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생활을 회복합시다.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30일)
  • 눅17:11-19
  • 설교자: N. 체이꼬바

01. 09. 30. (삼위일체 후 열여섯번째 주일)
설교 : N. 체이꼬바 (동 보헤미아 지역의 흘린스꼬 교회 목사)
본문 : 누가복음 17장11-19절
제목 : „감사 생활을 회복합시다.“

<공동 기도>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주님께 간구하고 그리고 은혜를 받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릴 줄 모르는 저희들입니다.
감사가 없기에 영광과 찬양도
진정으로 주님께 드릴 줄 모르는 저희들입니다.
이 추수의 계절에 감사의 생활을
회복하는 저희들 되길 원합니다.

<설교본문>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오늘 설교본문은 누가복음 17장 11-19절입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5-21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성 도 여러분, 문둥병자들이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비를 구하며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들은 그들을 이해합니다. 문둥병자들 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 – 그들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은혜에 의지해야되고 그리고 사회와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이 문둥병자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른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유 명한 치유자, 이적을 일으키는 분 나사렛 예수님이 가까이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야했습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도 그리고 예배에 참석할 수도 친구들과 일하고 만날 수 있을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이 예언자는 정말로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렇게 우리들도 자주 외칩니다. 우리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들은 큰 걱정을 하고 고통으로 우리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여 – 기도를 하게 되고 그리고 끊임없이 간구를 합니다. 
주여, 도와주시고 건강 주시고 어려움들을 해결해주시옵소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필요를 위한 개인 조수처럼 얼마나 이용하고 있는지 공정한 감시자가 반듯이 지켜보아야 할것입니다. 

현 재 중보기도를 하고 있고 중보기도는 아브라함 때부터 신자들의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중보기도는 확고부동하게 예배의 순서에 자리잡았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들의 간구가 성만찬 예식의 예배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간구합니다 :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을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설교가운데 한번도 그들에게 직접 하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을 깨끗하게 하였고 제사장에게 깨끗해진 몸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들은 교회로 집으로 일터로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자신의 소문을 확인시켰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해피 엔드로 끝납니다.

그 러나 해피 엔드가 되지않고 있습니다 –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방인 나만이 이스라엘 예언자에게 치유를 받았을 때(왕하 5장) 그는 어떻게 해야 될지를 알았습니다.  다시 돌아와 엘리사에게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이 돌아옵니다. 단지 사람의 도리를 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 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나를 크게 도와 주신것입니다. 다음에 또만납시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아래 얼굴을 대고 엎드리어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감사를 하는 이 단어는 „eucharistia“ 로 이것은 우리들의 성만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의 감사는 다시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도, 중간에도 그리고 마지막에도 이 문둥병자와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 기독교 존재의 기본적인 모습입니다. – 자비를 간구하고 예수의 도움을 받고 그리고 감사를 드리는 신앙의 기본적인 모습입니다.

열명 가운데 한명만이 그것을 이해를 하였습니다. 참된 만남이었습니다. 열명가운데 한명 – 배교자,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이 세상에 많은 치유자와 이적자들 가운데 한사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사 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 엘리사 선지자 보다도 더 큰분임을 알았습니다. 그에게 이미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한분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불쌍히 여기사 죄를 위해 희생되신 분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위의 권고로 깨끗함을 받은 다른 문둥병자들은 어쩌면 흠 없는 어린양을 구해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이 문둥병의 치유를 위해 명령한대로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구약의 말씀들이 성취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었을 때 그것은 열광적인 신앙의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경건한 존경의 감사입니다.

열명 가운데 오직 한 사람 – 정통적인 유대인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우리들에게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 원은 건강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의 경건한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건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각기 다른 병자들을 치유하십니다.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이 건강합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 하나님의 화해, 죄용서, 초신자, 이 모든 것을 단지 사마리아 사람만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감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의무적인 희생제물과 감사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있습니다. 감사를 부끄러워 하지않습니다 – 그에게 감사가 충만하고 그리고 다른 문둥병자들이 말한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간구할때의 그 간절한 심정으로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건강한 이성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한 신자들 앞에서 기쁨이 감추어 지지않습니다.

