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형제개혁교단 제 30 회 총회 소식과 보고서

체코형제개혁교단 제 30 회 총회 소식과 보고서

체코형제개혁교단(Ceskobratrska cirkev evangelicka)의 30차 총회가 1999년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프라하 비노흐라드 교회에서 열렸다. 13개 교회에서 68명의 대표와 총회 임원 6명과 신학대학 교수 대표 2명으로 구성된 총회 회원 76명과 언권회원으로 총회총무 5명, 청년대표 3명, 신학생 대표 3명, 교단산하 기관 대표 4명 등 총 91명이 회집되었다.

총회를 축하하기 위해 국내 기독교 인사로 카톨릭의 블륵(Vlk) 추기경과 각 교단장들이 참석하였고, 해외의 동역교단으로 영국연합개혁교단, 대한예수교장로교단(통합), 프랑스개혁교단, 스코틀랜드교단, 미국장로교교단, 크로아티아 체코교회, 이태리 발데시안교단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금번 총회는 체코민주혁명 10주년을 맞아 교회의 모습을 평가하는 의미 있는 회의였다. 총회 임원회 보고서 가운데 89년 이전의 체코교회의 모습과 오늘의 과제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인 \"교회의 고백과 교회생활\"을 소개한다. 그리고 얼마 전 의회에서 부결되었지만 동성연애자들의 결혼법이 한 동안 체코 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이 논쟁은 현재 교회 내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교단의 입장이 \"제 30차 총회 성명서\"에 표명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은 263개 교회에 138,616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다. 총회장 빠벨 스메따나 목사는 현재 체코개신교 총연합회 회장이기도 하다.

총회 임원회 보고서

1. 교회의 고백

10년 전 11월 17일 26차 총회 때 총대들은 한편의 드라마를 목격했다. 그것은 이 회기의 회의록에 기록되었다: 총회장은 시위를 하는 학생들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나로드니 트지다 거리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보고를 하였다. \"경찰이 11월 17일 50주년 기념행사의 시위를 조직한 학생들을 진압하는데 개입하였습니다. 젊은 학생 시위대가 시위를 허락받은 장소, ‘비쉐흐라드’를 출발해서 프라하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마이 백화점(현재의 테스코 백화점)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행진이 저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서 있었고 일부는 도로바닥에 앉았습니다. 도로 양쪽(나로드니 트지다 도로 양편으로 곳곳에 있는 골목길을 말함)으로 경찰들이 막고 있어서 시위대가 도주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 한 시간 가량 우리들은 그냥 경찰들과 대치해 있었습니다. 해산할 것을 경고한 후 보호막을 한 경찰차들이 학생시위대를 향해 밀고 들어왔고 안기부(SNB) 요원들이 잔인하게 젊은 시위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26차 총회 총대들은 불확실성, 공포, 예상과 희망의 드라마와 같은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저녁때 총대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성서를 낭독하며 묵상기도와 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내어 주기도를 드리며 그 시위대를 지원하였다. 총회는 당시 총회장이신 J. 흐로마드까(Hromadka)를 수상에게 그리고 내무부장관에게 보내어 경찰의 개입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총회는 수상 아다메츠(Adamec) 에게 전보를 보내 평화롭게 폭력이 없이 프라하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 그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과 구속된 모든 사람들을 풀어줄 것을 긴급하게 요청하였다. 그 당시 평화적으로 데모를 하는 학생들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일당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가져다준 과정을 목격하게 되리라는 예상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10년째 우리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자유의 숭고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모든 기독교인들 덕분이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 정치가들의 세대교체를 통해, 소위 사회주의 블록의 시민들 사이에 무르익은 전체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감에 의해 그리고 수감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지지하고 이 사회의 민주적인 조건을 밝히는 사람들의 용기에 의해 의심할여지없이 현재의 체코 사회의 커다란 변화는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표징을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볼 수 있다.

10년이라는 기간은 과거와 현재의 교회의 삶과 봉사를 평가하기에 충분하다고 나는 믿는다. 개혁신앙고백의 원칙적인 성서의 토대와 우리의 평가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공의의 사랑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성취와 판단(우리가 스스로 자신에게 전념할 수도 전념해서도 안된다)에 달려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외부의 환경과 사회구조에 의해 우리의 삶이 결정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며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세상의 권력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을 결코 박탈당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실질적인 자유의 원천이다.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전체주의적인 체제의 시대에 이 은총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이 은총으로 오늘을 살고있는가?; 이 은총과 특권이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용서의 확신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가장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의 은총과 만나는곳, 거기에서 우리 자신의 개개인의 삶과 전체 교회의 삶의 비판적인 반성이 시작된다.

