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0 성 하슈딸 교회

10. 성 하슈딸 교회당 (Kostel sv. Haštala)

성 아네슈까 수도원 앞 좁은 마당에서 남동쪽의 아네슈까 거리를 지나 하슈딸 광장(Haštalské náměstí)에 있는 성 하슈딸 교회당(라틴어로 Castellus)로 가자. 이 교회는 프라하의 제일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고, 나중에 바로크식으로 개축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외부와 내부가 14세기의 본래 고딕식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 교회당의 역사는 프라하의 루터파 교도들과 신 우트라퀴스트들의종교개혁 시대와 관련이 있다. 첫 후스파 시대에 양종성찬 교회에 이 교회당이 속하였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루터파 목사인 드라죠프의 M. 사무엘 마르띠니우스(M. Samuel Martinius z Dražova)가 이 곳에서 활동한다(1639년 색스니에서 망명 중 사망).

드라죠프의 마르띠니우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마틴 루터와 얀 후스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하였다. 반 합스부르크 봉기 시대에 그는 개혁파의 저항파 주동자들과의 협상에서 우트라퀴스트 교의회의 주요 고문(顧問)이기도 하였다. 결국 그가 1575년부터 체코 신앙고백의 내용을 소개하였던 프리드리히 팔츠끼(Fridrich Falcký)가 새롭게 왕으로 선출되면서 교의회와 왕 사이의 연락책도 맡게 되었다. 교리상으로 그는 루터파의 신학자로 분류되며 체코 형제단의 교리를 날카롭게 반박하였다.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로 프라하의 동료들과 함께 색스니의 피르나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망명 교회를 세운다. 1631년 가을 파사우(Passau)의 프라하 공격 때 몇몇 망명자들과 함께 귀향하고, 모스떼츠까 탑(Mostecká věž : II/7, IV/4)에서 처형당한 11명의 두개골을 모아 경건하게 장례식을 치룬다. 그리고 1632년 루터파 교회인 살바또르 교회(Kostel U Salvátora) 납골당에 안치시킨다 (슐릭 백작의 유골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르띠니우스가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을 때에 우트라퀴스트의 행정관으로 선출되었었지만 곧바로 색스니의 망명길로 돌아가야했다. 그 곳에서 신학자로서의 작업을 계속함은 물론 형제단과 얀 아모스 꼬멘스끼와도 논쟁을 계속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반개혁 당시 성 하슈딸 교회당은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고 1689년 바로크식으로 재건된다. 교회의 북쪽 측면 지붕은 가는 기둥들과 함께 프라하 고딕 건축물의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있다.
교회 건물을 뒤로 하고 하슈딸 광장에서 북쪽으로 리브나 거리(Rybná ulice)를 돌아 들로우하 거리(Dlouhá unice)를 만나서 왼편으로 돌아보자. 100미터정도 걸어 내려오면 레볼루츠니 거리(Revoluční třída)가 나온다. 신호등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진다; 50미터쯤 내려오면 오른편에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가 있다. 이 곳에서 작은 광장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개혁의 과거가 오늘에까지 남아있는 다른 교회가 서 있다.

II/9 성 시몬과 유다 교회

9. 성 시몬과 유다 교회당 (Kostel sv. Šimona a Judy)

