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14일)
  • 행10:1-35
  • 설교자: 이종실

030914 삼위일체 열두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0:1-35
제목: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

<본문>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설교>
저는 체코교회를 개혁교도들의 종친회에 비유를 합니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의 경험하나로 체코교회를 자기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지 30년 50년 또는 그 이상되는 교회들의 예를 들어 설명을 덧붙입니다.
처음에 교회개척 당시 그 교인들이 이제는 교회의 중진이 되었고 그 자녀들이 대를 이어 교회를 섬깁니다.
이 개척교인들이 구심력을 갖는 교회는 대체로 새로운 사람들이 정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뚫고 들어가기 어렵고 굳어진 관례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개척교인들의 폐쇄성이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경향이 요즈음 한국교회에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몇 년전 한국가서 체코교회의 폐쇄성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 교인들이 자기교회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반응을 하였습니다.

600년 체코 개혁교회역사는 생존이 역사의 과제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생겨났던 교회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거대한 시설물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수의 증가가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나마 이제는 그 증가율 마저 없어 앞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주 5일근무제라는 사회의 변화가 큰 폭풍이 되어 교회를 강타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에는 모두 손을 놓고있습니다.
600년 늙은 교회의 현상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인 수는 늘지않는데 목사숫자는 늘어나는 현상입니다.

저는 요즈음 한국교회가 점점 쇠퇴해가는 현상을 이곳에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의 대화의 변화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에 해외에 나오는 분들을 만나보면 교인들을 만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왜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나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마저도 떠나고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을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제가 섬기는 이 교회가 더 부흥해야 될 목적으로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프라하의 좁은 체코한인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각자 심각하게 해야될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내부인들이 외부인들을 기꺼이 맞이하는 전환점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도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을 고백할 때마다 그들은 언제나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 외에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출발이 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우리들은 이방인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한번은 한국에서 여행오신 분을 따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입장료가 너무 비싸 내부가 궁금했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다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납작한 접시 같은 것을 얹고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유대인들의 초대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상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검은 옷과 모자를 쓰거나 이런 납작한 접시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교인들이 아마 한마디 하지않을까? “당신 유대인들이 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느냐? 당신들은 회당으로 가라!”
초대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있는 것을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당시를 혼자서 그렇게 역으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있게되었습니까?
유대인들 만의 교회가 벽을 허물고 그 문호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전환점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 입니다.
분명이 그것은 세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유대교의 이단으로 남았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교회가 존재하지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된 이 사건은 매우 하잘 것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러나 어떻게 복음이 이방인들과 대화되었는지, 어떻게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는가를 생각한다면 역으로 우리가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전환점을 만들어 갈 것인지 이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이 굉장한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피장(무두장이) 시몬이란 사람의 집에서 베드로가 묵고있을 때였습니다.
정오쯤 되자 지붕위로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 시간은 사람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때였습니다.
그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무아지경에 빠졌고 그리고 그는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식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2절 본문에  “그 속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이 들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14절 입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율법에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은 레위기 11장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언급되어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굽이 갈라진 쪽발이면서 새김질하는 짐승입니다.
쪽발이면서 새김질을 안하는 짐승이나 아니면 새김질을 하는데 쪽발을 갖지않는 짐승은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오소리 토끼 낙타 돼지는 먹지못합니다.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지만 둘 중에 하나가 없는 것은 먹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새 가운데서도 독수리 매 종류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부엉이 백조 펠리컨 박쥐는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쥐 도마뱀 악어 카멜레온도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먹거리는 정결하고 어떤 것은 정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금지된 음식을 엄격히 지키고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가공된 음식이 있기에 그들은 성분을 분석하여 검사한 음식을 선택해서 먹습니다.
유대인 지구에 가면 이 음식 율례를 엄격히 따르는 유대인 식품점이 있습니다.
그 식품점에는 가공한 음식은 성분을 검사해서 금지된 성분이 없는 식품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음식에 관한 법을 매우 엄격히 지켰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표현대로 음식이 정결하고 정결하지 않는 위생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음식뿐 아니라 모든 정결하지 못한 경우를 규정하여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하였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정결하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정결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된 경우 가운데 음식에 대한 규정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경우는 설령 그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정결해 질 수 있는 예식 규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만진 사람은 옷을 세탁해서 입고 저녁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음식 만큼은 불결하게된 조건이 정화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지된 음식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큰 보자기에 담겨 내려오는 그 불결한 것을 “잡아 먹으라”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대답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매우 놀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이러한 대화가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배고픈 베드로에게 이 음식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못먹을 것을 주면서 먹으라고 놀리는 그런 재미있고 짓궂은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바로 이 환상 안에 이 후로 세계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서 피장 시몬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19, 20절) 하셨습니다.
그가 내려가 보니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성령님이 보내신 사람들이란 말인가?” 베드로는 마음 속으로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22절에 나옵니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 유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서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거룩한 천사에게서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정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을 방문하거나 함께 음식을 먹지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정에 없이 불시에 그것도 이방인에게서 초청을 받고 함께 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음성에 따랐습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묵게하고 다음날 가이사랴로 함께 떠났습니다.

