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이야기 발간

출애굽 강해 설교를 설교집으로 발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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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 크기
100쪽
표지 칼라
편집 사진 표지디자인 – 우리교회 얀 보우첵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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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체코 공화국의 기독교인들

2003년 06월 24일 프라하
Josef Smolik (요셉 스몰릭 교수)

체코 공화국의 기독교인들

우리가 한국 그리고 체코 기독교인으로서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만날 때 이 만남의 순간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쁨과 감사를 올리게 하는 많은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에 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여러분들의 나라에 복음을 선포할 선교사들을 보내시고 정치 문화 언어가 다른 우리들을 이끌어주신 성령의 능력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기적을 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할렐루야 찬송하게 하는 복음은 우리의 공통의 토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들의 특별한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그리고 여기서 우리 교회들이 다른 시대에 다른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9세기 (863년)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우리나라에서 읽혀졌고 성만찬이 배설되었고 하나님 영광을 찬송하였습니다. 이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에 교회는 이미 국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었습니다. 교회와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15세기에 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초래하였습니다. 교회는 유럽에서 대단한 권력과 부를 가진 기관이 되었습니다.교회가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동참을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력투쟁은 결국 교황이 세 명이 존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당시 유럽의 황제는 찰스 4세로 프라하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완전히 붕괴되고 복음이 상실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설교자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혼란하게 하고 그리고 성경과 일치하지않는 거짓 가르침을 하나님 말씀인 것 처럼 하게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노출된 교회의 위험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위험은 극도로 심각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개혁자 얀 후스를 불러 말씀대로 교회를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후스는 교회의 남용과 그리고 이 남용에 동참하는 사제와 비숍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후스에게 교회는 권력 기관이 아니라 신자들의 교제입니다. 후스의 설교는 성직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로마(교황청)은 후스를 고발하였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의 가르침을 취소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후스는 공의회의 신부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이단인 것을 성경을 통해 논증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신부들은 논쟁 없이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취소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후스는 거절하였고 1415년 7월 6일 화형장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매년 국가 공휴일인 그날에 그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후스는 화형을 당하였지만 진리 즉 후스가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불타 죽지않았습니다. 이 진리는 체코 민족의 가슴에 혁명을 일으키는 불이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십자군을 파병해 전쟁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체코인들이 후스의 이단 유죄판결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스의 추종자들은 후스를 옹호하는데 결연히 맞서 싸웠고 체코영토에서 십자군을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체코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후스파 혁명 프로그램은 프라하 네 개 조항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조항은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선포할 교회의 자유, 이전 신부들의 가르침의 형태 안에서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할 교회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체코어 성경번역은 온전하게 복음을 선포할 자유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두번째 조항은 떡과 포도주, 둘을 취하는 성만찬 배설을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sub utraque이며 그래서 후스파들을 우트라퀴스트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후스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강조하였고 오직 사제들과 성직자들만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락한 교회의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평신도들을 위한 잔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의 표시이자 하나님 나라에서의 종말론적인 기쁨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다음 두개조항은 경제 개혁과 세상 안에서 교회의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세번째 조항은 교회가 가난해야만 되는지 아니면 정치적 권력이 없는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상태인지에 대해 질문하였습니다. 네번째 조항은 사제들과 비숍들의 면책특권의 지위를 거부하였고 그들의 범죄도 시민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후스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외교협상을 통해 후스파들을 보수파와 급진파 둘로 분할하였습니다. 이것은 후스파 운동의 약화를 초래하였습니다. 급진파의 신학에서 형제단의 작은 교회가 시작되었고 후에 망명할 때 그들을 모라비안들로 불려졌습니다. 나의 체코형제교회는 개혁 장로교회 전통과 매우 가까운 이전 형제단의 유산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미 15세기에 형제단은 사도권 계승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사도의 지위와 함께 시작하는 계승권을 신성시한 비숍이 있는 곳입니다. 형제단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은 비숍의 역사적 계승과 관련이 없고 사도의 복음과 그리고 사도의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직 계승의 거부는 박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형제단은 이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형제단의 가르침의 다음 특징은 정치권력과 경제착취에 대해 비판적 접근이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 구조의 통합된 부분이 되어서 안되며 교회는 권력을 가진자와 부유한자의 편에 서서 안되며 식민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도 안됩니다. 형제단의 마지막 비숍인 얀 아모스 꼬메니우스(꼬멘스끼)는 경제 식민지주의의 해로운 결과 앞에 놓여있는 유럽국가를 경고하였습니다. 체코 영토로부터 추방된 후 형제단의 명맥을 이어간 교회 즉 모라비안들은 선교에 대해 특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노예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노예들이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15-17세기 상황은 카톨릭교도와 개혁교도들 사이에 전쟁상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전쟁은 체코 공화국 지경에서 개혁교도들이 완전히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단지 불법적으로 비밀스럽게 개혁교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체코왕국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합스부르크 카톨릭 왕조의 통치를 받고있었습니다. 비엔나 카톨릭 황제는 국가의 절대다수를 의미하는 체코 개혁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황제의 조약협정을 어긴 예수회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의 반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유럽에서 발발하고 30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체코 프로테스탄트들은 1618년 백산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27명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프라하 구시가지광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개혁교도들은 국가의 진보정당들과 함께 매년 이 처형을 기억하고있습니다.

