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26일)
  • 행14:8-28
  • 설교자: 이종실

031026(삼위일체 열아홉번째 주일)
본문: 행 13:1-3, 14:8-28
제목: 우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
13:1-3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4:8-28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나는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선교여행 역사입니다.
오늘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을 해내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제 그들이 돌아와 선교보고를 할 때 모든 교인들이 함께 모여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놀라움의 전율에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감격의 환호성이 오늘 본문 27절 28절에서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된 선교여행의 시작과 그 마지막에 대해 기록을 한 오늘 본문은 선교는 바로 교회의 본질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
월 28일 주일 설교에서 13장 1절에 나오는 교인 명부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다양하게 구성이 되어있고 그것의 의미는
교회는 유유상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13장 2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금식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의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2)

디옥 교회가 새해가 되어 위대한 이방선교 계획을 세워 “오늘은 안디옥 내일은 세계”이런 식의 구호를 만들고, 교회당에 현수막을
내걸고, 팜플렛을 만들고, 예산을 책정하며 교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간증과 설교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금식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와 같이 언제나 그들은 주님께 예배하고 금식하다가 아마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을 통해 성령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를 생각하고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기획하고 예산을 세워 사전 답사도 다녀보고 선교사를 인선하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좋게 말해서 선교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것도 아니었고 나쁘게 말해서 선교를 선동하지도 않았습니다.

13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들은 안디옥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개역 성경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부사 <이에> 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표준새번역은 <그래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는 주의 성령의 하신 말씀에 바로 “아멘” 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디옥 교회는 놀라고 긴장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치라고 요구한 인물이 누구였습니까?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프리카 흑인, 유대인, 희랍인, 헤롯 안디바의 젓동생인 막강한 권력자, 힘없는 사람, 바울과 같이 학문이 높은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온갖 인종과 민족과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모인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가 고향 다소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사울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교인들을 1년 동안 교육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11장 2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역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아직도 어린 교회입니다.
할 일이 많은 교회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문제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목회자가 필요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의 성령이 자신의 일을 위해 안디옥 교회에게 안디옥 교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리더쉽인 바나바와 바울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주의 성령의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바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의 계획과 꿈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오히려 그 꿈과 계획을 좌절시키며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우리의 귀로 그리고 우리의 머리로 듣는 그런 신경계통의 작용이 아닙니다.
성령의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으로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교회 선교의 시작입니다.

리고 선교의 마지막은 믿음으로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한 이들이 모여 “믿음의 미음자도 모르는 이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며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는 믿음의 축제입니다.
선교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의 소식을 듣고 다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갈무리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4장 27절에서 선교는 자신들의 일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복하는 일은 우리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 지난 주(10월 12일) 주일 설교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초기 선교의 패턴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의 동포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하려고 바울은 노력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된 오실 메시아 였음을 설교합니다.
그러나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거부를 당하고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아무 저항 없이 그 도시를 떠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자신의 동포의 구원이라는 바울의 선교의 꿈과 기대는 실패를 하지만 오히려 그 열매는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박해 받으면 떠나고 그리고 다시 다른 도시의 유대교 유대인들을 찾아가고 또 다시 박해받으면 떠나는 일을 계속 반복하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오히려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가 생겨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의 결실을 보기 위해 마음을 쏟습니다.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들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주의 성령의 의지하고 있다면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들이 겪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실패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상력 안에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느끼는 느낌이지 실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해외에서 살아가는 나의 계획이 그리고 교회의 선교의 계획이 성공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이 주의 성령에 의지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13장 3절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보내니라> 표준새번역에 <떠나 보냈다>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근거로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낸다, 떠나 보낸다>의 동사는 헬라어로 <자유하게 한다 놓아준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는 교회가 두 사람을 파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 있게 안디옥 교회의 일로부터 두 사람을 자유하게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이 부분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낸다, 떠나 보낸다>를 체코어 성경은 „vyslali je k d&iacute;lu.“ k d&iacute;lu란 말이 더 붙어 있습니다.
D&iacute;lo 즉 “성령이 맡기려고 하는 일” 을 위해 그들을 떠나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께서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냐?” 의아해서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에 속한 것은 분명하지만 안디옥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 모두를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인간은 죄인이라는데 있습니다.
믿음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봉사와 섬김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종실이가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로 선교사로 일한다고 해서 이종실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신자들의 개인의 생활과 교회의 모든 일은 결국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며 살았느냐고 질문 하였습니다.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 부터 그 모든 말씀을 다 지키며 살아온 대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다 지킬 수 있어도 그건 할 수 없겠다는 뜻입니다.
완벽한 신자와 완벽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온전한 신자,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날마다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날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장, 경험, 생각, 계획에 매여 있는 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장 15절 말씀입니다.

