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3. 생존 투쟁 1949 – 1977

13. 전제주의 통치사회에서의 생존 투쟁 1949년 – 1977년

“공산당의 지도력 아래서의 노동계급에 의해 정부의 모든 권력이 이양되었다.”는 공식적인 선언이 있었던 1948년 2월 정치적 구테타 이후 교회들도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다. 체코 개혁교도들은 자신의 민족의 진보적인 사회주의적 노력에 동감하였기에 사회제도의 올바른 건설에 대한 사회주의적 사상과 포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전제주의 통치의 폭력과 불법으로 체코개혁교도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정치적 반대자로 간주되면 처형되거나 갖히거나 노동수용소 또는 군부대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친척들은 범죄자들이 되었다.

체코형제 개혁교회 뿐 아니라 전 교회적으로 영적 지도자였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요셉 르믈 흐로마드까 (J. L. Hromadka)교수의 활동에 의해 많은 교인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사명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노력 하였다. 기독교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총회에 몇 차례 성명서에서 밝혀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치적 변화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증언을 해야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외적으로 확산되는 무신론주의 그리고 점증 되는 교회에 대한 차별을 기독교 증언의 무관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도움이 제거 되어야만 하는 교회의 시련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자신의 존재 – 그루터기가 되는 것 – 의 새로운 외적 조건을 받아들였다. 복음 전파와 교회의 사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단체 (후스파 종교개혁과 형제단 종교개혁)의 이전 활동과 관련된 “종교개혁의 정신의 연맹(SCED)”이 1952년부터 체코형제개혁교회안에서 활동을 확산시켰다. 목회자들의 신학교육을 지원하고 국내 국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등을 숙고하였다. 외부의 압력이 강화되는 시기에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SCED의 활동은 강제적으로 1974년 내무부의 결정에 의해 막을 내렸다.

60년대에 몇몇 맑스주의 철학자 – 특별히 마호베쯔(M. Machovec)교수 – 교회들 에게 환영을 받은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현대의 형태의 자신의 “헌법”을 갱신하여 1966년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불행하게도 대화의 희망과 정의롭고 인도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어느 하나도 성취되지 못하였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통치원칙으로 선언되고 유물론주의의 무신론이 유일하게 유효한 삶의 관점으로 정착되는 현실이 당시 새롭게 선포된 “사회주의 공화국(CSSR)”의 시대에 많은 교인들에게 사회주의 국가 정책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신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것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 당시 생존을 위해 많은 교인들을 “국내의 이민자”로 그리고 수동적인 “은둔자들”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존재의 순수성과 올바른 기독교의 경향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지속되는 이중적인 노력은 숨김없이 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에서 발표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총회는 각종 교회헌법의 정관과 구체적인 탄원과 청원으로 국가 행정기관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하였다.

1968년 공산주의 체제의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두브첵(A. Dubcek)의 시도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교회에 불러일으켰다. 불행하게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려진 짧은 기간이 쏘비에트 군대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가 체코로 진주하면서 1968년 8월 21일 끝이 났다. 1969년 2월에 열린 체코형제개혁교회 16차 총회가 “우리 민족의 총회”라는 특별 메시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하였다. 그 다음해 전제주의 통치자의 가혹한 형태의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이 공식적으로 “정상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억압은 교인들을 포함한 잠복중인 반 공산주의 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교인으로 1969년 1월 16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얀 빨라흐(Jan Palach) 학생의 희생은 젊은 세대의 내적 저항의 강렬한 표현이었다.

체코슬로벤스꼬 공화국 정부가 서명한 1976년 헬싱키 시민 권리에 대한 국제협정 선포이후 민주화 운동 “77헌장(Charta 77)”의 지지자들이 모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실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77헌장의 일차 서명자들 가운데 체코형제개혁교회의 19명의 목회자와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일터를 떠나야 했다. “77헌장”은 시민의 책임 운동으로서 자유와 민주의 회복을 위한 꿈을 민족적으로 각성 시킨 유명한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힘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인들은 내적 힘의 새로운 필요성과 자신의 교회의 확고한 토대 위에서 영적 방향을 위한 도움을 자각 하였다. 여기서 신실한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와 기독교 목사의 다양한 형태의 목회를 위해 투쟁하였다.

