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 3. 형제단 1457년 – 1621년

3. 예드노따 브라뜨르스까(Jednota Bratrska : 형제단) 1457년 – 1621년

후스파의 급진개혁의 첫 시기는 특별히 형제단의 종교개혁을 자극하였다. 로마와의 타협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급진적인 후스파 진영에서 15세기 후반에 (뽀제브라디의 이지 Jiri z Podebrady 라는 후스파 왕이 통치) 새로운 개혁세력이 일어났다. 이 개혁 세력이 “보헤미아 형제단”(Unitas fratrum)이다. 이들은 남보헤미아 종교사상가 뻬뜨르 헬취쯔끼(Petr Chelcicky)의 가르침과 프라하 후스파 감독 얀 로끼짜나(Jan Rokycana)의 설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신실한 신앙인들 그룹이었다. 이들은 악한 세상과 구별되기를 바라며 1457년에 동 보헤미아 지역의 쿤발트에 정착해서 복음 안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모형에 따라 올바르게 기독교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로는 수도승 제호즈 프라슈끼(Rehor Prazsky), 후스파 사제 잠베르크의 미하엘(Michael ze Zamberk)이다.

“침묵의 왕”과“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으며 “좁은 길”을 따르는 삶을 노력하였다. 첫 10년 간 형제단은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후스파 교회들과 관련된 마지막 사슬을 끊어버린 보헤미아의 발덴-따보르 교회 시대를 살아온 가장 연장자 사제에 의해 안수를 받은 자신의 사제들을 선출하였다. 쿤발트의 마데이(Matej z Kunvaldu)가 형제단의 첫번째 사제가 되었다.

형제단의 신학자와 설립자들로 중요한 인물들은 형제단의 신학자와 조직가로 루까쉬 프라슈끼(Lukas Prazsky), 루터교회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이며 찬송가 작곡자 얀 아우구스따(Jan Augusta), 유명한 신학자, 소설가, 음악신학가, 신약 성서 번역가 얀 브라호스라프(Jan Blahoslav), 시편을 시적으로 번역한 신학자 이지 스뜨레이쯔(Jiri Strejc) 등이다.

형제단은 체코 종교개혁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비록 형제단은 미약한 소수 민족이었고 그의 역사는 순교역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16,17세기의 체코의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형제단의 신앙고백, 교리, 교회 조직과 찬송가 외에 자신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 끄랄리츠까 성경(Bible kralicka)이 그 증거가 된다(역자 주: Bible kralicka- 간단한 주석이 곁들여진 6권으로 된 체코어 성서, 1579-1593년 모라비아의 끄랄리체에서 출판됨). 교회 규율의 강조점으로서 형제단은 교회의 칼빈적인 개념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의 신학에 더 가까웠다.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형제단의 개념은 라틴어 슬로건에 잘 나타나 있다 : In principiis unitas, in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연합의 원칙으로, 의심 없는 자유로, 모든 사랑으로)

형제단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마지막 감독 얀 아모스 꼬멘스끼(Jan Amos Komensky 또는 Comenius 1592-1670)이다. 전유럽에서 그는 신학자로 교육자로 과학자로 민족 간의 평화를 위한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절반을 반종교개혁시대에 망명자로 외국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교육과 언어학의 업적으로 “민족의 선생”이 되었다. 미래 에큐메니칼 기독교 사회와 국제평화 협력의 비젼에 대한 그의 제안으로 새로운 시대의 길을 여는 파이어니어가 되었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일반적인 상담(Obecna porada o naprave veci lidskych)”이라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관련해서 그의 영적인 유산은 오늘날에도 매우 의미가 있다. “모든 것에 대한 교정(Panorthosia)” 제하의 제6권은 종교, 철학, 과학과 정치에서의 인간관계의 발전에 대한 제안이 그 내용이다. 30년 전쟁 기간에 망명중인 꼬멘스끼가 “세계의 미궁(Labyrint sveta)”에서 자신의 민족에게 내적인 “마음의 천국(raji srdce)”에 대해 가르쳤다.

