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갈등과 하나님의 일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16일)
  • 행15:36-41
  • 설교자: 이종실

031116
본문: 사도행전 15:36-41
제목: 신자의 갈등과 하나님의 일

<본문>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설교>

칠 전 저의 아이가 의료보험을 연장을 하기위해 의사의 건강소견서가 필요하여 간단한 검사를 받는데 소변검사 결과에 조금 이상이
있다고 의사가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입에서 나온 말이 체코의 외국인 보험제도에 대한 증오어린 비판이었습니다.
“체코의 외국인 보험제도는 보험이 아니라 외국인을 수탈하는 제도이다.”
“그래 병이 있어 의료보험연장을 안해준다면, 꼬박 꼬박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받아먹고 돈안 드는 조그마한 질병은 치료해주고 돈 많이 드는 큰 질병은 치료를 안해주겠다는거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에 다시 한번 분개했습니다.
그러고는 금방 체념해 버렸습니다.
“그렇지 뭐 외국인이 무슨 힘이 있나? 내 소변 담아주랴?”

외국인들은 부당함을 느껴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외국인이 조그마한 사회문제라도 일으키면 비자를 갱신해 주지않으면 그나마 그 주장을 할 공간마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알고 보면 체코인들도 똑 같이 겪는 어려움들을 저희들이 겪으면서 우리 외국인들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햇빛이 많은 지중해 지역의 유럽 사람들은 유쾌하고 다혈질이고 시끄럽습니다.
일년 내내 햇빛을 보기 어려운 중부나 북유럽 사람들은 표정이 굳고 말이 없고 질서 정연하여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날씨가 이처럼 같은 유럽인들에게도 서로 다른 기질과 문화를 만들어내듯이 저희들은 눈에 보이지않는 피해의식이 외국인인 우리들의 삶에 깊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외생활이 길어질수록 그 피해의식에서 나타나는 방어기재가 무엇인지 제 자신을 늘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하다가 조그마한 거슬림에 쉽게 나만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여 격분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특히 동양인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다고 쉽게 오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비하 하거나 반대로
체코와 그 민족 모두를 싸잡아 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겪는 피해의식과 그에 따른 삶의 불안감으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과 영혼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말과 감정이 통하는 공동체에서 그러한 상처들이 절제함이 없이 폭발되고 분출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인들의 공동체로 조직된 교회 안에서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하다는 비난을 세상으로부터 저와 여러분들이 계속 들을 것인지 아니면 그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피해의식으로 상처 받은 마음과 영혼을 지닌 외국인이면서 신자들인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아니면 우리들 스스로 생각하듯이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갈등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않거나 갈등은 변함없이 누구나 겪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않는 세상 사람들이 겪지 않는 갈등까지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갈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단순한 갈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왜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적절하게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성막구조와 그 시설에 대해서 성경은 왜?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예수님의 족보를 왜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왜 처음으로 찾아가신 곳이 갈릴리였을까?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교회 지도자들의 갈등을 왜 누가는 그렇게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까?
왜 그랬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사도행전> 이란 책이름으로 우리들은 이 책이 사도들의 선교행적을 기록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도들의 행적은 사도들의 행적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입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 인간들의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일상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도행전 누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보여주길 원하였던 것입니다.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였다.”
<수일 후에> / <며칠 뒤에> 이 말씀은 지난 주에 말씀 드린 예루살렘 회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쟁을 중재하기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으며 단지 할례대신 율법에 금지한 음식을 이방인도 지킬 것을 결정하고 모두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일 후 또는 며칠 뒤라는 이 말씀은 목회를 한지 이제 며칠이 지난 다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릅니다.
안디옥 교회를 한참 섬기던 중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1차 선교여행 때)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라고 두번째 선교여행을 제안하였습니다.
바나바는 그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이 개인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의 일 즉 하나님의 일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께 섬겨 받드는데 무슨 갈등이 있겠는가?” 생각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겨 받들면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요즈음 대부분 한국교회들이 예배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주님의 만찬으로 사랑의 식탁을 나누던 초대교회를 한국교회들이 본받으려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사랑의 식탁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는 취지를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천에 들어가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만들면 맛이 없으니 음식 준비에 좀 간단한 것을 내게 맡겨달라.”
“왜 너는 매번 그렇게 요령을 피우느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느냐”
“나는 음식은 준비하지만 설거지는 못한다.”
“그러면 내가 음식을 준비할 테니 당신이 설거지 좀 해보라”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고 신경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중재를 한 것이 식사 준비는 돌아가면서 하는데 설거지 하는 사람을 고용하자는 것입니다.
이유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이 식사 후에 있는 주일 저녁예배시간을 변경해서 드리는 오후 2시 예배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분들이 식사 후에 예배 드리는 동안, 믿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먹고 남긴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면서 이런 유사한 경우들이 많이 생깁니다.
두 번째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요한을 동행하길 원했고 바울은 마가와 함께 가는 것을 원치않았습니다.
바울이 마가를 거부하였던 이유에 대한 단서를 사도행전 13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바울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은 바나바와 바울의 1차선교 여행 때 그들의 조수였습니다.(행 13:5)
바로 이 요한이 오늘 논쟁의 인물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그가 선교여행 중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마가가 바울이 자신의 친척 바나바를 무시한데 분개해서 되돌아왔다고 주장하고 어떤 주석가는 마가가 예루살렘에 태어나고 자라서 그가 이방인 전도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지도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마가(요한)이 중도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일을 맡은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고 이유가 있어도 한번 시작한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사람이라면 묵묵히 끝까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일을 다해놓고 그리고 돌아와서 바울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설령 어떤 허물이 자신에게 있어 그것 때문에 그가 다시 돌아갔더라도 마가(요한)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아주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책임감을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우선되는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의 추천에 동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두번째 선교여행을 제안했을 때 그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일차 선교여행에서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에 박해와 오해 속에서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러있기 위해 믿음의 형제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있어 이번 여행에서 그들을 찾아보고 격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 선교여행에서 중도 하차한 마가(요한)의 경력이 이번 여행의 목적을 고려할 때 바울은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생하는 다른 믿음의 형제들의 마음이 책임감 없는 마가(요한)로 인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마가를 거부하는 바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견해는 바울과 달랐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시면 <바나바의 사촌 마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마가가 아무리 실수를 하여도 그는 자신의 사촌입니다,
바울은 중도하차라는 마가의 실수 때문에 함께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이고 바나바는 그의 장래를 위해서 그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을 것이라고 인지상정의 우리의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39절에 그들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교회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 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받들다가 주먹까지 왔다 갔다 했는지는 모르지만 심하게 다투고 화해도 못하고 서로 갈라섰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저희들 같은 일반 신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 안에 갈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갈등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없는 갈등도 만들어서 서로 다투고 싸우자는 뜻이 아닙니다.