그 다음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자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어제 보았던 그 환상을 생각했고 마침내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28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28절)

 “우리는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해서는 안된다” – 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매우 주의 깊게 주목해야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같고 동등하기에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꿈속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 이 구절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나누었던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눅 15:2) 성경은 수근거리며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대단한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난과 수근거림을 상관하지 않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나눈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똑 같기에 평등하기에 차별을 해서는 안되기에” “하나님과의 교제에 그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이런 대답들은 틀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 예수님의 마음의 깊이를 이해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청을 받으려면 사전에 죄 용서와 성결해야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함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식탁에 참예하는 것도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속죄의 희생이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자 예수님은 자신이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죄인들을 초청하였고 그들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깨끗하게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들었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모인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용이 본문 말씀 34절과 35절과 그 이하에 나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34,
35절)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의 민족과 인종의 구분 안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인간의 집단 안에 있는 것입니다.
차별은 성과 나이 사회적 지위와 학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한 차별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세상에서 차별이 사라지지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차별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차이점은 우리들 사이에 있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차이를 결정적으로 중요한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차이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각자 개 개인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고넬료가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로움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의미는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했던 것 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으려고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며 그 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냐 우리 각자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리고 편을 만들고 있지는 안습니까?
교회로 모이는 것이 무슨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기득권이 되는 것 처럼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겸손히 노력할 때  우리들은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

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31일)
  • 출32:1-14
  • 설교자: 이종실

030831 (열한번째 삼위일체주일)
본문: 출애굽기 32:1-14
제목: 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설교>
저의 아버님은 조그마한 채굴광을 하나 세내어 일한 영세한 광산업자이셨습니다.
광맥을 찾고 그 맥을 따라 감추어진 석탄과 동과 같은 지하자원을 채굴하셨습니다.
광산촌의 아이가 바로 어렸을 때 저였고 여름에 갱 입구에 앉아 불빛하나 없어 깜깜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시커멓고 끝이 없어 보이는 구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쫒는 경험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출애굽기를 죽 설교하면서 저는 광산촌의 어린시절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지하에 감추어진 엄청난 노다지인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도 그냥 제눈에 드러나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실날 같은 말씀의 광맥을 찾아 조금씩 깊이 내려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습니다.
저는 말씀의 광맥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과정을 가급적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설교로 전달함으로써 여러분들께서도 스스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기쁨의 체험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지속적으로 만났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나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잊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느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내 병든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일에서 근거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그 마음과 영혼으로 우리는 바른 찬송과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는 모두 40장인데 저는 오늘 설교까지 13번으로 일단 출애굽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나간 12번의 설교를 돌이켜 보면서 대체로 저의 설교가 무엇이 왜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시켜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안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질병과 환란과 불행의 온갖 사탄의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시고 무능한 존재로 남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겹겹히 쌓여 하나님을 그 가운데 가두고 그 하나님을 우리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들의 마음은 어두워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들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시는 하나님을 저는 출애굽에서 지속적으로 만났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나를 끝까지 이처럼 관심을 기울여 주십니까?
눈물을 쏟고 목놓아 울고싶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 속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않자 백성들은 함께 모여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1절)
모세가 얼마나 오랫동안 산 위에 있었습니까?
출애굽기 24장 끝부분에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18절)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엇하러 산에 올라갔습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25장부터 오늘 본문 이전인 31장까지 계속됩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전건축법과 성전 인테리어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31장 18절)

성전과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회를 열어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요청에 아론은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형상 앞에 세워진 단에 봉헌을 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알립니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들은 일구이언을 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니 지키고 싶습니다.
어느날 말씀을 듣고 기도와 찬송을 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주일도 성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결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는 우리들의 결심과는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늘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우리들의 문제가 단지 하나님과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에만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두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우 자기 합리화의 습관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것은 원래 그런거야!
내가 신이 아닌데 어떻게 마음에 감동이 될 때 마다 하나님 앞에서 한 결심과 약속을 다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도 우리가 못 지킬 줄 알면서 그렇게 마음으로 결심하는 줄 다 알고 계실거야.