스페인 회당(Španělská synagoga)에서 두쉬니 거리(Dušní ulice)를끼고 서쪽으로 계속 가면 우 밀로스르드니흐(U Milosrdných) 거리가 나온다. 이 거리에서 구시가 요세포프 구역 저지대에 설립되었던 성 시몬과 유대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원래 이 곳은 14세기부터 성 시몬과 유대의 고딕식 채플과 프라하 빈민들을 위한 보후슬라프 병원이 함께 있던 곳이기도 하다. 후스파 시대에 이 채플은 양종양종성찬을 시행하던 교회의 관리아래 놓이기도 하였다. 루돌프루돌프의 종교칙서 교부(1609. 7. 12) 이 후 우트라퀴스트 교의회(konzistoř)는 이 채플을 형제단(Jednota bratrska)이 사용케 하였다 (베들레헴 채플을 포함한 프라하의 다른 3개의 교회와 비슷한 경우). 체코 형제단은 채플을 대형 홀의 교회당으로 재시공하였으며(1615-20) 오늘날까지 그 홀 내부와 음향까지 잘 보존되어 오고있다. (지금도 주요한 축하 행사나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형제단은 재시공한 교회 옆에 독일 신자들과 서부로부터 온 발롱 개혁 교회 신자들을 위한 작은 교회를 하나 더 세웠다. 1620년 꼬네츠니에 의하여 축성 받았으며 오늘날 이 교회는 남아있지 않다.

빌라 호라 에서 개혁 교도들을 누르고 승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 2세는 형제단 교회를 1620년 크리스마스에 자선의 수사회에게 선물한다. 이들은 신축한 수도원과 병원에 교회를 연결하였다. 1751년 교회 외관을 바로크식으로 개축하고 이 모습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 교회의 바로크식 오르간은 요세프 하이든과 W.A.모차르트가 연주하기도 하였다.) 우 밀로스르드니흐 거리쪽 교회의 동편에는 라틴어로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Dilige deum ex toto corde… – 주님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 시몬과 유대 교회당은 뒷 편 탑쪽으로 확장 건립된 수도원 산하 병원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18세가 말부터 프라하 최초의 진료소와 해부학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라섹의 소설 “F. L. Věk”으로 유명한 J. T. Held (+1851) 박사가 이 곳에서 과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이전의 수도원 산하 병원건물을 따라 우 밀로스르드니흐 거리를 죽 올라가서(북쪽으로) 코지 거리(Kozí ulice)와 만나는 교차로를 지나면 이 곳에 성 아네슈까 수도원(Klášter sv. Anežky)이 있다. 이 수도원의 역사는 체코 개혁 운동과 연관짓기 어려우므로 그냥 지나쳐가기로 하겠다.

프라하 최고(最古)의 고딕식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이 건물에 대한 기초 사실을 언급하도록 하자. 바츨라프 1세(+1253)의의 누나인 아네슈까 공주는 프란치스코 수녀회에 들어갔으며 이 곳에 1234년 소 프란치스코 수도회 옆에 여성 수도원을 건립한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수녀들을 위한 성 바르보라 교회와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교회가 세워진다. 후스파 시대에는 이 수도원이 해체되었으며 1626년 성 일리 교회로 옮겨지 옮겨지기 전인 1556년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이 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이 이후에 수녀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1782년 수도원은 완전히 없어졌으며 차츰 창고와 프라하 빈민을 위한 집으로 용도가 변하기 시작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이 황폐했던 건물은 본래 모습으로 재건되기 시작 하였으며 오늘날 국립 문화재로서 보호 받으며 문화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II/8 두쉬니 거리의 성 두흐 교회

8. 두쉬니 거리의 성 두흐 교회당 (Kostel sv. Ducha v Dušní ulici)

살바또르 교회당 뒤쪽 왼편으로 돌아 두쉬니 거리로 가서 사거리를 가로질러 맞은편 낡은 성 두하 교회당까지 간다. 그 교회당은 지을 때 부터 이웃하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연결되었다. 후스파 혁명의 시대에 부분적으로 손상되었고 한때 폐쇄되었다.

이 교회당은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체코 종교개혁시대인 16세기부터 프라하의 독일 루터교인들의 예배모임을 위해 사용되었고 그들은 이 교회당을 멀지않은 곳에 자신의 교회당 살바또르(I/7)를 건축할 때 까지 사용하였다.

