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인간소통의 언어

<사랑은 인간소통의 언어>

이세상에 그토록 다양한 언어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한번쯤 스스로 질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성경의 창세기 저자도 아마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고 그 대답을 하고있다. 그것이 바벨탑 이야기이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서로 다른 말이 생겨난 까닭을 설명하고있다. 처음에 언어가 하나뿐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힘을 합해 도시 문명을 건설하였다. 하늘 위에서 신이 의사소통을 하며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을 인간의 능력에 놀라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계획을 저지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이 다른 언어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저자는 인간의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을 신의 개입으로 묘사하고있기 때문이다. 단지 언어가 의사소통의 문제라면 굳이 신의 간섭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의 개입은 인간사회의 소통의 장애를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이 깔려있음을 의미한다.

인류역사상 인간사회에서의 소통 장애는 늘 존재하였다. 그리고 인류는 인간사회의 소통의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적으로 민주사회를 발전 시키고 기술적으로 통신을 발달시켰다. 현대사회는 신분과 계급보다 소통에 의해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소통 장애는 소외를 낳고 소외는 불법과 폭력으로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을 위해 그 제도와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열린 마음과 관심이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랑이다. 마음이 통하는 체코친구와 이야기하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필자의 어눌한 체코어도 잘 이해하여 더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틀림없이 전혀 다른 한국음식도 맛있게 먹는다. 반대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체코인과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쉬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들을 경험한다. 그래서 주눅이 들어 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물론 그는 타문화와 습관도 이해를 못하고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놀라운 것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같은 언어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심지어 왜곡되어 전달되고 전혀 달리 이해하여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회적으로 기술적으로 소통의 제도와 기능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나눔터 플러스를 통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체코와 한국 두 사회의 만남이 서로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관심이 우리들 마음에 사랑을 풍성하게 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 종 실

* 나눔터 플러스 2호 기고글

나눔터 플러스 창간에 붙여…

나눔터 플러스 창간에 붙여…

한국인들에게 체코는 그들의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거쳐가는 곳이다. 각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기간 거주한다. 대체로 체코의 한국인들은 20대 후반 부터 40대 초반의 활발한 인생의 시기를 체코에서 보낸다. 이 중요한 인생의 시기에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이상을 거주하면서 체코 사회를 가슴으로 느껴보지 못하고 귀국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러니 자신이 숨쉬고 살던 사회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중부유럽의 조그마한 나라 그까짓것 잘못 이해하면 어떠하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체코의 삶을 내가 원했던지 아니면 원치않았던지 그리고 그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 나는 이미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숨쉬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존재가 형성되어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곧 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이 된다. 우리가 자신의 사회를 바르게 이해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의 존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비정치적 비상업적 순수 생활 정보지 나눔터가 탄생하였다. 체코의 새로운 법령과 생활정보를 알리고 체코생활의 경험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체코의 유일한 한국어 소식지이다.

소식지의 이름처럼 나눔터는 바르게 체코사회를 이해하고 유익한 해외생활을 이룩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삶의 나눔의 장소이다. 이제 이 나눔의 장소를 우리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체코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장소로 발전하길 원하여 나눔터 플러스를 발간하게 되었다.

무지와 적의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이성과 과학의 진보 속에서 인간의 야만성을 경험한 것이 지난 세기의 우리들의 경험이다. 그 잔인한 야만성을 극복하기위해 인간은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하고있다. 그 노력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체코와 한국은 서로 부분적으로 알고있다. 필자가 만난 많은 체코인들은 한국에 대해 분단과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공산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를 기억하고있다. 서로를 모르면 서로를 업신여기게 된다. 외모로 사람과 나라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체코와 한국 두 사회가 폭 넓고 깊은 상호교류로 사회적 존재양식이 더 발전하여 인류의 평화발전에 기여하기를 소망하면서 이 일에 나눔터 플러스가 조그마한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종 실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나눔터 플러스는 이종실 목사가 발간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정보월간지 나눔터를 년간 두차례 즉 성탄절기와 부활절기에 발간되는 나눔터를 나눔터 플러스라 하여 체코어와 한국어로 발간됩니다. 나눔터 플러스 역시 별도로 정부의 정기간행물로 등록하였습니다. 나눔터 플러스를 받아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을 교회홈페이지 또는 나눔터 홈페이지를 통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체코 기독 사상가] 보이떼흐