[개혁교회사]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 – 1989

12.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1918년 – 1989년

반 종교개혁이 오랫동안 16세기 체코 개혁자들 사이에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1861년 종교개혁에 대한 칙령이 발표된 이후 체코 개혁 교도들에게 처음으로 외국 자매 교회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었다. 외국의 개혁 교도들은 당시 자신들의 믿음의 체코 형제들과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영적으로 그들에게 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에 지지를 보냈고 물질적으로 도왔다. 1821년부터 외국 대학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개혁 신학부에서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할 가능성이 열린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치관계의 시기에 중단되었으나 후에 다시 재개 되었다.

개혁교회의 교인들은 올바른 에큐메니칼 협력은 체코 국내에서 작은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1905년 프라하에서 후스의 경험으로 “콘스탄츠(후스가 화형을 당한 스위스 국경을 접한 독일 도시)의 연대”라는 상징적인 이름 아래 1주년 체코 국제 종교개혁 단체가 설립되었다. 절대적인 로마 카톨릭 국가 안에서 종교개혁의 단체들이 성장하고 종교개혁의 소수파의 자의식과 그들의 사명이 강화되었다. 이 단체들이 오늘날 다시 많은 에큐메니칼적이고 영적이며 문화적인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과 신학월간잡지 “크리스찬 리뷰”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슬로바키아 개혁 교회들과의 접촉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 접촉은 목회자들의 연합 컨퍼런스를 더 발전시켜 계간지 “Theologia evagelica”(1948-1951)의 발간이 이루어졌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연합되기 이전부터 체코개혁교회는 “세계개혁교회연맹(당시 세계 장로교연맹)”의 회원교회가 되었으며 후에 연합교회로서 “세계 루터교회 연맹”과 “연합교회연맹”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는 기독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활동에 참여 하였으며 특별히 1925년 스톡홀름(Stockholm)회의와 1927년 로잔(Lausanne)회의에 참여하였다. 1948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 1959년부터 유럽교회회의의 회원교회가 되었다.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대표들은 1973년 로이엔베르크 콘코르디아(Concordia of Leuenberg) 준비와 활동 그리고 계속되는 신학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때부터 해외의 개별 자매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과의 교류가 성공적으로 확대되고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에큐메니칼 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1954년 에반스톤의 2차 세계교회협의회 회의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에큐메니칼 교회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의 어려운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교도들은 개혁 교회의 신앙의 토대에서 세계의 사건에 대한 응답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세계평화의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8년 프라하 기독교 평화회의가 조직되었으며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개혁교회는 동서유럽의 개혁교도들의 만남에 의해 폭 넓은 단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전 세계에서 많은 교회들이 이 회의에 참여 하였다. 흐로마드까(J. H. Hromadka) 및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다른 중요한 인사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평화 회의에 참여하였다. 1968년 소위 “프라하의 봄”의 정치개혁이 강제로 탄압된 이후 정치적으로 “정상화(normalizace, normalization)” 운동의 시기에 특별히 이 평화운동은 정부의 간섭과 이데올로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제 3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평화회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내에서 교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협력은 단지 정부기관의 감시 아래에 계속될 수 있었다.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는 실제로 각 회원 교회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존재하였다. 반면 에큐메니칼 교회협의회 몇몇 활동 위원회(특별히 성서와 에큐메니칼 연구를 위한 위원회, 기도 생활 실천위원회, 여성활동 위원회, 성서발전 위원회 – “성서 사역”)는 시들어가는 에큐메니칼 단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9년 말경 형식적인 에큐메니칼 사업은 “우리 역시 사회의 아픔을 외면했고 오랫동안 침묵했었다”는 교회협의회 마지막 회의 성명서로 폐지되었다. 새로운 에큐메니칼 사업은 지역 교회와 개 교회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과제와 협력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교회들 사이의 형식적인 교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교회의 일치에 근거한 새로운 성서연구가 에큐메니칼 관계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형제로써 발견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의미는 일치된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삶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일치된 확신 속에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사]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

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년

1938년까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인숫자는 325,000명으로 늘어났다. 200개 개교회와 219개의 기도처에서 약 200여명의 목회자들이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100개의 교회당이 신축 또는 개축되었다. 이어지는 독일 파시스트 위협의 시대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와 정치 문제들이 교회의 과제로 다루어져야 했다.

1938년에 서유럽 강대국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화되는 압력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에 의해 3백만 명 수데텐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분리와 나찌 독일 제국의 합병 동의를 하였다. 이 수데텐 지역의 체코인 거주민들은 체코와 모라비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1939년 3월 그러나 히틀러는 나머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위 “보호령”이란 법규는 6년간의 독일 나찌 점령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6개월 후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체코와 모라바의 보호령”이 존재하는 엄격한 독일 통치하의 체코 영토 전역에서 전쟁의 요인이 잠복 되어 있었다. 게슈타포에 의해 지도되는 나찌들이 여기서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유태인들은 제거되었고 체코 민족의 모든 계층들 특별히 지식계층은 강압에 굴복하였다.

