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슈토렉 고별예배 설교

  • 연합 예배 (2003년 07월 04일)
  • 창 47-48:
  • 설교자: 얀 슈테판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이지 슈토렉 목사님의 생애 역시 쉽지않았습니다.

그는 어린나이에 어머니에 의해 아버지 축복에 대해 장자 에서와 논쟁에 휘말리게됩니다. 14년 노동으로 부인들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이 난산끝에 죽습니다. 막내아들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그리고

를 다시 만날 그때까지 수십년간 그는 죽은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7년 가뭄이 닥쳐 그와 그의 11명의 아들들이 호구지책을
강구해야했습니다. 그의 생애 이야기의 중심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불평함이 없이 슬픈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곱은 이지 슈토렉에게 생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야쿱이라 하였을 때 그는 야곱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교회당에 걸맞는
이름을 찾았을 때 벧엘에서 땅과 하늘의 소통의 도구인 사다리에 대한 야곱의 꿈 이야기가 그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는 족장처럼 자신의 대 가족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하나님이 겨루시다는 뜻) – 격투하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과 같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를 만난 사람들과 어떤 문제의식을 씨름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씨름은 그와의
교제의 시작이었고 그의 친구가되는 것은 그 씨름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문성의 차원에서 그의 삶은 내적 외적인 교회의
문제들과의 투쟁으로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친구로 그리고 아래 사람으로 또는 윗 사람으로 대하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대결을 피하지않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바른교회 기독교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를 세우려는 논쟁을 평생동안 교단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않는 그런
삯꾼 목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이지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맙시다. 그의 생애 중심에 야곱의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우리들을 축복할때까지 우리들이 떠날 수
없는 그리고 우리들이 도망칠 수 없는 어느날 갑자기 불쑥 밤에 나타난 불한당처럼 인간의 특별히 목회자의 인생의 여정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세월로 그리고 오늘날평균수명으로 보아도 그의 생애는 험한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100년을 살아도 겪지 못할 많은 것을 그는 61년의 세월동안 겪었습니다. 동시에 지난간 세월이 악하였습니까? 소상인
가정에서 소년으로서 보아온 박해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학업의 길은 쉽지않았고 전도사인 젊은 가장으로서 생활이
불안하였습니다. 젊은 공산주의 당원들과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 지쳤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과 많은 문제들로 시달렸을 것입니다.
좋은 성격이 없지 않은 남성, 아니 크고 작은 좋은 성격을 많이 소유한 남성이었습니다. 옳지않는 문제와의 씨름에 시간을
소비하지않았고 생산적인 것에 시간을 소비하였습니다. 야곱의 부정적인 모습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지는 도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가장 유명한 구약 이야기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지의 다른 모습 즉 그의 근면성, 희생, 강직성, 인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몇 개의 그가 세운 교회당인 – 체스끼 브로드의 교회당과 목사관, 꼬빌리시의 교회당과 목사관, 헤를리꼬비치의
교회당, 체스끼 브로드의 양로원 – 열매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동시에 누구도 그의 목회의 시간들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라반의
집에서 두차례의 7년간의 야곱의 침묵의 봉사기간과 이지의 시간을 비교할 순 없겠습니까? 거기에 더해서 목공소, 상인, 심지어
공산당원들, 관공서 직원들인 이웃들 부터 모든 예술 분야 즉 건축가 화가 음악가 배우들을 포함하여 목사로서 함께 일한 다른
전문분야의 전문가들 예를 들어 의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인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헌신한 교회 밖의 활동 시간들이 있습니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게이와 레스비언 기독교신자들을 위한 특별한 목회활동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큰 기대를 그가 실망시킬 때도 있었음을 저는 압니다. 가부장적인 기품이 있는 남성에 대한 기대로 사랑을 표현한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그를 아버지로 기대하는 젊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지는 도울 수는 있어도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자신의 바른 길을 찾아 걸
어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 역시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어가는 야곱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스라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를 기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바라봅니다.그들에게 유산과 약속을 주고
축복을 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표준새번역 창 48장) 야곱의 축복은 험악한 인생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비밀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는 구약성경의 놀라운 이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목자, 천사,
구원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들과 씨름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리고 우리들은 갈등의 삶을 우리들에게 준비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인생의 씨름을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그처럼
경험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형에서의 분노로부터 야곱을 보호하였습니까? 누가 라반으로부터 떠나올 때 보호의 손길을
내밀었습니까? 누가 가정의 갈등을 감내할 수 있게하였습니까? 누가 요셉을 구덩이와 애굽의 감옥에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까?
누가 기근을 극복하게하였습니까? 목자 하나님, 천사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조부
야곱이 그 하나님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위탁합니다. 우리들은 특별히 이시간 이지의 “교회의 자녀들” 꼬빌리시의 교인들을 그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

