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얻은 구원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21일)
  • 엡 2:4-10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421(부활절 후 세번째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전도사
본문: 에베소서 2:4-10
제목: 은혜로 얻은 구원

<공동기도>

부활의 참 소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악독과 시기와 분쟁과 투쟁과
패짓기를 즐겨하는 마음이 가득한 죄인들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살아가는 이세상에서 구원의 사랑과 감격을 채워가는
우리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읽은 오늘 말씀에서 세가지 중심 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허물로 죽은 우리들이지만 사랑이 크신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사도 바울, 오늘 우리들의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인 그는 자신의 신학에서 분명히 보여준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 까지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까지 모든 것은 율법과 인간이 선하고 온전하기 위해 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는 명령에 의해 판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과 명령은 인간이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 율법과 명령은 인간의 능력 밖이었고 그래서 인간은 그것들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16세기 초에 중부유럽에 한 젊은 수도자가 괴로움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고 죄 짓지않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자가 하나님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삶으로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않으려고 하지만 죄는 더 강해졌고 그 수도자를 지배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성경을 잊어버리고 전통과 추상적인 신학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의로 가르쳤으며 그리스도는 엄격한 심판자로 설명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수도자의 괴로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단지 선만을 행하지 못하고 죄를 범한 다는 것은 엄격한 심판자 그리스도앞에 설 수 없으며 그리고 죄로 죽음과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 젊은 남자의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죄와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싸움에 졌고 그토록 갈망하는 구원의 확신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고통속에서 그는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찾기 시작하였고 시편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 시편 31편 특별히 2절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그는 로마서 1장 16, 17절과 함께 이 시편의 말씀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중심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사랑으로 믿음을 통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들의 행위가 아니며 우리들은 선물을 받을만한 공적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은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율법의 실천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오직 믿음으로 쉽게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을 갖게되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들음으로 우리는 믿음을 얻게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사랑과 의로움과 평화와 진리를 이룹니다.
다시 말씀드려: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우리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수도자에게 눈을 돌려봅시다. 그는 1세기의 사도 바울의 신학을 16세기 에 재 발견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신뢰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에게 복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그는 발견하였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하고 의로움으로 깨닫게 되는 능력이 없는 인간이 상실되고 낙심되지 않을 것을 그는 발견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인간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수도자는 복음 안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의로움으로 행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살아계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없이 구원에 이룰 수 없습니다.

도 바울의 시대에 그리고 젊은 수도자가 믿음과 구원에 대해 깨달은 직후 그때 그시절 그 사람들은 말하였습니다: 만약 믿음이 인간을
의롭게 한다면 이를 테면 선한 실천을 하는 것이 필요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복음을 가지고 있다면 율법은 필요 없고
우리들에게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수도자는 올곧게 그러한 의견들을 거부합니다. 율법은 계속 설교 되어 죄인들을 놀라게하고 그들의 죄를 드러내서 회개와 결단을 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에 사랑의 약속도 선포됩니다.
율법이 회개를 이르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있게하여 우리 인간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중심내용을 만나게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의 창조물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로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행하고 모든 실천은 믿음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없이 모든사람들이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만 깨달은 신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어떠한 실천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우리들의 사랑을 채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광을 보여주시고 우리들과 함께 우리들을 통하여 자신의 창조사역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을 도우셨던 것 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실천으로부터 유익함을 얻도록 자유롭게 개방적으로 자연스럽게 돕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선 하심과 사랑이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로 물처럼 흘러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매와 형제 여러분,
오늘 설교 처음에 언급하였지만 그 이름을 여러분들에게 밝히지 않은 그 수도자의 어록으로 결론을 맺으려고합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 입니다. 그의 글들 가운데 한 귀절입니다:
신자는 혼자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이웃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사랑으로 이웃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거합니다.
아멘

<설교후 기도 -이종실 목사>

나님 아버지 우리의 동역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긴 모습이 달라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인 것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하나님앞에 설 수 없는 죄와 허물이 가득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이시간 다시한번 말씀을 통해 확신을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들의 삶이 괴롭고 힘들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스쳐지나갈지라도
그 삶또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계획 하심속에 있음을 이시간 믿습니다. 주의
사랑을 깨닫고 주를 믿는 믿음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주님의 은혜의 마음으로 내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보게 하셔서
우리들이 더욱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고 있는 그 감격의 체험속에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다빗 유레흐 교역자 청빙

한인 공동체 교우 목회 돌봄(체코사회에 필요한), 유학생 성경공부와 활동, 이종실 목사의 목회와 선교사역 협력, 체코 청소년과 체코의 소수민족을 위한 신앙잡지 발간을 위해 체코 교역자 다빗 유레흐를 우리 교회가 전도사님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빗 유레흐는 27세이며 슬로바키아 루터교회 소속이며 까렐대학 개혁신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일꾼을 발굴하고 지원하여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돕는것은 선교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한국교회의 목회와 선교정신을 배워 훌륭한 주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우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정미현 목사님 주일 설교

오늘(4월 14일)설교해 주신 정미현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미현 목사님은 한국기독교 장로회 목사님이시며
바젤에서 공부를 하시고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가르치시며
현재 금년 8월까지 스위스 개혁교회의 초청으로
스위스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스승이신 세계적인 체코신학자 로흐만 교수님의 80회 생신축하 기념강연회에 초청을 받아 오셔서 저희교회가 목사님을 모시게되었습니다.