교회 역시 나찌 정복의 시대에 가장 다양한 형태의 억압으로 박해를 받았다. 많은 목회자들 교인들이 반나찌 저항운동에 참여하였고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혔다. 저항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축출을 당하고 교회의 많은 젊은 교인들은 독일 제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폐교된 체코대학 가운데 개혁 신학부도 있었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젊은 신학도들을 위해 신학수업의 비밀 장기과정을 만들었다. 전쟁 직후에 학업을 끝마치고 교회 봉사를 위해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소위 “집사”들이 이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전쟁 후 나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 수데텐 독일인(약 350만 명)의 대부분이 독일로 추방되었다. 몇몇 개교회들뿐 아니라 전후 체코형제개혁교단이 수데텐 독일인들의 삶의 파괴 문제를 다루었다. 많은 체코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특별히 어린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옛 수데텐 독일인들이 살았던 비어있는 지역에 새로운 정책자들 실레시아(Slezsko),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에서 귀향한 체코 개혁교도들이 정착하였다. 이로 인해 체코형제개혁교단은 특별히 체코 서부지역에서 새롭게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교세가 270개 개교회 그리고 이지역에서 400개 기도처 그리고 약 350,000으로 늘어났다. 몇몇 국경지역 개교회에서 독일 예배가 진행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전쟁직후 독일인 약 160,00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많은 개혁교인들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회로 가입하였다. 예로 아쉐(Ase) 흐라니체(Hranice) 야히모바(Jachymova) 그리고 베이쁘르띠(Vejprty) 이다.

1945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주권이 형식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 하에서 갱신되었다. 서유럽 동맹국들의 배신적인 정책(뮌헨협정)에 대한 깊은 실망 이후 자유 공화국의 시민들은 소련연방의 승리에 점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46년 선거 후 가장 강력한 당이 된 새롭게 형성된 공산당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였다. 1948년 2월에 정부의 변혁이 준비되었고 점차적으로 공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따라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국가 감시 하에 들어갔으며 교인들은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새로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의 자유가 법에 의해 보장되었으며 교회 내부 활동은 허락되었으나 실제로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9년 국가에 의한 교회재정 보장에 대한 법이 발표되었다. 공산 정부는 교회의 물질적 보장과 모든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 이하여 재신이 “국유화”된 교회들은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정부의 통제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회월보의 문장까지 교회활동의 모든 것을 승인하는 “교회를 위한 정부부서(SUC)”가 만들어졌다. 소위 “영적활동에 대한 국가의 동의”는 개 교회 설교가들에 대한 규칙 뿐 아니라 초청받은 설교자에게도 필요하였다. 어떠한 교회의 활동을 위해 허락 받은 기부금은 대부분 필요한 교육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단지 감시자의 역할만을 하는 담당관리의 의사에 따라 사용되어졌다.

점증하는 정치적 전제주의의 강대국의 억압 하에서 날로 힘을 얻어가는 반 종교적 반 교회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힘든 투쟁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외적으로 존재하여 내적인 보전을 하는가 이다.

[개혁교회사]10.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 – 1948

10.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년 – 1948년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몇몇 중요한 요인들로 이미 이전에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관용의 시대(제9호 연재7번 참고) 1918년까지의 시대는 점차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와 얼마후 정통주의(신앙고백의 강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1918년 까지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를 한 비엔나 신학부는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이성주의는 후에 구(舊) 민족종교전통과 종교적인 감성에 대한 낭만적인 강조와 연결이 된다. 체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외국 종교개혁(독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문호가 개방될 무렵인 1860년대부터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에 루터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주의와 앵글로 색슨의 대각성 운동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몇 가지 갈래로 나뉘어진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이 강하였다. 신학의 자유주의는 신앙 고백적인 배타성을 약화시키고 교회의 실천적인 과제와 사명을 강조하여 결정적으로 1918년 두 교단이 연합하는데 기여하였다.