반종교개혁 이후 성 두흐 교회당은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넘어갔다. 교회당 입구 전면에 바로크 양식의 성 얀 네뽀무쯔끼(sv. Jan Nepomucký) 동상이 있었으며, 그것은 스따로미예스뜨스께 남미예스띠(구시가 광장)의 성 미꾸라쉬(sv. Mikuláš) 교회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1689년에 대화재 이후 교회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성 두흐 교회당 뒤쪽 스따레 미예스또(구시가)로 계속 걸어가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중세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이 나온다. 시내 가까운 곳의 유대인들이 후에 옛날 학교(Stará škola) 명패를 붙인 회당을 가졌다. (오늘날 뒤쪽 골목길 이름이 우 스따레 슈꼴리(U staré školy)이다.) 현재 유대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무어인 양식으로 후에 세워진 스페인 회당(1868년부터)이 이 자리에 있다.

[체코기독사상가]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1320-1374) – 예언자와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
또는 교회개혁과 그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1358년까지의 그의 생애에 대해 분명한 기록이 없다. 모든 자료에 의하면1320년경 현재의 즐린 부근의 중간정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올로모쯔의 비숍주재 성당에 있는 라틴학교에서 분명히 공부하였고 그리고 이탈리아의 어떤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1348년에 신부가 되었다. 그 후 끄로미에지쉬의 교회법률가로 임명을 한 올로모쯔 비숍 얀 오첵을 위해 일하였다. 밀리츠는 그와 함께 까렐 4세 황제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1358년에 프라하로 왔다. 이 일은 모라비아 작은 도시에서 가졌던 그의 시각을 괄목하게 넓게하였다. 비숍 얀 오첵의 외교회의와 여행에 참가하면서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고 그의 활동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게되었다. 그래서 1361년에 프라하 교회법률가가 되었고 성 비따 성당과 성 바츨라프 무덤을 돌보는 „성비따의 사끄리스따“직을 맡았다. 그래서 맡았던 황제 사무실의 일반행정직을 사직하였다.

당시에 사제가 술 취하고 위험한 장난을 하고 사제관에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교인들을 강탈하였다. 밀리츠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있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근본적인 교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전생애의 과제로서 교회의 권력 남용자들과 투쟁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생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1363년에 프라하에서 교회와 기독교의 몰락에 대한 설교를 시작한 오스트리아의 설교자 콘라드 발드하우서로부터 더욱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밀리츠는 그해 자신의 모든 교회의 직책을 사임하고 오직 그리스도 복음의 설교가로만 활동할 것을 마음먹었다. (눅 9:62)

그의 교회당이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성 미꿀라쉬 성당이 되었다. 감성적으로 열정적으로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로인해 처음에 모든사람들이 어색해 하고 웃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모든 설교는 회개와 거듭남의 요청이었다. 관심을 갖게 하기위해 주일에 두 번 또는 그 이상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비좁아 더 넓은 스따레 미에스또의 성 일이 교회당으로 옮겼다. 그의 설교는 2-3시간 걸렸고 몇 차례의 설교를 그가 직접하였다. 성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단에 있었다. 1365년부터 구시각 광장에 있는 성 미꿀라쉬 교회에서 성직자와 학생들을 위한 라틴어 설교를 시작하였고 1366년부터 띤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독일어 설교를 하였다.

성경 공부와 교부들에 대한 공부가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설교 외에 가장 중요한 사제활동은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었다. 거룩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함께하는 주님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도와 실천이 있는 신앙고백과 특별히 성만찬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그는 영적으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설교는 수집이 되었고 설교들 가운데 대중적인 설교들 – 주석이 되었다. 설교의 뼈대만을 준비해서 설교하였기에, 그의 말은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강한 사회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언급하였고 사람을 물건처럼 주고 받는 귀족들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그의 설교는 때때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하여금 실천을 불러있으켰으며 특별히 그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하였다. 밀리츠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금욕으로 자신의 몸을 고행을 시켰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영을 긴장시켰다.