우리의 믿음이 11월 이전의 시대에 입증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의 명백한 답을 우리는 줄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과거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복음의 권위 아래 서 있는 양심, 진실로 자신의 교회를 돌보고, 냉담한 시대에 복음을 설교하고, 젊은이들과 노인들을 가르치고, 비참하게 조롱과 모욕(공격)과 굴욕을 받은 사람들, 그들은 침묵의 왕을 자유롭게 따르는 자로 행동을 하였는가? 그는 봉사의 힘이 되었는가? 사회의 약한 자 억눌린 자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대해 민감했던 사람들, 그들은 약한 자와 비천한 자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였는가?

자기 존재에 대한 또는 체코형제개혁교단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복되었던 곳에서, 자기 생존의 본능으로, 예를 들어 우리의 삶을 보장할 귀중한 수단과 같은 그런 것을 우리가 기대하였던 곳,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교회의 장래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판단할 때,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은총이 우리를 판단하게 된다.

각각의 개인이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대비하고 그리고 앞으로 각 교단과 개교회들이 자립해야 될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다원화 된,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사회에서 하나님의 자유가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우리의 우선적인 과제가 경제적으로 교회의 삶을 준비하는 것인가? 경제적인 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교회의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장 6절)\"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증인으로 봉사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차별받는자를 돕고, 실직자와 홈레스 피플들을 돌보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그 자유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이며, 길들여진 습관으로부터의 자유이며, 고통속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살고 있다는 가장 이해할 수 있는 표징이 된다. 이러한 은총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를 들고 기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리려고 한다. 교회와 세속의 통계의 결과에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 교회의 삶은 우리가 온전히 순복하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자유이다.

여러분들에게 총회 임원회가 정부당국과 토의한 것을 규칙적으로 보고 드렸다. 다른 교단들과 함께 우리는 그 토론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토론들은 그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총회 임원회와 고문단(顧問團)들이 국제 관계를 고려해서 많은 문제들을 연구해야만 했었다. 우리국가가 NATO의 회원국이 되는 것을 우리는 지지하였다. 우리가 악을 반대해야만 하고 그리고 유럽과 세계의 불안정한 상황이 잘 조직된 군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였다. 알바니아 난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코소보와 유고슬라비아의 주요한 군사 시설에 대한 폭격을 해야 되는 중대한 시기에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지역으로부터 엄청난 폭력과 살해와 방화 그리고 추방에 대한 침묵과 영향력 없는 선언들은 오히려 극한 상황으로 몰고갈 것을 확신한 총회 임원회는 군사 작전을 지지하였다. 동시에 우리는 군대와 무기가 발칸반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음을 아울러 천명하였다. 만약에 진정한 화해가 오지 않고, 모든 기독교 교회들의 특별한 선교가 있지 않으면, 발칸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2. 교회 생활

총회 임원들은 지교회들을 방문해서 당회원들, 교인들과 같이 정규적으로 토론을 하였다. 몇 가지 문제점들을 유형별로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 주로 목회자의 봉사 부분이다. 교회들은 자신들의 목회자들이 신실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청년과 노인들을 믿음 안에서 가르치고 교육하고 개인의 삶과 가정의 삶에서 믿음을 증거하고 목회적인 돌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지난 몇 년 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에 통과한 많은 젊은 설교자들을 얻게 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목회자의 연령 비율이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우리 교단의 201명의 목사 가운데서 146명이 25-50세 사이이며 65세이상이 18명이다. 나는 모든 신실한 설교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남편과 부인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시간 나는 이미 은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목사로 봉사하고 있는 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현재 목회자를 찾고있는 교회가 40개나 된다. 만약에 은퇴 교역자들이 계속해서 일하시지 않았다면 목회자 없는 교회의 숫자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거의 모든 목회자들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의 수고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목회 이외에도 병원 방문, 가정 방문을 통해 노인들이, 그리고, 교도소 방문을 통해 죄수들이 죽음과 고통과 외로움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을 갖도록 목회적인 돌봄을 하고 있다.