이 바울의 설교는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앉은뱅이 치유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하면서 태어날 때 부터 발을 쓰지 못하여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 말했을 때 그는 스프링처럼 튀어 벌떡 일어서서 뚜벅 뚜벅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루가오니아 지방 사투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 ; 개역성경>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 ; 개역성경> 헤르메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신 중에 제일 높은 신입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의 아들입니다.
아마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잘생기고 귀티가 나고 품위가 있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외모에서 조금 뒤진 바울이 앞장서서 말하니 사람들 눈에 바울은 제우스 신의 대변인 헤르메스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재물을 바치듯이 그들에게 바치려고 황소와 화환을 가지고 왔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14절) / 표준새번역에 “이 말을 듣고서”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가오니아 지방 사투리를 처음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금 사람들이 왜 황소와 화환을 가지고 오는지 설명을 듣고 그제서야 바울과 바나바는 상황을 이해하게 된것입니다.
그러자 마자 두 사람은 옷을 찟으며서 무리들 속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
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 표준새번역)

15절 본문의 <헛된 일>은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황소와 꽃다발을 들고 와서 예배를 드리며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 하던 사람들이 금방 유대인들의 설득에 모두 넘어가 신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을 돌로 죽을 정도로 때렸습니다.(19절)
어떻게 설득하여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을 통해 바울의 일행과 사람들 사이가 틈이 벌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들을 겨우 말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르고 옳은 이야기를 들으면 수긍을 하면서도 불편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가 자기와의 이해관계가 충돌되면 옳아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불편한 존재들이 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부터 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처음부터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만들기도 하고 만든 신을 버리기도 합니다.

신이 아닌 것을 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 광야의 금송아지란 무엇입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받으로 올라가서 하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요를 하였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지도자가 아닌 신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가 모세처럼 자신들을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광야의 길을 인도해 줄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인도할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질은 제 마음대로 하고 싶지, 하나님께 순복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서 금송아지 우상을 데리고 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믿지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 이 우상>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도 불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습에서도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믿음이지 좋은 믿음 나쁜 믿음이란 그 말 자체가 아이러니합니다.
복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요청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를 예배하고 금식할 때에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게됩니다.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상의 삶이 성수주일입니다.
예배는 자신의 고집과 주장과 생각에 매인 나를 자유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는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들 가운데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창조주란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16절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
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법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 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16, 17절)

16절 17절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냥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종이와 종이를 풀칠해서 둘을 하나로 딱 붙이듯이 그렇게 자신을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족한 죄인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교제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하였습니다.
절대로 죄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죄 용서를 선포하시고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삶에 참된 구원과 생명이 있습니다.
이 삶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가 있는 삶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삶,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11월 말이면 2003년도 교회 회기 말이 되고 11월 마지막 주는 새로운 교회달력이 시작되는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새로운 교회회기, 새로운 교회력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헛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신의 고집, 주장, 계획들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에 나를 구속시키려는 주의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금년 한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버려할 <헛된 일>은 무엇인가?
곰곰히 반성해 보십시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내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 7:14)
만약에 우리들이 그 길을 찾기를 원한다면 단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믿음을 생각하고 믿음 안에 나의 삶을 머무르게 하길 원하는 간구와 결단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물질로 부터 자유하는 삶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19일)
  • 막10:17-27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1019 (삼위일체 18번째 주일)
본문: 막 10:17-27
제목: 물질로부터 자유 하는 삶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설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처음에 어떤 남자가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가 입은 옷을 보면 부유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가난해 보이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있습니다.
영생을 원하는데 어떻게 얻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그가 지속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이 땅의 생명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이여“ 부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율법선생님으로 생각한 예수님께 한 번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까?
지체없이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지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웃과의 관계와 관련 있는 십계명을 거론하며  그것을 지킬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부터 이웃을 향하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진지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거절하면서 계명을 단지 알고 있을 뿐아니라 어려서부터 지키며 모범적인 삶을 살고있다고 하였습니다.

