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얼마전 서울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교회의 청년들 20여명이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단기 선교”라는 이름아래 청년 교인들에게 선교의 길도 열어주고 더불어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얻고 새로운 도전을 받도록 배려하는 프로그램을 재정 형편이 가능한 교회들이 계획하고 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교회들의 이러한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선교의 개념이 너무나 다양해서 단순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의 중심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긴급히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와 따르는 이들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것을 “위대한 위임(委任)”으로 기독교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이 위대한 위임을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각오하고 있었다. 이것을 수행하려는 그들의 충일한 열정과 헌신에 어느덧 선교현장에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는 선교사인 필자 자신이 크게 도전을 받을 정도였다. 복음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과 헌신을 보면서 한국교회와 나아가 민족의 미래의 희망을 느꼈다. 자기철학과 이웃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미래를 담고있는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재기 발랄하였고 생동감과 창의력과 진취력이 넘쳐 났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헌신이 독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어떤 일본 신학자가 기독교를 “교사(敎師) 콤플렉스를 가진 종교”로 표현하였듯이 기독교의 교리는 타 종교에 대해 우월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기독교인들의 열정과 헌신이 자칫 열광주의와 독선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열광주의와 독선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가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열정과 헌신에 충일한 20여명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펼치고 싶은 일들을 잠시 접고 한 주간동안 체코교회와 슬로바키아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천년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자신의 교리를 전파할 기회 대신 오직 생존을 목표로 고난의 역사를 넘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한 교회재정 때문에 겨울철 난방은 엄두를 내지 못해 영하 10도가 넘는 교회당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른 모양의 열정과 헌신 속에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그들에게 새로운 눈(眼)의 열림이었다. 자신들의 열정과 헌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자기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앎이었다.

노자(老子)가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고 했다. 이 귀절이 기억될 때 마다 카톨릭의 종신(終身)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분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말의 깊은 뜻을 필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미 문 밖에 나와있는 필자 자신은 어쩌면 천하를 알려고 하기 보다 천하를 얻으려는 마음의 욕망이 앞섰던 것 같다. 문 밖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안고 다시 문안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의 여정이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나눔터 제30호

체코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문제

마가복음서에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말씀을 하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에 데리고 왔습니다. 마치 기적처럼 예를들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디아코니아의 실질적인 필요는 예수님이 잘 설교하는 그곳에 가리워있습니다. (역자 주: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뜻한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선교활동과 관련해서 사회봉사활동 즉 디아코니아 활동을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개 교회의 활동과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구별되어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디아코니아“ 라는 교회단체가 전담을 하고있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자신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기위해 디아코니아를 조직과 교회의 활동의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설교는 마지못해 행사하듯 건성이 아니라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실천은 세상의 평판의 척도입니다: 세상의 동서남북 네 지역의 대표들이 이름 모르는 한 집으로 옵니다. 누워있고 들려가는 그 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를 구하는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연함과 놀람은 디아코니아 봉사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이름 모르는 이 중풍병자 한 사람의 경우가 광범위한 변화들을 일으켰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에서 디아코니아가 생겨났습니다.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은 결국 개인주의가 되어 그 디아코니아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않고 단지 열심있는 자원봉사자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단지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고 결코 건강하게 하지 못합니다.그러므로 교회들이 디아코니아는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있는 것에 놀라지 맙시다.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들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실패와 좌절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교회당 안 어디에 그들을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러한 문제들과 실패와 좌절의 그들의 눈물이 디아코니아에 있습니까?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우리들 각자는 결국 패배하고 죽게 되고 승리하지 못하며 빈 손으로 온 처음처럼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을 많은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우리는 생의 희망의 도구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서 우리의 실패가 끝이 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며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우리의 교회를 열린교회로 그리고 예배와 디아코니아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이지 슈토렉

* 5월 27일 한국여전도회 성가단 디아코니아 활동 지원을 위한 콘서트의 프로그램 인사의 글이다.

5월 한국여전도회 성가단 방문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교회라고 고백을 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지체이다. 이러한 교회의 이해를 바탕으로 에큐메니칼 라인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있다.