<이지 슈토렉 목사 고별예배, 얀 슈테판 목사 설교,
본문 창세기 47장 48장>

II/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Evangelický kostel U Salvátora)

띤 거리 (Týnská ulice) 코너에서 북쪽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쪽 후스 동상 방향으로 서쪽 파지슈까 거리(Pařížská ulice)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약 100 미터 정도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오른 쪽으로 돌아 꼬스떼츠나 거리(Kostečná)로 들어선다. 들어서면 바로 제일 큰 프라하 개혁교회 교회당 우 살바또라 (U Salvátora : 라틴어로 salvator는 구원이란 뜻이다)가 서 있다. 이 건물의 역사 역시 체코 귀족 반란과 구시가 광장의 처형과 관련되어 있다.(I/4)

독일 르네상스 고딕 양식의 원래 교회당은 1611-1614년에 프라하 독일 루터교인 루돌프의 „황제 칙령“ (1609) 발표 직 후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루터교회 교인의 대표는 요하킴 안드레아스 쉴릭(Joachim Andreas Schlick – 체코이름은 Šlik 이다)이 되었다.

슐릭의 가문 문양은 오늘날 까지 교회당 지붕 뒷편에 보존되고 있다. 부유한 은광 소유자인 야히모브와 북서 체코의 몇몇 영주들이 이 가문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체코 루터교인들이 사용할 대표적인 루터교 교회당의 건축에 해외에 많은 개혁 교도들이 헌금을 하였다.

슐릭은 체코의 독일 개혁교회 교인의 대표로서 반 합스부르크 귀족 반란의 지도자 가운데 속하였다.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의 짧은 정복기간에 (1619-1620) 최고 높은 재판관이었다. 그래서 빌라호라(백산전투) 이 후 처형 귀족 명단에 첫번째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I/4) 당시 살바또르의 목사는 다빋 리빠흐(David Lippach)였다. 그는 1621년 6월 21일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슐릭과 다른 4명의 독일 귀족을 목회자로 그들을 돌보는 것을 허락 받았다.

일반적으로 교회당이 건축되면 어떤 성인에게 봉헌되어 교회당 이름을 그 성인의 이름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이 개혁교회 교회당은 성인이 아닌 구원자에게 봉헌하여 교회당 높은 지붕에 라틴어로 구원, 예수그리스도가 적혀있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형의 부분에 사도행전 4장 12절을 인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Non enim est in alio aliquo salus –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축복하는 구원자의 그림 뒤에 봉헌 상징: Sacrum DNORO(Domino nostro) Salvatori totius mundi Christo – 우리의 주,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반대편의 인용은 이사야 49:23: Reges erunt nutricii tui –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의 프라하 개혁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빌라호라 전쟁 시대를 거쳐 리빠흐 목사가 추방을 당하는 1622년까지 살바또르 교회당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 기간 중에 신자들은 슐릭의 시신과 구시가 광장 처형 후 경고로 12명의 핵심 귀족들의 머리와 함께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그의 머리를 가족이 끌어 내리도록 허락 받아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IV/4)

반 종교개혁 초기에 프라하에서 쫒겨난 살바또르 교회의 목회자와 대부분의 교인들(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은 루터교인들이 그들에게 성 얀 교회당을 사용하도록 빌려준 드레스덴의 섹슨 족 지역에서 피난처를 발견하였다.후에 그들의 망명 교회의 후손들이 드레스덴에 프라하 살바또르 전통과 관련해서 „Erlöserkirche“ – 구원자의 교회 – 이름을 지은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빌라 호라 전쟁과 반종교개혁 선언 이후 살바또르 교회당은 이웃하는 바울회 수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중에 1631년에 색슨족의 종교개혁교도 군대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많은 이주 개혁교도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처형당한 귀족들의 잘려나간 머리를 장례 지내고 살바또르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고 20세기에 수리를 하면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7세기 말에 바울 수도사들이 바로크 양식의 교회당을 인수하여 자신의 수도원과 왼쪽 갤러리를 계단 통로로 연결시켰다. 요셉 2세때 수도원을 취소한 후 자신의 거주지로 하면서 교회당 공간을 국가 주화 제작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관용의 칙령 발표 이후 1781년에 다른 프라하 루터 교인들이 다시 개혁교회 소유로 교회당을 얻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00년이 지난 뒤, 개혁교회 칙령(1861. 4. 8)이 발표된 후 프라하의 개혁 루터교회 교회당으로 돌려 받았다. (그 무렵 이 교회의 유명한 교인으로 역사가 프란티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가 있다.)