꼬멘스끼는 개인의 회심과 모든 기독교인들의 회개로 교회와 세상의 갱신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1650년에 출간된 “형제단의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산”에 교회와 개혁주의 형제들에 관해 가장 감명깊게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일 뿐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실 분이며 마지막 날에 오실 분임을 확고하게 믿는 믿음이 꼬멘스키가 자신의 가장 어려운 삶의 문제를 멈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얀 아모스 꼬멘스끼는 형제단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신의 저술 활동으로 당시 전유럽에 체코종교개혁의 영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동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혁교회사]2. 후스파의 종교개혁 1402-1434

2.얀 후스(Jan Hus)와 후스파의 종교개혁 1402-1434

1936년부터 까렐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얀 후스는 1402년에 베들레헴 채플의 관리자가 되었고 일찍이 교회의 개선에 대한 개혁적인 노력에 앞장서게 되었다. 일반 대중의 설교가로서 체코의 영적인 찬송의 보급자로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동안 폭 넓은 일반대중 계층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철학자로 프라하 대학 학장까지 지냈던 신학자로서 그는 영국 종교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더 나은 성경 이해와 교회갱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1412년 후스는 흡사 100년 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처럼 공개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와 당시 교회의 부패의 확산에 맞섰다. 그 때문에 교황에 의해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프라하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년 간 지방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야외에서 큰 무리들이 모였을 때 설교를 하였으며 풍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그 때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교황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회에 관해서”이다. 그는 저서와 설교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후스는 꼬스뜨니체(Constanz)에서 재판을 받고 이단으로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하였다.

후스와 그의 추종자 예로임 프라즈스끼(M. Jeronym Prazsky 후스의 변호자로서 역시 1416년 꼬스뜨니체에서 화형 당함), 스뜨지브로의 야꼬우벡(M. Jakoubek ze Stribra 베들레헴 채플과 대학 학장, 후스 후임), 흐지모프의 미꿀라쉬(M. Mikulas z Pelhrimova 초대 후스파 감독, 신앙고백 저자), 뻬뜨르 헬치츠끼(Petr Chelcicky 비판적인 민중 사상가), 얀 로키짜나(M. Jan Rokycana 초대 후스파 대감독, 유명한 신학자이자 프라하 띤 성당의 설교가) 이들 모두는 후대의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창시자들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복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사람들이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입각한 교회 정치와 그 기준에 따라 교회의 평신도의 직위와 책임을 부여하려는 노력에 높은 업적을 남겼다. 교회뿐 아니라 전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두려고 했던 그들의 강한 요구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적 의미로서 후스파의 개혁 운동을 유럽의 첫번째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할 만하다.

후스파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은 1420년대의 “4개 프라하 조항”이라는 제목으로 구체화되었다 :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포될 것.

둘째, 양종성찬(평신도에게 떡과 함께 포도주를)을 시행할 것.

셋째, 사제들로부터 모든 세속적인 지위를 박탈할 것.

넷째, 지위고하(사제를 포함)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죽음을 면치 못할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을 것.

두 번째 프라하 조항에 의거, 후스파들은 “깔리슈니치”[번역자 주 – “성찬잔을 주장하는 자들]로 불리워졌고 후에 “우뜨라끄비스떼”(Utraquists – 라틴어로 양종성찬을 의미)로 불리워졌으며, 양종성찬의 성만찬은 1414년에 “벽속의 마르띤 교회”에서 제일 처음 시행되었다. 성찬잔은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교회론적 특성을 갖는 후스파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후스파의 주장들이 남 보헤미아 따보르(번역자 주 – 현재도 그대로 지명을 유지하고 있음 – Tabor) 요새에서 실천적으로 완성되었다 (따보르는 성서에 나오는 따보르 산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여기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공동 소유의 삶을 살았다.