바 리새인처럼 우리들이 행동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바리새인들 주위에 기적과 하나님의 현존의 표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곧바로 / 이어지는 말씀에서/ 질문을 합니다 –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 하나님이 무언가 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도 일하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보여주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곁에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웃음거리도 아이러니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의 슬픈 진실입니다.

하 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의 끊임없는 모든 일속에 우리들의 질병과 문둥병자들의 노력 속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고계십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자신의 장점과 경건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고 여러분을 돕도록 하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이제 시작하십시오. 몇 마디의 감사의 기도와 잘 부르는 찬송가 몇 곡으로 감사를 끝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십시오. – 신발의 올이 삐죽나온 것 처럼 감사가 여러분에게서 나오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무엇을 감사해야 할 지를 바라보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여러분이 살아가는, 가끔은 쓰레기, 오물 같은, 그런 곳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바라보기 시작하십시오.

하 나님 나라 일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장 당연히 해야될 일로 받아들이십시오. – 겨자씨 알만한 믿음이 뿌리깊은 나무를 옮기고 100년의 습관을 바꾸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을 에게 개혁교도들과 무슬림들에게 문둥병자들과 집없는 사람들을 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 것 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비록 작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것입니다. 아멘

<설교후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 신의 희생으로 아버지앞에 나아가듯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악의 권세에서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아주시옵소서. 구원의 기쁨이 우리들의 생의 전체를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 이웃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의 증언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b-18a절

„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로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야곱의 결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23일)
  • 창 29:20-35
  • 설교자: 이종실

01년09월23일
삼위일체 후 열 다섯번째 주일
본문 창세기 29장 20-35절
제목 “야곱의 결혼”

<공동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부족함까지도 용납하시고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본문>
“야
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찾으니 애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와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창 29:20-25)

<설교>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테러와 그에 따른 보복전쟁이 선포되어 지금은 전쟁 아닌 전쟁의 공포에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전 통보 없이 공격하겠다.” “보복은 테러를 뿌리

기위해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쟁은 장기간 지속될것이다.” “미국의 보복 전쟁에 협조한 나라들을 보복을 하겠다.” 이전
전쟁과 달리 전쟁의 상대가 불분명해서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러리즘과 패권주의와의 이번 전쟁은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전쟁 심리전을 펴고있습니다.

은행창구는 연일 돈을 인출하는 사람들로 붐벼 미화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인출신청을 하고 이틀 뒤에나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와 남미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국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럽경제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새 밀레니엄의 시대가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 처럼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년 초의 화려한 행사들은 결국 어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이벤트 행사에 불과했음이 새 밀레니엄의 첫해도
넘기지 못하고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 개인들의 삶은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한조각의 나룻배와 같은
처지입니다.

