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출애굽의 대단원

  • 한인 예배 (2003년 08월 10일)
  • 출25:1-9
  • 설교자: 이종실

030810 (삼위일체 여덟번째 주일)
본문: 출애굽기 25: 1-9
제목: 예배, 출애굽의 대단원(大團圓)

<본문>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위해 여호수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출애굽기 25장 처음부분을 읽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31장까지 계속됩니다.
한번 책장을 넘기며 대충 빨리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막과 성막에 따른 물건들을 만드는 방법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읽다가 보면 이런 이야기도 성경의 일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글짓기 숙제를 하는 학생이 원고지 매수를 채우기 위해 요령을 부리듯이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한번 통독해야겠다고 마음잡고 성경을 읽는다면 이 부분이 첫번째 걸림돌이 됩니다.

읽기에도 지루할 정도로 성막과 그 딸린 물건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저자의 뜻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볼 만 합니다.

여기서 성막과 성막에 딸린 물건들이 정확히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의 저자는 9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9)

성막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천막입니다.
성막에 딸린 물건들은 예배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은 자신이 경배와 섬김을 받는 예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온 모세에게 예배 장소와 필요한 물건 제작에 대해 세부적인 방법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모두 40장입니다.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 출애굽기 전체 가운데 삼분의 일이 넘는 내용이 예배장소와 예배시 사용될 물건에 관해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 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 홍해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출애굽의 중요한 내용은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읽은 25장부터 40장 마지막 부분까지 대단원을 이루고 있는 성막을 중심으로한 예배의 섬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출애굽의 이야기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고된 노역으로 부터의 단순한 해방이 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이 그 법에 복종하도록 하려는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바로가 통치하는 나라, 바로의 통치아래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우상이 지배하는 삶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출애굽의 이유였습니다.
그뿐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삶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된 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도록 그들 가운데 하나님은 그 예배 처소와 예배에 사용될 물건을 만들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 출애굽의 대단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성막에 딸린 물건들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종교적 취향에 따라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만들도록 버려두지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것을 만들도록 엄하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는 예배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 의중을 따라야지 예배자 이스라엘의 뜻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번에 묘지를 향해 떠나는 관과 유가족을 가득 실은 지나가는 장례차를 구경을 하고 뒤따라는 가보았지만 상주가 되어 그 차에 타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영정을 안고 가는 상주가 바로 저였습니다.
주일이 끼어 4일장이 되었습니다.
빈소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이 저였습니다.
상주로 입관부터 삼우제까지 복잡한 장례절차를 치르면서 저는 장례예식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장례예식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산자들의 가슴에 맺힌 실수와 잘못과 원망과 산자들 사이에 뒤틀린 인간관계가 죽은 자 앞에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예식이 장례식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례식에는 엄중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 간소화 하려면 상주들과 친척들이 의논을 해서 합니다.
일방적으로 누구 한 사람에 의해 그 절차가 좌지우지되지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예배에 하나님 자신의 요구가 있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필요와 희망의 성취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배의 우선순위를 자주 잊습니다.
우리의 뜻과 소망들이 예배에 나타나는가 아닌가가 늘 살펴야 합니다.
(* 광고시간에 생일 축하 케익을 자르고 폭죽을 터트린다.)

잘못된 예배, 실패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구약성경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모세가 한 달 열흘씩이나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 사이에 조바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을 의지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들을 위한 예배는 우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제단을 세우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 32:4-6)

자기 자신을 우상화한 예배는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소외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소외된 자신을 더욱 정당화 하려는 자기 암시로 우상화된 예배는 더욱더 격렬해집니다.
제단을 세우고 그 앞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그 예배를 여호와의 절일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체코어 성경에 Zitra bude Hospodinova slavnost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이것은 Hospodinova slavnost (여호와의 페스티발)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페스티발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복해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는 잘못이었습니다.