후스파의 종교개혁들은 당시 종교적 그리고 세속적인 권력 양쪽으로부터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들 개혁자들은 1420년부터 1431년까지 교황의 군대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무기로 무장한 후스파 군대는 얀 쥐스까(Jan Zizka) 장군과 사제 쁘로꼬프 홀리(Prokop Holy)의 지휘 아래 전 유럽으로부터 조직된 무장한 십자군과 맞서 승리하였다. 따보르의 사제 얀 차펙(Jan Capek)이 지은 “너희는 하나님의 군사”라는 후스파 군가를 부르면, 적들은 놀라 도망을 칠 정도였다. 후스파들은 자신들의 종교개혁을 이웃지역으로 확산시키는 노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노래뿐 아니라 문서와 선언문을 사용하였다. 그들 군대는 독일을 거쳐 발틱 연안까지 소위 “아름다운 여행(후스파 군대 행진을 의미)”으로 불리우는 행진을 했다. 그들의 주장은 프랑스와 영국까지 전해졌다. 옥스포드 교수인 영국 위클리프파 피터 페이언(Peter Payne)은 후스파를 돕기 위해 대학이 있는 프라하로 왔다(그는 보헤미아에서 엥글리쉬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의사인 후스파 선교사 끄라바즈의 파벨(Pavel z Kravar)은 스코틀랜드에서 프라하 이단으로 1433년 화형을 당했다.

결국 후스파의 압박은 로마교회 진영에서 협상을 요구하게 하였다. 당시 거의 전 유럽에 후스파들이 있었다. 1433년 바젤 공의회에서 많은 협상 후에 “보헤미아 이단들”의 중요한 요구 사항들이 받아들여졌고 이것을 로마와의 “꼼팍따아따(협정서)”라고 한다.

후에 후스파는 따보르의 급진파와 프라하의 온건파로 나뉘어 형제간의 전쟁으로 치닫게 되어, 결국 1334년 리빤(Lipan) 전투라는 종교적인 정치적인 논쟁을 하게 된다. 승리한 프라하 양종성찬파(우뜨라끄비스뜨)가 평신도의 성찬잔을 허락하는 문제만을 다루고자 하는 로마교회 진영과 최종적인 협상 체결을 하게 된다.

고전적인 후스파의 신학 경향은 1431년 흐지모바의 미꿀라쉬(Mikulas z Pelhrimova) 감독이 쓴 “따보르의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 1412년 평신도에게 양종성찬이 처음 시작된 교회로 현재 까렐대학 개혁신학부 학생들이 주일저녁 7시 30분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건물은 프라하시 소유로 체코형제개혁교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개방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주일 저녁 7시 30분 예배에 참석하면 이 교회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

[개혁교회사]1. 체코 기독교의 뿌리 845년 – 1391년

1. 체코 기독교의 뿌리 845년 – 1391년

체코 국왕(koruna ceska)의 영토 보헤미아(Cechy), 모라비아(Morava), 실레지아(Slezsko)는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동유럽과 서유럽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여건이 체코 역사의 특징을 형성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역시 동유럽과 서유럽으로부터 각각 이곳으로 온 것은 슬라브 영토에서의 아바르(Avar)족의 통치가 끝난 직후였다. 남 모라비아에서 고고학자들이 구(舊)켈트(아이랜드-스코틀랜드)의 기독교 선교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하는 8세기말 경의 교회 건물의 터를 발굴하였다. 845년 바바리아(바보르스꼬-Bavorsko)의 제젠(현재의 Regensburg)에서 14명의 체코 부족장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서유럽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이 지역까지 넓히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된 예배의식을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화를 배경으로 게르만 프랑크 제국(Frank)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유럽(프랑크 제국)의 영향을 견제하기 위하여 대모라비아제국(velkomoravska rise)의 왕 라스띠슬라프(Rastislav)가 동유럽 교회들과 밀착하면서 자신의 제국에 그리스 선교사들을 요청하였다. 863년 모라바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카(Tesalonika) 출신인 슬라브인 선교사, 콘스딴띤(Konstantin, 일명 씨릴 Cyril)과 메또데이(Metodej) 두 형제가 왔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문자(흘라홀리체-hlaholice, 후에는 씨릴문자-cyrilske pismo 또는 끼릴리체-Kyrilice 라고 하며, 이 문자는 현재 러시아어 알파벳인 아즈부까-Azbuka이다)를 만들었고, 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구(舊)슬라브어(Staroslovensky jazyk)로 번역을 하였다. 예배에도 구슬라브어 예전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슬라브 문학의 창시자들이 되었다.(슬라브 문자는 동슬라브-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 불가리아 루마니아문자의 토대가되었다) 885년 메또데이가 죽은 후 이웃나라 바보르스꼬(Baborsko)로부터 서쪽의 영향을 다시 받기 시작하였다.