좋은 말씀 들려주시고 교제를 나누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4월 운영위원회

4월 운영위원회 회의결과를 알려드립니다

1)4월 7일 13시 30분 지하식당에서 (직책생략, 무순) 송종식, 강동주, 권영봉, 안정숙, 김만석, 이종실 (노윤택) 위원들이 참석.

2)중고등부 성경공부반 활동비 340꼬룬 청원(교육부 안건)은 허락하되 체코학생들도 초청하여 함께 활동하기를 권면하며 추가경비가 생기면 함께 지출하기로

3)5월 12일 어버이주일 야유회 예배를 작년과 같이 드리며 계획을 선교부가 맡기로

4)주방살림 물품구입(재정부 안건)은 월별 일괄 구입키로

5)6월 암창 찬송가 경연대회준비 점검

6)이종실 목사의 이름으로 은행구좌를 개설 매주 입금하고 헌금 보관이 불가피한 경우를 위한 금고 구입(재정부)

7)김성래 교우 격려금 15,000꼬룬 추인(재정부)

8)한인 공동체 교우 목회 돌봄(체코사회에 필요한), 유학생 성경공부와 활동, 이종실 목사의 목회와 선교사역 협력, 체코 청소년과 체코의 소수민족을 위한 신앙잡지 발간을 위해 체코 목회자를 채용(목회자 안건)의 건은 허락하고 월 5,000꼬룬 지원키로.

끊임없는 희망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14일)
  • 히 13:20-21
  • 설교자: 정미현

02.04.14 부활절후 두번째주일
설교자 정미현 목사
본문: 히브리서: 13: 20-21
제목: 끊임없는 희망
장소: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성경본문>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케 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아름다운 주일에 제 스승이신 로흐만(Lochman) 교수의 80회 생신 기념회가 있는 그 분의 고국에 올 수 있게 되었고 또 여러분과 함께 본문말씀을 나눌 수 있는 이러한 자리가 허락되어 감격스럽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역사라는 단어는 영어로 history입니다. 미국 여성신학자들이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에 의하면 역사란
남성들의 이야기( he-story) 였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남성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이와는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여성들도 교회안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였고 헌신적으로 일하였으나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하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세기에 살았던 한 여성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노르비취의 줄리안이며, 14세기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도 흑사병이 심하게 퍼져 있었고, 전쟁과 기아가 만연한 시기였습니다.
이로인하여 심한 절망감이 사람들 사이에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운 고난의 상황 속에서 줄리안은 신비주의적 은둔가로 영국의 노르비취 라는 곳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1373년 5월에 그녀는 심한 병을 앓게 되고 난 뒤에 특별한 환상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 권의 책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 책은 짧고 간결한 반면에 두 번째 책은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적고, 이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 권의 책 전체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은 다름아닌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표현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줄리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운 어머니로 묘사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자궁 속에서 키워내고, 심한 고통가운데 출산하고 젖을 먹여 키우듯이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어머니와 같이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성서본문에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중심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시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가운데 이들이 신앙 안에서 굳건히 서도록 권면하는 글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부활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삶의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줍니다.

우리가 격게되는 크고 작은 고난의 문제들에서 우리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의 근원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고난과 악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믿음가운데 살 수 있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희망하는 믿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매순간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의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서두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며 서두르며!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줄리안은 그녀의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All schall be well. All manner schall be well.”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갈 것입니다.

이 문장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이 문장은 전혀 낭만적이거나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잘 될 것이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한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악의 문제에 굴복하지 말고 고난의 상황을 이겨나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어딘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태야 한다거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분의 십자가의 사건은 유일회적이며 온 시간 속에 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없고, 단지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또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서로 서로 희망을 불러넣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줄리안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전쟁과 가난과 질병이 만연한 시기에 주변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안하였고 삶의 용기를 불러 넣어 주었습니다.
이 말은 결코 값싼 심리적 위안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내이곤 하는데 그러면 새 힘을 얻곤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주술적 힘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우리도 바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단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의 상황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세상의 삶 가운데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의 상황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항상 중요하고도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싸구려의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써서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발을 디디고 계신 바로 이 나라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고백하며 악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 채로 화형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믿음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후스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극적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 본문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로 이끄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순간에라도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빗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난은 항상 우리 삶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나락속으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우리는 걱정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나락으로 떨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믿음 가운데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함 없이 이국 땅에서의 여러분들의 삶이 날마다 더욱 풍요로와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