카톨릭과 개혁교회 서클과 일반 세속사회의 그룹들은 우리 역사의 이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과제가 과거의 상호 부정의를 화해하고 많은 편견과 이데올로기 어프로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패배이후 개혁교도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합법적으로 허락된 종교는 카톨릭 종교였습니다. (영국에서는 아주 반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개혁교도가운데 귀족은 나라를 떠날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노동력으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강제로 카톨릭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두개의 개혁교회들 즉 형제단 또는 후스파 신앙고백공동체를 제외한 개혁교회(칼빈개혁교)와 루터교회가 재카톨릭화후에도 생존한 남은자들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1781년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칼빈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합스부르크 카톨릭 제국이 무너진 1918년에 체코형제교회로 연합되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의 상황과 우리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17세기의 약간 다른 정신적, 철학적 경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17세기부터 우리들은 설립된 교회의 교인수가 감소하고 사회적으로 불이익 집단 즉 노동자들 사이에 신뢰성을 점점 잃어가면서 유럽 기독교 지식인들의 진보적 경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은 기독교 문명과 문화의 나라로 자의식을 가진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나라에서 공적지위를 상실하고있었습니다. 세속화의 근본뿌리는 17세기 신앙고백(교리) 전쟁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귀족과 왕들 심지어 교회권력계층들은 자신들의 종교, 복음을 위해서 싸우지않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기독교 신앙은 단지 핑계였습니다. (우리는 북아일랜드에서 비슷한 상황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식인들과 일반 백성들은 사랑과 화해의 복음에 대해 신뢰를 하지않았습니다. 새로운 운동이 유럽에서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것은 계몽운동 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 이성은 진리와 철학과 실존주의적인 확신의 기초였습니다. 기독교는 비판을 받았고 기독교 교리는 거부되었습니다. 새로운 인본주의와 관념주의의 철학이 기독교 전통을 대신하였습니다. 문화와 연극이 교회의 예배 역할을 하였습니다. 계몽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통신분야를 목격하듯이 엄청난 과학 기술 발전을 출발시켰습니다. 많은 반종교적, 반기독교적 반교권적 요소들의 결과로서 계몽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들도 이런 상황들에 대해 반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 신앙부흥운동, 새로운 성경연구들이 이러한 상황들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복음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중심이 세속문화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신학 안에서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방어적인 근본주의와 보수주의가 세속화된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것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양차세계대전의 20세기 재앙이 있었습니다. 유럽교회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고 유럽 민족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다리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과 교훈이 무엇입니까?