신앙생활은 당연히 그러는 것으로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립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이러한 습관처럼 되어버린 신앙생활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 보도록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주고싶습니다.

왜 우리는 신앙의 결심과 스스로 자신에게 한 것이든 하나님과 한 것이든 그 약속을 번번이 어깁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질문은 이 원인규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원인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 것을 요구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신을 요구하면서 덧붙여 한 말입니다.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걸림돌의 첫번째 이유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을 필요로하게된 원인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대상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세를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고 광야 여행 길에 그들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출애굽기 19장 4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분도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이 관계는 모세라는 한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그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보지 못하고 단지 모세를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모습이 오랫동안 그들의 시각에서 사라지자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허울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질서가 그들 사이에서 날마다 무너져 갔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닌 사람을 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다니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 한인 목회를 오래 하신 분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가장 마음이 아프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이 누구 보기 싫어서 교회 나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라는 것입니다.
이 좁은 해외의 한인사회에서 조금만 살다 보면 집안에 수저가 몇 벌인지 다 알 수 있는 이런 사회에서 사람을 보지 않고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교회를 나간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의 모임과 다릅니다.
예배라는 모임의 형식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은 신자들의 모이는 목적과 바라보고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임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교회로 모이기에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에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신자들이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이제 신앙생활의 장애의 가장 근본적인 또 다른 원인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다른 신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도자 모세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다른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론에게 모세의 역할을 해주거나 아니면 모세와 같은 다른 지도자를 선출 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여러분들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을 인도할 다른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은 정말 신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우상이 자신들을 인도할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본문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공동번역 성경에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라고 되어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갈 신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이 자신들 보다 앞서 뚜벅 뚜벅 걸어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우상은 그렇게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앞장 서서 걸어가는 우상을 따르며 그의 말에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 우상을 데리고 다니면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종교행위라면 우상숭배는 복종할 대상이 사라져버린 불복종의 종교행위 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한가지라도 지켜 복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신앙의 깊은 맛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내면 속에 언제나 원하는 종교는 불복종을 요구하는 우상숭배의 종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뿌리깊은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장애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것은 기독교인의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기준이 내 안에서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다음단계로 세계관이 변화되면 영의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싸울 영적싸움의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이 근본적인 신앙생활의 장애들과의 싸움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신앙수련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뼛속과 혈관 속에 그리고 존재 속에 불복종을 요구하는 종교를 희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들은 이 우상 앞에서 여호와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들이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논다는 단어가 성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합니다.
체코어 성경은 한국어 성경보다 좀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놀더라 – nev&aacute;zan&aacute; hra 이며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nev&aacute;zan&aacute; 라는 뜻은 한계도 규범도 절제도 없다는 뜻입니다.
축제에서의 그들의 놀이는 문란하고 난잡하였음을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중근동 지방의 고대의 예배에서 농사 신을 섬겼기에 송아지 우상 앞에서 하는 축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어떠한 신앙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도 내 마음에 닿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여기는 경우는 없는지 이 시간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시내 산 꼭대기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시다.
산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7,8절)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세는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손끝하나 움직일 힘을 잃은 상실감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하나님의 말씀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 하지않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모세는 커다란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9, 10절)

모세는 와락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력하게 어필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1절)
그리고 간청합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2절)
이와 같은 모세의 중재로 여호와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4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 없애버리실 마음이 정말로 있으셨다면 굳이 모세를 산으로 내려 보내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그 유사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미가 선지자들에게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고 그 메시지를 주면서 그들을 보냅니다.