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교회역사의 수치일 수 있는 두 성인들의 분쟁과 갈라섬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성경은 어떻게 갈등을 없애는 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끊임없이 출렁이듯 그치지않는 우리 인생들의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39절이하 41절까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그러나 바울은 실라를 택해서, 신도들로부터 주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인사를 받고, 길을 떠났다.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교회를 굳세게 하였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들이 심하게 다투고 결국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툼과 갈라짐 그 끝에 바로 이어진 현상을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러스로 갔고 바울은 신라와 함께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다가 서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섰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앞에서 주일날 식탁공동체를 준비하는 일로 둘러싼 어떤 한국교회의 갈등을 사례로 말씀드렸습니다.
교인들은 식사 후 오후 예배를 드리고 남은 설거지를 믿지않는 사람에게 교회 헌금으로 일당을 주고 일을 시킵니다.

록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정신의 실현이라는 원래의 취지는 빛이 바랬을 지라도 그래도
<사랑의 식탁 공동체>라는 그 하나님의 일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다시 원래의 취지대로 돌아올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다가 교회에 갈등이 생기면 그 하나님의 일 그것을 깨트려 버립니다.
원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밉더라도 받드는 하나님의 일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동의가 안 된다고 내 의견이 먹히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그
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오늘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은가에 대해 표명을 하지 않습니다.
심하게 다투고 서로 갈라서도 그들 사이에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갈등이 되어 중단되지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을 뿐 입니다.
갈등 속에서도 우리들이 바라 보아야 하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중단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성령을 훼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사람이 싫어 하나님의 일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들이 외국인으로서 피해의식에 젖어 살아가는 상처 받은 영혼들인데 자꾸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부정적인 말만 하면 결국 자기존재의 파괴가 옵니다.
독일에서 삼십년 이상 사신 분 한 분이 당신은 5도쯤 정신이 돌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0년 20년 후의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해야 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평상시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인정하려고 늘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장점을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내게 없는 달란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고전 1:12) 하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아
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고전 3:5-8)