수님은 그 사람이 정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것과, 그리고 자기를 뒤따르겠다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그가 자신의
길을 찾고 있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자신의 가진 것을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늘 보화를 받고 그리고 예수를 따를 수 있게됩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붙잡고있어 재물에 의지하는 그의 마음과 생각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이 땅의 보화를 가졌고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 보화를 보여줄 것을 원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에게 자신을 좇아오는 새로운 길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지 못하였고 그는 슬픈 기색을 띄었습니다. 머리를 떨구고 체념하여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땅에서 그는 재물을 모아놓은 것으로 살고 죽어서는 염려 없는 삶을 영원히 계속할 것이라고 그는 어쩌면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삶을 원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물질적으로 보장을 받았고 예수님께 와서 그는 죽음 후에 구원을 약속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교활한 수법은 그러나 예수님을 속이지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곧 바로 태도를 바꾸기를 그리고 자기 중심을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슬퍼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역시 슬퍼하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그 사람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잘 이해를 못해서 강조해서 말씀하시길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낙타와 바늘 귀 비유는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타가 바늘 귀로 들어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재물을 가졌을 때 재물에 무엇이 나쁜 것입니까?
그러나 재물이 많지 않은 사람도 뿌리 내린 무엇 그리고 결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지 못한 것 그리고 희망하는 것을 갖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비유가 내가 아니라 부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물의 양과 그 높이가 아니라 재물과의 질적인 관계 즉 인간이 갖고있거나 아니면 원하는 재물에 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재물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것은 재물을 가졌거나 매우 갈망하는 사람이 그 재물로 인해서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이웃을 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며 재물의 증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매우 물질에 매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삶을 위해 중요한 것을 생애 가운데 결정해야만 합니다.
재물의 노예로 사는 것 또는 다른 우선순위를 갖는 자유하는 삶을 사는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부자나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생의 목표인 사람에게 이러한 결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재물과 예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쉽지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슬픈 기색을 띄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 또는 갖기를 원한 사람이 하나를 선택을 하는 경우 재물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낙타는 바늘 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제가 언젠가 읽었던 이야기 입니다. 아시아에도 비슷한 비유가 있습니다. 모기는 철로 만든 황소 동상을 물을 수 없다,
그럼 오늘 본문 즉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인가요?
예수님은 재물과의 옳치못한 관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적인 장애가 된다는 것을 가르켜주십니다.
재물에 생의 목표를 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유혹을 의미하며 허황된 가능성을 추구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재물은 장애물입니다.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자세가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우리를 옭아매는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하지않았고 가난을 생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난함으로 복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하는 부유함으로 자유함때문입니다.
여기서 부자가 만약 맘몬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물질을 다스린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질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며 물질이 우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쉽지않습니다.
재물에 굴복하는 것과 하나님에 굴복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원칙적으로 신에게 굴복하듯 물질에 굴복하는 것으로 끝이납니다.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근심스럽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써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써는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화 감동하실 때 그 사람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하셔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거부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재물에 대한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 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순복할 때 그 부자는 재물을 바르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하게 하는 메시지인 오늘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물질을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만찬을 받들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자유하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 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직 재물로 자신의 삶을 지향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근본적인 요청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을 지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인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12일)
  • 행 13:44-14:7
  • 설교자: 이종실

031012 (열일곱번째 삼위일체 주일)

본문: 행 13:44-14:7

제목: 말씀 안에서 자유하는 신앙인

<본문>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설교>

바울과 그의 일행은 키프러스 섬에서 소아시아(현재 터어기)로 건너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13장 16절부터 오늘 저희들이 읽은 본문 직전인 43절까지 나옵니다.

