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기도로 한 몸 이룬 안디옥교회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28일)
  • 행13:1-12
  • 설교자: 이종실

030928
본문: 사도행전 13:1-12
제목: 예배와 기도로 한 몸 이룬 안디옥 교회
<본문>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설교>
저희가 지난 주에는 바나바와 익명의 기독교인 즉 주의 손이 함께한 교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안디옥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후에 사도가 된 사울과 바나바가 1년 동안 그 교회에서 가르칩니다.
이때 비로소 여러모로 교회 꼴을 갖추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소리를 듣게됩니다.
그리고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옵니다.(행12:25)
그 후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여 복음을 다른 지역에 전파할 수 있도록 파송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후 얼마 만에 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 오랜 세월은 흐르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모인지 얼마되지않아 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교회가 되었고 심지어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는가? 

안디옥 교회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명단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명단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바나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었습니다.
니게르(Niger)라는 말에서 Negro가 나왔습니다.
니게르 시므온은 즉 흑인 시므온이었습니다.
히브리 이름에서 <시므온>은 전통적인 유대인 이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그레네(키레네) 출신 <루기오>가 나옵니다.
그레네(키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지역에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카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전통 유대인의 이름인데 <루기오>는 아닙니다.
<루기오>는 라틴 이름입니다.
여기서 히브리 이름 <시므온>과 <루기오>의 이름을 나란히 기록한 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루기오>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입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을 지닌 통치자가 신약 성경에는 여러 사람 나옵니다.
첫번째가 헤롯 1세(마2:1; 눅1:5)입니다.
헤롯 1세는 주전 37-주후 4년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로마의 봉신 군주였다.
헤롯 1세가 다스릴 때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두번째가 헤롯 1세의 아들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주전 4년-주후 39년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다.
그에게 분봉왕(1/4 군주)이라는 칭호를 붙입니다(마14:1; 눅3:19; 9:7; 행13:1)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람이 바로 헤롯 안디바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나엔>은 헤롯 안디바의 젖동생 이었습니다.
젖동생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어린친구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릴 때 남자 친구를 뭐라고 하나요? 여자 친구는요? 
이를 미루어볼 때 마나엔은 궁전의 귀족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름이 <사울>입니다.
그는 다소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그는 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가장 정통 랍비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들 박해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명단에 나오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매우 다양한 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은 인원 몇 명 안되어도 교파가 다르면 둘로 셋으로 교파에 따라 나뉘어집니다.
게다가 지역출신에 따라 또는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나뉘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한 다양성은 곧 갈등과 다툼과 분열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유럽교회가 경험한 문제입니다.
유럽사회는 민족=교회(카톨릭과 개신교회)= 개신교회 교파가 일치되어있습니다.
예를들어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민족과 마쟐민족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슬로바키아 민족은 루터교회로 마쟐민족은 칼빈개혁교회로 일치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일치되지않은 북아일랜드 같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가 교회간의 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분열을 심각하게 겪고있기 때문입니다.

체코 개혁교도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다른 외부 사람들이 그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가 어렵다면 이것은 완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코교회와 함께하고 체코교회와 호흡을 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적 존재의의가 바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교인이름을 나열하는 누가의 의도는 교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민족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또는 출신지역으로 통일이 되어간다면 그 교회는 병든교회입니다.
유대인으로 민족이 통일된 예루살렘 교회에 비해 다양한 이방민족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가 타 문화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안디옥교회는 교회의 다양성이 다툼과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다이나믹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
여기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에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체코어 성경도 <섬긴다>를 <bohoslu&#382;ba(예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이란 단어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은 단지 음식을 먹지않는 금욕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금식은 기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음식을 포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을 의지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역대하 20장 3절에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군대가 쳐들어와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이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에스더 왕비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삼일간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왕 앞에 나갔습니다.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 이 말씀은 주일날 우리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 지를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그냥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의 다양성은 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예배 드리고 기도할 때 한 몸이 되고 폭발성을 갖는 것입니다.

