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프라하 성 네온사인 하트와 성탄의 별

<나눔터 제29호>

프라하 성 네온사인 하트와 성탄의 별

어두움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별처럼 스산하고 우울하고 어두운 길고 긴 겨울 밤에 프라하 성의 하트모양의 빨간 네온사인이 밝게 빛난다. 이 네온사인은 하벨 대통령이 편지 말미에 상징적으로 즐겨 쓰는 하트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대단한 체코 예술가가 하벨의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공산독재와 맞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그의 편지를 받고 지지한 서방 정치 지도자들에게 감사와 작별인사를 올리는 표시로 작년 11월 프라하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에 맞추어 그 자태를 드러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하벨의 모습이 나토회의로 모여든 서방 지도자들의 가슴에 프라하 성의 아름다운 야경과 더불어 빨간 네온사인으로 다시 확인되고 각인되었으리라.

고풍스러운 성과 현대식 네온사인, 자신을 죽이며 성의 고색(古色)을 은은히 밤하늘에 비쳐주는 조명과 주위를 더욱 어둡게 만들며 천박한 빨간색을 스스로 뽐내는 네온사인 그것도 선정적인 하트모양의… 무언가 부조화를 느끼지만 대예술가의 이름에 주눅이든 필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감히 그 작품에 대해 평을 어찌 할 수 있으리요. 벌거벗은 임금의 옷도 아름답고, 이름있는 디자이너가 벌거벗겨놓은 모델의 시원스레 쑥 빠진 몸매를 긴장하여 침을 삼키며 훔쳐 보면서 그 의상을 감상하는 척 무식과 말초적인 인간성을 감출 뿐이다.

그런데 이제 예술 세계의 눈을 열어가는 예술학교 학생들이 어느날 사다리를 타고 성 꼭대기로 올라가 하트의 절반을 없애 그것을 ? (물음표)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프라하 성과 빨간 네온사인의 부조화에 대한 무식한 필자의 느낌에 확신이 생겼다. 선동적인 학생들로부터 용기를 얻은 것은 필자 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성 아래 강변 식당들이 카드놀이에 나오는 다이아몬드, 스페이드, 크로버 모양의 네온사인을 제각각 지붕꼭대기에 매달아 갑자기 프라하 성 일대의 야경을 밤 유흥가로 변화시켜버렸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이 선동적인 학생들과 심술궂은 장사꾼들로 조롱을 당하는 듯 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해프닝(?)은 체코 공화국이 하벨이 세운 평화로운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해 아래 아무것도 감출 수 없듯이 역사 앞에서 모든 진실이 드러난 것인가? 하벨이 전생애를 걸고 투쟁한 평화와 민주 민주주의의 상징인 빨간 네온사인이 꺼지는 날, 즉 그의 대통령 집무 마지막날인 1월 31일(2월 2일 퇴임)에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하벨의 진실에 의문이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이날 하벨은 다른 유럽 7개국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서한에 서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 4개국에서 모인 그린피스 15명의 회원들은 하벨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투쟁의 상징 하트에 “War ?” 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하벨에게 “당신은 전쟁을 사랑한단 말인가?” 질문을 한 것이다. 그들은 공산독재와 맞서 생명을 걸고 비폭력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하벨과 이라크 전쟁 지지 서한에 서명한 하벨 사이에서 “당혹스러움과 배신감”을 느꼈다.

대량학살을 막기위해 이라크가 개발한 잔인한 생물 화학 무기를 강제로 무장해제 시켜야 된다는 미국의 입장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운명 공동체 유럽이 분열되고있다. 전쟁 없이 국제적인 협의와 외교적인 압력으로 재난을 피하는 노력은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이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미국은 더 큰 책임이 있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조기종결 한다는 명분으로 단지 두개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에서 10만 여명, 나가사키에서 8만 여명의 사상자를 낸 끔찍한 재난의 경험을 인류에게 안겨준 나라가 바로 미국이 아닌가? 온 인류가 전쟁 없이 대량살상무기를 지구에서 추방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얼마 전에 서양의 명절중의 명절인 성탄절이 지나갔다. 평화와 기쁨의 상징인 성탄 별은 헤롯 왕의 성 꼭대기가 아니라 가난한 예수가 누운 마구간 지붕 위에서 빛났다. 헤롯 왕의 궁전에서는 대량살상무기의 위협과 전쟁의 공포로 고통 받는 이들이 결국 자기 자신들임을 모른다. 오히려 그 성(城)에서는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대량학살 계획만이 있었을 뿐이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살며 생각하며] 나눔터 발간 세 돌의 만감

나눔터 발간 세 돌의 만감(萬感)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이렇게 석삼년을 참는 것이 옛날 우리네 며느리들의 미덕이었다. 옛 며느리들의 미덕은 요즈음엔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이며 비인간적이고 남성우위의 유산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제는 누구도 이것을 미덕(美德)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요즈음 며느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다. 아니,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핀잔을 받을 것이다. 당장 “안 살고 말지!” 라는 대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나올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옛날 우리네 며느리들의 미덕을 예찬하며 그 덕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들의 전통으로 이어가자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요즈음 며느리들도 석 삼년 죽어 지내며 시집살이 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석 삼년 속에 담겨있는 인내의 의미와 그 지혜를 오늘에 되살려내자는 뜻이다. 출가하면 외인이 되는 시대에 연약하고 어린 여인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집안에서 그 식구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이 아닌 필자는 타 문화의 해외생활의 경험을 반추하면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여린 고사리 같은 우리들의 옛 며느리들이 자신의 새로운 사회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했던 피 말리는 노력과 그 지혜가 언어도 문화도 토양도 전혀 다른 이 외국에서 뿌리 내리려는 우리들의 삶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억지일까?

