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김태연 두 교우들 한 가족이 된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001년 9월 9일 등록)
하나님을 보리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16일)
- 욥 19:1-29
- 설교자: 이종실
일시: 01년 09월 16일 (삼위일체후 열네번째 주일)
본문: 욥 19장 1-29절
제목: “하나님을 보리라”
<공동기도>
우리들의 희망이 되시는 주님,
세상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탄식하지 않게하옵소서.
오직 우리의 구원자 주님 한 분만을 바라는
희망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설교 본문>
“나
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설교 본문에서 21-26절만)
<설 교>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이곳에 와서 정착을 할 때 우리들에게 많았던 꿈들이 날이 갈수록 꿈의 성취라는 희망보다 점점 좌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시
간이 흐를수록 어려워 지는 경제여건, 점점 많아지는 학업의 제약들, 높아만 가는 물가, 외국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쇠약해져 가는
육신, 자주 찾아오는 크고 작은 질병들, 이룬 것 없이 성큼 흘러버린 세월들,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나오면 넓은 곳에 나와서 많은
경험들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삶 보다도 더 어둡고 좁고 편견된 삶, 왜소 해져가는 인격 그래서 안정을 찾아가기
보다 점점 불안해 지는 마음이 찬바람이 불자 왠지 더 쫓기는 느낌이 듭니다. 불안정하고 보장이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믿음 하나로 고통을 이긴 욥의 믿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을 보리라”로 정해보았습니다.
욥
은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욥처럼 애매하게 불행을 당한 사람은 성경에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욥을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억울하고 불행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단의 시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은 아들이 일곱, 딸이 셋
모두 10남매를 둔 다복한 가정에 양이 7천, 약대가 5천, 소가 1천 마리, 나귀가 5백 마리인 대 부호였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 스바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이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가고 천지지변으로 남은 가축과 자녀들이 몰살하는 사건들이 순식간에
숨돌릴 사이 없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욥은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욕창이 나서 가려움증을 견디지 못해 부서진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었습니다.
그 때 욥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들은 온 몸의 욕창으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버린 욥을 발견하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욥과 함께 땅에 앉아서” 욥의 고통을 말없이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욥1:12-13)
욥의 고통에 동참하는 세 친구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진솔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곱낮 일곱밤을 욥과 함께 땅에 앉았다는 것은 세 친구들이 욥과 함께 지낸 기간이 일주일이란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의 의미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재산과 아름다운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머리끝부터 발바닥 까지 질병을 얻자 형제들 친척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심지어 아내까지 멀어진
상황에서 그래도 그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친구들었습니다. 이처럼 세 친구들은 욥의 처지를 공감(共感)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친구라고 하면 인간적인 우정에 끌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아첨하는 그런 폐쇄된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패거리들이
나쁜 일을 도모하면 마피아라고 우리들은 부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런 패거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성품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욥의 친구들은 참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욥, 이세상에 죄 없이 망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직한 사람이 잘못된 것을 보았는가 그래 너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치더라도 너가 정말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게 죄를 짓는 거야. 너의 불행은 너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야.” 욥에 대한 친구들의 권면은 비난이 아니라 빨리 회개하고 다시 행복한 모습을 찾기를 원하여 친구를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을 향해 욥이 탄식을 했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19:22-24) 안타까운 탄식입니다. 서로의 신뢰가 깊으면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데 서로 신뢰하기에 더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인간 관계의 한계를 우리들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어떠한 고통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이 있어도 완벽한 이상적인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오늘 말씀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비신앙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꺼내려면 손가락을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처럼 죄와 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보편적인 죄와
벌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겪고 있는 죄와 고통간의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다고 욥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고 욥은 말합니다. 이 욥을 친구들은 설득을 합니다.
욥을 설득해 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 아니라 연약한 자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신뢰하는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교회의 정신이 무엇인지 가장 잘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 목사인 저와 같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오늘 우리는 욥과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마치 정신병자와 같았습니다.
