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House(열린 집)” 프로젝트란?

“Open House(열린 집)” 프로젝트란?

<프로젝트의 개념과 목적>

체코형제개혁교단(ČCE)과 대한 예수교 장로회(PCK)간의 연합 프로젝트로서 구체적으로 쁠젠의 ČCE 의 “꼬란두프 교회”에서 시행된다. 이 프로젝트는 교회가 단지 어떤 필요를 도와주는 차원에 만족하지 않고 교회주변의 매우 다른 사람들과 단체들에 대해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이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들 역시 사회에 열린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 선교이다.

체코교회는 무신론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을 한국교회와 나누며, 한국교회 역시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양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다.

이 프로젝트는 체코교회의 미래를 위한 모델과 동시에 교회의 경험과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공유하며 하나님의 선교를 이룩하는 선교 모델을 모색하는 실험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의 선교신학>

*2001년 1월말 꼬란두프 교회 공동의회에 제출한 내용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은 특별히 기독교의 증언 가운데 하나인 “섬김”을 표현하길 원한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 교회 안의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중간장소”가 되길 원한다. 특별히 가난한 계층(소비 또는 문화 생활 등의 다른 삶의 출구가 없는 이들)들에게 교회가 삶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역은 교회가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게토화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말로 “선교적인 목회” 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선교적인 목회“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해 넘쳐나는 정보를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교회로부터 어떤 기본적인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교회는 그들을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다. 교회가 무관심속에 버려두었던 사람들을 만나 “복음(기쁜소식)”을 나누는 희망은 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지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세상에 육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야 한다. 선교적인 목회의 중요한 모습은 강의나 설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 형식 없는 만남이다. 프로젝트 “열린 집”은 이러한 만남의 모든 기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변호할 필요가 없다. “증언자”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교회당과 기도실의 지붕아래 증언자의 보물을 감추지 않아야한다. 욕심 없는 섬김으로 사람들과 즐거운 만남을 이루어야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열린 집”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인포메이션의 차원을 갖는다.

렌까 페이네오바의 호스피체 사역

(렌까 페이네오바의 호스피체 사역)

지역사회안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꼬빌리시 교회의 슈토렉 목사가 교회의 같은 지역사회에 있는 대단지의 보흐니체 정신병원에서 89년 이후 10여년간 병원 종사자들에게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음을 깨우쳐 줌으로서 병원당국과 깊은 신뢰를 쌓게되었다.

종교에 대한 체코의 정부기관과 사회단체들의 분위기가 그렇듯이 이 병원역시 매우 배타적이고 환자들에게 종교적인 영향을 주는것에 호의적이지 못한 분위기이다.

이곳에 현재 꼬빌리시 교회는 성(性) 심리 치료병동과 호스피체 두곳에 두 사역자를 파송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재정과 기도를 우리 한인공동체가 지원을 하고 있으며 복음을 이 조그마한 사회공간에 확장하는데 우리 한국 교인들은 자신들의 선교 경험을 동원하고 있다.

호스피체에서 일하고 있는 렌까 페이네오바 가 그동안의 사역을 통해 느낀점을 자신의 교회인 비노흐라디 교회에 기고한것을 이번 테라사에 옮겨놓았다. 호스피체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 죽음을 잘 맞아들이도록 영적인 도움을 주는 일이다. 그녀의 글에 따르면 호스피체 환자들을 위한 전담 목회자를 파송하여 자기 교인 뿐아니라 모든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일하는 이런 사역은 아직 체코교회안에서 일반적이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사역이 죽음을 늘 바라보는 슬픈일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수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비록 생명과 가능성과 능력과 삶의 책임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 미래를 상실하는 슬픔이 늘 있지만은 죽음과 슬픔이 자신의 활동의 중심 주제가 아니라 만족한 하루 그리고 충족한 삶이 자신의 사역에서 중심되는 활동의 주제가 된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이런 삶의 충족감을 맛본 환자들 가운데 한사람이 한말은 \"여러분들이 겪을 수 있고 이미 겪었던 모든것은 여러분을 놀라게 할 지못합니다.\" 다음으로 만나는 자신의 활동의 주제는 아이러니 하게도 \"자유\"이다. 환자는 고통스러운 상실(건강, 가족, 재산, 가능성)로 모든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일때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우리들 주위의 있는 모든 문들을 닫으시나 우리들 위의 문들은 닫지않으신다. 죽는다는것은 사라지는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을 떠나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것이다.\"(리하르드 부름브란드, 승리의 믿음)

