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교회예산 증가

국가가 교회들에게 지속적으로 예산을 증액하고있다.

(체코에 이미 10년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로 부터의 교회 재정 분리는 여전히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교회로부터 국가 분리는 단지 체코 기관에 뿌리내려졌을뿐 재산 반환과 재정적인 대안에 대한 질문은 계속 해결되지 않고있다. 더 무신론적 경향이 강해가는 체코는 정부가 교회의 활동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는 몇 안되는 국가에 계속 속해있다.

국가는 교회에게 그리고 종교단체에게 문화재 관리를 지원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다른 사회자선 활동에 지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설립한 학교들에 대해서도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국가는 금년 목회자와 그들의 행정비 그리고 건물 유지를 포함한 관리비에 작년대비 50million꼬룬이 증액된 740 million꼬룬을 교회의 예산으로 지원하였다. 교회에 지원한 전체예산 가운데 거의 90퍼센트가 목회자들의 봉급이다.

“국가에 의한 목회자의 재정지원은 이상적인 형태가 아니나 그 문제의 해결은 시간이 필요하다. “ 비숍 컨퍼런스 대변인 다니엘 헤르만이 말했다.

신자의 숫자가 인구조사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1/4 즉 3백만명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신자들과 종교단체 종사자들의 대부분은 국가가 등록된 교회들이나 종교단체들에게 재정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목회자들의 숫자이다.

1989년 이후에 개정된 새로운 법에 의하면 교회들이 이 목회자 숫자를 정한다. 국가가 어떠한 경우에도 이 숫자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목회자의 숫자는 작년에 증가되었다. 금년에 2000년과 비교해서 1/10 증가하여 3651명으로 증가하였다.

21개의 등록된 교회와 종교단체 가운데 국가 예산의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 단체는 단지 몰몬교회, 여호와의 증인, 신 사도교회 등이다.

교회에 대한 국가 예산과 목회자(카톨릭 신부 포함) 숫자
교회활동에 대한 국가 지원 689 million 꼬룬 (2000년) 740 million 꼬룬(2001년)
이 지원금에서 목회자 봉급 570 million 꼬룬 (2000년) 635 million 꼬룬 (2001년)
목회자 숫자(국가 예산 지급자) 3330명 (2000년)3651명 (2001년)
* 목회자의 기본 봉급은 5780꼬룬부터 13600꼬룬까지 이다.
(2001년 9월 20일 인민일보 기사)

야곱의 결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23일)
  • 창 29:20-35
  • 설교자: 이종실

01년09월23일
삼위일체 후 열 다섯번째 주일
본문 창세기 29장 20-35절
제목 “야곱의 결혼”

<공동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부족함까지도 용납하시고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겸손을 배우게 하시며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본문>
“야
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찾으니 애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와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창 29:20-25)

<설교>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테러와 그에 따른 보복전쟁이 선포되어 지금은 전쟁 아닌 전쟁의 공포에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전 통보 없이 공격하겠다.” “보복은 테러를 뿌리

기위해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쟁은 장기간 지속될것이다.” “미국의 보복 전쟁에 협조한 나라들을 보복을 하겠다.” 이전
전쟁과 달리 전쟁의 상대가 불분명해서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러리즘과 패권주의와의 이번 전쟁은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전쟁 심리전을 펴고있습니다.

은행창구는 연일 돈을 인출하는 사람들로 붐벼 미화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인출신청을 하고 이틀 뒤에나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와 남미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국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럽경제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새 밀레니엄의 시대가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 처럼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년 초의 화려한 행사들은 결국 어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이벤트 행사에 불과했음이 새 밀레니엄의 첫해도
넘기지 못하고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 개인들의 삶은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한조각의 나룻배와 같은
처지입니다.

