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음’의 의미

예수님의 삶과 사역 속에 나타나는 이 근본적인 수동성(Passivity),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들로서 나름 좋은 뜻으로 한다고 하는 일들, 그 일들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의 근거과 비전은 무엇입니까? 내 능력의 최대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가능성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오해하며 좋아하는 말씀이죠.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신다, 이 말씀이 그런 뜻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이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나를 어떤 상황에 처하게 하시든, 거기서 내가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능히 자족하며 감당하리라는 고백이지요. ‘믿는다’는 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 내 결핍과 욕망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서 시작하는 것, ‘나의 할 수 있음’이 아닌 ‘하나님의 할 수 있음’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과 아직 대화하고 계실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 소식을 전합니다.그의 딸이 그 사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야이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예수님과 그 여인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왜 하필 그때 저 사람이 끼어들어서… 우리도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저 사람만 내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럼 결과는 달라졌을 텐데… 내 삶이 이렇게 불행해지진 않았을 텐데…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제정신이 아니었을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아직 끝난 게 아니란 말인가? …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더? 다른 사람들은 다 끝났다 생각했고, 이제 모든 게 부질없다 여겼고, 그럼에도 다 늦게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비웃었지만, 아마 야이로만은 아직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벌어진 놀라운 사건…

“소녀야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며 일으키시니, 소녀가 곧 일어나 걷게 됩니다. 누가 이 일을 예상했을까? 누가 이 일을 기대했을까? 사실 이건 야이로가 처음에 기대했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일, 그가 불행이라 생각했던 앞의 모든 상황들을 삼켜버리며,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할 수 없음’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셨던 하나님은 이 아무도 ‘할 수 없음’의 더 심각한 상황 속으로 그를 몰아넣으시고는, 그를 다시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이끌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결핍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를 욕망하게 하지만, 우리 안에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기대하고, 심지어 기도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습니까?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는 것 같고, 이제 더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의 믿음이 다시 더 온전히 하나님을 향할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계속 신뢰하며 따라갈 때, 구원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그분의 때에 임하고, 그 길에서 우리는 더 온전한 모습으로 새로 빚어질 줄 믿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는 한 목사님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부모님 두 분이 다 시각장애인이시고,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껌팔이도 한 적이 있었다 합니다. 그래도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셨다 합니다. 그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커져 신학공부를 그만두려 했는데, 여러가지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결국 목사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했습니다. 하지만 얘길 들어보니 그 이후로도 그분 인생엔 고난이 많았습니다. 딸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 아이를 돌보기 위해 많은 애를 써야 합니다. 얼마 전엔 어이없게도 아들이 개에 물려서,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꽤 담담하게 하시고, 때로는 유머를 곁들여 하십니다. 그래도 하나님 주신 은혜가 더 많다면서, 요즘엔 정말 감사하며 산다고 하였습니다. 얘기를 다 듣고, 정말 궁금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 많은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 주신 은혜와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왜 내 인생엔 다른 사람들보다 이렇게 고난이 많을까,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든 적은 없습니까?

그러자 그분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사실 내가 하나님께 어떤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인가를 생각하면, 이제껏 내가 하나님께 받아온 대접은 불평할 것이 못된다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면 그리스도인이 지금처럼 편하게 사는 시절이 없습니다… 아마 나보다 고난을 적게 겪으며 사는 분들도 저마다 힘들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아닐까요? 장애를 가진 딸아이 때문에 속상해서, “하나님 이 아이 왜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어요? 안 고쳐 주실 거에요?”… 하나님께 투정부리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 기도가 바뀌더라구요. “하나님 이 아이 아시죠? 그러면 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린 변함없이 하나님의 자녀다… 문득 욥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맞게 되는 ‘할 수 없음’의 순간, 그것은 우리를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내 능력의 최대치가 아닌,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보게 하고, 마침내 우리가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며 인내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