새로운 방문 계획에 따른 교회 방문은 교회의 삶에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더 자세한 보고는 부총회장(Synodni Kurator)께서 앞으로 하실 것이다. 방문위원회는 우선 노회장들의 5교회들을 시찰하였다. 교단의 지도자들의 교회들은 전체 교회의 대표가 아니다. 방문단은 목회뿐만 아니라 교회 행정에 대해 전반적으로 신뢰할 만한 시범을 보여주었다. 좋은 협력자들의 그룹에 의해 형성된 당회는 교인등록부, 회의록 작성, 서신관리 등등의 행정에 문제가 없게 된다. 노회에 방문단의 시찰이 계속될 것이다.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상호 논의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둘째) 장로들과의 협력의 심화는 교회 생활의 기쁜 모습이다. 몇몇 장로들이 안수받는 설교자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부총회장 다니엘 줴나띠께서 상세한 보고를 할 것이다. 청장년 계층의 장로들이 자신의 교회에서의 활동을 수동적으로 하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교회를 평가하고 계획하는 준비로써 성서신학을 더욱 잘 이해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교인들에게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는 그런 교회가 자신의 선교를 수행할 수 있다.

셋째) 세 번째로 중요한 부분이 새로운 법과 관련한 교회의 재정 문제이다. 나는 이미 앞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다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교회는 연대의 정신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교회들은 전체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들 교회들을 선교센터로서 이해 해야 한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흩어진 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포기하는 아이디어들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당회가 영적으로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이웃 교회들과 협력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자유가 확보되는 한, 교회는 국가로부터의 재정적인 지원을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정부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만 한다.

소속 교회들에게 보내는 30차 총회의 성명서

총회를 마치면서 총회의 결의 가운데 지 교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총대들의 성명서 형식으로 정리해서 교회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교회가 어떻게 성공적이고 효과적인 조직이 되는가?

교회 생활의 목회적 차원은 필수적임을 이번 총회에서 누차 지적되었다. 제도와 운영의 부드러운 상호작용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의 목회적인 헌신 – 우리들의 상호 보호함이 목장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 교단의 회원권을 요청한 \"예드노따 브라뜨르스카 교단\"(Jednota Bratrska)의 형제 자매들에게 \"체코형제개혁교단\"의 회원권을 주기로 한 우리의 결정을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위해서 새롭게 \"오흐라노브스끼 노회\"를 조직한 것은 그들 교단이 겪고있는 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총회에서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우리들과의 관심을 조직적으로 다루도록 요청된 것을 여러분들이 동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교회에서 그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기 원하며, 교회의 공동체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길 원합니다.

우리가 발의한 마지막 주제는 난민의 문제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물론 교회는 그들에게 사려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분들이 갖고있는 문서는 어떻게 우리들의 교회들이 그들의 가난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와 낡은 관습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다른 길을 보여주는 삶, 즉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 옛습관을 버림, 죄의 길을 떠나는 용기를 깨달았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민의 자유가 그러한 삶의 길에 좋은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1999년 11월 20일

[개혁교회사]15. 새로운 상황 1989 – 1990

15. 자유와 민주의 회복이후 새로운 상황 1989년 – 1990년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전체주의 통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힘이 1989년 11월 “힘없는 자들의 힘”의 유효성이 증명되었다. 비폭력적인 “벨벳혁명”의 며칠동안 겁에 질리고 당혹해한 공산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교인들은 정치상황의 드라마 같은 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모든 신학교 학생들은 11월 17일 유혈사태이후 스트라이크에 동참하였고 많은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완전한 민주의 회복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시민 포름”을 지지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장 요셉 흐로마드까(Josef Hromadka)박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26차 총회의 회장이자 체코개신교회 협의회 회장 이었다. 그는 폭력을 행사 하거나 의지하지않고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과 협상하는 책임을 맡았다.

42년 후 (1948년부터) 절대권력의 공산당의 전횡이 깨어지고 자유 공화국에서 모든 시민의 민주적 권리들이 회복될 수 있었다.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의 대통령 선출(1989년 2월 29일)은 체코슬로벤스꼬 역사의 중요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박해 받고 자신의 직위에서 해고된 정권에 반대한 많은 반정부인사들이 새롭게 형성된 사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민족을 이해하는 정권”의 의회에 일부 인사들은 진출하였다.

