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30일)
  • 요1:19-28
  • 설교자: 이종실

031130(대강절 첫째주일)
본문: 요 1:19-28
제목: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본문>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설교>
금년에도 성탄의 계절이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성탄의 계절을 교회력으로 advent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adventus에서 왔습니다.
Adventus는 도착, 강림 이란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성탄절 네 주 전부터 시작되는 advent를 우리는 대강절 또는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advent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두 가지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탄의 계절이 갈수록 상업주의에 영향을 받아 그 분위기가 축제와 소비와 향락으로 흘러가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탄의
계절은 시험장에서 학창시절에 공부한 모든 역량을 단 한번으로 평가 받는 대학입학시험 문제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매우 엄정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기다릴 것인가?
이 질문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듯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공회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통하여 요한에게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 질문이 “네가 누구냐?”입니다.
네가 과연 그리스도냐?는 매우 단정적인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 성경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어 말하다”란 말은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숨기지 아니하다”란 말은 “거절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에 대한 완벽하고 진실한 고백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외국인 눈에 비치는 한국인의 모습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일등에 대한 애착이 많은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외국기자는 “한국에는 일등은 많고 이등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외국인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모두 1등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육이란 모두 1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게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량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할 때 타인을 인정할 수 있어 비로소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명제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WEC 이라는 유수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 훈련을 하는 데 그때 가장 강조하는 훈련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는 목수의 가문인 반면 요한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던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존재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꼬?”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관심은 듣고 잊어버리는 매일 일어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 지지않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누가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수태소식을 들었듯이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하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남편 사가랴에게 요한의 수태를 알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요한이 조그만 긍정했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로 인정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꼭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면 모르냐” “꼭 내입으로 언급해야 너희가 알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 했어도 그는 최소한 한 종파를 이루어 지도자로 군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내어 숨기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그 겸손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일꾼삼으십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하여 적합한자가 아닙니다.” – 자기 부정을 했을 때 하나님은 말잘하는 아론을 동반하여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 보냈습니다.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합니다.” –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깨끗게 하시고 그를 말씀 전하는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했을때 예수께서는 그를 택하여 “사람을 취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격언가운데 “네 혀에게 ‘나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겸손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철저히 그리스도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다음은 21절 과 22절에 나오는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사냐?”
이에대해 요한은 “나는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요한에게 질문자는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역시 계속해서 처음에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음에는 “나는 아니라” 마지막으로 “아니라” 부정을 하고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부정에 대해 그들은 요한 스스로 자기 증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 하느냐?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을 세 번 부정한 후에 한 자기 긍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기능적인 자기 자신 이었습니다.
자기 인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PR하는 것이 아니라 부속품 같은 자기의 존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자신을 한 인격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구인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이 소리라는 것은 요한의 겸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리를 세상에 아름답게 내는 기능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인간-세상은 조화로왔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자신을 알고 자기 기능을 알고 자기 자신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는 겸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가인역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하갈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바른 답을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질문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잘 알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리로 철저히 자기를 그리스도의 뒤로 감춘  세례요한의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기쁨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에 크게 깨닫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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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1년 12월 08일)
  • 요 1:19-28
  • 설교자: 이종실

01/12/08 (대강절 두번째 주일)
본문: 요한복음 1: 19-28
제목: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공동기도>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례 요한 처럼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이 메시야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설교>

가는 아름다운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 1: 5-6)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 사람들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으로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징이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은 재앙이었으며 수태하지 못하는 여자와 후손이 없는 남자는 실패한 삶, 저주 받은
삶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삶은 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입니다.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던 레아가 그의 아들을 낳았을
때 수태를 하지못하던 야곱의 여인 라헬의 고통입니다. 마침내 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이 나의 수치를 씻으셨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라헬의 이 고백 속에서 단지 아이를 갖지
못한 이유 때문에 당했을 억울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을 겪은 여인들의 한들이
천지를 진동할 때 그 여인들의 태 속에 곧 다가올 새로운 시대가 요동을 치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자녀 없는 부모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뿐 아니라 억울하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의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음서 가운데 특히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요한의 이야기와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하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남편 사가랴에게 요한의 수태를 알렸고, 처녀 마리아에게는 직접 예수탄생을 알립니다. 늙어 수태를 한 친척 엘리사벳을 보고 천사의
처녀 수태 예고를 받아들인 마리아가 어느날 해산이 가까운 엘리자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가 찬양을 하고 사가랴도 찬양을 합니다.
비록 할례를 받는 난지 8일이 지날 때 까지 아들들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탄생 전에 이미 요한과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많은 병행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병행되는 이야기들이 요한과 예수가 누가
그리스도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되는 이야기 요한을 통해서 더 분명히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그리스도의 탄생 불과 몇 달 앞에 태어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기다림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공회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통하여 요한에게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 질문이 “네가 누구냐?”입니다. 네가 과연 그리스도냐?는 매우 단정적인 질문입니다.


질문에 대해 성경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어 말하다”란 말은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숨기지 아니하다”란 말은 “거절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에 대한 완벽하고 진실한 고백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외국인 눈에 비치는 한국인의 모습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일등에 대한 애착이 많은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외국기자는 “한국에는 일등은 많고 이등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외국인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모두 1등을 만들려고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육이란 모두 1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게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것입니다. 자신의 역량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할 때 타인을 인정할 수 있어 비로소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됩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명제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며칠전 여성도 성경 공부반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WEC 이라는 유수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가 선교사를 파송하기전 훈련을 하는 데 그때 가장 강조하는 훈련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 보다 6개월 형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목수의 가문인 반면 요한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꼬?”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관심은 듣고 잊어버리는 매일 일어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 지지않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요한이 조그만 긍정했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로 인정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꼭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면 모르냐” “꼭 내입으로 언급해야 너희가 알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 했어도 그는 최소한 한 종파를 이루어 지도자로 군림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내어
숨기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잘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자기를 긍정하게 하는
도구로 쓰십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그 겸손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일꾼삼으십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하여 적합한자가 아닙니다.” – 자기 부정을 했을 때 하나님은 말잘하는 아론을 동반하여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 보냈습니다.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합니다.” –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깨끗게 하시고 그를 말씀 전하는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했을때 예수께서는 그를 택하여 “사람을 취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대인의 격언가운데 “네 혀에게 ‘나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겸손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철저히 그리스도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다음은 21절 과 22절에 나오는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사냐?” 이에대해 요한은 “나는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요한에게 질문자는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역시 계속해서 처음에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음에는 “나는 아니라” 마지막으로 “아니라” 부정을 하고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부정에 대해 그들은 요한 스스로 자기 증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 하느냐? 

“나
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을 세번 부정한 후에 한 자기 긍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기능적인 자기 자신 이었습니다. 자기 인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PR하는
것이 아니라 부속품 같은 자기의 존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자신을 한 인격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구인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이 소리라는 것은 요한의 겸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이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리를 세상에 아름답게 내는 기능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인간-세상은 조화로왔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자신을 알고 자기 기능을 알고 자기 자신에 충실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는 겸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가인역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하갈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바른 답을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질문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기 자신을 잘 알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리로 철저히 자기를 그리스도의 뒤로 감춘  세례요한의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기쁨이 이 대강절에 여러분의 생애를 지배하시길 빕니다.

<설교후 기도>

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단지 그리스도의 소리로 자신을 규정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리던 요한 처럼 우리들의 삶이 오실 메시야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죽고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놀라운 역사 일어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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