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망치 않는 기도

  • 한인 예배 (2004년 05월 16일)
  • 눅18:1-8
  • 설교자: 베네쉬

Text: Lk 18,1-8

형제 자매 여러분

       

여기 누구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기만을 위하고  거만하고 오만한 그런 재판관을 아직 만나 보지 못해 보신 분 계십니까? 

그 재판관은 자신의 원한을 풀지 못했던 불쌍한 과부가 끊임없이 그를 찾아 오는 데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마 2천년 전에도 그런 냉소적인 관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이해할 만 하며 아주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재판관을 비유로 들어 즉, 보다 더 쉽게 기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재판관에 비유됨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늘의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의 기도가 공허한 것이 아니며 귀머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들의 모든 기도들은 들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낙망 치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모임에서 집에서 성경공부 중에 수업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또는 저 문제에 대해서  최소한 열 번, 스무 번 이미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수 십 년 간을 모임들에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또 계속 똑같은 일 만 일어나고 전혀 변화가 없으며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선물들에 대해 기도 중에 감사 할 수 있고 위기의 순간들 속에서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으십니다.

유혹의 순간들에 의심의 순간들에.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아십니까! 다만 기도 덕택에 저는 저의 병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보십시요.  기도가
없었더라면 제 아들들은 아마 어느 곳에서 탕자들이 되었을 것 입니다….  다만 항상 기도하고 낙망 치 마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떤 곳에서 설명을 해야만 된다면, 당신들은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따르면 기도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도록 하기위한 끊임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우리와 이 세상이 처해있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도록 하는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은 애굽 노예생활로부터 하늘까지 상달 하였습니다.

사무엘 상 2장에 보면 이렇게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던 한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끈임 없는 간청을 재판관의 모습 을  통해 설명하십니다.

재판관, 그는 아주 불쌍한 여인이었던 과부, 아무것도 없는, 기댈만한 그 무엇도 없는, 설혹 어떤 도움을 받았을지라도 그 도움에  수수료나 감사함을 표시할 수 없는 이 과부에 대해 이 재판관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아무 것 도 없습니다.  다만 부르짖음과 간청이 있을 뿐입니다.

과부는 매일 재판관에게 갑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재판관은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과부는 재판관의 의지를 꺾고야 말았습니다.

거기에 과부가 재판관을 신뢰 했다 든가 재판관이 과부를 이해 했다 든가 하는 말은 없습니다.

또는 재판관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든가 의무감을 느꼈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 재판관은 말하였을 것입니다.  „과부가 나에게 평안을 주도록, 갑자기 나에게 들이 닥치거나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나의 사무실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간절하고 끈질긴 여인이 당신들의 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점에서 본이 됩니까?

기도 속에 무엇을 놓고 이렇게 끈질긴 싸움을 해야 됩니까?

과부는 요구하였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우리는 어디에 우리를 못살게 구는 원수들이 있는지 잘 압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꼭 밖에 있는 그 누구일 필요는 없습니다.  악한생각, 부족함, 배신, 죄책감, 슬픔 또는 질병이 우리의 원수 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더욱 괴롭힙니다.

이것을 없애고 싶지만 되지 않습니다.

변화를 원하지만 오지않습니다.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오래 전부터 이 외침은 교회의 외침이었습니다.

교회와 각 개인의 외침입니다.  –  “원한을 풀어 주소서“

어느 누구도 과부를 변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버려졌으며 심지어 위협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는 대적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가 감당치 못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믿음 없음으로 넘어지기 잘하며 얼마나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 걱정할 때가 많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숨어 버리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시는가“라는 생각이 우리 내면 속에 피어 오를 때가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무관심한 존재들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가 우리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온 힘을 다해 밤낮 부르짖다가도 낙망 하기 잘 한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병든 자연에 대해서, 우리의 정치나 세상의 다른 나라를 위해서 끈질긴 기도를  쉬지않고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 제목들 속에서 낙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 제목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홍보를 위한 특별한 행사를 위한 것에 해당 되어야 하는 것 처럼
생각되고 달리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아느냐 그렇지 않는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즉, 이미 기도 했는데 전혀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때 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만두지 마십시요.  낙망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가지는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이 거만한 재판관에게 왔던 과부를 기억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매일 반복해서 간청했던 과부의 요구에 대해 아마 불합리하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낙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관이 그의 의지를 굽히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비유를 마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기도에 대해서 의심이 들 때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시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람 중에 한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원치 않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속에서 낙망 할 때 기도를 의심하게 될 때 또 누가 그러함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 그 이름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만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끔 예수님의 말씀은 질문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는 늘 묻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신가?  큰 불행 중에 그리고 큰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의지할만한 분이신가?“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점에 대해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대들은 신실한가?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돌보시도록 기도하며 원하는가?  그대들은 신실한 종들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세례를 통해 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불편함과 불이익으로 인해 오히려 여기 계신 분들이 순종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실려는지요.