1918년에 체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들이 체코형제 개혁교단으로 통합된 뒤 살바또르 교회는 총회 예배와 대에 전체교회들의 도움으로 교회당이 수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서있다.

II/6 부도보의 바츨라프 부도베쯔 집

6. 부도보의 바츨라프 부도베쯔 집
(Pamětní dům na Václava Budovce z Budova)

띤 교회 모퉁이에서 띤 거리 (Týnská ulice)로 돌아서 아름다운 장식이 있는 서쪽 성당 출입구쪽을 따라 50미터쯤 걸어 띤 정원 – 운겔트(Ungelt)앞 정원까지 간다. 문화재 안내판과 종교개혁 시대 말의 체코 종교개혁자 대표인 형제단의 지도자 부도보의 바쯜라프 부도베쯔(Václav Budovec z Budova)를 기념하는 방패를 들고 있는 귀족 동상이 있는 7/627번지 건물 왼쪽 편에 선다. 체코 귀족반란 지도자의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두번째 처형된 지도자로 이미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다.(I/4) – 이 고딕식 집은 1617년부터 당시 부도베쯔의 부인 바르뗌베르크의 안나(Anna z Vartemberka)의 소유였기에 빌라호라(백산전쟁) 이 후 처형당한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재산 몰수에 해당되지않다. 집의 동상은 바쯜라프 부도베쯔를 아무 색깔이 없는 셔츠를 입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귀족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상의 발 아래에 그의 기도가 적혀있다.: „주여, 나의 영혼을 거두어 가셔서 내가 당해야 하는 이 고통을 보지않게 하소서.“ 문화재 안내판은 „부도베쯔는 신앙의 자유와 영토의 권리를 위해 1621년 6월 21일 처형당한 27명의 체코 귀족 가운데 두번째 지도자 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띤 앞 정원 끝 부분에 있는 부도베쯔의 집 바로 뒤에 띤 정원 지역 운겔뜨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운겔뜨에 대해서는 이미 띤 사제관에 대한 설명 때 언급되었다.(I/3n) 남쪽에서 정원으로 들어가면 2/640호의 그라노브스끼(Granovský)의 출입문 집으로 이어진다. 이 집은 프라하에서 가장 잘 보존된 르네상스 양식의 집으로 유명하다. 앞 정원의 양 날개쪽에 북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로지아(한쪽에 벽이 없는 복도 모양의 방)가 보존되어있다. (90년대에 운겔뜨 전 지역이 식당으로 개조되어 가까이서 볼 수 있게되었다.) 만약에 시간이 있어 북쪽 출입지역을 빠져나와 말라 쓔뚜빠르스까 거리(Malá Štuparská ulice)로 나오면 왼쪽편에 구시가지 교회당들 가운데 두번째로 큰 성 야쿱(sv. Jakub) 교회당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있다. 교회당 본당 회중석은 프라하의 반 종교개혁 당시 (1689) 성 비뜨 성당 수리 직후 바로크 양식으로 수리되었다. 교회당 가운데 최고의 음향 때문에 연주회 또는 음악 녹음실로 각광을 받고있다.

띤 정원에서 같은 길로 되돌아 나와 띤 거리 (Týnská ulice)와 구시가 광장 모퉁이에 경건하게 서있는 신고딕 양식의 탑이 있는 집 13/605호 – 석종(石鐘)이 있는 집(U Kamenného zvonu)앞에 선다. 까렐 4세가 까렐 1세처럼 즉위하기 전에 어머니 엘리슈까 프제미슬로브나(Eliška Přemyslovna)와 잠시 거주하였다. 80년대에 원래의 초기 고딕양식으로 재건하였고 돌을 깍아 종을 만들었다.