바울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관점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유대인들의 역사 이해의 논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논리로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는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 바로 그 오실 메시아임을 설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설교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어떻게 성취 되었는지 설명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고난의 종의 모습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표준새번역 사 53:6)

하나님은 이 종의 중보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렸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과 그 증언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의 설교의 결론이 사도행전 13장 38절과 3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표준새번역 행 13:38-39)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중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 안에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근거는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 그 분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바울의 이 설교를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가 흘렀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 바울이 다시 회당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주제에 대해 질문 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종자들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설교에 대해 호감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모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은 바로 바울이 설교를 하고 한 주가 지난 뒤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한 주동안에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초대를 받아 같은 설교를 반복했을 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온 성읍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한 주간이 지난 그 다음 안식일에 사람들이 이전 보다 더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44절은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동네 사람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전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이방인 역시 회당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닥쳤습니다.

오늘 말씀 45절에 “그 무리를 보고 유대 사람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바울과 바나바가 한 말을 반대하면서 비방하였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난 주에 유대인들은 특별히 바울에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반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 원인을 <시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한 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한 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설교는 지금까지 할례 받지않았다고 경멸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않는다고 경멸 받았던 이방인들, 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들의 노력과 열정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환영하고 온 동네 사람을 불러모아 축제를 벌리는 아버지를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며 섬기던 첫째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그는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마음 속으로 동생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는 자는 이웃을 증오합니다.

이러한 증오의 형태가 시기심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시기심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신에 대한 증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뼈 속 깊이 흐르는 스타의식과 특권의식의 자기 중심적인 자기 주장이 하나님에게서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향한 증오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시기심입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나는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않게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공적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과 열정이 시기심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신앙의 노력과 열정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신앙생활이 또 다른 자기 중심적인 자기주장의 표현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용서 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내가 했던 것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했던 것,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은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생활을 위한 나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과가 일방적인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거부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평화 기쁨 그리고 의롭게됨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증오와 시기와 질투에 싸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들에게 먼저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당신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인하므로, 우리는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으니, 그것은 네가 땅 끝까지 구원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3:46, 47)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지만 그 복음이 강제로 마음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 목회자는 분석을 하고 설명을 할 수 있지만 그 원인을 목회자가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강제로  없애 버리지는 못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13장 46절 47절의 바울의 이야기는, 복음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지않으면 그 복음은 다른 곳으로 떠나갑니다.

주인이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초대해야 될 사람들의 명단을 종들에게 주면서 초대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논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집가고 장가가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 마다 다 이유가 있어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주인은 두 번 다시 그들에게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게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와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장 11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그 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방인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바울은 자신을 배척하고 복음을 거부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내 동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선동이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읍의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그 지방에서 쫒겨났습니다.

바울과 그 동료들은 동원된 공권력에 굴복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장면만을 본다면 그들은 실패자들입니다.

그러나 비시이다의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믿었고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실패는 이방인들에게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어 기독교인이 되고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것을 바울의 노력과 그의 능력때문이라고 하지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이방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은 모두 믿었다.” (표준새번역 행 13:48)고 누가는 주의 말씀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믿지않아 멸망을 받았다는 식의 교리적인 가르침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주의 말씀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패배를 겪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추방을 당하고 실패를 할지라도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52절 말씀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는 자신들의 계획과 생각이 좌절되는 아픔은 겪지만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의지가 더욱 굳건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추방당하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일어났던 일이 14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기본적인 패턴은 13장의 비시디아의 안디옥의 사건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곳에서 역시 바울은 처음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헬라 사람들)이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장 2절에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패턴이 사도 바울의 초기 선교에 계속 반복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치 세상의 이치를 득도한 수도사들처럼 박해 받으면 도망쳐서 다른 도시로 가고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 아이러니칼하게 회당에서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고 믿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고
마음을 돌이키지않고 시기와 질투의 사신이 되어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사도의 모습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늘 본문 14장 3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놀라운 일을 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주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두 사도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기심과 우월심과 질투심과 열등의식으로 표출되는 자기 중심적인 자기주장과 자기 의로움을 벗어버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총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살 수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자유하고 행복하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전파의 자신들의 계획이 좌절될 때 마다 그들은 불행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생업인 선교의 결과가 자신들의 열정과 노력과 능력과 설득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들 각 자가 자신의 계획과 열정과 능력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큰 일의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여러분의 사업에 얼마나 큰 결실을 꿈 꾸십니까?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여러분의 학업에 얼마나 큰 성취를 전망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모이는 이 교회가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복음이 체코의 한국인들에게 그리고 무신론자들의 체코인들에게 얼마나 전달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할 때  하나님 자신이 일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으로서 성령의 평화와 기쁨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샘솟듯 솟아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유와 기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을 경영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배와 기도로 한 몸 이룬 안디옥교회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28일)
  • 행13:1-12
  • 설교자: 이종실