예수님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그의 주권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치 않고 끊임없이 기도 했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실 것인지요?

모든 어려움에 주님의 신실 하심으로 극복한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으시겠는지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예수님을 기다리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한 모임들과 교회가 이 땅에 있을 것인지요?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낙망치 않고 간청한 사람들이 이 땅에 일을 것인지요?

포기치 않고 꾸준히 끈질기게 우리와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한 사람들이 이 곳에 있을 것인지요?

우리는 ‚인자가 올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 9장 24절 말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

  • 연합 예배 (2004년 05월 02일)
  • 요10:22-30
  • 설교자: 드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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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22-30 /  (설교: 드로빅)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진짜 양을 치는 목자를 제 눈으로 딱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자락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노인이었습니다.

색 바랜 비옷을 입고있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이리 저리 다니면서 양들을 에게 무언가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의 하루의 모습을 길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떼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났었고 잠시 후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멍멍짓는 양몰이 개가 짓는 소리와 양들의 울음소리로 양떼들은 길을 안내 받습니다.

부유한 서방 문명의 사람에게 이것은 낯설은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장면은 매일 일어났던 일이며 이 장면으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첫번째 우리의 반응는 왜 양들인가?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아주 바보 같은 짐승 양에게 비교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빠르게 변하는 오늘날에 탄력성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현대 개신교 기독교인들은 아마 다른 짐승에 비교해야 되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입니다.

사자는 우렁찬 목소리, 힘이 있고 빠르고 날렵해서 스스로 먹이를 취합니다.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눈으로 보통 자연 속에서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떼를 지어 삽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중세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은 많은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 안에서 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목자의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목자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고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해방의 말씀입니다.

정복하려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더 빠른 템포에 적응하도록하는 채찍으로부터 인간 자신의 독재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인 것을 아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속에서 우리를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우리 인생의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있었습니다.

그 음성에 대한 응답이 오늘 자신의 자녀들이 세례받기 원하는 부모님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례를 원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이 목자의 음성에 우리는 모든 방법으로 응답을 합니다.

신자의 삶으로 이 음성을 분별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지도자의 음성이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의 음성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는 음성은 우리를 아는 선한 목자의 음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 음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각계 각층 모든 민족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과 양 무리들의 그림이 사용되고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내하도록 부르심을 듣고 선한 목자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는 동서남북에서 자신의 교회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두번째, 자신의 손에 있는 우리를 빼앗기지 않는 목자의 안전함입니다.

성경에서 손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능력의 비유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안정되고 견고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 불확신에서 오는 흔들림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님의 안정성과 견고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모든 인간을 수용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불완전한 사람도 받아들입니다.

이 본문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였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오클레스 황제시대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적들로 둘러쌓였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교회의 양들의 확신과 자기이해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유럽의 우리 기독교인들은 1, 2세기의 기독교의 전환의 시기와 같은 그러한 박해로 위협을 받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는 목자에 대해 다양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희생들에 대해 단지 한가지만 선택하고 강조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을 거부하던 당시에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종류의 수박겉핥기식의 지식과 우리 목자의 음성에 건성으로 순복하는 것이 우리를 위협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한분 목자를 뒤따르는것을 아는일에 대한 게으름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내 옆에 검은 양이 있을 때 그리고 다른 울음소리로 양이 매애애 울 때 그때 우리는 위협을 받습니다.

세번째로 목자는 크신 분입니다.

교사와 도덕가의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19세기에 있었던 신앙고백의 논쟁은 바로 오늘 본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에서 발전된것입니다.

양과 양떼들과 관련해서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곧 하나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하나이십니다.

이 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되심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의 목자가 양떼를 이끌 때 이리 저리 아무데나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다닙니다.

양들이 배고프지않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안전한 목초지에서 쉬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들을 어디론가 인도합니다.

배부르게 합니다.

우리들의 목자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아십니다.

우리들은 그의 양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그러나 목자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길로 언제나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미래와 좌절을 경험케하는 것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신자들로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압니다.

부활절기에 사도행전을 봉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경험한 염려와 기쁨들은 우리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섬김과 예배와 증언의 공동체가 결국 승리함을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배웁니다.

하나님의 손이 강함을 초대교회로부터 배웁니다.