이것은 그가 더 급진주의적이 되게 하였고 그리고 동료사제들과 더 갈등하게 하였다. 그의 군사작전을 적그리스도와 비유한 까렐 4세 황제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밀리츠는 투옥되었고 그의 설교는 조사를 받았으나 어떤 문제점도 발견되지않아 결국 풀려났다. 밀리츠는 로마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1367년 그때 로마는 아비뇽에서 교황 우르반 5세의 귀향을 기다렸다. 그는 교황을 기다리면서 로마사람들에게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로인해 그는 이단으로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당시 그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교회의 훌륭한 설교가들의 도움과 공의회 회의로 적그리스도와의 전쟁과 교회의 개혁의 방법을 준비하여 모든 교회에 그것을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황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교회에서 사제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밀리츠는 체코에서 전체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라하로 다시 돌아왔다.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을 발표하였다. 그 글에서 그는 교회의 문제들(교회를 거룩한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대신 비숍들은 도둑 같고, 교회법률가들은 귀족들 마상 창 시합을 즐기고있고, 고위 성직자들은 주님의 양들을 잡아먹고, 신부들은 간음을 하고, 간통을 하고 매춘녀들과 성생활을 즐기고, 하루 종일 술에 취하여 있고, 짐승과 춤추는 여자를 사냥한다.) 을 지적하였고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그것은 말씀과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섬겨야만 하고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처럼 복음의 가난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을 제안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글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368년에 다시 로마로 떠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프라하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설교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1372년에 매춘녀들을 회개시켰다. 매춘굴에서 그들을 사왔다. 그들가운데 일부는 가정으로 돌아갔고 또는 결혼을 하였고 그리고 남은이들을 위해 집을 장만하였다. 그 집을 요한 계시록 14장 8절과 21장 1절과 2절에서 상상력을 얻어 „예루살렘“ 이라 하였다. 예루살렘은 막달라 마리아 채플에서 멀지않는 곳에 있는 공공건물에 있었다. 이 시설의 운영자금을 위해 밀리츠는 자신의 재산인 책을 팔았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고 부자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매일 이곳에서 16번의 미사가 드려졌고 성만찬이 베풀어졌으면 세명의 신분들이 설교하였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주위의 집 27채를 구입하여 예루살렘을 확장시켰다. 설교자들을 위한 그의 학교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사제들의 눈에 가시였다. 그들은 교황 레호즈 11세에게 고발하여 1374년 1월 13일 교황이 체코교회의 행정관에게 밀리츠의 이단적인 활동에 대한 조치를 위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항소문을 써서 교황에 뒤를 따라 아비뇽으로 갔다. 그는 적선행위를 계속하였고 가난 사람들은 그를 위해 도망을 쳤다. 아비뇽에서 관심을 끌어내어 동감을 얻어 완전히 복권되어 1374년 5월 21일 성령강림절에 교황청에서 설교하는 특권을 얻었다. 그 이후 지속적인 긴장의 결과로 쇠약해져서 1374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날에 아비뇽에서 죽었으며 그곳 추기경 성당에 장례되었다.

그의 죽음은 프라하 신부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밀리츠 추종자들의 박해가 있었고 예루살렘이 폐쇄되고 시토 수도회의 성 베르난트 기숙사가 들어섰다.

밀르츠의 제자이며 추종자인 야노보의 마떼이는 그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과 그 모습이며 경건하며 사도들의 현존하는 모습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다빗 유레흐

참고문헌
까냑, 미로슬브: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블라호슬라브, 프라하 1975년)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 (블라호슬라보바 출판사, 프라하 1948년)

II/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Evangelický kostel U Salvátora)

띤 거리 (Týnská ulice) 코너에서 북쪽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쪽 후스 동상 방향으로 서쪽 파지슈까 거리(Pařížská ulice)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약 100 미터 정도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오른 쪽으로 돌아 꼬스떼츠나 거리(Kostečná)로 들어선다. 들어서면 바로 제일 큰 프라하 개혁교회 교회당 우 살바또라 (U Salvátora : 라틴어로 salvator는 구원이란 뜻이다)가 서 있다. 이 건물의 역사 역시 체코 귀족 반란과 구시가 광장의 처형과 관련되어 있다.(I/4)

독일 르네상스 고딕 양식의 원래 교회당은 1611-1614년에 프라하 독일 루터교인 루돌프의 „황제 칙령“ (1609) 발표 직 후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루터교회 교인의 대표는 요하킴 안드레아스 쉴릭(Joachim Andreas Schlick – 체코이름은 Šlik 이다)이 되었다.

