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공화국의 기독교 종교인구

체코공화국의 기독교 종교인구
(2001년 인구조사)

체코 인구 10,230,060명 가운데 종교인구는 3,288,088명 (32,1%)이며, 비 종교인구는 6,039,991 명(59%) 이며 무응답자는 901,981 명(8,8%)이다. 32,1%의 종교인구는 아래와 같이 정부에 등록된 교회와 종교단체에 분포된다.

A. 기독교
I. 카톨릭 교회 (cca 27%): 로마 카톨릭 26,8% (2.740.780명), 그리스 카톨릭 (7 675) 그리고 구카톨릭 교회(1 605).
II. 개신교회 (cca 1,5%): 체코형제개혁교회 1,1% (117 212), 칼빈개혁교회0,1% (14 885), 슬레스까 칼빈개혁교회 0,1% (14 020) 그리고 루터개혁교회 (5 412).
III. 체코슬로벤스까 후스교회 1.0%(99 103).
IV. 오순절 계열 및 기타 개신 교회 (cca 0,3%): 형제교회 0,1% (9 931), 기독교 공동체 (6 927), 사도교회 (4 565), 침례교회 (3 622), 형제단 (3 426), 감리교회 (2 694) , 신사도교회 (449).
V. 여호와의 증인 0,2% (23 162).
VI. 동방정교회 0,2% (22 968).
VII. 제7일 안식일교회 0,1% (9 757).
VIII. 일신교(유니테리언 교도) (302).
IX. 몰몬교 (1 366).

B. 유대인 (cca 0,01%): 유대인 회당 (1 515).

C. 기타 1,9% (196 712).
정부에 등록된 교회나 종교단체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오순절 계열, 기타 세계종교 즉 이슬람, 불교 또는흰두교이며 체코에서 활동중인 이단종파이다.

비종교인구가 60%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자료는 체코가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임을 보여주고있다. 기타 다른 종교인구가 절대적으로 적기때문이다.

체코의 기독교역사는 8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 1200년이 넘었다. 세계 기독교역사에 14세기에 시작하여 얀 후스 선생의 시대에 그리고 후에 형제단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오늘날 교회의 약화의 원인을 카톨릭 교회에 의해 주도된 반 종교개혁의 시대(17세기) 그리고 공산독재의 시대(1948-1989)에서 찾을 수 있다. 교인숫자가 줄어들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으로서 세상에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전 유럽의 기독교의 위기의 시대에 1989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다. 오늘의 상황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일반사회에게 이상하게 비춰진다. 하나님을 믿는 것 교회당에 다니는 것은 현대적이지 않다고 오늘시대는 말한다. 일반사회는 카톨릭교회의 정치적 발언과 재산환원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반면 카톨릭 개신교 교회들의 사회봉사단체들의 활동(양로원, 무숙자, 환자, 미혼모 등등)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고있다.

다빗 유레흐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그리스도안에서 함께하는 우리들

그리스도안에서 함께하는 우리들

모든것은 신학적인 대화로 시작하였다. 신학은 풍부한 유대경전과 기독교 성경의 전통에 서 있기 때문에, 신학적인 대화는 전통으로부터 비롯되어야만 한다. 2천년간의 교회의 대화와 논쟁의 모든 전통들과 그리고 종교개혁의 전통을 덧붙이면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과 희망, 과제들을 얻게 된다.

처음에 나는 구체적인 일들을 이슈니 미에스또(프라하 4지역)에서 시작하려고 생각했었는데, 교회구조가 이 작업을 뒷받침 해줄 수 없었다. 꼬빌리시에서 우리는 근 30여년간의 외국교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종실 목사가 „왜 꼬빌리시에서는 안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내 생각을 전환시켜 주셨을때 나는 이미 모든 해답을 얻었다.

에큐메니칼 경험은 우리가 단순히 교회당을 예배를 위해 다른 교회에 세를 주는 형식의 그런 방식의 협력을 따르지 않도록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교회기관의 헌법에 기대지 않고 에큐메니칼 예배를 시작하겠노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다. 그래서 성만찬을 함께 하였다. 이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들이 하나되게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우리 체코-한국의 관계를 가장 높으신 분 앞에서 평등하게 하는 것이지 어떤 흥미로운 활동을 통해 유발시키는 그런 동정이나 관심이 아니다. 분명 체코 – 한국 두공동체간의 언어차이는 함께하는 공동의 성찬예배에서 극복되고, 그리고 우리의 공동의 목표를 보여준다.