체코의 주요한 기독 사상가들

보이떼흐 슬라브닉 – 선교사와 유럽인

보이뗴흐 슬라브닉은 956년 뽀뎨브라디 옆의 리비쩨에 위치하고 있던 유명한 슬라브닉 왕가에서 출생하였다. 972년에는 인문학 공부를 위하여 주요한 교회 및 전도 활동의 중심지였던 마그데부르그로 떠나, 그 곳에서 9년간 머문다. 그 곳의 아달베르트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으며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얻는다. 공부를 거의 마칠 무렵 성직 수임의 첫 단계를 받아들여 부제(副祭)가 된다. 프라하로 돌아와서 교회 성직자 단에 입교하여 사제 서품을 받는다. 982년에는 레베 흐라데츠에서 프라하에서 두 번째로 주교로 선출되며 983년에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주교청에서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임장을 독일 황제인 오타 2세로부터 받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클뤼니의 개혁 운동가 대표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사상에 깊은 영감을 받는다. 곧바로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빌링기스에게 새로운 프라하의 주교로서 서품을 받는다.

교회에서 타협 할 수 없는 기독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가는데 그의 역할을 다 하였고, 교회와 사회의 악법을 철폐하는데 앞장섰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노예 매매, 다처제, 근친혼, 이혼, 폭식, 알코올 중독, 장사로 인한 주일 신성모독 등. 그러나 그는 지배자로부터, 혹은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홀로 고독해진다. 이러한 거의 대부분의 온건한 노력들에도 988년 결국 조국을 등지고 로마 교황 요한 15세에게로 길을 떠나고, 그 이후 몬테 카시나의 수도원, 그리고 마침내 로마 옆 아벤티나의 성 보니파스와 알렉시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간다. 그 곳은 종교적 삶의 치유와 교회의 강한 개혁에 힘을 쏟고 있었다. 보이뗴흐는 이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고 992년 베네딕트 수도사의 선서를 한다.

조국에서는 그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였고, 기독교의 원칙을 고수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보이뗴흐 주교는 992년 기쁨과 희망으로 요청을 수락한다. 왕자는 그에게 권력을 선물하고, 보이뗴흐는 브제브노프에 993년에 축성 받게 되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립한다. 순풍시대도 오래가지 않고 나라 안과 교회 내에서도 이교도가 도로 득세한다. 994년 보이뗴흐는 성 이지 수도원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간통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여인을 목도하고는 두 번째로 조국을 등지게 된다. 다시 아벤티나의 수도원으로 행하였다. 996년 새로운 교황 제호즈 5세에게 황제관을 수여받기 위하여 그 곳으로 젊은 독일 황제 오타3세가 온다. 보이뗴흐가 전적으로 지지하였던 후기 기독교 양상의 로마제국의 혁신에 관한 계획을 알린다.

일년 후 보이뗴흐는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국으로 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지배자에 의하여 거부당한다. 이교도 속에서 그는 기독교 정신을 설파하는 선교자로서 헝가리에서는 파논할마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폴란드로 옮겨가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이후 수행원으로서 이교도의 땅 프러시아로 향한다. 그 곳에 도착해서는 겨우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였다. 열정을 다하여 설교하였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성서 말씀에 완강하였다. 997년 4월 23일 보이뗴흐는 난폭한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한다. 이교도들은 홀린 성 내 성벽쪽에 그의 머리를 도끼로 잘라 말뚝머리에 달아놓고 선교자들에 대한 경고로 보여준다. 그의 몸은 조각조각 잘린다.