우리들의 가치관과 삶의 의지가 세파의 흐름에 의지하고있습니다. 세파의 흐름에 우리들의 삶이 독립적이지 못하기에 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에 의존적인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은 어떻게 성취되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야곱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서 이 아침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낯선 땅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약 700키로미터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벧엘” 이란 곳에서 야곱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28장 14-15절)  여행의
목적지인 외삼촌 라반의 집, 하란에 도착한 이야기가  창세기 29장 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저자는 많은 야곱의 하란 도착 소식
가운데 하란의 우물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구멍을 향해 공을 몰고 가는 골퍼들 처럼 우리
하나님은 야곱을 700키로 미터 떨어진 마지막 종착지 하란 그 중에서도 우물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란
도착 첫 이야기가 외삼촌 라반의 만남이나 그의 집 아니면 하란에 있던 하나님의 제단이 아니라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은 사막
여행길을 가는 나그네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우물에서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고 이 만남은 그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녀의 미래를 예언하는 또 다른
우물이었습니다.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생의 물을 주는 우물, 예수 그리스도곁에 우리들은 교회로 모여있습니다. 교회가
야곱에게 약속한 축복을 성취해 가는 하나님의 첫 인도지 우물가임을 발견하는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세기 저자는 29장 야곱의 하란 도착 장면을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1-2상반절)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야곱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물을 야곱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교회를 하나님의 복의 시발점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란에서의 자기의 인생을 결정짓는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납니다. 우물 아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을 치우고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라헬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먼
여행길을 틀리지 않게 목적지 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목적을 했던 사람을 찾았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생각지 않던 일가 친척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헬도 너무 기뻐 야곱의 소식을 달려가서 아버지 라반에게 전하였습니다. 라반의 기쁨도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달려가 야곱을
환영하고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야곱은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여행길, 형의 복수의 두려움을 다 잊을 만큼
기뻣습니다.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기쁨은 또 다른 고생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야곱에게 라반의 집에서의 삶은 인생을 새롭게 배우는 여정의 시작을 의미하였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입니다. 야곱은 뼈중의 뼈 살중의 살인 아내를 얻는 대가로 일을 시작합니다.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라반이 허락을 합니다. 언니 레아가 있었지만 야곱은 하란에 도착해서 처음
우물가에서 만난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사랑하였기에 칠년을 하루같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라반을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칠년의 노동은 단지 노동의 가치만을 지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라헬과 가정을 이룬 후 낯선 곳에서 살아갈 야곱의 꿈과 인생의 계획을 수없이 그려보고 지우고
다시 그려본 세월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자신의 기다림과 희망이 사기 당하는
날이었습니다. 학벌과 이력과 출신과 가문을 속이고 한 결혼의 결과가 가져다 주는 인간적인 배신감과 심리적인 충격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날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쳐 나온 악몽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형 에서를 속인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의 결혼의 기준이 잘못된것일까? 아니면 내가 라헬을 사랑하지만 레아와 결혼할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야곱이었더라면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에 대해 당혹스러운 장면을 접하게
됩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그의 복을 탈취한 사기꾼 야곱이 자신을 속인 라반에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질문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삭의 시각장애를 이용하여 그를 속인 것 처럼 라반은 야곱이 어두운 장막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야곱을
속였습니다. 분명 이 사기사건을 통해 형을 속인 자신의 과거가 한번쯤 기억났을것임에도 불구하고 라반이 자신을 속인 것을
따집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인생에 대해 한번쯤 뒤 돌아 볼만도 한데 그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던 본래의 자신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7년을 라반을 위해서 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리도 야곱처럼 무엇인가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과 함께 그
상황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어떤 경우엔 하나님에게 항의도 하고 기도로 간구를 하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하기보다 오직 라헬을 아내로 삼고 싶은 자신의 생각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원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무려 14년을 보내기로 작심을 하고 있습니다.


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입버릇처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저와 여러분에 대해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고 계실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하지만 야곱처럼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게으름, 자신의 잘못을 모두 정당화 시키는 일을 서스럼 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신의
뜻으로 자신들의 테러를 정당화 합니다. 이 테러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는 미국 대통령은 정의를 위한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견주어 볼 때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야곱이 더 인간미가 넘쳐보입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아버지의 신체장애를 이용해 아버지를 속인 사기꾼 야곱은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요 우리들의 이름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기꾼 야곱의 얼굴에 하나님의 뜻으로 분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를 알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자 청년처럼 거듭남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교리화 시키고있습니다.


자가 아버지를 떠나갈 때 아버지와 단절을 한 것도 아니고 스캔들때문도 아니며 탕자가 탕자가된 것은 아버지것을 잘못 사용하였던 것을
알기에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빌려 그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하고있습니다.


간들이 자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떨치기 위해 바벨탑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아는 오늘날 신자들이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내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전히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해보려는 인간의 모습을 신의 이름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정말인 것처럼 말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빈말인지 느껴집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하는 우리들의 신앙행위가 자기의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야심찬 행위는 단지 야심 찬 마음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을 가증스러운 우리들의 얼굴을 우리 하나님은 피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야심들은 고통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하나님이 거두어 주십니다.