갑자기 견디기 힘든 일들을 겪고 몸의 질병까지 얻고 보니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호
받아야 될 만큼 연약한 사람,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 형제 친척
심지어 아내에게 까지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 욥이 살아계신 구속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누가 훌륭한
의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한 선교단체가 주체가 되어 지역 주민들이 선교사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들이 지역 주민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그들과 똑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해 존중하고 있는 부분과 존중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입고 먹는 습관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 가장 본질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우쳐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시대의 확고한 믿음조차도 부인했던 사람, 몸의 질병과 가난으로
어떤 것을 내다보고 명령하는 능력이 없었던 욥 이지만 그는 구속자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구속자의 희망으로
교회를 생명력 있게 만듭니다. 이들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어 교회를 참 안식과 화해와 사랑의 교제의 장소로 만들어 갑니다.
욥
기 42장 7-9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들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여기서 우리는 욥의 모습을 조금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돌아 보지 않는다는 고통 속에 빠진 시편의 저자 처럼 욥은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응답이 늦어지면 믿음과 확신도 흔들립니다. 고통에 지친 욥은 그래도
끝까지 기도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죽어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고
통을 끝내기 위해 차라리 욥에게는 죽음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나 욥은 죽음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 긍휼과 이해와 도움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씩 그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오직 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의 구원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절규하지 않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떠나가고 욥 홀로 남아도 그 구원자가 그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고
통 속에서 오직 구원자를 희망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님도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면서도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를 버리지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으로 욥도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회복되는 희망을 버리지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그의 도움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의 하나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강하게 믿으며
마지막 때 그를 볼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불행을 쫓고 행복을 가져오실 오직 한분 신실한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기도는 욥의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이해와
깨달음을 위한 씨름이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싸웁니다. 그를 고통 속에 던진 이유에 대한 욥의 질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혜는 제한되어있고 우리들의 깨달음은 단지 부분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들이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들 스스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들에게 진리와 지혜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욥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
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마다 하나님을 보겠다는 욥의 이 희망을 기억하십시다. 고통 속으로, 질병 가운데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내몰고 있다고 느낄 때 바로 여러분들을 참 안식과 화해와 섬김의 교회로 이루고자 중보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
순간 까지 욥처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후 기도>
하
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가 욥처럼 불안하고 안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을
보리라는 욥의 희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위탁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Open House
프로젝트 Otevreny dum (Open House, 열린 집)
1. “열린 집” 프로젝트란?
<프로젝트의 개념과 목적>
체코형제개혁교단(CCE)과 대한 예수교 장로회(PCK)간의 연합 프로젝트로서 구체적으로 쁠젠의 CCE 의 “꼬란두프 교회”에서 시행된다. 이 프로젝트는 교회가 단지 어떤 필요를 도와주는 차원에 만족하지 않고 교회주변의 매우 다른 사람들과 단체들에 대해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이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들 역시 사회에 열린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 선교이다.
체코교회는 무신론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을 한국교회와 나누며, 한국교회 역시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양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다.
이 프로젝트는 체코교회의 미래를 위한 모델과 동시에 교회의 경험과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공유하며 하나님의 선교를 이룩하는 선교 모델을 모색하는 실험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의 신학적인 토대>
….2001년 1월말 꼬란두프 교회 공동의회에 제출한 내용이다. ….
프로젝트 “열린 집”은 특별히 기독교의 증언 가운데 하나인 “섬김”을 표현하길 원한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 교회 안의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중간장소”가 되길 원한다. 특별히 가난한 계층(소비 또는 문화 생활 등의 다른 삶의 출구가 없는 이들)들에게 교회가 삶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역은 교회가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게토화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말로 “선교적인 목회” 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선교적인 목회“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해 넘쳐나는 정보를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교회로부터 어떤 기본적인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교회는 그들을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다. 교회가 무관심속에 버려두었던 사람들을 만나 “복음(기쁜소식)”을 나누는 희망은 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지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세상에 육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야 한다. 선교적인 목회의 중요한 모습은 강의나 설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 형식 없는 만남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은 이러한 만남의 모든 기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가 없다. “증언자”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교회당과 기도실의 지붕아래 증언자의 보물을 감추지 않아야한다. 욕심 없는 섬김으로 사람들과 즐거운 만남을 이루어야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열린 집”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인포메이션의 차원을 갖는다.