렌까 페이네오바는 자신의 사역이 오히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가 고백한다. 자신들의 삶이 끝나는것이 아니며, 그들 머리위에 있는 마지막 문이 열려있다는것을 그리고 그 문이 존재한다는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갖게하는 만남의 가능성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환자들과의 상담이 종교적인 힘을 과시하는 남용이나 강요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죽어가는 이들을 섬김을 위해 기독교의 희망은 잘 전달되어져야 한다.\" 고 결론으로 끝을 맺은 자신의 글에서 렌까 페이네오바의 부드럽고 푸근하며 흡인력이 있어보이는 그의 외모가 드러나고 있는것 같다. 그녀는 오래전에 까렐 대학 개혁신학부를 졸업하고 두자녀의 어머니며 부군은 의사이다. 현재 비노흐라디 교회의 교인이다.

보흐니체 정신병원을 방문하고

<보흐니체 정신병원을 방문하고>

나는 체코 꼬빌리시 교회에서 선교하고 있는 보흐니체 정신병원을 슈토렉 목사님의 안내로 방문하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가 있는데 거기에 참석하는 환자들에게 한국인들이 한국차를 대접하는 작은 봉사때문이다. 그곳은 합스부르크 왕가때 지어진 건물로 병원이라 하기 보다는 커다란 하나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고 보통사람이 사는 마을과 마찬가지로 학교 , 수퍼마켓 등 또 교도소 까지 있어 외관상 전혀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처음 프라하에 왔을때 교우들이 살고 있던 마을 옆이었지만 그때는 무심히 스쳐 지나갔었다.

나는 처음에 정신병원이라 하면 뭔가 스잔하고 음침하고 별로 기분좋은 느낌이 들지않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곳을 방문하였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나의 작은 성의가 그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것은 아닐지라도 소외된 그들에게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걸 느끼게 한다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처음 갈릴리의 낮고 천한자들을 찾아가 그의 사랑을 베푸셨던것 처럼 우리의 작은 봉사를 통해 그들이 예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잎이 져버린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길들이 잘 정돈 되어있었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날엔 참 예쁘겠구나\" 하는 생각과 \"아마 예배는 병원 한칸 빌려서 보겠지\" 라는 생각을 하는 중 차는 큰교회 앞에 멈췄다. \"아니 이곳에 이렇게 큰 교회가 있다니\" 나는 내심 놀랬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병원의 모습이라면 창살속에 갇혀 햇살을 향해 창문너머 세상을 그리워 하며 새장속에 사는 췌췌한 환자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곳은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응 훈련을 시키면서 치료를 한다는 것이다. 500명 정도의 환자와 800명 정도의 의사 간호사를 포함한 병원 종사자들이 있다고 한다. 한 남자 신학생의 봉사로 교회는 깔끔하게 정돈되여 있었다. 예배시간에 10여명의 환자들이 참석하였고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은 아무 관심이 없는양 무뚝뚝하기만 했다. 종소리와 함께 슈토렉 목사님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배순서에 따라 우리는 한국차(둥글레차)를 대접했다.

교회가 춥고 썰렁해서 따끈한 차한잔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나는 과연 이들이 이 차를 아무 의심없이 거부반응없이 마실까? 차가 뜨거운데 잘못하여 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한마디 아는 체코말로 \"도브리덴\"하고 인사를 하며 웃었고 옆 교우는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말과 더불어 차를 대접했다.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느끼면서 나는 그들을 향해 다시한번 \"도브리덴\"하며 웃었다. 한번도 따뜻한 눈길한번 받아 본적이 없는 양 경직 되어 있던 그들의 눈빛은 금방 부드러워졌고 \"데구이\"하며 고맙다는 말로 답을 해주기도 하고 \"이 차 돈주고 사먹느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배는 내가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잘드려졌고 어떤 휠체어에 탔던 할머니는 눈물이 글썽거리기도 하였다. 내마음은 봄눈처럼 녹아졌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 보았다. 예배가 끝난후 처음 딱딱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웃으면서 잘마셨다는 인사와 함께 어떤 할머니는 우리에게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습니다.\"라는 작은 종이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이 작은 만남은 결국 환자들과 우리들 사이에 문화와 건강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예수의 사랑을 맛보는 기쁨의 순간이라고 나는 고백할 수 있다. 교회를 나오면서 휑하게 비여있는 많은 자리가 가득차길 바라며 오늘 만난 환자들이 우리의 작은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맛보며 새로운 삶을 빨리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를 하였다.