몇 년 전에 지구촌교회 선교팀이 저희 교회를 다녀갔습니다.
그때 그 팀을 이끌고 오신 분이 김형준 목사님인데 현재 동안교회에 시무하십니다.
김 목사님은 목회 상담을 전공하시고 많은 경험을 갖고있습니다.
그때 강의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은 서로 다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조건 내가 양보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대로 일합니다.
바울은 책임감과 같은 기본적인 성품을 갖춘 사람을 이끄는 스타일이라면 바나바는 기본적인 성품이 부족한 사람을 일꾼으로 양육하고 성장시켜가는 스타일입니다.
갈등은 이 두 사람의 스타일의 충돌이었습니다.
갈등이 함께 받드는 하나님의 일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스타일을 서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두번째 선교여행은 사실 두 갈래 길로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러스 섬을 향하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들 두 지역은 첫번째 선교여행 때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간 선교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프러스 섬은 바나바의 고향 도시이고 15장에서 신자가 된 그 지역 통치자가 통치하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나바는 마가를 비교적 익숙하고 평온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또 다시 선교여행을 중도하차 하지않을 뿐 아니라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성장하게 하려는 바나바의 배려였습니다.
이 후에 바나바가 마가를 어떻게 잘 가르쳤는지 그 과정을 더 이상 추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두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66-67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딤후 4:11)
여기서 마가는 바로 바울이 2차선교여행때 거절한 그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2차 선교여행이 주후 50년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 바울에게 거절당한 마가가 66년경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0년 사이에 마가를 대하는 바울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바나바와 갈라선 바울이 선교여행에 함께 데리고 간 사람이 실라였습니다.
이 실라는 바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보면
“나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에 편지합니다.” (살후 1:1)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의 라틴어 입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자신과 이름을 나란히 쓸 만큼 그들의 관계는 돈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났던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실라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행 15:22)
예루살렘회의에서 바울은 실라를 처음 만났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결국 교회안에서 일어난 갈등 때문에 생겨난 회의였습니다.
만약 교회안에 갈등이 없었다면 바울과 실라의 만남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갈등을 넘어 그 갈등까지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속 좁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롬 8:28)
우리 인생 저 위에서 우리들의 불행조차도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어리석음 까지도 귀하게 여기며 당신의 일에 활용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십시다.
그 믿음 안에서 행복하고 복되고 충족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십시다.(아멘)

선교에 뒤따르는 교회의 위기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09일)
  • 행15:1-21
  • 설교자: 이종실

031109
본문: 사도행전 15:1-21
제목: 선교에 뒤따르는 교회의 위기

<본문>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설교>
바울과 바나바의 성공적인 1차 선교여행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는 안디옥교회에 다툼과 논쟁이 생겼습니다.
성공적인 선교의 결과가 교회의 내부에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선교의 성공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툼과 논쟁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체코교회와 함께하고 체코교회와 호흡하며 체코선교를 하는 우리 교회의 미래에 대해 예언적인 하나님 말씀으로 다가 오지않습니까?

타문화와 타종교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오랫동안 기독교안에서 논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은 교회사에서 소위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지나면서 나왔습니다.

거창하게 기독교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조그마한 교회 안에서 선교의 결과가 교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를 경험할 수 습니다.
가난한 달동네에 부모님들은 모두 일터에 나가 늦게 돌아오고 아이들은 저희들 끼리 그 위험하고 비탈진 골목길에서 밤늦게까지 천방지축 뛰어 놉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고, 때론 금지된 장난들도 합니다.
산 아래 한 교회의 교인이 이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 프로그램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 여기며 소중하게 관리하는 교회당을 천방지축 버릇없는 아이들에게 개방을 하는 문제를 교회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이 전도가 잠잠하던 교회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체코어로 드리는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떡과 잔을 모두 받는 성만찬을 자유롭게 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한 체코교인들이 한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두 가정은 이 예배를 거부하고 교회를 옮겼습니다.

최근의 예를 한가지 더 들자면 동성애자들을 위한 선교는 그들을 교회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21세기 교회 안에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이 마치면서 바로 이와 유사한 교회의 문제가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교회는 처음에 단지 유대인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설교하였습니다..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이방 나라에서 퍼져나가는 이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교파) 정도로 사람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실천되면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의 내용입니다.

