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운영위원회

4월 운영위원회 회의결과를 알려드립니다

1)4월 7일 13시 30분 지하식당에서 (직책생략, 무순) 송종식, 강동주, 권영봉, 안정숙, 김만석, 이종실 (노윤택) 위원들이 참석.

2)중고등부 성경공부반 활동비 340꼬룬 청원(교육부 안건)은 허락하되 체코학생들도 초청하여 함께 활동하기를 권면하며 추가경비가 생기면 함께 지출하기로

3)5월 12일 어버이주일 야유회 예배를 작년과 같이 드리며 계획을 선교부가 맡기로

4)주방살림 물품구입(재정부 안건)은 월별 일괄 구입키로

5)6월 암창 찬송가 경연대회준비 점검

6)이종실 목사의 이름으로 은행구좌를 개설 매주 입금하고 헌금 보관이 불가피한 경우를 위한 금고 구입(재정부)

7)김성래 교우 격려금 15,000꼬룬 추인(재정부)

8)한인 공동체 교우 목회 돌봄(체코사회에 필요한), 유학생 성경공부와 활동, 이종실 목사의 목회와 선교사역 협력, 체코 청소년과 체코의 소수민족을 위한 신앙잡지 발간을 위해 체코 목회자를 채용(목회자 안건)의 건은 허락하고 월 5,000꼬룬 지원키로.

끊임없는 희망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14일)
  • 히 13:20-21
  • 설교자: 정미현

02.04.14 부활절후 두번째주일
설교자 정미현 목사
본문: 히브리서: 13: 20-21
제목: 끊임없는 희망
장소: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성경본문>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케 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아름다운 주일에 제 스승이신 로흐만(Lochman) 교수의 80회 생신 기념회가 있는 그 분의 고국에 올 수 있게 되었고 또 여러분과 함께 본문말씀을 나눌 수 있는 이러한 자리가 허락되어 감격스럽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역사라는 단어는 영어로 history입니다. 미국 여성신학자들이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에 의하면 역사란
남성들의 이야기( he-story) 였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남성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이와는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여성들도 교회안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였고 헌신적으로 일하였으나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하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세기에 살았던 한 여성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노르비취의 줄리안이며, 14세기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도 흑사병이 심하게 퍼져 있었고, 전쟁과 기아가 만연한 시기였습니다.
이로인하여 심한 절망감이 사람들 사이에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운 고난의 상황 속에서 줄리안은 신비주의적 은둔가로 영국의 노르비취 라는 곳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1373년 5월에 그녀는 심한 병을 앓게 되고 난 뒤에 특별한 환상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 권의 책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 책은 짧고 간결한 반면에 두 번째 책은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적고, 이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 권의 책 전체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은 다름아닌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표현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줄리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운 어머니로 묘사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자궁 속에서 키워내고, 심한 고통가운데 출산하고 젖을 먹여 키우듯이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어머니와 같이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성서본문에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중심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시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가운데 이들이 신앙 안에서 굳건히 서도록 권면하는 글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부활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삶의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줍니다.

우리가 격게되는 크고 작은 고난의 문제들에서 우리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의 근원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고난과 악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믿음가운데 살 수 있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희망하는 믿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매순간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의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서두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며 서두르며!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줄리안은 그녀의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All schall be well. All manner schall be well.”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갈 것입니다.

이 문장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이 문장은 전혀 낭만적이거나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잘 될 것이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한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악의 문제에 굴복하지 말고 고난의 상황을 이겨나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어딘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태야 한다거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분의 십자가의 사건은 유일회적이며 온 시간 속에 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없고, 단지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또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서로 서로 희망을 불러넣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줄리안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전쟁과 가난과 질병이 만연한 시기에 주변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안하였고 삶의 용기를 불러 넣어 주었습니다.
이 말은 결코 값싼 심리적 위안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내이곤 하는데 그러면 새 힘을 얻곤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주술적 힘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우리도 바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단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의 상황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세상의 삶 가운데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의 상황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항상 중요하고도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싸구려의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써서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발을 디디고 계신 바로 이 나라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고백하며 악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 채로 화형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믿음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후스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극적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 본문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로 이끄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순간에라도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빗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난은 항상 우리 삶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나락속으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우리는 걱정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나락으로 떨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믿음 가운데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함 없이 이국 땅에서의 여러분들의 삶이 날마다 더욱 풍요로와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믿는 자가 되라

