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손이 함께한 사람들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21일)
  • 행11:19-30
  • 설교자: 이종실

030921 (삼위일체 열네번째 주일)
본문: 행 11:19-30
제목: 주의 손이 함께한 사람들
<본문>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설교>
지난 주에 유대교 안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발생한 기독교회가 유대문화와 전통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직접 지시하고  천사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할이 개입됩니다.
교회는 이처럼 인간들이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이끌리고 때로는 사건 하나 하나를 연결시키며 자연스럽게 섬세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숨은 손에 의해 발전해갑니다.

늘 말씀은 하나님의 숨은 손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 지 그리고 그 교회 안에 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특별히 어떤 교인들을
어떻게 선택하시고 이끌어가시는 지 오늘 그 여정을 세밀히 함께 살펴볼 때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사도행전에 대한 상식 한가지를 질문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달리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방선교의 베이스가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로 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으로 넓게 퍼져갔습니다.
어떻게 이들 놀라운 일들이 일었났는지 오늘 본문은 전해주고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라는 19절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일>은 스테반이 돌에 맞아죽는 첫번째 순교자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가 어떤 계명을 어겼기에 돌로 맞아 죽는 사형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이유로 죽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불행한 사건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박해가 그때부터 일어났습니다.
박해로 많은 유대 기독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유대교 안에서 한 분파를 이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우려한 정통 유대교의 종교 탄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안디옥교회에 관해 글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합니다.
다시말씀드려 안디옥교회의 탄생 근거를 스데반의 순교에서 누가는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기독교회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과 정통성이 유대교의 잘못된 신앙의 극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석이후에 한국의 정치정당인 민주당이 두쪽이 났습니다.
하나는 <민주당 사수파>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신당>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민주당의 정통성이 서로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민주당 사수파는 민주당의 역사성을 근거로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 통합신당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따랐던 민주당의 정신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민주당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전직 현직 대통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깨닫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기독교회는 어느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제한 시키는 딱딱한 껍질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껍질을 깨고 벗겨 기독교 교회를 세워가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기독교회의 출발은 이처럼 잘못된 신앙의 오류에 빠진 유대교를 밑거름으로 삼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교의 모순과 오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있습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집단임을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의 장면을 통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누가의 고발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54
그들은(*의회에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 이 말(*스데반의 설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서,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표준새번역 7:54-60)