030928
본문: 사도행전 13:1-12
제목: 예배와 기도로 한 몸 이룬 안디옥 교회
<본문>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설교>
저희가 지난 주에는 바나바와 익명의 기독교인 즉 주의 손이 함께한 교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안디옥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후에 사도가 된 사울과 바나바가 1년 동안 그 교회에서 가르칩니다.
이때 비로소 여러모로 교회 꼴을 갖추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소리를 듣게됩니다.
그리고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옵니다.(행12:25)
그 후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여 복음을 다른 지역에 전파할 수 있도록 파송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후 얼마 만에 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 오랜 세월은 흐르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모인지 얼마되지않아 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교회가 되었고 심지어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는가? 

안디옥 교회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명단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명단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바나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었습니다.
니게르(Niger)라는 말에서 Negro가 나왔습니다.
니게르 시므온은 즉 흑인 시므온이었습니다.
히브리 이름에서 <시므온>은 전통적인 유대인 이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그레네(키레네) 출신 <루기오>가 나옵니다.
그레네(키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지역에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카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전통 유대인의 이름인데 <루기오>는 아닙니다.
<루기오>는 라틴 이름입니다.
여기서 히브리 이름 <시므온>과 <루기오>의 이름을 나란히 기록한 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루기오>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입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을 지닌 통치자가 신약 성경에는 여러 사람 나옵니다.
첫번째가 헤롯 1세(마2:1; 눅1:5)입니다.
헤롯 1세는 주전 37-주후 4년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로마의 봉신 군주였다.
헤롯 1세가 다스릴 때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두번째가 헤롯 1세의 아들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주전 4년-주후 39년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다.
그에게 분봉왕(1/4 군주)이라는 칭호를 붙입니다(마14:1; 눅3:19; 9:7; 행13:1)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람이 바로 헤롯 안디바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나엔>은 헤롯 안디바의 젖동생 이었습니다.
젖동생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어린친구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릴 때 남자 친구를 뭐라고 하나요? 여자 친구는요? 
이를 미루어볼 때 마나엔은 궁전의 귀족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름이 <사울>입니다.
그는 다소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그는 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가장 정통 랍비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들 박해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명단에 나오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매우 다양한 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은 인원 몇 명 안되어도 교파가 다르면 둘로 셋으로 교파에 따라 나뉘어집니다.
게다가 지역출신에 따라 또는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나뉘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한 다양성은 곧 갈등과 다툼과 분열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유럽교회가 경험한 문제입니다.
유럽사회는 민족=교회(카톨릭과 개신교회)= 개신교회 교파가 일치되어있습니다.
예를들어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민족과 마쟐민족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슬로바키아 민족은 루터교회로 마쟐민족은 칼빈개혁교회로 일치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일치되지않은 북아일랜드 같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가 교회간의 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분열을 심각하게 겪고있기 때문입니다.

체코 개혁교도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다른 외부 사람들이 그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가 어렵다면 이것은 완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코교회와 함께하고 체코교회와 호흡을 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적 존재의의가 바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교인이름을 나열하는 누가의 의도는 교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민족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또는 출신지역으로 통일이 되어간다면 그 교회는 병든교회입니다.
유대인으로 민족이 통일된 예루살렘 교회에 비해 다양한 이방민족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가 타 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안디옥교회는 교회의 다양성이 다툼과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다이나믹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
여기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에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체코어 성경도 <섬긴다>를 <bohoslu&#382;ba(예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이란 단어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은 단지 음식을 먹지않는 금욕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금식은 기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음식을 포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을 의지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역대하 20장 3절에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군대가 쳐들어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이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에스더 왕비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삼일간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왕 앞에 나갔습니다.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이 말씀은 주일날 우리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 지를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그냥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의 다양성은 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예배 드리고 기도할 때 한 몸이 되고 폭발성을 갖는 것입니다.