출애굽 오늘 말씀에 예배 처소와 예배에 사용되는 물건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길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오늘날에 이 말씀대로 똑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하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장소를  거룩한 장소 즉 성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막은 원래 <살 곳> 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주할 곳 즉 살 곳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손으로 짓게 될 거주지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설계도와 일치된 건물은 거대한 신전이 아니었습니다.
성막은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조립형 텐트였습니다.
그걸 펼쳐서 세우면 가로 15미터 세로 5미터 높이 5미터 정도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계명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따라 살기로 엄숙히 다짐을 하였습니다.
계명을 주고 받고 그리고 다짐을 주고 받았으면 충분하지 또 성막을 세우도록 따로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거처를 찾는 이유가 분명하게 설명되고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생활공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거처를 필요로 하지않습니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유한한 인간이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거주하실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운반 가능한 거처를 짓도록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나는 그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 하십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된 확실한 체험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시내산은 아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광야의 여행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죽은 자 앞에서 산자들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하지만 그 회복이 늘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제사 또는 추도예배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을 견주어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전민족적인 체험이 닥쳐올 광야의 굶주림과 목마름과 전쟁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시내산의 언약이 타인의 죄로 전민족이 고통을 겪게되는 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불행을 예방하는 부적이 아닙니다.
시내산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광야의 캠프생활의 수고를 고스란히 겪어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캠프생활 한 가운데 성막이라 불리우는 텐트에서 함께 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막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것입니다.
조금 질문을 바꿔 우리에게 예배당이 왜 필요한가?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지속시키데 도움을 줍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이 병을 낫게 하고 보약이 약해진 곳을 강하게 해주지만 밥처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 세끼식사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우리들의 건강을 지속시킵니다.

로 뜨거운 체험도 없고 은혜도 느끼는 것 같지않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날을 기억하고 교회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지키고 승리하여 약속의 하늘 축복을 누리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사도 바울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처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신자의 삶을 함께 노력하십시다.
온갖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행복을 이 땅 위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우리 하나님은 지금 원하고 계십니다. (아멘)

우리가 주의 날을 지키면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27일)
  • 출20:8-11
  • 설교자: 이종실

030727 (여섯번째 삼위일체 주일)
본문: 출애굽기 20:8-11
제목: 우리가 주의 날을 지키면 주의 날이 우리를 지킵니다.

<본문>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설교>
오늘은 안식일에 대한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미 6월 마지막 주 설교본문으로 읽었습니다.
그때 십계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자의 삶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안식일 계명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안식일 계명에 대해 반복해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교회로 모이면서 고민을 한 것이 이 해외에서 한인교회가 과연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한인교회들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선교에 두고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우리 교회의 선교적 존재 의미와 관련한 교회론을 숙고하였습니다.
대부분 해외의 한인교회들은 선교를 위해 현지교회와 파트너쉽의 관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저희 꼬빌리시의 체코인들과 우리 한국인들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따라 모든 민족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거룩한 공회)라는 고백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교회입니다.
함께 세례를 베풀고 함께 성만찬 식탁을 나누고있습니다.
교회당을 월세를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활동보다 선교하는 체코교회의 비전과 변화를 제시하는 일을 우선하였습니다.


래서 유럽의 유럽교회들과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2년전(2001년) 스위스 제네바 존 녹스 국제 개혁센터에서 세계개혁교회연맹의
Mission in Unity 분과 주관으로 열린 재 유럽 한인교회와 유럽교회 컨퍼런스에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의 존재와
발자취를 주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교회들은 우리 큰 교회들이 감히 생각 조차도 못한 일을 작은 체코교회와 체코의 소수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감당하고 있다고 놀라와 했습니다.
저는 선교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세계교회와 유럽의 한인교회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주는 바른 방향성을 가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와 관련한 교회론과 더불어 목회적인 차원에서의 교회론에 대해 동시에 고민을 하고있습니다.
저희들은 신앙의 배경들이 매우 다양합니다.
교단이 다양합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단, 성결교단, 감리교단, 순복음교단, 침례교단 그리고 카톨릭 신자들이 함께 모입니다.
보수적인 분들 진보적인 분들, 다양한 신학적 신앙양태의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도 천차만별입니다.
체코에 거주하는 목적도 매우 다양합니다.
작년에 주일 평균 회집 인원이 45-50명쯤 되었습니다.
작년에 떠나신 분들이 27분이고 새로 오신 분들이 21분이었습니다.
예배인원수의 절반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의 교회들과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해외 교회들과도 비교할 때 매우 특수한 상황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교회를 어떻게 목회할 것인지 신학교에서 가르친 적도 그리고 저는 배운 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목회의 경험을 서술한 참고서도 시중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않았습니다.


수한 상황 안에 있는 교회를 바르게 섬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며 조그마한 자료라도 모으고 해외 목회자들의 경험을 듣고 그것을 숙고하고
그리고 우리교회의 상황과 빗대어 생각도 하고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평신도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면서 자신의 교회에 대한 평신도의
입장을 듣는 일들을 게을리하지 않고있습니다.

