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법] 교육법

체코 교육법

교육법, 29/1984 Sb. (초등교육과 고등교육 기관에 대한 법) 13번의 개정후 오늘날에는 284/2002 Sb. 로 등록되어있다. 서론(preamble)은 생략되었다. 1984년 체코슬로바키아 연합정부의 입법 의회에서 교육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었다. 교육법(초등교육과 고등교육 기관에 대한 법)은 11개의 항목으로 구분되어있다.
제 1항 – 교육법 규정
교육기관에는 초등학교, 초등 예술학교, 고등학교, 특별 학교, 전문 고등학교, 유치원 등이 있다. 교육기관의 시설에 대해서는 다른 특별한 법이 관리한다. 위의 기관들은 교육부에서 담당한다. 초등, 고등교육의 체계는 초등학교, 고등 전문학교, 김나지움 그리고 특별 교육기관으로 이루어진다. 교육시설의 종류와 이름은 교육부가 지정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의 교육은 체코어로 이루어진다. 소수민족들은 교육기관에서 그들의 문화를 익히고 더 발전시키는데 관심이 있다면 그들의 모국어로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장애인들에게는 그들이 공부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초등, 고등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이 무료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사립학교나 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에서는 학비를 지불 해야 한다. 정부의 예산에 의하여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교과서가 주어진다.
제 2항 – 초등학교
초등교육 기관은 학생들의 정신, 지적 능력을 담당하며, 도덕, 윤리, 환경, 건강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교육한다. 초등교육기관은 종교교육을 행할 수 있다. 초등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을 다음 교육(고등교육)을 위해 준비시킨다. 초등학교는 9년제이며,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뉘어진다. 저학년은 1학년부터 5학년까지를 의미하며, 고학년은 6학년부터 9학년까지를 말한다. 9학년 까지 모든 학급을 만들 수 없는 경우, 학년규모가 작은 학교를 설립 할 수 있다. 이런 학교의 학생들은 나머지 학년을 다른 학교에서 이수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 교육이다. 1-2개의 종합반(1-5학년)으로 설립된 학교는 평균 최소 한 반에 13명의 학생이 있어야 한다. 저학년의 모든 학년이 최소 1반정도가 있다면, 각반의 학생수는 최소 평균 15명이어야 한다. 그 외에 특별한 경우는 교육부와 그 도시의 시청 교육 담당실에서 관리한다.
위의 경우가 아닌 학교들(도시에 있는 큰 학교)은 각반에 최소 평균 17명의 학생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 특별한 경우는 교육부와 그 도시의 시청 교육 담당실에서 관리한다.
초등 예술학교는 각각의 예술종목에서 기본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관이다. 초등 예술학교는 음악반, 무용반, 미술반, 문학반, 연극반등 등을 설립 할 수 있다.
제 3항 – 고등학교
고등교육 기관은 학생들의 고등교육을 담당하며, 학생들이 여러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대학에 진학 할 수 있게 준비하는 기관이다. 고등교육 기관은 고등전문학교, 김나지움이 있다. 김나지움은 학생들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다. 김나지움은 4년제, 6년제, 8년제가 있다. 고등전문학교는 학생들이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정한다. 전문분야는 기술, 경제, 건강, 행정, 문화, 예술등 등이며 전문학교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기도 한다. 전문학교는 4년제이다. 꼰제르바또르 는 특별한 고등전문 교육기관이다. 이 교육기관은 예술분야에 교육중심을 둔다. 음악, 무용, 연극등 등, 대학진학을 준비시키기도 한다. 꼰제르바또르는 6년제이며 무용분야는 8년제이다. 꼰제르바또르의 졸업시험은 압솔루또리움이라 한다(압솔루또리움은 자격증이다)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하려면 고등교육의 대한 관심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외에 의무교육을 수료하여야만 하며(초등학교) 고등교육의 입학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8년제 김나지움과 8년제 꼰제르바또르에 입학하려면 초등학교 5학년을 수료한 학생들이어야만 한다. 6년제 김나지움에는 초등학교 7학년을 수료한 학생들이 입학가능하다. 4년제 김나지움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의 입학이 허가된다.
고등학교의 입학시험은 각 학교 교장이 담당하며(시험날짜, 시험출제 등), 원서를 접수한 학생들은 시험 결과에 따라 합격 또는 불합격이 된다. 시험은 4월 말에 있다. 합격/불합격 통지서는 각 학생들에게 편지로 통보된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은 마뚜리따라 칭한다. 8년제, 6년제, 4년제 김나지움들의 모든 학생은 졸업시험, 마뚜리따 시험을 본다. 만약 학생이 주어진 시간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2차 재시험을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제 4항 – 특별학교
특별학교는 장애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특별교육 기관이다. 특별학교의 교사들은 보통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육방법과는 다른 특별 교육방법을 사용한다. 특별학교의 종류에는 특별 초등학교, 특별 고등학교가 있다. 이 특별교육기관도 교육부에서 담당한다.
제 5항 – 의무교육
만 6세가 되는 학생들은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다. 만약 만 6세가 된 어린이가 건강에 (신체적, 정신적)문제가 있다면 그 어린이의 부모의 요청에 의하여, 그리고 학교 교장은 병원의 의사나 정신과 의사의 요청에 근거하여 어린이의 입학을 1년 후로 미룰 수 있다. 1학년 학생이 재학하는 도중 적응을 못하거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 학부형의 동의로 학생의 2학년 진학을 1년 미룰 수 있다. 의무교육은 9년이다.
만 6세의 어린이의 부모나, 그 어린이를 담당하는 관리기관(고아원, 보육원…)에서는 정시에 학교에 입학원서를 접수할 의무가 있으며, 어린이를 매일 등교시켜야 하는 의무도 있다. 학기는 9월 1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해 8월 31일에 종료된다.