냉전의 시대이후 세계는 경제적으로 자본이 더 이상 국경에 제한을 받지않는 광범위한 소통이 일어나고 이에 따른 변화가 무섭게 일어나고 있다. 그 변화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교류를 넘어 이제는 지역사회와 개인의 일상의 생활 속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세계교회가 그동안 발전시켜온 교회일치의 경험과 노력을 바탕으로 개 교회의 차원에서 교회의 일치문제를 숙고할 때가 되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체코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꼬빌리시에서의 실험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예배와 성만찬과 세례를 함께하는 것은 영적인 교류이며 기독교회의 교류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다른 교류 프로그램이 단지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적교류를 강화시키게 된다.

우리들의 실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한 예수교장로교단의 소속 지역교회들의 여성신도 전국 조직인 전국여전도회연합이 있다. 회원은 백만명이 넘는다. 이 단체안에 많은 부서조직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가단이다. 40여명의 회원들이 있으며 이들은 전국 30여개 교회에서 모였다. 이들이 5월 마지막주에 야곱의 사다리 교회의 “수도원”과 “봉사관”에서 생활하면서 한국문화도 소개하고 찬양으로 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체코교회의 신앙전통을 이해하고 꼬빌리시에서의 우리들의 삶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전국여전도회연합의 회장이자 한국기독여성과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연옥 박사가 작년에 설교로 우리들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체코 한국 기독교인들이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의 바른 사명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귀국하였다. 야곱의 사다리옆 교회당에서 우리들의 교제가 체코와 한국교회 전체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5월 26일 월요일에 프라하에 도착
27일 화요일 오후에 부채춤, 사물놀이, 한국차, 한국문화소개, 한국음식 한가지가 준비된다.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함께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28일 오후 7시 살바도르 교회당에서 디아코니아 활동을 돕는 목적으로 음악회
29일은 하루 종교개혁의 역사가 숨쉬는 아름다운 프라하를 돌아보고
30일 올로모쯔에서 우리 교우의 협력으로 올로모쯔 필하모닉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너와 함께 있으리라

  •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0일)
  • 출 3:1-15
  • 설교자: 이종실

030420 부활주일
출애굽기 3:1-15
너와 함께 있으리라

<본문>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설교>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절)

이 본문은 우리들에게 양떼를 모는 나이 80의 촌부 모세의 모습에 대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80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노예로 고통당하는 히브리 동포들을 도우려는 의협심이 충만했습니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열정은 뜨거움으로 불탔고 그래서 그는 동포를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포를 노예로 취급하는 애굽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자신의 동포들의 지지를 얻지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체코의 조그마한 한인사회를 한 예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다 능력있는 분들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나라와 민족 아끼고 봉사하고 그리고 보편적 인류사랑을 원하는 분들입니다.
옳은 일을 실천하는 마음과 뜻이 있는 분들이 모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마음들이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피부로 와서 닿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마음과 뜻들이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과 권위의식에 가리워져 있는 것을 경험할때가 종종있습니다.
이런것을 경험할때면 상실감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 내가 몸담은 내 사회 내 이웃을 향해 침을 뱉고 저주를 하게 됩니다.
이제 체코에 온지 한 두주 되는 분들의 입에서 체코는 터가 세다 고 하면서 자신의 사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커다란 좌절감을 겪었을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살인자로 반역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을 하면서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의 무게를 느낄 만큼 무거웠을 것입니다.

