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4 오테르스도르프의 식스트 집

4. 오테르스도르프의 식스트 집
(Někdejší dům Sixta z Ottersdorfu)

구시가 광장 앞 첼레뜨나 거리 왼편 끝에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집에 개혁의 자취가 있다. 그러나 2/553호 집은 오늘날 식스트의 집으로 통칭된다. 16세기 초부터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이 곳의 주인은 주요한 후스파 문헌학자이자 성서 연구자 및 유능한 정치가였던 오테르스도르프의 얀 식스트 (Jan Sixt z Ottersdorfu) 였다.

얀 식스트는 까렐 대학에서 학사 졸업을 하고, 오랫동안 외국에서 학업을 계속 하였다. 체코로 돌아온 후 프라하 구시가 시의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재상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많은 외교적 활동으로 귀족의 반열에도 오른다. (오테르스도르프 출신이라는 것을 이름에 붙임.) 페르디난드 1세에 대항하여 1547년 반합스브르크 봉기에 참여하여 재상의 자리에서 축출당하고 감옥 생활에 들어간다.

프라하에서 오테르스도르프의 얀 식스트는 후스파 구 양종성찬주의자들(보수파)의 편이 되었지만 루터파 신 양종성찬주의자들과의 관계도 꽤나 원활하였다. 그 당시 금지되었던 형제단 사람들과도 친교를 맺고 그들과 함께 신학과 성서 번역에 관한 관심도 나누게 된다. 1549년부터 그의 친구인 얀 멜랑뜨리흐의 인쇄소에서 체코어 성서 프라하 출판을 위하여 유능한 언어학자로써 신약 부분의 번역 작업에도 참여한다. 1575년 관록있는 외교관이자 대변가로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궁정대사들이 모인 가운데 체코 신앙고백(Česká konfese)의 인정에 관한 회의에서 양종성찬파를 대표하게 된다. 얀 식스트가 후스 시대 역사까지 “체코를 불안정하게 한 1546-47년 두 해의 사건들”이라 표현한 그 사건에 자신도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얀 테오도르 식스트(Jan Teodor Sixt)는 프라하 신양종성찬주의자들과 연계하였다. 그들과 같은 편에 서서 체코 반합스부르크 봉기를 준비하는 기간에 신교 의회의 변호인으로 선출되었다. 이 저항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 이후 교수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 받는다. 그러나 구시가 광장에서 교수형을 받기 직전, 그의 영향력있는 친구들의 탄원으로 황제에게 면책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카톨릭을 신봉하지 않고 거부하였으므로 추방령을 받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서의 삶을 마친다.

식스트家의 집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몰수당한다. 이후 황제의 프라하 장관들의 비서였던 필립 파브리시우스(Filip Fabricius)가 이 집을 하사 받지만 1618년 5월 23일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당시 장관들과 함께 창문 밖으로 떨어진다. – 이 빛 바랜 식스트家의 집은 지금은 단지 이름 뿐이고 (18세기 초 재건축 됨), 1층에는 와인바가 있다.

II/3 띤 사제관

3. 띤 사제관 – 띤 앞의 성모마리아 성당 옆
Týnská fara – při kostele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에서 출발하여 구시가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슈뜨빠르뜨스까(Štpartská) 거리가 좁게 나있다. 이 거리 오른편에 까렐 4세가 띤 앞의 성모마리아 성당(Panny Marie před Týnem) (다다음편에 우리는 이 곳을 둘러볼 것이다.)을 위한 사제관으로 건립한 5/601호 건물이 있다.

이 곳은 허옇게 바랜 색으로 써있는 ‘띤 앞’ (před Týnem)이라는 이름에서 설명된다. – 이 이름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띤(Týn), 띤 마당(Týnský dvůr) 혹은 운겔트(Ungelt) 등과 관련이 있다. 11세기에 이미 띤 이라는 이름의 안뜰에는 외국 상인들을 위한 여행자 숙소와 수입품 등에 관세를 매기는 세관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오늘날의 띤 사제관을 포함하여) 외국 병원과 더불어 작은 성모 마리아 교회가 건립되었다. 이 상인들을 위한 공간은 체코 왕 뿐 아니라 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돈이 나오는 가장 중요한 장소’ 였던 띤 마당은 – 독일어로 um Geld가 프라하 시민들에 의하여 발음이 와전된 채로 운겔트라 불리웠으며, 까렐 4세에 의하여 지어진 새로운 고딕 성당도 ‘띤 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체코 개혁시대에 띤 사제관에는 양종 성찬교회들을 관리하였던 후스 교의회(husitská konzistoř)가 있었다. 이 곳에서 대주교 얀 로키찬(Jan Rokycan)은 1424-1471년 사이에 모든 후스 교회들을 대표하였다. 띤 사제관은 반 개혁파가 재집권 할 때 까지 후스파 교회들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곳의 마지막 행정관이자 목사였던 이지 디카스투스(Jiří Dikastus)는 1621년 가을 띤 사제관을 떠나야했다.