정남례

사회주의 이후 체코의 교회재산반환 논쟁

사회주의 이후 체코의 교회재산반환 논쟁
    – 1999년 1월 2일 교회법 개정을 위한 전문위원회의 출범 을 보면서

최근 체코에서 공산주의 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재산의 반환과 교회의 재산과 활동을 제약하기위해 제정된 공산정부의 교회법에 대한 개정 논쟁이 사회의 주목을 받고있다.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혁명이후 계속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만 불러 일으켰던 이 문제들이 지금까지 해결을 보지 못하고 결국 금년 1월 부터 교회재산반환문제의 완전한 해결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교회법의 개정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위원회가 정부와 교회대표로 구성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2차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몇차례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재산 몰수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48년 2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공산정부가 이듬해 교회법을 확정하여 교회는 재산을 가질수 없고, 정부의 허락 아래서 교회활동이 가능한 교회법을 확정하였다.  이 법이 거의 변화없이 내려오다가 1990년에 법에 의해 인정되는 교회에 대해 국가의 재정지원을 존속하고 교회의 활동의 자유를 허락하는 교회법의 부분 손질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교회재산반환은 당시 슬로바키아 의회의 반대로 무산된 1992년 이후 지금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못하고 있다.

교회재산반환의 문제에 대해 시민민주당, 기독교민주당, 시민민주연맹당은 기본적으로 교회재산반환에 긍정적인 반면 사회민주당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교회법에 대해서는 교회와 종교활동을 국가로 부터 분리 시키는것과 교회의 공공활동 즉 의료보험, 사회활동의 재정에 대한 국가의 지원에는 각 정당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나 성직자의 봉급을 포함한 교회 운영재정의 지원에 대해서는 입장의 차이를 나타내고있다.

법적책임 소재가 분명한 교회재산은 이미 반환되었으나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요셉2세가 1782년에 설립한 “종교재단(Náboženská matice)” 에 속한 교회재산이 법적소유의 문제로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교회재산은 1949년 공산정부에 의한 교회법이 제정될때까지 이 재단에 속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법적으로 국가에 속한것도 아니고 교회의 소유도 아니라는 점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톨릭교회는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교회에 인정한다면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보호하는면에서 그리고 법적인 면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재산반환의 한두가지 스캔들을 사회문제로 여론화하고 이미 반환된 재산의 대부분이 사회에 유익하게 사용되는 예들을 알리지 않는 언론의 자세가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사회분위기를 형성시켜 교회와 국가간의 정당한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반면 소유재산도 그리고 돌려받을 재산도 카톨릭에 비해 적을 뿐아니라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지속적으로 절실히 필요할만큼 빈곤한 개신교회는 카톨릭교회의 직접적인 재산문제의 거론이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킬뿐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않으므로 교회법개정을 통한 자연스러운 해결을 주장함으로써 카톨릭 교회와 미묘한 시각차이를 드러내고있다.

앞으로 “전문위원회”가 교회와 국가 관계의 어떤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국가와 교회 그리고 교회들 사이의 대화에서 정부는 교회에 대해 보호자적인 입장에서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교회역시 교회는 국가위에 있다고 주장은 하지만 국가로 부터 독립 되는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치가들과 교회지도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여전히 과거 이데올로기 구조속에서 이해를 하며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되었다.
교회가 국가로 부터 완전 독립되지 못할때, 1989년 이후 일어난 새로운 신앙공동체는 여전히 교회법이 인정하지 않는 단체로서 법적으로 교회가 아닌 편법으로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실제적으로 활동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을것이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분열과 약화를 초래하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의 질문” 대신 “종교의 자유에 대한 질문”이 체코교회안에서 제기될 우려가 있다.

체코개혁교회와 예배의식

체코개혁교회와 예배의식(1998년 9월)
    – 동유럽 단기선교 연수를 마치고 방문한 학생들과 만난 후

한번은 모선교단체의 젊은이들이 방학동안에 단기선교연수로 동유럽 여러나라에 흩어졌다가 체코에서 모여 세미나와 평가회를 갖고 나를 찾아온적이있다.  나는 그들이 동유럽 교회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 궁금해서 먼저 짧은 기간이지만 보고 느꼈을 젊은이들의 경험을 경청하였다.  대체로 공통되는 의견은 체코교회는 예배가 은혜스럽지 못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할것 같다는것이다.