다양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한 몸이 된 것은 그들 모임이 이해관계가 같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가 되는 이 세상의 다양한 조직과 단체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한 단체라면 그들은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기도 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함께 겸손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가장 우선순위를 주일예배와 말씀 읽고 기도하는 일에 두고있습니다.
출애굽기 강해 설교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주일이 우리를 지킨다> 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해외생활에서 오는 문제들을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나 다른 일에서 찾으려는 유혹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어서 안되는 것은 예배와 말씀과 기도가 가장 근본적이고 모든 것에 우선 한다는 사실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왜곡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졌던 나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비뚤어진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때 예배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와 기도 중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게됩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배와 기도 중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습니다.”(3)
여기서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말씀은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을 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보내는 것과 교회가 보내는 것은 같은 것 같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소속된 한국교단 총회 세계 선교부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행정적인 지원과 관리를 하고 후원교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만 4년이 넘게하였습니다.
100가정이 넘는 선교사님들에게 선교비를 송금할 때는 몇 억이 되는 돈을 수표 한 장으로 들고 은행에 다녀보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400개가 넘었습니다.
이 교회와 단체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을 관리하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갖게 된 가장 큰 문제의식은 “선교는 누가하고 선교사는 누가 파송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말들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고 파송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실제의식은 선교는 선교사가 하고 파송은 교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후원하며 파송하는 교회 눈치살피기에 바쁘고 교회는 선교사를 해외파송한 자기교회 부목사로 생각을 합니다.
특별한 선교에 사명이 없이 자식 교육을 위해서 또는 한국목회에 문제가 있어서 탈출구로 해외 선교사로 나오고 교회는 선교사의 소명감보다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우선해서 파송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잘못되었기에 아무리 선교의 이론과 실제와 그 대안을 제시해도 시정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파송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임받고 그것을 고백하는 교회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파송하는 오늘 안디옥 교회 모습에서 성령의 파송의 위임을 받은 자의 진지한 자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교회가 선교를 얼만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탁 받았다는 고백과 그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이지만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체코교회와 더불어 체코선교를 하도록 목사인 저를 여러분들은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을 동역자로 파송하셨고 보흐니쩨 병원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성령의 하신말씀으로 듣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여러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교회가 성령의 말씀을 따라 선교를 할 때 교회에 나타나는 태도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안디옥 교회에서 누구를 파송하였습니까?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파송하라고 했을 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을 떠나보내고 싶을 교인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들 곁에서 가르치고 지도해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들은대로 그들을 파송하고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4절이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가 살라미에 도착했습니다.
살라미는 키프로스 동해안에 있는 항구였습니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온 섬을 두루 다니다가 바보로 갔습니다.
그 무렵에 키프로스를 통치하던 지역 총독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박해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이전부터 선교를 하였습니다.(11:19)
서기오 바울은 아마도 이 섬에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한 새로운 일에 대해 알았을것입니다.
그는 사울을 초대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예수(또는 엘루마)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마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늘 곁에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미루어볼 때 바예수(엘루마)는 궁중 예언자이거나 궁중 마법사였을것이라고 성서학자는 설명합니다..
이것은 마법사 엘루마가 키프로스 통치에 큰 권위를 가졌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엘루마가 바나바와 사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8절은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법사가, 그들에게 훼방을 놓아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선교여행에서 그들은 매우 영향력있는 특별한 마법사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첫번째 선교사들의 첫 선교지에서 겪은 첫 어려움이 마법사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선교의 첫번째 어려움이 왜 하필 마법사의 방해입니까?