  • 연합 예배 (2002년 04월 07일)
  • 요 20:19-31
  • 설교자: 이종실

02년 04월 07일 (부활주일)
설교본문: 요한복음 20장 19-31절
설교제목: 믿는 자가 되라

<본문>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

우리들은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를 본 것을 그에게 말했을 때 ”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도마는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 후 제자들은 함께 다시 모였을 때 이때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 도마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의 난해한 부분입니다.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후 그는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믿지않은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여기서 체코어 성경 번역과 한국어 성경번역에 차이점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체코어로 Nepochybuj a ver! (직역하면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믿어라!)
한국어 성경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을 직접 체코어로 바꾸어 보면 (Nestan se nevericim, ale vericim.)

제 생각에 의심 많은 도마는 헬라어 본문의 잘못된 오역입니다.
의심하는 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무언가 잘못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과 같고 반신반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믿음에 대한 설명은 어느날 도움을 위해 예수에게 온 어떤 사람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개역한글판 막 9:24)”
믿는 것과 아직 믿음 없음이 동시에 가능합니다.
믿음 없음은 믿음의 진실함을 유지하는 믿음의 요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자신의 책 믿음의 역동성에서 낡은 믿음은 죽어야 하고 믿지않은 것에 의해 먹혀 사라져야 새롭고 더 깊은 믿음이 탄생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예수는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믿지않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 없음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그늘지게 하지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나자 그가 즉시 믿게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는 정확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를 보는 것이 그가 믿게 된 이유라는 주장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상처를 직접 보고 예수가 도마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확신한 도마는 그를 믿게 됩니다

도마가 제자들의 친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주장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그들 모두가 믿었다면 그 역시 믿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그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도마가 믿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는 무언가 불충분하게 느껴집니다.
진짜 대답은 그 본문 그 자체에 있습니다.
도마가 있지않았을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숨을 쉬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버지는 나를 보냈고 나는 너희들을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가 이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명령과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에서 성령은 도마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었고 다음 일요일에 그 씨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는 성령이 다른 제자들의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에게 믿음을 창조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과 다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기독교 믿음을 잘못이해하고 있었다면 이 부활의 계절에 바른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나의 힘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힘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 한마디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고백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신것입니다.

우리의 간증,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와 성만찬, 우리의 모든 봉사가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버릴 수도 그리고 다시 생기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창조하는 활동을 하시도록 두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주위에 다시 모여드는 시간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으로서 우리들에게 오시는 때입니다.

부활절은 우리들의 기운 빠진 믿음을 다시 기운 넘치게 하는 기회로 삼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성령이 세상 안에서 믿음을 새롭게 하게하는 수단을 교회가 제공하는 때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우리의 의심을 버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성령이 우리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믿음을 세우는  절기입니다. 아멘

<함께 하는 유럽 한인 교회> 소식

<함께 하는 유럽 한인 교회> 처음 모임부터 참석한 우리교회입니다. 추진위원들께서 후속 모임을 위해 많이 수고하고 계십니다. 첨부한 화일의 내용을 꼭 확인해 보시길 바라며 유럽교회와 한국교회의 역사의 한페이지를 열어가는 추진위원회의 준비와 그 행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함께 하는 유럽 한인 교회
Korean Churches Together in Europe (KCTE)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 2:21)