당시 나는 야고보의 말씀과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성서에 셀 수 없이 많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가 나온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체코인과 한국인들의 협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성서의 약속의 말씀과 구체적인 교회들의 국제적인 경험의 바탕과 예배 예전의 갱신의 노력의 과정에서 우리 체코-한국 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여정이 모색되었다. 이 여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안에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 성취되는 그 동안 이 여정은 옳았으며 안전한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고, 교회당 사용을 한국인 교회라는 하나의 별도의 교회에게 세를 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인종이 함께 섬겨가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요한 계시록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희생양을 찬송한다.(계 5,9-14) 찬송과 존귀를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이 협력은 동시에 몇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에 체코 한국 공동체로부터 인새심있고 중요한 교회의 사회봉사가 발전되고 있다. 성만찬에 고통 받는이 들과 아픈이들이 참여하지못한다. 댜블리쩨의 우리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봉사와 보흐니쩨 정신 병원에서 그리고 역시 보흐니쩨의 슈뜨라스부르크 호스피체에서의 목회 차원의 우리들의 사역의 의미있는 봉사는 프라하 꼬빌리시의 야곱의 사다리 교회에서 함께 하는 체코 한국의 실존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우리 기독교 공동체가 사회를 섬겨가는 일을 깨우쳐주고있다. 이런 섬김은 말로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침묵의 실천의 연대를 이해하는 우리들이 세속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증언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양 문화의 접촉이다. 한국인들은 교회당에서 뿐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호스피체에서 아름다운 찬송을 부른다. 우리들은 한인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새롭게 형성된 체코 – 한국공동체를 통해 그리고 나눔터와 같은 이러한 잡지를 통해서 민족들의 평화로운 만남의 이러한 선물을 깊게하고 확장하게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문화의 영역에서 전통의 교환, 두 국가간의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 요리법의 교환 그리고 다른 형태의 공동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를 잘 알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풍요롭게 해주고 기쁘게 해줄것이다. 이러한 기쁨은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이다. 기독교인이 아닌사람도 이세상에서 민족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야 하며 약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함을 알것이다.

한국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의 삶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다른공간이 있다. 한국인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초청을 알리는 종탑을 세울 수있었다. 종은 잘 움직이고 있고 이 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리듬을 주고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우리 교회당 장소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민족들이 확장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앞에 몇가지 일이 남아있고 두 공동체가 한곳에서 모일 공간을 필요로 하고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종실 목사의 사역을 매우 존경한다. 이목사는 한인 공동체를 인자하고 목적성있게 아주 다방면으로 목양하고 있으며, 우리들이 문화적인 장애로 어려움을 겪을 때 체코의 전통도 한국공동체에 알리는 일도 한다. 열린마음으로 체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있으며 우리의 종교개혁의 과거와 현재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고 동시에 우리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가까워지게 한다. 우리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가길 희망한다. 우리들에게 어떻게 예배예전을 발전시켜 사회를 위해 새로운 활동을 할것인지 등의 많은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잡지 발간이 결실이 있고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언어들 그리고 인종들을 향해 열려지는 것을 도울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지 슈토렉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사랑은 인간소통의 언어

<사랑은 인간소통의 언어>

이세상에 그토록 다양한 언어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한번쯤 스스로 질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성경의 창세기 저자도 아마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고 그 대답을 하고있다. 그것이 바벨탑 이야기이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서로 다른 말이 생겨난 까닭을 설명하고있다. 처음에 언어가 하나뿐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힘을 합해 도시 문명을 건설하였다. 하늘 위에서 신이 의사소통을 하며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을 인간의 능력에 놀라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계획을 저지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이 다른 언어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저자는 인간의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을 신의 개입으로 묘사하고있기 때문이다. 단지 언어가 의사소통의 문제라면 굳이 신의 간섭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의 개입은 인간사회의 소통의 장애를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이 깔려있음을 의미한다.

