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 – 1989

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년 – 1989년

반 종교개혁이 오랫동안 16세기 체코 개혁자들 사이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1861년 종교개혁에 대한 칙령이 발표된 이후 체코 개혁 교도들에게 처음으로 외국 자매 교회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었다. 외국의 개혁 교도들은 당시 자신들의 믿음의 체코 형제들과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에게 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에 지지를 보냈고 물질적으로 도왔다. 1821년부터 외국 대학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개혁 신학부에서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할 가능성이 열린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치관계의 시기에 중단되었으나 후에 다시 재개 되었다.

개혁교회의 교인들은 올바른 에큐메니칼 협력은 체코 국내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1905년 프라하에서 후스의 경험으로 “콘스탄츠(후스가 화형을 당한 스위스 국경을 접한 독일 도시)의 연대”라는 상징적인 이름 아래 1주년 체코 국제 종교개혁 단체가 설립되었다. 절대적인 로마 카톨릭 국가 안에서 종교개혁의 단체들이 성장하고 종교개혁의 소수파의 자의식과 그들의 사명이 강화되었다. 이 단체들이 오늘날 다시 많은 에큐메니칼적이고 영적이며 문화적인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과 신학월간잡지 “크리스찬 리뷰”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슬로바키아 개혁 교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를 더 발전시켜 계간지 “Theologia evagelica”(1948-1951)의 발간이 이루어졌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연합되기 이전부터 체코개혁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당시 세계 장로교연맹)”의 회원교회가 되었으며 후에 연합교회로서 “세계 루터교회 연맹”과 “연합교회연맹”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기독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활동에 참여 하였으며 특별히 1925년 스톡홀름(Stockholm)회의와 1927년 로잔(Lausanne)회의에 참여하였다. 1948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 1959년부터 유럽교회회의의 회원교회가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들은 1973년 로이엔베르크 콘코르디아(Concordia of Leuenberg) 준비와 활동 그리고 계속되는 신학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때부터 해외의 개별 자매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과의 교류가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에큐메니칼 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1954년 에반스톤의 2차 세계교회협의회 회의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에큐메니칼 교회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의 어려운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교도들은 개혁 교회의 신앙의 토대에서 세계의 사건에 대한 응답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세계평화의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8년 프라하 기독교 평화회의가 조직되었으며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개혁교회는 동서유럽의 개혁교도들의 만남에 의해 폭 넓은 단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들이 이 회의에 참여 하였다. 흐로마드까(J. H. Hromadka) 및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다른 중요한 인사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평화 회의에 참여하였다. 1968년 소위 “프라하의 봄”의 정치개혁이 강제로 탄압된 이후 정치적으로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ation)” 운동의 시기에 특별히 이 평화운동은 정부의 간섭과 이데올로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제 3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평화회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서 교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협력은 단지 정부기관의 감시 아래에 계속될 수 있었다.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는 실제로 각 회원 교회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존재하였다. 반면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 몇몇 활동 위원회(특별히 성서와 에큐메니칼 연구를 위한 위원회, 기도 생활 실천위원회, 여성활동 위원회, 성서발전 위원회 – “성서 사역”)는 시들어가는 에큐메니칼 단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9년 말경 형식적인 에큐메니칼 사업은 “우리 역시 사회의 아픔을 외면했고 오랫동안 침묵했었다”는 교회협의회 마지막 회의 성명서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에큐메니칼 사업은 지역 교회와 개 교회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과제와 협력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교회들 사이의 형식적인 교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교회의 일치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연구가 에큐메니칼 관계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형제로써 발견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미는 일치된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일치된 확신 속에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사]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

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년

1938년까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인숫자는 325,000명으로 늘어났다. 200개 개교회와 219개의 기도처에서 약 200여명의 목회자들이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100개의 교회당이 신축 또는 개축되었다. 이어지는 독일 파시스트 위협의 시대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와 정치 문제들이 교회의 과제로 다루어져야 했다.

