺힌 사람을 만난 사람은 그들과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우리들의 본래의 인간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은 매우 즐겁지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을 수 없고, 교활하고, 교양이 없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매우 피곤하게할 것입니다. 감옥이나 정신병동만이 희망 없는 경우가
아닙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불의와 증오를 우리 스스로 자기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고통이 우리들의 삶의 관점을
깨닫게하였습니다. 그리고 증오가 우리의 두 민족의 역사와 우리의 영혼의 바닥에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왕을 준비하셨습니다.
 
다윗은 그러나 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표가 되지않고있습니다. 그리고 구호도
걸지않았습니다. „전 세계 프로레타리아들이여 연대하라!“ 그리고 그 구호에 사람들을 끌어들일 어떤 정치적인 정당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따랐고 다윗은 그들의 대장이요, 주인이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죄와 증오와 구원이 불가능성
모두를 담당한 그분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여호와는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십니다.“ (시편 146편)

만약에 여기서
끝나야만 한다면 이것은 단지 종교사회주의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약한자들의 범주에 자신의 시각을 맞춘 예언자의 선포를
들어야만 합니다. – 베들렘과  모든 민족의 기다리는 왕중의 왕과 함께 다시 유대 땅을 찾을때까지, 그리고 그나라가 이루어질 때
까지, 지금 교회안에서 여행길을 잠시 멈추어 휴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여기 교회에 우리들에게  피곤하지 않도록 마련된 식탁이
있습니다.
<아멘>

제네바에서 온 편지

2001년 6월 5일 부터 8일까지 제네바 존 녹스 국제 개혁센터에서 열린 <재 유럽 한인교회 선교협력 증진을 위한 협의회> 를 주관한 WARC 실무자로 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회계 보고서를 동봉하여 회의를 위해 우리 공동체가 헌금한 미화 200불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회의에서 결정한 추진위원회 소식도 전해왔습니다. 이미 교우 여러분들께 회의 보고서를 나누어 드린적이 있습니다. 9월 독일에서 열린 추진위원회 결정 사항도 한국어로 번역하여 나누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추진위원회 결의 사항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지 유럽교회와 밀접한 관계속에 있는 스웨덴의 스톡홀름 교회(임마누엘 교회 – 조충일 목사)와 체코 공화국의 프라하 교회(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 이종실 목사)를 케이스 스터디로 두 교회의 모델을 자료화 하기로 하였습니다.

위의 편지를 받고 우리 공동체가 걸어가는 길이 역사적으로 매우 의의가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하게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노력이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현지교회와 한인교포교회들 모두에게 의미를 주는 일인 동시에 한국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체코교회와 함께하고, 체코교회와 호흡을 같이하는\" 우리 공동체의 정신을 기도와 신앙의 자기훈련으로 더 깊이있게 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십시다.

18차 공동체 가족회의

제 18차 공동체 가족회의
일시 : 2001년 10월 28일 오후 7시
장소 : 교회 세미나실

< 결의 사항 및 토의 사항 >

1. 보흐니체 정신병동 장기입원 환자들을 위한 바자회를 금년에도 지속하기로 하고 일정은 11중에 하되 체코교우들과 의논해서 결정키로 하다.

2. 총무선임, 서기선임을 11월 4일 공고하여 11월 18일 투표키로 하다.

3. \"공동체 가족회의\"제도 개선키로하다. – 처음에는 가족 수가 적어 전체회의가 가능하였으나 이제는 가족 수도 많이 늘어 회의 정족수 자체에 어려움을 가져오고 있으므로 교회운영에 공동체 가족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한다는 \"공동체 가족회의\"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현실 가능한 제도 개선을 목사, 총무, 서기 3인이 연구하여 11월 공동체 가족회의에 제안키로 하다.

4. 금년도 잔액 헌금의 은혜스러운 사용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로 하다.

5. 기타 토의 – 한인공동체 외국인 교우들과 한국어를 배우길 희망하는 체코공동체 체코교우들을 위해 한국어 강좌 개설 문제를 토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