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 8:27-38>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제자들이 예수께 전합니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 어떤 이는 엘리야, 또 어떤 이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진짜 관심은 그 다음 질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는 좀 더 긴 대답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이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바요나(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베드로가 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바른 인식은 자기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됨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 혹은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 최북단 헤르몬 산 발치에 자리잡고 있던 이교 도시였습니다.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운데 하나인 이 도시는 헤롯 대왕이 BC 20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로부터 선물로 얻은 도시였습니다. 헬라의 자연신 판(Pan) 신전이 그곳에 있었고, 당시 제국 안에서 신처럼 여겨지던 로마황제에게 바쳐진 신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후에 분봉왕 헤롯 빌립이 도시를 화려하게 확장하고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름을 ‘가이사랴’라 하였고,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 뒤에 자기 이름을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이름이 붙은 도시, 그리고 각종 이교의 신전이 있던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같은 질문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예수님이 오셔서 던지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돈이 주인 된 세상, 사람들이 돈에 매여 사는 이 세상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도를 넘고 있는 세상, 짓밟힌 생명들의 피울음이 그칠 날 없는 이 세상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몸이 원하는 것, 눈이 혹하는 것, 나를 돋보이게 할 만한 것들에 경도된 세상, 그 욕망을 따라 각자 제 취향에 맞는 우상을 만들어 자기 속에 모셔 두고 은밀히 숭배하며 사는 이 세상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짧지만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이 땅에 가져올 수 있는 이, 그 진정한 왕, 진정한 신의 아들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번역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할 기름부음 받은 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던 이유는 그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그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마침내 그는 이 분이 바로 기다려왔던 그분임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베드로와 다른 시대, 다른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그 의미가 깊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것은 사람이 자기 지혜로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수준의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셨기에,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이 보여주듯, 어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가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에 더 이상 오류가 없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내 삶의 현실 속에서 형성된 어떤 생각의 틀, 가치의 틀, 기대의 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는 어떤 환멸의 순간을 마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씀해 주십니다. 외부를 향해서는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내부를 향해서는 더 많이 드러내는 태도를 취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구하고 찾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소식이 전혀 기쁜 소식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소식이 누군가에게 진정 복음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분이 어떤 메시아인지 먼저 이해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드러내 놓고 알려주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31)

여기 ‘인자’라는 표현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예수께서 이 표현을 그분 자신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실 때 그 의미는 다니엘서의 메시아 예언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그분 자신을 ‘인자’라 호칭하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 소멸되지 않는 권세를 받아 모든 백성과 나라들을 영원히 다스릴 인자 같은 이, 즉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암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로서의 메시아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바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이것은 스승에게 해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제자의 따뜻한 염려의 말일까요? 아닙니다. 여기 ‘항변하다’로 번역된 ‘에피티마오’라는 단어는 ‘비난하다’, ‘책망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매우 강한 어조의 말입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선생님! …” 이런 뉘앙스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까지 말할까? 자신이 이제껏 생각하고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그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정녕 예수님이 그 메시아라면 그처럼 버림 받고 죽임 당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전례없이 호된 것이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

방금 전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던 제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상황에 사탄이 개입하고 있음을 예수님은 간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호된 책망은 이 영적 전투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분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이라 하십니다. 본문의 맥락상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그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가시려는 구원의 역사,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이어지는 길을 말할 것입니다. 한편 ‘사람의 일’이란 인간 베드로가 그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바라고 기대하던 구원의 역사, 다시 말해 놀라운 신적인 능력으로 적들을 제압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꿈을 말할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기대하는 바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래 전 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마침내 보게 되었지만 아직 부분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은 알았지만, 고난당해야 하는 메시아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 53장에서 선지자가 후에 전파될 메시아의 길을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니엘서에 묘사된 메시아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 능력 밖의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길이 우리 인간의 길과 다르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지평 위에서 펼쳐진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고 거기 합류하여 그분과 함께 흐를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분을 찾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55”6-7)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부지런히 배우며 깨달아가는 일입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막7:14) 이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일하시며 어디로 우리를 이끄시는지 그 대략적인 방향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비록 다 이해되진 않을지라도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일을 앞세우며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결국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며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55:10-11)