초대교회에 임한 그 능력의 손이 바로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음을 우리들은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도마를 위한 변명

  • 한인 예배 (2004년 04월 25일)
  • 요 20:19-31
  • 설교자: 빠벨 뽀꼬르니

040428

이사야 53장

요한복음 20: 19-31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때부터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동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는 그들이 확인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했습니다. .

도마는 회의론자와 의심 많은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교황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왜 그 자리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도마가 제자들의 모임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도마를 변호하고자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구요?

다른 제자들을 한번 살펴 보십시요 : 그들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주시며 세상으로 그들을 보내십니다. –
그런데 그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난 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해 또다시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두 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의 기쁨은 무엇 이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과 평강의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어떻게 행했습니까?

그들이 정말 믿음이 있었는지 대해서는 쓰여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만 그랬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에게선 그 믿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도마가 왜 믿어야 합니까?

이 제자들이 교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 입니까?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그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어쩌면 그 제자들이 도마를 전혀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의심이 많은 도마를 그 모임에 계속 끼워 주었고, 다음 주일에  모두 함께했던 것은 성령의 열매인지도 모릅니다.

도마는 그 때까지 12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서만 등장합니다.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았고, (베드로나 요한 처럼)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쌍둥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가 정말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누구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불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마는 어쩌면 다른 사도들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쌍둥이가 자기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 도마가 자신의 의심 때문에 이제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의심은 그에게는 약점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했습니다.

의심은 약점이지만 자신이 인정하고 고백한 의심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놓는 의심은 우리의 내면을 약하게 만들고,

우리를 넘어뜨리며, 사람을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물건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나타낸 의심은 의심을 풀려고 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용기와 내면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솔직함의 표현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기도 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할 때도 많습니다. 

아우구스틴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 도마는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럼, 도마의 의심은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요?

도마는 무엇에 대해 의심했습니까?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까?

다른 동료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 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까?

도마는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도마가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랬다면, 제 생각엔 도마는 오히려 못자국이 다 나아 상처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 분이 진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했다면 오히려 도마는 자신이 아는 얼굴을 보고 아는 음성을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정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살과 뼈로 된 그 사람을 오히려 한번 안아보고 싶어했을 겁니다. – 그렇다면 왜 도마는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상처 난 곳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을까요? 

제 생각에 거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질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종, 그 분에게 난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받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도마는 단지 살아있는 시신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구세주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가 그 이상의 다른 뭔가를 원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마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 도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군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마 때문에 다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 의심을 풀어주십니다. 도마가 믿음에 대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도마에 대해 마찬가지 입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보다는 믿는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계십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의심들과 질문들에 대답해 주시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각자의 개성 속에서 찾고 계십니까?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한가지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못자국 난 상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각자 개성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동일한 한가지 입니다.  – 동일한 하나의 믿음입니다. : 바로 예수님이 받은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되며,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도마는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대답합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그것은 도마의 외침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 회의론자에 의심이 많았던 그 도마가 요한 복음을 통틀어 최고의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아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항상 다른 사도들의 그림자 속에 있었던 것 같은 도마가 그러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는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고 서로 연결시켜준, 알파와 오메가를 찾아낸 첫 번째 사람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도마가 정말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 손바닥의 못자국에 넣어봤는지, 자신의 손을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봤는지는 더 이상 말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시며 말씀을 마치십니다.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귀로 듣는 것으로 충분한 것을 눈으로 보아도 만족하지 않다는 설교자의 회의를 듣는 것 같고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에 대한 시몬 벤 라뀌쉬 랍비의 깨달음을 듣는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에서 번개와 지진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나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구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로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이 있을까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세지입니다. 자신의 의문들과 의심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보지 못해도 믿음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보다  과거에 누구를 믿었었는지, 또 지금은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인지 하는 사실에 달려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의 특징

  • 한인 예배 (2004년 02월 29일)
  • 행17:16-34
  • 설교자: 이종실

040229

본문: 사도행전 17:16-34

제목: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의 특징

<본문>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1)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1)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설교>

오늘 본문은 바울의 아덴(아테네) 선교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도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풍부한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전통이 있는 언젠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도시입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인터넷으로 아테네 이곳 저곳을 방문했습니다.

BC 5세기부터 융성했던 문화의 흔적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철학과 정치사상의 교과서에서 보았던 지명들과 장소가 모두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 근교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동화로 읽었던 신들이 모여 살고, 사랑을 나누고 그리고 서로 다투던 그 장소들 모두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아마 어려서 부터 바울도 이 아테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선진국가인 아테네는 지식인 바울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런 아테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아테네에 온 것은 아닙니다. (16:13-15)

그의 다음 선교 목적지인 고린도를 가기 위해 아테네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렸습니다.