나머지 남은 항목에서는 교육기관의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학교 직원들 (교사, 학교직원), 교육부에 속하지 않는 교육기관들, 예를 들면 사관학교, 경찰 학교등등 내무부나 국방부에서 담당하는 학교들에 관하여, 사립학교와 교회학교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 법의 원문 29/1984 Sb.는 1984년 9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같으며 13번째 개정안 (284/2002 Sb.)는 2002년 6월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기독교 신자수 감소 그러나 군소교단과 종교단체 신도수 증가

기독교 신자수 감소 그러나 군소교단과 종교단체 신도수 증가

체코의 무신론주의는 점점 더 심화되고 기독교 신도수는 감소하고 있다. 최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체코의 59퍼센트가 무신론자들이다 (1991년에 39.8퍼센트 였다)
체코통계청의 통계는 이러한 경향이 주로 전통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소수교단과 종교단체는 과거보다 교인수가 더 늘어났다.

가장 큰 세 개의 기독교단(로마 카톨릭, 체코개혁교단,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단)의 신도수가 2001년에 330,000명으로 전체신도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1년에 소수교단의 교세는 모두 합해서 120,000명에 불과하였다. “통계의 분석을 부인할 수 없지만 깊은 역사를 지닌 체코형제개혁교단이 내일 문을 닫게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1990년 교회의 붐이 있은 이후 지금 우리교회는 활기를 되찾고있다”고 교회 대변인 이바나 베네쇼바가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만명이 넘는 교세를 지닌 몇 개의 교단이 군소교단 가운데 널리 알려져있다. 동방정교회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개혁교회이다. 체코에서 토대가 없는 교회들 가운데 네번째 큰 교회로 23,000명의 교세를 지닌 여호와증인 종교단체가 대표적이다. 인구조사에서 여호와 증인은 8,000명의 신도가 증가하였다.

체코비숍회의 대변인 다니엘 헤르만은 전통교단들은 지금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처를 해야만 한다고 지적하였다.
교회들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숙고하고 그 도전에 대해 응답을 해야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활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소수교단(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종교단체)의 신자들이 증가하는 이유를 사회학자 얀 스뽀우스따는 “큰 유럽교회들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지원에 익숙하여 예를 들어 미국의 기독교들 처럼 그렇게 활동적이지 않다”고 분석하였다.
체코 무신론자들은 전체인구의 3/5이다. 여성 기독교 인구가 약 57%로 남신도보다 많다. 시골이 도시에 비해서 그리고 저소득층이 고소득층 보다 기독교인구가 높다.

체코의 4개의 가장 큰 기독교 교회 및 단체
로마 카톨릭 2,700,000명
체코 형제개혁교회 117,000명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회 99,000명
여호와의 증인 23,000명
(위의 신도수는 인구조사의 통계이며 실질적인 종교활동인구는 대체로 위의 통계의 1/10로 어림잡고있다.)