성경말씀 안에서 이러한 고민과 숙고를 통해 세워진 저의 목회의 방향을 몇 차례에 걸쳐 목회 서신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을 간추려 교회의 신앙생활과 생활실천목표로 삼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숙고된 원칙들을 따라서 목회를 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하고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적인 관점에서의 교회론에 대한 정립은 제게 여전히 많은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런데 이번에 몇 주간에 걸쳐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설교를 하면서 체코의 우리 한인교회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목회란 결국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쳐주고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연구를 하여 목회적 차원의 교회론을 정립해 볼 생각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응답하는 신자의 삶의 종합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안식일 이라는 단어의 뿌리는 멈추라는 단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멈추라! 쉬어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 11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 계명의 근거로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은 거론하고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1장은 아주 감동적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우주만물 가운데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천지만물이 만들어지는 그때에 사람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일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지 못합니다.
인공호흡기를 폐에 넣고 인간의 병든 신체부위를 바꾸는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은 생명을 새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준비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않는 사람 그 누구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필요를 스스로 충족하지 못합니다.
간략하게 묘사된 오늘 말씀의 천지창조는 이 세상을 보존하며 우리를 그 곳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설명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 날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의 참된 쉼을 위해서 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4장에서 우리는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다(히 4:1)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기자에게 안식은 영생 구원의 미래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이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 4:6)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11절에서 우리들에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0-13)
 
십계명은 출애굽기와 동시에 신명기에서도 나옵니다.
신명기의 안식일 계명의 이유는 출애굽기와 매우 다릅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나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출애굽기의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일과 관련이 있는 반면에 신명기의 안식일은 출애굽의 구원의 하나님의 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성서의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찬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의 모습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살면서도 늘 그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애굽 땅의 노예들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구원 받듯이 세상의 맘몬 신과 온갖 유혹과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존재의 의미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이 권능의 손과 팔을 자신들에게 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지창조의 설명은 단지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손과 팔을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억하는 날로서 안식을 지킬 것을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바로 이 세상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을 지킴으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내 보이시길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론 자신이 잘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실수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의 일곱번째 날이 아니라 첫번째 날을 거룩하게 구분하고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이 날을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날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린이 처럼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났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그들은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건은 분명히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건은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해주신 분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기억하는 주의 날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안식일과 다르지않습니다
오히려 이 주님의 날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시키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에 대해 마가복음 2장 2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안식일은 우리 믿는이들을 위해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 날을 지키면 안식일 즉 주의 날이 우리 신자들을 지켜줍니다.
주의 날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마가복음 3장 1-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에 관한 이야기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우리들이 분명히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1-5)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악의와 증오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소위 악의 축에 속한 부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율법을 엄격히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 안식일에 금할 일의 세심한 부분까지 토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로지 안식일에 금지된 일만 보았지 하나님의 은총의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안식일 즉 주의 날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날에 보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해야 되는 고역의 날입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시고 받아주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기쁨으로 이날을 맞이하십니까?
아니면 회당을 찾아온 예수를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처럼 미움과 악의와 증오와 질투로 이날을 맞이하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날 주의 날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그 날을 지킨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기억하며 우리들의 인간관계의 미움과 악의와 증오와 질투를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날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다른 피조물에게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모두 함께 기억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성대한 잔치를 벌립니다.
그 아들 혼자만이 먹고 마실 잔치가 아니라 온 동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길 잔치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주일동안 세상에 휩쓸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의 날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안식일 주의 날은 그냥 놀며 쉬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무거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날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마음과 육신의 질병이 치유되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며 우리의 근심으로부터 마음이 놓이는 날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참되게 안식일 지키고, 안식일이 우리의 6일간의 삶을 지키는 은혜의 체험이 있는 우리들의 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출애굽 이야기 발간

출애굽 강해 설교를 설교집으로 발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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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 크기
100쪽
표지 칼라
편집 사진 표지디자인 – 우리교회 얀 보우첵 장로님
1쇄 50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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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체코 공화국의 기독교인들

2003년 06월 24일 프라하
Josef Smolik (요셉 스몰릭 교수)

