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 체코 기독교의 뿌리 845년 – 1391년

1. 체코 기독교의 뿌리 845년 – 1391년

체코 국왕(koruna ceska)의 영토 보헤미아(Cechy), 모라비아(Morava), 실레지아(Slezsko)는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동유럽과 서유럽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여건이 체코 역사의 특징을 형성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역시 동유럽과 서유럽으로부터 각각 이곳으로 온 것은 슬라브 영토에서의 아바르(Avar)족의 통치가 끝난 직후였다. 남 모라비아에서 고고학자들이 구(舊)켈트(아이랜드-스코틀랜드)의 기독교 선교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하는 8세기말 경의 교회 건물의 터를 발굴하였다. 845년 바바리아(바보르스꼬-Bavorsko)의 제젠(현재의 Regensburg)에서 14명의 체코 부족장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서유럽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이 지역까지 넓히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된 예배의식을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화를 배경으로 게르만 프랑크 제국(Frank)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유럽(프랑크 제국)의 영향을 견제하기 위하여 대모라비아제국(velkomoravska rise)의 왕 라스띠슬라프(Rastislav)가 동유럽 교회들과 밀착하면서 자신의 제국에 그리스 선교사들을 요청하였다. 863년 모라바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카(Tesalonika) 출신인 슬라브인 선교사, 콘스딴띤(Konstantin, 일명 씨릴 Cyril)과 메또데이(Metodej) 두 형제가 왔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문자(흘라홀리체-hlaholice, 후에는 씨릴문자-cyrilske pismo 또는 끼릴리체-Kyrilice 라고 하며, 이 문자는 현재 러시아어 알파벳인 아즈부까-Azbuka이다)를 만들었고, 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구(舊)슬라브어(Staroslovensky jazyk)로 번역을 하였다. 예배에도 구슬라브어 예전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슬라브 문학의 창시자들이 되었다.(슬라브 문자는 동슬라브-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 불가리아 루마니아문자의 토대가되었다) 885년 메또데이가 죽은 후 이웃나라 바보르스꼬(Baborsko)로부터 서쪽의 영향을 다시 받기 시작하였다.

마쟐족의 침략(903-906)에 의한 대모라비아 제국(Velkomoravske rise)의 몰락 이후 체코 영토가 로마에 오랫동안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독일-라틴의 동유럽 문화의 결정적인 영향에 놓이게 되었다(당시 대모라비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슬로바키아 영토는 오랫동안 마쟐족의 지배를 받게된다).

10세기 초에 프제미슬로베츠(Premyslovec) 가문의 바츨라프(Vaclav) 왕이 서유럽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는 동생 볼레슬라프(Boleslav)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다(935년 9월 29일). 즉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후에 체코 민족의 수호신으로 불리어졌다. 후에 997년 동 프로이센(Prus)에서 이방인 복음전파 활동 중에 순교를 당한 프라하 비숍 보이띠에흐(Vojtech-973년에 프라하 주교청을 세움)에 의해 결국 체코에서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까지 서유럽 기독교 형태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유명한 중세 기독교 인물 가운데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사상에 심취한 프제미슬로베츠의 귀족 아네슈까(Anezka 체코왕 프제미슬 오따까르 1세-Premzsl Otakar I의 딸)는 1234년 프라하에 수녀들의 수도원을 세웠다. 중세 기독교의 후기 인물 가운데 소위 경건한 왕, 까렐 4세 황제(cisar KarelIV)는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룩셈부르크(Lucemburk) 가문의 혈통과 어머니로 부터 체코 프제미슬로베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프라하는 중요한 상업 도시이자 유명한 문화중심 도시가 되었다. 1348년 까렐 4세가 중부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세웠다(현재의 까렐대학).

프라하는 당시 세 번째로 큰 유럽도시가 되었다. 프라하의 귀중한 건축물이나 유명한 예술품들은 대부분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체코는 서유럽 기독교 문화의 선진 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1344년에 프라하에 대교구청이 세워지고 빠르두비체의 마르노슈뜨(Pardubice의 Arnost)가 첫번째 비숍으로 임명되었다. 1344년 이후 세속화되어가는 로마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개혁의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콘드라드 발드하우저(Kondrad Waldhauser- 프라하의 독일인 설교가), 슈띠뜨니의 토마쉬(Stitny의 Tomas -남체코 출신의 기독교문서 저자), 끄로미에지쉬의 얀 밀리츠(Kromeriz의 Jan Milic 체코 설교가와 도덕과 사회 향상을 위한 교사)와 야노브의 맏데이(Janov의 Matej -체코의 종말론 신학자), 이들이 체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다. 베들레헴 까펠(Betlemska kaple)은 이들의 개혁 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 베들레헴 까펠은 1391년 프라하에서 체코어 설교를 위해 건립되었고 15세기 초에는 소위 유럽의 “첫번째 종교개혁”인 후스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냈다.