II/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에서 북동쪽 지역에 있는 오른쪽편의 구시가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회랑이 있는 두개의 고딕건물 뒤로 띤 앞의 마리아 교회당의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당시 고딕 교회당의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프라하 성당으로 까렐 4세가 1365년에 세웠다. (1511년에 완성됨) 앞에서 이야기했듯이(I/2) 1360-69년에 독일 개혁교회 설교가 콘라드 발트하우저(Konrad Waldhauser)와 그가 죽은후 끄로므녜지쉬의 얀 밀리츠(Jan Milič z Kroměříže)가 이 교회에서 활동을 – 얀 밀리츠는 당시 일이(Jilji) 교회서부터 신부였다 (I/7) – 하였다.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교황의 면죄부 판매 문제에 대해 대학에서 논쟁이 일어났던 시대에 얀 후스(Jan Hus) 선생과 야꼬우벡(Jakoubek) 선생이 이 성당의 설교자들이었다. 면죄부 판매 시위를 벌렸던 후스의 젊은 추종자 세 사람이 띤 교회당입구 모퉁이에서 처형당하였다. (I/8).

띤 성당은 체코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유명한 후스파 교회당이었다. 당시 후스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돌르니 꼰지스또즈(dolní konzistoř)“(I/3)가 띤 교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카톨릭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호르니 꼰지스또즈(horní konzistoř)“는 프라하 성의 성 비뜨 성당에 위치하고 있었다. 1427년부터 두 기관의 교회의 대감독으로 체코국가 회의가 1435년에 선발한 얀 로끼차나 (Jan Rokycana) 선생이 1427년부터 띤 앞의 마리아 교회의 행정 관리자 및 수석 설교자가 되었다. 1436년에 로끼차나는 띤 교회로부터 바젤에서 열린 공의회에 후스파 협상 사절로 파송되었다. 바젤 공의회에서 그는 양종성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고 1437년에 다시 한번 더 발표하였다.

띤 성당에서 얀 로끼차나 선생의 장례식이 있었다.(1471) 후에 여기서 1484년 부터 후스파 신부로 임명된 미란돌라의 루찌안(Lucian z Mirandoly) 비숍의 장례식이 있었다.(1493) 1601년 여기서 루돌프 2세 황제 시대에 유명한 덴마크 천문학자 개혁파 티코 브라헤 (Tycho Brahe)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후에 귀족들의 반란 (* 번역자 주 – 30년 전쟁의 시작) 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 대학 총장 얀 예세니우스 박사 (Dr. Jan Jesenius)가 설교를 하였다. 티코 브라헤의 무덤이 오늘날까지 교회당의 중앙 제단 앞 오른쪽 기둥 옆에 보존되고있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1457-1471)의 통치시대에 띤 성당 지붕의 중앙부에 움푹들어간 곳에 금 성찬잔과 그 아래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라고 씌여있는 왕의 형상이 놓여있었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이 후스파 심볼들이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성모 마리아 형상으로 교체되었다. 성모 마리아상 뒤의 금으로된 후광은 금 성찬잔을 녹여 만든것이다.

개혁파 설교가인 얀 로끼차나 선생을 띤 교회의 설교가로 언급한 것과 관련해서 그의 주도 아래 „그리스도 율법“을 사랑하는 새로운 후스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슬로바니에 있는 새도시 후스파 수도원(III/6)의 관리자인 로끼차나의 조카 제호즈 끄라이치(Řehoř Krajčí)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서클은 다시 초대 사도 교회를 모범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열성가들은 프라하를 떠나 1457년에 잠베르크의 쿤발트 (Kunvald u Žamberka) 에서 체코 형제단 (Jednota Českých bratří) 이라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로끼차나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떠나 자신들의 목회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뻬뜨르 헬치쯔끼(Petr Chelčický)의 글들을 접하였고 그리고 이지 왕의 북 체코 통치시대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은 빌라 호라 전투때까지 체코 종교개혁운동의 주요 성당이자 중심이 되었다. 이웃나라 독일에서 1519년 얀 후스 선생의 종교개혁 유산을 이어받은 새로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등장이후 프라하에서 루터의 추종자 토마스 뮌쩌(Tomáš Müntzer)가 환영을 받았다. 1521년 베들레헴 채플(I/8)과 띤 성당에서 독일어로 설교하고 체코어로 통역되었다. 띤 교회에서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몇몇 후스파 설교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설교하였다. 1523년부터 하벨 짜헤라(Havel Cahera)가 그리고 1539년부터 바츨라브 미뜨마넥 (VáclavMitmánek) 박사가 양종성찬파 꼰지스또즈 (* 번역자 주 – 후스개혁파 최고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들은 페르디난드 1세의 반종교개혁 시대에 프라하에서 추방되었다. 다음으로 1542년부터 후스파 꼰지스또즈의 책임자가된 얀 미스또뽈(Jan Mystopol +1568)이 띤 교회의 유명한 관리자가 되었다. 루돌프 2세 황제 대헌장 발표이후 엘리아쉬 슈드(Eliáš Šúd 1609 – 1614)가 관리자가 되었고 1618년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를 왕위에 즉위 시킨 이지 디까스뚜스(Jiří Dikastus 1614-1621)가 마지막 관리자였다. 빌라 호라 전투 승리 이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 생을 마쳤다. (I/3)