레아는 라헬처럼 매력이 있지않았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것은 인생의 현실입니다. 언제나 사람의 등뒤에 서있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고통스럽고 이해하지 못하는
질서가 존재합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남편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그녀는
마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남편에게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아기를 잉태하지 못하였다.”(31절)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고 그리고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무언가 희망의 요소들이 있는
우리들의 인생의 현장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야곱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빚어진 상황에 직접
개입하고 계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레아를 버리지않으셨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의 아픔을 아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아들을 계속해서 넷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정하지 않았지만 30장
1-2절에 이 일로 라헬에게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나고 급기야 야곱과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14년을 기다리고 일해도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던 라헬 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던 그때 처음에 라헬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처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처음처럼 지속됩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부유함과 가난이 길고 짧은 시간으로 반드시 교체되며 지나갑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이 있었고 레아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기에 커다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자녀들의 출생에 늘 하나님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후에 라헬에게도 레아 처럼 하나님께서 아들과 딸을 주셨습니다. 모든 아들들이 하나님의 백성 곧 12지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그리고 그 추구의 방식과 가치관이 그리고 삶의 위치가 각기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신 약속하신 복을 성취해가는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가르침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뿌리내려
사기꾼 야곱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둡고 잘생기지 못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의 몸에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였습니다. 레아의 몸에서 난 유다는
누구입니까? 12지파 가운데 그가 바로 다윗의 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의 시작이었습니다.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계획을 통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못생기고 눈도 나빠 사랑 받지 못하던 야곱의 여인 레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문,
유다를 탄생시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차근 차근 진행시켜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교우여러분,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 신뢰할 수 없는 라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레아, 곱고 아리따워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나 아이를 낳지못해 질투와 시기심에 가득찬 라헬,
서로 속고 속이고, 갈등과 분쟁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동 운명의 창세기의 인간사회를 저와 여러분들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우리들의 모습과 다른점이 없음을 우리들은 이 아침에 발견하였습니다.


리고 놀라운 사실을 우리들은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한 야곱과의 약속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장 14-15절) 이
약속만이 부족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욕망과 갈등과 불화를 통해 하나 하나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오늘
아침 우리들은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성취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 불신앙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고 못생기고 눈이 나쁜 레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 채 라헬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인간계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야곱의 운명은 광야에서
제단을 쌓던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들의 믿음, 우리들의 헌신, 우리들의 기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설교 후 기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우리들을 통해 세상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신앙과 헌신과 노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임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따를 때 우리들의 믿음과 헌신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며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위탁의 말씀> 고린도후서 6장 17-18절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보리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16일)
  • 욥 19:1-29
  • 설교자: 이종실

일시: 01년 09월 16일 (삼위일체후 열네번째 주일)
본문: 욥 19장 1-29절
제목: “하나님을 보리라”

<공동기도>

우리들의 희망이 되시는 주님,
세상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탄식하지 않게하옵소서.
오직 우리의 구원자 주님 한 분만을 바라는
희망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설교 본문>

“나
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설교 본문에서 21-26절만)

<설 교>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이곳에 와서 정착을 할 때 우리들에게 많았던 꿈들이 날이 갈수록 꿈의 성취라는 희망보다 점점 좌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간이 흐를수록 어려워 지는 경제여건, 점점 많아지는 학업의 제약들, 높아만 가는 물가, 외국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쇠약해져 가는
육신, 자주 찾아오는 크고 작은 질병들, 이룬 것 없이 성큼 흘러버린 세월들,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나오면 넓은 곳에 나와서 많은
경험들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삶 보다도 더 어둡고 좁고 편견된 삶, 왜소 해져가는 인격  그래서 안정을 찾아가기
보다 점점 불안해 지는 마음이 찬바람이 불자 왠지 더 쫓기는 느낌이 듭니다. 불안정하고 보장이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믿음 하나로 고통을 이긴 욥의 믿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을 보리라”로 정해보았습니다.

 

은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욥처럼 애매하게 불행을 당한 사람은 성경에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욥을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억울하고 불행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단의 시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은 아들이 일곱, 딸이 셋
모두 10남매를 둔 다복한 가정에 양이 7천, 약대가 5천, 소가 1천 마리, 나귀가 5백 마리인 대 부호였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 스바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이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가고 천지지변으로 남은 가축과 자녀들이 몰살하는 사건들이 순식간에
숨돌릴 사이 없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욥은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욕창이 나서 가려움증을 견디지 못해 부서진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었습니다.