중세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급진적인 방법 외에는 달리 치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 당시 교황의 도덕적인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이끌어낼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더 이상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제안을 한 평화적인 방법을 종교개혁자들은 연구하여 천명하였고 그래서 개혁을 보장할 회의에 자신들의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교회 고위 지도자들의 그런 공의회에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하지못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된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형태의 성직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교황과 공의회(koncil-council)를 반대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토대로 교황과 공의회의 반그리스도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우리들은 제1차 종교개혁을 완전한 종교개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위 세계종교개혁과 달리 제1차 종교개혁인 후스종교개혁은 가난한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영향력과 문화를 확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미래에 있을 진리의 승리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종교개혁의 실현을 성취하였다.

[살며 생각하며] 교회의 자폐증

나눔터 제 16호 (2001/07/01 발간)

교회당 옆 숲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확 뚫린 시야에 프라하 시내가 저 아래 보인다. 뾰쪽 뾰쪽 솟은 교회당의 탑들을 보면 서울의 밤하늘을 수 놓고 있을 빨간 네온싸인의 십자가가 불현듯 보고 싶어진다.

세월의 흐름을 정지시켜 희귀한 볼거리로 변해버린 빛 바랜 복음의 흔적들을 보느니 마구잡이 일지언정 새싹처럼 솟아나는 생생한 살가운 복음의 생동감을 어쩌면 서울 하늘아래 빨간 네온싸인 십자가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리라.

어쩌면 좋을까? 막강한 자본의 힘이 세상을 동-서로 나눈 철의 장막을 걷어냈지만 교회와 사회 사이에 가로막힌 이 장막을 누가 걷어내 줄 것인가? 최근 인구조사에서 체코의 카톨릭 교인수가 40%에서 20%로 줄어들고, 줄줄이 중요한 선거를 앞둔 정당의 당수가 교회를 많은 복지단체 가운데 하나로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전파를 타는 것은 체코사회에서의 기독교 위상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카톨릭 신부의 섹스 스캔들, 개혁교회 목사의 금전 스캔들이 터지자 세상의 언론은 물길을 만난 물고기 처럼 생기가 넘치게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재생산 하고있다. 정말 교회에 대해 애정이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교회와 물질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연일 교회를 힐난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요즈음 카톨릭 신학부가 아예 세상과 담을 쌓는 유아독존으로 세상 여론이 교회에 대해 더욱 신랄해 지고 있다.

중세시대의 대학은 곧 신학교였고 교회였다. 1348년 설립된 까렐대학도 신학교로 출발하였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0/1371-1415)는 신부이자 이 학교에 학장을 지냈고 그의 동상이 전형적인 중세 풍의 대학교정 안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그의 교회의 부패와의 투쟁은 대학을 교회와 국가(사회) 둘 사이를 연결하는 영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다리의 역할로 자리 매김 하였다.  이러한 대학정신의 발전은 현대에 이르러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까렐대학의 카톨릭 신학부는 타 학부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여성 및 평신도의 입학을 제한하며 교과 과정도 19세기로 돌아가고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 방법은 시대착오라고 교회 안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심지어 바티칸에서 조차 우려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까렐대학 당국은 대학 역사 이래로 전무후무한 총장 직권을 사용하여 카톨릭 신학부의 학사 행정을 관리하려는 조짐까지 있다.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빠짐없이 읽고 또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필자는 이것이 “교회의 자폐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까렐대학 카톨릭 신학부의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지난 6월 5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럽 한인교회 신학협의회가 열렸다. 유럽의 이민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유럽교회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인 것 만으로도 한국교회와 유럽교회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유럽교회와 한인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세워진 사례발표를 위해 필자도 그 협의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 협의회는 결국 유럽의 한인 이민 교회들이 민족, 교파, 신분, 인간관계의 동굴로서의 한인교회를 탈피하고 유럽의 한인들은 물론 유럽인들과 함께 공감 공명을 느끼며 살아보자는 취지였다.