이러한 변동의 상황에서 1990년 초부터 종교의 자유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졌다. 교회에 대한 국가 감시가 취소되었다. 개혁 신학부는 까렐 대학에 소속되었다. 모든 교회들에게 에큐메니칼 협력의 가능성이 열렸다. 많은 연합감사예배와 다양한 에큐메니칼 모임들이 열렸다. 오랫동안 우세했던 반종교적인 선전들이 정규적인 주일예배, 영적인 대화와 교회와 에큐메니칼 소식들의 신문 방송등 언론매체의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연합활동으로 체코형제개혁 첫번째 위원회는 다른 교회 대표들이 새로운 교회법의 제언에 대한 의견들을 준비하도록 하였으며 종교인과 교회를 언급하는 다음 법들과 규칙들의 주의 깊은 관찰과 준비에 주목하였다. 1990년 27차 총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에서 종교교육을 강화하였다. 특별위원회는 “시민교육” 시간에 목회자들이 종교교육이 가능한 학교 또는 지역교회에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시행된 종교교육의 커리큘럼을 승인하였다. 어린이 지체 부자유 아동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수련회를 확대하였다.

이런 다양한 영적인 활동 외에 교회에서 교회 찬송가의 몇 차례 인쇄가 있게 한 점증하는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이 있었다. 외국 교회들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1979년 말 바덴(Baden,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마치 1988년 두권의 교회력 예전이 바덴 개혁교회의 도움으로 출판된 경우와 비슷하다.

체코형제개혁교회가 세운 학교는 첫 단계로 전문학교 형태였다. 프라하에서 사회사업 과목외에 현대언어 학과도 갖춘 “개혁 아카데미”가 세워졌다; 브르노(Brno) 와 나호드(Nachod)의 전문학교들은 홈 케어(환자 노인을 가정에서 돌보는 사회봉사)와 사회봉사 활동을 목표로 하였다. 흐라데쯔 끄랄로베(Hradec Kralove)에서 임시 설교자와 교리문답 교사 양성을 위해 성경학교가 설립되고 끄로미에지쉬(Kromeriz)에서 음악과 교리문답 교사 교육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사역은 청소년 부서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교육제도에 따라 재조직되었다. 청소년 모임, 청소년 사역자 모임, 다양한 목적을 갖는 여름봉사활동, 외국에서 젊은이들의 참석이 가능한 모임을 포함한 모임들의 숫자가 점증하였다. 컨퍼런스 프로그램의 높은 비율이 청소년에게 부담이 되었고 “형제애(Bratrstvo)”라는 청소년을 위한 잡지의 내용이 폭이 넓어졌다.

확대된 평신도 교육은 대중적으로 사회의 영향을 주는 교회의 개방된 사고와 같은 의미 있는 유사성을 갖는다. 위원회는 언론매체를 위해 새롭게 조직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를 예배와 기타 종교 행사 방영 준비에 다른 교회 대표들과 공유하는 라디오 텔레비젼 방송의 종교 방송 편집진에 파송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요한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총회는 독립된 교회 스튜디오 설립을 허락하였다.

자랑할 만한 내용으로 새로운 차원의 상당히 발전된 다양한 디아코니아 봉사를 들 수 있다. 기독교적인 도움의 상담봉사(프라하 – 살바또르, 브르노, 오스트라바)외에 프라하 10, 끌로보우까(Klobouka), 끄라브치쩨(Krabcice), 나호드(Nachod), 프제로우체(Prelouce), 뽀드보잔(Podboran), 야브로네쯔(Jablonec n. N.)과 미스리보지쩨(Mysliborice)에서 차례대로 사회사업 센터가 설립되었다. 공식적인 직원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 외에 디아코니아는 수많은 자원봉사 협력자들을 갖게된다. 교회의 사회사업학교의 졸업자들부터 디아코니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역 교회, 지역 노회는 양로원, 병원 그리고 망명자 수용소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기독교 봉사의 이처럼 다양한 형태와 함께 기독교 증언의 새로운 형태를 동시에 찾았다. 전도의 새로운 개념은 과거의 비종교적인 해석의 경험에서 그리고 새로운 찬송가의 형태의 증언에서 계속될 수 있었다.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과 형태의 중심에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교회는 올바른 경향의 추구를 멈출 수 없었다. 최근 총회는 새로운 길은 올바른 조사와 과거 시대의 정당한 평가 없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개혁교회사]14. 교회 정체성을 위한 투쟁 1977-1989