체코 공화국의 기독교인들

우리가 한국 그리고 체코 기독교인으로서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만날 때 이 만남의 순간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쁨과 감사를 올리게 하는 많은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에 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여러분들의 나라에 복음을 선포할 선교사들을 보내시고 정치 문화 언어가 다른 우리들을 이끌어주신 성령의 능력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기적을 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할렐루야 찬송하게 하는 복음은 우리의 공통의 토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들의 특별한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그리고 여기서 우리 교회들이 다른 시대에 다른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9세기 (863년)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우리나라에서 읽혀졌고 성만찬이 배설되었고 하나님 영광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에 교회는 이미 국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었습니다. 교회와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15세기에 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초래하였습니다. 교회는 유럽에서 대단한 권력과 부를 가진 기관이 되었습니다.교회가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동참을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력투쟁은 결국 교황이 세 명이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당시 유럽의 황제는 찰스 4세로 프라하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완전히 붕괴되고 복음이 상실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설교자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혼란하게 하고 그리고 성경과 일치하지않는 거짓 가르침을 하나님 말씀인 것 처럼 하게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노출된 교회의 위험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위험은 극도로 심각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개혁자 얀 후스를 불러 말씀대로 교회를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후스는 교회의 남용과 그리고 이 남용에 동참하는 사제와 비숍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후스에게 교회는 권력 기관이 아니라 신자들의 교제입니다. 후스의 설교는 성직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로마(교황청)은 후스를 고발하였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의 가르침을 취소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후스는 공의회의 신부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이단인 것을 성경을 통해 논증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신부들은 논쟁 없이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취소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후스는 거절하였고 1415년 7월 6일 화형장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매년 국가 공휴일인 그날에 그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후스는 화형을 당하였지만 진리 즉 후스가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불타 죽지않았습니다. 이 진리는 체코 민족의 가슴에 혁명을 일으키는 불이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십자군을 파병해 전쟁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체코인들이 후스의 이단 유죄판결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스의 추종자들은 후스를 옹호하는데 결연히 맞서 싸웠고 체코영토에서 십자군을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체코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후스파 혁명 프로그램은 프라하 네 개 조항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조항은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선포할 교회의 자유, 이전 신부들의 가르침의 형태 안에서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할 교회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체코어 성경번역은 온전하게 복음을 선포할 자유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두번째 조항은 떡과 포도주, 둘을 취하는 성만찬 배설을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sub utraque이며 그래서 후스파들을 우트라퀴스트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후스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강조하였고 오직 사제들과 성직자들만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락한 교회의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평신도들을 위한 잔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의 표시이자 하나님 나라에서의 종말론적인 기쁨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다음 두개조항은 경제 개혁과 세상 안에서 교회의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세번째 조항은 교회가 가난해야만 되는지 아니면 정치적 권력이 없는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상태인지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네번째 조항은 사제들과 비숍들의 면책특권의 지위를 거부하였고 그들의 범죄도 시민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후스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외교협상을 통해 후스파들을 보수파와 급진파 둘로 분할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스파 운동의 약화를 초래하였습니다. 급진파의 신학에서 형제단의 작은 교회가 시작되었고 후에 망명할 때 그들을 모라비안들로 불려졌습니다. 나의 체코형제교회는 개혁 장로교회 전통과 매우 가까운 이전 형제단의 유산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미 15세기에 형제단은 사도권 계승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사도의 지위와 함께 시작하는 계승권을 신성시한 비숍이 있는 곳입니다. 형제단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은 비숍의 역사적 계승과 관련이 없고 사도의 복음과 그리고 사도의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직 계승의 거부는 박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형제단은 이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형제단의 가르침의 다음 특징은 정치권력과 경제착취에 대해 비판적 접근이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 구조의 통합된 부분이 되어서 안되며 교회는 권력을 가진자와 부유한자의 편에 서서 안되며 식민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도 안됩니다. 형제단의 마지막 비숍인 얀 아모스 꼬메니우스(꼬멘스끼)는 경제 식민지주의의 해로운 결과 앞에 놓여있는 유럽국가를 경고하였습니다. 체코 영토로부터 추방된 후 형제단의 명맥을 이어간 교회 즉 모라비안들은 선교에 대해 특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노예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노예들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15-17세기 상황은 카톨릭교도와 개혁교도들 사이에 전쟁상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전쟁은 체코 공화국 지경에서 개혁교도들이 완전히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단지 불법적으로 비밀스럽게 개혁교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체코왕국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합스부르크 카톨릭 왕조의 통치를 받고있었습니다. 비엔나 카톨릭 황제는 국가의 절대다수를 의미하는 체코 개혁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황제의 조약협정을 어긴 예수회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의 반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유럽에서 발발하고 30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체코 프로테스탄트들은 1618년 백산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27명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프라하 구시가지광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개혁교도들은 국가의 진보정당들과 함께 매년 이 처형을 기억하고있습니다.