999년 보이뗴흐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1000년부터는 폴란드의 주요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그는 또한 헝가리인들에게 주요 성인인기도 한데, 그 이유는 994년 나중에 헝가리 황제가 되는 슈뗴판 1세에게 세례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골은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는 프라하 대교구의 주요 성인이다.

보이떼흐는 학식있고, 헌신적인 인물이었으며 그의 품격있는 성품은 모든 회의에서 빛났다. 지칠 줄 모르고 신의 영광과 찬미, 영적 구원을 위하여 싸웠다.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서 도덕적 원칙과 더 높은 가치를 옹호하였다. 대륙의 정신적인 일치를 강구하였으며, 칼로서가 아닌 기독정신으로서 유럽의 일치를 꾀하였다 그의 지성적 싸움의 장이자 고향은 바로 유럽이었다. 그가 스스로 기울였던 노력의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로 이끌었지만 그의 과제를 다 이루었으며 이후 세대에게 또한 역할을 전수하였다. 그의 유산은 화해, 융합, 일치의 유산이다. 그리고 또다른 유산은 유럽의 정신적 중요성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인 것이다.

( 슬라브닉 가문의 보이뗴흐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 비판적 시각과 객관성, 정확성으로 그에 대하여 기술하려 노력한 여러 도서들을 접하기를 추천한다.)

한국 서울 청년 기독교인들의 슬로바키아 여행

한국 서울 청년 기독교인들의 슬로바키아 여행

2003년 2월 6일 \"동안 교회 단기 청년 선교팀은 프라하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 교회에 도착하였다. 2월 9일 그들 중 일곱 명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선교일에 대한 새로운 배움을 얻기 위하여 필자와 함께 일주일 동안의 슬로바키아 여행길에 올랐다.

방문하는 교회마다 교회 신자들의 만남으로 가득하였다. 선교팀은 동안 교회와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다. 한국 전통 한복을 입고 장구 박자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전통 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방문 교회 신자들에게 차와 사탕을 대접하였다. 질의 응답시간에는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스삐슈스까 벨라 교회에서는 심지어 한국과 슬로바키아 기독교 신자들의 현상에 대한 대화가 집중적으로 오고 갔었다.) 한국어로는 정용구 전도사가 진행을 하고 김무송 교우가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으며(케쥬마록, 스삐슈스까 벨라), 류지만 교우는 직접 영어로 이야기를 전달하였다.(슈뜨르바, 브라티슬라바-뻬뜨르잘까)

한국 선교팀은 방문지에서 한국인으로는 첫 공식방문이 되곤 하였다. 슈뜨르바에서는 심지어 역사상 첫 한인 방문단으로, 공식적으로 시청에 초대를 받아 방명록에 기록을 남기고 짧은 문화 프로그램을 -노래와 춤을 추는 지역 어린이 합창단 공연- 보여주기도 하였다. 게다가 지역 방송사에서 녹화도 하였다. 브라티슬라바에서는 반전 평화 콘서트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유명 슬로바키아 연예인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고, 주옥같은 클래식 음악 연주가 울려퍼지기도 하였다. 그 곳에서는 슬로바키아의 복음 교회 (40만명의 신도수를 자랑하는 슬로바키아에서는 제일 큰 신교 교회) 주교와, 동시에 에큐메니컬 연합회장인 율리우스 필로 신학 박사가 나와서 연설을 하였고, 콘서트 후에 필로 박사는 선교팀과 잠시 만남의 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모든 교회는 선교팀을 위하여 문화 유적 답사 등의 프로그램을 준비해 주었다. 케쥬마록에서는 희귀본 도서관과 시의 역사 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유적지를 견학하였다. 스삐슈스까 벨라 교회에서는 우리 선교팀을 위하여 벨리안 얼음동굴 구경도 시켜주었다 슈뜨르바에서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의 일반인들의 생활상이 있는 전통 목조 가옥을 방문하고, 비쏘께 따뜨리 산맥 중심 슈뜨릅스께 쁠레쏘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2000미터정도 되는 쏠리스꼬 봉우리에 올라가서 산과 숲이 절경인 전망을 구경하였다. 브라티슬라바에서는 슬로바키아의 중심으로서 있는 많은 문화 유산들 중 몇 개를 보기도 하였다.