다양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한 몸이 된 것은 그들 모임이 이해관계가 같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가 되는 이 세상의 다양한 조직과 단체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한 단체라면 그들은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와 기도 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함께 겸손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나님께 복종할 때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가장 우선순위를 주일예배와 말씀 읽고 기도하는 일에 두고있습니다.
출애굽기 강해 설교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주일이 우리를 지킨다> 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해외생활에서 오는 문제들을 교회의 모임이나 행사나 다른 일에서 찾으려는 유혹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어서 안되는 것은 예배와 말씀과 기도가 가장 근본적이고 모든 것에 우선 한다는 사실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왜곡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졌던 나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비뚤어진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때 예배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와 기도 중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게됩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배와 기도 중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습니다.”(3)
여기서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말씀은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을 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보내는 것과 교회가 보내는 것은 같은 것 같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소속된 한국교단 총회 세계 선교부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행정적인 지원과 관리를 하고 후원교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만 4년이 넘게하였습니다.
100가정이 넘는 선교사님들에게 선교비를 송금할 때는 몇 억이 되는 돈을 수표 한 장으로 들고 은행에 다녀보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을 후원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400개가 넘었습니다.
이 교회와 단체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을 관리하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갖게 된 가장 큰 문제의식은 “선교는 누가하고 선교사는 누가 파송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말들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고 파송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실제의식은 선교는 선교사가 하고 파송은 교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후원하며 파송하는 교회 눈치살피기에 바쁘고 교회는 선교사를 해외파송한 자기교회 부목사로 생각을 합니다.
특별한 선교에 사명이 없이 자식 교육을 위해서 또는 한국목회에 문제가 있어서 탈출구로 해외 선교사로 나오고 교회는 선교사의 소명감보다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우선해서 파송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잘못되었기에 아무리 선교의 이론과 실제와 그 대안을 제시해도 시정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파송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 보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임받고 그것을 고백하는 교회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파송하는 오늘 안디옥 교회 모습에서 성령의 파송의 위임을 받은 자의 진지한 자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교회가 선교를 얼만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탁 받았다는 고백과 그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이지만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체코교회와 더불어 체코선교를 하도록 목사인 저를 여러분들은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을 동역자로 파송하셨고 보흐니쩨 병원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성령의 하신말씀으로 듣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여러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교회가 성령의 말씀을 따라 선교를 할 때 교회에 나타나는 태도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안디옥 교회에서 누구를 파송하였습니까?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파송하라고 했을 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을 떠나보내고 싶을 교인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들 곁에서 가르치고 지도해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들은대로 그들을 파송하고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4절이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가 살라미에 도착했습니다.
살라미는 키프로스 동해안에 있는 항구였습니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온 섬을 두루 다니다가 바보로 갔습니다.
그 무렵에 키프로스를 통치하던 지역 총독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박해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이전부터 선교를 하였습니다.(11:19)
서기오 바울은 아마도 이 섬에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한 새로운 일에 대해 알았을것입니다.
그는 사울을 초대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예수(또는 엘루마)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마법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늘 곁에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미루어볼 때 바예수(엘루마)는 궁중 예언자이거나 궁중 마법사였을것이라고 성서학자는 설명합니다..
이것은 마법사 엘루마가 키프로스 통치에 큰 권위를 가졌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엘루마가 바나바와 사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8절은 “이름을 엘루마라고 번역해서 부르기도 하는 그 마법사가, 그들에게 훼방을 놓아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선교여행에서 그들은 매우 영향력있는 특별한 마법사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첫번째 선교사들의 첫 선교지에서 겪은 첫 어려움이 마법사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선교의 첫번째 어려움이 왜 하필 마법사의 방해입니까?

마법사의 방해는 교회의 선교가 영적 전쟁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늘 체험합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해 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꼭 방해되는 일이 생깁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할 때에는 틀림없이 많은 교인들이 결석을 합니다.
사탄이 저를 낙심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낙심시켜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우리 교회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인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마음을 다잡다가 마음에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겠다는 마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탄은 꼭 시험을 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던 욥을 사탄이 시험하였습니다.
이 영적전쟁이 극명하게 드러나면 하나님의 축복이 가까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안디옥 교회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로 모이는 구성원들이 다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으면 유유상종하고 끼리 끼리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나의 신앙의 눈높이로, 나의 도덕적 기준으로 형제와 자매들을 절대로 판단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함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도록 우리들 곁에 데려다 놓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교회를 찾은 사람들을 가로막는 문턱이 되지않게 하십시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온전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들고 어렵고 때론 동의하기 쉽지않지만 말씀 대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가는 그런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주의 손이 함께한 사람들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21일)
  • 행11:19-30
  • 설교자: 이종실

030921 (삼위일체 열네번째 주일)
본문: 행 11:19-30
제목: 주의 손이 함께한 사람들
<본문>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설교>
지난 주에 유대교 안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발생한 기독교회가 유대문화와 전통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직접 지시하고  천사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할이 개입됩니다.
교회는 이처럼 인간들이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이끌리고 때로는 사건 하나 하나를 연결시키며 자연스럽게 섬세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숨은 손에 의해 발전해갑니다.