우리들의 가치관과 삶의 의지가 세파의 흐름에 의지하고있습니다. 세파의 흐름에 우리들의 삶이 독립적이지 못하기에 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에 의존적인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은 어떻게 성취되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야곱의 결혼 이야기를 통해서 이 아침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낯선 땅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약 700키로미터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벧엘” 이란 곳에서 야곱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28장 14-15절)  여행의
목적지인 외삼촌 라반의 집, 하란에 도착한 이야기가  창세기 29장 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저자는 많은 야곱의 하란 도착 소식
가운데 하란의 우물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구멍을 향해 공을 몰고 가는 골퍼들 처럼 우리
하나님은 야곱을 700키로 미터 떨어진 마지막 종착지 하란 그 중에서도 우물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란
도착 첫 이야기가 외삼촌 라반의 만남이나 그의 집 아니면 하란에 있던 하나님의 제단이 아니라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은 사막
여행길을 가는 나그네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우물에서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고 이 만남은 그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물가에 물을 기르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녀의 미래를 예언하는 또 다른
우물이었습니다.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생의 물을 주는 우물, 예수 그리스도곁에 우리들은 교회로 모여있습니다. 교회가
야곱에게 약속한 축복을 성취해 가는 하나님의 첫 인도지 우물가임을 발견하는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세기 저자는 29장 야곱의 하란 도착 장면을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1-2상반절)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야곱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물을 야곱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교회를 하나님의 복의 시발점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란에서의 자기의 인생을 결정짓는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납니다. 우물 아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을 치우고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라헬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먼
여행길을 틀리지 않게 목적지 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목적을 했던 사람을 찾았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생각지 않던 일가 친척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헬도 너무 기뻐 야곱의 소식을 달려가서 아버지 라반에게 전하였습니다. 라반의 기쁨도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달려가 야곱을
환영하고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야곱은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여행길, 형의 복수의 두려움을 다 잊을 만큼
기뻣습니다.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기쁨은 또 다른 고생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야곱에게 라반의 집에서의 삶은 인생을 새롭게 배우는 여정의 시작을 의미하였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입니다. 야곱은 뼈중의 뼈 살중의 살인 아내를 얻는 대가로 일을 시작합니다.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라반이 허락을 합니다. 언니 레아가 있었지만 야곱은 하란에 도착해서 처음
우물가에서 만난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사랑하였기에 칠년을 하루같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라반을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칠년의 노동은 단지 노동의 가치만을 지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라헬과 가정을 이룬 후 낯선 곳에서 살아갈 야곱의 꿈과 인생의 계획을 수없이 그려보고 지우고
다시 그려본 세월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자신의 기다림과 희망이 사기 당하는
날이었습니다. 학벌과 이력과 출신과 가문을 속이고 한 결혼의 결과가 가져다 주는 인간적인 배신감과 심리적인 충격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날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쳐 나온 악몽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형 에서를 속인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의 결혼의 기준이 잘못된것일까? 아니면 내가 라헬을 사랑하지만 레아와 결혼할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야곱이었더라면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에 대해 당혹스러운 장면을 접하게
됩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그의 복을 탈취한 사기꾼 야곱이 자신을 속인 라반에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질문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삭의 시각장애를 이용하여 그를 속인 것 처럼 라반은 야곱이 어두운 장막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야곱을
속였습니다. 분명 이 사기사건을 통해 형을 속인 자신의 과거가 한번쯤 기억났을것임에도 불구하고 라반이 자신을 속인 것을
따집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인생에 대해 한번쯤 뒤 돌아 볼만도 한데 그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던 본래의 자신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7년을 라반을 위해서 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리도 야곱처럼 무엇인가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과 함께 그
상황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어떤 경우엔 하나님에게 항의도 하고 기도로 간구를 하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하기보다 오직 라헬을 아내로 삼고 싶은 자신의 생각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원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무려 14년을 보내기로 작심을 하고 있습니다.


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입버릇처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저와 여러분에 대해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고 계실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하지만 야곱처럼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게으름, 자신의 잘못을 모두 정당화 시키는 일을 서스럼 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신의
뜻으로 자신들의 테러를 정당화 합니다. 이 테러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는 미국 대통령은 정의를 위한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견주어 볼 때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야곱이 더 인간미가 넘쳐보입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아버지의 신체장애를 이용해 아버지를 속인 사기꾼 야곱은 바로 우리들의 얼굴이요 우리들의 이름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기꾼 야곱의 얼굴에 하나님의 뜻으로 분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를 알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자 청년처럼 거듭남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교리화 시키고있습니다.


자가 아버지를 떠나갈 때 아버지와 단절을 한 것도 아니고 스캔들때문도 아니며 탕자가 탕자가된 것은 아버지것을 잘못 사용하였던 것을
알기에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은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빌려 그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하고있습니다.


간들이 자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떨치기 위해 바벨탑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아는 오늘날 신자들이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내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전히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해보려는 인간의 모습을 신의 이름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정말인 것처럼 말해도 듣는 사람은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빈말인지 느껴집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하는 우리들의 신앙행위가 자기의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야심찬 행위는 단지 야심 찬 마음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을 가증스러운 우리들의 얼굴을 우리 하나님은 피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야심들은 고통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하나님이 거두어 주십니다.