예배가 교회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과 전혀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교회에 까지 고민없이 자신의 사고로 잣대를 대는것은 우리 목회자들의 생각을 반영하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교회성장을 위해 최근 교회들이 예배의식에서 부터 예배당 시설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나 정보로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여러매체를 통해 이 외국에서 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변화가 목적을 갖든지 아니든지, 또는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변화는 늘 있어왔다.  중요한것은 전통의 계승과 창조의 조화가 있는 변화를 올바른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계승할 내용에 관해서 숙고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점이다.  그래야 창조와 적용이 올바른 방향을 가질 수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염두에 두고 그동안 체코개혁교단의 동역 목회자로 일하면서 느낀 체코개혁교회와 예배의식에 대한 소감을 피력하고자 한다.  체코개혁교회의 예배의식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자신의 교회의 역사적 의미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15,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을 단지 카톨릭과 개혁파들의 종교분쟁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다시말해서 당시 종교개혁은 곧 사회개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그리고 이해되도록 체코어로 선포할것과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양종의 성찬을 나눌것, 사제나 감독은 세상의 권력을 포기할것, 그리고 성직자도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을것 등을 주장한 체코종교개혁은 당시 전 유럽의 교회와 국가 권력으로 부터 반대를 받았을 만큼 중세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개혁의 역사적 경험들이 검소하며 절제되어있고 말씀을 강조는 현재 체코교회의 예배의식과  당시 반개혁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대신 사용되는 성경책과 성찬잔의 교회의 상징물과 설교단을 정면 한 중앙에 배열하는 예배당 시설등에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예배순서에서 예배의 부름, 파송의 말씀, 그리고 축도는 목회자의 미사여구 없이 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해서 선포한다.  이때 성도들은  모두 일어서서 그 말씀을 경청한다.  성경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축도를 할때마다 “찌어다”와 “축원하옵나이다”의 논쟁이 있었던 우리교회가 생각난다.  설교단의 배치는 체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후스가 설교했던 베들레헴 채플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베들레헴 채플은 카톨릭 예배당으로 오직 말씀만 선포되었던 곳이다.  이 예배당은 다른 카톨릭 교회건축양식과 다를 뿐아니라 제단을 놓을 자리에 설교단이 차지하고 있다.  이 채플을 체코개혁교회가 예배당의 전형으로 삼고 있다.  예배당 양식까지도 말씀을 강조한 자신의 교회역사와 접목되어있음을 엿볼수있다.

성찬예식은 특별한 절기를 제외하고 한달에 한번있다.  체코교회에서 재미있게 느낀것은 예배의 모든예식은 안수받지 않은 목회자(신학생, 전도사), 장로 누구나 집례가 가능하다.  설교도하고 축도도 한다.  그러나 성찬예식 만큼은 반드시 안수받은 목사가 집례하게 되어있다.  1415년 후스의 화형의 불씨는 체코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켰고, 1781년에 비로소 그들은 자신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카톨릭의 박해 아래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 호밀빵을 나누며 서로 격려와 기도로 믿음을 키워온 체코개혁교회 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어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서 카톨릭에서 사용되는 웨이퍼(얇게구운하얀색의 과자)대신 고난과 죽음속에서 믿음과 사랑을 키워온 자신들의 양식, 거칠고 거무스름한 호밀빵을 들고 참례했던 그들의 첫번째 성찬예식을 나는 성찬을 집례하거나 참례할때마다 상상해보려고 노력한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고 죽기까지 지키기”(후스의 어록에서) 위해 자신의 조상들의 고난과 피흘린 역사가 담겨있는 호밀빵앞에서 화체냐, 영적임재냐, 기념이냐 라는 신학논쟁은 한뼘의 마음장난에 불과하게 느껴진다.

나는 우리한국교회가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전혀달리하는 체코개혁교회의 예배의식을 그대로 모방해야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역시 칼빈의 종교개혁이 전통에 서있는 장로교회로
서 죽기까지 진리를 지켜온 역사적 경험과 예배의식이 상호작용되어 오늘도 개혁교회로서 전통을 잇고있는 체코교회를 보면서 우리가 계승할 내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