1938년에 서유럽 강대국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화되는 압력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에 의해 3백만 명 수데텐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분리와 나찌 독일 제국의 합병 동의를 하였다. 이 수데텐 지역의 체코인 거주민들은 체코와 모라비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1939년 3월 그러나 히틀러는 나머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위 “보호령”이란 법규는 6년간의 독일 나찌 점령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6개월 후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체코와 모라바의 보호령”이 존재하는 엄격한 독일 통치하의 체코 영토 전역에서 전쟁의 요인이 잠복 되어 있었다. 게슈타포에 의해 지도되는 나찌들이 여기서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유태인들은 제거되었고 체코 민족의 모든 계층들 특별히 지식계층은 강압에 굴복하였다.

교회 역시 나찌 정복의 시대에 가장 다양한 형태의 억압으로 박해를 받았다. 많은 목회자들 교인들이 반나찌 저항운동에 참여하였고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혔다. 저항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축출을 당하고 교회의 많은 젊은 교인들은 독일 제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폐교된 체코대학 가운데 개혁 신학부도 있었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젊은 신학도들을 위해 신학수업의 비밀 장기과정을 만들었다. 전쟁 직후에 학업을 끝마치고 교회 봉사를 위해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소위 “집사”들이 이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전쟁 후 나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 수데텐 독일인(약 350만 명)의 대부분이 독일로 추방되었다. 몇몇 개교회들뿐 아니라 전후 체코형제개혁교단이 수데텐 독일인들의 삶의 파괴 문제를 다루었다. 많은 체코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특별히 어린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옛 수데텐 독일인들이 살았던 비어있는 지역에 새로운 정책자들 실레시아(Slezsko),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에서 귀향한 체코 개혁교도들이 정착하였다. 이로 인해 체코형제개혁교단은 특별히 체코 서부지역에서 새롭게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교세가 270개 개교회 그리고 이지역에서 400개 기도처 그리고 약 350,000으로 늘어났다. 몇몇 국경지역 개교회에서 독일 예배가 진행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전쟁직후 독일인 약 160,00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많은 개혁교인들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회로 가입하였다. 예로 아쉐(Ase) 흐라니체(Hranice) 야히모바(Jachymova) 그리고 베이쁘르띠(Vejprty) 이다.

1945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주권이 형식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 하에서 갱신되었다. 서유럽 동맹국들의 배신적인 정책(뮌헨협정)에 대한 깊은 실망 이후 자유 공화국의 시민들은 소련연방의 승리에 점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46년 선거 후 가장 강력한 당이 된 새롭게 형성된 공산당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였다. 1948년 2월에 정부의 변혁이 준비되었고 점차적으로 공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따라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국가 감시 하에 들어갔으며 교인들은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새로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의 자유가 법에 의해 보장되었으며 교회 내부 활동은 허락되었으나 실제로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9년 국가에 의한 교회재정 보장에 대한 법이 발표되었다. 공산 정부는 교회의 물질적 보장과 모든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 이하여 재신이 “국유화”된 교회들은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정부의 통제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회월보의 문장까지 교회활동의 모든 것을 승인하는 “교회를 위한 정부부서(SUC)”가 만들어졌다. 소위 “영적활동에 대한 국가의 동의”는 개 교회 설교가들에 대한 규칙 뿐 아니라 초청받은 설교자에게도 필요하였다. 어떠한 교회의 활동을 위해 허락 받은 기부금은 대부분 필요한 교육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단지 감시자의 역할만을 하는 담당관리의 의사에 따라 사용되어졌다.

점증하는 정치적 전제주의의 강대국의 억압 하에서 날로 힘을 얻어가는 반 종교적 반 교회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힘든 투쟁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외적으로 존재하여 내적인 보전을 하는가 이다.