레아는 라헬처럼 매력이 있지않았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것은 인생의 현실입니다. 언제나 사람의 등뒤에 서있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고통스럽고 이해하지 못하는
질서가 존재합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남편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그녀는
마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남편에게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아기를 잉태하지 못하였다.”(31절)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고 그리고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무언가 희망의 요소들이 있는
우리들의 인생의 현장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야곱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빚어진 상황에 직접
개입하고 계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레아를 버리지않으셨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의 아픔을 아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아들을 계속해서 넷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정하지 않았지만 30장
1-2절에 이 일로 라헬에게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나고 급기야 야곱과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14년을 기다리고 일해도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던 라헬 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던 그때 처음에 라헬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처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처음처럼 지속됩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부유함과 가난이 길고 짧은 시간으로 반드시 교체되며 지나갑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이 있었고 레아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기에 커다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자녀들의 출생에 늘 하나님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후에 라헬에게도 레아 처럼 하나님께서 아들과 딸을 주셨습니다. 모든 아들들이 하나님의 백성 곧 12지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그리고 그 추구의 방식과 가치관이 그리고 삶의 위치가 각기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신 약속하신 복을 성취해가는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가르침의 의미를 자신의 삶 속에 뿌리내려
사기꾼 야곱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둡고 잘생기지 못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의 몸에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였습니다. 레아의 몸에서 난 유다는
누구입니까? 12지파 가운데 그가 바로 다윗의 조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의 시작이었습니다.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계획을 통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못생기고 눈도 나빠 사랑 받지 못하던 야곱의 여인 레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문,
유다를 탄생시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차근 차근 진행시켜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라하 꼬빌리시 교우여러분,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 신뢰할 수 없는 라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레아, 곱고 아리따워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나 아이를 낳지못해 질투와 시기심에 가득찬 라헬,
서로 속고 속이고, 갈등과 분쟁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공동 운명의 창세기의 인간사회를 저와 여러분들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우리들의 모습과 다른점이 없음을 우리들은 이 아침에 발견하였습니다.


리고 놀라운 사실을 우리들은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한 야곱과의 약속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장 14-15절) 이
약속만이 부족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욕망과 갈등과 불화를 통해 하나 하나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오늘
아침 우리들은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성취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 불신앙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고 못생기고 눈이 나쁜 레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한 채 라헬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인간계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야곱의 운명은 광야에서
제단을 쌓던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들의 믿음, 우리들의 헌신, 우리들의 기도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설교 후 기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우리들을 통해 세상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신앙과 헌신과 노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임을 저희들이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따를 때 우리들의 믿음과 헌신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며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위탁의 말씀> 고린도후서 6장 17-18절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보리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16일)
  • 욥 19:1-29
  • 설교자: 이종실

일시: 01년 09월 16일 (삼위일체후 열네번째 주일)
본문: 욥 19장 1-29절
제목: “하나님을 보리라”

<공동기도>

우리들의 희망이 되시는 주님,
세상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탄식하지 않게하옵소서.
오직 우리의 구원자 주님 한 분만을 바라는
희망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설교 본문>

“나
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설교 본문에서 21-26절만)

<설 교>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이곳에 와서 정착을 할 때 우리들에게 많았던 꿈들이 날이 갈수록 꿈의 성취라는 희망보다 점점 좌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간이 흐를수록 어려워 지는 경제여건, 점점 많아지는 학업의 제약들, 높아만 가는 물가, 외국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쇠약해져 가는
육신, 자주 찾아오는 크고 작은 질병들, 이룬 것 없이 성큼 흘러버린 세월들,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나오면 넓은 곳에 나와서 많은
경험들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삶 보다도 더 어둡고 좁고 편견된 삶, 왜소 해져가는 인격  그래서 안정을 찾아가기
보다 점점 불안해 지는 마음이 찬바람이 불자 왠지 더 쫓기는 느낌이 듭니다. 불안정하고 보장이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믿음 하나로 고통을 이긴 욥의 믿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을 보리라”로 정해보았습니다.

 

은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욥처럼 애매하게 불행을 당한 사람은 성경에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욥을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억울하고 불행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단의 시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은 아들이 일곱, 딸이 셋
모두 10남매를 둔 다복한 가정에 양이 7천, 약대가 5천, 소가 1천 마리, 나귀가 5백 마리인 대 부호였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 스바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이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가고 천지지변으로 남은 가축과 자녀들이 몰살하는 사건들이 순식간에
숨돌릴 사이 없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욥은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욕창이 나서 가려움증을 견디지 못해 부서진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었습니다.

