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형제개혁교회의 선교신학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선교신학
– 1981년 11월 제22차 총회에서 결의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써 자신의 백성에게 오시며, 우리들의 낙심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사 40.29-31), 자신의 맹세(롬15.21)를 우리들에게 기억시키시며, 자신과 함께 우리들이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막1.36-38)

마지막 때에 우리 교회가 해야될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믿음을 상실하고 교회와 멀어진 많은 세례교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전도(evangelizace) 라고 하며 동시에 선교(misie)는 오늘날까지 믿지않는자들로 부터 새로운 교인들을 얻는 것으로 이해되며, 특별히 먼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소위 해외선교) 잃어버린 영혼과 죽은 영혼을 찾는 것은 모든 우리 \"개교회\"(sbor)들의 지속적 과제가 될 것이다.(마18.12, 계3.2)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기에 기독교인들로 간주되는 유럽민족에게서 변화들이 일어났다. 복음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세례 받지 않는 숫자들의 점차적인 증가로 교회들, 기독교 민족들이 소수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개교회들, 개인들 단체들은 감소되고 그리고 내적으로 약화된 중심에 새로운 봉사를 위한 희망적인 관점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점점 깨닫게된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막16.15). 그러나 현재 우리들은 우리 교회의 현재의 위치가 하나님의 심판의 발자취를 따르며 모든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없이 내적으로 교회의 사명이 진행되는 그 곳에서 깊이 회개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선언해야만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화해 없는 세상의 중심에서 산다면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좋은 양심을 가질 수 없다. 여기서 온전한 회개란 새롭게 그리스도의 선교의 실례를 고려하고 실현하는것을 지체하지 않고 시작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사역의 시작부터 모든 인간과 자연을 위해 자유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셨다. 모든인간들 가운데 오직 한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지라도 이미 그의 선택을 통해 전 인류를 고려하셨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방민족을 낙담시키지 않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가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을 위협하였을 때에도 이방인(바빌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포기되지 않았다. 바빌론의 포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지않았으나 모든 백성, 모든 민족을 위한 희망까지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다(사49.6, 51.4-5). 만약에 우리들이 포로생활로 부터 해방되는 제2이사야서를 읽는다면 그 기간과 그 장소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새로운 약속이 어떠한가에 우리는 놀라게된다. 여기서 종말론적인 관점이 열리게된다. 선택받은 자들이 자신을 재앙의 끝(종말)으로 생각하는 순간에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을 의심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무지와 자신들의 죄 아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손을 내미신다(사53.). 이미 구약에서 그렇게 언급하였기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한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신약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약의 언급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화되고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받은 자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간의 장벽이 허물어졌다(엡2.11-19).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들이 빨리 그 소식을 듣고 그리고 그것을 믿고, 그리고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롬15.7-12).

교회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속된다.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 통치권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권한을 위임하고 그들을 파송하여 모든 민족 모든 국가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게 하였으며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통치권을 실현시켜나가고 있다(마28.18-20, 막16.15-16, 요20.21, 행1.8). 그러한 사도들의 선교활동은 계속해서 다음 세대의 교회들의 과제가 되
었고 세상에서 교회 존재의 이유 중에 한가지가 되었다.

선교적인 소망

교회는 자신의 선교적 소명을 가지며 그것을 기쁨으로, 소망 적으로 수행해야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망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 소망은 인내며 기다림이다. 소망은 무엇에 의해 금방 준비 되는 것이 아니며 긴 호흡이다. 한번의 실패로 소망은 어느 누구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소망은 계속된 폐쇄(역자의 주 – 공산정부에 의한 교회의 고립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공산정부는 전도를 포함한 신앙의 자유를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제한하였다)에 의해 용기를 잃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편견과 싸운다. 오늘날 모든 이들에게 생생한 선교의 희망을 자극하는 것을 우리들은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수단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믿음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초청이며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복음은 허락하지 않는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있다. 복음이 원칙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에 충돌하는 곳에서는 선교적 증인은 침묵해야한다(마10.14).