그 때 욥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들은 온 몸의 욕창으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버린 욥을 발견하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욥과 함께 땅에 앉아서” 욥의 고통을 말없이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욥1:12-13) 

욥의 고통에 동참하는 세 친구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진솔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곱낮 일곱밤을 욥과 함께 땅에 앉았다는 것은 세 친구들이 욥과 함께 지낸 기간이 일주일이란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의 의미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재산과 아름다운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머리끝부터 발바닥 까지 질병을 얻자 형제들 친척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심지어 아내까지 멀어진
상황에서 그래도 그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친구들었습니다. 이처럼 세 친구들은 욥의 처지를 공감(共感)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친구라고 하면 인간적인 우정에 끌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아첨하는 그런 폐쇄된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패거리들이
나쁜 일을 도모하면 마피아라고 우리들은 부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런 패거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성품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욥의 친구들은 참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욥, 이세상에 죄 없이 망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직한 사람이 잘못된 것을 보았는가 그래 너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치더라도 너가 정말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게 죄를 짓는 거야. 너의 불행은 너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야.” 욥에 대한 친구들의 권면은 비난이 아니라 빨리 회개하고 다시 행복한 모습을 찾기를 원하여 친구를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을 향해 욥이 탄식을 했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19:22-24) 안타까운 탄식입니다. 서로의 신뢰가 깊으면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데 서로 신뢰하기에 더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인간 관계의 한계를 우리들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어떠한 고통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이 있어도 완벽한 이상적인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오늘 말씀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비신앙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꺼내려면 손가락을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처럼 죄와 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보편적인 죄와
벌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겪고 있는 죄와 고통간의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다고 욥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고 욥은 말합니다. 이 욥을 친구들은 설득을 합니다.
욥을 설득해 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 아니라 연약한 자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신뢰하는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교회의 정신이 무엇인지 가장 잘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 목사인 저와 같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오늘 우리는 욥과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마치 정신병자와 같았습니다.
갑자기 견디기 힘든 일들을 겪고 몸의 질병까지 얻고 보니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호
받아야 될 만큼 연약한 사람,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 형제 친척
심지어 아내에게 까지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 욥이 살아계신 구속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누가 훌륭한
의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한 선교단체가 주체가 되어 지역 주민들이 선교사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들이 지역 주민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그들과 똑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해 존중하고 있는 부분과 존중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입고 먹는 습관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 가장 본질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우쳐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시대의 확고한 믿음조차도 부인했던 사람, 몸의 질병과 가난으로
어떤 것을 내다보고 명령하는 능력이 없었던 욥 이지만 그는 구속자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구속자의 희망으로
교회를 생명력 있게 만듭니다. 이들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어 교회를 참 안식과 화해와 사랑의 교제의 장소로 만들어 갑니다.


기 42장 7-9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들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여기서 우리는 욥의 모습을 조금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돌아 보지 않는다는 고통 속에 빠진 시편의 저자 처럼 욥은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응답이 늦어지면 믿음과 확신도 흔들립니다. 고통에 지친 욥은 그래도
끝까지 기도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죽어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통을 끝내기 위해 차라리 욥에게는 죽음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나 욥은 죽음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 긍휼과 이해와 도움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씩 그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오직 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의 구원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절규하지 않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떠나가고 욥 홀로 남아도 그 구원자가 그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통 속에서 오직 구원자를 희망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님도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면서도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를 버리지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으로 욥도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회복되는 희망을 버리지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그의 도움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의 하나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강하게 믿으며
마지막 때 그를 볼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불행을 쫓고 행복을 가져오실 오직 한분 신실한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기도는 욥의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이해와
깨달음을 위한 씨름이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싸웁니다.  그를 고통 속에 던진 이유에 대한 욥의 질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혜는 제한되어있고 우리들의 깨달음은 단지 부분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들이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들 스스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들에게 진리와 지혜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욥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마다 하나님을 보겠다는 욥의 이 희망을 기억하십시다. 고통 속으로, 질병 가운데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내몰고 있다고 느낄 때 바로 여러분들을 참 안식과 화해와 섬김의 교회로 이루고자 중보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
순간 까지 욥처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후 기도>

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가 욥처럼 불안하고 안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을
보리라는 욥의 희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위탁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09일)
  • 눅7:11-17
  • 설교자: 이종실

