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6.12)

2013년 6월 12일 오늘의 말씀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111편 1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로새서 3장 16절)
묵상
<정직한 마음>이 오늘 새벽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정직>의 잣대는 무엇일까?
시편이 언급한 <통회하는 심령> <상한 심령>이 
<정직한 마음>과 관련이 있을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모두가 똑 같은 경험을 하게됩니다.
다름 아닌 <회개>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깊게 성찰하고 깨닫게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이 정직한 마음이며
그 마음들이 모이는 모임인 교회는 지상의 천국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기 자신이 이 모임의 일원임을 하나님께 감사하게됩니다.
요즈음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소위 <좋은 교회>를 찾아 교회를 옮겨 다닙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이기심>입니다.
마음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두고, 내가 <큰 바위 얼굴>이 되지않는 한 
이 지상에서 <좋은 모임과 회중>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것입니다.
이미 우리 각자가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한 성전이 되지 못하는 한 
그는 어디에서도 <좋은 교회>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즈음 우리 기독교 교회의 흔들리는 가치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아진 인간의 모든 생각과 교만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내려오는 용기와 결단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시각이 달라지고 행복이 시작됩니다.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말씀 보다 높은 마음들은 거짓이며 불행의 씨앗입니다.
기도
1
하나님 보다 높아진 모든 마음의 생각과 판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용기를 내어 회개하길 원합니다.
입술의 회개만이 아니라 삶의 모습까지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제 자리로 돌리겠습니다.
주 성령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2
어제 하루를 돌아보십시다.
얼마나 어떻게 예수님 생각을 했습니까?
어제의 시간 모든 순간들을 회상하시면서
뒤돌아 보는 이 시간이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하는 오늘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6.10)

2013년 6월 10일 오늘의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

또 이르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장 18-20절)
묵상
우리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아주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때 즉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때 가장 평안합니다.
인간은 단지 이 평안을 자신의 뜻으로 찾으려고 하기때문에 
끝없는 목마름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소위 내가 “올인”하고 있는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 부요함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사람은 삶의 스타일이 달라집니다.
복의 근원이며 통로가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된 세상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닌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며
오늘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
1
주님, 나는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하늘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 성령이여 도우소서. 기도하십시다.
2
어제 하루를 돌아보십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님을 제일먼저 생각했습니까?
하루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서 예수님 생각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내 마음을 집중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어떤 도전을 받았고, 순종이 있었습니까?
전혀 의식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느낀 순간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어떤 경우에 그런 느낌이 들었고,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든 것이 주님으로 부터 온것임을 고백하였습니까?
잠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 보도록 인도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6.08)

2013년 6월 8일 오늘의 말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편 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누가복음 5장 27-28절)
묵상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 신앙의 비밀은 매우 “단순성”에 있는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그리고 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것 저것 따지지않고 그냥 100퍼센트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시킨대로 그냥 따라합니다.
직장이나 친구관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이 생기면 
단순하게 그 사람을 믿습니다.
이것 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단순하게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100퍼센트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의 “단순성”은 맹목적인 맹종의 우민화와 다릅니다.
맹신의 우민화는 광신도를 만들지만
신앙의 단순성은 극도로 정제된 신앙의 성숙함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광신도”가 되어서 안됩니다.
광신도는 정통성을 상실한 종교 이데올로기 집단을 만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체화되지 않는 신앙과 삶의 분열증세가 나타납니다.
기독교 교회로서 세속단체와 차별성을 볼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선동”이나 “값싼은혜”나 “마케팅 기법의 목회”로 
인간의 본성의 욕망을 충족시켜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드는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광신도로 가는 길입니다.
100퍼센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싸움의 결과입니다.
나의 DNA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뀔때까지
끊임없이 말씀과 함께 자기싸움을 하는 과정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때까지
신앙의 길을 정진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기도
1
성령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내가 맹신자 광신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성숙한 신자되게 하옵소서.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성숙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 성령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2.
어제하루를 돌아보며 아래 질문에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하루와 새생명 주심을 감사하며 예수님 생각했습니까?
음식을 먹을때 마다 예수님 생각하며 감사했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든 것이 주님으로 부터 온것이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예수님 생각했습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예수님 생각나며 예수님의 뜻이라는 마음의 감동을 느낀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언제 무슨 일이었으며, 그때 어떻게 반응을 하였습니까?
예수님 생각을 하지 않았던 모든 시간들을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나요?
잠자리에서 예수님 생각했나요?
3
내일 거룩한 주님의 날입니다.
이 날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싶은 자원하는 심령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예배의 초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초대에는 언제나 초대자의 초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며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된 마음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예배로 모이는 공동체(교회)를 위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6.07)