새롭게 교인이 된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유대 기독교인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믿음의 형식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기서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신도들을 가르치기를 ‘여러분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표준새번역)
여기서 <어떤 사람> <몇몇 사람>이 누구인지 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표준새번역)
몇몇 사람/ 어떤 사람은 <바리새파 출신 유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의 문화유산을 가진 유대인들이라는 자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유대 기독교인들 서클에 들어오게되자 이들이 앞장서서 이방 기독교인들을 유대인화 해야 된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방 기독교문화를 유대 기독교 문화화 하기위해 그들이 빼어든 칼은 구원 문제였습니다.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단지 문화가 아니라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바리새파 출신 사람들의 주장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계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야의 소망을 기다리며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할례를 지켰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신앙고백을 믿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교회의 신자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이 개종을 했을 때 그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곧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표준새번역)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아마 안디옥 교회가 두쪽으로 갈라질 정도였던 같습니다.
분쟁은 구체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리고 유대에서 내려온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논쟁이 안디옥 교회 전체로 번지면서 심각한 충돌과 논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이견이 없었던 처럼 보이지만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이방인에 대한 문제로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 “얼굴을 마주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2장 14절에 야단을 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표준새번역)

지금 안디옥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조금씩 달랐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고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안고 있는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안정대신에 충돌과 다툼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선교를 우리는 굳이 해야되는가? 하는 회의가 들것입니다.
선교는 예수님이 교회에게 맡기신 “위대한 위임이자 명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하는 교회는 선교로 인해 교회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하는 가를 생각해야지 그렇다고 선교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선교에 대한 이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후의 발생할 교회의 문제에 대한 이해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도 구원은 모세의 율법인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는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방인 선교를 통해서 오히려 선교한 교회가 새롭게 진리를 깨닫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가르치면서 배우듯이 선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크게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Sharing in mission 입니다.
Mission이 Sharing in mission으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과정은 공짜가 아닙니다.
선교의 결과가 가져온 교회 안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깨닫는 축복이 될 수 있고 아니면 갈등으로 교회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체코선교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안디옥 교회의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부터 배우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교회가 자신이 세운 지도자들을 신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와 신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보게 하였다.”(표준새번역)
안디옥 교인들은 교회의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하려고 하지않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이 문제를 가지고 갔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나면 교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 문제를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섭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고 내가 더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재위에 앉아 회개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모두 영적교만에 빠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고쳐야 될 점이 목회자의 권위의식과 교인들의 우민화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목회자를 존경하는 교인들의 진심을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런 권위의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자기 성찰을하고 있습니다.
더 몸을 낮춰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저는 제가 생각하는 목회자의 표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르기 위해 저는 노력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교인은 목회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교인은 불행합니다.
목회자와 교인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행복합니다.
목회자의 자기 성찰의 노력을 교인이 악용해서도 안되고 목회자에 대한 교인의 존경심을 목회자가 악용해서 안됩니다.
자신의 목회자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고 신뢰하는 교인 그리고 교인은 나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고 목회자는 단지 그 청지기라는 자기 인식을 서로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하고 여러분 자신이 복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 말씀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저는 제 자신을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장이 있도록 끝없이 노력 할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저의 목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신뢰하는 눈으로 교회의 부족한 점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체험과 체험을 통해서 갖게 된 확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7절과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토론을 많이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 우리는,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5:7, 11)
이방 선교를 통해 그가 얻은 경험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평생에 불결한 것과 한번도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원치 않았지만 성령의 지시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갔고 그래서 고넬료의 변화를 보았기에 교인들은 그의 결론을 존중했습니다.
12절에 베드로가 말하자 “온 무리가 가만히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둘째로 교회의 문제의 토론의 기준은 말씀과 사랑입니다.
“토론을 많이 한 뒤에” 베드로가 구원은 주 예수의 은혜로 얻는다는 체험으로 내린 결론을 신자들이 존중을 하자 야고보가 한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어떤 인물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이방인에 대해서 베드로 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시면 안디옥에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저녁을 같이 먹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중에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을 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에서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할례 받은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대단히 강경파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역으로 야고보는 바울이나 바나바와 베드로 보다 교회 내 이방인의 문제에 대해 보수 강경파 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수 강경파 야고보가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나 바울과 바나바와는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이 야고보가 베드로의 주장이 구약성경 아모스에 나오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예언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베드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교회 지도자의 체험과 확신을 말씀으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할례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음이 판명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확인한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입장인 보수 강경파 야고보였기에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디옥 교회의 토론은 이렇게 누구의 이야기가 옳았는가를 판명하는 것으로 마쳐지지 않고 야고보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
러므로 나의 판단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5:19-20)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하고 토를 달았습니다.
그 내용은 우상의 재물로 드려진 불결한 음식과 성의 문란과 목매어 죽인 것을 피하고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을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바리새파 유대 기독교인들이 요구한 할례대신에 단지 금지할 음식만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위해 할례보다 금지된 음식을 지키는 것이 야고보의 생각에 더 중요했기때문이었습니까?
그러나 야고보는 오늘 본문 어디에서도 구원을 위해 금지된 음식을 실천해야된다고 이야기 하지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않았습니다.
야고보가 금지된 음식을 실천할 것을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한 이유는 완전히 다른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이 그 이유입니다.
“예로부터 어느 도시에서나 모세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다시말씀드려서 오래 전부터 모든 도시에서 모세의 율법과 그 강론을 듣기위해 안식일 마다 회당에 모였던 기독교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 부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도 그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회당(교회)생활을 하고있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제안한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신앙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랑의 식탁이 예배와 함께 중요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배드리고 그리고 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탁에 만약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즐겨먹는 음식대로 피 흘리는 고기를 준비한다면 유대인들이 그 식탁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형제 자매들을 할례문제로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유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모세의 율법의
말씀을 듣고 함께 같은 교우로서 저녁식탁에 자리할 수 있도록 율법에서 금지하는 음식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에 대한 토론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그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선교로 불거진 교회의 문제가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모든 교회들에게 두가지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인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가로막히 담이 근본적으로 허물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두가지 열매는 안디옥교회의 2차 3차 선교여행의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우들이 모두 저와 같이 선교에 대해 큰 열정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를 교회의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데 한 분도 반대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선교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활성화되고 안정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예상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 보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큰 깨달음을 갖게되었습니다.
선교는 제가 기대한 것이 아닌 오히려 교회의 문제와 불안정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의 선교와 그 선교로 인하여 예상되는 교회의 어려움이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교로 인하여 생겨나는 교회의 어려움의 끝은 혼란과 무질서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르므로 선교가 우리들에게 가져올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그 어려움을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서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하여 더욱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 공동체, 선교의 공동체로 날마다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아멘)

