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6 부도보의 바츨라프 부도베쯔 집

6. 부도보의 바츨라프 부도베쯔 집
(Pamětní dům na Václava Budovce z Budova)

띤 교회 모퉁이에서 띤 거리 (Týnská ulice)로 돌아서 아름다운 장식이 있는 서쪽 성당 출입구쪽을 따라 50미터쯤 걸어 띤 정원 – 운겔트(Ungelt)앞 정원까지 간다. 문화재 안내판과 종교개혁 시대 말의 체코 종교개혁자 대표인 형제단의 지도자 부도보의 바쯜라프 부도베쯔(Václav Budovec z Budova)를 기념하는 방패를 들고 있는 귀족 동상이 있는 7/627번지 건물 왼쪽 편에 선다. 체코 귀족반란 지도자의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두번째 처형된 지도자로 이미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다.(I/4) – 이 고딕식 집은 1617년부터 당시 부도베쯔의 부인 바르뗌베르크의 안나(Anna z Vartemberka)의 소유였기에 빌라호라(백산전쟁) 이 후 처형당한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재산 몰수에 해당되지않다. 집의 동상은 바쯜라프 부도베쯔를 아무 색깔이 없는 셔츠를 입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귀족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상의 발 아래에 그의 기도가 적혀있다.: „주여, 나의 영혼을 거두어 가셔서 내가 당해야 하는 이 고통을 보지않게 하소서.“ 문화재 안내판은 „부도베쯔는 신앙의 자유와 영토의 권리를 위해 1621년 6월 21일 처형당한 27명의 체코 귀족 가운데 두번째 지도자 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띤 앞 정원 끝 부분에 있는 부도베쯔의 집 바로 뒤에 띤 정원 지역 운겔뜨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운겔뜨에 대해서는 이미 띤 사제관에 대한 설명 때 언급되었다.(I/3n) 남쪽에서 정원으로 들어가면 2/640호의 그라노브스끼(Granovský)의 출입문 집으로 이어진다. 이 집은 프라하에서 가장 잘 보존된 르네상스 양식의 집으로 유명하다. 앞 정원의 양 날개쪽에 북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로지아(한쪽에 벽이 없는 복도 모양의 방)가 보존되어있다. (90년대에 운겔뜨 전 지역이 식당으로 개조되어 가까이서 볼 수 있게되었다.) 만약에 시간이 있어 북쪽 출입지역을 빠져나와 말라 쓔뚜빠르스까 거리(Malá Štuparská ulice)로 나오면 왼쪽편에 구시가지 교회당들 가운데 두번째로 큰 성 야쿱(sv. Jakub) 교회당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있다. 교회당 본당 회중석은 프라하의 반 종교개혁 당시 (1689) 성 비뜨 성당 수리 직후 바로크 양식으로 수리되었다. 교회당 가운데 최고의 음향 때문에 연주회 또는 음악 녹음실로 각광을 받고있다.

띤 정원에서 같은 길로 되돌아 나와 띤 거리 (Týnská ulice)와 구시가 광장 모퉁이에 경건하게 서있는 신고딕 양식의 탑이 있는 집 13/605호 – 석종(石鐘)이 있는 집(U Kamenného zvonu)앞에 선다. 까렐 4세가 까렐 1세처럼 즉위하기 전에 어머니 엘리슈까 프제미슬로브나(Eliška Přemyslovna)와 잠시 거주하였다. 80년대에 원래의 초기 고딕양식으로 재건하였고 돌을 깍아 종을 만들었다.

II/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에서 북동쪽 지역에 있는 오른쪽편의 구시가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회랑이 있는 두개의 고딕건물 뒤로 띤 앞의 마리아 교회당의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당시 고딕 교회당의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프라하 성당으로 까렐 4세가 1365년에 세웠다. (1511년에 완성됨) 앞에서 이야기했듯이(I/2) 1360-69년에 독일 개혁교회 설교가 콘라드 발트하우저(Konrad Waldhauser)와 그가 죽은후 끄로므녜지쉬의 얀 밀리츠(Jan Milič z Kroměříže)가 이 교회에서 활동을 – 얀 밀리츠는 당시 일이(Jilji) 교회서부터 신부였다 (I/7) – 하였다.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교황의 면죄부 판매 문제에 대해 대학에서 논쟁이 일어났던 시대에 얀 후스(Jan Hus) 선생과 야꼬우벡(Jakoubek) 선생이 이 성당의 설교자들이었다. 면죄부 판매 시위를 벌렸던 후스의 젊은 추종자 세 사람이 띤 교회당입구 모퉁이에서 처형당하였다. (I/8).