늘 말씀은 하나님의 숨은 손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 지 그리고 그 교회 안에 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특별히 어떤 교인들을
어떻게 선택하시고 이끌어가시는 지 오늘 그 여정을 세밀히 함께 살펴볼 때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사도행전에 대한 상식 한가지를 질문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달리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방선교의 베이스가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로 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으로 넓게 퍼져갔습니다.
어떻게 이들 놀라운 일들이 일었났는지 오늘 본문은 전해주고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라는 19절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일>은 스테반이 돌에 맞아죽는 첫번째 순교자가 되는 사건입니다.
그가 어떤 계명을 어겼기에 돌로 맞아 죽는 사형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이유로 죽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불행한 사건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박해가 그때부터 일어났습니다.
박해로 많은 유대 기독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유대교 안에서 한 분파를 이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우려한 정통 유대교의 종교 탄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안디옥교회에 관해 글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합니다.
다시말씀드려 안디옥교회의 탄생 근거를 스데반의 순교에서 누가는 찾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기독교회가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과 정통성이 유대교의 잘못된 신앙의 극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석이후에 한국의 정치정당인 민주당이 두쪽이 났습니다.
하나는 <민주당 사수파>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신당>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민주당의 정통성이 서로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민주당 사수파는 민주당의 역사성을 근거로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 통합신당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따랐던 민주당의 정신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민주당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전직 현직 대통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깨닫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기독교회는 어느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제한 시키는 딱딱한 껍질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껍질을 깨고 벗겨 기독교 교회를 세워가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기독교회의 출발은 이처럼 잘못된 신앙의 오류에 빠진 유대교를 밑거름으로 삼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교의 모순과 오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있습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집단임을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의 장면을 통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누가의 고발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54
그들은(*의회에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 이 말(*스데반의 설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서, 58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표준새번역 7:54-60)