카톨릭과 개혁교회 서클과 일반 세속사회의 그룹들은 우리 역사의 이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과제가 과거의 상호 부정의를 화해하고 많은 편견과 이데올로기 어프로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패배이후 개혁교도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합법적으로 허락된 종교는 카톨릭 종교였습니다. (영국에서는 아주 반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개혁교도가운데 귀족은 나라를 떠날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노동력으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강제로 카톨릭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두개의 개혁교회들 즉 형제단 또는 후스파 신앙고백공동체를 제외한 개혁교회(칼빈개혁교)와 루터교회가 재카톨릭화후에도 생존한 남은자들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1781년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칼빈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합스부르크 카톨릭 제국이 무너진 1918년에 체코형제교회로 연합되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의 상황과 우리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17세기의 약간 다른 정신적, 철학적 경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17세기부터 우리들은 설립된 교회의 교인수가 감소하고 사회적으로 불이익 집단 즉 노동자들 사이에 신뢰성을 점점 잃어가면서 유럽 기독교 지식인들의 진보적 경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은 기독교 문명과 문화의 나라로 자의식을 가진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나라에서 공적지위를 상실하고있었습니다. 세속화의 근본뿌리는 17세기 신앙고백(교리) 전쟁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귀족과 왕들 심지어 교회권력계층들은 자신들의 종교, 복음을 위해서 싸우지않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기독교 신앙은 단지 핑계였습니다. (우리는 북아일랜드에서 비슷한 상황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식인들과 일반 백성들은 사랑과 화해의 복음에 대해 신뢰를 하지않았습니다. 새로운 운동이 유럽에서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것은 계몽운동 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 이성은 진리와 철학과 실존주의적인 확신의 기초였습니다. 기독교는 비판을 받았고 기독교 교리는 거부되었습니다. 새로운 인본주의와 관념주의의 철학이 기독교 전통을 대신하였습니다. 문화와 연극이 교회의 예배 역할을 하였습니다. 계몽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통신분야를 목격하듯이 엄청난 과학 기술 발전을 출발시켰습니다. 많은 반종교적, 반기독교적 반교권적 요소들의 결과로서 계몽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들도 이런 상황들에 대해 반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 신앙부흥운동, 새로운 성경연구들이 이러한 상황들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복음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 세속문화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신학 안에서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방어적인 근본주의와 보수주의가 세속화된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것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양차세계대전의 20세기 재앙이 있었습니다. 유럽교회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고 유럽 민족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다리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과 교훈이 무엇입니까?

1. 교회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와 동일화할 때 교회는 정체성과 신뢰성을 상실합니다. – 정체성과 신뢰성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교회는 권력 구조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유지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신자의 시민권은 이땅에 있지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교회는 종말론적 실재입니다. 복음은 모든 권력과 공국(국가)를 초월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서 살도록 그리고 세상의 조작과 도구의 희생이 되지않을 자유를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2. 유럽 교회들은 선교적 열정과 역동성을 상실하였습니다. 유럽대륙의 전통은 교회와 국가와 민족의 멤버쉽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속하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시민들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경건주의자들과 신앙 부흥주의자들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황은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거대한 선교의 장이 되었지만 선교활동과 사고의 전환이 총체적으로 결핍되어있습니다. 사고의 전환은 긴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3. 체코 공화국은 유럽에서 가장 세속화된 나라입니다. 이것은 인구의 대부분이 외부의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카톨릭을 받아들여만 했던 반 개혁운동의 시대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카톨릭이 체코 백성들에게 이식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의 종교적인 깊이에 까지 영향을 끼치지못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베란 추기경은 이사실을 지적하여 공의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자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복음이 다른 민족에게 이식될 수 없고 외국 문화로 포장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반면에 이 자유는 민족의 문화적 콘텍스트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유럽연합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회들은 자신의 삶에서 통합과 세계화의 과정에서 상실할 지 모르는 민족과 문화의 전통의 긍정적인 가치를 지킬 과제를 갖습니다.