\"개교회\"(sbor)들의 선교

우리들의 개교회가 설립되는 동안 우리들은 개교회안에서 살고 성장하는 자들을 위해 개교회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선교의 위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개 교회들 가운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것이다. 개교회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들의 가장 우선되는 사명에 복종되어질 것이다. 모든 예배는 응답 적으로, 사려 깊게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고려가 있는 형태가 될 것이다. 찬송, 기도 그리고 설교들이 그들에게 이해되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주의 깊게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본다면 모든 모임에서 \"무식한 자들과 믿지않는자\"(고전14.23, 공동번역 – 보통교인과 믿지않는자) 에 대한 고려를 해야함을 어떻게 사도들이 강조하고 그리고 요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분명한 언어(역자의 주 – 방언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개교회의 모든 삶이 새로운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한다. 새로운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되며, 사랑과 신뢰, 존경과 자유가 서로 충만한 것이다. 만약에 전도할 때 복음화된 사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영적인 집을 찾으려고만 한다면 개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말하는 것조차 쉽지않을것이다.

개교회의 모든 삶이 새로운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될 때 전 교인들이 참석하는 개교회의 선교활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에 대한 개방의 원칙을 갖는 선교활동중에(고전5.10, 요17.14-18) 개 교회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왕국의 질서를 발전시키게 된다. 개교회는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며 그 선교의 사명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차별성을 분명하게 알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미움에 대항해서 사랑을 세우고 용서로 잘못을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으로 차별성을 이끈다. 소비적인 삶의 양태를 상호 나눔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고려를 함으로써 극복하며 소심함에 대항하여 자유와 용기를 제공하며 약한 자들과 함께 함을 좋아하며 시대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존재들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삶으로 이끈다. 그래서 예언자적인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운 삶의 영광을 세상에 비춘다.

선교의 실천

성서는 교회가 자신의 활동들 가운데 선교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언급하고 있다. 즉 성령의 명령
으로 선교활동을 위해 구별해서 안수를 교회가 베푼다(행13.1-5). 성령이 요청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들이 있지만 복음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고전1.17). 개교회는 어디나 선교적 기능의 범주에 따라 각자 맡은 바 은사가 다른 교인들(\"전도자\"엡4.11)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알려 줄 과제가 세례받은자 각자에게 있다(벧전1.9)

우리들은 선교를 위해 은사를 갖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선교의 과정과 방법을 성령에게 모두 일임할 수 없다. 물론 교인 각자는 선교활동을 위해 자신을 성령에게 맡겨야 한다. 선교활동에서 카리스마가 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카리스마가 개인이나 그룹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믿음대로 활동하는 회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개 교회들이 신입교인들에게 자신의 공동체를 개방할 것과 그들에게 그들이 알고있는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삶으로 증거 하도록 개 교회들에게 기억시키자. 우리들의 개 교회들은 자신의 전통과 속박을 극복해야만 하며 모든 사람에 대한 허구와 의심과 예민함으로부터 기독교인의 자유를 입증해야만 한다(갈2.11, 롬14.15-23). 복음은 본래의 삶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한 삶은 그의 받아들임에 달려있기때문이다.

선교의 목표

전도의 목적은 믿기를 작정한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믿는 자가 세례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어 받은 은사를 자신의 삶으로써 받아들이게된다(엡4.11-32).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선교를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삼아서 안된다. 예를 들어 내적인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라든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든가… 주님이 우리들의 공동체에 구원받은 자를 더하여 주실 때(행2.47) 그것이 커다란 기쁨이 되는 것이지 자기만족이나 우월성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개교회들에게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즉 선교적으로 섬기는 교회는 자신의 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것임을 알아야 한다(행5.41 그리고 바로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선교와 일치

개교회를 위해 선교를 거슬리는 관점은 매우 고통스럽다. 즉 교회가 교단으로 분열되어 함께 사랑안에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선교활동의 장애물이 된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분열보다 더 강한 분이 그리스도임을 우리들은 고백한다. 그 소망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두가 가까워지고 일치되는 그때를 위해 우리들은 노력한다. 설령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특별한 강조점을 들으며 서로 자신의 지식으로 봉사하는 선물 받은 공동체를 기독교회의 한가지 형태 안에서 보기를 원한다. 우리는 – 우리들의 선교적 사명의 관점으로 – 서로 존경하며, 다른 교회의 활동을 존경하고 성서적 증인과 선교활동의 발전적 이해를 위해 협력함으로 교회를 돕는 것을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경쟁과 개종주의의 모든 형태를 우리는 거부한다. 주님의 만찬식탁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목적을 바라본다.