1. 교회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와 동일화할 때 교회는 정체성과 신뢰성을 상실합니다. – 정체성과 신뢰성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교회는 권력 구조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유지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신자의 시민권은 이땅에 있지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교회는 종말론적 실재입니다. 복음은 모든 권력과 공국(국가)를 초월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서 살도록 그리고 세상의 조작과 도구의 희생이 되지않을 자유를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2. 유럽 교회들은 선교적 열정과 역동성을 상실하였습니다. 유럽대륙의 전통은 교회와 국가와 민족의 멤버쉽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속하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시민들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경건주의자들과 신앙 부흥주의자들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황은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거대한 선교의 장이 되었지만 선교활동과 사고의 전환이 총체적으로 결핍되어있습니다. 사고의 전환은 긴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3. 체코 공화국은 유럽에서 가장 세속화된 나라입니다. 이것은 인구의 대부분이 외부의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카톨릭을 받아들여만 했던 반 개혁운동의 시대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카톨릭이 체코 백성들에게 이식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의 종교적인 깊이에 까지 영향을 끼치지못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베란 추기경은 이사실을 지적하여 공의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자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복음이 다른 민족에게 이식될 수 없고 외국 문화로 포장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반면에 이 자유는 민족의 문화적 콘텍스트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유럽연합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회들은 자신의 삶에서 통합과 세계화의 과정에서 상실할 지 모르는 민족과 문화의 전통의 긍정적인 가치를 지킬 과제를 갖습니다.

4.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성도의 교제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그리고 설교를 통해 수행하는 예언자적 역할이 있습니다. 복음은 민족주의, 문화, 정치 그리고 경제 권력을 상대화시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과 그 공동체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개 교회 공동체의 예언적인 존재로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교회로서 우리는 지금 유럽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고, 교회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그리고 선교 활동이 정체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앞에서 회개할 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 장로회 신학대학 역사신학의 종교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에게한 강의내용

믿음으로 산다는 것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20일)
  • 창 12:1-4a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년 7월 20일 (삼위일체 다섯번째 주일)
본문: 창세기 12장 1-4절 상반절
제목: 믿음으로 산다는 것
통역: 남유정 교우

<본문>

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창세기
12:1~4a)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랍비들의 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옛날에 우상을 만들어서 시장에 공급하던 유대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시장에 있는 그의 상점에서 아버지가 만든 그 우상들을 팔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구제와 희망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그의 가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우상이 잘 팔리는 가운데  그 상인이 부자가되는 것은 정말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장사할 줄 모르는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자신이 파는 물건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그는 손님들이 그 우상을 많이 사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지 말도록 권고했습니다. 그 우상들은 아무 쓸모없는 불량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 이상한 상인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그 우상 사는 것을 단념하지 못하자,  결국  자신의 물건들을  직접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우상들은  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단지 아버지가 만든 조각상일 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만든 진정한 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것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랍비들의 이야기 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은 메소포타미아 입니다. 그런데 그 땅으로 유브라테스와 티그리스 두개의 강이 흘러 <두 강 사이의 땅>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 동산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참으로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셨던 에덴 동산과는 다르게 이 땅은 사람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부와 권력을 쫓아가기 위해 우상을 섬겼고, 이웃을 시기하며 탐욕스럽게,  적대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데라라고 불리는 한 평범한 양치기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세 아들이 있었고 ,  세 아들 중의 장남이 아브라함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이 그와 말씀하시는 분이 유일하고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우상도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수확의 신도,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한계적인 신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자신들의 부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방 귀퉁이에 놓여지는 조각상도 아니며,  우리는 그분을 묘사할  수도, 어떤 곳에 세워놓거나 고정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시간을 주관하시며,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끝에 가서 나타나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인생의 조용한 공허 속으로 그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음성은 아브라함을 불러 독립하게 했고 새로운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때문에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곳에 머물기를 원치않으셨습니다. 그를 우상숭배의 세상으로부터 떠나도록 부르셨으며, 다른 곳에 정착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우상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끝없는 순환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꺠닫는다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던 고향 땅을 떠나야만 했으며
아버지 집과 친척과  부족의 모든 정신적인 유대 관계들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왔던 모든 것과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냐하면 이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의미와 방향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가지만 어디로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이 사는 아주 낯선 땅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함께 동행하는 자신의 모든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아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로운 길을 떠났습니다.
인생은 사람이 축복의 희망 속에 용기있게 떠나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 속에서 떠나는 길 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용기를 얻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세우신 계획이 있음을 꺠달았고,  그래서 그는 순종하며 새로운 인생 길을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했으면 그런 용기를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을 때, 그는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 길을 준비했으며, 그러는 중에 이미 그는 자신의 고향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곳은 자기 집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수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인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그 종들과 또  양과 말등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고향이었던 땅과, 가족들과 그리고 우상숭배로부터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풍성한 은혜와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풍성한 수확과 자손, 적들에 대한 승리를 축복하셨습니다.
그것들은 물질적인 선물이지만 중요한 선물은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도 그를 떠나지 않으실거라는 약속, 그를 인도하실 것이며, 그를 보호하실 것이며, 그에게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라는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해서 그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그를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그 사람들도 축복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뭔가를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떄,  진정한 인생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시며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 즉 , 그 분의 선택과 부르심을 통해서 시작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원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이러한 부르심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의 길로 떠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하며,  그 믿음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의 인생 순례를 정기적으로 숙고해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그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 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생기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상의 속박 속으로 빠진다거나 또는 오직 주권적인 하나님께만 속할 따름인 공간의 속박으로  빠지게 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주의깊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은 또한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훌륭하고 잘 되어간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잠재우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리는 아브라함 처럼 진리의 삶의 여정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목적지를 볼 수 없고, 
오히려  낯선 곳으로,  또는 불확실성 속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아무것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우리가 아는 안정된 이 곳에 머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그 말씀을 따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희망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위한 귀를 열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당장에 그 목적지와 또는 그 결과를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아멘.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13일)
  • 시 90:1-17
  • 설교자: 오지훈