마법사의 방해는 교회의 선교가 영적 전쟁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늘 체험합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해 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꼭 방해되는 일이 생깁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할 때에는 틀림없이 많은 교인들이 결석을 합니다.
사탄이 저를 낙심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낙심시켜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마음을 다잡다가 마음에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겠다는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탄은 꼭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던 욥을 사탄이 시험하였습니다.
이 영적전쟁이 극명하게 드러나면 하나님의 축복이 가까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안디옥 교회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로 모이는 구성원들이 다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으면 유유상종하고 끼리 끼리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나의 신앙의 눈높이로, 나의 도덕적 기준으로 형제와 자매들을 절대로 판단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함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도록 우리들 곁에 데려다 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교회를 찾은 사람들을 가로막는 문턱이 되지않게 하십시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온전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들고 어렵고 때론 동의하기 쉽지않지만 말씀 대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가는 그런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주의 손이 함께한 사람들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21일)
  • 행11:19-30
  • 설교자: 이종실

030921 (삼위일체 열네번째 주일)
본문: 행 11:19-30
제목: 주의 손이 함께한 사람들
<본문>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설교>
지난 주에 유대교 안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발생한 기독교회가 유대문화와 전통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직접 지시하고  천사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할이 개입됩니다.
교회는 이처럼 인간들이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이끌리고 때로는 사건 하나 하나를 연결시키며 자연스럽게 섬세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숨은 손에 의해 발전해갑니다.

늘 말씀은 하나님의 숨은 손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 지 그리고 그 교회 안에 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특별히 어떤 교인들을
어떻게 선택하시고 이끌어가시는 지 오늘 그 여정을 세밀히 함께 살펴볼 때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사도행전에 대한 상식 한가지를 질문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달리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방선교의 베이스가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로 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으로 넓게 퍼져갔습니다.
어떻게 이들 놀라운 일들이 일었났는지 오늘 본문은 전해주고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라는 19절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일>은 스테반이 돌에 맞아죽는 첫번째 순교자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가 어떤 계명을 어겼기에 돌로 맞아 죽는 사형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이유로 죽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불행한 사건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박해가 그때부터 일어났습니다.
박해로 많은 유대 기독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유대교 안에서 한 분파를 이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우려한 정통 유대교의 종교 탄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안디옥교회에 관해 글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합니다.
다시말씀드려 안디옥교회의 탄생 근거를 스데반의 순교에서 누가는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기독교회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과 정통성이 유대교의 잘못된 신앙의 극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석이후에 한국의 정치정당인 민주당이 두쪽이 났습니다.
하나는 <민주당 사수파>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신당>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민주당의 정통성이 서로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민주당 사수파는 민주당의 역사성을 근거로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 통합신당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따랐던 민주당의 정신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민주당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전직 현직 대통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깨닫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기독교회는 어느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제한 시키는 딱딱한 껍질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껍질을 깨고 벗겨 기독교 교회를 세워가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기독교회의 출발은 이처럼 잘못된 신앙의 오류에 빠진 유대교를 밑거름으로 삼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교의 모순과 오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있습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집단임을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의 장면을 통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누가의 고발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54
그들은(*의회에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 이 말(*스데반의 설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서,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표준새번역 7:54-60)