띤 성당은 체코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유명한 후스파 교회당이었다. 당시 후스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돌르니 꼰지스또즈(dolní konzistoř)“(I/3)가 띤 교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카톨릭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호르니 꼰지스또즈(horní konzistoř)“는 프라하 성의 성 비뜨 성당에 위치하고 있었다. 1427년부터 두 기관의 교회의 대감독으로 체코국가 회의가 1435년에 선발한 얀 로끼차나 (Jan Rokycana) 선생이 1427년부터 띤 앞의 마리아 교회의 행정 관리자 및 수석 설교자가 되었다. 1436년에 로끼차나는 띤 교회로부터 바젤에서 열린 공의회에 후스파 협상 사절로 파송되었다. 바젤 공의회에서 그는 양종성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고 1437년에 다시 한번 더 발표하였다.

띤 성당에서 얀 로끼차나 선생의 장례식이 있었다.(1471) 후에 여기서 1484년 부터 후스파 신부로 임명된 미란돌라의 루찌안(Lucian z Mirandoly) 비숍의 장례식이 있었다.(1493) 1601년 여기서 루돌프 2세 황제 시대에 유명한 덴마크 천문학자 개혁파 티코 브라헤 (Tycho Brahe)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후에 귀족들의 반란 (* 번역자 주 – 30년 전쟁의 시작) 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 대학 총장 얀 예세니우스 박사 (Dr. Jan Jesenius)가 설교를 하였다. 티코 브라헤의 무덤이 오늘날까지 교회당의 중앙 제단 앞 오른쪽 기둥 옆에 보존되고있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1457-1471)의 통치시대에 띤 성당 지붕의 중앙부에 움푹들어간 곳에 금 성찬잔과 그 아래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라고 씌여있는 왕의 형상이 놓여있었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이 후스파 심볼들이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성모 마리아 형상으로 교체되었다. 성모 마리아상 뒤의 금으로된 후광은 금 성찬잔을 녹여 만든것이다.

개혁파 설교가인 얀 로끼차나 선생을 띤 교회의 설교가로 언급한 것과 관련해서 그의 주도 아래 „그리스도 율법“을 사랑하는 새로운 후스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슬로바니에 있는 새도시 후스파 수도원(III/6)의 관리자인 로끼차나의 조카 제호즈 끄라이치(Řehoř Krajčí)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서클은 다시 초대 사도 교회를 모범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열성가들은 프라하를 떠나 1457년에 잠베르크의 쿤발트 (Kunvald u Žamberka) 에서 체코 형제단 (Jednota Českých bratří) 이라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로끼차나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떠나 자신들의 목회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뻬뜨르 헬치쯔끼(Petr Chelčický)의 글들을 접하였고 그리고 이지 왕의 북 체코 통치시대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은 빌라 호라 전투때까지 체코 종교개혁운동의 주요 성당이자 중심이 되었다. 이웃나라 독일에서 1519년 얀 후스 선생의 종교개혁 유산을 이어받은 새로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등장이후 프라하에서 루터의 추종자 토마스 뮌쩌(Tomáš Müntzer)가 환영을 받았다. 1521년 베들레헴 채플(I/8)과 띤 성당에서 독일어로 설교하고 체코어로 통역되었다. 띤 교회에서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몇몇 후스파 설교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설교하였다. 1523년부터 하벨 짜헤라(Havel Cahera)가 그리고 1539년부터 바츨라브 미뜨마넥 (VáclavMitmánek) 박사가 양종성찬파 꼰지스또즈 (* 번역자 주 – 후스개혁파 최고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들은 페르디난드 1세의 반종교개혁 시대에 프라하에서 추방되었다. 다음으로 1542년부터 후스파 꼰지스또즈의 책임자가된 얀 미스또뽈(Jan Mystopol +1568)이 띤 교회의 유명한 관리자가 되었다. 루돌프 2세 황제 대헌장 발표이후 엘리아쉬 슈드(Eliáš Šúd 1609 – 1614)가 관리자가 되었고 1618년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를 왕위에 즉위 시킨 이지 디까스뚜스(Jiří Dikastus 1614-1621)가 마지막 관리자였다. 빌라 호라 전투 승리 이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 생을 마쳤다. (I/3)

[체코 기독 사상가] 보이떼흐

체코의 주요한 기독 사상가들

보이떼흐 슬라브닉 – 선교사와 유럽인

보이뗴흐 슬라브닉은 956년 뽀뎨브라디 옆의 리비쩨에 위치하고 있던 유명한 슬라브닉 왕가에서 출생하였다. 972년에는 인문학 공부를 위하여 주요한 교회 및 전도 활동의 중심지였던 마그데부르그로 떠나, 그 곳에서 9년간 머문다. 그 곳의 아달베르트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으며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얻는다. 공부를 거의 마칠 무렵 성직 수임의 첫 단계를 받아들여 부제(副祭)가 된다. 프라하로 돌아와서 교회 성직자 단에 입교하여 사제 서품을 받는다. 982년에는 레베 흐라데츠에서 프라하에서 두 번째로 주교로 선출되며 983년에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주교청에서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임장을 독일 황제인 오타 2세로부터 받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클뤼니의 개혁 운동가 대표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사상에 깊은 영감을 받는다. 곧바로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빌링기스에게 새로운 프라하의 주교로서 서품을 받는다.