이처럼 기독교회는 신앙의 독선과 오류와 모순을 극복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 반성이 없는 기독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과 회개 없이 자기교리와 가르침만을 주장하는 기독교회는 자신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꼬빌리시의 한인 기독교인들은 자기주장에 앞서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총의 감격을 체험하고 그 눈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최악의 사건을 선택하십니다.
당시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사용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해외에서 험악한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존심 상하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꺽는 그 많은 험악한 일을 하나님이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사용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경험들이 가져온 상실감과 좌절감과 수치심과 패배감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의 한 부분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흩어진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해의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며 운명의 파도가 언제나 그들을 파멸시키려고 넘실거렸습니다.
고스란히 어려움을 겪어야지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처지들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채 스스로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것 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강풍으로 삼아 친히 돛단배가 되어 우리를 태우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흩어진자들>이 온갖 고생 끝에 드디어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한 지역 도시였습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녹아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죄악이 크게 입을 벌리고 유혹하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최악의 장소를 이방인 선교기지로 선택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 최악이 하나님의 눈에 최악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신자는 쉽게 판단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20절 본문을 보시면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구브로) 사람과 구레네(그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헬라)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과 9장에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이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0절의 <헬라 사람>은 분명히 유대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이방인들입니다.
10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예배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골넬료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워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완전히 성경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완전한 이방인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돌아가서 다시 19절 말씀을 보시기바랍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19)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왜 다른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이방인에 대한 깊은 편견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만약 성령이 강권적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방문했을까요?
한번도 부정한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한번도 이방인들하고 같이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 조차도 구원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체코교회를 방문하면서 어떻게 한국인들은 처음에 기독교 용어들의 개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체코 교인들로부터 자주 질문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배경 없이 메시야와 유일신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어떻게 구약의 구자도 모르는 완전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인가요?
그들이 설득력이 뛰어났기 때문인가요?
헬라 사상을 잘 이해해서 짧은 시간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기 때문인가요?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물론 안디옥으로 피난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다른 유대인들과 다른 점을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친절한 사랑도 베풀고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는 우리 꼬빌리시 한인 교우들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선교는 우리들의 재주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서 교회일 하겠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하겠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돈 많이 벌게 되면 아까워서 못하게 됩니다.
재능을 더 갈고 닦아서 하나님 일 하겠다고 생각하는 분 계시면 오산입니다.
재능이 뛰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조그마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가 누구이든 재능이 있든 없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주의 손에 붙잡힌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조그마한 봉사나 교회의 선교를 내가 한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질이 없어 재능이 없어 일을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주어 그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안디옥 교회를 세워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열었던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오늘 본문은 <구브로(키프러스)와 구레네(그레네) (출신) 몇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출신지역만 나오지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평범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을 교회의 선교를 위해 손을 내밀어 붙잡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박해라는 신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그리고 박해를 피해서 간 곳이 죄악이 가장 심한 장소에서 그것도 익명의 신자를 선택해서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 기지 안디옥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선교는 최선의 조건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조건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내가 조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선교를 생각하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입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동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는 유대인들과 함께 찬양하고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방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들 두 그룹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거기서 본 것은 예루살렘의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교회였을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습관은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23절에서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했습니다.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의지하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이렇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과 형식을 뛰어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해서,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가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히 달라보이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그의 영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체코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쉽지않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다른 교회의 전통 안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목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신앙 전통에 매여 있는 사람이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는 신앙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가 쉽지않습니다.
큰 교회의 대형 성가단의 웅장한 음악과 수 많은 인파가 운집한 교회당에서 떠나갈 듯 부르는 찬양과 기도가 꽉 찬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왔을 때 이곳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가 쉽지않을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에 같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럽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해 유럽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선교사들 목회자들 평신도들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체코교회 안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는 꼬빌리시 한인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교만에 빠지지 않는 우리 교인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전통과 습관 모두가 다른 교회였지만 그곳에서도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사람 그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안디옥 교회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24) 로 평가하고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사도가 아닌 바나바를 선택해서 보낸 이유를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섬기고 받드는 삶의 스타일이 일 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후에 바울이된 사울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갔을 무렵에 사울은 다소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 일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 사울이 왜 다소에 있었는지 그 상황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9장에 상세히 기술된 내용입니다. 다메섹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했던 그 상황입니다.
다메섹(다마스쿠스)에서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설교를 합니다.
그 후부터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자신의 추종자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많이 이야기 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테러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타인에게 설득을 시켜보지 못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옛말에 열 배 부자는 사람의 시샘을 받지만 백 배 부자는 사람을 부릴 수 있고 천 배 부자는 사람의 숭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학문과 학벌과 출신가문과 사회적 지위는 사람들이 그를 숭배할 만한 압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득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자 아마 사울은 충격과 좌절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천하의 사울이 도망쳤습니다.
자신의 고향 도시 다소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몇 년을 보냅니다.
성경은 사울이 다소에서 보낸 기간이 얼마였는지 말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사울의 행적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사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 설교나 전도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비참하게 도망친 이후 수년간 사울은 다소에서 잠적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 일부는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좌절은 좌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가 실제로 안디옥에서 시작할 때를 위해 그를 준비하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 둘은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리고 일년동안 그들은 이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후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사울이 이처럼 다시 교회의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는 바나바에 의해서 였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그의 눈은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사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영웅이 되려는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섬기고 받드는 숨어 봉사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성장해 갑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참된 교회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는 멀리 있지않습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신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설립과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인물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이 붙잡고 싶은 신자가 누구인지 깨우쳐 주고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겸손한 영을 가지십시다.
어디에서나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촉촉한 사랑의 눈빛을 지닌 인자하고 착한 신자들이 되십시다.
받들고 섬기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알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노력하십시다.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꼬빌리시 한인교우들을 손에 잡고 체코교회의 선교를 위해 일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

  • 한인 예배 (2003년 09월 14일)
  • 행10:1-35
  • 설교자: 이종실

030914 삼위일체 열두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0:1-35
제목: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

<본문>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설교>
저는 체코교회를 개혁교도들의 종친회에 비유를 합니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의 경험하나로 체코교회를 자기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지 30년 50년 또는 그 이상되는 교회들의 예를 들어 설명을 덧붙입니다.
처음에 교회개척 당시 그 교인들이 이제는 교회의 중진이 되었고 그 자녀들이 대를 이어 교회를 섬깁니다.
이 개척교인들이 구심력을 갖는 교회는 대체로 새로운 사람들이 정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뚫고 들어가기 어렵고 굳어진 관례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개척교인들의 폐쇄성이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경향이 요즈음 한국교회에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몇 년전 한국가서 체코교회의 폐쇄성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 교인들이 자기교회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반응을 하였습니다.