01.09.09 (삼위일체후 열세번째)
누가복음 7장 11-17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공동기도>
슬퍼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타인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슬퍼하여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존경하고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리 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잘 알고 그것을 삶에 적용을 시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심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모습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들의 시각을 모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설교제목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 사람은 죽은 자를 뒤따르는 과부 여인입니다. 그 죽은 자는 자신의 독자 였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히9:27)”로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여인이 뒤따르는 죽음은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 죽은 자에게 말씀하실 때 “청년아…”한 것을 보아 그 여인의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결혼도 하지않은
젊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인간의 수명을 다한 죽음은 정을
떼는 아픔은 있지만 그리 억울하지 않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기력이 왕성하고 미래가 있는 젊은이의 누구도 예기치 못한 죽음을
우리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 그 이유와 뜻을 질문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에 직면해야 됨을 알기에 안타까운 죽음의 슬픔은 우리들의 가슴에 빠르게 전달됩니다. 오늘 이 젊은이의 죽음의 모든 슬픔은 그 죽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눈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음을 뒤따르는 장례가 이 여인에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여인을 과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나누던 남편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하나를 얻고 이제 아장 아장 걸음마를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더 사랑이
깊어져 갈 때 그 아들 하나를 두고 먼저 훌쩍 저 세상으로 가버린 남편의 죽음을 뒤따르면서 다시 평생 느껴 보지 못할 사랑의
이별에 어린아이 등에 업고 애통한 눈물을 흘려본 여인이었습니다. 그 비통함은 누구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러나 이 여인은 지금 그 보다 더 비통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오늘 장례행렬을 뒤따르며 이 여인은 자신의 가슴을 파고 그 안에 아들을 묻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먼저 떠난
남편의 사랑의 징표였습니다. 그 아들은 자신의 슬픔의 위로였습니다. 힘들었지만 훌륭하게 장성한 아들은 그녀의 미래이자 의지할
보호자였습니다. 그녀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 아들의 관을 앞에 두고 뒤따르는 여인의 울음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이 보다 더 슬픈 울음소리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을 함께 나누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례행렬을
뒤따랐습니다.   

이 장례행렬의 큰 무리와 마주하여 한 사람의 뒤를 따르는 또 다른 무리의 행렬이 
다가오고있었습니다. 이 다른 무리는 장례행렬에 동참하기 위해 이웃 마을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례행렬과는 전혀
무관한 무리의 행렬이었습니다. 마주 다가오는 두 무리의 조우는 마치 접촉점이 없이 교차하는 공간의 선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는 두 무리가 애절한 여인의 울음소리로 만나게 됩니다.
이 장면을 오늘 성서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님은 지금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고 나인성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백부장 하인의 치유방법에 사람들은 많이
놀랬습니다. 하인을 만나지도 보지도 않고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백부장의 사람됨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소원인 하인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며칠 후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갈 때 뒤따랐던 것으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국회 위원들이 선거 때는 코가 땅에 닿도록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금배지를 달고 나면 백성들
위에 군림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겸손히 신앙생활 잘 하던 분들이 조금 성공을 했다 싶을 때 교만하여 남을 교훈 하려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표리부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할 때나 사람들이 비정하게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를 요청 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홀로 걸어가고 계십니다. 죄인과 고통 받는 삶들을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비록 환호하는 무리에 휩싸여 있을지라도 그의 눈은 슬픔을 당해 애통해 하는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환호하는
백성에 그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여인의 울음은 단지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희망과 모든
의지가 되었던 아들을 잃자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절망에 눌려 나오는 신음소리 였습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은 불쌍히 여겼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의 절망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불행을 당한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욥이 불행을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발견할 것을 욥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고는 욥의 위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괴롭히는 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여인의 울음소리에 다만
같이 마음 아파하시며 그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슬픔을 해석하거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이해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슬픔을 겪는 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백마디 말보다 슬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입니다.