교회가 세상과 대화는 물론 공감 공명을 느끼지 못하면 자기세계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자폐증”으로 의심을 한다. 세상과 공감 공명을 느끼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학의 관점에서 “섹트” 라고 정의한다. 기독교인과 기독교회를 성경은 빛에 비유를 한다. 빛은 감출 수 없는 그 속성 때문에 용도는 더 멀리 비취게 하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빛의 자리는 더 높은 곳, 더 드러난 장소에 있다. 빛을 막을 수 있는 경계선은 없다. 우리 모두 마태복음 5장 16절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보자.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살며 생각하며] 삶을 선교로

나눔터 제 15호 (2001/06/03 발간)


[살며 생각하며] 삶을 선교로 –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의 실험

한국 기독교인들이 선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은 많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의 방법과 이해에 대해서는 매우 폭이 좁은 것을 마지막 나의 봉사지 였던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통합) 세계 선교부에서 5년간 간사로 일할 때 느꼈던 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 대안을 체코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에서 찾아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체코-한인 교우들의 클럽 활동이다. 아직 선교의 대안이라고 말하기는 초보 단계이고 시작 단계이지만 “삶을 선교로” 여기는 적극적인 대안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체코 인들의 놀이는 문화를 즐기는 것이다. 수준이 높은 문화는 물론이고 접해 보지않는 미지의 문화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문화를 우리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체코 인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체코 인들의 문화 이해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삶의 양태라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싶다. 체코 영화의 장면 장면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을 화면으로 옮겼을 때 그 장면들이 주는 미학적인 감각이라든지 철학적인 메시지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지나치기 쉬운 장면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문화적인 비범한 감각을 가진 민족이 체코 인들이다.

이것이 체코 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설정했을 때 우리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이다. 그 시작과 초석을 꼬빌리시 교회(야곱의 사다리 교회)의 체코-한인 교우들이 다지고 있다. 꼬빌리시 교회의 체코 교우들과 한인 교우들의 교류 프로그램으로 10개의 클럽 활동 반이 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양 교우들이 함께 교류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동의 관심과 주제를 가지고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다. 활동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삶을 더 깊이 보게 된다. 이 만남은 가정과 가정의 만남으로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문화와 인종과 국가를 넘어 한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로 고백하는 만남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클럽활동은 서로의 전통음식을 가르쳐 주는 요리반,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언어반, 여행을 함께 하는 여행반, 운동을 함께하는 운동반,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만나는 골프반, 일년에 한 두 차례 예배시간에 올릴 연극을 준비하는 연극반, 서로의 전통문화를 전수하는 예술반, 예배시간을 위해 특송을 준비하는 성가반, 한국 장기 – 체코 장기를 서로 전수하고 시합하는 장기(將棋)반, 바느질로 예쁜 소품들을 만드는 퀼트반 등이 있다.

체코-한인 교우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모든 모임이 다 활발하게 진행 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무슨 모임이든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자와 관심자가 있을 때 그 모임이 활성화가 된다. 그 역할을 우리 한인 교우들에게 당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체코 교우들이 재미를 느끼고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거부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초청하고 교회 안에서 만남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필요성과 교회의 존재 의미를 알게 될 때 그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체코 교회는 점점 생기가 돌게 될 것이다.

체코의 국가와 교회간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때 체코 선교는 사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일은 물론 외부 사람들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체코 교회를 돕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 양자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체코 선교는 자기 만족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삶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체코에 온 것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고백하고 있다. 그 뜻은 물론 단순하지 않다. 더욱이 그 뜻을 빌어 체코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지 않고 타민족 기독교인들과 어울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세상에 표현하는 것은 누구도 금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마땅히 해야 될 일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말고도 우리들이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야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를 보통의 일반 체코 인들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고 친근하게 하여 우리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애국 애족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당위성 외에 체코-한국 기독교인들의 만남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가 하나 있다. 진솔한 만남, 사랑의 만남을 통해 체코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격과 교양을 갖춘 한국 민족으로 평가 받는 우리들이다. 이 열려진 공간에 체코의 모든 한인들의 참여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살며 생각하며] 프라하의 가장 어린 종탑과 종

나눔터 제 14호 (2001/05/06 발간)

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일을 마치고 저 멀리 마을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은 유럽인들에게 교회의 종이 단지 교회당의 예배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지역사회에 울려 퍼지는 경건의 묵상의 기도임을 보여준다.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케하는 27미터 종탑꼭대기에서 “천사”라고 불리우는 크고 작은 두개의 종이 금번 부활주일에 처음 프라하 8구역의 꼬빌리시, 보흐니쩨, 자블리쩨 지역에 아름다운 교회종소리를 울렸다.