선교와 종말

신약의 증인들은 개인에게나 민족에게 일정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며 그래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서 준비될 어질 구원과 삶에 대해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공허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종교인들 비종교인들 누구나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의 잃어버린 자를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의 사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
은 없다: 온 세상에 모든 민족 모든 국가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신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세주 되심을 모든 사람이 믿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이다. 교회가 더 열심히 사명을 수행하면 할 수 록 점점더 승리가 가까워지고 그리스도가 이미 하나님과 화해시킨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위해 진리와 진실 사랑과 평화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충만하게될것이다.(마24.14, 롬11.11-15, 벧후3.9)

장로들과 개교회들을 위한 과제들

우리 개교회의 장로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관점으로 다음에 응답한다:

1. 매 설교에서 분명하게 이해할만하게 복음의 핵심이 표현되어진다.
a)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통치의 선언.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천으로 통치권을 갖게되었고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줌으로써 실현하였다.
b) 하나님의 화해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복종하도록 초청
매 설교는 복음을 만난 사람 그리고 개교회의 전회중이 전도에 대한 준비, 그것들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려해야 한다. 장로들은 조직적으로 설교의 청중들이 성장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 할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한다.(\"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2. 교회의 경계선 밖의 인생들의 고통과 질문들 그리고 세상의 문제들은 모든 개교회의 기도와 예배에서 다루어진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불한 세상을 위한 싸움터가 되는 것이다.

3. 성찬예식은 \"봉사\"로 모든 개교회가 믿음을 고백하는 장소이다. 즉 어린이들, 병자, 노인들, 버려진 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는 것이다.

4. 개교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중심을 극복해야 하며 모든 교회들의 사명에 응답해야한다. 그래서 교회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과제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개교회안에서의 활동을 위해 교회는 자신의 일꾼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5. 교회의 선교활동에 의해 관심을 일깨운 사람들이 개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형제 자매들을 발견할 때 그들은 세례를 받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6. 장로들은 선교활동을 위한 교회의 가르침과 고백을 가급적 짧은 기간 안에 적응될 수 있도록 그리고 이해될 수 있도록 새로운 교리로 표현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대별로 보는 간략한 체코역사

연대별로 보는 간략한 체코역사

체코 영토의 기원
1) B. C 2 – A. D 1 세기 고대로마시대

2) Bohemia, Moravia, Silesia로 구성
3) 켈트족, 게르만족의 보헤미아 지역 거주 시작

6세기경 슬라브족의 슬로박, 모라비아 지역 거주 시작
830-836 \"위대한 모라비아\" 제국의 탄생
863 Cyril과 Methodius의 기독교 전파
슬라빅 언어의 탄생(신약성경 번역)
907 \"위대한 모라비아\"의 몰락
9세기말 체코 국가의 시작(Borivoj왕에 의해 시작)
885년 프하하성 건축
1002년 로마제국의 통치
1085년 브라티슬라브 2세가 보헤미아 첫 번째 왕이 되다.
제2의 프라하성인 비쉐흐라드를 세움
12세기 신성로마 제국아래에서 번성
1300 바츨라브 2세의 은화통화(이흘라바, 쿤트나호라 지역)
13세기 특징적인 고딕문화의 발전
1346 까렐 4세(1346-1378) – 로마왕위를 가진 보헤미아 첫 번째왕
1348 까렐 대학 설립, 프라하 도시 건립(구시가지, 까렐다리, 교회 등등)
까를슈테인성 건립
1378 – 1419 까렐 4세의 첫 번째 아들 바츨라브 4세의 시대
1402 얀 후스가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다.
1415 얀 후스 화형 당함(7월 6일)
1419 후스전쟁의 시작(7월 30일)
1618 – 1648 30년 전쟁
1620 빌라 호라 전투(11월 8일)
17세기 바로크 문화
18세기초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성
1914 – 1918 1차 세계대전
1918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합수부르크 왕가로 부터 독립(10. 28)
1939 뮌헨협정, 독일지배(3월 15일)
1939 – 1945 2차 세계대전
1948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시작(2월 25일)
1968 프라하의 봄
1968 8월 21일 바르샤바 군대 진입(소련, 동독, 불가리아, 폴란드)
1989 벨벹혁명(11월 17일)
1989 바츨라브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당선
1992 체코와 슬로바키아 국경선 확정
1993 체코와 슬로바키아 국가 분리