[개혁교회사]10.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 – 1948

10.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년 – 1948년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몇몇 중요한 요인들로 이미 이전에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관용의 시대(제9호 연재7번 참고) 1918년까지의 시대는 점차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와 얼마후 정통주의(신앙고백의 강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1918년 까지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를 한 비엔나 신학부는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이성주의는 후에 구(舊) 민족종교전통과 종교적인 감성에 대한 낭만적인 강조와 연결이 된다. 체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외국 종교개혁(독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문호가 개방될 무렵인 1860년대부터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에 루터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주의와 앵글로 색슨의 대각성 운동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몇 가지 갈래로 나뉘어진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이 강하였다. 신학의 자유주의는 신앙 고백적인 배타성을 약화시키고 교회의 실천적인 과제와 사명을 강조하여 결정적으로 1918년 두 교단이 연합하는데 기여하였다.

후스개혁신학부의 설립이후 바르트(K. Barth)와 부르너(E. Brunner)와 함께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야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리고 교회를 순례자의 교제로 깨달은 흐로마드까(J. L. Hromadka)의 영적인 지도아래 특별히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흐로마드까 교수는 라들( E. Radl ) 교수와 함께 교회밖의 일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별히 기독학생운동(아카데미 YMCA)의 젊은 세대들에게 “기독교 레뷰(krestanska revue)” 월간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학활동으로 흐로마드까는 세계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체코종교개혁의 유산을 정의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문화를 위해 체코종교주의의 기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종교, 철학과 문학간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현대사회의 교회와 교회일치의 과제에 따라 새로운 이해를 도우려고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5년 이후) 니뮐러(M. Niemoler)와 본 회퍼(D. Bonhoeffer)로 대표되는 나치정권에 대항하는 독일고백교회의 용감한 투쟁이 젊은 체코신학도들에게 오늘날까지 특별히 감명을 주었다. 후에 역시 해석학, 종말론, 그리고 대화에 대한 문제들과 씨름한 유명한 신학자들 불트만(R. Bultmann) 골빗쩌(H.Gollvizer) 틸리히 (P. Tillich) 몰트만 (J. Moltman)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영적인 삶 가운데 세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난다.

1. 성서 지향적인 흐름이다. 이 경험은 고전적인 체코개혁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지배적이다. 하나님 말씀의 개관성 강조이다; 신학방법은 과학적인 해석학의 작업과 관련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신학부와 합동으로 두개의 신하작업그룹에서 새로운 성서 콘코던스(원어 동의어와 함께) 그리고 새로운 성서번역을 하였다. 번역그룹 < 구약은 비츠 (M. Bic)의 지도아래 그리고 신약은 소우첵 (J, B. Soucek), 소우첵 교수가 죽은 후 뽀꼬르니 (P. Pokorny) 교수의 지도아래 > 이 에큐메니칼 기획을 하였다. 몇 년간의 작업을 걸쳐 1979년에 에큐메니칼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다.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은 2권으로 된 예배예전과 새 찬송가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2. 전도의 경향이다. 개인의 회심과 십자가 신학과 내적경건의 강조와 함께 국내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유교회(free church)”의 영적인 새로운 물결과 오순절 경향과 세상과 물질적인 소비사회에 증언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에 근접하였음이 틀림이 없다.