마쟐족의 침략(903-906)에 의한 대모라비아 제국(Velkomoravske rise)의 몰락 이후 체코 영토가 로마에 오랫동안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독일-라틴의 동유럽 문화의 결정적인 영향에 놓이게 되었다(당시 대모라비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슬로바키아 영토는 오랫동안 마쟐족의 지배를 받게된다).

10세기 초에 프제미슬로베츠(Premyslovec) 가문의 바츨라프(Vaclav) 왕이 서유럽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는 동생 볼레슬라프(Boleslav)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다(935년 9월 29일). 즉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후에 체코 민족의 수호신으로 불리어졌다. 후에 997년 동 프로이센(Prus)에서 이방인 복음전파 활동 중에 순교를 당한 프라하 비숍 보이띠에흐(Vojtech-973년에 프라하 주교청을 세움)에 의해 결국 체코에서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까지 서유럽 기독교 형태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유명한 중세 기독교 인물 가운데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사상에 심취한 프제미슬로베츠의 귀족 아네슈까(Anezka 체코왕 프제미슬 오따까르 1세-Premzsl Otakar I의 딸)는 1234년 프라하에 수녀들의 수도원을 세웠다. 중세 기독교의 후기 인물 가운데 소위 경건한 왕, 까렐 4세 황제(cisar KarelIV)는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룩셈부르크(Lucemburk) 가문의 혈통과 어머니로 부터 체코 프제미슬로베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프라하는 중요한 상업 도시이자 유명한 문화중심 도시가 되었다. 1348년 까렐 4세가 중부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세웠다(현재의 까렐대학).

프라하는 당시 세 번째로 큰 유럽도시가 되었다. 프라하의 귀중한 건축물이나 유명한 예술품들은 대부분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체코는 서유럽 기독교 문화의 선진 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1344년에 프라하에 대교구청이 세워지고 빠르두비체의 마르노슈뜨(Pardubice의 Arnost)가 첫번째 비숍으로 임명되었다. 1344년 이후 세속화되어가는 로마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개혁의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콘드라드 발드하우저(Kondrad Waldhauser- 프라하의 독일인 설교가), 슈띠뜨니의 토마쉬(Stitny의 Tomas -남체코 출신의 기독교문서 저자), 끄로미에지쉬의 얀 밀리츠(Kromeriz의 Jan Milic 체코 설교가와 도덕과 사회 향상을 위한 교사)와 야노브의 맏데이(Janov의 Matej -체코의 종말론 신학자), 이들이 체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다. 베들레헴 까펠(Betlemska kaple)은 이들의 개혁 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 베들레헴 까펠은 1391년 프라하에서 체코어 설교를 위해 건립되었고 15세기 초에는 소위 유럽의 “첫번째 종교개혁”인 후스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냈다.