2003. 7. 13. (삼위일체 넷째주일)

본문: 시편 90편 1-17절

제목 :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설교자: 오지훈 전도사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체코 형제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게 된 것을 참으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견습 선교사로
파송되어 약 1년이라는 기간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픈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90편입니다. 이 시편의 제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가 드리는 ‘기도시’ 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드린 이 기도문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가 드린 기도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영원하신 하나님’, 5절부터
11절에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생’, 12절에서 17절, 끝까지는 ‘은총을 간구하는 소망’ 크게 이렇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이것이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 기도 시를 썼을 당시에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을 겁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는 편안한 집이 없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텐트 생활을 한 거지요. 1절에 나오는
‘거처’라는 단어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장소, 안정감을 느끼는 곳을 의미합니다. 나라와 집, 거주하는 땅 없이,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오직 하나님 만이 거할 곳이라고 모세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언제나 착각을 하고 삽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착각을 하고 사는데, 체코인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를 잠시
하면, 1년여의 생활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를 떠나면서 짐을 싸게되었습니다. 근데, 짐을 싸면서 너무나도 머리가 복잡하고 아팠습니다.
왜 이리 쓸데없는 짐이 그리도 많은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가야 하나? 오스트리아에서 겨우 1년밖에 생활을 안했는데도
생각보다 짐이 꽤 있었습니다. 저 역시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생활이 이제 다 끝났는데,
이곳이 마치 나의 영원한 거처인 양 생활을 했구나! 이것이 저의 작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
가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곳이 영원한 거처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모세의 고백처럼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바로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들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
맘을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제 맘이 속상해서 심히 괴로워하는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위로를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바로 3절이었습니다. 3절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너의 인생들은 돌아가라’ 라고 되어 있지요? 그 때 이 말씀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를 지금 괴롭히는 그 사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그 사람,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구나! 왜냐하면, 언젠가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죽을 거지만, 그 사람 역시
죽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맘에 큰 위로가 되더군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 누가 여러분을 속상하게 한 일이 있거든, 시편
90편 3절을 깊이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 사람, 나를 괴롭히고 나의 맘을 상하게 한 그 사람! 언젠가는 티끌로 돌아
갈 거야. 이렇게 한번 맘을 먹어보십시오. 그렇게 맘을 바꾸면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해 질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전보다는 덜할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 곧 영원한 하나님 아래서, 우리는 다 같은 피조물이라는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유한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 불교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시간의 끝이
불교에서는 없습니다. 니르바나, 즉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는 불교적 시간관은 계속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시간입니다. 바로, 원적인
시간관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이와는 현저히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라고 시작됩니다. 처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이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처음과 끝이 명확합니다. 직선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시간을 뛰어넘으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간 또한 친히 창조하고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곳 유럽 지역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처음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영원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전도서 12장 1절부터 2절을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을 기억할 뿐 아니라, 유한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5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을 다시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오늘 설교 제목이 뭡니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다 함께 따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여러분! 방금 전에 제가 우리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착각인가 하니,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인양 착각하고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늘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90편에 전체적인 주제인 ‘시간’과 관계된 착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군생활을 할 때 장교로 생활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남북한으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군대 시절을 휴전선을 지키는 소대장 생활을 하고 중위로 전역항였습니다. 군 시절에