[살며 생각하며] 베네쇼브

베네쇼브(Benešov)

얼마 전에 베네쇼브(Benešov)를 다녀왔다. 오전 9시 30분에 약속이 있어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아침 출근시간을 감안하여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8시경 프라하 4, 콩그레스(Kongres)를 지나 1번 고속도로로 진입할 무렵 마주 오는 차선에 시내로 향하는 승용차들이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줄지어 서있었다. 한참을 달려도 마주 오는 차선에 서있는 차량들의 꼬리가 끝나지 않았다. 프라하 경계를 알리는 큰 아치 조형물을 2-3 키로미터 정도 지나서야 차량 행렬이 끝났다.
도로 보수공사나 교통 사고 없이 이렇게 길게 줄을 지어 서있는 차량 행렬을 10년을 살면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프라하를 40 키로미터 정도 벗어나 베네쇼브, 린쯔(Linz오스트리아 도시) 표시가 있는 출구를 타고 국도로 들어섰다. 자세히 보지 못하면 지나칠 듯 서있는 국도변의 베네쇼브 지경을 알리는 흰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원을 그리듯 급커브에 좁고 웅덩이가 패인 아스팔트 길을 따라 비스듬하게 하늘을 가르키는듯 땅을 가르키는듯 애매하게 매달려있는 시내 방향 표시 판을 암호 해독하듯 하며 길을 찾았다. 꼬노삐슈떼 (Konopiště) 성과 호수를 몇 차례 찾았을 때 그냥 지나치면서 한번도 들러 보지 않은 도시였다.
베네쇼브는 사자바(Sazava) 강과 신화의 블라닉(Blánik)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13세기 중반에 처음 수도원이 생기면서 차츰 도시로 발전하였다. 후스 전쟁 시대에 얀 쥐쉬까(Jan Žiška)가 이 도시를 정복하였다. 1415년 개혁파의 왕 이지 뽀제브라디(Jiří z Pořebrady)와 황제 실비오 피오코로미니 (Silvio Pioccolomini)와 교황 피우스 2세(Pius II )가 만나 협상을 했던 도시가 바로 이 베네쇼브였다. 이와 같이 체코 보헤미아 역사에서 보듯 베네쇼브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9시 30분 예정된 만남이 교회당에서 시작 되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나누고 시내로 향하던 출근길의 길고 긴 차량 행렬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 교회 목회자가 „30분 마다 있는 열차로 프라하 중앙역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승용차로 출근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 그리고 업무 시간이 끝난 젊은 직장인들은 저녁 시간을 대부분 프라하에서 보내고 있어 일과 시간이 끝나면 오히려 베네쇼브 거리는 한가해 진다.“고 그 목회자는 덧붙여 말했다.
역사와 전통이 서려있는 인구 약 10만 명의 작지 않는 도시가 급격하게 가까운 대도시 프라하로 그 생활권이 편입이 되고있다. 그 목회자의 말을 빌리면 비단 베네쇼브뿐만 아니라 대도시에 인근한 중소도시들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경제가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소비 지향적인 사회 풍조“를 지적하였다.
1989년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면서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거칠고 거무틱틱한 화장실 휴지가 부드럽고 하얗게, 이곳 저곳을 드나들며 구입하던 일상용품과 식품을 거대한 창고형 슈퍼마켓에서  ‚한 방에 날리고‘, 주말 오두막집에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텃밭을 일구던 사람들이 주말 심야 극장가로 모여들고, 늦은 시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던 선술집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화려한 까페와 디스코장에 밀려나고, 대중교통이 뜸한 주말에나 움직이던 낡은 승용차들은 업그레이드 되어 아무 때나 시내를 질주하고있다. 그토록 한국 매스컴에서 자주 들어 익숙했던  „향락 산업“  „소비 문화“ 라는 말들을 이 땅 체코에서 다시 듣게 될 그날이 가까이 있음이 느껴진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11월호 32호나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