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Ondřej Kolář

 

<마태복음 8장 5-13절>

Když přišel do Kafarnaum, přistoupil k němu jeden setník a prosil ho: „Pane, můj sluha leží doma ochrnutý a hrozně trpí.“ Řekl mu: „Já přijdu a uzdravím ho.“ Setník však odpověděl: „Pane, nejsem hoden, abys vstoupil pod mou střechu; ale řekni jen slovo, a můj sluha bude uzdraven. Vždyť i já podléhám rozkazům a vojákům rozkazuji; řeknu-li některému ‚jdi‘, tak jde; jinému ‚pojď sem‘, tak přijde; a svému otroku ‚udělej to‘, tak to udělá.“ Když to Ježíš uslyšel, podivil se a řekl těm, kdo ho následovali: „Amen, pravím vám, tak velikou víru jsem v Izraeli nenalezl u nikoho. Pravím vám, že mnozí od východu i západu přijdou a budou stolovat s Abrahamem, Izákem a Jákobem v království nebeském; ale synové království budou vyvrženi ven do tmy; tam bude pláč a skřípění zubů.“ Potom řekl Ježíš setníkovi: „Jdi, a jak jsi uvěřil, tak se ti staň.“ A v tu hodinu se sluha uzdravil.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Bylo to hodně neobvyklé setkání. Napadá nás kněmu hned několik otázek. Nejprve: Proč římský důstojník vyhledal zrovna Ježíše a neobrátil se raději na nějakého lékaře? Možná už vyzkoušel všechno a nikdo nepomohl. Avšak nezapomeňme – Ježíš byl pro něj příslušníkem okupovaného, podrobeného národa. Římané se cítili být těmi nadřazenými, jako nositelé kultury mezi barbary.

예수님과 백부장의 만남은 아주 이례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백부장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이 즉시 우리에게 떠오르는데 가장 먼저, 왜 로마제국 장교였던 백부장이  의사를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미 백방으로 손을 써봤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로마제국에 예속된 점령지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 사람들은 야만인들에게 문화를 전달하는 스스로를 우월한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Další otázka zní: Je-li sluha neschopný služby, neměl by ho prostě nahradit někdo jiný? Nejen vdnešní tržní společnosti, ale už tehdy si lidé u dna společenského žebříčku byli dobře vědomi, že jsou snadno vyměnitelní, jako součástky stroje. Nemůžeš pracovat? Máš smůlu, na tvé místo rád nastoupí někdo jiný. Připusťme ale, že setník byl na svého sluhu zvyklý a neměl chuť riskovat, že na místo nemocného, ale jinak schopného a spolehlivého otroka nastoupí otrok sice zdravý, ale neschopný.

다음 질문은, 하인이 봉사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면, 다른 하인들이 그 하인을 대신하는게 맞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오늘날 시장경제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사다리 구조와 같은 계급 또는 계층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기계 부속품들처럼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 할 수 없습니까? 슬픈일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자리를 쉽게 대신하게 될테니까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병든 하인에게 익숙해져 있었고 또 비록 병들었지만 유능하고 신뢰할만한 하인을 건강하지만 무능한 다른 하인으로 교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생각합시다.

A nakonec ještě jedna otázka. Hlavní důvod, proč setník vyhledal Ježíšovu pomoc, nebyl ten, že jeho sluha prostě nefunguje a tím mu komplikuje život. Setník přišel za Ježíšem proto, že jeho sluha trpí. Nevíme, nakolik byla ta nemoc vážná. Na tom až tak nezáleží. Ta nemoc ale vyvolávala velké bolesti. Tvrdý voják, který toho asi v životě už dost zažil, byl pohnut lítostí. Navíc lítostí vůči svému podřízenému, vůčipouhému šroubku v armádní mašinérii. Jak se to shoduje spředepsanou vojenskou bezcitností?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 백부장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근본적인 이유가 그의 하인이 하인으로서의 역할을 못한다거나 그로 인해 그의 삶이 복잡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그의 하인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하인의 병이 얼마나 위중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인의 병의 상태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인의 병이 큰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그러한 고통을 충분히 겪어 봤을 강인한 군인이 연민에 휩싸였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연민은 그의 부하에 대한 연민, 군대라는 거대한 기계의 작은 나사에 불과한 것 같은 그의 하인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어떻게 백부장의 이러한 연민의 감정이 군대 특유의 냉담함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을까요?