중세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급진적인 방법 외에는 달리 치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 당시 교황의 도덕적인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이끌어낼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더 이상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제안을 한 평화적인 방법을 종교개혁자들은 연구하여 천명하였고 그래서 개혁을 보장할 회의에 자신들의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교회 고위 지도자들의 그런 공의회에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하지못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된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형태의 성직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교황과 공의회(koncil-council)를 반대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토대로 교황과 공의회의 반그리스도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우리들은 제1차 종교개혁을 완전한 종교개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위 세계종교개혁과 달리 제1차 종교개혁인 후스종교개혁은 가난한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영향력과 문화를 확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미래에 있을 진리의 승리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종교개혁의 실현을 성취하였다.

[살며 생각하며] 교회의 자폐증

나눔터 제 16호 (2001/07/01 발간)

교회당 옆 숲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확 뚫린 시야에 프라하 시내가 저 아래 보인다. 뾰쪽 뾰쪽 솟은 교회당의 탑들을 보면 서울의 밤하늘을 수 놓고 있을 빨간 네온싸인의 십자가가 불현듯 보고 싶어진다.

세월의 흐름을 정지시켜 희귀한 볼거리로 변해버린 빛 바랜 복음의 흔적들을 보느니 마구잡이 일지언정 새싹처럼 솟아나는 생생한 살가운 복음의 생동감을 어쩌면 서울 하늘아래 빨간 네온싸인 십자가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리라.

어쩌면 좋을까? 막강한 자본의 힘이 세상을 동-서로 나눈 철의 장막을 걷어냈지만 교회와 사회 사이에 가로막힌 이 장막을 누가 걷어내 줄 것인가? 최근 인구조사에서 체코의 카톨릭 교인수가 40%에서 20%로 줄어들고, 줄줄이 중요한 선거를 앞둔 정당의 당수가 교회를 많은 복지단체 가운데 하나로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전파를 타는 것은 체코사회에서의 기독교 위상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카톨릭 신부의 섹스 스캔들, 개혁교회 목사의 금전 스캔들이 터지자 세상의 언론은 물길을 만난 물고기 처럼 생기가 넘치게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재생산 하고있다. 정말 교회에 대해 애정이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교회와 물질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연일 교회를 힐난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요즈음 카톨릭 신학부가 아예 세상과 담을 쌓는 유아독존으로 세상 여론이 교회에 대해 더욱 신랄해 지고 있다.

중세시대의 대학은 곧 신학교였고 교회였다. 1348년 설립된 까렐대학도 신학교로 출발하였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0/1371-1415)는 신부이자 이 학교에 학장을 지냈고 그의 동상이 전형적인 중세 풍의 대학교정 안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그의 교회의 부패와의 투쟁은 대학을 교회와 국가(사회) 둘 사이를 연결하는 영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다리의 역할로 자리 매김 하였다.  이러한 대학정신의 발전은 현대에 이르러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까렐대학의 카톨릭 신학부는 타 학부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여성 및 평신도의 입학을 제한하며 교과 과정도 19세기로 돌아가고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 방법은 시대착오라고 교회 안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심지어 바티칸에서 조차 우려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까렐대학 당국은 대학 역사 이래로 전무후무한 총장 직권을 사용하여 카톨릭 신학부의 학사 행정을 관리하려는 조짐까지 있다.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빠짐없이 읽고 또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필자는 이것이 “교회의 자폐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까렐대학 카톨릭 신학부의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지난 6월 5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럽 한인교회 신학협의회가 열렸다. 유럽의 이민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유럽교회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인 것 만으로도 한국교회와 유럽교회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유럽교회와 한인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세워진 사례발표를 위해 필자도 그 협의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 협의회는 결국 유럽의 한인 이민 교회들이 민족, 교파, 신분, 인간관계의 동굴로서의 한인교회를 탈피하고 유럽의 한인들은 물론 유럽인들과 함께 공감 공명을 느끼며 살아보자는 취지였다.