며칠간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어려서부터 소문으로 들었던 아테네를 관광하면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힘들었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해변가로 나가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을 만끽하였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서서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오랜 여행길에 지친 심신을 씻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아마도 흥겨운 노래곡조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돌아오라 Sorento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78장)

그리고 아테네 도시 이곳 저곳을 둘러봅니다.

16절에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는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이지 않고 호메니우스의 대서사시와 같은 문학과 예술이 보이지않고 왜 우상이 보였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낭은 “저 추하고 보잘 것 없는 유대인은 아테네의 동상들을 우상이라고 말함으로서 헬라의 예술을 모욕했다.”고 사도행전 17장 16절의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지난 주 로마에서 대회기간 내내 안내로 수고하신 밀라노 한인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저와 세분 강사들을 공항까지 안내하여 주었습니다.

그 분은 밀라노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있어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자주 밀라노를 안내할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대리석 수입을 하러 온 분들과 다니는데 그 분들은 어디를 가도 바닥만 보고 다니신 답니다.

한번은 식당을 들어갔는데 음식은 주문할 생각하지도 않고 모두 바닥만 열심히 내려다 보았다고 합니다.

저의 눈에는 모두가 아름답다는 프라하와 그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않고 오직 종교개혁유적지 프라하와 폐쇄적인 교회와 무신론의 사회 만이 눈에 보입니다.

사람들이 관광을 할 때 자신의 관심과 아는 것 만큼 만 보고 느끼고 갑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을 가이드 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까렐다리에 있는 성인들의 동상을 보고 “저 우상 덩어리들!”하고 소리치는 것을 들고 참 무식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도 아테네에서 우상을 보고 그리고 격분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16절에 나오는 바울의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바울이 <마음에 분하여>라고 번역되어있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격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에는 <znepokojovat se>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화가나서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쓰는 Zlobit se 가 아닌 심기가 불편해서 평안하지 않는  znepokojovat s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살면서 그리고 교회생활로 만나면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고 심기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상태가 바울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심기불편한 감정이 계기가 되어 계획이 없던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시행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선교의 계획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원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와 같은 선교사나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바울 처럼 우리는 기도하며 믿음 가운데 우리의 삶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 가운데 세운 우리의 삶의 계획일지라도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뒤 돌아 보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뿐 입니다.

미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때가 있고 어떤 경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라 여겼는데 그것을 참고 인내한 것이 우리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꾼, 하나님이 쓰는 신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불협화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테네 선교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계획하지 않은 바울 사이의 영적 불협화음은 바울의 심기가 불편함으로 왔습니다.

해외생활에서 그리고 해외의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심기가 불편한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이면 남이 아닙니다.

남이 아닌 사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전혀 알지 못하는 프라하의 이웃이 조금 잘되면 배가 아픈 정도가 아닙니다.

심사가 뒤틀리고 이유없이 무조건 미워집니다.

이 좁은 바닥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눈을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아는 체 하지도 않으면 내가 또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다가 괜히 무시당한 것 같아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고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면 또 기분 나빠질 것 같아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습니다.

해외에 살다 보면 한국말도 자꾸 어눌해지고 그 뉘앙스도 둔해져 말한 사람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마음의 상처를 받아 혼자서 심기가 불편해져 다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함께 불편해 하게 됩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다고 이런 심기 불편한 마음이 풀리지 않고 해를 거듭하면서 쌓이고 쌓여 결국 우리는 오랜 해외생활의 대가로 “인격 파탄자”가 되고 맙니다.

근 10년 전에 독일에서 만난 한 광부출신의 교민이 “20년 해외생활에 나의 머리는 한 5도쯤 돌았습니다.”라고 한 말을 이제 막 해외생활을 시작한 저에게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0년 후의 나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년이 지난 후 치열하게 자기성찰을 하는 그분의 모습 정도만 되어도 괜찮겠다고 해외생활 10년이 지나가는 지금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외생활에서 심기 불편함이 쌓여 서서히 <인격 파탄자>가 되어간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해외생활에서 인격 파탄자로 만들 수 있는 심기 불편한 감정이 우리들의 자기 주장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는 영적 불협화음의 사인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좋지않는 감정이 처음에 계획되지 않았던 바울의 아테네 선교의 계기가 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17)

바울은 심기 불편하여 격분한 감정을 감정으로 노출시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화가 나게 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심기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나면 부부도 그리고 부모와 자식도 대화가 힘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특징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 바울이 격분하였습니까?