교회에서 타협 할 수 없는 기독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가는데 그의 역할을 다 하였고, 교회와 사회의 악법을 철폐하는데 앞장섰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노예 매매, 다처제, 근친혼, 이혼, 폭식, 알코올 중독, 장사로 인한 주일 신성모독 등. 그러나 그는 지배자로부터, 혹은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홀로 고독해진다. 이러한 거의 대부분의 온건한 노력들에도 988년 결국 조국을 등지고 로마 교황 요한 15세에게로 길을 떠나고, 그 이후 몬테 카시나의 수도원, 그리고 마침내 로마 옆 아벤티나의 성 보니파스와 알렉시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간다. 그 곳은 종교적 삶의 치유와 교회의 강한 개혁에 힘을 쏟고 있었다. 보이뗴흐는 이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고 992년 베네딕트 수도사의 선서를 한다.

조국에서는 그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였고, 기독교의 원칙을 고수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보이뗴흐 주교는 992년 기쁨과 희망으로 요청을 수락한다. 왕자는 그에게 권력을 선물하고, 보이뗴흐는 브제브노프에 993년에 축성 받게 되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립한다. 순풍시대도 오래가지 않고 나라 안과 교회 내에서도 이교도가 도로 득세한다. 994년 보이뗴흐는 성 이지 수도원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간통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여인을 목도하고는 두 번째로 조국을 등지게 된다. 다시 아벤티나의 수도원으로 행하였다. 996년 새로운 교황 제호즈 5세에게 황제관을 수여받기 위하여 그 곳으로 젊은 독일 황제 오타3세가 온다. 보이뗴흐가 전적으로 지지하였던 후기 기독교 양상의 로마제국의 혁신에 관한 계획을 알린다.

일년 후 보이뗴흐는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국으로 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지배자에 의하여 거부당한다. 이교도 속에서 그는 기독교 정신을 설파하는 선교자로서 헝가리에서는 파논할마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폴란드로 옮겨가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이후 수행원으로서 이교도의 땅 프러시아로 향한다. 그 곳에 도착해서는 겨우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였다. 열정을 다하여 설교하였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성서 말씀에 완강하였다. 997년 4월 23일 보이뗴흐는 난폭한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한다. 이교도들은 홀린 성 내 성벽쪽에 그의 머리를 도끼로 잘라 말뚝머리에 달아놓고 선교자들에 대한 경고로 보여준다. 그의 몸은 조각조각 잘린다.

999년 보이뗴흐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1000년부터는 폴란드의 주요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그는 또한 헝가리인들에게 주요 성인인기도 한데, 그 이유는 994년 나중에 헝가리 황제가 되는 슈뗴판 1세에게 세례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골은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는 프라하 대교구의 주요 성인이다.

보이떼흐는 학식있고, 헌신적인 인물이었으며 그의 품격있는 성품은 모든 회의에서 빛났다. 지칠 줄 모르고 신의 영광과 찬미, 영적 구원을 위하여 싸웠다.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서 도덕적 원칙과 더 높은 가치를 옹호하였다. 대륙의 정신적인 일치를 강구하였으며, 칼로서가 아닌 기독정신으로서 유럽의 일치를 꾀하였다 그의 지성적 싸움의 장이자 고향은 바로 유럽이었다. 그가 스스로 기울였던 노력의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로 이끌었지만 그의 과제를 다 이루었으며 이후 세대에게 또한 역할을 전수하였다. 그의 유산은 화해, 융합, 일치의 유산이다. 그리고 또다른 유산은 유럽의 정신적 중요성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인 것이다.

( 슬라브닉 가문의 보이뗴흐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 비판적 시각과 객관성, 정확성으로 그에 대하여 기술하려 노력한 여러 도서들을 접하기를 추천한다.)

II/4 오테르스도르프의 식스트 집

4. 오테르스도르프의 식스트 집
(Někdejší dům Sixta z Ottersdorfu)

구시가 광장 앞 첼레뜨나 거리 왼편 끝에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집에 개혁의 자취가 있다. 그러나 2/553호 집은 오늘날 식스트의 집으로 통칭된다. 16세기 초부터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이 곳의 주인은 주요한 후스파 문헌학자이자 성서 연구자 및 유능한 정치가였던 오테르스도르프의 얀 식스트 (Jan Sixt z Ottersdorfu) 였다.