삽질을 비롯하여, 밤에 잠 안자고 함께 근무 서는 병사와 장기두기, 말 지지리도 안 듣는 부하들 열심히 혼내주기 등등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 중에 배운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은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중에 군에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군에서 휴가를 나갈 때, 그냥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옷도 다리고,
구두도 닦고 모자도 빠빳하게 데리고… 무엇보다도 휴가증이 있어야 휴가를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에서는 병사들 휴가
내보내기 전에 휴가 계획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몇 박 며칠 휴가기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계획서를 제출해야만
제가 내용을 확인하고 휴가증을 주었습니다. 근데 이것을 뭐라고 불렀냐면 꺢캤린宛퉬이라고 불렀습니다. 단어 뜻을 풀어본다면 겣  후
자, 걸음 보 자, 붙여보면 꺏斌?퐚 좀 유식하게 영어를 써서 표현하면  꺕  스텝 플랜  정도 될 겁니다. 꺏米  걷는다 
라는 뜻이죠. 계획서는 이렇게 작성됩니다. 몇 박 며칠 휴가라고 할 경우, 돌아오는 날부터 계획서는 작성됩니다. 즉 복귀일로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작성을 하는 겁니다. 이를 뭐라고 부른다고요? ‘후보 계획’이라고 합니다. 후보계획은 복귀일부터 시작하여 휴가
출발일로 끝나게 됩니다. 이 계획서에서의 시간은 거꾸로 흐릅니다. 어떤 병사는 후보 계획을 알차게 세웁니다. 세세한 시간까지 적어
넣으면서 알차게 세웁니다. 왜냐하면 휴가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제대를 얼마 앞둔 말년들은 어떻습니까? 형식적으로 대충 대강 적어서 제출합니다. 휴가를 다녀 온 병사들에게 휴가 기간 잘
보냈느냐 라고 물어보면 후보계획을 잘 세운 병사와 후보계획을 대강 세운 병사의 대답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적인
것처럼 보여도 귀한 휴가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한 병사의 시간과 대충대충 후보계획서를 작성한 병사의 시간은 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인생을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영화속에 수퍼맨만 앞발을 이렇게 내밀고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신속히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삶을 보람 있게 보내려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후보계획’을 잘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인생의 계획을 ‘지금’이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중에는 앞으로 살 날이 지금껏 살아 온 날보다 그리 많지 않은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태어난 것은 순서가 있어도 죽는
것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 죽을 것인가? 과연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위인 중에 일제 시대 살았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일제 암흑기 시절에 어린
학생들을 계몽하는데 애를 쓰신 교육자였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사상가인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었고, 도산 학교 2대 교장을
지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거의 도가에 나오는 도사처럼 사신 분입니다. 그분의 기이한 행적 중 이 시간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정하고 사셨습니다. 하루에 잠도 겨우 4시간밖에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식사를 단 한 끼만 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절제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 가야 할
거리도 걸어 다니셨다고 합니다. 밤 8시부터 12시까지가 그분의 취침 시간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깨어서 활동을 했습니다. 밤
12시에 일어나면 그 한밤 중에 성경 말씀과 여러 서적을 읽고 주로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동이 틀 때까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한 도인이었는데, 절제와 규칙적인 생활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자신이 죽기로 작정한 그날에 결국 죽지 못하고 몇
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자기가 정한 기한 내에 죽지 못했습니까? 죽기를 작정하고 하루하루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오래 사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은 하루하루가 종말론적인 삶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똑바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 매일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일 당장 죽는다면? 아니, 이 예배가 끝나자마자 죽는다면? 여러분!
다시 12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모세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 신앙의 숭고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체코 나라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은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아,
내가 바이올린을 참으로 못하는구나’ 깨닫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해야지’ 이런 각오와 결심을 갖고 바이올린을 합니다.
근데, ‘아, 난 바이올린을 참 잘해’ 이런 교만한 사람은 오히려 그 이상의 발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부족함은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 즉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정된 시간을 주셔서 근신하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회 신부였던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이런 내용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큰 선물이다” 죽음이 선물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유한함을 깨닫고 겸손히 그분께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유한함, 즉 허무함을 깨달을 때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13절에서 17절을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이 단락은 앞에서 살핀 두 단락의 내용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단락 6절을 살펴보면,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뜨거운 태양 아래 금방 시들어가는 풀의 꽃에 비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분위기가 강렬한 소망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급작스러운 반전은 하나님의 시간을 깨닫는 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흔히 신학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크로노스 적인 시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 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의 양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시간의 질적인 개념입니다. 크로노스는 그냥 일상적인