우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26일)
  • 행14:8-28
  • 설교자: 이종실

031026(삼위일체 열아홉번째 주일)
본문: 행 13:1-3, 14:8-28
제목: 우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
13:1-3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4:8-28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나는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선교여행 역사입니다.
오늘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을 해내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제 그들이 돌아와 선교보고를 할 때 모든 교인들이 함께 모여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놀라움의 전율에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감격의 환호성이 오늘 본문 27절 28절에서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된 선교여행의 시작과 그 마지막에 대해 기록을 한 오늘 본문은 선교는 바로 교회의 본질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
월 28일 주일 설교에서 13장 1절에 나오는 교인 명부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다양하게 구성이 되어있고 그것의 의미는
교회는 유유상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13장 2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금식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의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2)

디옥 교회가 새해가 되어 위대한 이방선교 계획을 세워 “오늘은 안디옥 내일은 세계”이런 식의 구호를 만들고, 교회당에 현수막을
내걸고, 팜플렛을 만들고, 예산을 책정하며 교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간증과 설교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금식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와 같이 언제나 그들은 주님께 예배하고 금식하다가 아마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을 통해 성령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를 생각하고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기획하고 예산을 세워 사전 답사도 다녀보고 선교사를 인선하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좋게 말해서 선교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것도 아니었고 나쁘게 말해서 선교를 선동하지도 않았습니다.

13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들은 안디옥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개역 성경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부사 <이에> 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표준새번역은 <그래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는 주의 성령의 하신 말씀에 바로 “아멘” 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디옥 교회는 놀라고 긴장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치라고 요구한 인물이 누구였습니까?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프리카 흑인, 유대인, 희랍인, 헤롯 안디바의 젓동생인 막강한 권력자, 힘없는 사람, 바울과 같이 학문이 높은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온갖 인종과 민족과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모인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가 고향 다소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사울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교인들을 1년 동안 교육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11장 2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역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아직도 어린 교회입니다.
할 일이 많은 교회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문제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목회자가 필요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의 성령이 자신의 일을 위해 안디옥 교회에게 안디옥 교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리더쉽인 바나바와 바울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주의 성령의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바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의 계획과 꿈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오히려 그 꿈과 계획을 좌절시키며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우리의 귀로 그리고 우리의 머리로 듣는 그런 신경계통의 작용이 아닙니다.
성령의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으로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교회 선교의 시작입니다.

