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 새로운 피조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5)

 

1 샬롬 ~ 주 안에서 평강하신지요.. 어떻게들 지내십니까.. 삶이 참 녹록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식들 키우는 것도 쉽지 않고.. 직장생활 하는 것도 쉽지 않고..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고.. 여기 저기 인사하고 사람 구실 하면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어디까지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어디로 가야할까요..

저는 지금 프라하에서 북서쪽으로 차로 한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넥센타이어 공장에서 통역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통역이지 막노동에 가깝습니다. 일 자체가 힘들다기 보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평생 거칠고 힘든 일을 해 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분들과 함께 일 해 나간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지요.. 저는 그곳에서 손가락 마디들 중에 한마디가 없는 사람들을 여럿 봤습니다. 그만큼 삶은 힘들고 치열하고 진지한 것이겠지요.. 그 중에 제가 프라하에서 오래 알고 있었던 강모사장님도 계셨는데 이렇게 검지와 중지가 잘려 나간 것을 봤습니다. 상처가 덜 아물어 추운 겨울 날씨에 한 데에 있다보니 다친 손가락 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그러셨어요 하니까 농담을 하시더군요.. “아직도 신에게는 아홉개의 손가락이 남아 있습니다 ㅎㅎ” 삶이란 웃픈것일까요..

 

2 오늘 저는 본문 말씀과 함께 우리, 특히 크리스천의 삶, 크리스천의 삶의 현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는 꿈이 큰 사람을 응원합니다만 그 꿈이 현실성이 없을 때 이 사람은 약간 몽상가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이 친한 친구이면 한마디 덧붙입니다. “현실을 봐! 지금 너가 처한 형편과 환경과 상황을 봐!” (여기 형편과 환경과 상황.. 이렇게 비슷한 단어를 함께 쓴 것은 각각의 단어가 약간씩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썼고 별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습니다.)

이왕 현실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번 생각해 보죠.. 나는 지금 어떤 현실에 처해 있습니까.. 나는 어떤 형편과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나는미혼입니까 기혼입니까.. 미혼이면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직장을 구하고 있습니까.. 기혼이면 직장생활하고 있습니까.. 육아를 하고 있습니까..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고 힘듭니까.. 이제 내 나이도 어언 몇 살입니까.. 연로하신 부모님은 건강하십니까.. 나는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의 현실은 믿지 않는 자들의 현실과 다른 현실입니까.. 우선 이 질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려 본다면, 크리스천의 현실은 믿지 않는 자들의 현실과 다른 현실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믿지 않는 자들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과 다른 형편과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 그러한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3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5)

오늘 본문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관계가 없는 내용들을 갖고 있는 구절들처럼 보입니다마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새로운 피조물’ ‘새것’ ‘새 하늘과 새 땅’ 또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런 문구들에서 볼 수 있듯이 공통적으로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새롭다’라는 형용사는 헬라어로 ‘카이노스’라는 형용사인데, 이 ‘카이노스’라는 형용사는 과거에는 없었지만 지금 존재하게 된 새로운 것 또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을 지칭하고자 할 때 사용된 형용사입니다. 반면에 헬라어에는 ‘새롭다’라는 형용사로 ‘네오스’라는 형용사도 있는데 이는 나이가 적음을 나타내거나 또는 우리가 새 차 하면 떠오르듯이 오래되고 낡은 것이 아니라 새것을 지칭할 때 사용된 형용사입니다. 그러니까 영어에는 ‘새롭다’라는 형용사로 new라는 형용사가 하나만 있습니다마는 헬라어에는 이 형용사가 두 개가 있는데 지금까지 없었던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것을 가리킬 때는 ‘카이노스’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우리가 흔히 오래된 것과 비교해서 새것이라는 것을 가리킬 때는 ‘네오스’라는 형용사가 사용된 것입니다.