얀 식스트는 까렐 대학에서 학사 졸업을 하고, 오랫동안 외국에서 학업을 계속 하였다. 체코로 돌아온 후 프라하 구시가 시의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재상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많은 외교적 활동으로 귀족의 반열에도 오른다. (오테르스도르프 출신이라는 것을 이름에 붙임.) 페르디난드 1세에 대항하여 1547년 반합스브르크 봉기에 참여하여 재상의 자리에서 축출당하고 감옥 생활에 들어간다.

프라하에서 오테르스도르프의 얀 식스트는 후스파 구 양종성찬주의자들(보수파)의 편이 되었지만 루터파 신 양종성찬주의자들과의 관계도 꽤나 원활하였다. 그 당시 금지되었던 형제단 사람들과도 친교를 맺고 그들과 함께 신학과 성서 번역에 관한 관심도 나누게 된다. 1549년부터 그의 친구인 얀 멜랑뜨리흐의 인쇄소에서 체코어 성서 프라하 출판을 위하여 유능한 언어학자로써 신약 부분의 번역 작업에도 참여한다. 1575년 관록있는 외교관이자 대변가로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정대사들이 모인 가운데 체코 신앙고백(Česká konfese)의 인정에 관한 회의에서 양종성찬파를 대표하게 된다. 얀 식스트가 후스 시대 역사까지 “체코를 불안정하게 한 1546-47년 두 해의 사건들”이라 표현한 그 사건에 자신도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얀 테오도르 식스트(Jan Teodor Sixt)는 프라하 신양종성찬주의자들과 연계하였다. 그들과 같은 편에 서서 체코 반합스부르크 봉기를 준비하는 기간에 신교 의회의 변호인으로 선출되었다. 이 저항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 이후 교수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 받는다. 그러나 구시가 광장에서 교수형을 받기 직전, 그의 영향력있는 친구들의 탄원으로 황제에게 면책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톨릭을 신봉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므로 추방령을 받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서의 삶을 마친다.

식스트家의 집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몰수당한다. 이후 황제의 프라하 장관들의 비서였던 필립 파브리시우스(Filip Fabricius)가 이 집을 하사 받지만 1618년 5월 23일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당시 장관들과 함께 창문 밖으로 떨어진다. – 이 빛 바랜 식스트家의 집은 지금은 단지 이름 뿐이고 (18세기 초 재건축 됨), 1층에는 와인바가 있다.

II/3 띤 사제관

3. 띤 사제관 – 띤 앞의 성모마리아 성당 옆
Týnská fara – při kostele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에서 출발하여 구시가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슈뜨빠르뜨스까(Štpartská) 거리가 좁게 나있다. 이 거리 오른편에 까렐 4세가 띤 앞의 성모마리아 성당(Panny Marie před Týnem) (다다음편에 우리는 이 곳을 둘러볼 것이다.)을 위한 사제관으로 건립한 5/601호 건물이 있다.

이 곳은 허옇게 바랜 색으로 써있는 ‘띤 앞’ (před Týnem)이라는 이름에서 설명된다. – 이 이름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띤(Týn), 띤 마당(Týnský dvůr) 혹은 운겔트(Ungelt) 등과 관련이 있다. 11세기에 이미 띤 이라는 이름의 안뜰에는 외국 상인들을 위한 여행자 숙소와 수입품 등에 관세를 매기는 세관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오늘날의 띤 사제관을 포함하여) 외국 병원과 더불어 작은 성모 마리아 교회가 건립되었다. 이 상인들을 위한 공간은 체코 왕 뿐 아니라 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돈이 나오는 가장 중요한 장소’ 였던 띤 마당은 – 독일어로 um Geld가 프라하 시민들에 의하여 발음이 와전된 채로 운겔트라 불리웠으며, 까렐 4세에 의하여 지어진 새로운 고딕 성당도 ‘띤 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체코 개혁시대에 띤 사제관에는 양종 성찬교회들을 관리하였던 후스 교의회(husitská konzistoř)가 있었다. 이 곳에서 대주교 얀 로키찬(Jan Rokycan)은 1424-1471년 사이에 모든 후스 교회들을 대표하였다. 띤 사제관은 반 개혁파가 재집권 할 때 까지 후스파 교회들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곳의 마지막 행정관이자 목사였던 이지 디카스투스(Jiří Dikastus)는 1621년 가을 띤 사제관을 떠나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