그 때 욥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들은 온 몸의 욕창으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버린 욥을 발견하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욥과 함께 땅에 앉아서” 욥의 고통을 말없이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욥1:12-13) 

욥의 고통에 동참하는 세 친구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진솔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곱낮 일곱밤을 욥과 함께 땅에 앉았다는 것은 세 친구들이 욥과 함께 지낸 기간이 일주일이란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의 의미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재산과 아름다운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머리끝부터 발바닥 까지 질병을 얻자 형제들 친척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심지어 아내까지 멀어진
상황에서 그래도 그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친구들었습니다. 이처럼 세 친구들은 욥의 처지를 공감(共感)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친구라고 하면 인간적인 우정에 끌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아첨하는 그런 폐쇄된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패거리들이
나쁜 일을 도모하면 마피아라고 우리들은 부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런 패거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성품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욥의 친구들은 참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욥, 이세상에 죄 없이 망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직한 사람이 잘못된 것을 보았는가 그래 너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치더라도 너가 정말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게 죄를 짓는 거야. 너의 불행은 너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야.” 욥에 대한 친구들의 권면은 비난이 아니라 빨리 회개하고 다시 행복한 모습을 찾기를 원하여 친구를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을 향해 욥이 탄식을 했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19:22-24) 안타까운 탄식입니다. 서로의 신뢰가 깊으면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데 서로 신뢰하기에 더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인간 관계의 한계를 우리들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어떠한 고통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이 있어도 완벽한 이상적인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오늘 말씀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비신앙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꺼내려면 손가락을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처럼 죄와 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보편적인 죄와
벌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겪고 있는 죄와 고통간의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다고 욥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고 욥은 말합니다. 이 욥을 친구들은 설득을 합니다.
욥을 설득해 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 아니라 연약한 자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신뢰하는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교회의 정신이 무엇인지 가장 잘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 목사인 저와 같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오늘 우리는 욥과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마치 정신병자와 같았습니다.
갑자기 견디기 힘든 일들을 겪고 몸의 질병까지 얻고 보니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호
받아야 될 만큼 연약한 사람,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 형제 친척
심지어 아내에게 까지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 욥이 살아계신 구속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누가 훌륭한
의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한 선교단체가 주체가 되어 지역 주민들이 선교사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들이 지역 주민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그들과 똑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해 존중하고 있는 부분과 존중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입고 먹는 습관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 가장 본질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우쳐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시대의 확고한 믿음조차도 부인했던 사람, 몸의 질병과 가난으로
어떤 것을 내다보고 명령하는 능력이 없었던 욥 이지만 그는 구속자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구속자의 희망으로
교회를 생명력 있게 만듭니다. 이들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어 교회를 참 안식과 화해와 사랑의 교제의 장소로 만들어 갑니다.


기 42장 7-9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들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여기서 우리는 욥의 모습을 조금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돌아 보지 않는다는 고통 속에 빠진 시편의 저자 처럼 욥은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응답이 늦어지면 믿음과 확신도 흔들립니다. 고통에 지친 욥은 그래도
끝까지 기도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죽어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통을 끝내기 위해 차라리 욥에게는 죽음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나 욥은 죽음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 긍휼과 이해와 도움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씩 그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오직 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의 구원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절규하지 않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떠나가고 욥 홀로 남아도 그 구원자가 그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통 속에서 오직 구원자를 희망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님도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면서도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를 버리지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으로 욥도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회복되는 희망을 버리지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그의 도움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의 하나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강하게 믿으며
마지막 때 그를 볼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불행을 쫓고 행복을 가져오실 오직 한분 신실한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기도는 욥의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이해와
깨달음을 위한 씨름이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싸웁니다.  그를 고통 속에 던진 이유에 대한 욥의 질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혜는 제한되어있고 우리들의 깨달음은 단지 부분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들이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들 스스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들에게 진리와 지혜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욥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마다 하나님을 보겠다는 욥의 이 희망을 기억하십시다. 고통 속으로, 질병 가운데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내몰고 있다고 느낄 때 바로 여러분들을 참 안식과 화해와 섬김의 교회로 이루고자 중보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
순간 까지 욥처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후 기도>

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가 욥처럼 불안하고 안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을
보리라는 욥의 희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위탁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Open House

프로젝트 Otevreny dum (Open House, 열린 집)

1. “열린 집” 프로젝트란?