리고 선교의 마지막은 믿음으로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한 이들이 모여 “믿음의 미음자도 모르는 이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며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는 믿음의 축제입니다.
선교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의 소식을 듣고 다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갈무리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4장 27절에서 선교는 자신들의 일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복하는 일은 우리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 지난 주(10월 12일) 주일 설교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초기 선교의 패턴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의 동포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하려고 바울은 노력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된 오실 메시아 였음을 설교합니다.
그러나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거부를 당하고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아무 저항 없이 그 도시를 떠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자신의 동포의 구원이라는 바울의 선교의 꿈과 기대는 실패를 하지만 오히려 그 열매는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박해 받으면 떠나고 그리고 다시 다른 도시의 유대교 유대인들을 찾아가고 또 다시 박해받으면 떠나는 일을 계속 반복하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오히려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가 생겨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의 결실을 보기 위해 마음을 쏟습니다.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들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주의 성령의 의지하고 있다면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들이 겪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실패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상력 안에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느끼는 느낌이지 실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해외에서 살아가는 나의 계획이 그리고 교회의 선교의 계획이 성공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이 주의 성령에 의지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13장 3절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보내니라> 표준새번역에 <떠나 보냈다>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근거로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낸다, 떠나 보낸다>의 동사는 헬라어로 <자유하게 한다 놓아준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는 교회가 두 사람을 파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 있게 안디옥 교회의 일로부터 두 사람을 자유하게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이 부분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낸다, 떠나 보낸다>를 체코어 성경은 „vyslali je k d&iacute;lu.“ k d&iacute;lu란 말이 더 붙어 있습니다.
D&iacute;lo 즉 “성령이 맡기려고 하는 일” 을 위해 그들을 떠나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께서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냐?” 의아해서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에 속한 것은 분명하지만 안디옥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 모두를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인간은 죄인이라는데 있습니다.
믿음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봉사와 섬김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종실이가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로 선교사로 일한다고 해서 이종실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신자들의 개인의 생활과 교회의 모든 일은 결국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며 살았느냐고 질문 하였습니다.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 부터 그 모든 말씀을 다 지키며 살아온 대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다 지킬 수 있어도 그건 할 수 없겠다는 뜻입니다.
완벽한 신자와 완벽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온전한 신자,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날마다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날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장, 경험, 생각, 계획에 매여 있는 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장 15절 말씀입니다.

이 바울의 설교는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앉은뱅이 치유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하면서 태어날 때 부터 발을 쓰지 못하여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 말했을 때 그는 스프링처럼 튀어 벌떡 일어서서 뚜벅 뚜벅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루가오니아 지방 사투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 ; 개역성경>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 ; 개역성경> 헤르메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신 중에 제일 높은 신입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의 아들입니다.
아마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잘생기고 귀티가 나고 품위가 있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외모에서 조금 뒤진 바울이 앞장서서 말하니 사람들 눈에 바울은 제우스 신의 대변인 헤르메스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재물을 바치듯이 그들에게 바치려고 황소와 화환을 가지고 왔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14절) / 표준새번역에 “이 말을 듣고서”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가오니아 지방 사투리를 처음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금 사람들이 왜 황소와 화환을 가지고 오는지 설명을 듣고 그제서야 바울과 바나바는 상황을 이해하게 된것입니다.
그러자 마자 두 사람은 옷을 찟으며서 무리들 속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
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 표준새번역)

15절 본문의 <헛된 일>은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황소와 꽃다발을 들고 와서 예배를 드리며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 하던 사람들이 금방 유대인들의 설득에 모두 넘어가 신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을 돌로 죽을 정도로 때렸습니다.(19절)
어떻게 설득하여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을 통해 바울의 일행과 사람들 사이가 틈이 벌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들을 겨우 말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르고 옳은 이야기를 들으면 수긍을 하면서도 불편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가 자기와의 이해관계가 충돌되면 옳아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불편한 존재들이 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부터 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처음부터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만들기도 하고 만든 신을 버리기도 합니다.

신이 아닌 것을 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 광야의 금송아지란 무엇입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받으로 올라가서 하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요를 하였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지도자가 아닌 신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가 모세처럼 자신들을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광야의 길을 인도해 줄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인도할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질은 제 마음대로 하고 싶지, 하나님께 순복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서 금송아지 우상을 데리고 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믿지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 이 우상>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도 불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습에서도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믿음이지 좋은 믿음 나쁜 믿음이란 그 말 자체가 아이러니합니다.
복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요청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를 예배하고 금식할 때에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게됩니다.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상의 삶이 성수주일입니다.
예배는 자신의 고집과 주장과 생각에 매인 나를 자유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는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들 가운데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창조주란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16절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
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법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 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16, 17절)