슐릭의 가문 문양은 오늘날 까지 교회당 지붕 뒷편에 보존되고 있다. 부유한 은광 소유자인 야히모브와 북서 체코의 몇몇 영주들이 이 가문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체코 루터교인들이 사용할 대표적인 루터교 교회당의 건축에 해외에 많은 개혁 교도들이 헌금을 하였다.

슐릭은 체코의 독일 개혁교회 교인의 대표로서 반 합스부르크 귀족 반란의 지도자 가운데 속하였다.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의 짧은 정복기간에 (1619-1620) 최고 높은 재판관이었다. 그래서 빌라호라(백산전투) 이 후 처형 귀족 명단에 첫번째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I/4) 당시 살바또르의 목사는 다빋 리빠흐(David Lippach)였다. 그는 1621년 6월 21일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슐릭과 다른 4명의 독일 귀족을 목회자로 그들을 돌보는 것을 허락 받았다.

일반적으로 교회당이 건축되면 어떤 성인에게 봉헌되어 교회당 이름을 그 성인의 이름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이 개혁교회 교회당은 성인이 아닌 구원자에게 봉헌하여 교회당 높은 지붕에 라틴어로 구원, 예수그리스도가 적혀있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형의 부분에 사도행전 4장 12절을 인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Non enim est in alio aliquo salus –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축복하는 구원자의 그림 뒤에 봉헌 상징: Sacrum DNORO(Domino nostro) Salvatori totius mundi Christo – 우리의 주,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반대편의 인용은 이사야 49:23: Reges erunt nutricii tui –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의 프라하 개혁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빌라호라 전쟁 시대를 거쳐 리빠흐 목사가 추방을 당하는 1622년까지 살바또르 교회당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 기간 중에 신자들은 슐릭의 시신과 구시가 광장 처형 후 경고로 12명의 핵심 귀족들의 머리와 함께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그의 머리를 가족이 끌어 내리도록 허락 받아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IV/4)

반 종교개혁 초기에 프라하에서 쫒겨난 살바또르 교회의 목회자와 대부분의 교인들(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은 루터교인들이 그들에게 성 얀 교회당을 사용하도록 빌려준 드레스덴의 섹슨 족 지역에서 피난처를 발견하였다.후에 그들의 망명 교회의 후손들이 드레스덴에 프라하 살바또르 전통과 관련해서 „Erlöserkirche“ – 구원자의 교회 – 이름을 지은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빌라 호라 전쟁과 반종교개혁 선언 이후 살바또르 교회당은 이웃하는 바울회 수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중에 1631년에 색슨족의 종교개혁교도 군대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많은 이주 개혁교도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처형당한 귀족들의 잘려나간 머리를 장례 지내고 살바또르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고 20세기에 수리를 하면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7세기 말에 바울 수도사들이 바로크 양식의 교회당을 인수하여 자신의 수도원과 왼쪽 갤러리를 계단 통로로 연결시켰다. 요셉 2세때 수도원을 취소한 후 자신의 거주지로 하면서 교회당 공간을 국가 주화 제작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관용의 칙령 발표 이후 1781년에 다른 프라하 루터 교인들이 다시 개혁교회 소유로 교회당을 얻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00년이 지난 뒤, 개혁교회 칙령(1861. 4. 8)이 발표된 후 프라하의 개혁 루터교회 교회당으로 돌려 받았다. (그 무렵 이 교회의 유명한 교인으로 역사가 프란티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가 있다.)

1918년에 체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들이 체코형제 개혁교단으로 통합된 뒤 살바또르 교회는 총회 예배와 대에 전체교회들의 도움으로 교회당이 수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