인류역사상 인간사회에서의 소통 장애는 늘 존재하였다. 그리고 인류는 인간사회의 소통의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적으로 민주사회를 발전 시키고 기술적으로 통신을 발달시켰다. 현대사회는 신분과 계급보다 소통에 의해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소통 장애는 소외를 낳고 소외는 불법과 폭력으로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을 위해 그 제도와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열린 마음과 관심이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랑이다. 마음이 통하는 체코친구와 이야기하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필자의 어눌한 체코어도 잘 이해하여 더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틀림없이 전혀 다른 한국음식도 맛있게 먹는다. 반대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체코인과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쉬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들을 경험한다. 그래서 주눅이 들어 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물론 그는 타문화와 습관도 이해를 못하고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놀라운 것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같은 언어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심지어 왜곡되어 전달되고 전혀 달리 이해하여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회적으로 기술적으로 소통의 제도와 기능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나눔터 플러스를 통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체코와 한국 두 사회의 만남이 서로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관심이 우리들 마음에 사랑을 풍성하게 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 종 실

* 나눔터 플러스 2호 기고글

나눔터 플러스 창간에 붙여…

나눔터 플러스 창간에 붙여…

한국인들에게 체코는 그들의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거쳐가는 곳이다. 각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기간 거주한다. 대체로 체코의 한국인들은 20대 후반 부터 40대 초반의 활발한 인생의 시기를 체코에서 보낸다. 이 중요한 인생의 시기에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이상을 거주하면서 체코 사회를 가슴으로 느껴보지 못하고 귀국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러니 자신이 숨쉬고 살던 사회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중부유럽의 조그마한 나라 그까짓것 잘못 이해하면 어떠하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체코의 삶을 내가 원했던지 아니면 원치않았던지 그리고 그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 나는 이미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숨쉬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존재가 형성되어간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곧 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이 된다. 우리가 자신의 사회를 바르게 이해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의 존재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비정치적 비상업적 순수 생활 정보지 나눔터가 탄생하였다. 체코의 새로운 법령과 생활정보를 알리고 체코생활의 경험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체코의 유일한 한국어 소식지이다.

소식지의 이름처럼 나눔터는 바르게 체코사회를 이해하고 유익한 해외생활을 이룩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삶의 나눔의 장소이다. 이제 이 나눔의 장소를 우리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체코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장소로 발전하길 원하여 나눔터 플러스를 발간하게 되었다.

무지와 적의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이성과 과학의 진보 속에서 인간의 야만성을 경험한 것이 지난 세기의 우리들의 경험이다. 그 잔인한 야만성을 극복하기위해 인간은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하고있다. 그 노력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체코와 한국은 서로 부분적으로 알고있다. 필자가 만난 많은 체코인들은 한국에 대해 분단과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공산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를 기억하고있다. 서로를 모르면 서로를 업신여기게 된다. 외모로 사람과 나라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체코와 한국 두 사회가 폭 넓고 깊은 상호교류로 사회적 존재양식이 더 발전하여 인류의 평화발전에 기여하기를 소망하면서 이 일에 나눔터 플러스가 조그마한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종 실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나눔터 플러스는 이종실 목사가 발간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정보월간지 나눔터를 년간 두차례 즉 성탄절기와 부활절기에 발간되는 나눔터를 나눔터 플러스라 하여 체코어와 한국어로 발간됩니다. 나눔터 플러스 역시 별도로 정부의 정기간행물로 등록하였습니다. 나눔터 플러스를 받아보기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을 교회홈페이지 또는 나눔터 홈페이지를 통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체코 기독 사상가] 보이떼흐

체코의 주요한 기독 사상가들

보이떼흐 슬라브닉 – 선교사와 유럽인

보이뗴흐 슬라브닉은 956년 뽀뎨브라디 옆의 리비쩨에 위치하고 있던 유명한 슬라브닉 왕가에서 출생하였다. 972년에는 인문학 공부를 위하여 주요한 교회 및 전도 활동의 중심지였던 마그데부르그로 떠나, 그 곳에서 9년간 머문다. 그 곳의 아달베르트 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으며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얻는다. 공부를 거의 마칠 무렵 성직 수임의 첫 단계를 받아들여 부제(副祭)가 된다. 프라하로 돌아와서 교회 성직자 단에 입교하여 사제 서품을 받는다. 982년에는 레베 흐라데츠에서 프라하에서 두 번째로 주교로 선출되며 983년에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주교청에서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임장을 독일 황제인 오타 2세로부터 받게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클뤼니의 개혁 운동가 대표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사상에 깊은 영감을 받는다. 곧바로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빌링기스에게 새로운 프라하의 주교로서 서품을 받는다.