저희의 믿음

  • 한인 예배 (2001년 08월 19일)
  • 막 2:1-12
  • 설교자: 이종실

01.08.19 (삼위일체 후 열번째 주일, 한인 공동체)
마가복음 2장 1-12절
저희의 믿음

8
월 15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경기가 열린 드르노비쩨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브르노에서 30키로 미터 떨어진 조그마한 시골
마을인 드르노비쩨 마을 시작을 알리는 하얀 도로팻말이 보이자 바로 왼쪽으로 커다란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이 축구
경기장 하나가 이 마을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작은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큰 축구 경기장 이었습니다. 마을 안 주차장은
물론 골목 골목에 차를 세울 수 있는 모든 곳은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의 차들로 이미 꽉 찼습니다. 차들의 번호판을 둘러보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차량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스위스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차량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는 매진이 되었고
사람들은 매표소 부근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러 많은 인파가 작은 마을 드르노비쩨를 찾아오듯이 이 보다 작은 마을,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축구와 같이 사람들에게 어떤 흥미를 끄는 스포츠나 오락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당은 비어가고 문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된 쾌락에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인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특정한 어느 계층 어느 부류의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합니다. 젊은이 노인, 배운자 배우지 못한자, 건강한자 병든자, 한국사람 체코사람, 남한 사람 북한사람, 경상도사람
전라도 사람, 장로교인 감리교인 성결교인 침례교인 순복음교인 카톨릭교인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산골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지역 어디에선 가에도 각종 언어로
선포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땅히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외면하기 쉬운 약한자 병든자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던 가버나움의 집에 네 사람이 들것에 한 중풍병자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여 한마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며 집중을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던 방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근동 지방의 건축양식이 지붕은 양옥집 처럼 평편하고 건축소재는 주로 돌과 흙을 사용하였기에 지붕을 뚫는 과정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장면처럼 지붕을 조용히 소리없이 통과하는 톰 크루즈
처럼 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그렇게 내려놓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방은 흙먼지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병자를 위해 전체를 방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흙먼지를 뒤집어쓰시고 하시던 말씀을 놓쳐버렸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위한 네 사람들의 무례를 꾸짖고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나아가 칭찬을 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5절에서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희란 중풍병자를 들고 와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내려보낸 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네 명의 침입자들, 방해자들, 이기적인 자들의 행위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 예수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식의 광신적인 신앙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인가?


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희의 믿음”을 어떻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곁에 가장
가까이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 병자는 스스로 예수님께 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소변 대변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절망의 사람이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질병이 그가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문 앞에 까지 빈틈없이 들어선 사람들이 그가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의 사람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않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는 예수님의 초지 일관(初志
一貫)된 모습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예절, 도덕과 윤리 그리고 규범 조차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뜻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며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인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한 죄인을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데려다
놓은 네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그 믿음이 지붕을 뚫고 모임을
방해했습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죄인이 빠진 교회의 모임은 무언가 석연치 않는 부족한 모임입니다. 만약 이
중풍병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를 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찾은 자신의
동기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고 예수님을 나름대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동기들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들의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예수님을 찾아오는 신앙의 열심의 문제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가의 문제는 다릅니다. 이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문제의 차원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교회의 문제입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서기관들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기관들은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이 지금까지
배우고 확신에 차 가르치던 것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두 가버나움의 예수님 계신 곳을
향했지만 찾는 이들의 마음의 생각들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병든 자, 절망에 갇힌 자,
죄인이 오자 그 죄인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편견과 선입견 없이 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모이기에 힘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세상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면 알릴수록 세상은 교회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금년 체코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세의 급격한 감소를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언론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91년도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세는 전인구의 40%였는데 10년 만인 2001년 인구조사에서 20%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청에서 처음에는 집계를 잘못한 줄 알고
몇 차례 확인을 했을 정도로 카톨릭 교세의 격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체코 카톨릭 교회는
원인 분석을 계속하고 있는데 시인이자 정치가인 카톨릭 신자 한 사람이 카톨릭 교세 감소의 원인이 사회변동 후 10년간 교회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언론매체에 교회선전을 많이 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중풍병자 같은 이들을 섬김임 없이 종교적인 열심으로 모이는 신자들만이 있는 교회를 무신론적인
분위기의 체코사회는 외면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의
전환점으로 오늘 본문은 “저희의 믿음”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임을 알고 한 사람을 주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 함께 협력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결과가 있었고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놓은 이 네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 아모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은 죄 사함의 선포와 해방과 치유와 거듭남의 자리입니다. 죄 사함의 선포는 단지
과거의 치유와 극복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앞에 나가거늘…” 누워서 살던 사람이 자신의 누운 자리를 들고 걸어가 질병과 무기력하게 절망하는
삶을 살았던 과거의 자리 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이 놀라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응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리의 변화와 시작은 단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열심만이 아니라 그 모임에 네 사람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중풍병자, 그의 고백과 믿음이 아니라 “저희의 믿음”으로 죄 사함의 선포와 치유와 새로운 삶의
시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저 네 사람의 믿음 앞에 결과가
없는 믿음의 행위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저와 여러분을 대면 시키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한 주 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보다 앞섰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신뢰함이 없이 그의 말씀을 목사이기 때문에 그냥 의무감으로 듣는 것 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치유와 해방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오늘 말씀 속의 가버나움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십시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던 우리들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희망 가운데서 사랑과 용서, 섬김과 기도로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다 놓는
네 사람의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더 큰 사명과 은혜를 허락할 줄 믿습다. 아멘
 