두개의 종은 각각 852mm의 336kg 과 655mm의 176kg의 무게로 3년전 우리 한국에도 소개된 종제작 마기스터 “마노우셱”에 의해 만들어지고 종탑은 꼬빌리시 교회 교인인 “야쿱 로스꼬베쯔”가 설계하였다. 야쿱 로스꼬베쯔는 금년 체코국립도서관 설계 경연대회에서 3등을 차지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설계가 이다. 종을 “천사”로 이름 짓고 성경이 쓰여진 언어의 순서대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체코어, 한국어로 종의 겉 표면 위에서 아래로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종탑과 종은 프라하 시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것으로, 새 밀레니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제작된 것으로 그리고 프라하에서 최초의 현대적인 종탑으로 프라하 종탑 문화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4월 14일 토요일은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로 “하얀 토요일”이란 교회달력의 이름에 어울리게 아침부터 흰 눈이 내렸다. 오전 9시 30분 “하얀 토요일” 고난주간의 예배를 겸하여 종 봉헌 예배가 드려졌다. 프라하 8 구청장, 경찰서 대표, 전국 디아코니아 회장, 독일-체코 평화기금 회장,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 부총회장, 프라하 8 카톨릭교회 신부, 프라하 8 지역의 각종 사회봉사 단체 관계자들 그리고 교우 해서 모두 100여명 남짓한 인원이 참석하였다. 종탑제작과 종 제작을 위해 헌금한 한국교회의 손님은 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끝내 참석을 하지 않았다. 예배 후 체코 교우들이 정성껏 준비한 각종 케이크를 맛보며 참석자들은 이리 저리 종들을 두드려도 보고 살짝 손을 안으로 넣어 만져도 보고 주위에서 사진도 찍었다. 사람들 앞에 첫 선을 보이고 잠시 후 27미터 높은 꼭대기에 매달릴 종들은 진한 회색을 띈 고운 살결에 약간 붉은 기가 돌고있어 일시에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부끄러워 얼굴을 돌리며 붉은 홍조를 띈 소녀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저 멀리 저 높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야곱의 사다리 교회”는 체코 개혁교단의 프라하 8지역 교회이다. 처음 세워진 곳은 현재 지하철 C선의 연장선이 들어올 사거리 교통이 좋은 꼬빌리시 광장이 있는 곳에 있었다. 공산당 정권 시절에 정부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도로 건너편 숲이 시작하는 길옆으로 교회당을 이전시켰다. 이곳에서 교인들은 형을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을 치다가 광야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 야곱을 기억하게 되었다. 야곱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주는  꿈을 꾸었다. 당시 꼬빌리시 교인들에게 이 성경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이자 야곱의 꿈은 자신들의 꿈이 되었다. 그 후 세워진 교회당을 “야곱의 사다리 옆에 세워진 교회당”(이것을 필자는 야곱의 사다리 교회로 해석하고 있다.) 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제 교회당 옆에 세워진 높은 사다리 모습의 종탑은 안개 낀 날 밤에 보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로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그 위에 매달릴 종을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는 “천사”로 그래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천사”라는 말의 체코어는 “posel(뽀셀)”이다. “뽀셀” 이란 단어의 의미는 “전하는 자”라는 뜻이다.

슈토렉 목사의 시작하는 말 그리고 손님들 소개에 이어 필자는 “체코 공화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자신의 소유의 집을 가질 수 없지만 꼬빌리시 교회의 한국인들은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이라는 영적인 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서 우리들은 체코 형제 자매들의 서로 다른 문화, 언어, 삶의 스타일, 전통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우리들에게 매일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의 깨달음과 더 넓은 관점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체코-한국 기독교인들의 협력의 상징인 두개의 종이 놓여있습니다. 두개의 종은 하나의 아름다운 종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두 개의 종소리가 함께 울리듯이 체코-한국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수의 사랑을 이 지역사회에 전하기를 희망합니다.” 라는 요지의 짧은 연설을 하였고  마지막 축복기도를 끝으로 종 봉헌 예식을 마쳤다.