Tak tedy vojevůdce a lítost. Při čtení toho příběhu nás napadne ještě jedna jeho vlastnost, a to pokora. Člověk zvyklý rozkazovat a přijímat rozkazy uznává, že jsou věci, na které žádný lidský rozkaz nestačí. Dějí se i události neočekávané, nevypočitatelné, a tedy neovlivnitelné. Něčím takovým je právě nemoc. Spadá do sféry, kam naše moc nesahá – ani ta politická, vojenská, ani moc peněz, ba dokonce často ani moc lékařská. Setník si uvědomuje, že i kdyby stokrát přikazoval, jeho sluha nevstane a nemoc sama neodejde. Právě takové poznání může být počátkem víry. Zjištění, že nemám svůj život ani životy druhých lidí pevně ve svých rukou. Ktomu člověk nemusí dojít jen skrze neštěstí. Vlepším případě se přihodí naopak něco hezkého, třeba když se manželům po letech marného úsilí a zkoušení všeho možného náhle, neočekávaně, bez složitých medicínských technik, podaří počít dítě.

군 지휘관과 연민. 본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더 우리에게 떠오르는 백부장의 성격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입니다.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은 인간의 명령만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예상치 못한,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질병입니다. 질병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일 때가 있는데, 정치적, 군사적, 금전적 힘, 심지어 의료적 힘으로도 미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백번을 명령할지라도 그의 하인이 못 일어날 것과 하인의 병이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믿음의 시작이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이 나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러한 깨달음을 꼭 불행을 통해서 깨달을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 좋은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을 통해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으면 좋은데 예를들어, 어떤 부부가 임신을 위해 수년간, 가능한 모든 노력 끝에 복잡한 의료 기술 없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이, 내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Setníkova pokora se projeví i v tom, že Ježíše osloví „pane“. To je silné slovo. Vždyť on sám je velký pán a má nad sebou docela jiné pány, kteří mu rozkazují. Oslovení „pane“ už nemá daleko k oslovení „Bože“. Setník si řekl: Já mám pod palcem své vojsko; ty máš zas pod palcem všelijaké zlé duchy, které způsobují nemoc. Já velím světu viditelnému, ty světu neviditelnému. A vtom tvém světě, ve světě náboženském, jistě panují podobné poměry, jako vtom mém. Tak prostě udělej to, co dělávám v takových případech já – a bude to mít stejný efekt. Vydej rozkaz – a stane se.

백부장의 겸손은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은 아주 강한 단어입니다. 백부장은 그 자신이 주된 위치에 있고 그 위로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많은 주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호칭이 백부장이 그의 수하에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질병을 일으키는 모든 악령들을 주님의 손아귀에 쥐고 계심을 알게 해 주는 호칭임을 알아야 합니다. 백부장은 보이는 세계를 지휘하지만 주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휘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세계, 종교의 세계에도 이 땅의 세계, 보이는 세계처럼 분명 비슷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그가 보이는 세계에서 명령을 내리듯이 주님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명령을 내려주셔서 동일한 효과를 발생시켜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Setník má, zdá se, vše dobře promyšlené. Ví, že Ježíš je příslušníkem národa, který si velice zakládá na čistém a nečistém. Je nepředstavitelné, aby se Žid potřísnil vstupem do pohanského domu. Řešení se ovšem najde. Vždyť ani generál nemusí jít do první linie a může řídit vojsko zbezpečné vzdálenosti, z velitelského stanu. Sám nemusí rozdávat rány a krvácet – od toho tu jsou jiní, jeho podřízení, vojáci. Stačí říci slovo. A tak i tobě, Ježíši, přece stačí říci slovo, nemusíš udělat ani krok kmému domu. Řekni jen slovo – a můj sluha bude uzdraven.

백부장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정결함과 부정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민족의 일원인 것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스스로를 더럽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물론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장군은 최전선에 나가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휘소에서 군대를 이끌 수 있습니다. 장군 스스로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그의 부하들이 있는 겁니다. 장군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당신도 명령만 내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집에 한 발자국도 들이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Setníkova slova jsou vlastně jakýmsi podobenstvím vycházejícím z vojenského prostředí. Ježíš je tu vylíčen téměř jako velitel nebeských a pekelných jednotek. Ostatně, zněčeho takového ho někteří odpůrci skutečně podezírali. Vždyť on opravdu mnohokrát jen zavelel a zlí duchové se zděšením prchali. Ale toto podobenství se Ježíši zamlouvá. Za jeho drsnou slupkou se totiž skrývá hluboká pravda: Ježíšovo slovo je mocné a účinné, slovo proměňující, uzdravující, nově tvořící. Slovo, které tu bylo už na počátku u Boha, skrze které byl povolán z nicoty svět. Slovo, které vstupovalo do dějin Božího lidu a řídilo jeho cesty. Slovo, na jehož povel se řídí hory, moře i hvězdy na nebi.