3. “새로운 진보적인 변화” 의 경향이다. 특별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복음전파의 새로운 방법을 열망하는 에큐메니칼과 사회의 질문에 의해 성경의 증언의 일반적 이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 경향의 한쪽 날개는 사회의 중심에 책임 있는 기독교의 참여로 막스주의자들과 개방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일정한 기간동안 사회 문제들의 이해에 대한 흐로마드까 교수의 논문발표이후 교회에 철학적으로 진보적인 에큐메니칼 서클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러나 모든 것을 지배 하 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의해 질식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즉 총회장과 평신도 대표(curator)들이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영적인 방향을 지도하여갔다. 힘들었던 시대에 그들은 신실한 목회와 국내외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교회의 상황을 신학화 하였다. 첫번째 총회장은 요셉 소우첵(Dr. Josef Soucek 1918-1938), 다음에 카밀 나기(Dr. Kamil Nagy 1939) 요셉 크제넥(Dr. Josef krenek 1939-1949), 빅토르 하옉(Dr. Viktor Hajek 1950-1968), 바츨라프 케이즈(Dr. Vaclav Kejr 1969-1977), 밀로슬라브 하옉(Dr. Miloslav Hajek 1977-1987), 요셉 흐로마드까(Dr. Josef Hromadka 1987-1990), 평신도 대표(꾸라또르 curator-영문) 페르디난드 카프카(Ferdinand Kafka – 1939), 안토닌 보하츠(Dr. Antonin Bohac – 1950), 구스타프 흐레이사(Dr. Gustav Hrejsa – 1959), 파벨 시멕(Dr. Pavel Simek – 1971), 프란디쉑 슈까르반(Dr. Frantisek Skarvan – 1979), 밀로쉬 레쉬까르(Dr. Milos Lesikar – 1991), 1991년 부터 지금까지 총회장으로 파벨 스메따나(Pavel Smetana)이며 평신도 대표인 꾸라또르로 즈데녝 수사(MuDr. Zdenek Susa)를 거쳐 현재 리디에 로스꼬브초바(RNDr. Lydie Roskovcova) 여사이다..

[개혁교회사]9.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설립과 활동

9.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설립과 활동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장로제도”를 선택하였다. 장로들과 목사를 제외한 모든 교회들의 대표들은 임기가 6년 이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최근까지 교회는 270명의 설교자들 중에 30-40여명의 여성들이 포함 되어있다. 모든 교회는 총회 법에 따르도록 되어있다. 행정상 13개 노회로 구분하고 한 개 노회는 약 20개 개교회로 구성된다. 노회는 목사 2인 평신도 2인으로 구성된 4인 노회회의(Senioratni Vybory, Seneorate Council)에 의해 운영 관리된다. 노회의 개 교회 대표들은 매 2년마다 노회 총회 회의로 소집되며 그리고 대표들은 매년 부서회의로 모인다.

교회의 최고 기관은 총회장과 총회 평신도대표(Synodni kurator, Synodal Curator)를 대표로 하는 3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로 구성된 “총회회의(Synodni rada, Synodal Council)이다. 총회 사무실과 150-200명의 목회자 평신도들이 자원해서 함께일하는 각 위원회와 부서들의 사무실이 프라하 Jungnannova 9번지, ”후스의 집(Husovy dum)에 있다. 교회의 회원은 특별히 개혁교도 가정의 후손들로 구성되어있으나 개 교회들은 자신의 교인들뿐아니라 자신들의 지역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개 교회의 핵심사역은 주일 예배와 성경 공부이다. 교리교육(어린이들을 위한 종교와 예배 교육, 주일학교, 세례교육, 청소년 활동과 다양한 성경공부 과정)을 강조한다. 그리고 목회와 “기독교 봉사”(노인, 독거노인들과 병자들을 위한 봉사사역)이 특별히 강조되며 이러한 사역은 헌신적인 장로들과 전문가 평신도들의 도움으로 진행된다. 몇몇 도심지역의 개 교회들은 여성들 30대 중년세대들 그리고 특별 봉사 활동을 위한 사역팀이 있다.