16절 17절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냥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종이와 종이를 풀칠해서 둘을 하나로 딱 붙이듯이 그렇게 자신을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족한 죄인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교제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하였습니다.
절대로 죄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죄 용서를 선포하시고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삶에 참된 구원과 생명이 있습니다.
이 삶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가 있는 삶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삶,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11월 말이면 2003년도 교회 회기 말이 되고 11월 마지막 주는 새로운 교회달력이 시작되는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새로운 교회회기, 새로운 교회력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헛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신의 고집, 주장, 계획들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에 나를 구속시키려는 주의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금년 한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버려할 <헛된 일>은 무엇인가?
곰곰히 반성해 보십시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내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 7:14)
만약에 우리들이 그 길을 찾기를 원한다면 단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믿음을 생각하고 믿음 안에 나의 삶을 머무르게 하길 원하는 간구와 결단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물질로 부터 자유하는 삶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19일)
  • 막10:17-27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1019 (삼위일체 18번째 주일)
본문: 막 10:17-27
제목: 물질로부터 자유 하는 삶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설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처음에 어떤 남자가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가 입은 옷을 보면 부유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가난해 보이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있습니다.
영생을 원하는데 어떻게 얻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그가 지속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이 땅의 생명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이여“ 부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율법선생님으로 생각한 예수님께 한 번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까?
지체없이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지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웃과의 관계와 관련 있는 십계명을 거론하며  그것을 지킬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부터 이웃을 향하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진지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거절하면서 계명을 단지 알고 있을 뿐아니라 어려서부터 지키며 모범적인 삶을 살고있다고 하였습니다.

수님은 그 사람이 정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것과, 그리고 자기를 뒤따르겠다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그가 자신의
길을 찾고 있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자신의 가진 것을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늘 보화를 받고 그리고 예수를 따를 수 있게됩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붙잡고있어 재물에 의지하는 그의 마음과 생각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이 땅의 보화를 가졌고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 보화를 보여줄 것을 원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에게 자신을 좇아오는 새로운 길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지 못하였고 그는 슬픈 기색을 띄었습니다. 머리를 떨구고 체념하여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땅에서 그는 재물을 모아놓은 것으로 살고 죽어서는 염려 없는 삶을 영원히 계속할 것이라고 그는 어쩌면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삶을 원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물질적으로 보장을 받았고 예수님께 와서 그는 죽음 후에 구원을 약속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교활한 수법은 그러나 예수님을 속이지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바로 태도를 바꾸기를 그리고 자기 중심을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슬퍼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역시 슬퍼하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그 사람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잘 이해를 못해서 강조해서 말씀하시길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낙타와 바늘 귀 비유는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타가 바늘 귀로 들어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재물을 가졌을 때 재물에 무엇이 나쁜 것입니까?
그러나 재물이 많지 않은 사람도 뿌리 내린 무엇 그리고 결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지 못한 것 그리고 희망하는 것을 갖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비유가 내가 아니라 부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물의 양과 그 높이가 아니라 재물과의 질적인 관계 즉 인간이 갖고있거나 아니면 원하는 재물에 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재물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은 재물을 가졌거나 매우 갈망하는 사람이 그 재물로 인해서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이웃을 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며 재물의 증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매우 물질에 매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삶을 위해 중요한 것을 생애 가운데 결정해야만 합니다.
재물의 노예로 사는 것 또는 다른 우선순위를 갖는 자유하는 삶을 사는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부자나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생의 목표인 사람에게 이러한 결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재물과 예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쉽지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슬픈 기색을 띄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 또는 갖기를 원한 사람이 하나를 선택을 하는 경우 재물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낙타는 바늘 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가 언젠가 읽었던 이야기 입니다. 아시아에도 비슷한 비유가 있습니다. 모기는 철로 만든 황소 동상을 물을 수 없다,
그럼 오늘 본문 즉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인가요?
예수님은 재물과의 옳치못한 관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적인 장애가 된다는 것을 가르켜주십니다.
재물에 생의 목표를 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유혹을 의미하며 허황된 가능성을 추구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재물은 장애물입니다.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자세가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우리를 옭아매는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하지않았고 가난을 생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난함으로 복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하는 부유함으로 자유함때문입니다.
여기서 부자가 만약 맘몬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물질을 다스린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질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며 물질이 우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쉽지않습니다.
재물에 굴복하는 것과 하나님에 굴복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원칙적으로 신에게 굴복하듯 물질에 굴복하는 것으로 끝이납니다.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근심스럽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써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써는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화 감동하실 때 그 사람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하셔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거부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재물에 대한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 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순복할 때 그 부자는 재물을 바르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하게 하는 메시지인 오늘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물질을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만찬을 받들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자유하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 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직 재물로 자신의 삶을 지향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근본적인 요청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을 지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인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12일)
  • 행 13:44-14:7
  • 설교자: 이종실

031012 (열일곱번째 삼위일체 주일)

본문: 행 13:44-14:7

제목: 말씀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인

<본문>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설교>

바울과 그의 일행은 키프러스 섬에서 소아시아(현재 터어기)로 건너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13장 16절부터 오늘 저희들이 읽은 본문 직전인 43절까지 나옵니다.