자,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오늘 본문 구절들에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까지 없었던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키는 형용사 ‘카이노스’가 공통적으로 쓰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다시 본다면 각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됩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였는데 이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전에 그러한 것이 있었던 적이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새하늘과 새땅’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처음 창조된 피조세계가 체질이 풀어져 없어지고 처음 세계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 말씀처럼 만물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새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4 우리는 지금 ‘새롭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카이노스’라는 형용사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이 카이노스 즉, ‘새롭다’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그리고 아담의 타락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재창조와 구원이 이루어지고, 성령님을 통해 이 구원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적용된 것을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형용사가 바로 ‘카이노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창세기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카이노스’라는 형용사 즉, 새롭게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관련하여,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로 그렇게 되어진 것입니다. 성령님과 관련하여, ‘카이노스’ 즉,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거처 삼으셔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동행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인해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 ‘새것’인 것입니다.

 

5 그러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는 것이 지금 여기 나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녀도 내 삶은, 나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신다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은 믿지 않는 자들의 형편 환경 상황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순천만이라는 바닷가에서 살았습니다. 순천만은 갈대숲과 갯벌이 유명한데 그곳에 짱뚱어라는 바다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짱뚱어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썰물 때 짱뚱어는 갯벌 위에 나와 있습니다. 근데 자세히 보면 각각의 짱뚱어 옆에 물구멍이 하나씩 있습니다. 짱뚱어의 집 겸 피난처인 것이지요.. 갯벌에는 짱뚱어 뿐만 아니라 노란 집게발을 갖고 있는 농게도 있는데 짱뚱어의 천적입니다. 농게가 다가오면 짱뚱어는 옆에 있는 물구멍으로 재빨리 들어가 숨습니다. 짱뚱어들은 영역다툼도 합니다. 다른 짱뚱어가 자기 물구멍 가까이 다가오면 꼬리로 쳐서 침입해온 짱뚱어를 쫓아 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려고 짱뚱어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까.. 저와 짱뚱어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형편과 환경과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짱뚱어와 저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형편과 환경과 상황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짱뚱어가 제가 아니고 제가 짱뚱어가 아닌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고 해서 같은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짱뚱어의 삶이 인간의 삶과 다르듯이 – 짱뚱어는 너무나 한정된 공간을 살아가는 미물이 아닐런지요 – 믿지 않는 자의 삶은 믿는 자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인 것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가지만, 무생물의 삶이 다르고 생물의 삶이 다르고, 식물의 삶이 다르고 동물의 삶이 다르고, 동물의 삶 중에서 인간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또 인간의 삶에서 믿지 않는 자의 삶이 믿는 자의 삶과 다르고, 같이 믿는 자이지만 나의 삶이 다르고 너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편으로서 실재는 같지만, 무생물과 생물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이 다르고, 식물과 동물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이 다르고, 동물과 사람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이 다르고, 사람들 중에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이 다르고,  믿는 자들 중에 나와 너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 너의 삶이 같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으로서의 삶이면 질적인 차이가 없는 미미한 차이의 삶이겠지만, 같은 사람의 삶일지라도 믿지 않는 자와 믿는자의 삶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던 ‘카이노스’라는 형용사이고 이런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를 표현하는 구절들이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라는 구절들 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새로운 형편과 환경과 상황입니다. 그것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형편과 환경과 상황입니다. 이에 대한 비근한 예를 한 문장으로 언급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시공간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존재자들의 삶과 같은 삶이지만, 영원에 잇대어져 있는 삶이라는 점에서 다른 존재자들의 삶과 다른 삶인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내 형편과 환경과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내가 크리스천이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 자녀이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것이며 그로 인해 나의 삶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형편과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6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어떤 삶을 살고 계신지요.. 혹시 힘든 형편과 환경과 상황 때문에 남몰래 눈물 흘리며 힘든 삶을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 새것으로서의 삶은, 영원에 잇대어져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삶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 삶이며, 예수님께서 나를 십자가 상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살게하신 삶이며, 성령님께서 보혜사로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나를 도우시고 나와 동행해 주시는 삶인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열심히 살기는 해야 하겠지만 너무 애쓰지는 맙시다. 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삽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편 37편 5절 말씀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걱정과 염려대신 말씀을 붙드는 삶을 삽시다. 말씀을 붙드는 삶이 ‘새로운 피조물’, ‘새것’의 삶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머릿 속에 계속 맴도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혹시 마음 속에 걱정과 염려가 있는 형제 자매님이 여기 계신다면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립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을 권고하시기 즉,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