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08)

2013년 4월 8일 오늘의 말씀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하나님)의 손에 있느니라
(욥기 12장 10절)

그(하나님)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사도행전 17장 27하반절 – 28절 상반절)
묵상
큰 고통이나 곤난에서 기적적으로 헤쳐나왔을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짜릿하게 체험합니다.
그러나 평안과 행복이 지속되면 
더 나은 평안과 행복을 기대하면서 
현재의 평안과 행복은 불행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광야를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한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나안의 이방문화와 섞여살며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수고 멸하시기를 원치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직하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늘 옳아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와 마음에 대해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욥의 친구들 처럼 “불행은 인간의 죄때문”이라는 “교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살고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제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참된 회개가 있어야 
당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고
정직한 마음이 회복되어
당신 안에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회개 없는 나의 삶은
당신 없는 나 중심의 삶일 뿐이며
파멸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30)

2013년 3월 30일 오늘의 말씀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이사야 57장 15절,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0장 36절, 표준새번역)
묵상
1980년대 체코교회에 대한 책한권 읽을 정도의 알량한 지식으로
1993년에 체코에 왔습니다.
체코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서 과거의 경험은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체제와 관습이 비슷한 사회에서 
과거 경험으로 새로운 사회를 유추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체코사회를 한국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두 사회는 완전히 단절된 사회였습니다.
언어와 문화와 전혀다른 정치사회체제에서 형성된
인간의 삶과 정신세계와 습관과 심지어 교회의 삶까지 달랐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신앙인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하나의 세상은 하나님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게 침묵하시고, 
세상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하지않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지 않는 인간은 
더욱더 인간이 할 수 있는 현실세계에 집착을 하지만
인간은 더욱 고독해지고 허무해집니다.
신을 소유물로 삼고 권력을 누렸던 중세 기독교의 타락으로 
인간은 더 이상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중심의 근대시대를 열었지만
상실과 고독과 절망의 허무주의가 전염병처럼 퍼져버린 현대사회입니다.
인간 역사는 신을 죽이고 나서야 신을 발견하게됩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유사합니다.
함께 있을때 그 사람의 장점 보다 단점이 더 잘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없어지면 그때 그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직접 인간사회로 내려오셔서 스스로 자신이 누구신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당신의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셨기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규칙과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다른 피조물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악은 인간으로 부터왔습니다.
이 사실을 인간은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신을 십자가에 죽이고 난 후에야 자신들이 죽인 그 분이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비로소 자신들의 죄악을 알게되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 스스로 깨우쳐 가도록 자기희생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미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
그 분이 결국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나의 희망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욕망이고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 길을 가도록 두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보지못했지만
당신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넘어 지면 붙잡아주려고 
더 다치지 않도록 붙잡아주려고
안돼! 안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내 겨드랑 가장 가까운 곳 아래까지
당신의 두 팔을 뻗어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내 뒤에 그렇게 서 계시는 당신을 보지못하고
말없는 당신의 침묵을 
당신이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당신에게 등을 보이면서
당신을 아는것 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냥 그렇게 계속 
내 등을 바라보며 나를 따라오셨습니다.
내가 등을 돌려 당신을 바라볼때까지…
주님,
진실로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십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의 뜻을 가리고
영문도 모르고 지껄였습니다.
사순절이 끝나는 이 날
다시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서
지난 날을 뉘우칩니다.
이제 다시 깨닫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나의 희망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셔서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9)

2013년 3월 29일 오늘의 말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27편 8절)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요한복음 19장 5절)
묵상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인 표현이나 인체학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은 이웃에 대한 개방성과 개인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관계없이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 아닙니다.
얼굴을 가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얼굴을 찾으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하나님을 만나게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오늘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오늘 특별히 성금요일에,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는 자신의 얼굴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하시는 사람의 아들의 얼굴은 
동시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기도
주님,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당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나는 사랑이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사랑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가시면류관을 쓴
당신의 얼굴이 말없는 말씀을 합니다.
초지일관 언행일치의 당신의 삶이
물흐르듯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면 
나는 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얼굴 아닌것을 바라보면
그것들은 나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8)

2013년 3월 28일 오늘의 말씀

내가 세울 정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팔을 휘둘러 뭇 백성을 재판하겠다.
(이사야 51장 5절, 표준새번역+공동번역)

내가 고난을 받기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 22장 15절)
묵상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부활절 전 목요일입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을
기억하여 “세족목요일” 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Holy Thursday라고 합니다.
사순절 시작은 “재의 수요일”이라하여 참회로 시작합니다.
잿더미 위에서 재를 몸에 뿌리며 참회를 한것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오늘이 참회가 끝나는 날이고, 참회가 끝나면 
참회자들에게 “푸른 나뭇가지”를 주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날을 “푸른 목요일” 또는 “정결 목요일 (Sheer Thursday)” 부릅니다.
체코어로 “푸른 목요일”이란 뜻의 “젤레니 츠뜨브르떽”이라고 합니다.
오늘 “푸른 목요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바로 유월절 식탁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은 날을 기념하는 축제 절기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음식은 출애굽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노예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쓴나물(양고추냉이), 누룩없는 빵 무교병, 포도주,
유월절 양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을 상징하는 정강이 뼈, 삶은 계란, 
고센땅에서 흙벽돌을 만들던 작업을 연상시키는 하로셋(진흙) 소스 등입니다.
이 음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유의 상징이 
유월절을 있게한 “어린양”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유월절 식탁에서도 
“어린양”이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오늘 본문의 다음에 나오는 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어린양” 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만찬을 지금까지 성만찬으로 시행하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눅 22:19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누구나 죄의 노예로부터 구원을 얻게되었습니다.
기도
주님,
나의 희망은 
오직 당신의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그늘 이 외에
내가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서
당신과 나와 하나이기에
당신을 아는것은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아는 것은 당신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브라함 처럼
야곱 처럼
모세 처럼
욥 처럼
다윗 처럼
선지자들 처럼
베드로 처럼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 처럼
바울 처럼
당신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우주 보다 도 더 광대하신 당신이
스스로 십자가 안에 자신을 가두어 두셨기에
미천한 죄인이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게 은혜이며 감사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