이처럼 기독교회는 신앙의 독선과 오류와 모순을 극복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 반성이 없는 기독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과 회개 없이 자기교리와 가르침만을 주장하는 기독교회는 자신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꼬빌리시의 한인 기독교인들은 자기주장에 앞서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총의 감격을 체험하고 그 눈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최악의 사건을 선택하십니다.
당시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사용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해외에서 험악한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존심 상하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꺽는 그 많은 험악한 일을 하나님이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사용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경험들이 가져온 상실감과 좌절감과 수치심과 패배감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의 한 부분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흩어진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의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며 운명의 파도가 언제나 그들을 파멸시키려고 넘실거렸습니다.
고스란히 어려움을 겪어야지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처지들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채 스스로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것 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강풍으로 삼아 친히 돛단배가 되어 우리를 태우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흩어진자들>이 온갖 고생 끝에 드디어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한 지역 도시였습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녹아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죄악이 크게 입을 벌리고 유혹하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최악의 장소를 이방인 선교기지로 선택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 최악이 하나님의 눈에 최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신자는 쉽게 판단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20절 본문을 보시면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구브로) 사람과 구레네(그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헬라)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과 9장에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이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0절의 <헬라 사람>은 분명히 유대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이방인들입니다.
10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예배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골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워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완전히 성경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완전한 이방인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돌아가서 다시 19절 말씀을 보시기바랍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19)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왜 다른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이방인에 대한 깊은 편견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만약 성령이 강권적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방문했을까요?
한번도 부정한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한번도 이방인들하고 같이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 조차도 구원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체코교회를 방문하면서 어떻게 한국인들은 처음에 기독교 용어들의 개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체코 교인들로부터 자주 질문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배경 없이 메시야와 유일신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어떻게 구약의 구자도 모르는 완전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인가요?
그들이 설득력이 뛰어났기 때문인가요?
헬라 사상을 잘 이해해서 짧은 시간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기 때문인가요?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물론 안디옥으로 피난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다른 점을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친절한 사랑도 베풀고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는 우리 꼬빌리시 한인 교우들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선교는 우리들의 재주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서 교회일 하겠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하겠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돈 많이 벌게 되면 아까워서 못하게 됩니다.
재능을 더 갈고 닦아서 하나님 일 하겠다고 생각하는 분 계시면 오산입니다.
재능이 뛰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조그마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가 누구이든 재능이 있든 없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주의 손에 붙잡힌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조그마한 봉사나 교회의 선교를 내가 한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질이 없어 재능이 없어 일을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주어 그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안디옥 교회를 세워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열었던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오늘 본문은 <구브로(키프러스)와 구레네(그레네) (출신) 몇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출신지역만 나오지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평범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을 교회의 선교를 위해 손을 내밀어 붙잡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박해라는 신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그리고 박해를 피해서 간 곳이 죄악이 가장 심한 장소에서 그것도 익명의 신자를 선택해서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 기지 안디옥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선교는 최선의 조건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조건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내가 조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선교를 생각하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입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동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는 유대인들과 함께 찬양하고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방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들 두 그룹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거기서 본 것은 예루살렘의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교회였을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습관은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23절에서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했습니다.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이렇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과 형식을 뛰어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해서,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가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히 달라보이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그의 영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체코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쉽지않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다른 교회의 전통 안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목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신앙 전통에 매여 있는 사람이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는 신앙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가 쉽지않습니다.
큰 교회의 대형 성가단의 웅장한 음악과 수 많은 인파가 운집한 교회당에서 떠나갈 듯 부르는 찬양과 기도가 꽉 찬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왔을 때 이곳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가 쉽지않을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에 같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럽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해 유럽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선교사들 목회자들 평신도들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체코교회 안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꼬빌리시 한인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교만에 빠지지 않는 우리 교인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전통과 습관 모두가 다른 교회였지만 그곳에서도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사람 그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안디옥 교회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24) 로 평가하고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사도가 아닌 바나바를 선택해서 보낸 이유를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섬기고 받드는 삶의 스타일이 일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후에 바울이된 사울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갔을 무렵에 사울은 다소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 일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 사울이 왜 다소에 있었는지 그 상황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9장에 상세히 기술된 내용입니다. 다메섹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했던 그 상황입니다.
다메섹(다마스쿠스)에서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 후부터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자신의 추종자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많이 이야기 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테러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타인에게 설득을 시켜보지 못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옛말에 열 배 부자는 사람의 시샘을 받지만 백 배 부자는 사람을 부릴 수 있고 천 배 부자는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학문과 학벌과 출신가문과 사회적 지위는 사람들이 그를 숭배할 만한 압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득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자 아마 사울은 충격과 좌절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천하의 사울이 도망쳤습니다.
자신의 고향 도시 다소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몇 년을 보냅니다.
성경은 사울이 다소에서 보낸 기간이 얼마였는지 말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사울의 행적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사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 설교나 전도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비참하게 도망친 이후 수년간 사울은 다소에서 잠적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 일부는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좌절은 좌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가 실제로 안디옥에서 시작할 때를 위해 그를 준비하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 둘은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리고 일년동안 그들은 이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후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사울이 이처럼 다시 교회의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는 바나바에 의해서 였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그의 눈은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사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영웅이 되려는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섬기고 받드는 숨어 봉사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성장해 갑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참된 교회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는 멀리 있지않습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신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설립과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인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이 붙잡고 싶은 신자가 누구인지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겸손한 영을 가지십시다.
어디에서나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촉촉한 사랑의 눈빛을 지닌 인자하고 착한 신자들이 되십시다.
받들고 섬기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알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노력하십시다.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을 손에 잡고 체코교회의 선교를 위해 일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