제사장 이드로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일면식도 없는 미디안 땅에서 그는 나이 40이 되어 처음해보는 양치기 목자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양치기 일을 그는 지금 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40년간 매일 양 떼를 몰면서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을 불태우던 불이 서서히 불씨를 남기며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80의 촌부의 모습에서 이전에 모세가 가졌던 야망 그 마음의 뜻을 더 이상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의 타던 불꽃이 꺼져가고 그 열기가 식어가는 만큼 그와 그의 가족들 사이에 평화로운 삶은 더욱 더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히브리 동포들은 이순간에도 애굽에서 숨차게 살고 있음에 분명하였습니다.
옛날 바로가 죽은 후에도 노예들의 상황은 바뀌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모세에게 먼 나라였습니다.
고통받는 자신의 동포역시 먼 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 동포의 고통은 모세의 삶의 고민일 수 없습니다.
그의 눈앞의 가족과 양떼가 오직 그의 삶의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의 작은 평화의 세상에 안주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상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그날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다가, 성경을 보다가 그리고 깊은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떼들과 함께 일하다가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감리교회 이현주 목사님이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는 그의 책에서 재미있게 해석을 합니다.
모세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서양 속담이 아니라 길 아니거든 가지 말라는 동양 속담에 따라서 살아간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치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 호렙산으로 스스로 방향을 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양치기는 이미 있는 풀과 물을 찾아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 풀과 물이 모세를 호렙산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호렙산을 모세가 자기 발로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이끄시는 대로 발길을 옮기다가 다달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의 관계성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도 아닌 이 해외에서 우리가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체코의 전문가가 되어도 쉽지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체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에 일단 아는 사람을 통해 조그마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리고 조금 생활이 익숙해 지면 먼저 아는 사람을 폐기처분하고 스스로 아는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체코사람 아니면 아름 아름 알게된 체코사람 그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추구해 갑니다.
인간관계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면 한국인이 되었든 체코인이 되었든 오래가지 못합니다.
10여년 넘게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오고 가는 삶을 보면 이 과정을 그리 벗어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은 인간관계를 수단으로 결코 만들지 않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삶의 목적으로 수단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다릅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기심으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과 다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곳에 저와 저의 가족을 보내신 분이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까?
저와 저의 가족을 죽이든 살리든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살고 계십니까?

신앙의 생활화, 생활의 신앙화가 철저히 되지않으면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가 없습니다.
나의 계획과 목적이 앞서는 한 우리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초와 물을 따라 양떼를 몰고가다가 그는 호렙산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는 불에 타지않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 타버려 재가된 사람, 모세 앞에  태우되 재를 만들지 않는 영원히 타는 불, 하나님의 불이 있습니다.

그 불로부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때까지도 모세는 하나님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초지를 찾아 양떼를 몰고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는 그의 일상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그가 늘 하던대로  양떼가 배불리 먹으면 떠났을 곳입니다.
늘 일상생활에 있는 평범한 장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서있던 곳을 지적하며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들의 이기적인 발걸음을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으며 그 신을 누가 벗겨줄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불태우는 욕망이라 불리우는 전차의 수레바퀴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신들을 구원할 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죽이고 나서야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운명하시자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를 죽인 무리들과 백부장과 군인들이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뒤늦게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다시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실천이기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스스로 고백한 그들이 전혀 다른 모의를 합니다.


이튿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마 27:6264)
그뿐만 아닙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의 사건을 조작하고 왜곡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 28: 12-13)

이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을까 두려워하여 숨어지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도마는 믿지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믿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심각한 문제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걸어왔던 이기적인 발걸음의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과 빛으로 채워지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듯이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면 빈 마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과 뜻으로 동시에 채워집니다.
가족과 양떼로 채워진 모세의 마음에 다시 고통 받는 동포로 채워집니다.


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7-8절)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이기심을 벗기고 고통받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마음의 이기심을 벗겨주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음하고 울부짖는 우리의 고통에 귀를 기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세상의 모든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의 자리는 실가닥 같은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오시엥침(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를 처음 방문하고 정말로 충격과 공포와 전율을 느꼈습니다.
한동안 밥맛을 잃었습니다.

문에 듣던 죽음의 가스실은 아닌지 샤워실 물꼭지를 바라는 저들의 눈, 시체 태우는 방의 굴뚝에서 오른 연기와 재를 바라보던 눈, 이
행렬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두려움에 떠는 눈, 그 눈들 속에 담긴 공포, 죽음보다 더 무서운 그 공포 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있는 한 그 자리는 고통의 자리임도 불구하고 절망의 자리라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매달려 있는 곳 십자가 그곳이 바로 절망의 자리이고 가장 큰 고통의 자리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던 한 인간의 좌절은 이 세상 어떤 고통도 그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단절되어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14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언제나 인간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려오셔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스스로 계신 이 하나님은 스스로 세 가지 일에 대해 물으신다고 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내 일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둘째,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셋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의 삶의 장소에서 신발을 벗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9,10절)