케쥬마록은 1269부터 있던 도시였으며 지금은 비쏘께 따뜨리 산맥 아래에 있는 문화 생활과 관광 중심지이다. 개혁 운동 이후 이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지금은 신도수가 약 1000명 정도 된다. 포루뵌 목사는 특별히 교회 모임방에서 저녁 만찬을 준비하여주었고 (2003년 2월 9일), 약 70명의 교우들이 참석하였다. 이 만남의 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 진행이 되었다.

스삐슈스까 벨라는 케쥬마록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1263년부터 스삐쉬 독일인들이 정착을 하게된다. 1545년 이 도시는 개혁을 받아들여 현재 약 400명의 신자들이 있는 교회로 발전한다. 교회는 특별히 저녁 예배를 준비하여주고 (2003년 2월 10일), 예배 집전은 페츠꼬 부목사가 하였으며 설교는 소반스까 목사가 담당하였다. (설교말씀 발췌한 글은 다음 페이지에 있다.) 예배에 이어 40명의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 만남의 시간은 3시간 30분이상 진행 되었다.

슈뜨르바는 비쏘께 따뜨리 산맥 기슭에 있으며 1280년 이 곳에 대한 첫 기록이 나온다. 우리가 방문한 교회는 개혁 때 지어졌으며 약 1700명의 신도가 있다. 발로츠 목사는 특별 저녁 예배를 준비하고 (2003년 2월 12일 목요일), 한국 선교팀 형제들도 참석한 가운데 성찬의 전례 예식이 거행되었다. 예배에 참석한 150명의 교우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예배 후 그대로 교회에 남아 선교팀과 만남을 시간을 3시간 이상 가졌다.

브라티슬라바에서는 두 교회를 방문하였다. 한 교회는 브라티슬라바 교회로 개혁 때부터 있기 시작하여 현재 약 15000명의 교우가 있는 곳이고, 브라티슬라바 – 뻬뜨르잘까 교회는 아파트 단지 중심에 선교의 일환으로 20세기 말에 지어진 곳이다. 끌라띡 목사의 초청을 받아 주일 예배는 브라티슬라바 – 뻬뜨르잘까 교회(2003년 2월 16일)에서 보았다. 올가 끌라띠꼬바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였던 예배를 마치고, 예배를 보았던 250명의 교우들 중에 약 80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결론을 지어야 할까? 슬로바키아 교회의 교우들에게나, 한국의 청년 선교팀에게도 이번에 이루어진 이번에 이루어진 만남의 자리는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슬로바키아인들은 한국의 기독교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었을 것이며 한국인들은 슬로바키아 기독교 신자들의 삶을 맛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는 어떻게 생겼고, 전례는 어떠하며 교우들은 어떻고, 그들은 어떤 기쁨과 근심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먼 아시아에서 온 청년들은 천 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를 가진 유럽과 슬로바키아에서 교회는 어떻게 지속되는가, 실제로 보고 느끼는 기회를 가졌다. 이는 추억을 남기고 주위 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기독교 정신의 이해 그리고 선교활동에 대하여도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만든 값진 경험들이었다. 이번 여행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맺는다.

2003년 2월 11일 동안교회 단기 선교단 방문 예배 중 스삐슈스까 벨라 교회의 루비짜 소반스까 목사 설교 말씀

말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6장 4절, 9절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이름없는 자 같으나 유명합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1-12절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은 사도 바울이 신자들을 위해 쓴 것입니다. 다만 차이라면 첫 번째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보낸 것이고 두 번째는 로마인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이 곳 교회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우리 각각은 슬로바키아와 한국의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 하느님의 일꾼들의 만남입니다.