II/2 히베른의 집, 화폐주조소 부꼬이 성

2. 히베른의 집, 화폐 주조소 부꼬이 성
(Dům „U Hybernů“, Někdejší mincovna Buquoyský palác)

화약탑 건너 편 공화국 광장 동쪽으로 제정 양식의 거대한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이는 히베른의 집(U Hybernů)이다. 이는 1355년 까렐 4세가 로마에서의 대관식을 마치고 암브로시오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트 수도회를 위하여 성 암브로시우스 교회와 수도원이 있던 자리이다.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 초기에 이 교회가 중요한 의미를 얻은 이유는 1419년 초 바츨라프 4세가 후스주의 신봉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 교회에서의 양종 성찬을 허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만 해도 양종 성찬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와 왕정(Kralův dvůr)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성 베네딕트 교회에서만이 가능하였다. 그 이후 성 베네딕트 교회는 철거되었고, 단지 지금은 거리 이름으로 교회에 관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베네딕트 거리- Benediktská ulice))

1차 후스 전쟁 시대에 암브로시오 베네딕트회 사람들은 프라하에서 추방 당하였다. 이단 형상들을 모두 없애고 프라하 내 교회의 조각상들과 그림들을 불태운 지그문트의 십자군 원정대를 막고, 프라하인들을 돕기 위하여 후스 급진파들은 1420년 성 암브로시아 교회 앞에서 집회를 가진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구시가와 신시가에서 후스파들의 큰 집회가 열리곤 하였다.

이후 뽀뎨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왕은 암브로시오 수도원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한다. 그러나 이들은 블라디슬라프 2세가 집권하였을 무렵인 프라하 전쟁시대에 성찬잔에 대한 설교로 1583년 프라하로부터 추방당한다. 반종교개혁 시기였던 1630년 수도원은 히베르인들 (아일랜드 – 라틴어로 히베르니아 Hibernia, 여기서 히베른 이란 이름도 파생되어 나옴.) 이라 불리웠던 아일랜드의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하여 재건되었다. 요세핀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해체되고, 암브로시아 교회는 이단으로 배척당하였다. 1789년 부터는 체코 극장으로 이 곳이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라섹의 소설 „F.L.Věk“을 극화한 작품에서 유명해진 바츨라프 트함(Václav Thám)과 춤의 명인 부토(Butteau)도 또한 이 곳에서 공연 하였었다.

화약탑(Prašná brana)을 지나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로 가보자. 이 곳에서부터 구시가 광장을 지나 프라하 다리를 건너 소지구외 흐라차니까지 이르는, 체코 지배자들이 지나다닌 王道(Královská cesta)가 시작된다. 한 100미터쯤 지나 왼편에 있는 36/587번지 집 앞에서 멈추어보자. (이 집은 아케이드와 거리쪽으로 난 발코니가 있고, 마치 그 집의 과거를 말해 주는 듯 군사들과 그의 대장의 조각상이 있다. )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벨플로비츠의 집은 1409년 바츨라프 4세가 왕정으로 편입시켜 체코 왕비들의 궁정(Dvůr českých královen)으로 탈바꿈하였다. 후스중의 시대 초기에는 구시가로 편입되고, 1420년부터는 후스의 주조소(husitská mincovna)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759년 주조원이었던 라요프의 파흐따(Pachta z Rájova)에 의하여 재시공된 동전 주조소의 벽면에는 오보츠니 뜨르흐 거리쪽으로 이런 현판이 있다. : 이 곳에 후스주의 시대인 1539년부터 1784년까지 동전을 만들던 주조소가 있었다.- 체코 화폐 100년의 기억. (1848년 이 주조소 앞에서 혁명 봉기 초기에 합스부르크 장군이었던 빈디쉬그뢰츠가 프라하 사람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바로 옆 건물은 1403 년부터 체코 영토 출신 학생들을 위한 체코 민족 대학 기숙사(Univerzitní kolej českého národa) 로 쓰였던 곳이다. 이 기숙사는 체코 개혁 당시 양종 성찬 교회의 학생들에게 제공 되었다.