모세는 이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전의 그 열망의 불꽃은 다 타버려 식어버린 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그러나 주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답하지않았습니다.
단지 그에게 약속만 하였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아직 열정이 남아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가 힘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 질문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관대의 질문이 아니라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심입니다.
체코의 작은 한국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치게하고 실망하게 하고 허무하게 하는 끝없는 논쟁이 모세와는 그 표현이 다르지만 결국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모세는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 앞에선 우리는 자기 자존심에 대한 질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질문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질문은 해외에 산다고 다 똑 같은 줄 아는가?
나는 당신과 다르다. 이겁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선교사면 다 똑 같은 선교사인가?
나는 체코의 개척선교사이다.
그래도 경험으로나 공부로나 나 만큼 선교를 준비했나?
프라하에 한인교회가 두개 있는데 교회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선교적으로 정통성이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아닌가?
은근한 자존심과 우월심, 이것이 궁극적으로 모세의 질문 내가 누구관대? 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을 부패하게 만들고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건강하게 살려면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대 라는 자신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발걸음의 신을 벗은 사람이 오직 가져야 할 관심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파송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좌절과 근심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교회당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파송을 하면서 목사인 저에게 파송장을 주고 생활비와 선교비의 계약서를 주고 평신도인 여러분들에게 돈 잘 벌리는 사업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파송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와 여러분들의 열정과 노력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고통받는 이들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일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열정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부활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응답은 우리들의 신앙의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발걸음의 신을 날마다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붙잡고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충족한 삶을 체험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2003년 공동의회 한인공동체 보고

2003년 공동의회 한인공동체 보고서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체코형제 자매들에게 한인교우들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한인교우들은 슈토렉 목사님의 건강회복을 위해 매일 아침에 가정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에큐메니칼 예배가 더 활성화되고 체코와 한국 교우들이 함께 교회의 경험과 영적 유산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돕는 일들을 해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체코교회의 영적인 유산과 교회의 경험을 배우고 체험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 스몰릭 교수님을 매월 1회 초청해서 그의 설교를 듣고있습니다. 그 외 체코목회자와 설교자를 초청해서 영어 또는 체코어 설교를 듣습니다. 영어와 체코어 설교는 각각 김주영 교우와 남유정 교우가 통역을 합니다. 이들 체코 설교자들을 통해 저희들은 다양한 체코교회의 경험과 영적유산을 접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인 교우들은 체코 교우들과의 교류를 앞으로 적극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코오디네이터로 김창수 집사를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체코에서 공부하는 한국유학생들을 위해 그들이 유학생활에 잘 적응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선교적이고 목회적인 차원에서 체코어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였습니다.

이종실 목사는 한국과 체코 두 사회의 문화와 기독교를 더 폭 넓은 교류를 촉진하기 위하여 체코한국 기독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일에 이종실 목사의 오랜 친구인 다빗 유레흐 전도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협회는 문서선교의 차원에서 체코의 한국인들을 위한 생활정보지 나눔터, 그리고 체코인들을 위해 체코어 한국어 잡지 나눔터 + (플러스)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나눔터와 나눔터 플러스는 정기 발간물로 문화부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작년에 우리교회에 매우 유명한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교계 지도자들이 몇 명이 방문을 하였습니다. 이화여자대학의 교수이면서 신학자이고 목사인 정미현 박사가 자신의 스승인 체코의 신학자로서 스위스 바젤신학부의 학장인 로흐만 교수의 80회 생신기념 강연회에 참석을 하면서 우리교회를 방문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수이면서 한국학술진흥 이사장인 김성재 목사가 찰스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프라하를 방문하면서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였고 귀국 후에 얼마있다가 문화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한국기독교 여성계의 지도자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여전도회 명예회장인 이연옥 박사가 에큐메니칼 예배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작년한해 27명의 교우들이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직장 때문에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하였고 21명의 교우들이 새로왔습니다. 현재 주일예배에 평균45명이 참석합니다. 그리고 작년 한해 176명의 한국인들이 저희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서울 동안 교회의 20명의 젊은이들이 한 주간 동안 삐섹에서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삐섹의 젊은 기독교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리고 슬로바키아 교회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프라하에서 2003-03-23 사순절 셋째주일에
보고자 목사 이 종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