14. 현실사회주의 아래서의 교회 정체성을 위한 투쟁 1977년 – 1989년

77헌장 지지자들과 절대 권력에 맞선 저항자들의 용감한 투쟁의 도덕적 깊이는 올바른 신학 경향을 위한 체코형제개혁교회 내부 토론의 중요한 반응을 일으켰다. 마치 급진적인 따보르파와 함께 온건한 프라하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던 후스 시대 처럼 현실사회주의의 억압 아래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두개의 중요한 논쟁이 형성되었다: 1. 교회활동의 보장된 합법적인 가능성을 통해 평화적이고 분쟁 없는 방법을 추구하는 – 온건한 대다수 그리고 2. 고백교회의 의미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어려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비타협 정책을 지지하는 – 급진적인 소수 그룹. 모든 총회 때마다 급진적인 목소리는 신학적 토론에서 언제나 흘러나왔다. 총회의 지지를 받는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 당국자들과 파트너 관계를 열기위해 노력하였다. 지속적으로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보장 받을 수 있도록 대화와 협상을 통해 야기된 모든 문제들과 위협적인 분쟁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십자가 아래서 교회의 고백과 증언으로서 옛날 형제단의 경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우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인권 문제는 체코형제개혁교회 안에서 많은 교인들의 주장이기도 하였다. 1977년 5월 교회의 31명이 단체로 국가회의에 신앙과 교회 차별에 대한 문서와 모든 종교의 자유의 실질적인 보장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서명자는 주로 정부에 의해 교회활동이 중지된 젊은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의 몇 몇 명망 있는 평신도들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불의를 반대해야 하는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실제 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서 모순을 일으켰다. 총회는 활동 중에 있거나 아니면 국가로부터 목회 활동이 중지된 서명자 목회자들에게 경고로 질책하도록 결정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54명의 체코형제개혁교회 목회자들이 목회 활동이 금지되었고 많은 신학생들이 제적되었다. 총회는 국가 기관들에게 교회의 법과 시민의 권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각각 다른 것임을 환기시켰다; 총회는 “합법적인 저항” 과 “공식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락된 것”으로 해석 결의를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디아코니아 활동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몇 몇 설교가들은 목회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제적된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 관청의 차원에서 국가는 구체적인 범법 사례와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 종교교육 그리고 문서 사업의 제한된 활동을 공지하였고 노회와 총회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기위해 국가 정보기관과 감시기관의 반복되는 도청과 감시, 교회 봉사직의 선출에 대해 소위 “사전 국가동의”라 불리우는 승인과 “국가의 불신임”의 조건에 의한 동의의 거부를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올바른 신학경향에 대한 토론은 정규적으로 목회자 컨퍼런스와 특별히 총회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 근본적인 신학적 차원에 대한 개방된 토론은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다. 때때로 심지어 심각한 논쟁이 있지만 각각 다른 신학 경향의 사람들은 성만찬에 그리고 교회의 영적일치의 보호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을 확인하는 화해의 형제의 영으로 언제나 함께 모일 수 있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 협의방식은 개방성 – 전체주의 통치의 중심에서 – 민주주의 의회의 방법들을 반영하였고 국가 기관의 주의 깊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80년대 중반 소비에트 연방에서 고르바초프(M. Gorbacov)가 “글라스노스뜨(개방)”과 “뻬쩨스뜨로이(개혁)”의 토대 위에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의 새로운 길을 선언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민주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불행하게도 공산주의 권력자들은 일반적인 선언에 집착하였고 전체주의 정책의 과정과 무기력한 경제구조의 변화를 실천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 제1공화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잊지않고 있던 “침묵하는 대다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해 다양한 “시민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국가 기념일에 공산당의 인민 군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된 대중집회와 시위들이 발생하였다. 1987년 제25차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 후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에 관한 “법 개정안”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안이 1988년 말에 국가 행정기관에 제출되었다. 1989년에 법무부와 국방부와 협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봄 민주적인 자유의 회복을 위한 대중 서명 운동인 “몇 개의 문장” 이라는 새로운 시민운동이 조직되었고 모든 교회 많은 교인들이 이 서명운동에 참가하였다. 위기의 상황이 정치적 변동을 성숙시켰다. “진리와 자유의 삶”(하벨의 구호)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989년 11월 16-18일 프라하에서 열린 제 26차 총회기간에 이 요구가 표명되었다. 11월 17일 총회의 저녁 회의때 혁명적인 사태의 소식이 전달되었다.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나로드니 트지다(Narodni trida)거리에서 경찰의 잔인한 진압에 의한 대량학살 소식을 전달 받고 총회 회의는 중단되고 침묵 기도 후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움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당시 총회의 선언은 모든 사태를 발생시킨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첫번째 공개적인 저항이었다.