구(舊)형제단의 전통에 따라 교회의 교인들은 형제적인 교제와 협의된 개 교회의 생활의 질서와 법에 따른 기독교인의 삶을 지켜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의 교인들이 개 교회에서 책임과 사랑의 봉사를 배우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에 헌신하는 복종의 삶으로 세상에서 증언의 모범이 되는 것을 훈계한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삶과 사역에서 많은 연약함과 영적인 쇠약함이 있다. 현대의 소비 사회의 세속화 과정이 지속적으로 더 깊게 교회의 질서에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회밖의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복음을 전달하려는 살아있는 선교적 인식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인 접근을 위해 준비된 설교자와 가장 다양한 신학과 복음화와 다른 주제들의 과정과 특별히 “선교적 과제”라는 주제로 매년 열리는 역사적 문화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공개강좌와 연구모임의 평신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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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형제개혁교단은 출판활동이 있다. 매월 “체코형제(Cesky bratr)” 잡지가 발간된다. “최근 소식(Aktuality)”이란 제목 아래 총회의 새로운 소식을 싣고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월간 잡지로 “형제(Bratrstvo)”가 있는데 이것은 전제주의 시대때 발간이 금지 되었다가 1990년에 재발간 되기 시작하였다. 젊은 목사들에 의해 발간되는 부정기 간쟁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있다. 교회 출판사와 서점의 이름은 “깔리흐(KALICH)”이다. 종교서적, 일반서적을 제외하고 매년 특별히 “개혁교회 달력(Evangelicky kalendar)” 그리고 매일 가정 예배를 위한 책 “매일 생활을 위하여(Na kazdy den)”을 출판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는 개혁교단들의 연합지인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Kostinecke jiskry)”가 있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자신의 교인들을 위한 교류와 휴식을 위해 몇몇 교육과정과 수련장을 가지고 있다: 보헤미아-모라비아 산간지방의 호떼보즈(Chotebor)에 그리고 끄르끄노쉐 산에 있는 헤를리꼬비쩨(Herlikovice)와 얀스께 라즈니(Jnaske Lazni)에 그리고 끄루슈네 산에 있는 야히모브(Jachymov)에 그리고 서부 모라비아의 라지(Lazy) 등에 있다. 교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영성수련과 성도의 교제를 깊게 하는 기회를 이곳에서 갖게 된다. 이 수련장에서 각양각색의 전체교회 교인을 위한 교육과 컨퍼런스가 열린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손님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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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활동들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든 개 교회들은 매년 교회의 자립을 위한 “희년의 관용의 기금(jubilejni tolerancni dar)”라는 특별 모금을 한다. 이 기금은 특별활동을 위한 개 교회의 지원금으로 사용된다.

[개혁교회사]8.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탄생 1918년

8.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탄생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설립 직후 오랫동안 갈망해온 체코개혁교회들의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3백년동안 체코 개혁전통의 후예들이 “조상의 믿음”을 온전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관용의 시대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두 개의 교회(번역자 주 – 여기서 교회는 교단을 의미하며 하나는 루터의 신앙고백을 한 그룹과 다른 하나는 스위스 개혁신앙고백을 한 그룹이 각각 교단을 형성하였다. 이하 교단은 ‘교회’로 그리고 교단소속의 교회들은 ‘개교회’로 표기함)와 17-18개 개혁교회들이 1918년 12월 프라하에서 총회를 열고 연합을 하였다. 당시 개혁교회는 126,000명 교인들과 루터교회 34,000 교인들이 있었다. 체코의 개혁전통 특히 형제단의 전통으로 연합된 교회의 설립은 체코형제개혁교회(Ceskobratraska cirkev evangelicka)로 이름이 붙여졌다. 연합된 교회의 상징은 “성경”(형제단의 전통)위여 놓여있는 “성찬잔”(후스의 전통)이 되었다.

풍부한 역사적인 뿌리 때문에 교회일치는 단지 연합의 차원을 넘어 에큐메니즘의 정신을 형성시켰다.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고백(예;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구 후스파 신앙고백 “1420년의 프라하 4개 조항”외에 루터 신앙고백인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1535년의 형제단의 신앙고백”(1662년 얀 아모스 꼬멘스끼의 번역본에 따름), “1566년의 두 번째 스위스 개혁신앙고백” 그리고 체코개혁전통의 초기 에큐메니칼 기원이 되는 문서인 1575년 체코개혁교도의 첫 번째 연합인 “체코신앙고백”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연합된 교회는 특히 선교활동의 가능성의 기회를 갖게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로마로부터 탈퇴”(Pryc od Rima – Los von Rom)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체코국민의 거의 18%가 로마 카톨릭교회를 떠났다. 대부분 그들은 합스부르크 군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여러 면에서 신용을 잃게된 카톨릭 교회에 실망하였다. 처음 10여 년간 약 100,000명의 로마 카톨릭인들이 체코형제 개혁교회에 등록하여 120개 교회 250,000명의 교인을 이룬 가장 큰 체코개혁교회가 되었다.