\"이름없는 자 같으나 유명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서로 보지 못하였었고,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미 서로 압니다. 그리스도 속에서 서로 압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를 매고 죽음으로써 우리 모두의 죄를 똑같이 사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천년 왕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영원한 지옥의 길로부터 보호받습니다. 슬로바키아 교회와 한국의 교회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식들입니다. 당신도, 우리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주려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함께 보고, 듣고, 말합니다. 그들과의 상호 동질적인 공동체를 가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이 곳에서 함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영적인 축복을 나눕니다\" 신자 공동체는 단지 말을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축복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서로 말입니다. 이는 곧 모든 이는 주어야 하고 모든 이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인들은 바울에게,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우리는 여러분들로부터, 여러분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아들일까요?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믿음으로서 나오는 영적인 축복, 즉 격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나라에서 사회, 경제, 정치적인 관계 안에서, 그리고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의 관습과 특성을 가진 교회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의 경험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사회에서, 경험 속에서 살아 갑니다. 이런 축복과 믿음의 삶, 경험의 나눔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격려하며 강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름이 없으나 유명한 공동체와의 만남을 갖게 해 주신데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 및 번역 다빗 유레흐

* 체코어 한국어 잡지 나눔터 + 2호에 실린글

벨리바의 한국의 주간

벨리바의 한국의 주간

2003년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삐섹 벨리바 찻집에서 „한국의 주간“ 행사를 한국 서울의 동안교회 우리 친구들과 함께 하였다. 우리 친구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였고 몇몇 학교를 방문하여 한국의 다른 생활모습에 대해서 학생들과 대화를 하였다. 우리들은 한국 전통결혼예복을 입어볼 수 있었고 한국 음식을 요리하고 맛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전통한국차와 다기 그리고 DVD를 가지고와서 우리들이 현재 프로그램을 위해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은 체코 공화국에서 없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한국문화를 가지고 왔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앞으로 많은 교제가 이어지게 될것이다. 이번 방문은 우리들에게 축복이며 한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사역의 다양성안에서 그 한주간이 커다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한다. 이어지는 글은 벨리바의 한국의 주간에 참석하였던 사람이 쓴 글이며 그 한 주간이 그의 삶의 큰 변화를 일으켰다.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만나야 얻을 수 있을 한국문화를 다 알아버렸다.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시길…

내 이름은 토니입니다. 2월 7일 무렵주일 벨리바 찻집에서 한국의 주간이 열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땐 그것이 나의 관심을 그렇게 끌지 못했던 것은 „한국“ 이란 개념이 나에게 전혀 없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준비된 프로그램에 참석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벨리바에 가서 찻집 출입문에 들어서면서 멋진 장식과 동양의 문화에 그냥 넋을 놓게되었습니다. 벨리바에서 그만 하루를 보내며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그 주간에 시간에 쫒겨 모든 활동을 참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 시범도 사물놀이도 보지 못하였지만 예를 들어 전통한국춤 또는 전통한국놀이 와 같은 다른 프로그램들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경험들을 하였습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국글자의 두 종류가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동양의 춤과 전통적인 그리고 현대적인 음악에 열광하게 되었습니다. 색깔이 있는 큰 부채를 가지고 꽃 모양을 만들고 그 중앙에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는 모양으로 추는 춤은 나를 황홀하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닭싸움 또는 바둑 놀이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도 모자란나머지 우리 한국 친구들은 금요일 엘림 청년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우리들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체코 문화를 보여주었고 우리들은 함께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 주 동안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 중 몇몇과는 인터넷을 통해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이 친구들과 다시만나 올해 짧은 기간동안 다 하지 못하고 모자랐던 점들을 보충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토니
* 이 글은 체코 한국어 잡지 나눔터 + 2호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