지구화(Globalization)와 더불어 유럽은 점점 여러 종족들이 함께 사는 복합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약 30여년 전부터 유럽에 대거 이민 오게 된 한국사람들도 이 유럽의 복합사회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 중 기독교인들은 한인교회를 세웠고 이제 한인교회는 유럽 전역에 존재하면서 한인들의 신앙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인교회는 모국교회의 분열로 인해 유럽에 와서도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각각 독립적으로 때로는 경쟁적으로 존재하여 왔습니다. 또한 한인교회는 유럽사회 속에 있으면서도 섬처럼 따로 떨어져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예배당을 빌려쓰고 있는 몇몇 유럽교회를 제외하면 유럽교회도 멀리 한국에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정작 바로 옆에 있는 한인교회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는 국경, 인종, 언어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의 우주적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외인(外人)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라고 천명하며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9-22)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적 도전은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과 더불어 여러 인종이 한 사회구성원으로 복합사회화 되어가고 있는 유럽에 있는 교회들에게 심각한 신학적 교회론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유럽에 사는 한인교회와 많은 소수 민족 신앙공동체는 유럽에서 외인(外人)으로 존재해야 합니까? 유럽 현지 교회에게 이들은 영원히 손님입니까? \”너희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동일한 권속\”이란 성경의 선언은 오늘 유럽 현지교회와 한인교회 등 소수 민족 신앙공동체에게는 어떻게 적용됩니까? 유럽의 세속사회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화폐를 통합하고 유럽공동체(EU)를 구성했습니다. 세속 사회가 이렇게 함께 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결단을 하는데 하물며 우주적으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진 교회는 아직도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각각 떨어져 있는 모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고사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치 못한 모습이 아닙니까? 유럽교회가 소수 민족 교회를 동일한 시민으로 하나님의 한 권속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는 한인교회들끼리 먼저 연결되어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학적 명령과 시대적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지난 2001년 6월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과 존녹스 국제개혁쎈타 후원으로 유럽에서 사역하고 있는 여러 한인교회 관계자들과 한국교회 대표, 유럽의 현지교회 관계자, 미국과 일본의 한인교회 대표들이 함께 모여 \”재유럽한인교회 선교협력을 위한 신학협의회\”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30 여년 동안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해 왔던 한인교회들이 공 교회 차원에서 함께 자리한 것이 처음이고 동시에 유럽교회 관계자들과 더불어 한인교회와 유럽교회의 협력을 범 유럽적 차원에서 논의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협의회 참석자들은 유럽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지 말고 하나로 연결되어 함께 복음을 증거하고 명실공히 유럽교회와 공동으로 유럽선교에 나서야 한다는 시대적 부름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함께하는 유럽한인교회\”라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함께하는 유럽한인교회\”는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어떤 조직이나 기구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어 누구든지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운동으로서 개 교회가 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완전한 자율권을 가지며 참여할 수 있는 운동입니다.
\”함께하는 유럽한인교회\”는 조직이나 기구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조직유지를 위한 많은 재정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주 재정적 필요는 2003년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독일에서 가질 예정인 신앙축제(Faith Festival)와 같은 행사가 있을 때 본 교회의 교우들의 참여와 공동 프로그램을 위한 재정적 필요일 것입니다. 그 외에 소식지 발간, 회의를 위한 최소한의 경비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회나 개인이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차원에서 하는 지원금을 통해 진행하려고 합니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기 위해 핵심봉사자로 참여하는 분들은 그 해당교회가 회의비용이나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시면 충분할 것입니다.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분이나 공동체 교회들의 자발적인 기부는 운동을 위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현재 \”함께하는 유럽한인교회\” 추진위원회에는 감리교, 예장통합, 구세군, 예장합동, 기장, 예장고신 출신 목회자가 함께 참여하고 있고 하나님의 성회, 성결교, 침례교 출신의 목회자들도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은 대부분 목회자는 목사안수 받은 교단적 배경이 있으나 교회 자체는 한국의 교회와는 달리 초 교파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한인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함께하는 유럽한인교회\”는 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활발히 참여하는 운동을 지향합니다.