시내 산 꼭대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성전 건축법을 일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여호와는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백성들 가운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25장)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백성들이 돌이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예언자 에스겔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 33:11)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24일)
  • 눅19:1-10
  • 설교자: 다빗 유레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여리고라는 곳에 들르셨습니다. 
여리고에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부자였던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그 뜻으로 볼 때 사가랴 라는 이름과 똑같이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달성할 수 있었던 삭개오는 아마도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서 그는 존경을 받거나 인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에도 겨우 몇몇 사람들만이 그에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삭개오는 바로 로마의 관청에서 세리로 일을 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세금과 여러가지 수수료를 걷어 로마정부에 바쳤습니다.
같은 동족을 배반하고 침략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대인들은 그를 자기 민족을 떠나버린 매국노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이란 의미가 민족과 함께 종교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삭개오는 로마정부의 세리라는 직업을 갖기위해 이스라엘의 종교사회를 떠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을 불결하게 여겼던 로마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과  명예를 포기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돈과 지위를 따져볼 때 그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세리에서 여리고 전체의 모든 세리들의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이 어떻게 세금을 걷어들였는지 여기서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세금을 걷어들이는 방식은 사실상 세리들에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구역의 세금 징수권을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자신이 투자한  금액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신들의 권한이 있는 납세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납세자들에게 세금 독촉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돈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당한 일이 자주 일어났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세리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세례 요한이 세리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그러한 부당한 상황이 있음을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3:12b-13) 하고 대답했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런 부정직하고 신중하지 않은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부당함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삭개오를 가장 많이 판단하고 증오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삭개오와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라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신실하시며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으며,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부르셨고, 그리고 여리고까지 오셨습니다.
여리고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순례자들 중에 나사렛 예수도 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던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거리는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기이한 일을 일으킨다는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위해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끼어들었습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달려나왔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들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어쩌면 에수님은 아무도 경멸하거나 얕보지 않으며, 열등한 사람들과도 한 식탁에 앉아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외로운 삭개오는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고,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밀쳐냈습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뿌리가 튼튼하고 가지가 넓게 뻗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가지 속에서 몸을 숨겼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꼭 그 분을 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주위를 지나가실 때 삭개오가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서 멈추시고 가지위로 우러러 보시며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나무 가지 속에 있는 삭개오를 아신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까지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다는 것은 그 집의 손님으로 밤을 보내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삭개오는 재빠르게 나무를 내려와 정말 커다란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까지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명한 사람이 그 라는 것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대접해 드릴까 무척이나 고민했을거라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여있던 군중들에게 그 일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 어떻게 예수님이 여리고의 가장 큰 죄인의 집에 가실 수 있단 말인가?!“
선지자라면 삭개오의 집에 절대 발을 들여 놓지 않으실 텐데, 모인 사람들 중에 정말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합당한 바르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집에 가셔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모인 군중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원래  정통 유대인은 이방인이나 죄인, 불명예스러운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안되었습니다.
물론 삭개오도 예수님의 친절이 그에게 과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선택하셨을 때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는 협박이나 질타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삭개오의 양심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를 통한 모든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대접함에 있어서 맛좋은 것들보다 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법률이 규정해 놓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보상해 주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나온 것 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피해액의 20% 내지 100%를 더 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2배의 보상에다 다시 두배의 보상을 더해서 4배의 보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삭개오였지만 어떻게 부자들이 보상하고 회개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변화된 삭개오의 너그러움은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표입니다.
더 나쁜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큰 죄인이라고 보았고 그를 쉽게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삭개오를 기억하셨습니다. 
이렇게 길을 잃은 죄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선택된 백성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그 집으로 구원과 용서, 새로운 인생이 함께 들어간 것입니다.

삭개오는 변화되었고 회개를 했습니다.
이전까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보다 부(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아둔 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전 시민 앞에서 삭개오를 인정할 때 그러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로 다가가셨던 사랑으로 삭개오를 회개 시키셨고 바르게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어버린, 순종하지 않는 어린양이 죽지 않도록 찾아나서는 선한 목자처럼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세리와 죄인들 같이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떠나버리고 그 약속의 말씀 또한 상실해버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롭게 다가가심으로 삭개오 또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듯 그들을 찾으셔서 다시 우리로 돌려보내십니다.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의 가장 주된 주제는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고 부르시며 그의 손님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삭개오가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회개와 지금까지 행해왔던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그의 노력은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방법에 가장 올바르게 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례길의 의미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러한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몇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장 큰 죄인이라도 구원하시려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전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고 새로운 인생길을 떠날 때 가능합니다.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삭개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독교인들은 <우리> 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 올바른 쪽에 있는 사람이 우리입니다. 좋은 우리, 선택된 우리입니다.
그리고 주위 세상을 의미하는 <그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불행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올바른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에 „분명히“ 잃어버린 죄인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한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그의 민족과 종교사회보다도 더 우선시 생각했습니다.
부의 축적과 사회적인 지위를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났었습니다.
삭개오는 우리들의 소유가 우리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돈이란 우리가 다른 이웃들의 고통과 빈곤을 덜어주기 위해 나누어 줄 수 있을 때만이 정말 자신을 위해 쌓아 놓을 수 있는 영원한 재산이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자유함을 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사랑 안에 하나님이 생겨나고 그 사람의 참 존재를 실현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삭개오를 기억하셨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올바른 길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그의 인생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른 이웃들을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Amen