누가의 복음서를 읽던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고통 받는 자 절망에 빠진 자의 슬픔을 같은 마음으로 나누고 계시는 이 예수님의 모습에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유대사회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던 소수의 흩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열성 유대인들은 이들을 찾아내어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한때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회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은 삶의 뿌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사회에서 그리고 이슬람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그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일입니다. 체코의 개혁 교도들은 카톨릭으로부터 4백년이 넘게 삶의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고통과 절망을 느끼는 것 뿐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
때문에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 아니면 신분을 감춘 채 비밀리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미래가 없는 이들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 받고 절망에 빠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 하나님을 시편으로 찬양하며 기억했던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예배 때 마다 부르는 시편 68편 찬송가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찬양하라 주님께 한 없는 사랑의 주님
고아들의 아버지, 경배하라 주님께 한없는 사랑의 주님 과부들의 보호자, 그 크신 사랑의 주님 우리의 고통 아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 그 크신 사랑의 주님 우리의 고통 아시고 응답해주신 주님”

유대인들의 박해 아래 하루 하루 불안에 떨며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던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은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롬8:35-37)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삶의 근거와 의지를
송두리째 상실한 사람의 고통과 절망과 슬픔과 애통함을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불쌍한 마음으로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이 고백이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삶의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지구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완전히 꺼져버린 등불이 되지않고 그것을 극복하게 된 힘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깨달아 오늘의 어려운 우리들의 삶을 극복해 가는데 큰 힘과 용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래서 먼저 삼위일체후 열세번째 주일 아침에 들려주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들은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고백을 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젊은 죽음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과 토대를 상실해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여인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렘9:1) 하며 진심으로 슬퍼할 줄 알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삶의 많은 장벽으로 알게 모르게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해외생활에서 우리
교우들이 그리고 우리 한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오손 도손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 모두 누구나 간절히 소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과 달리 한국 사람인 제 자신부터 한국사람을 회피하려는 이중적인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한국사람을
만나면 피해를 받게 되고 결국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던 왜곡된 경쟁심리,
질투심, 열등 의식들이 해외생활의 삶의 장벽들을 만나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은폐 시키고 가면을 씌워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과 우쭐함과 분노와 원망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을 관계로 만나지 못하고 수단의 대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경원시하는 황폐한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달리 말씀 드려 해외생활에서 우리들의 삶이
황폐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 각자가 인생의 도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할 줄 모르기 때문 입니다. 대신 우리들은 분노와 원망을 하나님을 향해, 남편을 향해, 아내를 향해, 자녀를 향해,
부모를 향해, 이웃을 향해 쏟아놓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상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문제이며 그리고 인간 불행의
원인으로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돌아가면서 독서를 하고 있는 김형준 목사님의 “가시지 않는
상처라면” 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김형준 목사님이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방을 하나 준비해놓고 선생님들을 한분 한분 그 방에 5분 동안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들에게 “저
방에는 여러분 자신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살아왔던 사람, 가장 위해줘야 함에도 가장 학대한 사람, 가장 사랑해야 함에도
미워했던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 사람과 5분 동안 대화를 나누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나서 느낌을 나하고 나눕시다.” 그래서
40대 갓 넘긴 여선생님이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분은 존경 받는 가정 주부에 자녀들도 훌륭하게 자라고 있어 다들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였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잡담을 하며 그 선생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안에
들어간 그 선생님는 5분이 넘어도 나오지 않아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만 안에서 황소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선생님이
처음에 방에 들어가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벽에 대형 거울 하나만 있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자 갑자기
방에 들어오기 전에 하신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기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기였습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거울에 비친 자신이 그렇게 멀리 느껴질 수 없었습니다. 아름답던 모습이 늙어가고 있었고 자식과 남편을 위한 성실한
삶이 자기의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온 날들이 떠오르자 그만 그 자리에서 그 선생님은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은 다릅니다. 모세를 따라 애굽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위험한 일을 겪을 때,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 무언가 불편을 느낄 때, 무언가 뜻대로 잘되지 않을 때 그때마다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 자신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출애굽기는 16장 8절에서 모세를 향한 그들의 원망과 한탄은 모세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원망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현재 인도함을 받는 자기 자신의 상실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슬퍼하고 애통해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상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통한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애통을 모르는 사람의 삶은 희망이 없는
삶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할 줄 그리고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 만이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체험이 있게 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체험은 삶의 의지가 모두 무너지고 사라져버린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가 새순처럼 돋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울고있던 여인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눈물을 멈추게 하였을 때 도움이 시작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오셔서
“울지 마라”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후 기도)
남편과 하나뿐인 아들 –
자신의 삶의 토대를 잃어버린 여인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인생의 도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상실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지 못하고 타인을 향해 원망과 분노를 보내며 살아온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절망하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곳에 주님의 눈길이 닿고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을 만나는 참된 희망을 발견하는 저희들의
매일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울지 말라”는 주님의 위로로 살아가는 저희들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와 찬송

