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음’의 의미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그는 회당장, 그러니까 유대인 회당의 대표격 인물이니, 나이도 많고, 사회적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이 나그네 청년 예수 앞에 엎드린 것일까? 그의 어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어떤 아비가 자식이 죽게 됐는데 물불을 가리겠습니까? 아마 의사들을 불러 치료도 다 받아본 뒤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안 돼서, 급기야 예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길이었을 겁니다. 그의 인생에 찾아온 이 ‘할 수 없음’의 순간, 그 때가 되니 다른 이들이 나를 어찌 볼까는 더이상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그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며, 가장 겸손한 자세로 그는 간청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언젠가 이어령 선생이 기독교 신자가 된 사연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는 병든 딸이 그 힘든 시간을 신앙으로 이겨내며 마침내 치유에 이르는 것을 보고,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요.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네가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주겠니…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이 ‘할 수 없음’의 순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스스로 생존하거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하나님께 지음받은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뚜렷이 인식하는 기회,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내 시선을 고정할 수 있는 기회, 우리의 존재와 삶이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고, 그 안에서 새로 빚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 아닐까요?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17:24—28)

 

우리는 누구입니까? 다른 동물들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 나는 누구입니까? 다른 누군가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 내가 가진 능력, 내가 이룬 성취를 가지고 ‘나’를 규정하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자신을 진정 정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지금 우리 모습의 대부분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 아니고, 우리 인생? 아주 일부만이 우리가 의도하여 행한 일의 결과이고, 사실 대부분은 우리에게 발생한 일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하나의 자아로서 행동하기 전에, 나는 하나의 자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줄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우린 이미 ‘받은 자’이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고, 또 때로는 수동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 존재는 사실 보다 근본적인 수동성(Passivity)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받아 지금 여기 존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지금 여기서 살아갑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나의 ‘할 수 없음’을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이 진실에 직면하며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기, 자신의 ‘할 수 없음’과 마주하고, 마침내 예수님께 나아온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시는 길에, 한 여인이 조용히 그 무리 사이에 끼어 뒤로 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댑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 여러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며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세가 악화된 상황에서, 어디선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리 행동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녀의 이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녀 자신에게서 발원한 것일까? 그녀의 그 절박함에서 기원한 것일까? 모든 절박한 사람이 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요. 믿음은 한 사람 안에서 발원하는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현 상황을 바꿀 만한 인간 안에 어떤 능력(capacity)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뜻 안에서 얼마든 일어날 수 있는 미지의 가능성(possibility)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