이지 슈토렉 고별예배 설교

  • 연합 예배 (2003년 07월 04일)
  • 창 47-48:
  • 설교자: 얀 슈테판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이지 슈토렉 목사님의 생애 역시 쉽지않았습니다.

그는 어린나이에 어머니에 의해 아버지 축복에 대해 장자 에서와 논쟁에 휘말리게됩니다. 14년 노동으로 부인들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이 난산끝에 죽습니다. 막내아들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그리고

를 다시 만날 그때까지 수십년간 그는 죽은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7년 가뭄이 닥쳐 그와 그의 11명의 아들들이 호구지책을
강구해야했습니다. 그의 생애 이야기의 중심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불평함이 없이 슬픈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곱은 이지 슈토렉에게 생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야쿱이라 하였을 때 그는 야곱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교회당에 걸맞는
이름을 찾았을 때 벧엘에서 땅과 하늘의 소통의 도구인 사다리에 대한 야곱의 꿈 이야기가 그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는 족장처럼 자신의 대 가족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하나님이 겨루시다는 뜻) – 격투하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과 같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를 만난 사람들과 어떤 문제의식을 씨름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씨름은 그와의
교제의 시작이었고 그의 친구가되는 것은 그 씨름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문성의 차원에서 그의 삶은 내적 외적인 교회의
문제들과의 투쟁으로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친구로 그리고 아래 사람으로 또는 윗 사람으로 대하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대결을 피하지않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바른교회 기독교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를 세우려는 논쟁을 평생동안 교단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않는 그런
삯꾼 목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이지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맙시다. 그의 생애 중심에 야곱의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우리들을 축복할때까지 우리들이 떠날 수
없는 그리고 우리들이 도망칠 수 없는 어느날 갑자기 불쑥 밤에 나타난 불한당처럼 인간의 특별히 목회자의 인생의 여정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세월로 그리고 오늘날평균수명으로 보아도 그의 생애는 험한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100년을 살아도 겪지 못할 많은 것을 그는 61년의 세월동안 겪었습니다. 동시에 지난간 세월이 악하였습니까? 소상인
가정에서 소년으로서 보아온 박해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학업의 길은 쉽지않았고 전도사인 젊은 가장으로서 생활이
불안하였습니다. 젊은 공산주의 당원들과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 지쳤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과 많은 문제들로 시달렸을 것입니다.
좋은 성격이 없지 않은 남성, 아니 크고 작은 좋은 성격을 많이 소유한 남성이었습니다. 옳지않는 문제와의 씨름에 시간을
소비하지않았고 생산적인 것에 시간을 소비하였습니다. 야곱의 부정적인 모습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지는 도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가장 유명한 구약 이야기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지의 다른 모습 즉 그의 근면성, 희생, 강직성, 인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몇 개의 그가 세운 교회당인 – 체스끼 브로드의 교회당과 목사관, 꼬빌리시의 교회당과 목사관, 헤를리꼬비치의
교회당, 체스끼 브로드의 양로원 – 열매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동시에 누구도 그의 목회의 시간들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라반의
집에서 두차례의 7년간의 야곱의 침묵의 봉사기간과 이지의 시간을 비교할 순 없겠습니까? 거기에 더해서 목공소, 상인, 심지어
공산당원들, 관공서 직원들인 이웃들 부터 모든 예술 분야 즉 건축가 화가 음악가 배우들을 포함하여 목사로서 함께 일한 다른
전문분야의 전문가들 예를 들어 의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인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헌신한 교회 밖의 활동 시간들이 있습니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게이와 레스비언 기독교신자들을 위한 특별한 목회활동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큰 기대를 그가 실망시킬 때도 있었음을 저는 압니다. 가부장적인 기품이 있는 남성에 대한 기대로 사랑을 표현한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그를 아버지로 기대하는 젊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지는 도울 수는 있어도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자신의 바른 길을 찾아 걸
어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 역시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어가는 야곱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스라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를 기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바라봅니다.그들에게 유산과 약속을 주고
축복을 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표준새번역 창 48장) 야곱의 축복은 험악한 인생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비밀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는 구약성경의 놀라운 이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목자, 천사,
구원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들과 씨름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리고 우리들은 갈등의 삶을 우리들에게 준비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인생의 씨름을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그처럼
경험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형에서의 분노로부터 야곱을 보호하였습니까? 누가 라반으로부터 떠나올 때 보호의 손길을
내밀었습니까? 누가 가정의 갈등을 감내할 수 있게하였습니까? 누가 요셉을 구덩이와 애굽의 감옥에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까?
누가 기근을 극복하게하였습니까? 목자 하나님, 천사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조부
야곱이 그 하나님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위탁합니다. 우리들은 특별히 이시간 이지의 “교회의 자녀들” 꼬빌리시의 교인들을 그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