첼레뜨나 거리 반대편으로 바로크 스타일의 집인 25/590번지 집이 있다.: 네 기둥의 집. (U čtyř sloupů) 이 집은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및 신학자였던 독일-이탈리아 계인 베르나르드 볼자노(Bernard Bolzano)가 살았고, 삶을 마감한 (1848년)곳이기도 하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계몽주의 신학 교수였으며, 독일과 체코 대학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보헤미즘’을 주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체코 땅 안에서 두 개의 민족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첼레뜨나 거리를 따라 약 100미터정도 내려오다 보면 20/562호 집이 있다. 이 곳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랑스 전투 사령관이었던 부꼬이 백작이 소유하였던 부꼬이 성(Buquoyský palác)이다. 부꼬이는 운명적인 빌라 호라 전투에서 황실 군대장으로 있었다. 신교도들을 누르고 승리로서 얻은 여러 재산중에 이 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1762년 이 집은 대학의 소유가 된다. 1880년부터 이 곳에 왕립 체코 교육 학회가 자리 잡는다. 몇몇 정보들에 의하면 이 집은 체코 개혁 당시 체코 형제단의 큰 후원자이자 리또미슐 지역 영주였던 뽀스뚜삐체의 보후슬라프(Bohuslav z Postupic)의 소유였다 한다. 형제단 교리에 관한 협의를 위하여 루까쉬와 바츨라프 끄라쏘니츠(Lukáš a Václav Krasonický) 형제가 지도하는 형제단의 임원들과 그리고 대학 교수들과 전문가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와 함께 이 집에서 모임이 열렸다. 1504년 새해 첫 날, 모임은 이루어졌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그 밖에 여러 해 동안 다양한 회의가 이 집에서 진행 되었었다. 1547년, 시 당국 대표들이 독일의 슈말칼덴 신교연합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페르디난드 1세의 도움을 거절했을 때, 중요한 회의도 이 곳에서 열린다. 뮐베르그 전투에서의 승리 후 페르디난드는 꼬스떽의 재산까지 몰수해 버림으로서 그를 응징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집도 그 때 몰수당한다. 17세기 초에는 프리드리히 팔츠끼가 집권하던 무렵 체코 왕실의 부총리를 역임하였던 미할로비체의 보후슬라프 (Bohuslav z Michalovic)가 이 집을 소유하였었다. 그리고 반합스부르크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다.

[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얼마전 서울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교회의 청년들 20여명이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단기 선교”라는 이름아래 청년 교인들에게 선교의 길도 열어주고 더불어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얻고 새로운 도전을 받도록 배려하는 프로그램을 재정 형편이 가능한 교회들이 계획하고 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교회들의 이러한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선교의 개념이 너무나 다양해서 단순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의 중심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긴급히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와 따르는 이들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것을 “위대한 위임(委任)”으로 기독교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이 위대한 위임을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각오하고 있었다. 이것을 수행하려는 그들의 충일한 열정과 헌신에 어느덧 선교현장에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는 선교사인 필자 자신이 크게 도전을 받을 정도였다. 복음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과 헌신을 보면서 한국교회와 나아가 민족의 미래의 희망을 느꼈다. 자기철학과 이웃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미래를 담고있는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재기 발랄하였고 생동감과 창의력과 진취력이 넘쳐 났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헌신이 독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어떤 일본 신학자가 기독교를 “교사(敎師) 콤플렉스를 가진 종교”로 표현하였듯이 기독교의 교리는 타 종교에 대해 우월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기독교인들의 열정과 헌신이 자칫 열광주의와 독선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열광주의와 독선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가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열정과 헌신에 충일한 20여명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펼치고 싶은 일들을 잠시 접고 한 주간동안 체코교회와 슬로바키아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천년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자신의 교리를 전파할 기회 대신 오직 생존을 목표로 고난의 역사를 넘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한 교회재정 때문에 겨울철 난방은 엄두를 내지 못해 영하 10도가 넘는 교회당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른 모양의 열정과 헌신 속에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그들에게 새로운 눈(眼)의 열림이었다. 자신들의 열정과 헌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자기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앎이었다.

노자(老子)가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고 했다. 이 귀절이 기억될 때 마다 카톨릭의 종신(終身)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분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말의 깊은 뜻을 필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미 문 밖에 나와있는 필자 자신은 어쩌면 천하를 알려고 하기 보다 천하를 얻으려는 마음의 욕망이 앞섰던 것 같다. 문 밖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안고 다시 문안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의 여정이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나눔터 제30호

체코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문제

마가복음서에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말씀을 하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에 데리고 왔습니다. 마치 기적처럼 예를들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디아코니아의 실질적인 필요는 예수님이 잘 설교하는 그곳에 가리워있습니다. (역자 주: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뜻한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선교활동과 관련해서 사회봉사활동 즉 디아코니아 활동을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개 교회의 활동과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구별되어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디아코니아“ 라는 교회단체가 전담을 하고있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자신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기위해 디아코니아를 조직과 교회의 활동의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설교는 마지못해 행사하듯 건성이 아니라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실천은 세상의 평판의 척도입니다: 세상의 동서남북 네 지역의 대표들이 이름 모르는 한 집으로 옵니다. 누워있고 들려가는 그 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를 구하는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연함과 놀람은 디아코니아 봉사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이름 모르는 이 중풍병자 한 사람의 경우가 광범위한 변화들을 일으켰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에서 디아코니아가 생겨났습니다.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은 결국 개인주의가 되어 그 디아코니아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않고 단지 열심있는 자원봉사자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단지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고 결코 건강하게 하지 못합니다.그러므로 교회들이 디아코니아는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있는 것에 놀라지 맙시다.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들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실패와 좌절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교회당 안 어디에 그들을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러한 문제들과 실패와 좌절의 그들의 눈물이 디아코니아에 있습니까?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우리들 각자는 결국 패배하고 죽게 되고 승리하지 못하며 빈 손으로 온 처음처럼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을 많은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우리는 생의 희망의 도구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서 우리의 실패가 끝이 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며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우리의 교회를 열린교회로 그리고 예배와 디아코니아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이지 슈토렉

* 5월 27일 한국여전도회 성가단 디아코니아 활동 지원을 위한 콘서트의 프로그램 인사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