교회가 세상과 대화는 물론 공감 공명을 느끼지 못하면 자기세계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자폐증”으로 의심을 한다. 세상과 공감 공명을 느끼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학의 관점에서 “섹트” 라고 정의한다. 기독교인과 기독교회를 성경은 빛에 비유를 한다. 빛은 감출 수 없는 그 속성 때문에 용도는 더 멀리 비취게 하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빛의 자리는 더 높은 곳, 더 드러난 장소에 있다. 빛을 막을 수 있는 경계선은 없다. 우리 모두 마태복음 5장 16절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보자.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살며 생각하며] 삶을 선교로

나눔터 제 15호 (2001/06/03 발간)


[살며 생각하며] 삶을 선교로 –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의 실험

한국 기독교인들이 선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은 많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의 방법과 이해에 대해서는 매우 폭이 좁은 것을 마지막 나의 봉사지 였던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통합) 세계 선교부에서 5년간 간사로 일할 때 느꼈던 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 대안을 체코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 찾아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체코-한인 교우들의 클럽 활동이다. 아직 선교의 대안이라고 말하기는 초보 단계이고 시작 단계이지만 “삶을 선교로” 여기는 적극적인 대안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체코 인들의 놀이는 문화를 즐기는 것이다. 수준이 높은 문화는 물론이고 접해 보지않는 미지의 문화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문화를 우리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체코 인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체코 인들의 문화 이해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삶의 양태라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싶다. 체코 영화의 장면 장면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을 화면으로 옮겼을 때 그 장면들이 주는 미학적인 감각이라든지 철학적인 메시지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지나치기 쉬운 장면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문화적인 비범한 감각을 가진 민족이 체코 인들이다.

이것이 체코 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설정했을 때 우리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이다. 그 시작과 초석을 꼬빌리시 교회(야곱의 사다리 교회)의 체코-한인 교우들이 다지고 있다. 꼬빌리시 교회의 체코 교우들과 한인 교우들의 교류 프로그램으로 10개의 클럽 활동 반이 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양 교우들이 함께 교류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동의 관심과 주제를 가지고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다. 활동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삶을 더 깊이 보게 된다. 이 만남은 가정과 가정의 만남으로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문화와 인종과 국가를 넘어 한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 고백하는 만남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클럽활동은 서로의 전통음식을 가르쳐 주는 요리반,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언어반, 여행을 함께 하는 여행반, 운동을 함께하는 운동반,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만나는 골프반, 일년에 한 두 차례 예배시간에 올릴 연극을 준비하는 연극반, 서로의 전통문화를 전수하는 예술반, 예배시간을 위해 특송을 준비하는 성가반, 한국 장기 – 체코 장기를 서로 전수하고 시합하는 장기(將棋)반, 바느질로 예쁜 소품들을 만드는 퀼트반 등이 있다.

체코-한인 교우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모든 모임이 다 활발하게 진행 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무슨 모임이든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자와 관심자가 있을 때 그 모임이 활성화가 된다. 그 역할을 우리 한인 교우들에게 당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체코 교우들이 재미를 느끼고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거부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초청하고 교회 안에서 만남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필요성과 교회의 존재 의미를 알게 될 때 그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체코 교회는 점점 생기가 돌게 될 것이다.

체코의 국가와 교회간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때 체코 선교는 사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일은 물론 외부 사람들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체코 교회를 돕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 양자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체코 선교는 자기 만족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삶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체코에 온 것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고백하고 있다. 그 뜻은 물론 단순하지 않다. 더욱이 그 뜻을 빌어 체코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지 않고 타민족 기독교인들과 어울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세상에 표현하는 것은 누구도 금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마땅히 해야 될 일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말고도 우리들이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야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를 보통의 일반 체코 인들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친근하게 하여 우리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애국 애족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당위성 외에 체코-한국 기독교인들의 만남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가 하나 있다. 진솔한 만남, 사랑의 만남을 통해 체코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격과 교양을 갖춘 한국 민족으로 평가 받는 우리들이다. 이 열려진 공간에 체코의 모든 한인들의 참여를 진심으로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