돈을 버는 일과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다른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광산촌의 광부 사택에서 자랐다. 하늘도, 땅도, 물도 검은 색깔의 세상에 정을 갖고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이웃을 보지 못했다. 막장의 검은 흙 때문에 검은 대륙의 판자촌 사택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꿈은 한밑천 잡아 검은 대륙을 탈출하는 것이다. 검은 대륙은 이미 그들에게 사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들이 버린 그 땅으로부터 결국 사람들은 버림을 받게 된다.

돈 버는 일이 모두가 아니다. 사회에서 뿌리 없는 삶은 공허하고 갈수록 갈증이 난다.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부평초 인생이 되고 만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힘겨운 일들에 대해 주관과 가치관이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한다. 그리고 그것을 앞 다투어 무 무용담처럼 허장성세 자랑으로 늘어놓는다. 돈과 권력과 이익의 냄새에 따라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새 떼처럼 살아간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다. 다투면서도 함께 있어야 한다. 불안은 불신의 근원이 된다. 불안한 미래가 갑자기 어느날 현실로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뿌리 없는 삶에게 이미 예정된 불안이다. 불안의 그림자가 결국 모든 것을 뒤 덮는다.

나눔터는 체코의 한인사회가 체코사회에 뿌리내리기를 소망하는 조그마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형편없이 미약하다. 이제 만 세 돌이다. 말없이 봉사하는 이들과 독자의 관심이 없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일이다. 감사를 드리며 석 삼년의 옛 며느리들의 미덕의 의미와 지혜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노력할 것을 나눔터 발간 만 세 돌을 맞아 다시 다짐해 본다.

목사 이 종 실(나눔터 발간인)

자기 비움의 선교

21세기 한국선교의 나아갈 길 – 자기 비움의 선교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이 명제를 교회가 얼마나 신실하게 따르고 있는가? 아무리 전혀 다른 시대가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을 선교하는 교회가 자기를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선교에 대한 교회의 신실성을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그 잣대가 무엇인가? 선교사의 파송 숫자? 설립 교회 숫자? 세례교인 숫자? 선진화된 교회선교 정책? 선교사 복지의 선진화 정도? 만약 이러한 요인들이 잣대가 된다면 지금 선교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우리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선교 정책과 선교사 복지를 갖춘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서구 개신 교회와 그 선교단체의 선교의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구체적인 근거와 통계를 가지고 기독교의 소수 종파로의 전락에 대한 서구 선교 학자들의 예측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직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긍심을 가질 만 하다. 그러나 자긍심과 교만은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경계를 넘어갔다. 십자가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선교를 수행 하는 교회에게 무슨 의미인가? 자기를 버림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림이 바로 선교에 대한 교회의 신실성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버림은 하나님의 파송을 위탁 받아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와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 사이에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한다는 신뢰를 형성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 해서 파송한 교회와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든다는 연대의식과 신뢰보다 더 근본 되는 선교정책과 지원은 없다. 총회의 선교 정책과 행정의 선진화 노력도 이 연대와 신뢰 형성을 목표로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가 깊어질수록 선교를 위한 연대의식과 신뢰가 더 폭 넓고 깊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선교사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연결들이 완전히 단절된 생면부지의 오지에 파송된 선교사는 말하는 법과 생활 방법을 유치원 학생처럼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야 한다. 이 기간은 마치 수족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뇌의 활동만 정상적인 불구자로 자기 자신이 느껴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노력 없이 정상적인 성격과 인격을 갖추어가기가 쉽지않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 가야 한다. 특별히 선교활동의 분야가 더욱 그렇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절박함과 기적들로 꽉 찬 일터와 현장은 선교사에게 용기와 희망이자 동시에 유혹이기도 하다. 자기 자랑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선교 현장 보고는 최대한 절제하고, 대신 부족하게 느낄 수도 있는 현지 교회와 신학이 자신의 선교현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이것을 한국교회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심의 그 자유로 자신의 동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한국교회의 21세기 선교를 꿈면서…
<장로교 여성신문 기고>

[살며 생각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를 풀어 설명하면 “처지를 바꾸어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최근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체코 일간지들의 보도를 접하면서 떠오른 말이다.