후스개혁신학부의 설립이후 바르트(K. Barth)와 부르너(E. Brunner)와 함께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야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리고 교회를 순례자의 교제로 깨달은 흐로마드까(J. L. Hromadka)의 영적인 지도아래 특별히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흐로마드까 교수는 라들( E. Radl ) 교수와 함께 교회밖의 일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별히 기독학생운동(아카데미 YMCA)의 젊은 세대들에게 “기독교 레뷰(krestanska revue)” 월간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학활동으로 흐로마드까는 세계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체코종교개혁의 유산을 정의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문화를 위해 체코종교주의의 기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종교, 철학과 문학간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현대사회의 교회와 교회일치의 과제에 따라 새로운 이해를 도우려고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5년 이후) 니뮐러(M. Niemoler)와 본 회퍼(D. Bonhoeffer)로 대표되는 나치정권에 대항하는 독일고백교회의 용감한 투쟁이 젊은 체코신학도들에게 오늘날까지 특별히 감명을 주었다. 후에 역시 해석학, 종말론, 그리고 대화에 대한 문제들과 씨름한 유명한 신학자들 불트만(R. Bultmann) 골빗쩌(H.Gollvizer) 틸리히 (P. Tillich) 몰트만 (J. Moltman)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영적인 삶 가운데 세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난다.

1. 성서 지향적인 흐름이다. 이 경험은 고전적인 체코개혁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지배적이다. 하나님 말씀의 개관성 강조이다; 신학방법은 과학적인 해석학의 작업과 관련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신학부와 합동으로 두개의 신하작업그룹에서 새로운 성서 콘코던스(원어 동의어와 함께) 그리고 새로운 성서번역을 하였다. 번역그룹 < 구약은 비츠 (M. Bic)의 지도아래 그리고 신약은 소우첵 (J, B. Soucek), 소우첵 교수가 죽은 후 뽀꼬르니 (P. Pokorny) 교수의 지도아래 > 이 에큐메니칼 기획을 하였다. 몇 년간의 작업을 걸쳐 1979년에 에큐메니칼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다.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은 2권으로 된 예배예전과 새 찬송가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2. 전도의 경향이다. 개인의 회심과 십자가 신학과 내적경건의 강조와 함께 국내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유교회(free church)”의 영적인 새로운 물결과 오순절 경향과 세상과 물질적인 소비사회에 증언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에 근접하였음이 틀림이 없다.

3. “새로운 진보적인 변화” 의 경향이다. 특별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복음전파의 새로운 방법을 열망하는 에큐메니칼과 사회의 질문에 의해 성경의 증언의 일반적 이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 경향의 한쪽 날개는 사회의 중심에 책임 있는 기독교의 참여로 막스주의자들과 개방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일정한 기간동안 사회 문제들의 이해에 대한 흐로마드까 교수의 논문발표이후 교회에 철학적으로 진보적인 에큐메니칼 서클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러나 모든 것을 지배 하 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의해 질식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즉 총회장과 평신도 대표(curator)들이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영적인 방향을 지도하여갔다. 힘들었던 시대에 그들은 신실한 목회와 국내외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교회의 상황을 신학화 하였다. 첫번째 총회장은 요셉 소우첵(Dr. Josef Soucek 1918-1938), 다음에 카밀 나기(Dr. Kamil Nagy 1939) 요셉 크제넥(Dr. Josef krenek 1939-1949), 빅토르 하옉(Dr. Viktor Hajek 1950-1968), 바츨라프 케이즈(Dr. Vaclav Kejr 1969-1977), 밀로슬라브 하옉(Dr. Miloslav Hajek 1977-1987), 요셉 흐로마드까(Dr. Josef Hromadka 1987-1990), 평신도 대표(꾸라또르 curator-영문) 페르디난드 카프카(Ferdinand Kafka – 1939), 안토닌 보하츠(Dr. Antonin Bohac – 1950), 구스타프 흐레이사(Dr. Gustav Hrejsa – 1959), 파벨 시멕(Dr. Pavel Simek – 1971), 프란디쉑 슈까르반(Dr. Frantisek Skarvan – 1979), 밀로쉬 레쉬까르(Dr. Milos Lesikar – 1991), 1991년 부터 지금까지 총회장으로 파벨 스메따나(Pavel Smetana)이며 평신도 대표인 꾸라또르로 즈데녝 수사(MuDr. Zdenek Susa)를 거쳐 현재 리디에 로스꼬브초바(RNDr. Lydie Roskovcova) 여사이다..