예배, 출애굽의 대단원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10일)
  • 출25:1-9
  • 설교자: 이종실

030810 (삼위일체 여덟번째 주일)
본문: 출애굽기 25: 1-9
제목: 예배, 출애굽의 대단원(大團圓)

<본문>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위해 여호수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출애굽기 25장 처음부분을 읽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31장까지 계속됩니다.
한번 책장을 넘기며 대충 빨리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막과 성막에 따른 물건들을 만드는 방법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읽다가 보면 이런 이야기도 성경의 일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글짓기 숙제를 하는 학생이 원고지 매수를 채우기 위해 요령을 부리듯이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한번 통독해야겠다고 마음잡고 성경을 읽는다면 이 부분이 첫번째 걸림돌이 됩니다.

읽기에도 지루할 정도로 성막과 그 딸린 물건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저자의 뜻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볼 만 합니다.

여기서 성막과 성막에 딸린 물건들이 정확히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의 저자는 9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9)

성막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천막입니다.
성막에 딸린 물건들은 예배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은 자신이 경배와 섬김을 받는 예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온 모세에게 예배 장소와 필요한 물건 제작에 대해 세부적인 방법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모두 40장입니다.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 출애굽기 전체 가운데 삼분의 일이 넘는 내용이 예배장소와 예배시 사용될 물건에 관해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 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 홍해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출애굽의 중요한 내용은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읽은 25장부터 40장 마지막 부분까지 대단원을 이루고 있는 성막을 중심으로한 예배의 섬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출애굽의 이야기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고된 노역으로 부터의 단순한 해방이 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이 그 법에 복종하도록 하려는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바로가 통치하는 나라, 바로의 통치아래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우상이 지배하는 삶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출애굽의 이유였습니다.
그뿐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삶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된 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하나님은 그 예배 처소와 예배에 사용될 물건을 만들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 출애굽의 대단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성막에 딸린 물건들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종교적 취향에 따라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만들도록 버려두지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것을 만들도록 엄하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는 예배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 의중을 따라야지 예배자 이스라엘의 뜻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번에 묘지를 향해 떠나는 관과 유가족을 가득 실은 지나가는 장례차를 구경을 하고 뒤따라는 가보았지만 상주가 되어 그 차에 타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영정을 안고 가는 상주가 바로 저였습니다.
주일이 끼어 4일장이 되었습니다.
빈소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이 저였습니다.
상주로 입관부터 삼우제까지 복잡한 장례절차를 치르면서 저는 장례예식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장례예식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산자들의 가슴에 맺힌 실수와 잘못과 원망과 산자들 사이에 뒤틀린 인간관계가 죽은 자 앞에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예식이 장례식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례식에는 엄중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 간소화 하려면 상주들과 친척들이 의논을 해서 합니다.
일방적으로 누구 한 사람에 의해 그 절차가 좌지우지되지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예배에 하나님 자신의 요구가 있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필요와 희망의 성취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배의 우선순위를 자주 잊습니다.
우리의 뜻과 소망들이 예배에 나타나는가 아닌가가 늘 살펴야 합니다.
(* 광고시간에 생일 축하 케익을 자르고 폭죽을 터트린다.)

잘못된 예배, 실패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구약성경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모세가 한 달 열흘씩이나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 사이에 조바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을 의지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들을 위한 예배는 우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제단을 세우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 32:4-6)

자기 자신을 우상화한 예배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소외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소외된 자신을 더욱 정당화 하려는 자기 암시로 우상화된 예배는 더욱더 격렬해집니다.
제단을 세우고 그 앞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그 예배를 여호와의 절일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체코어 성경에 Zitra bude Hospodinova slavnost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이것은 Hospodinova slavnost (여호와의 페스티발)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페스티발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복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는 잘못이었습니다.

