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다리 (A Bridge of Hospitality)

복음은 환대의 복음이며,
교회는 환대의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꼬빌리시교회는 안디옥교회와 같은 다민족교회입니다.
현지인과 이주민 사이에 적대감의 골이 깊은 이 체코사회에서
꼬빌리시교회는 환대의 다리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지인과 이주민 크리스찬들이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환대의 장을 만들어갈 때, 그것은 교회의 잃어버린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세상을 하나님 나라 복음에로 초청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체코교회가 그 기관화된 모습을 탈피하고, 복음 안에서 그 문화적 포로상태에서 해방되는 길도 될 것입니다.
이처럼 꼬빌리시의 세 민족 공동체는 한쪽이 다른쪽을 일방적으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이처럼 서로 도와가며 함께 성장해가는 관계입니다.
체코공동체가 체코사회에서 더 온전한 환대와 변혁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주민 크리스찬들은 그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일본 공동체가 더 온전한 환대와 변혁의 공동체로 거듭나는데, 체코 크리스찬들은 그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 설교 전문 첨부.
* 설교전문

꼬빌리시 새벽묵상 92013.05.04)

2013년 5월 4일 오늘의 말씀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편 138편 8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니라
(누가복음 9장 46-48절)
묵상
제자들의 논쟁에 예수님이 끼어들어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말은 “마음의 생각 (마음의 변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대화에 끼어드신 것은 단순한 말때문이 아니라
말이 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생각”을 감추고 명분을 찾아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말을 하더라도 
컨텍스트 안에서 보면 그 명분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포장하는 거짓임이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생각을 바르게 하기위해 늘 자기성찰을
해야합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크신 하나님이 작은 것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정신이기도 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성심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작은 것은 대부분 귀찮고 내게 이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은 누구도 주목하지 못하는
미천한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당신은 누구도 관심을 갖지않았던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어른들의 세상에 도움이 되지않는
어린아이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걸인과 불치의 병자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벗이 되신것이 아니라
당신은 그들 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공과 성취, 명예와 부귀를 꿈꾸는 내 마음은
당신과 당신의 사람과 당신의 작은 일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 새벽
저는 당신의 눈과 귀를 갖고싶습니다.
당신과 같이 되고싶습니다.
아멘
알림니다.
내일은 꼬빌리시의 다민족들이 함께하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오월 첫째주 예배는 예배후 바베큐 파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패트병으로 재미있는 공동작업을 함께하고
파티이후에 다민족 성도들이 함께 어울리는 댄스 파티가 있습니다.
바베큐 준비를 해주신 성도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 9시 30분에 봄맞이 교회 대청소가 있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의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내일 예배는 9시 30분입니다. 늦지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3)