이 개종운동으로 다른 교회들도 많은 교인을 얻었다. 약 10,000여명이 19세기말 체코 영토에서 활동을 시작한 소수 개혁교회들에 가입하였다. 회중교회인 “체코형제교회연합”, “연합침례교회”, “개혁감리교회” 그리고 일부의 “구 카톨릭 교회”등이다. 이 외에도 1920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이 세워졌다. 민족교회로서 부분적으로 동방정교회와 관련이 있으나 대체로 후스 전통과 관련이 있다.(나중에 후스 전통에 근거한 교회임을 강조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후스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카톨릭교회가 아닌 교회들 가운데 제일 큰 교회로 750,000교인의 교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체인구의 77%를 이루고 있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전히 체코 공화국에서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주고 있다.

첫 20년 동안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복음화(특별히 체코 서부지방)와 교회개척에 집중하였다. 초기에 개교회들 간의 신앙고백의 차이들은 특별히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전 루터 교인들은 자신의 예배예전을 되찾았고 반면에 대다수인 개혁파들은 칼빈의 교리를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았으나 장로교회 전치와 제도를 유지하였다. 목회자들과 그들이 섬기는 개교회들이 서로 다른 신앙고백의 전통에 있어도 목회자들이 임명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지역교회의 회원권은 주로 거주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관용에 의해서 세워진 전통적인 지역교회들이 이 외에 자유주의 신학과 복음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에 따라 새로운 개교회들이 생겨났다. 독일 개혁교도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 120,000 교인의 자신의 개혁교회를 갖게되었다.

1919년 초기에 목회자 교육을 위해 프라하에 “후스 개혁 신학부”가 세워졌다(후에 1953년에 “꼬멘스끼 개혁 신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새 신학부는 초기에 연합된 교회의 지도자들과 밀접하게 협력이 되었다. 연합된 교회 – 체코형제개혁교회 – 목회자 출신가운데 신학교 교수들이 배출되었다. 신학부 사역의 초대 책임자는 비엔나 신학부에서 프라하로 임명이된 스깔스끼(G. A. Skalsky)교수였다. 교수 첫 세대 가운데 후스 신학부에 유명한 교수들이 있었다: 교회사의 흐레이사(F. Hrejsa)와 바르또쉬(F.M. Bartos) 구약학의 다ㄴ(S. Danek), 신약학의 쥘까(F. Zilka), 교리학 교수 흐로마드까(J.L. Hromadka)였다. 다음 세대로 역사학자 지찬(R. Rican), 구약학 비츠(M. Bic), 신약학 소우ㅊ(J.B Soucek), 교리학과 윤리의 도비아쉬(F.M. Dobias), 실천신학 베드나즈(F. Bednar), 노보뜨니(A. Novotny) 그리고 예슈께(J.B. Jeschke)이다. 다음 세대로 교리사 몰나르(A. Molnar), 조직신학 로흐만(J.M. Lochman), 브로쉬(L. Broz), 구약학 헬레르(J. Heller), 신약학 뽀꼬르니(P. Pokorny), 실천신학의 스몰릭(J. Smolik)과 파벨 필리피(Pavel Filipi), 사회윤리 트로얀(J. Trojan), 오포첸스끼(M. Opocensky), 종교이론 온드라(J.N. Ondra)이다. 신학부는 자신의 총대를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 파송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