4.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성도의 교제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그리고 설교를 통해 수행하는 예언자적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은 민족주의,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 권력을 상대화시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과 그 공동체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개 교회 공동체의 예언적인 존재로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교회로서 우리는 지금 유럽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고, 교회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그리고 선교 활동이 정체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앞에서 회개할 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 장로회 신학대학 역사신학의 종교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에게한 강의내용

믿음으로 산다는 것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20일)
  • 창 12:1-4a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년 7월 20일 (삼위일체 다섯번째 주일)
본문: 창세기 12장 1-4절 상반절
제목: 믿음으로 산다는 것
통역: 남유정 교우

<본문>

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창세기
12:1~4a)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랍비들의 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옛날에 우상을 만들어서 시장에 공급하던 유대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시장에 있는 그의 상점에서 아버지가 만든 그 우상들을 팔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구제와 희망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그의 가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우상이 잘 팔리는 가운데  그 상인이 부자가되는 것은 정말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장사할 줄 모르는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자신이 파는 물건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그는 손님들이 그 우상을 많이 사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지 말도록 권고했습니다. 그 우상들은 아무 쓸모없는 불량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 이상한 상인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그 우상 사는 것을 단념하지 못하자,  결국  자신의 물건들을  직접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우상들은  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단지 아버지가 만든 조각상일 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만든 진정한 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것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랍비들의 이야기 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은 메소포타미아 입니다. 그런데 그 땅으로 유브라테스와 티그리스 두개의 강이 흘러 <두 강 사이의 땅>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 동산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참으로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셨던 에덴 동산과는 다르게 이 땅은 사람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부와 권력을 쫓아가기 위해 우상을 섬겼고, 이웃을 시기하며 탐욕스럽게,  적대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데라라고 불리는 한 평범한 양치기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세 아들이 있었고 ,  세 아들 중의 장남이 아브라함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이 그와 말씀하시는 분이 유일하고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우상도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수확의 신도,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한계적인 신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자신들의 부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방 귀퉁이에 놓여지는 조각상도 아니며,  우리는 그분을 묘사할  수도, 어떤 곳에 세워놓거나 고정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시간을 주관하시며,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끝에 가서 나타나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인생의 조용한 공허 속으로 그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음성은 아브라함을 불러 독립하게 했고 새로운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때문에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곳에 머물기를 원치않으셨습니다. 그를 우상숭배의 세상으로부터 떠나도록 부르셨으며, 다른 곳에 정착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우상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끝없는 순환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꺠닫는다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던 고향 땅을 떠나야만 했으며
아버지 집과 친척과  부족의 모든 정신적인 유대 관계들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왔던 모든 것과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냐하면 이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의미와 방향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가지만 어디로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이 사는 아주 낯선 땅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함께 동행하는 자신의 모든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아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로운 길을 떠났습니다.
인생은 사람이 축복의 희망 속에 용기있게 떠나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 속에서 떠나는 길 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용기를 얻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세우신 계획이 있음을 꺠달았고,  그래서 그는 순종하며 새로운 인생 길을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했으면 그런 용기를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을 때, 그는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 길을 준비했으며, 그러는 중에 이미 그는 자신의 고향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곳은 자기 집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수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인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그 종들과 또  양과 말등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고향이었던 땅과, 가족들과 그리고 우상숭배로부터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풍성한 은혜와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풍성한 수확과 자손, 적들에 대한 승리를 축복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물질적인 선물이지만 중요한 선물은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도 그를 떠나지 않으실거라는 약속, 그를 인도하실 것이며, 그를 보호하실 것이며, 그에게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라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해서 그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그를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그 사람들도 축복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뭔가를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떄,  진정한 인생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시며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 즉 , 그 분의 선택과 부르심을 통해서 시작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원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이러한 부르심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의 길로 떠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하며,  그 믿음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의 인생 순례를 정기적으로 숙고해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그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 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생기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상의 속박 속으로 빠진다거나 또는 오직 주권적인 하나님께만 속할 따름인 공간의 속박으로  빠지게 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주의깊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은 또한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훌륭하고 잘 되어간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잠재우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리는 아브라함 처럼 진리의 삶의 여정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목적지를 볼 수 없고, 
오히려  낯선 곳으로,  또는 불확실성 속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아무것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우리가 아는 안정된 이 곳에 머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그 말씀을 따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희망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위한 귀를 열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당장에 그 목적지와 또는 그 결과를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