시간입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학교 수업 시간을 상상해 봅시다. 그것도 밥을 방금 먹은 오후의 첫 수업시간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은
졸음도 오고, 매우 졸린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이 크로노스적인 시간입니다. 학생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흘러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업 마칠 즈음이 되어 교수님이 시한폭탄을 투척하는 발언을 합니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자, 다음 주 이 시간에 시험을 보도록 하겠다. 그 시험에서 점수가 시원찮은 학생은 모두 낙제시키마!”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졸음을 깹니다. 그것도 그냥 깨는 것이 아니라 확 깹니다. 그 때부터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의미 없던 시간이 의미가
생깁니다. 무의미하던 시간이, 양적인 시간이 질적인 시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교수님의 선포 이후, 학생들에게는 시험 보는 그
날까지 일분일초가 소중한 시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함께 고린도 후서 6장 1절에서 2절을 한 목소리로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시간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전반부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은총을 소망하며 간구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고 그에 반하여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만든 지혜가 그에게 이러한 소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주님의 은총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모세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라는 표현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바로 ‘우리’ 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이후의 시간, 즉 카이로스 적인 시간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시간은
‘나’를 넘어서는 시간입니다. 나를 넘어서 그것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미국 영화중에 ‘나홀로 집에(Home
Alone)’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어린 꼬마애가 크리스마스 휴가기간 동안 집에 혼자 남겨져 집을 지킨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나홀로 천국에(Heaven Alone)’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 있는 사람들은 ‘나홀로 천국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천국에(Heaven All Together)’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누가 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난 ‘그 시간’ 이후, 그 ‘하나님의 시간’에 삭개오는 이런 놀라운 선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과거에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다가 비로소 남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 즉,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뭉크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포 영화 ‘스크림’을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절규’라는 작품은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런 그림입니다. (표현을 해준다.) 아무튼, 그런 그림을 그린 화가인데, 이 화가의 그림을 쭉 감상하는 중에 말년에 그린 작품 중
하나가 제게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작품은 마침, 전시실 출구 나가는 곳 끝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인생
여정을 헤아린 미술관의 사려깊은 공간배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작품 제목은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입니다. 그림을
보면 왼편에는 뭉크자신보다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습니다. 그 괘종시계에 시침과 분침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가운데에 늙은 노년의
뭉크가 두 팔을 내리고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고 그냥 서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 방 뒤편에는 하얀
문이 열려 있고 그 사이에는 무수한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다. 뒤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자신이 화가였으니까요. 문이 하얀 것은 아마 천국을 향하는 자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늙은 뭉크가 손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축 내려놓고 있습니다. 옆에는 시계가 있는데 시간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침대가 있습니다. 침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도 죽음을 ‘잔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괘종시계에 시간이 명확히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침대, 바로 죽음은 직시하지만 언제 죽을지
시간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뭉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기에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어두운 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소외감, 죽음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이 특별히 제게 와 닿았던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중에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에게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그분의 지혜입니다.

