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7)

2013년 3월 27일 오늘의 말씀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시편 50편 1절)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땅에서 경고하는 사람을 거역하였을 때에
그 벌을 피할 수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늘로 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배척하면
더욱더 피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5절)
묵상
인간은 대자연의 세계의 일부이지만 
대자연의 법칙대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자연의 법칙에 속하지 않은 인간만의 고유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같은 인간일지라도 바닷가에서 또는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면서
“움직이는 해”를 볼 수도 있고, “움직이는 지구”도 볼 수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는 “움직이는 해”를 보고 천동설을 주장했고
코페르니쿠스는 “움직이는 지구”를 보고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같은 자연을 자유롭게 자신의 관점의 체계로 
사물을 보고 경험을 달리합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세계를 인간은 모든 논리의 법칙을 가지고
들여다 보았지만 결국 그 중심코드는 “신”입니다.
신을 배제하고 보느냐 인정하고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미 2세기에 한 신학자가 “믿으면 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같은 인간이면서 믿음의 소유 여부에 따라
대자연과 인간들의 삶의 군상들과 그 역사로 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다른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자연과 인간 군상들의 삶과 그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내면의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우리의 삶이 모두 제자리를 잡게되고 
참된 평안을 누리게됩니다.
기도
주님,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믿음이 있으면
당신이 “사랑”임을 알게되고
다른 증거들이 필요없음을 느끼게됩니다.
그러나
때론 당신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밤을 만나
저의 믿음이 연약해지면
저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음성으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6)

2013년 3월 26일 오늘의 말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다니엘 2장 20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장 20절)
묵상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에 “잃어버린 에덴”을 찾고있습니다.
철학자들 과학자들 예술가들은 물론 
평범한 서민들 조차도 그 마음 속에 “에덴”을 찾고있습니다.
에덴은 안정을 보장해주는 인간의 완전한 미래입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에덴을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에덴이 “바벨 탑”입니다.
바벨 탑은 오래전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예술가들 정치가들 경제가들
자본가들 기술자들이 지혜를 내어 “잃어버린 에덴”을 
건설하려고 하지만 에덴과 거리가 먼 “바벨 탑”이 되고맙니다.
왜냐하면 에덴을 잃어버린 순간 
인간의 상상력은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창의력”을 부르짖지만 소유욕에 눈먼 인간은
창조적인 창조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인간의 지혜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의 “잃어버린 에덴”입니다.
과학자들이 우주의 원리를 다 밝혀낼 수 있어도
아내의 마음을 몰라 이혼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한 신뢰와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은 “잃어버린 에덴”을 스스로 찾고자하는
자기포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이세상에 현현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저희가 온전히 당신과 같아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행적을 보면서
당신의 지혜를 배우길 원합니다.
당신의 지혜대로 사는 것이 저희의 믿음이며
당신의 지혜대로 되어갈 줄 믿는 것이 
저희의 생명입니다.
당신은 진실로
저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저희의 소망은 오직하나
당신의 지혜를 배우며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하루 일상이 당신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5)

2013년 3월 25일 오늘의 말씀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땅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시편 16편 6절, 표준새번역)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분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 표준새번역)
묵상
시편의 이 축복은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의 소망을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두게합니다.
이것은 이 땅의 일을 비하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이 땅의 모든 일을 땅의 일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로 여기게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의 기쁨은 이 땅의 모든 일에서 발견됩니다.
교회당 예배 모임이나 성도들간의 주중 모임이나 만남뿐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모든 책임들과 관련된 일들과 그 만남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의 기쁨을 발견하게됩니다.
우리 성도는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유산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길 원합니다.
당신의 십자가 사랑은
내 눈을 열어
만물을 새롭게 발견하게 합니다.
위대하고 큰 것을 소망하는 나의 눈은
작고 보잘것 없는 것에서
당신의 창조의 경이로움의 희열을 봅니다.
당신앞에서 정직한 백성으로 사는 것의
기쁨과 그 뜻을 알게합니다.
열매의 달콤한 과즙이 아닌
씨앗이 품은 생명에 
내 입에서 침이 흐르게합니다.
당신의 십자가 사랑은
같은 세상 안에서
다른 당신의 세상을 발견하게합니다.
당신의 십자가는
언제나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하고
나를 새롭게 출발시키는
사랑의 플랫폼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나의 죄를 이기는 능력임을 깨닫게하시니 감사
고난주간이 있어 주님을 더욱 묵상케 하시니 감사
온 교우들이 십자가 사랑을 깨닫기를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3)

2013년 3월 23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애굽기15장 2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장 4절)
묵상
바로의 압제에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강제 노역으로 고통을 겪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해방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자유는 강제노역과는 
또 다른 고난을 필연적으로 만나야했습니다.
그 고난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과 위기였습니다.
지속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광야에 발을 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치앞도 전망할 수 없는 
마치 암흑 속을 걷는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었습니다.
넘실거리는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마른 강바닥이 생겨 강 한복판에 길이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건넌후 
양편으로 갈라져 길을 만든 강물들이 갑자기 원래대로 합쳐지면서 
바짝 뒤쫒는 바로의 기마병들을 수장시켜버렸습니다.
마치 강물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이스라엘을 도왔습니다.
모세도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이 이렇게 실현될줄 몰랐습니다.
그의 입에서 노래가 터져나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노래로 노래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소원 안에 이미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똑 같이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세밀한 구원의 활동까지도 
체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주님
감사로 제사를 하는자가
당신을 영화롭게한다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하도록
인도해주시고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신의 통치와 활동들을 볼 수 있도록 
영적 민감성을 회복하여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구원하신 당신께서
오늘 나를 그렇게 구원하고 계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거룩한 주의 날을 주셔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니 감사
경제적 위기로 불안한 삶을 구원해 주실줄 믿고 감사
주의 일꾼들을 보내주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22)

2013년 3월 22일 오늘의 말씀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약속)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약속) 하셨사오니
(사무엘하 7장 28절)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누가복음 19장 37절)
묵상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놓을 장막을 세우고 법궤를 옮겨놓았습니다.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실로의 성막이 불태워진 이후
100년이 넘어서 명실상부 예루살렘에 법궤가 있는 성막이 
제대로 세워졌습니다.
이 일로 다윗이 너무 기뻐 춤을 추었는데
그 모습을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하였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전을 세우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생겼습니다.
이동식의 성막시대를 마치고 
제대로된 건물로서 성막시대를 열겠다는 비전입니다.
그당시에는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창의적인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성전을 세우는것을 원치않았습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계획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기특한 마음을 칭송하며 약속을 하십니다.
소위 다윗 왕국의 미래입니다.
“너를 너의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여서 평안히 살게 하겠다. 
너의 집안을 한 왕조로 만들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다.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다윗은 놀라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눈에 보이는 왕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대로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나라, 영생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고 난 뒤에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하나님의 약속:이 깨달아집니다.
기도
주님
나의 한계는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눈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아는것의 한계입니다.
내가 나를 온전히 알 수 없는
그 크기가 얼마나 광대한지 
그것을 알 수 없는 한계입니다.
내가 당신앞에서
얼마나 미세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없는 한계입니다.
결국 믿음의 한계입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성령으로 나를 조명하여주사
당신앞에서 나의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