9월 17일 북일 정상들이 처음 만났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 민간인 납치문제에 대해 “참으로 불행한 일로서 솔직히 사과”를 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일제 식민지 역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양 국가 개선을 위한 정상들의 첫 만남의 의미와 그 미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민간인 납치 사망문제로 일본열도가 들끓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같은 날 체코 일간지를 통해 중부 유럽의 조그마한 나라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경제신문만 양 국 정상회담을 “일본 총리 KLDR 첫 방문”의 제목으로 비교적 객관적인 보도를 한 반면 인민일보, 드네스 등은 각 각 “KLDR 일본 민간인 납치 인정하다.” “김정일 인정하다: 우리가 일본인들을 납치하였다”의 제목으로 일본언론의 시각을 복사하여 전해주었다.

일방적인 감정을 보도하는 이 기사들을 접하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일본 시민들로 무고하게 가족을 잃은 자들의 아픔이 있게 한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20세기의 반 문명과 그 야만성을 드러냈던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열도 안에서는 일개 사병에 불과하지만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천황의 군인으로서 무한대적인 우월의식으로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그 때 그 역사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종군 위안부로 아름다운 인생의 꿈을 접고 질기디 질긴 명줄을 끊지 못해 여지껏 생존해 있는 우리 할머니들의 눈물이 떠오르면서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체코 일간지들의 시각에 대한 분노였다.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인들의 입장을 전하는 체코 일간지의 기자들의 시각은 일본 언론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다른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우파 체코 언론들의 말초 감각적인 혐오감을 그 배경으로 하고있다.

작은 나라 체코는 언제나 주위의 강대국들의 흥정거리였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왔다. 체코 언론들이 그 불운의 역사를 기억하며 북한과 일본의 정상회담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생생한 가까운 이데올로기 경험이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의 대상으로서 약탈과 강탈을 당한 옛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수덴 독일인들의 초법적이고 폭력적인 베네쉬 독트린 철폐와 재산환수 요구에 대해 히틀러의 야만성을 회상 시킨 체코 언론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니면 어느새 체코언론들은 테러리즘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감추어 보려는 세태에 물들어버린 것인가?
<나눔터 2002년 10월호 기고>

아웃사이더 <해리포터>

나눔터 제 23호 2002년 4월호

<살며 생각하며>

아웃사이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두 편의 외국영화가 체코 극장가를 강타한 유래 없는 역사를 이루었다. 영화배급소의 통계에 의하면 개봉 4일만에 전국 160개 극장에서 93 605명이 관람하고 950만 꼬룬의 입장료를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반지의 제왕>은 첫 주에 관람객 12만명 돌파 1,300만 꼬룬 입장료 수입을 차지 <해리 포터> 를 앞질렀다. 이 흥행은 나의 피부에 와 닿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표를 예매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한편의 영화를 보기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을 만큼 영화광이 아닌 필자는 자연히 상대적으로 손 쉽게 볼 수 있었던 <해리 포터>로 눈을 돌렸다.

영화 <해리 포터>는 46개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1억1천만부 이상 팔린 조앤 K. 롤링의 소설 첫번째 이야기이다. 해리 포터라는 한 고아소년이 11살 생일에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 놀라운 마법 세계에서 짜릿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제작 때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소설 속의 환상과 마법의 세계를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 무려 1억 6천만 불이 투입되고 영국 런던 근교에 ‘호그와트 마법학교’ 세트장이 완벽하게 마련되고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술, 특수효과에 천문학적인 투자가 있었다고 한다.
영화는 영화자체로 감상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몇 가지 해리의 모티브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어느 사회에서나 아웃사이더 였다. 아웃사이더인 그의 이미지는 갸름한 얼굴과 가느다란 다리, 새까만 머리카락에 연한 초록 눈에 동그란 안경을 낀 해리 포터 역을 한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외모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유약하고 저항할 줄 모르는 그는 고아로 이모의 집에서 학대를 받으며 살고있지만 무엇인가 신비한 기운에 둘려 있는 느낌을 준다. 이모 가족의 학대는 해리를 절망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해리의 미래를 드러내 주고있다.

영화 속에 드러나는 해리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죽은 부모와 동일화 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효가 아니라 해리는 부모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를 이어 유명한 마법사로 탄생한 것도 그렇다. 그리고 해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꿈의 세계로 늘 도피한다. 강자는 자신의 의지에 기대지만 약자는 비전에 의지한다. 그리고 해리는 자신의 친구를 아웃사이더 가운데서 발견한다. 생선을 뼈와 살로 나눠 회 치듯 인생을 그렇게 나눌 수 없지만 해리와 같은 아웃사이더 인생들에게는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선과 악, 성공과 실패가 더 분명하게 구분된다. 약자들 앞에서 분장할 필요가 없는 강자들의 심리와 감추어진 발톱을 그들은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테러와 보복전쟁은 색깔만 다른 같은 폭력이며 보복전쟁은 사랑의 매가 아닌 것을 아웃사이더 인생들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약자들은 악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것과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호 협력과 연대 속에서 물러서지 않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약자들의 승리는 친구들의 승리, 협력과 연대의 승리이다.

4월!
부활의 계절에 아웃사이더 해리로부터 묵묵히 고난을 받고 부활의 승리를 노래하는 아웃사이더 예수와 역사 속의 그의 사람들이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목사 이 종 실(나눔터 발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