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받은 구원

어떤 의미에서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 은혜의 프레임 안에서 행동하고 관계맺습니다. 최근에 본 어느 드라마에서 인상깊은 얘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스위스 한 마을에 핵 폐기장 건설 투표를 했는데, 처음엔 주민 60%가 찬성했다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마을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면 돈을 주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고, 다시 투표를 했는데, 결과는 주민 25% 찬성. 어찌된 일일까? 돈을 준다는데, 어째서 찬성률이 뚝 떨어졌을까? 처음에 그 스위스 사람들은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 어딘가 짓긴 지어야 돼. 우리가 책임지자. 그게 옳은 일이야.” 근데 거기 돈이 들어와 버리니까 생각하는 회로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겁니다. ‘뭐가 옳은 거지?’에서 ‘뭐가 나한테 이득이지?’로… 일단 그렇게 돼 버리면, 왜 그 위험한 걸 내 앞마당에? 이게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한 글에서, 선물이 더이상 선물이 되지 않는 경우를 묘사합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 그것을 주고나서 받는 이에게 일정한 반응을 기대할 때, 그는 그의 선물을 ‘거래(exchange)’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받는 이에게 빚진 자의 느낌과 부담을 불러일으키며,
선물을 더이상 선물 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좀 극단적인 사고전개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많은 것을 거래와 교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관계맺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은 ‘거래의 회로’가 아닌 ‘은혜의 회로’ 속에서 움직여져야 하지 않을까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10:8)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주신 권면입니다.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내가 준 것으로 상대를 압박하거나 조종하려 하지 말고, 그냥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는 마음으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며 살면 좋지 않을까요? ‘은혜’ 의식이 약해진 곳에서 ‘거래’ 의식은 더 강하게 고개를 들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은 배고픈 자들이 배고픔을 만족시켰다는 점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깨우쳐주신 사건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마14:20)

하나님 나라의 경제는 ‘결핍’의 경제가 아니라 ‘넘침’의 경제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 눈에는 ‘사치’의 경제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결핍을 느낀 그것을 딱 그만큼 채움받은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가장 좋은 선물을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걸 받을 자격도 없던 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도록 값 없이 받았던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은혜의 회로’를 따라 내가 거저 받은 것을 내 주위 사람들과 거저 나누며 살면 좋지 않을까요?

자신이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 안에서 새롭게 빚어져 갑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기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고 말할 때, 이는 태초의 창조사건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새 창조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무’로부터의 창조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일은 이와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무’로부터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거듭남, 즉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빚어져가는 과정은 때때로 우리에게 답답함과 고통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내게 이미 주어진 것이 부서지거나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기대에 반하여 행동하시는데, 이는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부수고 제거하시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새로 빚어짐을 위해 우리를 무(無)로 돌리시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55:9)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2:9)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1:53)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우리 스스로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개입해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을 낮추시고 비우시고 부드럽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 선물을 진정 나를 위한 좋은 선물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빚어져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이 은혜로 새로 빚어짐을 말한 뒤에, 비로소 바울은 우리의 ‘선한 일’에 대해 언급합니다. 오직 ‘선하다’ 불릴 수 있는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선한’ 삶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만약 우리 삶 속에서 ‘선한 일’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넘쳐흐른 결과이며,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거저 주는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받은 구원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기대를 초월하여 가장 좋은 것을 제때에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 주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 빚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의 회로’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삶으로 은혜의 복음을 신실하게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