그가 십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를 보자 화가 났습니까?

그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십계명을 어겼다고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 처럼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우상에 하나님이 분노한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오늘 분노한 것은 그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 아테네 시민들 때문이 아닌 다른 더 깊은 뜻이 있었음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도시는 우상 위에 우상으로 쌓여있었습니다.

아마 유대인 묘지처럼 묘지 위에 묘지들이 켭켭이 쌓인 것 처럼 우상들이 도시 전역에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전국에 있던 우상숫자들보다 아테네의 우상숫자가 더 많아고 심지어 아테네 시민들 숫자 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시내를 다니다가 그 많은 우상의 상들과 제단들 속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의 제단을 발견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사도 바울은 갑자기 알지 못하는 신까지 숭배해야 하는 인간의 처량함이 느껴졌습니다.

요나 이야기를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요나로 인하여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나가 제비에 뽑히고 그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러자 거센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자연재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를 배경으로 한 성경 말씀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우리나라의 심청전도 이런 종류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한 에피소드는 키프러스의 에피메니데스 라는 사람이 쓴 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6세기 때에 아테네에 전염병이 빠르게 퍼져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이 그들이 신가운데 하나를 화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신을 화나게 하였는지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신이 화가 났는지 발견하지 못하였다.

화가난 신은 아직 아테네에서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는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우선 양 몇 마리를 골라 며칠동안 먹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풀밭 위에 풀어 놓았습니다.

배가 고픈 양들은 초원 위에 돋아난 풀들을 마음껏 뜯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풀을 먹지 않은 곳이 있으면 그곳에 재단을 세웠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신을 위해 이와 같이 재단을 세우자  전염병이 차츰 수그러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의 배경에는 재앙과 불행에 대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아테네 시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고와 고도로 발전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신의 뜻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자유가 있는 신화를 생산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하면서 공포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그들의 모습에 바울은 분노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몇몇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테네에는 많은 학파들이 형성될 만큼 지식의 전당 대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공포로 온갖 신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아테네가 이성과 논리를 자랑하는 지식인들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은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이 모순에 대해서 분노한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심기불편함과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이웃과 개인을 향하지 않고 해외생활의 현실이 가져오는 긴장과 구조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임을 사도 바울처럼 깨달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감정이 일어날 때 이것은 나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선회 시키려는 영적신호가 아닌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감정으로 표출하면 나와 이웃을 인격 파탄자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감정의 원인을 추적해 가면
해외생활에서 오는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긴장과 구조적인 어려움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결심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처한 자신의 현실적인 모순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화를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대화가 결국 아테네에서 복음 선포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그리고 다른 날에는 광장에서 아테네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광장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활동장소 였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토론하였습니다.

아테네에 있던 다양한 학교 가운데 에피쿠로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아마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었던 것 갔습니다.

그들은 다음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없어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고 말하는 사람들은 범신론의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은 18절에서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에서 나오는 예수와 부활을 각각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대화는 이처럼 힘이듭니다.

아테네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평가합니다.

사오정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놀 때 자기들끼리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서로 열심히 이야기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이야기에 왜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느냐”고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신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가를 이해하는 대화의 출발점으로서의 역할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대화는 설득과 굴복을 시키는 것을 목표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말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22)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심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억지로 무엇을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받는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누룬 것도 의도적으로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시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포에 둘러쌓여 우상숭배를 하면서 이성과 논리를 자랑하는 그 모순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대화를 시도한 것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생활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가 <숨은 봉사생활>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집사님을 위시해서 거의 전교우들이 조그마한 봉사한가지도 모두 맡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앞으로도 그 작은 봉사를 통해 지금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서로 다른데서 오는 영적
불협화음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듣고 그것에 투신하려는 자신의
노력의 장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의 봉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우리 교우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누구가 나서기 싫은 일이 구정물에 손을 넣고 설거지 하는 일, 화장실 휴지통이 차면 누군가가 치우는 일, 주방일 간수하는 일과 같이 표시 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굳은 일들입니다.

굳은 일을 앞에 두고 처음에는 서로 눈치 보며 신경전을 부리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을 서로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하는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성장이자 곧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소양을 갖춘 우리 교우들 개인들의 신앙의 성장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믿거나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추켜 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은 오늘 사도 바울처럼 그 사실을 모르면서 그저 생활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단지 저와 여러분은 꾸준히 묵묵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돌이키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하며 맡은 작은 봉사일지라도 그 동기가 교만하지않도록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도록 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순절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참 신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의 길을 모두 함께 걸어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