이처럼 기독교회는 신앙의 독선과 오류와 모순을 극복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 반성이 없는 기독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과 회개 없이 자기교리와 가르침만을 주장하는 기독교회는 자신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꼬빌리시의 한인 기독교인들은 자기주장에 앞서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총의 감격을 체험하고 그 눈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최악의 사건을 선택하십니다.
당시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사용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해외에서 험악한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존심 상하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꺽는 그 많은 험악한 일을 하나님이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사용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경험들이 가져온 상실감과 좌절감과 수치심과 패배감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의 한 부분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흩어진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의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며 운명의 파도가 언제나 그들을 파멸시키려고 넘실거렸습니다.
고스란히 어려움을 겪어야지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처지들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채 스스로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것 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강풍으로 삼아 친히 돛단배가 되어 우리를 태우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흩어진자들>이 온갖 고생 끝에 드디어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한 지역 도시였습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녹아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죄악이 크게 입을 벌리고 유혹하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최악의 장소를 이방인 선교기지로 선택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 최악이 하나님의 눈에 최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신자는 쉽게 판단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20절 본문을 보시면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구브로) 사람과 구레네(그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헬라)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과 9장에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이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0절의 <헬라 사람>은 분명히 유대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이방인들입니다.
10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예배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골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워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완전히 성경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완전한 이방인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돌아가서 다시 19절 말씀을 보시기바랍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19)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왜 다른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이방인에 대한 깊은 편견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만약 성령이 강권적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방문했을까요?
한번도 부정한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한번도 이방인들하고 같이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 조차도 구원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체코교회를 방문하면서 어떻게 한국인들은 처음에 기독교 용어들의 개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체코 교인들로부터 자주 질문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배경 없이 메시야와 유일신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어떻게 구약의 구자도 모르는 완전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인가요?
그들이 설득력이 뛰어났기 때문인가요?
헬라 사상을 잘 이해해서 짧은 시간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기 때문인가요?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물론 안디옥으로 피난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다른 점을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친절한 사랑도 베풀고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는 우리 꼬빌리시 한인 교우들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선교는 우리들의 재주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서 교회일 하겠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하겠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돈 많이 벌게 되면 아까워서 못하게 됩니다.
재능을 더 갈고 닦아서 하나님 일 하겠다고 생각하는 분 계시면 오산입니다.
재능이 뛰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조그마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가 누구이든 재능이 있든 없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주의 손에 붙잡힌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조그마한 봉사나 교회의 선교를 내가 한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질이 없어 재능이 없어 일을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주어 그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안디옥 교회를 세워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열었던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오늘 본문은 <구브로(키프러스)와 구레네(그레네) (출신) 몇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출신지역만 나오지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평범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을 교회의 선교를 위해 손을 내밀어 붙잡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박해라는 신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그리고 박해를 피해서 간 곳이 죄악이 가장 심한 장소에서 그것도 익명의 신자를 선택해서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 기지 안디옥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선교는 최선의 조건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조건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내가 조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선교를 생각하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입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동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는 유대인들과 함께 찬양하고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방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들 두 그룹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거기서 본 것은 예루살렘의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교회였을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습관은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23절에서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했습니다.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이렇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과 형식을 뛰어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해서,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가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히 달라보이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그의 영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체코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쉽지않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다른 교회의 전통 안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목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신앙 전통에 매여 있는 사람이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는 신앙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가 쉽지않습니다.
큰 교회의 대형 성가단의 웅장한 음악과 수 많은 인파가 운집한 교회당에서 떠나갈 듯 부르는 찬양과 기도가 꽉 찬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왔을 때 이곳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가 쉽지않을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에 같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럽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해 유럽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선교사들 목회자들 평신도들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체코교회 안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꼬빌리시 한인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교만에 빠지지 않는 우리 교인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전통과 습관 모두가 다른 교회였지만 그곳에서도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사람 그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안디옥 교회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24) 로 평가하고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사도가 아닌 바나바를 선택해서 보낸 이유를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섬기고 받드는 삶의 스타일이 일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후에 바울이된 사울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갔을 무렵에 사울은 다소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 일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 사울이 왜 다소에 있었는지 그 상황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9장에 상세히 기술된 내용입니다. 다메섹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했던 그 상황입니다.
다메섹(다마스쿠스)에서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 후부터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자신의 추종자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많이 이야기 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테러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타인에게 설득을 시켜보지 못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옛말에 열 배 부자는 사람의 시샘을 받지만 백 배 부자는 사람을 부릴 수 있고 천 배 부자는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학문과 학벌과 출신가문과 사회적 지위는 사람들이 그를 숭배할 만한 압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득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자 아마 사울은 충격과 좌절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천하의 사울이 도망쳤습니다.
자신의 고향 도시 다소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몇 년을 보냅니다.
성경은 사울이 다소에서 보낸 기간이 얼마였는지 말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사울의 행적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사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 설교나 전도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비참하게 도망친 이후 수년간 사울은 다소에서 잠적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 일부는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좌절은 좌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가 실제로 안디옥에서 시작할 때를 위해 그를 준비하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 둘은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리고 일년동안 그들은 이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후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사울이 이처럼 다시 교회의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는 바나바에 의해서 였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그의 눈은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사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영웅이 되려는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섬기고 받드는 숨어 봉사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성장해 갑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참된 교회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는 멀리 있지않습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신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설립과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인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이 붙잡고 싶은 신자가 누구인지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겸손한 영을 가지십시다.
어디에서나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촉촉한 사랑의 눈빛을 지닌 인자하고 착한 신자들이 되십시다.
받들고 섬기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알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노력하십시다.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을 손에 잡고 체코교회의 선교를 위해 일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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