백부장의 말은 사실 군사적 배경에 근거한 일종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거의 하늘과 지옥 군대의 사령관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실 때 악령들이 공포에 질려 떠나갔습니다. 군사적 배경에 근거한 비유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백부장의 투박한 비유 뒤에는 사실 엄청난 진실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고, 효과가 나타나며, 변화시키고, 치유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으로 인해 이 세상이 없는 데서 있는 것처럼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 들어오셔서 그들의 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씀의 명령으로 산들과 바다와 하늘에 있는 별들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To podobenství má ještě jednu rovinu, kterou možná setník sám ani nedomyslel. Nejvyšším velitelem římských ozbrojených sil je císař. Také on vydává rozkazy na dálku. Někdy na dost velikou dálku, protože například zŘíma do Palestiny je to mnoho dní cesty. A přece i tam císařova vůle platí beze změny, také tam, vcizině, ho musejí všichni poslouchat, i když se s ním třeba nikdy nesetkali a ani nesetkají. Včetně setníka z Kafarnaum. Není také v tom pozoruhodně podobný Ježíši? Ježíšův nebeský Otec je také daleko, není viditelný, a přece jeho vůle platí. Ježíš se jí plně podřizuje, jde cestou poslušnosti – která je o to těžší, že je cestou daleko od Božího trůnu, daleko od Boží slávy, kdesi v nehostinné, temné cizině lidského světa.

이 비유에는 사실 백부장도 생각지 못 한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로마군대의 최고 사령관은 로마황제입니다. 로마황제 또한 멀리서 명령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로마에서 팔레스타인까지는 여러 날이 걸리는 꽤 먼 거리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도 로마황제의 뜻은 변함없이 적용됩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다른 식민지에서도 로마황제를 만난적 없고 지금도 만나고 있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로마황제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는 가버나움의 백부장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명령구조가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 않는지요?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계셔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셨고,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래서 황량하고 어두운 이방 땅, 이 세상을 향한 순종의 좁은 길을 가셨습니다.

Ještě důležitější než toto podobenství je ale nakonec postoj toho, kdo je vyslovil. Setník nejen vystihl cosi podstatného o Ježíši, ale hlavně se na něj ve své nouzi plně spolehl. Pohan přichází kJežíši svírou – zahalenou do trochu svérázného hávu, s vírou, která se neorientuje v teologických záležitostech. Ale on nepřišel za Ježíšem složit konfirmační zkoušku. Přišel s bolestí, která mu ležela na srdci. A s vírou, která nehledá vlastní prospěch, ale pomoc druhému, i když je to pouhý otrok. S vírou pokornou i odvážnou.

그러나 이 비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을 걸어온 사람의 태도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해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이방인이 이색적인 망토같은 옷을 입고, 신학적인 문제에 촛점이 맞춰져 있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입교교육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그의 유익을 구하고자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하인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용감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Setník rozpoznal, že Boží mocné slovo nám v Ježíši přichází na pomoc. Aniž to tušil, postavil se se svou vírou vedle jiných velikých svědků víry, Abrahama, Izáka a Jákoba. Takové víře se podivil i Ježíš – proč je tak těžko knalezení mezi vyvoleným lidem, mezi těmi, které Bůh doprovázel a vedl? Ta víra je vzorem i pro nás. Nemusíme Bohu vždy a ve všem rozumět. Žádná naše představa ani žádná teologie nemůže Boha vystihnout. To ale ani není potřeba. Stačí se pokorně a přece odvážně spolehnout, že Bůh to snámi myslí dobře. I když ho nevidíme, i když je daleko a někdy nám připadá být až příliš daleko – jeho slovo je blízko. A když zazní v našich životech, přichází uzdravení. Amen.

백부장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믿음을 놀라와 하셨습니다. 왜 이런 믿음을 선민들에게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듭니까? 이 믿음은 우리에게도 본이 됩니다. 우리는 늘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어떤 상상력도, 우리의 어떤 신학도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겸손하게 용감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선한 뜻을 갖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지만, 비록 그 분이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때로 그 분이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의 말씀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울려 퍼질 때, 우리의 삶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