[개혁교회사]13. 생존 투쟁 1949 – 1977

13. 전제주의 통치사회에서의 생존 투쟁 1949년 – 1977년

“공산당의 지도력 아래서의 노동계급에 의해 정부의 모든 권력이 이양되었다.”는 공식적인 선언이 있었던 1948년 2월 정치적 구테타 이후 교회들도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체코 개혁교도들은 자신의 민족의 진보적인 사회주의적 노력에 동감하였기에 사회제도의 올바른 건설에 대한 사회주의적 사상과 포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전제주의 통치의 폭력과 불법으로 체코개혁교도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정치적 반대자로 간주되면 처형되거나 갖히거나 노동수용소 또는 군부대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친척들은 범죄자들이 되었다.

체코형제 개혁교회 뿐 아니라 전 교회적으로 영적 지도자였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요셉 르믈 흐로마드까 (J. L. Hromadka)교수의 활동에 의해 많은 교인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사명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노력 하였다. 기독교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에 몇 차례 성명서에서 밝혀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치적 변화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증언을 해야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외적으로 확산되는 무신론주의 그리고 점증 되는 교회에 대한 차별을 기독교 증언의 무관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도움이 제거 되어야만 하는 교회의 시련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자신의 존재 – 그루터기가 되는 것 – 의 새로운 외적 조건을 받아들였다. 복음 전파와 교회의 사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단체 (후스파 종교개혁과 형제단 종교개혁)의 이전 활동과 관련된 “종교개혁의 정신의 연맹(SCED)”이 1952년부터 체코형제개혁교회안에서 활동을 확산시켰다. 목회자들의 신학교육을 지원하고 국내 국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등을 숙고하였다. 외부의 압력이 강화되는 시기에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SCED의 활동은 강제적으로 1974년 내무부의 결정에 의해 막을 내렸다.

60년대에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 – 특별히 마호베쯔(M. Machovec)교수 – 교회들 에게 환영을 받은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현대의 형태의 자신의 “헌법”을 갱신하여 1966년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불행하게도 대화의 희망과 정의롭고 인도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어느 하나도 성취되지 못하였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통치원칙으로 선언되고 유물론주의의 무신론이 유일하게 유효한 삶의 관점으로 정착되는 현실이 당시 새롭게 선포된 “사회주의 공화국(CSSR)”의 시대에 많은 교인들에게 사회주의 국가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신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것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 당시 생존을 위해 많은 교인들을 “국내의 이민자”로 그리고 수동적인 “은둔자들”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존재의 순수성과 올바른 기독교의 경향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지속되는 이중적인 노력은 숨김없이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서 발표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총회는 각종 교회헌법의 정관과 구체적인 탄원과 청원으로 국가 행정기관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였다.

1968년 공산주의 체제의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두브첵(A. Dubcek)의 시도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교회에 불러일으켰다. 불행하게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짧은 기간이 쏘비에트 군대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가 체코로 진주하면서 1968년 8월 21일 끝이 났다. 1969년 2월에 열린 체코형제개혁교회 16차 총회가 “우리 민족의 총회”라는 특별 메시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하였다. 그 다음해 전제주의 통치자의 가혹한 형태의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이 공식적으로 “정상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억압은 교인들을 포함한 잠복중인 반 공산주의 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교인으로 1969년 1월 16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얀 빨라흐(Jan Palach) 학생의 희생은 젊은 세대의 내적 저항의 강렬한 표현이었다.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정부가 서명한 1976년 헬싱키 시민 권리에 대한 국제협정 선포이후 민주화 운동 “77헌장(Charta 77)”의 지지자들이 모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실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77헌장의 일차 서명자들 가운데 체코형제개혁교회의 19명의 목회자와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일터를 떠나야 했다. “77헌장”은 시민의 책임 운동으로서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한 꿈을 민족적으로 각성 시킨 유명한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힘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인들은 내적 힘의 새로운 필요성과 자신의 교회의 확고한 토대 위에서 영적 방향을 위한 도움을 자각 하였다. 여기서 신실한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와 기독교 목사의 다양한 형태의 목회를 위해 투쟁하였다.