끝으로

어느 무명 시인의 시 한편을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하겠습니다. 바로 저의 시입니다.

제목 : 장례식 연습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난 자리에 눕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아직 남아 있는

곧 다가올 나도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살그머니 내려놓고서

난 자리에 눕는다

오늘 이것만큼은

반드시

해내리라 다짐했건만

끝내는 못 끝낸 일들

아쉬워하며 후회하며

반듯이 

자리에 눕는다

다리를 뻗고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하루 동안

지은 죄

그분께 아뢰며

그 나라에 가고픈

마음 속

깊은 열망 되뇌며

엄숙하고, 고요하게

오늘도

자리에 눕는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풀과 같이 연약한 우리를 기억하시고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 감사드릴 것은 우리에게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를 겸손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주님을 붙들고
매일 매일 살게 도와주소서. 모세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우리 날 세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참
지혜란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 속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였던 모세처럼 그렇게 기도하며 살게 도와주세요.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오지훈 전도사는 장로회 신학대학(광나루) 신대원에 재학중 오스트리아 단기선교사 1년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2)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06일)
  • 출 20:12-17
  • 설교자: 이종실

030706 (삼위일체 셋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0:12-17
제목: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2)

<본문>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찌니라
14 간음하지 말찌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설교>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십계명 후반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에 거듭 강조를 하였던 것은 십계명은 맹목적으로 지키고 따라야 하는 율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응답하는 방법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31절에 나오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서기관이 질문하였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십계명의 첫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입니다.
이 부분을 지난 주에 저희들이 함께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웃사랑의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부터 마지막 열번째 계명이 이에 대해 언급하고있습니다.

오늘 언급할 여섯개의 계명은 그 하나 하나가 별도의 설교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웃사랑의 방법으로서 전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그 중심되는 흐름과 원리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 다섯번째 계명이 나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12절)

이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십계명의 전반부에 포함시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관계성의 특별한 의미 때문입니다.
부모는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실 때 언제나 그 비유로 부모를 비유하였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에도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이세상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번째 계명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앞의 네 계명과는 구별이 되고 오히려 뒤따라 나오는 계명으로 부모라는 인간관계가 다른 인간사이의 관계로 그 범위가 넓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맺는 첫번째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시고 그 가정을 통해서 결정해주신 관계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과 우리들의 관계역시 무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인간관계를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결정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계명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에서 공경이란 단어는 “무겁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구를 무겁게 여기는 것, 중요하게 대하는 것이 공경한다는 히브리 낱말의 본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공경한다는 말은 누구를 가볍게 보거나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나이 많아 힘이 없어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부모가 아직 젊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재물 때문입니다.
부모가 재물이 있으면 자녀들이 서로 모시고 살려고 합니다.
부모님들의 고민은 늙어서 어떻게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않게 살면서 자녀들로부터 못 볼꼴 보지않고 살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 입니다만, 이번 IOC 총회 때문에 많은 행사들이 있어 체코의 젊은 한국 청년들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신문 방송 기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양도 없고 시간도 안지키는 사람들이 국장 직위를 가진 분 앞에서 시간도 칼같이 지키고 태도도 보통 때와 다른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힘이 있는 사람을 누구나 무겁게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다섯번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나이 들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어버이를 잘 모셔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족 이기주의에서 부모를 이해는 것도 오늘의 계명을 제한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염치도 없고 수치심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자신의 가문의 확장과 영광이 이어지게 하는 것을 임무로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는 사회를 이어가는 뿌리입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생의 과정에서 바뀌면서 사회는 이어져 갑니다.
우리 인간은 부모 없이 인간 사회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대대로 부모를 통해 전해지는 인간사회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영향으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 홀로 우리 가정 홀로 제 힘만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시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본문은 특별히 밝히고 있지않습니다.
예를들어 부모가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하지않았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번째 계명은 우리가 부모라 부르는 나이 들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계명에 뒤를 이어 간단한 말로 표현된 네개의 계명이 따라 나옵니다.