600년 체코 개혁교회역사는 생존이 역사의 과제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생겨났던 교회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거대한 시설물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수의 증가가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나마 이제는 그 증가율 마저 없어 앞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주 5일근무제라는 사회의 변화가 큰 폭풍이 되어 교회를 강타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에는 모두 손을 놓고있습니다.
600년 늙은 교회의 현상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인 수는 늘지않는데 목사숫자는 늘어나는 현상입니다.

저는 요즈음 한국교회가 점점 쇠퇴해가는 현상을 이곳에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의 대화의 변화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에 해외에 나오는 분들을 만나보면 교인들을 만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왜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나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마저도 떠나고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을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제가 섬기는 이 교회가 더 부흥해야 될 목적으로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프라하의 좁은 체코한인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각자 심각하게 해야될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내부인들이 외부인들을 기꺼이 맞이하는 전환점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도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을 고백할 때마다 그들은 언제나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 외에 결코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회의 출발이 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우리들은 이방인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한번은 한국에서 여행오신 분을 따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입장료가 너무 비싸 내부가 궁금했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다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납작한 접시 같은 것을 얹고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유대인들의 초대교회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상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검은 옷과 모자를 쓰거나 이런 납작한 접시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면 교인들이 아마 한마디 하지않을까? “당신 유대인들이 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느냐? 당신들은 회당으로 가라!”
초대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있는 것을 유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당시를 혼자서 그렇게 역으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있게되었습니까?
유대인들 만의 교회가 벽을 허물고 그 문호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전환점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 입니다.
분명이 그것은 세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유대교의 이단으로 남았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교회가 존재하지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된 이 사건은 매우 하잘 것 없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러나 어떻게 복음이 이방인들과 대화되었는지, 어떻게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는가를 생각한다면 역으로 우리가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전환점을 만들어 갈 것인지 이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이 굉장한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피장(무두장이) 시몬이란 사람의 집에서 베드로가 묵고있을 때였습니다.
정오쯤 되자 지붕위로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 시간은 사람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때였습니다.
그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무아지경에 빠졌고 그리고 그는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식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2절 본문에  “그 속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이 들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14절 입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율법에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부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은 레위기 11장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언급되어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굽이 갈라진 쪽발이면서 새김질하는 짐승입니다.
쪽발이면서 새김질을 안하는 짐승이나 아니면 새김질을 하는데 쪽발을 갖지않는 짐승은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오소리 토끼 낙타 돼지는 먹지못합니다.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지만 둘 중에 하나가 없는 것은 먹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새 가운데서도 독수리 매 종류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부엉이 백조 펠리컨 박쥐는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쥐 도마뱀 악어 카멜레온도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먹거리는 정결하고 어떤 것은 정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금지된 음식을 엄격히 지키고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가공된 음식이 있기에 그들은 성분을 분석하여 검사한 음식을 선택해서 먹습니다.
유대인 지구에 가면 이 음식 율례를 엄격히 따르는 유대인 식품점이 있습니다.
그 식품점에는 가공한 음식은 성분을 검사해서 금지된 성분이 없는 식품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음식에 관한 법을 매우 엄격히 지켰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표현대로 음식이 정결하고 정결하지 않는 위생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음식뿐 아니라 모든 정결하지 못한 경우를 규정하여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하였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정결하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면 그 사람이 정결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된 경우 가운데 음식에 대한 규정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경우는 설령 그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정결해 질 수 있는 예식 규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를 만진 사람은 옷을 세탁해서 입고 저녁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음식 만큼은 불결하게된 조건이 정화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지된 음식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큰 보자기에 담겨 내려오는 그 불결한 것을 “잡아 먹으라”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대답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매우 놀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이러한 대화가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배고픈 베드로에게 이 음식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못먹을 것을 주면서 먹으라고 놀리는 그런 재미있고 짓궂은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바로 이 환상 안에 이 후로 세계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서 피장 시몬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19, 20절) 하셨습니다.
그가 내려가 보니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성령님이 보내신 사람들이란 말인가?” 베드로는 마음 속으로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22절에 나옵니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 유대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서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거룩한 천사에게서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정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을 방문하거나 함께 음식을 먹지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정에 없이 불시에 그것도 이방인에게서 초청을 받고 함께 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의 음성에 따랐습니다.
그들을 불러들여 묵게하고 다음날 가이사랴로 함께 떠났습니다.

