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시편 51:1-19>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식한 사람이 사죄와 회복의 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표제에 ‘다윗의 시…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말씀하실 정도로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 은밀히 남의 아내를 빼앗고 비열히 살인을 교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모르게 행했다 생각한 그 일을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드러내시며 책망하셨고, 이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죄’라는 말에서 보통은 어떤 행위나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에서 이탈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죄’라는 말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길 꺼려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고리타분하고 불편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까요? 명백히 ‘죄’로 표현되어야 할 어떤 문제의 상황을 ‘질병’이란 의학용어나 ‘위법’이란 법률용어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와 관련된 언어를 폐기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인류는 여전히 소외, 진실의 왜곡, 지옥 같은 현실, 죽음을 경험합니다. 이를 가리키는 언어를 버릴 때 그 앞에서 우리는 그저 벙어리가 될 뿐입니다.

무어라 부를지도 모르는 사태가 우리 삶에서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사태를 회피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죄의 언어가 사라지면 은총의 언어 또한 약해집니다. 무엇을 용서받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면 그 용서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죄’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 깨어진 관계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 들어서기로 선택하는 것을 ‘참회’라 합니다. 참회를 결단하면 쓴 약을 먹었을 때처럼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이 약에는 분명 우리 삶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회’(penitence)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단어 중에 ‘회개’(repentance)가 있습니다. 참회가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뉘우치는 일이라면, 회개는 자신이 잘못 가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바른 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참회가 진실한 뉘우침이라면, 회개는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뜻할 것입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지만 누구나 진실하게 참회하며 회개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참회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 하여 남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짓고 사는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심각한 죄인은 자신이 잘못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여 참회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회와 회개는 은혜입니다. 참회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참회와 회개 모두 그 빛을 받아 죄를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 있음을 보게 될 때에만 우리는 다시 그분께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방문과 책망은 분명 다윗에게 곤혹스럽고 고통스런 일이었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본래의 ‘나’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 그 간극에 아파하며 그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우리는 어제까지의 내가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제까지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는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본문 1절에서 시인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이미 엎지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 내가 행한 잘못에 대해 나 스스로 그건 없었던 일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홍같이 붉은 나의 죄를 그분의 눈과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 주시고 말갛게 씻어내 주시길 구할 뿐입니다.

3절과 4절에서 시인은 또한 말합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자기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 자신이 죄 가운데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 “나만 잘못한 게 아니잖아!”, “다들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별일 아니야!”… 이와 같은 책임회피와 자기합리화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인간은 피조세계를 이루는 그물망 속에 살며 다른 모든 피조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 상황에 대해 전적으로 잘못이 나에게 있다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상황은 나아질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참회하고 회개할 부분이 있다면 해야 할 것입니다.

죄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이 죄와 의를 가르는 기준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짓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인식합니다. 이것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일 겁니다.

4절에서 시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죄가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그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 겁니다. 14절에서 그는 사람을 향한 그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간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만 그는 자기의 죄를 사람에겐 숨길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스스로 의롭다 주장해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아무리 내가 무죄로 보인다 해도 하나님이 아니라 판결하시면 나는 유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눈이 그의 죄를 찾아내시고 드러내셨으니, 주님 말씀대로 나는 죄인입니다,당신의 판결이 옳습니다,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 사람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압니다. 그것은 중심의 진실함, 마음속의 진실입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속이지 않는 진실한 마음, 부풀리지 않는 진솔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내면 속에 지혜의 빛을 비춰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지혜일까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일 것입니다. 내가 잃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일 것입니다. 나에게 회복되어야 할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일 것입니다. 또한 내가 행해야 할 진짜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일 것입니다.

그 지혜로부터 10절에서 시인은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죄로 더러워진 내 마음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뜻 위애 내가 굳게 서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가 또한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지혜로부터 또한 11절에서 시인은 그에게 진정 소중한 것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또한 성령입니다. 언제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있게 하소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살게 하소서!

그 지혜로부터 또한 12절에서 시인은 그에게 진정 회복되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능력으로 함께하시며 나타내시는 구원, 다윗은 그것을 살면서 많이 맛보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맛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내가 주님께 붙어 있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면 이제 그가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를 시인은 13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제 그는 죄인들이 주께 돌아올 수 있도록 죄인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제 그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높이 찬송하여 전파하리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 말합니다.

진실한 참회와 회개가 빠진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은 압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일까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참회와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복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며, 참된 위로는 애통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싸매시고 고치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무너진 성벽은 재건되고 삶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Lent)은 고어로 ‘봄’(spring)이란 뜻을 지닌 단어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이 절기가 봄에 시작되기도 하지만 영적인 삶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기간을 영혼을 다시 푸르게 만드는 시간으로 여겼기에 참회와 기도와 금식으로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부활절까지 이어지는 시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영혼의 땅속에 묻혀 있던 딱딱한 구근이 꽃으로 만개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진실한 참회와 회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