[개혁교회사]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 – 1989

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년 – 1989년

반 종교개혁이 오랫동안 16세기 체코 개혁자들 사이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1861년 종교개혁에 대한 칙령이 발표된 이후 체코 개혁 교도들에게 처음으로 외국 자매 교회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었다. 외국의 개혁 교도들은 당시 자신들의 믿음의 체코 형제들과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에게 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에 지지를 보냈고 물질적으로 도왔다. 1821년부터 외국 대학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개혁 신학부에서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할 가능성이 열린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치관계의 시기에 중단되었으나 후에 다시 재개 되었다.

개혁교회의 교인들은 올바른 에큐메니칼 협력은 체코 국내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1905년 프라하에서 후스의 경험으로 “콘스탄츠(후스가 화형을 당한 스위스 국경을 접한 독일 도시)의 연대”라는 상징적인 이름 아래 1주년 체코 국제 종교개혁 단체가 설립되었다. 절대적인 로마 카톨릭 국가 안에서 종교개혁의 단체들이 성장하고 종교개혁의 소수파의 자의식과 그들의 사명이 강화되었다. 이 단체들이 오늘날 다시 많은 에큐메니칼적이고 영적이며 문화적인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과 신학월간잡지 “크리스찬 리뷰”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슬로바키아 개혁 교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를 더 발전시켜 계간지 “Theologia evagelica”(1948-1951)의 발간이 이루어졌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연합되기 이전부터 체코개혁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당시 세계 장로교연맹)”의 회원교회가 되었으며 후에 연합교회로서 “세계 루터교회 연맹”과 “연합교회연맹”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기독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활동에 참여 하였으며 특별히 1925년 스톡홀름(Stockholm)회의와 1927년 로잔(Lausanne)회의에 참여하였다. 1948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 1959년부터 유럽교회회의의 회원교회가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들은 1973년 로이엔베르크 콘코르디아(Concordia of Leuenberg) 준비와 활동 그리고 계속되는 신학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때부터 해외의 개별 자매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과의 교류가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에큐메니칼 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1954년 에반스톤의 2차 세계교회협의회 회의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에큐메니칼 교회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의 어려운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교도들은 개혁 교회의 신앙의 토대에서 세계의 사건에 대한 응답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세계평화의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8년 프라하 기독교 평화회의가 조직되었으며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개혁교회는 동서유럽의 개혁교도들의 만남에 의해 폭 넓은 단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들이 이 회의에 참여 하였다. 흐로마드까(J. H. Hromadka) 및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다른 중요한 인사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평화 회의에 참여하였다. 1968년 소위 “프라하의 봄”의 정치개혁이 강제로 탄압된 이후 정치적으로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ation)” 운동의 시기에 특별히 이 평화운동은 정부의 간섭과 이데올로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제 3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평화회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서 교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협력은 단지 정부기관의 감시 아래에 계속될 수 있었다.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는 실제로 각 회원 교회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존재하였다. 반면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 몇몇 활동 위원회(특별히 성서와 에큐메니칼 연구를 위한 위원회, 기도 생활 실천위원회, 여성활동 위원회, 성서발전 위원회 – “성서 사역”)는 시들어가는 에큐메니칼 단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9년 말경 형식적인 에큐메니칼 사업은 “우리 역시 사회의 아픔을 외면했고 오랫동안 침묵했었다”는 교회협의회 마지막 회의 성명서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에큐메니칼 사업은 지역 교회와 개 교회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과제와 협력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교회들 사이의 형식적인 교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교회의 일치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연구가 에큐메니칼 관계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형제로써 발견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미는 일치된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일치된 확신 속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