그 다음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자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어제 보았던 그 환상을 생각했고 마침내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28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28절)

 “우리는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해서는 안된다” – 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매우 주의 깊게 주목해야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같고 동등하기에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꿈속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 이 구절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나누었던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눅 15:2) 성경은 수근거리며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대단한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난과 수근거림을 상관하지 않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나눈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똑 같기에 평등하기에 차별을 해서는 안되기에” “하나님과의 교제에 그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이런 대답들은 틀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 예수님의 마음의 깊이를 이해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청을 받으려면 사전에 죄 용서와 성결해야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함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식탁에 참예하는 것도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속죄의 희생이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자 예수님은 자신이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죄인들을 초청하였고 그들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깨끗하게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들었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모인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용이 본문 말씀 34절과 35절과 그 이하에 나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34,
35절)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의 민족과 인종의 구분 안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인간의 집단 안에 있는 것입니다.
차별은 성과 나이 사회적 지위와 학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한 차별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세상에서 차별이 사라지지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차별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차이점은 우리들 사이에 있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차이를 결정적으로 중요한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차이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각자 개 개인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고넬료가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로움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 돌아왔다는 의미는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이 했던 것 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으려고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며 그 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냐 우리 각자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리고 편을 만들고 있지는 안습니까?
교회로 모이는 것이 무슨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기득권이 되는 것 처럼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겸손히 노력할 때  우리들은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

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31일)
  • 출32:1-14
  • 설교자: 이종실

030831 (열한번째 삼위일체주일)
본문: 출애굽기 32:1-14
제목: 아!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설교>
저의 아버님은 조그마한 채굴광을 하나 세내어 일한 영세한 광산업자이셨습니다.
광맥을 찾고 그 맥을 따라 감추어진 석탄과 동과 같은 지하자원을 채굴하셨습니다.
광산촌의 아이가 바로 어렸을 때 저였고 여름에 갱 입구에 앉아 불빛하나 없어 깜깜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시커멓고 끝이 없어 보이는 구멍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쫒는 경험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출애굽기를 죽 설교하면서 저는 광산촌의 어린시절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지하에 감추어진 엄청난 노다지인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도 그냥 제눈에 드러나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실날 같은 말씀의 광맥을 찾아 조금씩 깊이 내려가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습니다.
저는 말씀의 광맥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과정을 가급적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설교로 전달함으로써 여러분들께서도 스스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기쁨의 체험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지속적으로 만났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나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잊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느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내 병든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일에서 근거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그 마음과 영혼으로 우리는 바른 찬송과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는 모두 40장인데 저는 오늘 설교까지 13번으로 일단 출애굽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나간 12번의 설교를 돌이켜 보면서 대체로 저의 설교가 무엇이 왜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시켜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안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질병과 환란과 불행의 온갖 사탄의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시고 무능한 존재로 남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겹겹히 쌓여 하나님을 그 가운데 가두고 그 하나님을 우리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들의 마음은 어두워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들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시는 하나님을 저는 출애굽에서 지속적으로 만났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나를 끝까지 이처럼 관심을 기울여 주십니까?
눈물을 쏟고 목놓아 울고싶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 속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않자 백성들은 함께 모여 아론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1절)
모세가 얼마나 오랫동안 산 위에 있었습니까?
출애굽기 24장 끝부분에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18절)고 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엇하러 산에 올라갔습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25장부터 오늘 본문 이전인 31장까지 계속됩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전건축법과 성전 인테리어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31장 18절)

성전과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회를 열어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요청에 아론은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형상 앞에 세워진 단에 봉헌을 하며 축제를 열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알립니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들은 일구이언을 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니 지키고 싶습니다.
어느날 말씀을 듣고 기도와 찬송을 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주일도 성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결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는 우리들의 결심과는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늘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우리들의 문제가 단지 하나님과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에만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두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우 자기 합리화의 습관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것은 원래 그런거야!
내가 신이 아닌데 어떻게 마음에 감동이 될 때 마다 하나님 앞에서 한 결심과 약속을 다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도 우리가 못 지킬 줄 알면서 그렇게 마음으로 결심하는 줄 다 알고 계실거야.

신앙생활은 당연히 그러는 것으로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립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이러한 습관처럼 되어버린 신앙생활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 보도록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주고싶습니다.