2. 프로젝트 논의 과정
1999년 6월 노아 방주 프로젝트로 논의 – 당시 상담실을 사회선교 프로그램으로 개편
1999 년 9월 전국연합 여전도회 총회에서 프로젝트비 지원키로
1999년 11월 프로젝트의 개념 변화 – “열린 집”으로 프로젝트명 변경
2000년 02월 27일 양교단(CCE, PCK) 대표들의 방문과 예배
2001년 01월 쁠젠 꼬란두브 교회가 프로젝트를 위해 Prokopova 17번 건물제공
3. 지난 1년간 프로젝트 경과 보고
1) 상담실 운영자의 활동이 상담에서 끝나지 않고 치유의 과정으로 목회자와의 연계
2) 상담사례별로 예방차원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강좌 개최
3) 목회자 및 사역자들의 독일과 네덜란드 교회의 사회봉사 프로그램 견학
4) 상담자중 무숙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할 공간확보와 수리
5) 교회의 활동을 대 사회를 향한 열린 프로그램으로의 모색
4. 현재 요청되는 상황
1) 실무간사 채용
가. 지난 1년간 프로젝트의 개념을 구체화 시켜가는 과정으로 꼬르빠 목사와
이종실 목사가 일을 주도하였다.
나. 이제 프로젝트를 확산시켜가는 단계로 풀 타임 직원(가칭 실무간사)이 필요.
다. 실무간사의 일
가) 프로젝트 홍보 – 팜플렛, 홈페이지, 잡지 발간
나)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위한 네트웍 구축 – 방송, 잡지, 신문
인터뷰 및 광고, 사회봉사단체들과의 협력체계 구성
다) 프로젝트 기획 운영 관리 – 노인클럽(매주 월), 청소년 예배(월 1회),
어린이 영어교실(기회중),
라) “열린 집” 공간 개보수와 관리 – 자원봉사자, 기금마련…..
마) 건물 보수후 목회 인포메이션을 위한 시설(찻집, 도서실, 어린이 놀이터) 관리
라. 사례비 책정금 월 10,000꼬룬(실 수령금 7 000꼬룬)
마. 까렐 쉬므르 (남)
1975년 9월 30일 생, 김나지움 졸업후 개혁교회 아카데미 사회복지과 졸, 호스피체 또는 사회보호시설에서 활동을 하면서 long term 과정 찰스대학 개혁신학부에서 공부 현재 4학년이며 신학부 재학중 1년간 찰스대학 의학부에서 1년간 심리치료법 수학.
2) 긴급히 필요한 사무용품 – 컴퓨터와 프린터
4. 프로젝트 맡은이들
이 종실 목사, 루덱 꼬르빠 목사, 까렐 쉬므르 전도사
작성일 2001/2/24
* 이 프로그램은 현재 꾸란두브 교회의 내부사정으로 의견 조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디아코니아 자동차 구입
자동차 구입 재정 보고
우리 디아코니아의 지역인 프라하 북부지역에서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자동차가 꼭 필요합니다. 매일 점심을 배달하고 병원에서 진찰이 필요한 환자들 수송, 장애인을 도울 때 그리고 그 환자들이 콘서트나 전시회를 가고 싶을때, 또는 그들의 힘으로 도저히 갈 수 없는 경우와 그 외 여러가지 봉사를 위해 자동차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금년 5월 말까지 사용했던 자동차는 1995년 중고시장에서 구입한것입니다. 이 차는 처음부터 잔고장이 많았습니다. 새 자동차 구입을 위한 재정 문제의 해결의 발판은 \"디보께 후시\"였습니다. 디보께 후시가 인터넷 사이트에 우리 활동을 위한 헌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금운동만으로는 차를 살만큼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Kvetnovy den 과는 경쟁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선 공연을 구상하게 되었으나 댜브릴쩨 에는 자선 공연을 위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고 그 당시 우리 교회당은 저희에겐 그다지 큰 장소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공연 장소의 렌트비용 문제 때문에 자선공연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였지만 고맙게도 살바또르 교회는 우리에게 자선 공연을 위한 장소를 렌트비없이 빌려주었습니다.