<프로젝트의 개념과 목적>
체코형제개혁교단(CCE)과 대한 예수교 장로회(PCK)간의 연합 프로젝트로서 구체적으로 쁠젠의 CCE 의 “꼬란두프 교회”에서 시행된다. 이 프로젝트는 교회가 단지 어떤 필요를 도와주는 차원에 만족하지 않고 교회주변의 매우 다른 사람들과 단체들에 대해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이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들 역시 사회에 열린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 선교이다.

체코교회는 무신론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을 한국교회와 나누며, 한국교회 역시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양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다.

이 프로젝트는 체코교회의 미래를 위한 모델과 동시에 교회의 경험과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공유하며 하나님의 선교를 이룩하는 선교 모델을 모색하는 실험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의 신학적인 토대>
….2001년 1월말 꼬란두프 교회 공동의회에 제출한 내용이다. ….

프로젝트 “열린 집”은 특별히 기독교의 증언 가운데 하나인 “섬김”을 표현하길 원한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 교회 안의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중간장소”가 되길 원한다. 특별히 가난한 계층(소비 또는 문화 생활 등의 다른 삶의 출구가 없는 이들)들에게 교회가 삶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역은 교회가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게토화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말로 “선교적인 목회” 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선교적인 목회“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해 넘쳐나는 정보를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교회로부터 어떤 기본적인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교회는 그들을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다. 교회가 무관심속에 버려두었던 사람들을 만나 “복음(기쁜소식)”을 나누는 희망은 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지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세상에 육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야 한다. 선교적인 목회의 중요한 모습은 강의나 설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 형식 없는 만남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은 이러한 만남의 모든 기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가 없다. “증언자”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교회당과 기도실의 지붕아래 증언자의 보물을 감추지 않아야한다. 욕심 없는 섬김으로 사람들과 즐거운 만남을 이루어야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열린 집”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인포메이션의 차원을 갖는다.

2. 프로젝트 논의 과정
1999년 6월 노아 방주 프로젝트로 논의 – 당시 상담실을 사회선교 프로그램으로 개편
1999 년 9월 전국연합 여전도회 총회에서 프로젝트비 지원키로
1999년 11월 프로젝트의 개념 변화 – “열린 집”으로 프로젝트명 변경
2000년 02월 27일 양교단(CCE, PCK) 대표들의 방문과 예배
2001년 01월 쁠젠 꼬란두브 교회가 프로젝트를 위해 Prokopova 17번 건물제공

3. 지난 1년간 프로젝트 경과 보고
1) 상담실 운영자의 활동이 상담에서 끝나지 않고 치유의 과정으로 목회자와의 연계
2) 상담사례별로 예방차원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강좌 개최
3) 목회자 및 사역자들의 독일과 네덜란드 교회의 사회봉사 프로그램 견학
4) 상담자중 무숙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할 공간확보와 수리
5) 교회의 활동을 대 사회를 향한 열린 프로그램으로의 모색

4. 현재 요청되는 상황
1) 실무간사 채용
가. 지난 1년간 프로젝트의 개념을 구체화 시켜가는 과정으로 꼬르빠 목사와
이종실 목사가 일을 주도하였다.
나. 이제 프로젝트를 확산시켜가는 단계로 풀 타임 직원(가칭 실무간사)이 필요.
다. 실무간사의 일
가) 프로젝트 홍보 – 팜플렛, 홈페이지, 잡지 발간
나)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위한 네트웍 구축 – 방송, 잡지, 신문
인터뷰 및 광고, 사회봉사단체들과의 협력체계 구성
다) 프로젝트 기획 운영 관리 – 노인클럽(매주 월), 청소년 예배(월 1회),
어린이 영어교실(기회중),
라) “열린 집” 공간 개보수와 관리 – 자원봉사자, 기금마련…..
마) 건물 보수후 목회 인포메이션을 위한 시설(찻집, 도서실, 어린이 놀이터) 관리
라. 사례비 책정금 월 10,000꼬룬(실 수령금 7 000꼬룬)
마. 까렐 쉬므르 (남)
1975년 9월 30일 생, 김나지움 졸업후 개혁교회 아카데미 사회복지과 졸, 호스피체 또는 사회보호시설에서 활동을 하면서 long term 과정 찰스대학 개혁신학부에서 공부 현재 4학년이며 신학부 재학중 1년간 찰스대학 의학부에서 1년간 심리치료법 수학.
2) 긴급히 필요한 사무용품 – 컴퓨터와 프린터

4. 프로젝트 맡은이들
이 종실 목사, 루덱 꼬르빠 목사, 까렐 쉬므르 전도사

작성일 2001/2/24
* 이 프로그램은 현재 꾸란두브 교회의 내부사정으로 의견 조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