왜 우리는 신앙의 결심과 스스로 자신에게 한 것이든 하나님과 한 것이든 그 약속을 번번이 어깁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질문은 이 원인규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원인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 것을 요구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신을 요구하면서 덧붙여 한 말입니다.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걸림돌의 첫번째 이유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을 필요로하게된 원인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대상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모세를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리고 광야 여행 길에 그들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출애굽기 19장 4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분도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이 관계는 모세라는 한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그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보지 못하고 단지 모세를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모습이 오랫동안 그들의 시각에서 사라지자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허울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질서가 그들 사이에서 날마다 무너져 갔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닌 사람을 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다니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 한인 목회를 오래 하신 분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가장 마음이 아프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이 누구 보기 싫어서 교회 나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라는 것입니다.
이 좁은 해외의 한인사회에서 조금만 살다 보면 집안에 수저가 몇 벌인지 다 알 수 있는 이런 사회에서 사람을 보지 않고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교회를 나간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의 모임과 다릅니다.
예배라는 모임의 형식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것은 신자들의 모이는 목적과 바라보고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임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교회로 모이기에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에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신자들이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이제 신앙생활의 장애의 가장 근본적인 또 다른 원인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다른 신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도자 모세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다른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론에게 모세의 역할을 해주거나 아니면 모세와 같은 다른 지도자를 선출 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여러분들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을 인도할 다른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은 정말 신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우상이 자신들을 인도할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본문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하였는데 이 말씀은 공동번역 성경에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라고 되어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갈 신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이 자신들 보다 앞서 뚜벅 뚜벅 걸어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우상은 그렇게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앞장 서서 걸어가는 우상을 따르며 그의 말에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 우상을 데리고 다니면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종교행위라면 우상숭배는 복종할 대상이 사라져버린 불복종의 종교행위 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한가지라도 지켜 복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신앙의 깊은 맛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내면 속에 언제나 원하는 종교는 불복종을 요구하는 우상숭배의 종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뿌리깊은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장애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이것은 기독교인의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기준이 내 안에서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다음단계로 세계관이 변화되면 영의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싸울 영적싸움의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이 근본적인 신앙생활의 장애들과의 싸움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신앙수련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뼛속과 혈관 속에 그리고 존재 속에 불복종을 요구하는 종교를 희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들은 이 우상 앞에서 여호와의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희생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들이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논다는 단어가 성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합니다.
체코어 성경은 한국어 성경보다 좀 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놀더라 – nev&aacute;zan&aacute; hra 이며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nev&aacute;zan&aacute; 라는 뜻은 한계도 규범도 절제도 없다는 뜻입니다.
축제에서의 그들의 놀이는 문란하고 난잡하였음을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중근동 지방의 고대의 예배에서 농사 신을 섬겼기에 송아지 우상 앞에서 하는 축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어떠한 신앙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도 내 마음에 닿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여기는 경우는 없는지 이 시간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시내 산 꼭대기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시다.
산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7,8절)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세는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손끝하나 움직일 힘을 잃은 상실감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하나님의 말씀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 하지않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모세는 커다란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9, 10절)

모세는 와락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력하게 어필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1절)
그리고 간청합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2절)
이와 같은 모세의 중재로 여호와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4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 없애버리실 마음이 정말로 있으셨다면 굳이 모세를 산으로 내려 보내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그 유사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미가 선지자들에게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고 그 메시지를 주면서 그들을 보냅니다.