[개혁교회사]9.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설립과 활동

9.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설립과 활동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장로제도”를 선택하였다. 장로들과 목사를 제외한 모든 교회들의 대표들은 임기가 6년 이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최근까지 교회는 270명의 설교자들 중에 30-40여명의 여성들이 포함 되어있다. 모든 교회는 총회 법에 따르도록 되어있다. 행정상 13개 노회로 구분하고 한 개 노회는 약 20개 개교회로 구성된다. 노회는 목사 2인 평신도 2인으로 구성된 4인 노회회의(Senioratni Vybory, Seneorate Council)에 의해 운영 관리된다. 노회의 개 교회 대표들은 매 2년마다 노회 총회 회의로 소집되며 그리고 대표들은 매년 부서회의로 모인다.

교회의 최고 기관은 총회장과 총회 평신도대표(Synodni kurator, Synodal Curator)를 대표로 하는 3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로 구성된 “총회회의(Synodni rada, Synodal Council)이다. 총회 사무실과 150-200명의 목회자 평신도들이 자원해서 함께일하는 각 위원회와 부서들의 사무실이 프라하 Jungnannova 9번지, ”후스의 집(Husovy dum)에 있다. 교회의 회원은 특별히 개혁교도 가정의 후손들로 구성되어있으나 개 교회들은 자신의 교인들뿐아니라 자신들의 지역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개 교회의 핵심사역은 주일 예배와 성경 공부이다. 교리교육(어린이들을 위한 종교와 예배 교육, 주일학교, 세례교육, 청소년 활동과 다양한 성경공부 과정)을 강조한다. 그리고 목회와 “기독교 봉사”(노인, 독거노인들과 병자들을 위한 봉사사역)이 특별히 강조되며 이러한 사역은 헌신적인 장로들과 전문가 평신도들의 도움으로 진행된다. 몇몇 도심지역의 개 교회들은 여성들 30대 중년세대들 그리고 특별 봉사 활동을 위한 사역팀이 있다.

구(舊)형제단의 전통에 따라 교회의 교인들은 형제적인 교제와 협의된 개 교회의 생활의 질서와 법에 따른 기독교인의 삶을 지켜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의 교인들이 개 교회에서 책임과 사랑의 봉사를 배우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에 헌신하는 복종의 삶으로 세상에서 증언의 모범이 되는 것을 훈계한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삶과 사역에서 많은 연약함과 영적인 쇠약함이 있다. 현대의 소비 사회의 세속화 과정이 지속적으로 더 깊게 교회의 질서에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회밖의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복음을 전달하려는 살아있는 선교적 인식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인 접근을 위해 준비된 설교자와 가장 다양한 신학과 복음화와 다른 주제들의 과정과 특별히 “선교적 과제”라는 주제로 매년 열리는 역사적 문화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공개강좌와 연구모임의 평신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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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형제개혁교단은 출판활동이 있다. 매월 “체코형제(Cesky bratr)” 잡지가 발간된다. “최근 소식(Aktuality)”이란 제목 아래 총회의 새로운 소식을 싣고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월간 잡지로 “형제(Bratrstvo)”가 있는데 이것은 전제주의 시대때 발간이 금지 되었다가 1990년에 재발간 되기 시작하였다. 젊은 목사들에 의해 발간되는 부정기 간쟁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있다. 교회 출판사와 서점의 이름은 “깔리흐(KALICH)”이다. 종교서적, 일반서적을 제외하고 매년 특별히 “개혁교회 달력(Evangelicky kalendar)” 그리고 매일 가정 예배를 위한 책 “매일 생활을 위하여(Na kazdy den)”을 출판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는 개혁교단들의 연합지인 주간지 “콘스탄츠의 불꽃(Kostinecke jiskry)”가 있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자신의 교인들을 위한 교류와 휴식을 위해 몇몇 교육과정과 수련장을 가지고 있다: 보헤미아-모라비아 산간지방의 호떼보즈(Chotebor)에 그리고 끄르끄노쉐 산에 있는 헤를리꼬비쩨(Herlikovice)와 얀스께 라즈니(Jnaske Lazni)에 그리고 끄루슈네 산에 있는 야히모브(Jachymov)에 그리고 서부 모라비아의 라지(Lazy) 등에 있다. 교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영성수련과 성도의 교제를 깊게 하는 기회를 이곳에서 갖게 된다. 이 수련장에서 각양각색의 전체교회 교인을 위한 교육과 컨퍼런스가 열린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손님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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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활동들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든 개 교회들은 매년 교회의 자립을 위한 “희년의 관용의 기금(jubilejni tolerancni dar)”라는 특별 모금을 한다. 이 기금은 특별활동을 위한 개 교회의 지원금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