  • 연합 예배 (2001년 09월 02일)
  • 삼상 16,14-23
  • 설교자: 이지 슈토렉

첫번째 성경읽기 – 사도행전 9장 1-6절


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두번째 성경읽기(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4-23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이새거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시리고 그 아들 다윗의 손으로 사울에게 보내니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앗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사무엘 상 여기서 우리들은 휴가철 이후에 다시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버림받은 왕 사울은 심판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악신이 그에게 임했으나 악신은 하나님이
부리신 것 입니다. 사울을 공격한 악한 영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독립적이고 하나님에 대항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입니다.
하나님에게 독립된 권한을 가진 자신의 영역과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그러한 악한 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사탄은 악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사탄을 독립적으로 하나님에 대항하는 존재로 이해를
하였다면 그것은 아마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직 승리하지 못하였고 아직도 하나님이 통치하지 못하고 악이 통치하는 어떤 지역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의 단지 전쟁터일 뿐일 것 입니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세력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면 아직 온전하신 하나님이 되시지 못한 것
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직 승리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악이 제일 높아 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믿음은 단지 염려와 고통의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그분은 말과
군대를 바다에서 전멸시켰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뽑으신 그분 그리고 지금 그를 벌하시는 그분, 그분은 악의 어떠한 간교한 트릭에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하고 보호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하였다고 말해야만 했습니다. 교회가 예를 들어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듯이 주되시고
통치하시는 하늘 보좌가 그 분,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렇게 증인자들이 믿음을 깨달았고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심판과 심지어 가장 심한 벌로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 가운데 사울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할 때에도 심지어 그들을 바빌론의 온갖 종노릇하게 버려두었습니다. 파멸과 지옥으로 사랑하는 아들 마지막 의로우신 왕
예수를 끌어당겼습니다. 
   
예언과 그 심판에 관해 읽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결국 교회가 오직 한분 주님만을
갖고 있고 지옥의 권세가 그를 패배 시키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한분 여호와 하나님때문입니다.여기서 왕을 거부한 이스라엘 나라의
좋지 못한 역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왕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상상할 수 없이 정말 독창적이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사울에게 준비된 신하들을 보냅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다윗 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기름부은 하나님의 왕이
오고있습니다. 베들레헴 한밤중에 천사처럼 노래하며 오고있습니다. 강탈당한 마음, 윙윙거리고 잘 안 들리는 귀 그리고 벌 받은
육체를 위한 노래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미리암,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의 노래이며 다윗의 시편들 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役事)에 대한 두꺼운 찬양 모음을 한장 한장 노래하는 것입니다.(우리 개혁교회 찬송가 처음
150장이 시편의 찬양입니다.- 이 시편 찬양은 우리 개혁 전통입니다.) 사울에게 모든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 찬양은 마치
장래의 음악처럼 들리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이 버림받은 자의 죽음으로 마쳐야만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위해 다윗의 노래들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움을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을 위한 주의 사도인 다른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거듭날 때 비로소 거기서
비밀이 벗겨졌습니다. 지금 그러나 왕에게 단지 일순간의 평안만이 있습니다. 다윗의 찬양의 능력은 상실과 파멸의 악신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하나님의 노래는 상쾌하고 치유하는 도움의 은사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짓는 그 순간에도
찬송을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모든 우리들의 죄가 우리를 억누를 때 교회당으로 오는 용기를 가집시다. 지금 여기에서
놀라우신 기쁨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우리가 듣고있고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생각을 이루어주는 소망에 대해 우리들은 다시 찬양 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아멘)

설교후 기도

중보기도

복음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깨우쳐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 세계의 평화와 정의와 민족간의 평화를 위해,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환경보전을 위해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섬김을 위한 성령의 은사를 위해
-주님께 기도드립니다.(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이 에게, 아멘.

세번째 성경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