 

이날 우리들이 함께 드린 기도이다.

이 종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의 안전과 죄 용서와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우리 도시 사람들이 나그네, 집없는 이들, 나찌의 테러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도록 일깨워 주옵소서. 도움이 필요하지만 도움을 받을 길이 없어 혼자 살아가는 독거 노인들에게 힘을 주시고 보흐니쩨 병원, 불로바 병원의 입원환자와 정신병자들을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들과 함께 살고 있는 타 민족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평화와 협력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됨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한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평화와 정의와 평안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희생적으로 봉사하며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의 형제 자매들을 복 내려 주시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삶의 좋은 조건의 창조와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의 교회가 하나되어 진리의 말씀이 전파되게 하시며 주님의 사랑을 뒤따르게 하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목사 이종실
                                          ● 체코 형제개혁교단 총회목사
                                          ● 체코 형제개혁교단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 교회 목사 

[살며 생각하며] 광우병, 구제역 그리고 가축 학살

나눔터 제 13 호 (2001/04/08 발간), 여전도 회보에 기고

요즈음 유럽신문과 방송의 머릿기사는 도축 되고 불태워지는 가축들의 처참한 사진들을 곁들인 광우병, 구제역 이야기이다.
재산을 잃은 축산 농부들의 안타까운 이야기, 먹이 사슬로 인한 질병의 감염경로를 막기위해 식탁에서 사라져가는 쇠고기 이야기,
육식에서 채식으로 바뀌어가는 유럽인들의 식생활 이야기, 쇠고기 대신 닭고기 소비가 증대하자 성장 촉진 호르몬과 유전공학으로 재배된
곡식을 사료로 키운 닭고기의 안정성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인간을 위하는 이야기뿐 이다.

가축의 전염병을 막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축 학살 밖에 없는 듯 전염된 가축들을 도살하고 불태우고 있다. 전염병이 더
번지지 않도록 가축을 대량, 집단으로 도축하는 것이 어쩌면 옳다. 그러나 가축을 집단으로 학살함으로 이런 유사한 재앙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인간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대량학살을 자행했고, 이어지는 냉전시대에 인간은 공기와 물을 심각하게
오염시켰고 많은 숲들을 파괴하였으며 야생동물의 수백 종을 멸종 시켰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병든 먹거리를 대량 학살하여 폐기처분하고 있다.그래도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다음은 어떤 재앙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방자한 인간, 애굽 왕 바로를
설득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길은 재앙밖에 없었던 것처럼 인간의 먹거리에 질병을 보내 인간을 설득하여 오늘날
깨어진 창조질서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가축의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성찰 없이 가축부터 죽이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영원에 대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단지
순간을 사는 인간풍조가 느껴진다. 내일과 10년 20년 그리고 죽음까지를 바라보는 인내심이 상실되었음을 느낀다. 오늘날 인간은
먹기를 탐하고 쾌락을 원한다. 수많은 디지털 위성 방송들, 언론 매체들, 인터넷 방송들 그리고 정보들이 인간이 먹고 즐기는 쾌락을
자극하고 그것을 가십으로 다루고 있다. 수치심을 상실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존경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삶에 대해
존경을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면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우리들의 선한 목자이듯이 우리들은 피조물의 목자이다. 이것이 성서가 이해하고 있는 인간 이해이다. 우리 피조물의
목자는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았다.(창세기 2장 15절)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안다.(요한복음10장 14절) 축산농부는 가축들을 어떻게 기를지 안다. 농부는 곡식을 심을 때와 거둘 때를 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의 재능과 능력을 안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의 목자들은 더 이상 목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소비자가 되었다. 왜 우리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켜야 되는지 소비자는 질문 할 필요가 없다.

소비자는 삶을 사상과 실천에 대한 씨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웃보다 더 좋은 지위, 더 좋은 자동차, 더 넓은 집, 더
멋진 여행을 차지하기 위한 경주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 가축을 원인 모를 질병과 고통과 학살로 내몰고 있음을
소비자는 인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