2013년 6월 7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시편 135편 6절)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시게 하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보다 더 힘이 세다는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10장 22절, 표준새번역)
묵상
나훔 1장 2절에서 나훔 선진자는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4장 1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나 주는 질투라 질투하는 하나님이기때문이다.” 하셨습니다.
질투는 매우 인간적인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은 누구나 “질투”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사랑을 향한 나의 순수한 사랑이 훼손되길 원치않는 마음의 표현이 질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길 원치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그 사랑을 받으면서 다른 우상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질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우주와 우주안에 가득찬 모든 것의 다 주인이십니다.
진정한 주인의 완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을 사랑합니다.
기도
1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지못하는 세상을 위해 중보하십시다.
2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내 마음은 다른 것을 향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의 기도를 올리십시다.
3
어제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의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다음 질문에 마음 속으로 간단하게 대답하십시다.
먹고 마실때 마다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였습니까?
주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까?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믿으며 어려운일을 만날때 주님을 기억하였습니까?
어떤 일들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신줄 느낀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오늘의 말씀이 오늘 나의 삶의 능력의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습니까?
말씀이 능력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한 체험이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도 그 말씀도 사모하지 않은 나머지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였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모든 것이 주님으로 부터 온것이고 주님의 것임을 고백했습니까?
잠자리에 들어서 예수님 생각을 했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피곤하고 아픈 몸을 눕히고 쉬게할 수 있는 집이 있으니 감사
노숙자들을 보면서 중보하게 하시니 감사
방과후 공원을 배회하며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을 보며 중보하게 하시니 감사
잔디를 깍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들을 하는 분들을 보며 중보하게 하시니 감사
뉴스를 보며 등장하는 인물들을 위해 중보하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6.06)

2013년 6월 6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
(이사야 52장 12절)

그곳(안디옥)에 이르러서 
두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 교회 회중을 불러모으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사도행전 14장 27절, 표준새번역)
묵상
프라하 도심을 거의 마비시켰던 2002년 대홍수의 경험으로
홍수에 대한 대비책이 잘 세워진것을 이번 홍수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금년에도 프라하 8 까를린 지역 일부가 물에 잠겨 주민들이 대피를 하였지만
2002년 홍수때에 비해 훨씬 경미한것 같습니다.
2002년 홍수 때는 까를린 지역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 청년들과 함께 까를린 지역에 수해복구 봉사를 하였습니다.
물이 빠진 집 안은 온통 흙탕물에 밀려온 진흙과 쓰레기 그리고 오물로 가득찼었습니다. 
집안의 오물로 범벅된 진흙과 쓰레기를 치우는 일들을 며칠동안 하였습니다.
우리교회 한분 집사님으로 부터 2002년 홍수때 힐튼 호텔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까를린 동네에서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있는 힐튼 호텔 지하층도 물에 잠겼습니다.
그당시 힐튼 호텔 총책임자는 호텔이 물에 잠길것을 예상하여 미리 깨끗한 수돗물로 
지하층을 물로채워 홍수로 밀려오는 흙탕물이 호텔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홍수가 끝난후 힐튼 호텔은 적은 비용으로 신속하게 복구를 하여 호텔 경영의 피해를 
최소화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안에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주셔서 (딤후 1장 7절)
죄악과 불행이 우리 인생을 지배하고 파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의 눈을 떠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 꼬빌리시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줄 믿습니다.
오직 믿음의 눈만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도
1
내 인생의 주인이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2
어제 하루를 돌아보십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잠을 깰때 예수님을 생각했습니까?
하루 3끼 식사할때 마다 음식을 먹을때 마다 예수님 생각했습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 일상의 삶 속에서 갑자기 예수님 생각난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그때 예수님의 뜻으로 느끼는 마음의 감동이 있었습니까?
그 예수님의 뜻에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켜 보려고 노력했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은 다른 시간들은 주로 무슨 생각을 하였습니까?
내 인생의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일을 마친후 그 일이 주님의 것으로 고백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적이 있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잠자리에서 예수님 생각했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루의 염려를 하루의 염려로 끝나게 하시니 감사
교회재산반환 이후 교회 자립에 대한 중선년의 패널토의를 잘 마치게 하시니 감사
교회들의 교회 자립의 노력이 교회간의 경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것을 알게하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