바울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관점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유대인들의 역사 이해의 논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논리로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는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 바로 그 오실 메시아임을 설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설교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어떻게 성취 되었는지 설명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고난의 종의 모습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표준새번역 사 53:6)

하나님은 이 종의 중보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과 그 증언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의 설교의 결론이 사도행전 13장 38절과 3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표준새번역 행 13:38-39)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중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 안에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근거는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 그 분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바울의 이 설교를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가 흘렀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 바울이 다시 회당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주제에 대해 질문 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종자들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설교에 대해 호감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모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은 바로 바울이 설교를 하고 한 주가 지난 뒤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한 주동안에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초대를 받아 같은 설교를 반복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온 성읍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한 주간이 지난 그 다음 안식일에 사람들이 이전 보다 더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44절은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전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이방인 역시 회당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닥쳤습니다.

오늘 말씀 45절에 “그 무리를 보고 유대 사람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바울과 바나바가 한 말을 반대하면서 비방하였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난 주에 유대인들은 특별히 바울에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반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 원인을 <시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한 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한 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설교는 지금까지 할례 받지않았다고 경멸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않는다고 경멸 받았던 이방인들, 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들의 노력과 열정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환영하고 온 동네 사람을 불러모아 축제를 벌리는 아버지를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며 섬기던 첫째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그는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마음 속으로 동생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는 자는 이웃을 증오합니다.

이러한 증오의 형태가 시기심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시기심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신에 대한 증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뼈 속 깊이 흐르는 스타의식과 특권의식의 자기 중심적인 자기 주장이 하나님에게서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향한 증오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시기심입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나는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않게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공적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과 열정이 시기심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신앙의 노력과 열정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신앙생활이 또 다른 자기 중심적인 자기주장의 표현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용서 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내가 했던 것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했던 것,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은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생활을 위한 나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과가 일방적인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평화 기쁨 그리고 의롭게됨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증오와 시기와 질투에 싸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들에게 먼저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당신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인하므로, 우리는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으니, 그것은 네가 땅 끝까지 구원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3:46, 47)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 복음이 강제로 마음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목회자는 분석을 하고 설명을 할 수 있지만 그 원인을 목회자가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강제로  없애 버리지는 못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13장 46절 47절의 바울의 이야기는, 복음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지않으면 그 복음은 다른 곳으로 떠나갑니다.

주인이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초대해야 될 사람들의 명단을 종들에게 주면서 초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논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집가고 장가가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 마다 다 이유가 있어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주인은 두 번 다시 그들에게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게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와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그 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바울은 자신을 배척하고 복음을 거부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내 동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선동이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그 지방에서 쫒겨났습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은 동원된 공권력에 굴복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장면만을 본다면 그들은 실패자들입니다.

그러나 비시이다의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믿었고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실패는 이방인들에게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어 기독교인이 되고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것을 바울의 노력과 그의 능력때문이라고 하지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이방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은 모두 믿었다.” (표준새번역 행 13:48)고 누가는 주의 말씀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믿지않아 멸망을 받았다는 식의 교리적인 가르침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주의 말씀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패배를 겪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추방을 당하고 실패를 할지라도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52절 말씀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는 자신들의 계획과 생각이 좌절되는 아픔은 겪지만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의지가 더욱 굳건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추방당하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일어났던 일이 14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기본적인 패턴은 13장의 비시디아의 안디옥의 사건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곳에서 역시 바울은 처음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헬라 사람들)이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장 2절에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패턴이 사도 바울의 초기 선교에 계속 반복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치 세상의 이치를 득도한 수도사들처럼 박해 받으면 도망쳐서 다른 도시로 가고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 아이러니칼하게 회당에서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믿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고
마음을 돌이키지않고 시기와 질투의 사신이 되어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사도의 모습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늘 본문 14장 3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놀라운 일을 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주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두 사도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기심과 우월심과 질투심과 열등의식으로 표출되는 자기 중심적인 자기주장과 자기 의로움을 벗어버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총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살 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자유하고 행복하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전파의 자신들의 계획이 좌절될 때 마다 그들은 불행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생업인 선교의 결과가 자신들의 열정과 노력과 능력과 설득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 각 자가 자신의 계획과 열정과 능력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큰 일의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여러분의 사업에 얼마나 큰 결실을 꿈 꾸십니까?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여러분의 학업에 얼마나 큰 성취를 전망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모이는 이 교회가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복음이 체코의 한국인들에게 그리고 무신론자들의 체코인들에게 얼마나 전달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할 때  하나님 자신이 일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으로서 성령의 평화와 기쁨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샘솟듯 솟아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유와 기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을 경영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