<이지 슈토렉 목사 고별예배, 얀 슈테판 목사 설교,
본문 창세기 47장 48장>

II/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Evangelický kostel U Salvátora)

띤 거리 (Týnská ulice) 코너에서 북쪽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쪽 후스 동상 방향으로 서쪽 파지슈까 거리(Pařížská ulice)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약 100 미터 정도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오른 쪽으로 돌아 꼬스떼츠나 거리(Kostečná)로 들어선다. 들어서면 바로 제일 큰 프라하 개혁교회 교회당 우 살바또라 (U Salvátora : 라틴어로 salvator는 구원이란 뜻이다)가 서 있다. 이 건물의 역사 역시 체코 귀족 반란과 구시가 광장의 처형과 관련되어 있다.(I/4)

독일 르네상스 고딕 양식의 원래 교회당은 1611-1614년에 프라하 독일 루터교인 루돌프의 „황제 칙령“ (1609) 발표 직 후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루터교회 교인의 대표는 요하킴 안드레아스 쉴릭(Joachim Andreas Schlick – 체코이름은 Šlik 이다)이 되었다.

슐릭의 가문 문양은 오늘날 까지 교회당 지붕 뒷편에 보존되고 있다. 부유한 은광 소유자인 야히모브와 북서 체코의 몇몇 영주들이 이 가문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체코 루터교인들이 사용할 대표적인 루터교 교회당의 건축에 해외에 많은 개혁 교도들이 헌금을 하였다.

슐릭은 체코의 독일 개혁교회 교인의 대표로서 반 합스부르크 귀족 반란의 지도자 가운데 속하였다.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의 짧은 정복기간에 (1619-1620) 최고 높은 재판관이었다. 그래서 빌라호라(백산전투) 이 후 처형 귀족 명단에 첫번째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I/4) 당시 살바또르의 목사는 다빋 리빠흐(David Lippach)였다. 그는 1621년 6월 21일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슐릭과 다른 4명의 독일 귀족을 목회자로 그들을 돌보는 것을 허락 받았다.

일반적으로 교회당이 건축되면 어떤 성인에게 봉헌되어 교회당 이름을 그 성인의 이름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이 개혁교회 교회당은 성인이 아닌 구원자에게 봉헌하여 교회당 높은 지붕에 라틴어로 구원, 예수그리스도가 적혀있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형의 부분에 사도행전 4장 12절을 인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Non enim est in alio aliquo salus –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축복하는 구원자의 그림 뒤에 봉헌 상징: Sacrum DNORO(Domino nostro) Salvatori totius mundi Christo – 우리의 주,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반대편의 인용은 이사야 49:23: Reges erunt nutricii tui –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의 프라하 개혁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빌라호라 전쟁 시대를 거쳐 리빠흐 목사가 추방을 당하는 1622년까지 살바또르 교회당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 기간 중에 신자들은 슐릭의 시신과 구시가 광장 처형 후 경고로 12명의 핵심 귀족들의 머리와 함께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그의 머리를 가족이 끌어 내리도록 허락 받아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IV/4)

반 종교개혁 초기에 프라하에서 쫒겨난 살바또르 교회의 목회자와 대부분의 교인들(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은 루터교인들이 그들에게 성 얀 교회당을 사용하도록 빌려준 드레스덴의 섹슨 족 지역에서 피난처를 발견하였다.후에 그들의 망명 교회의 후손들이 드레스덴에 프라하 살바또르 전통과 관련해서 „Erlöserkirche“ – 구원자의 교회 – 이름을 지은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빌라 호라 전쟁과 반종교개혁 선언 이후 살바또르 교회당은 이웃하는 바울회 수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중에 1631년에 색슨족의 종교개혁교도 군대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많은 이주 개혁교도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처형당한 귀족들의 잘려나간 머리를 장례 지내고 살바또르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고 20세기에 수리를 하면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7세기 말에 바울 수도사들이 바로크 양식의 교회당을 인수하여 자신의 수도원과 왼쪽 갤러리를 계단 통로로 연결시켰다. 요셉 2세때 수도원을 취소한 후 자신의 거주지로 하면서 교회당 공간을 국가 주화 제작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관용의 칙령 발표 이후 1781년에 다른 프라하 루터 교인들이 다시 개혁교회 소유로 교회당을 얻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00년이 지난 뒤, 개혁교회 칙령(1861. 4. 8)이 발표된 후 프라하의 개혁 루터교회 교회당으로 돌려 받았다. (그 무렵 이 교회의 유명한 교인으로 역사가 프란티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가 있다.)