(기도)

늘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남에게 무관심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비방과 비난을 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주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거짓된 모습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케 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시사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회복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체코교회와 사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야곱의 피난처

  • 연합 예배 (1999년 12월 05일)
  • 창 28:10-1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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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자 : 이지 슈토렉(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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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28장 10-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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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띠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 10-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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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말씀>>

 
  야곱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몰래 엿 들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잡아죽이려 했습니다. 야곱은 도망을 치고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의 뒤에는 눈물과 분노의 집이, 그의 앞에는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우리 유럽 기독교인들 역시 우리자신들 뒤에 화형장과 하나님의 약속의 이름 아래 잔인하고 범죄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뒤를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습니까?

    야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외로웠습니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이 저 멀리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아래에서 자책과 분노를 두려워하는 야곱을 기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무엇인가 잡았습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전부였습니다. 성공과 성취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머리맡의 돌베개로 어떤 종교심을
준비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세례교육에서 배웠던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사닥다리 아니면 하늘에 이르는 계단. 좋습니다. 바빌론 포로의
유대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범상하고 거대한 피라미드, 그 안에 나타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우주의 비밀을 벗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꿈에서는 다릅니다. 뿌르드끼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 그 사닥다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땅에서 하늘로가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입니다. 야곱에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열린 하늘문, 그것은 기적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불행이 시작하는 그 처음에 사닥다리 꿈을 꾸게되었습니다.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기서 성탄절 천사의 첫 번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야곱의 여정을 긴 인생의 여정으로 바꾸고 있으며, 한편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앞에서 우리가 벌써 읽었듯이,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바빌론 위에 서서, 교활한 야곱 위에
서서, 어떤 활동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늘과 야곱 사이에서만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아브라함, 야곱의 후손, 땅위의 모든 족속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제 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가 잠자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 다음 번 여행길로 보내는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이 하늘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굽어보시는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단지 프라하의 북쪽에
거주하는 체코개혁교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 모든 민족, 어떠한 목적의 여행길에  있는 이들, 잃어버린 고향에서 암담한
목적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돌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동안, 찾고
세우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모든 잘못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의 피난처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약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사람, 어느 곳에서도 조그마한 신뢰도 내어놓을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 의해 상처받거나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를 주십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오늘 체코-한국 에큐메니칼 예배, 세례식을 우리들이 축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후손 예수님의 성찬단, 다른
민족들의 밥상공동체로 놓여있는  그 성찬단,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어느 어두운 밤에 주신 말씀의 놀라운 확신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음성을 들었고 확신합니다.

아멘 아멘

인내, 격려, 소망

  • 연합 예배 (1999년 11월 07일)
  • 창 12:1-6, 롬 15:4-9상
  • 설교자: 이지 슈토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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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자 : 이지 슈토렉 목사(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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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12장 1-6절, 로마서 15장 4-9 상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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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  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겔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창세기 12장 1-6절)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5장 4-9 상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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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

 
모든 사람들이 아브람의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커다란 변화와 움직임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른 민족들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브람이 들어간 땅은 가나안인들이 거주한 곳이었습니다.
우리 체코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땅은 기독교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기독교 사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성서를 설명할 때에 보냄을 받은 자의 관점에서 교훈, 인내, 안위(격려)와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하나 하나는 특별한 중요성을 갖습니다. 교훈 –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성서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교훈의 첫 번째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복음은 상품 선전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내를 통해서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인내는
안위(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언제나 인내는 연약한 식물과 같아서 오랜 돌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격려할 때 소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압니다. 인내와 격려의 하나님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소망을 언급합니다.