\”함께하는 유럽한인교회\”는 유럽에 존재하는 각 교파 노회나 총회는 물론 지금까지 뜻 있는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 온 목회자의 친교나 유학생들의 신앙부흥을 위한 모임들의 의도를 존중하며 이런 기존 모임들과 더불어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갈6:2) 함께 협력하여 유럽의 한인교회가 하나되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교회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 종교개혁을 하면서도 교회일치를 강조했던 칼빈은 교회는 \”함께 호흡\”(Pia Conspiratio)해야 하는 나뉘어 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함께 호흡하고 함께 선교하는\” 운동에 귀 교회와 귀하가 주도적으로 손을 함께 잡아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교회는 아래에 서명한 봉사자들에게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는 유럽 한인 교회                                                                     함께 하는 유럽 한인 교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사하는                                                      추진위원회 총무로 봉사하는

박 성 원 목사                                                                                          김 동 욱 목사
Rev. Dr. Park Seong-Won                                                                  Rev. Kim Dong-Wook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Sandstr. 46
P.O.Box 2100                                                                                       D-40764 Langenfeld
150, Route de Ferney                                                                         Germany
1211 Geneva 2                                                                                      Tel : (+49-2173) 10841
Switzerland                                                                                          Fax : (+49-2173) 10823
Tel : (+41-22) 791 62 36                                                                    E-mail: dong.kim@pironet.de
Fax : (+41-22) 791 65 05
E-mail : parkswon@hotmail.com

 

아웃사이더 <해리포터>

나눔터 제 23호 2002년 4월호

<살며 생각하며>

아웃사이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두 편의 외국영화가 체코 극장가를 강타한 유래 없는 역사를 이루었다. 영화배급소의 통계에 의하면 개봉 4일만에 전국 160개 극장에서 93 605명이 관람하고 950만 꼬룬의 입장료를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반지의 제왕>은 첫 주에 관람객 12만명 돌파 1,300만 꼬룬 입장료 수입을 차지 <해리 포터> 를 앞질렀다. 이 흥행은 나의 피부에 와 닿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표를 예매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한편의 영화를 보기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을 만큼 영화광이 아닌 필자는 자연히 상대적으로 손 쉽게 볼 수 있었던 <해리 포터>로 눈을 돌렸다.

영화 <해리 포터>는 46개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1억1천만부 이상 팔린 조앤 K. 롤링의 소설 첫번째 이야기이다. 해리 포터라는 한 고아소년이 11살 생일에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 놀라운 마법 세계에서 짜릿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제작 때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소설 속의 환상과 마법의 세계를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 무려 1억 6천만 불이 투입되고 영국 런던 근교에 ‘호그와트 마법학교’ 세트장이 완벽하게 마련되고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술, 특수효과에 천문학적인 투자가 있었다고 한다.
영화는 영화자체로 감상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몇 가지 해리의 모티브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어느 사회에서나 아웃사이더 였다. 아웃사이더인 그의 이미지는 갸름한 얼굴과 가느다란 다리, 새까만 머리카락에 연한 초록 눈에 동그란 안경을 낀 해리 포터 역을 한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외모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유약하고 저항할 줄 모르는 그는 고아로 이모의 집에서 학대를 받으며 살고있지만 무엇인가 신비한 기운에 둘려 있는 느낌을 준다. 이모 가족의 학대는 해리를 절망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해리의 미래를 드러내 주고있다.

영화 속에 드러나는 해리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죽은 부모와 동일화 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효가 아니라 해리는 부모와 자신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를 이어 유명한 마법사로 탄생한 것도 그렇다. 그리고 해리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꿈의 세계로 늘 도피한다. 강자는 자신의 의지에 기대지만 약자는 비전에 의지한다. 그리고 해리는 자신의 친구를 아웃사이더 가운데서 발견한다. 생선을 뼈와 살로 나눠 회 치듯 인생을 그렇게 나눌 수 없지만 해리와 같은 아웃사이더 인생들에게는 그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선과 악, 성공과 실패가 더 분명하게 구분된다. 약자들 앞에서 분장할 필요가 없는 강자들의 심리와 감추어진 발톱을 그들은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테러와 보복전쟁은 색깔만 다른 같은 폭력이며 보복전쟁은 사랑의 매가 아닌 것을 아웃사이더 인생들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약자들은 악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것과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호 협력과 연대 속에서 물러서지 않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약자들의 승리는 친구들의 승리, 협력과 연대의 승리이다.

4월!
부활의 계절에 아웃사이더 해리로부터 묵묵히 고난을 받고 부활의 승리를 노래하는 아웃사이더 예수와 역사 속의 그의 사람들이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목사 이 종 실(나눔터 발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