1918년에 체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들이 체코형제 개혁교단으로 통합된 뒤 살바또르 교회는 총회 예배와 대에 전체교회들의 도움으로 교회당이 수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서있다.

II/6 부도보의 바츨라프 부도베쯔 집

6. 부도보의 바츨라프 부도베쯔 집
(Pamětní dům na Václava Budovce z Budova)

띤 교회 모퉁이에서 띤 거리 (Týnská ulice)로 돌아서 아름다운 장식이 있는 서쪽 성당 출입구쪽을 따라 50미터쯤 걸어 띤 정원 – 운겔트(Ungelt)앞 정원까지 간다. 문화재 안내판과 종교개혁 시대 말의 체코 종교개혁자 대표인 형제단의 지도자 부도보의 바쯜라프 부도베쯔(Václav Budovec z Budova)를 기념하는 방패를 들고 있는 귀족 동상이 있는 7/627번지 건물 왼쪽 편에 선다. 체코 귀족반란 지도자의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두번째 처형된 지도자로 이미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다.(I/4) – 이 고딕식 집은 1617년부터 당시 부도베쯔의 부인 바르뗌베르크의 안나(Anna z Vartemberka)의 소유였기에 빌라호라(백산전쟁) 이 후 처형당한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재산 몰수에 해당되지않다. 집의 동상은 바쯜라프 부도베쯔를 아무 색깔이 없는 셔츠를 입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귀족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상의 발 아래에 그의 기도가 적혀있다.: „주여, 나의 영혼을 거두어 가셔서 내가 당해야 하는 이 고통을 보지않게 하소서.“ 문화재 안내판은 „부도베쯔는 신앙의 자유와 영토의 권리를 위해 1621년 6월 21일 처형당한 27명의 체코 귀족 가운데 두번째 지도자 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띤 앞 정원 끝 부분에 있는 부도베쯔의 집 바로 뒤에 띤 정원 지역 운겔뜨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운겔뜨에 대해서는 이미 띤 사제관에 대한 설명 때 언급되었다.(I/3n) 남쪽에서 정원으로 들어가면 2/640호의 그라노브스끼(Granovský)의 출입문 집으로 이어진다. 이 집은 프라하에서 가장 잘 보존된 르네상스 양식의 집으로 유명하다. 앞 정원의 양 날개쪽에 북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로지아(한쪽에 벽이 없는 복도 모양의 방)가 보존되어있다. (90년대에 운겔뜨 전 지역이 식당으로 개조되어 가까이서 볼 수 있게되었다.) 만약에 시간이 있어 북쪽 출입지역을 빠져나와 말라 쓔뚜빠르스까 거리(Malá Štuparská ulice)로 나오면 왼쪽편에 구시가지 교회당들 가운데 두번째로 큰 성 야쿱(sv. Jakub) 교회당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있다. 교회당 본당 회중석은 프라하의 반 종교개혁 당시 (1689) 성 비뜨 성당 수리 직후 바로크 양식으로 수리되었다. 교회당 가운데 최고의 음향 때문에 연주회 또는 음악 녹음실로 각광을 받고있다.

띤 정원에서 같은 길로 되돌아 나와 띤 거리 (Týnská ulice)와 구시가 광장 모퉁이에 경건하게 서있는 신고딕 양식의 탑이 있는 집 13/605호 – 석종(石鐘)이 있는 집(U Kamenného zvonu)앞에 선다. 까렐 4세가 까렐 1세처럼 즉위하기 전에 어머니 엘리슈까 프제미슬로브나(Eliška Přemyslovna)와 잠시 거주하였다. 80년대에 원래의 초기 고딕양식으로 재건하였고 돌을 깍아 종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