출애굽 오늘 말씀에 예배 처소와 예배에 사용되는 물건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길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오늘날에 이 말씀대로 똑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하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장소를  거룩한 장소 즉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막은 원래 <살 곳> 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주할 곳 즉 살 곳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손으로 짓게 될 거주지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와 일치된 건물은 거대한 신전이 아니었습니다.
성막은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조립형 텐트였습니다.
그걸 펼쳐서 세우면 가로 15미터 세로 5미터 높이 5미터 정도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계명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따라 살기로 엄숙히 다짐을 하였습니다.
계명을 주고 받고 그리고 다짐을 주고 받았으면 충분하지 또 성막을 세우도록 따로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거처를 찾는 이유가 분명하게 설명되고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생활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거처를 필요로 하지않습니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유한한 인간이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거주하실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운반 가능한 거처를 짓도록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나는 그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 하십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된 확실한 체험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시내산은 아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광야의 여행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죽은 자 앞에서 산자들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하지만 그 회복이 늘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제사 또는 추도예배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을 견주어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전민족적인 체험이 닥쳐올 광야의 굶주림과 목마름과 전쟁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시내산의 언약이 타인의 죄로 전민족이 고통을 겪게되는 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 부적이 아닙니다.
시내산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광야의 캠프생활의 수고를 고스란히 겪어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캠프생활 한 가운데 성막이라 불리우는 텐트에서 함께 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막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것입니다.
조금 질문을 바꿔 우리에게 예배당이 왜 필요한가?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지속시키데 도움을 줍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이 병을 낫게 하고 보약이 약해진 곳을 강하게 해주지만 밥처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 세끼식사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우리들의 건강을 지속시킵니다.

로 뜨거운 체험도 없고 은혜도 느끼는 것 같지않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날을 기억하고 교회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지키고 승리하여 약속의 하늘 축복을 누리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사도 바울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처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신자의 삶을 함께 노력하십시다.
온갖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행복을 이 땅 위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우리 하나님은 지금 원하고 계십니다. (아멘)

우리가 주의 날을 지키면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27일)
  • 출20:8-11
  • 설교자: 이종실

030727 (여섯번째 삼위일체 주일)
본문: 출애굽기 20:8-11
제목: 우리가 주의 날을 지키면 주의 날이 우리를 지킵니다.

<본문>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설교>
오늘은 안식일에 대한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미 6월 마지막 주 설교본문으로 읽었습니다.
그때 십계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자의 삶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안식일 계명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안식일 계명에 대해 반복해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교회로 모이면서 고민을 한 것이 이 해외에서 한인교회가 과연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한인교회들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선교에 두고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우리 교회의 선교적 존재 의미와 관련한 교회론을 숙고하였습니다.
대부분 해외의 한인교회들은 선교를 위해 현지교회와 파트너쉽의 관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저희 꼬빌리시의 체코인들과 우리 한국인들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따라 모든 민족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거룩한 공회)라는 고백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교회입니다.
함께 세례를 베풀고 함께 성만찬 식탁을 나누고있습니다.
교회당을 월세를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활동보다 선교하는 체코교회의 비전과 변화를 제시하는 일을 우선하였습니다.


래서 유럽의 유럽교회들과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2년전(2001년) 스위스 제네바 존 녹스 국제 개혁센터에서 세계개혁교회연맹의
Mission in Unity 분과 주관으로 열린 재 유럽 한인교회와 유럽교회 컨퍼런스에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의 존재와
발자취를 주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교회들은 우리 큰 교회들이 감히 생각 조차도 못한 일을 작은 체코교회와 체코의 소수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감당하고 있다고 놀라와 했습니다.
저는 선교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세계교회와 유럽의 한인교회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주는 바른 방향성을 가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와 관련한 교회론과 더불어 목회적인 차원에서의 교회론에 대해 동시에 고민을 하고있습니다.
저희들은 신앙의 배경들이 매우 다양합니다.
교단이 다양합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단, 성결교단, 감리교단, 순복음교단, 침례교단 그리고 카톨릭 신자들이 함께 모입니다.
보수적인 분들 진보적인 분들, 다양한 신학적 신앙양태의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도 천차만별입니다.
체코에 거주하는 목적도 매우 다양합니다.
작년에 주일 평균 회집 인원이 45-50명쯤 되었습니다.
작년에 떠나신 분들이 27분이고 새로 오신 분들이 21분이었습니다.
예배인원수의 절반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의 교회들과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해외 교회들과도 비교할 때 매우 특수한 상황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교회를 어떻게 목회할 것인지 신학교에서 가르친 적도 그리고 저는 배운 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목회의 경험을 서술한 참고서도 시중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않았습니다.