시내 산 꼭대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성전 건축법을 일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여호와는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백성들 가운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25장)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백성들이 돌이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예언자 에스겔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 33:11)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24일)
  • 눅19:1-10
  • 설교자: 다빗 유레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여리고라는 곳에 들르셨습니다. 
여리고에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부자였던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그 뜻으로 볼 때 사가랴 라는 이름과 똑같이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달성할 수 있었던 삭개오는 아마도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서 그는 존경을 받거나 인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에도 겨우 몇몇 사람들만이 그에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삭개오는 바로 로마의 관청에서 세리로 일을 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세금과 여러가지 수수료를 걷어 로마정부에 바쳤습니다.
같은 동족을 배반하고 침략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대인들은 그를 자기 민족을 떠나버린 매국노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이란 의미가 민족과 함께 종교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삭개오는 로마정부의 세리라는 직업을 갖기위해 이스라엘의 종교사회를 떠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을 불결하게 여겼던 로마인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과  명예를 포기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돈과 지위를 따져볼 때 그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세리에서 여리고 전체의 모든 세리들의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이 어떻게 세금을 걷어들였는지 여기서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세금을 걷어들이는 방식은 사실상 세리들에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구역의 세금 징수권을 돈을 주고 샀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자신이 투자한  금액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신들의 권한이 있는 납세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납세자들에게 세금 독촉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돈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당한 일이 자주 일어났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세리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세례 요한이 세리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그러한 부당한 상황이 있음을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3:12b-13) 하고 대답했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그런 부정직하고 신중하지 않은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부당함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삭개오를 가장 많이 판단하고 증오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삭개오와는  어떤 관계도 맺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라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신실하시며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으며,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부르셨고, 그리고 여리고까지 오셨습니다.
여리고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순례자들 중에 나사렛 예수도 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던 여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거리는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기이한 일을 일으킨다는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위해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끼어들었습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로 집에서 달려나왔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들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어쩌면 에수님은 아무도 경멸하거나 얕보지 않으며, 열등한 사람들과도 한 식탁에 앉아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외로운 삭개오는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고,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밀쳐냈습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뿌리가 튼튼하고 가지가 넓게 뻗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가지 속에서 몸을 숨겼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꼭 그 분을 볼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주위를 지나가실 때 삭개오가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서 멈추시고 가지위로 우러러 보시며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은 나무 가지 속에 있는 삭개오를 아신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름까지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다는 것은 그 집의 손님으로 밤을 보내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삭개오는 재빠르게 나무를 내려와 정말 커다란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까지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지명한 사람이 그 라는 것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대접해 드릴까 무척이나 고민했을거라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여있던 군중들에게 그 일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 어떻게 예수님이 여리고의 가장 큰 죄인의 집에 가실 수 있단 말인가?!“
선지자라면 삭개오의 집에 절대 발을 들여 놓지 않으실 텐데, 모인 사람들 중에 정말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합당한 바르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집에 가셔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모인 군중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원래  정통 유대인은 이방인이나 죄인, 불명예스러운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안되었습니다.
물론 삭개오도 예수님의 친절이 그에게 과분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선택하셨을 때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는 협박이나 질타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삭개오의 양심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를 통한 모든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대접함에 있어서 맛좋은 것들보다 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법률이 규정해 놓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보상해 주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나온 것 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피해액의 20% 내지 100%를 더 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2배의 보상에다 다시 두배의 보상을 더해서 4배의 보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삭개오였지만 어떻게 부자들이 보상하고 회개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변화된 삭개오의 너그러움은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표입니다.
더 나쁜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큰 죄인이라고 보았고 그를 쉽게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은 삭개오를 기억하셨습니다. 
이렇게 길을 잃은 죄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선택된 백성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그 집으로 구원과 용서, 새로운 인생이 함께 들어간 것입니다.

삭개오는 변화되었고 회개를 했습니다.
이전까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보다 부(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아둔 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전 시민 앞에서 삭개오를 인정할 때 그러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로 다가가셨던 사랑으로 삭개오를 회개 시키셨고 바르게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어버린, 순종하지 않는 어린양이 죽지 않도록 찾아나서는 선한 목자처럼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세리와 죄인들 같이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떠나버리고 그 약속의 말씀 또한 상실해버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롭게 다가가심으로 삭개오 또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듯 그들을 찾으셔서 다시 우리로 돌려보내십니다.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의 가장 주된 주제는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의 시작입니다.
죄인을 찾으시고 부르시며 그의 손님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삭개오가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회개와 지금까지 행해왔던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그의 노력은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방법에 가장 올바르게 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례길의 의미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러한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몇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장 큰 죄인이라도 구원하시려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지금까지의 전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고 새로운 인생길을 떠날 때 가능합니다.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삭개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독교인들은 <우리> 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 올바른 쪽에 있는 사람이 우리입니다. 좋은 우리, 선택된 우리입니다.
그리고 주위 세상을 의미하는 <그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불행하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올바른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에 „분명히“ 잃어버린 죄인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한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그의 민족과 종교사회보다도 더 우선시 생각했습니다.
부의 축적과 사회적인 지위를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났었습니다.
삭개오는 우리들의 소유가 우리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돈이란 우리가 다른 이웃들의 고통과 빈곤을 덜어주기 위해 나누어 줄 수 있을 때만이 정말 자신을 위해 쌓아 놓을 수 있는 영원한 재산이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자유함을 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사랑 안에 하나님이 생겨나고 그 사람의 참 존재를 실현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삭개오를 기억하셨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올바른 길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그의 인생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른 이웃들을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