살인하지 말찌니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도적질 하지 말찌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찌니라 (13-16절)

이것은 우리의 이웃의 생명과 가정과 소유를 가볍게 보거나 아무렇게나 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이웃에게 준 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13절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을 때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형제도를 명령하신것과 전쟁을 명령하신 것을 함께 어떻게 이해해야될지 우리들은 당혹스러울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율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틴과 보복에 보복을 이으며 끝나지 않는 전쟁을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과 사형제도는 이 계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구약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의문들을 뒤로 하고 13절의 살인금지 계명의 그 근본정신을 저와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할 것 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생명을 살리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자연환경파괴와 인권침해와 전쟁과 굶주림의 사회문제를 우리 신자들은 그래서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4절에 간음에 대한 계명입니다.
앞에나오는 살인하지말라는 계명과 관련해서 이 계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웃이 맺고있는 혼인관계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인간의 성적욕구를 충족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닙니다.
한 가정은 사회의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결혼과 한 가정을 파괴하는 것뿐 아니라 전체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스팸 메일의 대부분이 포르노 사이트 광고물입니다.
날이 갈수록 대범하고 자극적입니다.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신념으로 끈질기게 보냅니다.
성도덕의 문란의 위험이 바로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패망의 요인으로 꼭 들어가는 것이 성도덕의 문란입니다.
하나님은 결혼과 성 관계가 분리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결혼과 성 관계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신비입니다.
이 축복과 신비를 존중하고 지켜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14절에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구약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계명은 사람을 종으로 부리든지 팔아먹던 일을 금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인신매매와 유괴를 금하는 계명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단지 노동력을 목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는 하지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인간관계가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시여길 때 우리는 이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체코의 한인사회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체코에 체류하는 목적이 인간관계보다 더 우선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나치게 목적지향적으로 살고있습니다.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만 우리의 이웃을 수단으로 삼는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에 이어지는 것은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16절) 계명입니다.
이것은 법정에서의 증언과 관련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법정의 증언은 때때로 이웃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증언은 진실해야합니다.
거짓증언의 결과는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죄인이되어 평생 머리를 들지못하고 살게됩니다.
이 계명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법정에서의 다툼에만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말 한마디, 무책임하게 던진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영원히 교회를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체코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만남은 피할 수 없습니다.
교인이 말 한마디로 타인에 가슴에 못을 박고 그 명예와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교회로 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실수와 잘못을 한 사람일수록 그들에게 더욱 교회의 문은 더 넓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저와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교회 문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우리 꼬빌리시 한인교우 여러분들은 절대로 남의 실수와 잘못을 비판하지 마십시다.
절대로 남의 실수와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마십시다.
더구나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을 모함하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입밖에 꺼내는 것은 물론 행여 마음에도 품지 마십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본의 아니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으면 지체 없이 용서를 구하면서 반성을 하며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실수와 잘못으로 비난 받는 이웃과 한인사회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가르쳐 주신기도로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이 나 같은 못난 죄인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17절)

열번째 계명이 다른 계명들과 구별되는 것은 다른 것은 행위를 금한 것이라면 이 계명은 마음과 생각을 금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으로 잠시 맡겨둔 것임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의 위대함을 이해하지도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마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탐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지배하게 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