2013년 5월 3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38편 8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장 10절)
묵상
아들이 결혼을 하여 분가를 한후 
거의 매일 제 아내와 저가 둘이서 밥상을 대합니다.
아내는 아들 없는 밥상을 대충차려도 흠이 되지않을텐데
언제나 격식을 갖추어 밥상을 차립니다.
냉장고에 저장하는 플라스틱 반찬통을 
밥상 위에 통채로 올려놓은 적이 없습니다.
몇가지 반찬은 아니지만 제대로 그릇에 담아 
밥상을 예쁘게 차리는데 신경을 씁니다.
반찬의 종류에 따라 걸맞는 예쁜 그릇에 차려진 
한끼의 밥이 배만부르게 하는것이 아니라 
아내로 부터 존중받고 사랑받는 마음까지 느끼게합니다.
아내의 밥상차림을 보면서
저는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위해 
차리시는 복음의 밥상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밥상 위의 온갖종류의 그릇들입니다.
우리들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으로 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릇들입니다.
우리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대로 사용될때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선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천하지 않기때문에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존재의 기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음은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엡스타인이 
배우들이 영화를 찍다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생면부지의 남녀를 짝 지우고 박자에 맞춰 함께 호흡을 하거나
연인처럼 서로 오래 눈을 응시하게하고
몸이 닿지않는 상태로 최대한 가까이 붙어있게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후, 참가자들 대부분이 상대방에 대해 친밀간을 느끼고
일부 남녀는 시키지도 않은 키스까지 진도가 나갔다고 합니다.
엡스타인의 결론은 
사랑하기 때문에 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인처럼 행동함으로써 사랑의 감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을 바꿀때 최고의 사랑이 찾아오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심리학자들의 무신론적인 실험과 접근을 통한 인간이해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치 감나무 밑에서 감이 절로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누워있는것과 같은 수동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실험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창조된 자신의 존재 모습대로 의지적으로 실천하면서, 이미 자신의 내면 속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그 기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영적 시각이 삐뚤어져 있고, 
우리의 판단력과 행동도 
이미 많이 빗나가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능력조차 상실하여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
깨달을 수 없는 존재들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날때부터 걷지못한 자가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이전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모두 버린
행동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일어나 걷겠습니다.
당신의 목적대로 내가 조그마한 선행을 
기쁨으로 실천 하겠습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우리를 위한 일이 내게 있음을 감사
꼬빌리시의 다민족들의 5월 모임을 기대하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2)

2013년 5월 2일 오늘의 말씀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시편 119편 76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장 5절)
묵상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성경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역사입니다.
상식적으로 볼때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는 역사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것은 
다윗이 골리앗보다 최첨단 무기를 갖추었기 때문이아닙니다.
예수님도 이길수 없는 거대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거대한 골리앗이 정치 사회 종교의 법과 권력과 언론을 총동원해서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거대한 골리앗들이 역풍을 맞았습니다.
황제와 교황의 거대한 골리앗과 맞서
중세시대 한줌의 재도 되지않은 체코 모라바 종교개혁교도들은
“주의 진리는 승리한다”는 믿음하나로 싸워
복음을 복음되게 하지 못한 교회전통의 틀을 무너트려
오직 말씀, 오직 믿음이라는 오늘 우리 개신교의 신앙전통을 세우는
초석들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위로입니다.
세상과 짝하며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것은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는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힘이 되기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성도의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영적전쟁이 아닌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권모 술수
교묘한 자기자신의 합리화
자기성찰을 전혀할 수 없는 영적 깜깜이 상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고 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만 말할줄 아는 영적 불구 상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 해석하는
크리스천 무신론자들의 양산
….
….
이와같은 사탄의 악한 계략들이
나 자신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종횡무진합니다.
악한 사탄들의 활동은 
망망대해와 같이 크고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나의 영혼은 그 위에 떠있는
작은 조각 배 같습니다.
그러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긴
성경의 이야기와 당신의 역사가
내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어
당신의 이름을 의지하며
오늘도 담대히 싸움터로 나갑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5.01)

2013년 5월 1일 오늘의 말씀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2장 31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 6장 2절)
묵상
“지키라” “행하라” 두개의 명령을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계명”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성하게 하려 왔다”고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서 
율법을 지키고 행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오직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하였고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풀수 없는 한계가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베풀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무례하지 않는것입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성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원한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모든 것을 희망합니다.
사랑은 (성도들이 서로)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의 짐을 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의 짐을 성도는 세상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짐을 서로 나누어질때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이 순종이 곧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언이며 선교입니다.
기도
주님,
“주고 받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칙입니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주고, 고용인으로 부터 돈을 받습니다.
판매자는 물건을 주고, 구입자로 부터 돈을 받습니다.
부모는 사랑을 주고, 자녀로 부터 감사를 받습니다.
사용자는 돈을 주고, 물건으로 부터 편리함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사랑을 주고, 성도로 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들이 모여
서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은혜만 받고 사랑을 주지 않으면 교회는 황폐해 집니다.
교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서로 짐을 나누어지려고 
다툼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고싶습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