교회에서 타협 할 수 없는 기독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가는데 그의 역할을 다 하였고, 교회와 사회의 악법을 철폐하는데 앞장섰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노예 매매, 다처제, 근친혼, 이혼, 폭식, 알코올 중독, 장사로 인한 주일 신성모독 등. 그러나 그는 지배자로부터, 혹은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홀로 고독해진다. 이러한 거의 대부분의 온건한 노력들에도 988년 결국 조국을 등지고 로마 교황 요한 15세에게로 길을 떠나고, 그 이후 몬테 카시나의 수도원, 그리고 마침내 로마 옆 아벤티나의 성 보니파스와 알렉시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간다. 그 곳은 종교적 삶의 치유와 교회의 강한 개혁에 힘을 쏟고 있었다. 보이뗴흐는 이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할 것을 결심하고 992년 베네딕트 수도사의 선서를 한다.

조국에서는 그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였고, 기독교의 원칙을 고수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보이뗴흐 주교는 992년 기쁨과 희망으로 요청을 수락한다. 왕자는 그에게 권력을 선물하고, 보이뗴흐는 브제브노프에 993년에 축성 받게 되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립한다. 순풍시대도 오래가지 않고 나라 안과 교회 내에서도 이교도가 도로 득세한다. 994년 보이뗴흐는 성 이지 수도원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간통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여인을 목도하고는 두 번째로 조국을 등지게 된다. 다시 아벤티나의 수도원으로 행하였다. 996년 새로운 교황 제호즈 5세에게 황제관을 수여받기 위하여 그 곳으로 젊은 독일 황제 오타3세가 온다. 보이뗴흐가 전적으로 지지하였던 후기 기독교 양상의 로마제국의 혁신에 관한 계획을 알린다.

일년 후 보이뗴흐는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국으로 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지배자에 의하여 거부당한다. 이교도 속에서 그는 기독교 정신을 설파하는 선교자로서 헝가리에서는 파논할마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폴란드로 옮겨가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다. 이후 수행원으로서 이교도의 땅 프러시아로 향한다. 그 곳에 도착해서는 겨우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였다. 열정을 다하여 설교하였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성서 말씀에 완강하였다. 997년 4월 23일 보이뗴흐는 난폭한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한다. 이교도들은 홀린 성 내 성벽쪽에 그의 머리를 도끼로 잘라 말뚝머리에 달아놓고 선교자들에 대한 경고로 보여준다. 그의 몸은 조각조각 잘린다.

999년 보이뗴흐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1000년부터는 폴란드의 주요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그는 또한 헝가리인들에게 주요 성인인기도 한데, 그 이유는 994년 나중에 헝가리 황제가 되는 슈뗴판 1세에게 세례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골은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는 프라하 대교구의 주요 성인이다.

보이떼흐는 학식있고, 헌신적인 인물이었으며 그의 품격있는 성품은 모든 회의에서 빛났다. 지칠 줄 모르고 신의 영광과 찬미, 영적 구원을 위하여 싸웠다.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서 도덕적 원칙과 더 높은 가치를 옹호하였다. 대륙의 정신적인 일치를 강구하였으며, 칼로서가 아닌 기독정신으로서 유럽의 일치를 꾀하였다 그의 지성적 싸움의 장이자 고향은 바로 유럽이었다. 그가 스스로 기울였던 노력의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로 이끌었지만 그의 과제를 다 이루었으며 이후 세대에게 또한 역할을 전수하였다. 그의 유산은 화해, 융합, 일치의 유산이다. 그리고 또다른 유산은 유럽의 정신적 중요성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인 것이다.

( 슬라브닉 가문의 보이뗴흐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게 비판적 시각과 객관성, 정확성으로 그에 대하여 기술하려 노력한 여러 도서들을 접하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