이처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은 믿고 순종하는 이의 삶 속에서 합류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사람의 길은 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길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내어드리는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외로이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선택하셨고, 바로 그 길 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

‘무리’(crowd)는 어떤 관심이나 필요에 의해 예수님께 나아오긴 했지만 아직 그분을 본격적으로 따르기로 결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 예수님 말씀을 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미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고자 한다면, 혹은 이제 비로소 제대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 예수님 말씀을 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길에 역행하는 우리의 자연스런 성향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런 성향은 그리스도의 길에 역행합니다. 우리의 자연스런 욕망의 길을 따라가면 그리스도의 길이 이끄는 곳과 정반대 지점에 도달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또다시 ‘깨달음’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긍정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부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 그 기준이 있을 리 없고, 그것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자에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지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자기 부인의 연장선상에서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길로 나아감에 따른 대가를 감내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따라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로 인해 겪게 될 수 있는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세상의 어떤 차별적 기준에 의해 한 사람이 집단적 따돌림을 당하거나 배척받고 있을 때 예수 믿는 누군가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그 역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따돌림 당하고 배척 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 예수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희생(self-sacrifice)의 길을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높은 길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결국 그분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을 신뢰하고 소망하면서 그분의 일에 나를 내어드리는 자기-내어줌(self-donation)의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을 믿고 소망하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자의 삶이 쉽고 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환상입니다. 신앙이 성숙해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잘못된 환상이 깨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해야만 하고,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 가신 길이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 자신을 내어드리는 길이었듯,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의 부르심도 쉽고 편한 길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나를 일치시키며 내어드리는 참된 삶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미리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14:28,31)

“인생은 고되고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고부터 삶은 쉬워진다” 했던 스캇 팩의 말처럼,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가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며 그에게 약속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따를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치 않고 주의 은혜를 힘입어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길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이라 하시면서, 동시에 그 길이 참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본문에 ‘목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쉬케’인데, 이것은 살아 있는 존재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일반적인 생명 혹은 목숨을 가리킵니다. 한편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 언급할 때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조에’라는 단어입니다. 이 ‘조에’는 아들의 생명, 예수 믿는 자들이 그를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이를 참고하여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다시 보면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자기 목숨(프쉬케)을 다시 찾을 것이다. 아들 안에 있는 생명, 그 영원한 생명(조에)이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요(요6:54), 하나님과 더불어 지금부터 영원까지 살아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기 목숨(프쉬케)을 지키려고 예수님과 복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조에)에서 이탈함으로 인해 결국 자기 목숨(프쉬케)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조에)에서 소외되어 결국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게 된다면 설령 이 땅에서 제 목숨(프쉬케) 지키며 온 천하를 얻었다 해도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그 무엇을 주고도 잃어버린 자기 목숨(프쉬케)과 바꿀 수 없으리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저는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사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 같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자유야!” 라는 막무가내의 말이 오히려 그의 집착을 보여줍니다. ‘자유’에 대한 집착, ‘권리’에 대한 집착…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죠.  

그 집착 가운데 있는 사람을 계속 그 상태로 두면 그는 거기에 더욱 중독된 사람이 되거나 자기 안에 완전히 갇히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를 거기서 해방하여 진정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진정한 나로 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뿐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결혼관계에 비유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행태를 영적인 간음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이처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은밀히 사랑하고 섬기면서, 마치 과녁을 이탈한 화살처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세상도 그러하기에, 그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며, 따라서 고난을 예고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영광 중에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수줍어 한다는 뜻이 아니라 수치스러워(ashamed) 한다는 뜻입니다.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와 한 통속이지?” 물었을 때 베드로가 “나는 그를 모른다!” 부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수치스러워한다’의 반대는 ‘자랑스러워한다’일 것입니다.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예수님과 복음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따르는 자임을 자랑스러워 하며 예수님과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예수님이 누구시며 복음이 무엇인지 참으로 깨달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이름이 붙은 도시, 그리고 각종 이교의 신전이 있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음란하고 죄 많은’ 오늘의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사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질문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을 믿고 따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날마다 더욱 깨달아가며 예수님이 부르시는 길, 우리의 길보다 높은 하나님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