   
여러분에게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보와 축복의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들은 로마 교회를 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는 하나님과 교회를 알지 못한 세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내와 격려로 교회를 축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의 인내와 격려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세상 한복판에 있는
그러한 교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간청하겠습니까? 바울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라고 5절에서 간구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뜻이라면 어떤 뜻입니까? 자신의 아들을 하늘의 평화 가운데 두지
않고 세상으로 그를 보냈을 때 하나님의 뜻은 어떤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도우심, 대신 하심, 우리와 하나되심 그리고
죽으심의 모든 이야기는 – 점점 소외되는 적대적이 되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나아가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민족들은 하나님의
적대자들이었으나 인내와 격려의 하나님은 서로 화해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사역을 통해 모든 민족들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라”고(성서는 오늘 본문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교회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모두를 위해 준비한 것이 의미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우리 기독교인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소망은
이방인들의 희망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주목하십시다. 이방인들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신하심이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는 모든 예배를 통해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우리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다른 민족,
다양한 언어와 인종 문화를 가진 민족들과 다양한 염려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 (성적인 범죄자들, 각종
중독에 의한 정신질환자들, 동성연애자들을 지칭하는 것임 – 꼬빌리시 교회가 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과 만나는 기회를
선물로 주시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깊게 그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들은 우리들의 예배를 통해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우리 가운데 마련하십시다. 그리고
그들을 환영하며 그들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열심히 보흐니체 정신 병원 사역에 힘씁시다.
우리들이 더 뜨거운 마음으로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로고스 단체를 돕는 일을 계속하십시다. 우리 교회의 숙소에 머무르는 여행객들과
각종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묵고 있는 손님들을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심정으로) 도웁시다. 어떤 이익을 남기기 위한 호텔을
운영하듯이 우리들의 교회 숙소를 운영하지 맙시다. (꼬빌리시 교회는 펜지온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교회 건축을
위해 외국 형제 교회들로부터 빌린 건축비를 갚고 있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교회 건축을 부분적으로 계속 증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펜지온 운영을 꼭 수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일년에 한 두 차례 짚시들을 위한 학교에서 짚시들 공동체 훈련이라든가
콘서트를 위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봉사단체들의 각종 모임을 위해 무료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 한 예가 사회적인 인식의 부족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로고스 나다체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의 활동을 목회적으로 돕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는 곳에, 새로운 사회가 세워지는 곳에 하나님은 모든 일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적대민족인)
독일인들도, (체코 개혁교회에 적대적이었던) 로마 카톨릭도 그리고 짚시들도 모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들에게)
놀라운 새로운 기쁨이 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질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다양한 언어를 예배시간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한국말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초대 교회의 옛날
언어들로 우리들은 모든 민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언의 무리와 연합이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끼리에 엘레이존을
사용합니다. 몇 개 기본적인 예배 용어를 한국말로 배워 보십시다. 예를 들어 “빠네 스밀루이 세”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놀라운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증언자들의 모든 말들을 보여 주기 위해 사도 바울은 결론으로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온갖 즐거움과 평화를 여러분들에게 가득히 안겨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넘쳐흐르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13절)

    성만찬 때 빌립보서 2장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그
찬송은 오늘날 우리들도 초청을 받고 있는 거룩한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보죄 앞에 모든 민족, 모든 언어, 모든 인종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기쁨과 평화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훈의 인내와 격려와 소망의 영감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만약에 그러한 어떤 것이 교회의 예배에서 경험되어진다면 그것은 성령의 능력과 선물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결론으로 오늘 본문 15장의 한 부분을 읽겠습니다.

 
  “다만 내가 이 편지에서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서 말한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다시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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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중의 ()는 독자의 설교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자의 해석입니다.
 
* 설교 자가 인용한 성경 본문은 오랜 외국 생활로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현대적으로 번안된 공동번역의 성경을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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