수한 상황 안에 있는 교회를 바르게 섬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며 조그마한 자료라도 모으고 해외 목회자들의 경험을 듣고 그것을 숙고하고
그리고 우리교회의 상황과 빗대어 생각도 하고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평신도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면서 자신의 교회에 대한 평신도의
입장을 듣는 일들을 게을리하지 않고있습니다.

성경말씀 안에서 이러한 고민과 숙고를 통해 세워진 저의 목회의 방향을 몇 차례에 걸쳐 목회 서신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을 간추려 교회의 신앙생활과 생활실천목표로 삼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숙고된 원칙들을 따라서 목회를 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하고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적인 관점에서의 교회론에 대한 정립은 제게 여전히 많은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런데 이번에 몇 주간에 걸쳐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설교를 하면서 체코의 우리 한인교회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목회란 결국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쳐주고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연구를 하여 목회적 차원의 교회론을 정립해 볼 생각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응답하는 신자의 삶의 종합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안식일 이라는 단어의 뿌리는 멈추라는 단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멈추라! 쉬어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1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 계명의 근거로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은 거론하고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1장은 아주 감동적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우주만물 가운데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천지만물이 만들어지는 그때에 사람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일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지 못합니다.
인공호흡기를 폐에 넣고 인간의 병든 신체부위를 바꾸는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은 생명을 새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준비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않는 사람 그 누구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필요를 스스로 충족하지 못합니다.
간략하게 묘사된 오늘 말씀의 천지창조는 이 세상을 보존하며 우리를 그 곳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설명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 날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의 참된 쉼을 위해서 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4장에서 우리는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다(히 4:1)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기자에게 안식은 영생 구원의 미래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이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 4:6)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11절에서 우리들에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0-13)
 
십계명은 출애굽기와 동시에 신명기에서도 나옵니다.
신명기의 안식일 계명의 이유는 출애굽기와 매우 다릅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나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출애굽기의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일과 관련이 있는 반면에 신명기의 안식일은 출애굽의 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성서의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찬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살면서도 늘 그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애굽 땅의 노예들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구원 받듯이 세상의 맘몬 신과 온갖 유혹과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존재의 의미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이 권능의 손과 팔을 자신들에게 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지창조의 설명은 단지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손과 팔을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억하는 날로서 안식을 지킬 것을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바로 이 세상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을 지킴으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내 보이시길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론 자신이 잘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실수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의 일곱번째 날이 아니라 첫번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이 날을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날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린이 처럼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났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그들은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건은 분명히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건은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해주신 분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기억하는 주의 날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안식일과 다르지않습니다
오히려 이 주님의 날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시키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에 대해 마가복음 2장 2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안식일은 우리 믿는이들을 위해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 날을 지키면 안식일 즉 주의 날이 우리 신자들을 지켜줍니다.
주의 날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마가복음 3장 1-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에 관한 이야기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우리들이 분명히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1-5)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악의와 증오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소위 악의 축에 속한 부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율법을 엄격히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 안식일에 금할 일의 세심한 부분까지 토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로지 안식일에 금지된 일만 보았지 하나님의 은총의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안식일 즉 주의 날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날에 보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해야 되는 고역의 날입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시고 받아주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기쁨으로 이날을 맞이하십니까?
아니면 회당을 찾아온 예수를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처럼 미움과 악의와 증오와 질투로 이날을 맞이하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날 주의 날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그 날을 지킨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기억하며 우리들의 인간관계의 미움과 악의와 증오와 질투를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날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다른 피조물에게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모두 함께 기억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성대한 잔치를 벌립니다.
그 아들 혼자만이 먹고 마실 잔치가 아니라 온 동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길 잔치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주일동안 세상에 휩쓸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의 날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안식일 주의 날은 그냥 놀며 쉬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무거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날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마음과 육신의 질병이 치유되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며 우리의 근심으로부터 마음이 놓이는 날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참되게 안식일 지키고, 안식일이 우리의 6일간의 삶을 지키는 은혜의 체험이 있는 우리들의 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