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2)

2013년 3월 12일 오늘의 말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편 1절)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 났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 공동번역)
묵상
“죄를 감추고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 법은 죄를 범한후 죄를 감추고 없애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죄를 지으면 자수하여 죄를 지은만큼 형벌을 받아야
죄가 없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신학적인 설명으로 원죄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잘 설명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로마서 7장 18-20, 공동번역)
아마도 자기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분들은
사도 바울의 이 고민이 바로 자신의 경험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깊게 성찰하신 분입니다.
자기 안에서 죄 때문에 자기분열이 너무심하여
아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24절에서 탄식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죄를 말할때 바로 이 죄와 죄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는 이 죄를 가리우고 없애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죄가 없는 사람 또는 죄를 짓지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내면의 자기분열이 없는 척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미 이 죄의 실체를 들추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성찰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이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유창한 기도와 열심있는 섬김과 순종없는 화려한 성경지식의 커튼으로
자기분열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추면 감출수록 우리 내면의 자기분열은 더욱 더 심화될 뿐입니다.
결국 이상한 모습의 신자가 되고맙니다.
오늘 본문 32편 3절에서 시편기자는 
자신도 그런 사람가운데 하나였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32편 5절에서 시편기자는 또 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자기분열을 하나님께 인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죄”인 것을 깊이 깨달으면
신기하게도 죄 사함의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께 우리의 허물을 깨닫고 인정하게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 
새롭운 깨달음으로 다가오게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신비가 시작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신비에 내 삶이 황홀해집니다.
그동안 계속 살아왔던 세상이 그때부터 전혀 다른 세계로 다가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던 내 의식의 세계와 눈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믿음의 눈과 믿음의 세계안에서 살게됩니다.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하며 그 약속의 실현을 보고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오늘 시편기자는 이야기 합니다.
기도
주님,
행복은 제가 정결해지는 것에 비례합니다.
난관은 많고 내 안의 죄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오니
저로 하여금 깊은 자기성찰이 있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MRI 촬영하듯 비추어주시옵소서
내 죄를 깨닫게하시고
내 자아를 부인하게 하옵소서.
내 안의 내 죄가
가장 큰 나의 원수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11)

2013년 3월 11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편 69편 14절)

기도를 계속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골로새서 4장 2절)
묵상
오늘 시편 기자의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를 반기시는 때”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나를 반기지 않을실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시편기자는 그렇게 느낄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7절에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시편 13편 1절에서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절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짙은 먹구름위로 언제나 찬란한 태양은 빛나고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얼굴을 언제나 우리에게로 향하고 계시지만
우리들의 교만 이기심 시기심 질투 욕망 과 같은
연약함과 허물이 먹구름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이렇게 예언을 하였습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누가복음 4장 1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 주님의 말씀과 삶과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고 있는
나의 어둠을 거두어내는 과정입니다.
참된 신앙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어제 류광현 전도사님의 설교처럼
기도를 한다는 것은 참된 신앙으로 도약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에 놓지않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과정입니다.
“당장의 유익을 좇아 나를 더럽히지 않는” 과정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 (독방에서 드린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
빈방에 홀로 앉으니
고독이 밀려오네.
성삼위 함께 거하시니
모두 함께 네 식구가 되었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많은 손님들이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
하나님을 알기원하 마음들을 교회로 보내시니 감사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니 감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편은 다윗의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참된 신앙은,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당장의 유익을 좇아 나를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처한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그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다윗처럼 참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늘 하나님의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교전문 첨부.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9)

2013년 3월 9일 오늘의 말씀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편 7절)

(여호와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장 26절)
묵상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은
정의가 없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불평등의 사회는 인간의 역사이래로 지속되어왔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를 보며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받은 환대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온 아들에게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분노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의 눈에
인생을 방탕하게 살아가는 죄인과 세리와 친구하고 먹고 마시며
당시 죄의 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죄인인 병자들을
환영하고 그 질병들을 고쳐주는 예수는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였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열번을 참고 한 번 매를 듭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매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고 인생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도
그 마음의 동기를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동기를 따라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로 마지막 심판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오는 모든 한계와 허물의 장벽을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친히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모든 악에서 이기게 합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게 여기십니다.
이것을 성경 민수기는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민 6:25) 설명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사 53:11)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롭게되는 길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내용의 발전이 없는 형식적인 크리스천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여 잘못을 고치기 위해 몸부림치며
오직 예수의 사랑의 삶을 내 존재의 DNA로 만드는 씨름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악인들의 승승장구를 보면서
불의의 뻔뻔스러움을 보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당신을 생각합니다.
억울함
분노
끓어오르는 복수심
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시고 은혜베푸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순종하여
사랑으로 죄악을 이기신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내 마음이 
붙잡을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거룩한 주의 날을 주셔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니 감사
하나님의 전을 사모할 성도들을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3.08)

2013년 3월 8일 오늘의 말씀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편 18편 7절)

그러나 제가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 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2절, 표준새번역)
묵상
“내 소리를 들으셨다”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편 기자인 다윗은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부르짖음, 그의 소리가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향한 소리이며 부르짖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4절과 5절에서 자신이 겪은 환난을 
그림언어로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큰물이 나를 두렵게하고”
“지옥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
이와같은 환난 속에서 응답없는 공허한 부르짖음의 고통의 끝을 
인내로 보게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완전하지 않아 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한 순간 사람과의 관계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판단과 실수는 작게 시작되었을지 모르나
그 것이 나에게 환난이 되어 돌아올때는 
수천배 수만배의 큰 고통의 크기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이 없습니다.
그 사이 환난은 나를 더 옥죄이고
더욱 판단을 흐리게하고, 심지어 내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기도는 하지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과 잔꾀를 생각하게됩니다.
기도는 하지만 폭풍우에 춤추는 나룻배처럼 
내 삶과 내 존재는 두려워하고 흔들립니다.
이전에 했던 인간의 한계를 환난 중에서도 드러내게됩니다.
일은 더욱 더 꼬여갑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보다 두려움에 더욱 빼앗기게되고
내 기도는 점점 내게서 멀어집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붙잡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기자의 간증이요 증언입니다.
정말 인간의 실패는 자신의 실수와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언”을 듣지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성경이 증언한대로 오신 메이야 이다”라는 증언을 
사람들이 듣지않고 오히려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허물이 많은 자들이라는 성경의 말씀은
희망의 종소리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서 오신 예수의 증언을 
듣지않는 것이 정말 절망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이 증언한 것을 증언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듣지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증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붙잡아라”
“환난 중에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러면 들으시리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거스리는 역사의 흐름안에 서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두 개의 문”만이 놓여있습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기도
주님,
환난 중에
어떤 두려움이나 분노와 좌절도
내 마음을 빼앗지 않도록 하소서
내 마음은 오직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온전히 의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께 기도하게 하소서
비록 기도 소리가 
메아리 조차 없이 사라질지라도
내 마음이 공허하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의 귀에 내 소리가 들릴때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인내가 곧 믿음임을 알게하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