장소는 해결되었으나 출연자 섭외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아는 사람 중에 출연자들을 섭외하였습니다. 특히 제가 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도록 힘을 얻은 것은 음악가 야나 브라호바와 마이클 에릭슨 두분이셨습니다. 제가 이분들과 전화를 했을때 이 분들은 한마디 거절없이 제청을 들어 주셨고 출연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청장 인쇄 및 발송 그리고 전화비 외에 별로 들어가는 경비없이 자선 공연을 열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큰 도움과 희망을 우리 교회와 이지 슈토렉 목사님과 디보께 후시 재단에서 얻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했던 것은 자동차 판매회사 츄미에베스 사장님 보우라씨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분은 16만 꼬룬이 모이면 편한 차를 책임 지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모금은 우리 기대를 넘어섰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큰 도움은 우리교회의 한국분들이십니다. 이종실 목사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셨을 뿐아니라, 여러 한인교우들과 함께 콘서트에도 참여하셨고 게다가 스톡홀룸의 한국 형제들에게 부탁을 하여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국제적인 도움으로 우리는 새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의 은색 빛 펠리치아 콤비는 파란색 디아코니아 로고가 있고 그리고 어떻게 이 자동차를 구입했는지에 관해 간단한 문구를 새겼습니다.
\" 이 자동차는 디아코니아 친구들의 헌금으로 구입되었습니다. \"
보고자: 리디에 베셀라
(우리 교회 소식지 Terasa 22호에 게제된 내용임)
뽈리츄스끼 노회 목회자 컨퍼런스
뽈리츄스끼 노회 목회자 컨퍼런스
프라하에서 약 180키로미터 떨어진 쁘로세츠 교회에서 9월 10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뽈리츄스끼 노회 목회자 컨퍼런스가 열렸다. 슈토렉 목사와 함께 오전 6시 45분에 출발했지만 많은 비 때문에 15분 늦게 도착하였다.
뽈리츄스끼 노회는 10개의 지교회 그리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실제 활동 교인 수는 약 500여명에 불과한 체코형제개혁교단의 두 번째로 작은 노회이다. (교회 수로는 제일 작은 노회이다.) 노회 지역은 스비따비 지역 일부, 빠루도비쩨 지역 일부, 흐린스꼬 이므라모브 끄로우나 끄루쩸부륵 뽈리츠까 뗄레찌 등의 모라바 지역으로 넓이는 1,010 평방 키로미터이다.
이미 교회를 방문했거나 아니면 총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찬송을 한장 부르고 바로 설교를 하였다.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나오는 중풍병자 이야기를 가지고 교회의 본질에 대해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는 몇 주전에 한인교회에서 한 것을 교회론적인 관점을 더 집중하고 그리고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해 덧붙였다. 설교가 끝난 후 설교의 내용을 가지고 토론을 하였다.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모두들 한바탕 웃고 지나간 두 가지를 소개하면 하나는 왜 중풍병자를 포함한 다섯 사람의 믿음을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한 참석자는 이미 중풍병자와 일체가 된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믿음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반문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네 사람이 지붕에 구멍을 낸 행위는 교회당 파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않겠는가? 질문 하였다. 교인이 얼마 되지 않는 체코의 교회들이 문화 유산인 교회당을 보수 유지하는데 많은 시간과 재정을 허비하느라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느니 차라리 교회당을 처분하고 교회다운 일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올바른 일이 아닌가? 라는 뜻의 질문이었다.
설교에 대한 토론이 끝나자 슈토렉 목사와 본인이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 교회에 대해 각각 간단히 발제를 하였다. 슈토렉 목사는 체코-한국 교인들의 공동체 생활의 동기와 그동안의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본인은 체코의 한인 현황과 한인 공동체의 구성원의 다양한 신앙적인 배경과 한국 기독교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들에 대해 발제를 하였다.
발제 후 질문 내용들을 크게 분류하면 에큐메니칼 예배 예전에 관해서, 체코-한국 교인들의 하나의 교회의 행정에 대해서, 에큐메니칼 예배의 설교 내용과 준비에 대해서, 체코-한국 교인들의 교제에 대해서, 프라하의 다른 교회들의 반응에 대해서 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코-한국 교회의 교류에 대한 프로그램의 가능성에 대해 한국교회(교단)과 체코형제 개혁 교단의 노회와 노회의 교류의 가능성,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의 가족들과 뽈리츄스끼 노회의 교회들의 가족들과 상호 교류프로그램, 어린이 교류 프로그램의 가능성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추후 이 논의를 협력선교의 틀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도록 더 구체화 하기로 하였다.
10월 12-14일 호뗴보즈에서 열리는 뽈리츄스끼 노회 가족들 모임에 한인교우의 가족의 참석을 요청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